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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나의 월남전 전우 張世東 대위

부상당하고 후송되면서도 “김 소위, 중대를 부탁해!”

글 : 김광휘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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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동, “9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있다가 자원해서 왔소. 군인은 싸움을 해봐야 되잖아”
⊙ 장세동의 제1연대 제1대대 제3중대, 한국군 최초로 베트콩 지역에 투입… 첫 전투에서 베트콩 2명 사살
⊙ 美 101공수사단으로부터 고보이 전략촌 인계받은 후 伐木刀로 마을 주변 숲 제거 후 진지 구축…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극찬
작전 직전의 가을. 퀴논 근처의 전략지 꾸몽 고개에서 장세동 대위(왼쪽)와 함께.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타계(他界) 소식을 알리는 TV 뉴스를 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장세동(張世東)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다. 그는 내게 월남전에서 함께 싸웠던 ‘장세동 대위’이고 전우(戰友)였다. 뉴스를 보면서 나는 56년 전 기억들을 떠올렸다.
 
  나이 80을 넘기고 젊은 날을 되돌아보니 나한테도 정말 그런 세월이 있었던가 싶다. 군대는 다녀와야겠는데 사병으로 갔다가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2년이 넘도록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봉급이 나오는 장교 생활을 하기로 했다. 3학년 때 ROTC 제도가 생겨 두말없이 지망했고, 졸업과 동시에 임관하여 포병 소위가 되었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수도사단 포병60대대, 미군들이 쓰다 주고 간 105mm 야전포(野戰砲)를 운영하는 포병부대에 관측장교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그 부대가 얼마 후에 베트남에 간다고 들썩거렸다. 장교들은 심야에 대대장이 한 사람씩 불러 “베트남에 갈 거냐? 말 거냐?”를 아주 간단하게 물었다. 가지 않겠다고 하면 다음 날 다른 부대로 발령을 내주었다. 나는 가겠다고 했다. 첫째, 나는 해외여행을 해본 일이 없었다. 베트남이라고 하는 남방(南方)국가에 가서 일단 이국(異國)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었다. 둘째, 나는 엉뚱하게도 스페인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헤밍웨이를 흠모했다. 바로 그를 흉내 내고 싶었다. 홀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울며 말렸지만 나는 훌훌 털고 떠났다.
 
 
  미군 불도저들, 밤새도록 시체 치워
 
  1965년 10월 3일 일요일 9시20분 부산 제3부두. 나를 태운 ‘제너럴 가이거’라고 하는 미국 퇴역 전함에는 제1진으로 출발하는 청룡부대원들과 500명가량의 육군 맹호부대 선발대원들이 타고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일기를 썼기 때문에 지금도 기록이 남아 있다. 정말 생전 처음 타보는 배였으며, 바다여행이었다. 부산 시내에서 동원되었음직한 여학생들이 손수건을 흔들어주었고, 군악대가 힘차게 해병대 노래와 맹호부대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함께 배에 타고 있던 해병들의 군가(軍歌)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에 편지를 띄우고,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에 춤을 춥시다~ 처녀 열아홉 살 아름다운 꿈속에 아이 러브 유~ 라이라이라이라이 차차차…!”
 
  배는 대만해협 쪽으로 항진(航進)했다. 해병들은 배 위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군가를 불러댔다. 5박 6일의 항해 끝에 배는 베트남 중부 항구도시 ‘꾸이년’에 도착했다. 미군들은 그 도시를 그냥 ‘퀴논’이라고 불렀다. 내가 받은 5만분의 1 군용지도에는 ‘QUI NHON’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도시 이름은 중국 고전 《맹자》에 나오는 ‘귀인(歸仁)’에서 따온 것이었다. ‘어짊 속으로 돌아간다’라는 깊은 뜻을 가진 유서 깊은 고도(古都)였다.
 

  그 항구도시에 한국 최초의 육군 전투부대 맹호부대가 상륙했고 그 도시의 북서쪽에 사령부를 차리게 되었다. 우리 선발대가 도착했을 때, 현지 일대는 얕은 능선이 구릉을 이루고 있는 밋밋한 능선지대로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야였다. 그곳은 베트콩과 미군 101공수사단이 피나는 전투를 벌여 쌍방이 200여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곳이기도 해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우리가 모래밭에 참호를 파고 첫날밤을 지낼 때, 미군 불도저들은 밤새도록 시체들을 치우고 있었다.
 
