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그때 그 사람

가수 진미령

“‘김동석의 딸 진미령’이 더 자랑스럽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대만 유학 준비하다가 ‘말해줘요’(1976년)로 데뷔… ‘소녀와 가로등’ ‘하얀 민들레’ 등 히트곡 남겨
⊙ 화교학교 나오는 바람에 ‘화교’로 소문 나… 아버지는 6·25 전쟁영웅인 정보장교 김동석 대령
⊙ 전유성과 5년 단위로 상호 합의해서 계약을 연장하는 조건으로 결혼
⊙ 스포츠 통역, 연기자, 요리책 저자로도 활동… ‘주식회사 진미령’ 차려 프리미엄 김치 생산
사진=조준우
  평생을 오해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가수 진미령(陳美齡·64)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미령은 화교(華僑)가 아니다. 본명이 김미령(金美齡)인 토종 한국인이다. 외할머니가 화교라는 일부 인터넷 정보도 사실이 아니다. 외할머니도 개성 출신의 한국인이다. 글로벌 지구촌 시대에 국적과 민족을 따지는 일은 어쩌면 큰 의미가 없는 일이겠지만, 당사자가 피로를 느낀다면 진실을 널리 알리는 일도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 지금도 화교라고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까.
 
  “그럼요. 오향장육 어떻게 하면 맛있냐고 물으세요.”
 

  진미령이 ‘화교’라고 소문이 난 건 연희동 한국한성화교중고등학교(韓國漢城華僑中高等學校)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진미령은 아버지 김동석(金東石·1923~2009년), 어머니 함영희(咸瑛喜·90)의 2남 2녀 중 셋째다. 위로 언니, 오빠, 아래로 남동생이 있다.
 
  “엄마는 4남매 중 하나는 외국식 공부를 시키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외교관이 꿈이었던 제가 뽑힌 건지도 모르겠네요. 국제학교 학비는 공무원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명동(明洞) 한성소학교를 무작정 찾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딸 여기서 공부시키고 싶다고. 한국 학생도 일부 입학이 가능하던 시절입니다. 아버지가 청년 시절에 중국에서 생활하신 적도 있고, 화교 사회에 대한 애정이 크셔서 즐겁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진미령 華僑說’
 
진미령은 1984년 LA올림픽 때 한국 유도 대표팀을 위해 자원봉사를 했다. 하형주, 김재엽 등이 보인다. 사진=진미령 제공
  화교설(說)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건 데뷔 2년 차였던 1977년 5월 무렵이다. 영화 〈사랑의 스잔나〉 개봉 인사차 주연배우 진추하(陳秋霞·65)가 내한(來韓), TV에 출연했다. 공중파가 영상매체의 거의 전부였던 시절, 홍콩 톱스타와의 인터뷰는 그 자체로 화제만발(話題滿發)이었다. 상당한 시청률을 기록한 프로그램에서 진미령은 유창한 중국어로 진추하와 인터뷰를 했고, 듀엣으로 노래도 불렀다. 영화가 1976년 한국 흥행 1위를 기록하자 진미령의 노래와 인터뷰도 ‘수명(壽命)이 긴 화제’가 되어 대중 사이에서 소문을 만들었다. 출신학교, 중국어, 진씨(陳氏)라는 희성(稀姓)은 ‘진미령 화교설’을 뒷받침한 삼중창이다.
 
  오해의 정점은 1990년 베이징(北京)아시안게임 전야제 사회다. 진미령은 중국인 남성과 공동 MC를 봤다. 직전 대회(86 서울아시안게임) 개최국 국민이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중국어,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생각은 달랐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이니 화교인 진미령을 부른 것’이라는 소문이 정설처럼 떠돌았다. 당사자로서는 조금 억울한 일이다.
 
  진미령이 전야제 사회를 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스포츠 관련 통역으로 실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1984년 LA올림픽. 당시 LA에 거주하던 진미령은 자동차로 유도 선수들을 이동시키고 통역을 하며 자원봉사를 했다. 대한유도협회 부회장이던 부친의 명(命)을 따른 결과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일시 귀국, 유도팀 통역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하형주(河亨柱), 김재엽(金載燁), 이경근(李璟根) 등 올림픽 유도 메달리스트들과 지금도 교분을 이어가는 배경이다.
 
 
  대만 유학 추진하다가 가수 데뷔
 
  가수가 된 것은 절반은 우연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 앞에서 엄마의 머리솔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부른 적은 있다. 할머니의 애창곡 배호(裵湖)의 ‘돌아가는 삼각지’ ‘사랑’ 그리고 이미자(李美子)의 노래가 레퍼토리였다. 혜화초등학교 시절, 시민회관 소속 어린이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재롱’이고 ‘취미 생활’이었다. 1976년 2월, 화교학교 19기로 졸업한 김미령은 시간이 넘쳐났다. 9월 대만의 대학 진학 때까지 남은 기간은 7개월. 거의 매일 나이트클럽에 다니며 신나게 노는 딸을 어머니는 더 두고 보지 못했다.
 