  10월 27일에 맹호부대 본진(本陣)이 퀴논항에 도착했다. 나는 항구로 달려 나가 상륙주정(LST)을 타고 사단 깃발, 연대 깃발을 앞세우며 상륙하는 부대원들을 맞았다. 언덕 위에서는 미군 군악대가 신나는 ‘콰이강 마치’를 연주하였다.
 
  며칠 뒤, 포병 사령부에서 나에게 보병부대로 전보(轉補)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가야 할 곳은 맹호부대 제1연대 제1대대 소속 제3중대였다. 그때는 부대라고 해야 벌판에 천막을 치고 단위별로 듬성듬성 모여 있었고 현지 지리에 어두운 한국군을 위해 미군 101공수사단 병력이 외곽을 지켜주고 있었다. 채명신(蔡命新) 사령관도 철모에 별 두 개를 붙인 채 동분서주하고 있었다(그때 채명신 사령관은 소장이었는데 얼마 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때는 모두가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벌판에서 미군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까먹으며 각자가 알아서 자기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식이었다. 가끔 별 네 개를 단 키 크고 잘생긴 미국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요란한 헬기 소리와 함께 현장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채명신 사령관이 달려가 맞았다. 두 사람은 벌판의 그늘에 앉아 지도를 펴놓고 한국군과 미군의 작전지역을 협의했다.
 
 
  장세동 대위와의 첫 만남
 
작전을 떠나는 3중대 모습.
  나는 어렵게 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3중대를 찾아갔다. 부산 출신의 키 작은 관측하사 천 하사와 유선병 이 일병이 짐을 들고 따라오고, 전라도 출신의 관측병 박 일병이 앞장을 섰다. 가까스로 중대를 찾아가자 키가 나와 엇비슷하고 다부지게 생긴 대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었다.
 
  “F.O요? 김 소위요?”
 
  포병 관측장교를 군대용어로 F.O라고 부른다. 전방 관측장교라는 영어의 약자다. 나는 예의를 갖춰 거수경례를 하며 인사했다.
 
  “네, 관측장교로 발령받은 김광휘 소위입니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잘해봅시다. 우리 보병은 포병이 잘 때려줘야 살 수 있어요. 김 소위, 영어 좀 한다면서? 우선 미군 포병과 항공병하고도 말이 돼야 합니다. 밤에 조명등과 에어스트라이크(공습)를 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그는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난 육사 6기 장세동 대위요.”
 
  그때는 요즘처럼 16기라고 하지 않고, 정규 육사 출신들을 그냥 6기라고 하였다. 그러며 C레이션에서 꺼낸 커피를 권하면서 말했다.
 
  “난 이소동(李召東・1군 사령관 역임. 대장 예편) 장군의 9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있다가 자원해서 왔소. 군인은 싸움을 해봐야 되잖아. 우리, 아마도 싸움깨나 하게 될 거요.”
 
 
  戰場에서 만난 친구
 
  그때 웅성거리고 있던 중대원들의 열 중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그는 큰 소리로 나를 향해 외쳤다.
 
  “야! 자네, 김광휘 아니야? 나 최인수야! 최인수!”
 
  고된 훈련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탄 키 작은 육군 중위가 큰 소리로 외치며 내 손을 잡았다. 뜻밖에도 그는 내 고등학교 동기생이었다. 그냥 알고 지내던 동기생이 아니라, 함께 교회도 다니고 재수할 때 도서관까지 같이 다녔던 절친이었다.
 
  “아니!”
 
  우리는 부둥켜안았다. 그렇게 인연이 깊었던 두 사람이 아득한 베트남전의 벌판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 중대에서 소대장과 관측장교로 말이다. 아무튼 그는 중위였고, 나는 소위였다. 그는 충북 보은중학교를 수석으로 나온 수재로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법관이 되기 위해 서울법대에 두 번이나 응시했지만, 그 거만한 육법전서가 그를 뿌리쳤고, 이내 보병학교로 달려가 육군 장교가 된 것이었다. 홧김에 서방질을 한 셈인데, 그 인연이 깊어 베트남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장세동 중대장이 반색하였다.
 
  “아니, 이런 인연이 있나? 고등학교 동창생을 베트남 전쟁터에서 만나다니…. 우리 앞으로 정말 잘해봅시다.”
 
  나중에 유추(類推)해보니, 맹호부대에 이어 베트남에 온 백마부대(9사단) 사단장인 맹장(猛將) 이소동 장군이 장세동 대위를 채명신 사령관에게 추천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거기 물건 하나가 갔습니다. 내가 데리고 있던 수색중대장이오. 끝내주는 장교입니다. 중용해보세요.”
 
 
  베트콩 지역에서의 첫 밤
 
1965년 크리스마스 이브, 작전 직전의 장세동 대위(오른쪽).
  맹호1연대 제3중대의 관측장교로 발령받아 사단 본부 부근에 있는 보병연대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중대가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의 이동수단은 헬리콥터였다. 모두 헬기를 타고 자기 보급품을 들고 요란한 날갯소리를 들으며 어느 밋밋한 산 중턱에 내렸다.
 
  장세동 중대장과 관측장교인 내가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뒤로 고지 하나가 있고, 그 너머에 대대 본부가 있고, 포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군으로서는 최초로 베트콩 지역에 떨어진 것이었다. 외곽지대는 먼저 와 있던 미군 101공수사단이 맡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대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세동 중대장, 나 배정도(裵貞道·청와대 경호실 행정차장보 역임. 육군 소장 예편) 대대장인데, 축하해. 제3중대가 최전방을 맡게 됐어. 우리 한국군으로서는 최초로 베트콩 지역에 들어선 거야. 오늘 저녁부터 잘 해봐.”
 
  제3중대는 미군들이 던져주는 철조망을 받아 주변에 설치하고는 잡초를 치우고 야영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후 모두 C레이션을 까먹고, 중대장의 명령을 기다렸다.
 
  “여러분, 어쩌다 보니 우리가 한국군 최초로 베트콩 지역에 들어와 첫 밤을 보내게 되었다. 자고로 살고 죽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고 하였다. 우리는 군인이다. 살고 죽는 것은 하늘에 맡기고 최선을 다해보자!”
 
  모두 저녁참으로 다시 C레이션을 까먹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중대장이 소대장들에게 지시했다.
 
  “오늘 밤부터는 절대 밤에 담배를 피울 수 없다. 담뱃불은 적의 표적이 된다. 아무리 모기가 물어도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홍천에서 배운 대로 거머리가 물고, 모기가 뜯고, 담배가 고프더라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첫 전투
 
  그렇게 잔뜩 겁을 먹고 모두 총을 든 채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베트콩이다! 베트콩이 쳐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박격포, 조명탄 올려! F.O, 조명탄 때려줘!”
 
  나는 떨렸다. 말로만 듣던 베트콩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고 전투가 벌어졌다. 실전이었다. 포대 위에 조명탄을 띄워 달라고 포사격 명령을 하였다. 얼마 후, 105mm 조명탄이 밤하늘에 올라 주변을 밝혔다. 부대 앞 개울을 가로지르는 베트콩들이 보였다. 사격이 시작되었다. 조명탄은 조금 있다가 꺼졌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중대장이 소리쳤다.
 

  “김 소위, F.O! 미군 비행기 불러! 조명탄 쏴달라고 해!”
 
  나는 미군 연락장교에게 우리 상황을 설명하고 조명탄을 투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곧이어, 거짓말처럼 미군 비행기들이 날아오고 하늘에서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 베트콩들은 철수하기 급급하였다. 얼마 후, 총성이 멎었다. 날이 밝았다. 고지 위로 헬기들이 날아오고 제일 먼저 채명신 사령관이 달려왔다. 키 크고 잘생긴 그 장군이 성큼성큼 다가와 장세동 대위의 손을 잡았다.
 
  “장 대위, 수고했어. 아주 멋지게 격퇴시켰군. 전과(戰果)는?”
 
  장세동 대위는 간략하게 보고했다.
 
  “베트콩 사살 2명입니다. 시체는 저기 있습니다.”
 
 
  허화평
 
  채명신 사령관과 참모들이 베트콩 시체를 살펴봤다. 팬티 차림에 수류탄을 움켜쥔 결사대 2명이었다. 그들은 최초로 접한 한국군의 사기를 단번에 꺾기 위해 결사적으로 덤볐다가 깨끗이 당하고 시신 2구를 남기고 철수한 것이었다.
 
  사단에서 나온 보도진이 사진을 찍고 전투교훈을 정리하는 장교가 상황을 기록하였다. 그 장교는 장세동 대위로부터 상세한 전투경위를 꼼꼼히 들으면서 들고 온 메모지에 정리했다. 그는 장세동 대위에게 깍듯이 경례를 하며 구면(舊面)인 듯 아는 체를 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바로 허화평(許和平·청와대 정무1수석비서관, 제14·15대 국회의원 역임) 중위였다. 채명신 사령관은 베트콩을 사살한 병사 2명을 찾아서 격려해주었다.
 
  “무섭지 않았는가?”
 
  병사들은 턱을 앞으로 쭉 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령관은 만족한 듯 어깨를 치며 말했다.
 
  “그렇지! 적을 충분히 유인해서 마지막 순간에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진짜 군인인 거야. 좋아! 훈장을 상신하도록!”
 
  그날, 1965년 10월 29일 금요일, 베트남 중부 퀴논 북부 풍손 지역에서의 전투상황은 한국의 신문, 잡지에도 대서특필되었으며,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도 요란하게 보도되었다. 《전우신문》(당시 군대에서 발행되던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육군 베트남전사에도 남아 있다.
 
  1996년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전적지에 가본 일이 있다. 베트남군 전몰자(戰歿者) 묘지가 경건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한국군이 단독으로 베트남전에서 중대 단위로 승리를 거두게 되자 채명신 사령관은 부대 운영을 중대 단위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 최초의 시범부대로 장세동 중대, 즉 맹호 제1대대 제3중대를 미군들이 가까스로 교두보로 확보하고 있던 ‘고보이’라는 지역으로 투입하였다. 고보이는 퀴논 북동부 강가의 전략(戰略) 마을이었다.
 
  미군들이 그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강가 마을의 이쪽저쪽에 폭격과 포격을 어찌나 심하게 했던지 마을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로 야자 숲속에 버려져 있었다. 우리 중대가 그 마을에 들어가자 미군들은 우리 한국군을 묘한 표정으로 맞았다.
 
  현지에 있는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일대에서 용맹을 떨쳤다는 101공수사단 C중대였다. 그들은 이미 당시 최신 무기였던 M16소총을 들고 있었고, 아주 성능이 뛰어난 통신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미군 중대장은 굵은 시가를 물고 M1과 카빈총을 들고 나타난 우리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장세동 대위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 지역을 당신 중대에 인계하고 나면 이 강을 건너 앞으로 저 평야지대를 점령해나갈 수 있겠는가?”
 
  장세동 대위는 그 키 큰 미군 대위를 올려다보며 당당히 말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우리 식대로 싸우겠다. 당신들이 싸우는 모습을 사흘만 보여달라. 그 후 물러가도 좋다.”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거야!”
 
작전 당시 장세동 대위 대신 부대를 지휘하던 김광휘 소위.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날 저녁부터 미군들이 싸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중대 본부로 쓰이던 이층집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세워진 건물 같은데 동네에서 가장 튼실하게 보이는 목조건물이었다. 2층에 중대장실이 있고 무전기 안테나가 지붕에 삐죽하게 나와 있었다. 시가를 입에 문 중대 선임하사와 중대장이 번갈아 가며 전투지휘를 하는 와중, 강 건너 소대에서 베트콩이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즉각 105mm 포탄이 떨어지고 함성이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바로 앞까지 베트콩이 들어온 듯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세동 중대장과 부중대장 김실근(육사 18기) 중위, 그리고 나는 납작 엎드려 그 전투장면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베트콩들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자 연신 수류탄이 터지고 미군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미군들의 소리는 주로 “갓 댐!” “퍼킹!” 같은 욕설이 대부분이었고, 부상당한 미군들을 실어 나를 헬기들이 연신 날아오기 시작하였다.
 
  ‘전투라는 것이 정말 이런 것인가….’
 
  나는 무서움 때문에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부중대장 김실근 중위는 나를 향해 말했다.
 
  “김 소위, 우리끼리 저놈들하고 싸우게 되면 당신 저 미군 포병들처럼 대포 잘 쏠 수 있겠소? 자신 있어?”
 
  난 자신이 없었다. 포병을 부르고 미군 비행기를 부르고 그럴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장세동 중대장이 뒤에서 말했다.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거야! 김 소위, 우리는 할 수 있어. 겁먹지 마!”
 
  이후 미군들은 떠났고 미군들이 떠나고 나자 우리는 더 무서웠다. 장세동 중대장은 말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싸우는 거야. 우선 베트남 사람들을 마을 한가운데 모이게 하고, 밤에는 절대로 나가지 못하게 해. 마을 가에 있는 바나나 숲을 다 벌목도(伐木刀)로 치워. 바나나 나무인지, 베트콩인지 구분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마을 주변을 깨끗이 청소해!”
 
 
  “우리의 자랑스러운 컴퍼니 리더 캡틴 장”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병사들은 벌목도를 들고 마을 주변을 깨끗이 치웠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헬기 편으로 모두 퀴논 시내 피란민촌으로 후송시켰다. 마을에는 꼭 남고자 하는 노인들과 이장, 몇 명의 민병대들만 남게 되었다. 철조망을 겹겹으로 치고 사이사이 미군이 건네준 클레이모어 지뢰(야전폭탄)와 부비트랩(폭발물) 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기관총을 촘촘히 배치하였다. 그야말로 물 샐 틈 없는 요새가 되었다.
 
  밤마다 베트콩들이 기습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도 전투의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봤던 그 미군들처럼 우리도 여유 있게 양담배를 피우며 시가를 물며 커피를 마시며 전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지도를 보고 기계적으로 화집점(火集點·미리 봐둔 공격지점)을 포대에 알려 사격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채명신 사령관이 웨스트모어랜드 대장과 함께 헬기로 날아왔다. 질서정연한 고보이 진지를 둘러보고 웨스트모어랜드 대장이 말했다.
 
  “채 사령관, 한국군 참 대단합니다. 내가 얼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우리 101공수사단 C중대를 보러 바로 이곳에 왔었습니다. 그때에는 미군들이 베트남 주민들과 마구 엉켜 있었고, 밤에는 주민과 베트콩을 구분할 수 없어 우물쭈물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보고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군들은 이렇게 말끔하게 중대 진지를 구축했군요. 좋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운영해보세요.”
 
  채명신 사령관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에게 장세동 대위를 소개하며 말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컴퍼니 리더(중대장) 캡틴 장입니다.”
 
  장세동 대위는 반듯한 자세로 두 사령관에게 경례를 올렸다.
 
 
  “예감이 좋지 않아”
 
4·19 작전 모습.
  1966년 4월 19일 아침이었다.
 
  중대는 앞으로 있을 연대 작전의 준비 작업을 위해 고보이 평야 진격 작전을 펴기로 했다. 바로 전날 부중대장 김실근 중위가 목표 부락인 탄쾅 마을까지 정찰을 끝내고 돌아왔다.
 
  “별 특이한 동향은 없었습니다. 적들이 침투한 흔적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패트롤(정찰)을 끝내고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산책 삼아 갔다 오시죠 뭐.”
 
  그런데 장세동 중대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런데 예감이 좋지 않아.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하고 썩 내키지가 않아.”
 
  대대장이 병사의 군장(軍裝)을 점검하다가 무엇이 신경에 걸렸던지 거친 말을 하였다.
 
  “새끼야, 이렇게 군화 끈을 풀고 어떻게 전투를 할래? 그렇게 정신 줄을 놓으면 뒈지는 거야. 알아?”
 
  그는 지휘봉으로 병사의 배를 쿡 찔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장 대위는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했다.
 
  “제 부한가? 왜 아이를 때려? 작전하러 나가는데….”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자신의 부하를 대대장이 건드리는 것이 참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부대는 출발하였다. 야자수 우거진 강변로를 따라 소리 없이 움직였다. 해가 평야 끝의 푸카트산 정상으로 떠올랐다.
 
 
  기습
 
  아침 10시쯤 되었을 것이다. 아침참을 모두 거르고 나왔기 때문에 추수가 막 끝난 들판 끝에서 C레이션을 꺼내 먹었다. 목표지점인 탄쾅 마을이 눈앞에 보였기 때문에 내가 말했다.
 
  “중대장님, 저 숲속의 마을이 탄쾅입니다. 오늘 작전 목표의 끝입니다.”
 
  중대장은 무전병에게 앞에 나간 2소대장을 부르도록 하였다.
 
  “최 중위, 이상 없소?”
 
  무전기 너머에서 답신이 왔다.
 
  “네, 특이한 적정이 없습니다. 저희 소대는 이미 탄쾅 마을을 통과했습니다.”
 
  나는 C레이션에 든 과일통조림을 마지막으로 따 먹고 생뚱맞게 말했다.
 
  “중대장님, 그러고 보니 오늘이 4·19네요. 전 그때 중앙청 앞에까지 갔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까만 정복을 입은 경무대 경찰들이 무릎쏴 자세로 우리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했습니다.”
 
  “난 그때 휴가를 받아서 청량리역에 내렸었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고 버스가 안 다니더군. 그래서 걸어서 동대문까지 갔는데 데모대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어. 참 대단했었지.”
 
  우리는 들판을 건들건들 걸으며 마지막 목표를 돌고 중대 본부가 있는 고보이로 돌아가 샤워를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타다다! 하는 연발음이 나면서 내 뒤에 걸어오던 부중대장 김실근 중위가 풀썩 쓰러졌다. 그는 쓰러진 후에 나를 향해 외쳤다.
 
  “김 소위! 움직일 수가 없다! 내가 총탄에 맞았나?”
 
  나는 달려가 보았다. 그의 대퇴부가 뻘겋게 되어 있었다. 나는 급히 위생병을 찾았다.
 
  “위생병! 위생병!”
 
  그때 또 총성이 울렸다. 앞서가던 김지영 중위(육사 19기, 당시 화기소대장)가 눈을 움켜쥐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 손끝에는 눈알 같은 것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중대장이 소리 질렀다.
 
  “위생병! 위생병! 김 중위, 김 중위를 덮쳐!”
 
  위생병이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위생 배낭을 메고 달렸다. 계속 총성이 울렸다. 위생병이 김 중위를 안고 개울로 뛰어들었다. 숲속에 서 있는 저격병의 기관총 총구가 보였다. 장세동 중대장이 벌떡 일어나 들고 있던 카빈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그가 왼손을 움켜쥐더니 내 어깨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를 움켜잡았다. 그의 피가 내 군복을 적셨다. 뜨뜻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들고 있던 군용지도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김 소위, 2소대장 불러. 빨리!”
 
  나는 이미 마을을 통과한 최인수 중위를 불렀다.
 
  “뒤를 봐! 뒤에 있어! 지금 우리가 저격당하고 있어! 빨리 돌아와!”
 
  중대장을 둘러업었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벅벅 기면서 소리쳤다.
 
  “선임하사! 선임하사!”
 
  중대 선임하사가 개울에 엎드려 있다가 기어 올라왔다. 나는 소리쳤다.
 
  “중대장님 업어! 빨리 업어!”
 
 
  “스모그는 안 돼. 포판을 펴”
 
1966년 5월 초, 사단후송병원으로 이송된 장세동(왼쪽) 대위와 부관 김실근(맨 오른쪽) 중위.
  유도 선수였다는 그는 벌벌 떨면서 중대장을 둘러업고 뛰었다. 총탄은 계속 날아왔다. 나는 뒤에 누워 있는 부중대장을 업고 선임하사를 따라갔다. 총탄이 발뒤꿈치를 따라왔다. 달리면서 미국 헬리콥터를 불렀다. 좌표를 부르며 빨리 와달라고 소리쳤다. 다행히 헬기는 굉음을 내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들의 기관총 사격 때문에 내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다급한 나는 어깨에 차고 있던 스모그(연막탄)의 핀을 뽑았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중대장이 눈을 뜨며 말했다.
 
  “안 돼. 스모그는 안 돼. 박격포가 날아와. 포판을 펴. 포판을!”
 
  나는 관측하사 천 하사에게 헬기가 내릴 수 있도록 포판을 펴도록 했다. 천 하사는 구르면서 포판을 폈다. 헬기는 포판을 보고 쏟아지는 기관총탄 속에서 필사적으로 하강을 시도하였다.
 
  최인수 소대가 달려왔다. 숲속에 숨어 있던 베트콩 부대와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너무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모두 야전삽을 꺼내 들고 베트콩과 뒹굴고 있었다. 신형인 듯한 헬기에서 날렵한 미군 위생병들이 뛰어내려 장세동 대위와 김실근 중위를 실어 올렸다. 장세동 대위는 헬기를 타면서 다시 눈을 떴다.
 
  “김 소위, 중대를 부탁해!”
 
  1966년 4월 19일, 퀴논 북쪽 고보이 벌판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그는 총탄에 맞아 의식을 잃으면서도 끝까지 중대장의 임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진짜 군인이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5공(共) 정권의 실력자로 기억하고 있지만, 정치적 공과(功過)를 떠나서 나는 증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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