  “놀러 다니지만 말고 노래를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나중에 외교관 하더라도, 노래 잘하면 덕 볼 일이 많지 않겠느냐며 권유하셨죠. 학교처럼 아예 시간을 정해서 오아시스 레코드사로 노래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래야 마구 놀러 다니지 못하잖아요? 그래도 여전히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작곡가 장욱조에게 노래를 배우던 무렵, 해군 군악대 출신의 전설적 매니저 타미 킴이 신인 발굴차 레코드사를 찾아왔다. 그는 진미령을 발탁하고, “8월 말에 대만으로 떠난다니 7월까지만 해보고 안 되면 그때 그만둬도 되지 않느냐”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곡을 받아 연습하는데 TBC 조용호 PD가 ‘얼굴과 노래가 서로 맞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만든 데뷔곡이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나 그대를 알아요~’라는 경쾌한 멜로디의 히트곡 ‘말해줘요’(1976)다. 예명은 외할머니 진금복(陳錦福)의 성(姓)을 따 ‘진미령’으로 지었다. ‘딴따라 할 것 같으면 호적에서 뺀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피해 할머니의 ‘빽을 쓴’ 결과다.
 
  아버지·어머니가 임지(任地)를 따라 지방에서 생활하는 동안, 외할머니는 서울에 남아 진미령을 키웠다. 그래서 외할머니의 방패막이가 통했던 것이다. 외할머니가 없었다면 진미령의 가수 데뷔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이유다.
 
  혜성처럼 등장한 앳된 소녀, 당차고 당당한, 하지만 순진하면서도 우수에 깃든 목소리를 지닌, 묘한 매력을 한 몸에 구현한 가수에게 대중은 환호했다. 데뷔를 하고 얼마 후 갑자기 일거리가 밀려들었다. 진미령은 성우로도 활동했고, MBC 라디오 〈가요열차〉 〈싱글벙글쇼〉의 진행도 맡았다. 이주일, 박상규, 서수남, 이규혁 등이 진미령의 진행 파트너였다. ‘브라보콘’ 등 CM송도, 만화영화 주제가도 여러 곡 불렀다.
 
  CM송 취입 동기는 지금도 만나는 정수라와 윤석화다. 어린이물의 대표곡은 ‘날으는~ 날으는~ 원더우먼~’으로 시작하는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원더우먼〉(한국방영 1977). ‘세월이 가면’의 최호섭이 부른 〈로보트 태권V〉(1976), ‘타타타’의 김국환이 부른 〈은하철도 999〉(1982)와 더불어, 필자가 꼽는 1970~80년대 ‘이 가수가 이런 곡도?’의 3대 샘플이다.
 
 
  아버지 김동석 대령
 
고2 때 부모님과. 아버지 김동석 대령은 정보부대의 전설이다.
  여기서 진미령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김동석 대령은 미국 2사단이 선정한 6·25 4대 영웅 중 한 명이다. 다른 세 분은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장군,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다. 쟁쟁하고 저명한 역사적 위인(偉人) 사이에서, 대령 출신의 군인이 4대 영웅?
 
  김동석 대령은 함북 명천 출신으로, 육사 8기 졸업생이다. 6·25 당시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참전, 첩보장교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과정에서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다. 맥아더 원수(元帥)와 독대(獨對), 인천상륙작전 정보를 전달했고, 맥아더 장군이 보고서를 볼 때마다 책상 위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This Man)이 전해준 정보는 100%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부시 전 대통령의 ‘This Man’과는 용례(用例)가 다르다. 그래서 김동석 회고록 제목도 《이 사람(This Man)》이다.
 
  김동석 대령이 UN군 10만 명 이상, 미 공군 전투기 조종사 수십 명의 생명을 살렸다는 평가도 있다. 미군 군사(軍史)에 나오는 분석이다. 당시 8군 사령관 마크 M 클라크 대장의 회고록 《한국전쟁비사-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에도 비슷한 평가가 실려 있다. 아버지 김동석 대령에 대한 진미령의 회고다.
 
  “어렸을 때 어쩌다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살기(殺氣)가 넘쳐서 근처에도 못 갔어요. 북한 간첩이 언제 올지 모른다며 베개 밑에 권총, 칼 등을 깔고 주무셨거든요. 부하들이 작전을 나가면 돌아올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부대 사무실에서 수염도, 손톱·발톱도 깎지 않고 파견 나간 대원들을 기다리셨죠. 부하들이 돌아오면 파티를 해주고,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마음 아파하셨어요. 지금도 강원도 영월사에 가면 순국(殉國)하신 분들의 위령탑이 있습니다.”
 
  첩보부대에서 아버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3·6동지회라는 모임이 매년 속초에서 김동석 대령 추모회를 여는데, 진미령은 지금도 어머니를 모시고 그분들을 찾는다. 밥과 술대접도 잊지 않는다. 과거 미 2사단이 의정부에 주둔하던 시절, 김동석 기념관(Kim Dongsuk Honour’s Room)이 있었다. 평택으로 이전하며 진미령은 전시품 214점을 안양에 있는 국군정보사령부로 넘겼고, 정보사는 체육관 이름을 ‘동석관(東石館)’으로 명명했다.
 
 
  “아버님이 딸 자랑 많이 하셨다”
 
  아버지 덕분에 미군 부대를 정기 방문한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딸이 유명 가수가 된 후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으니 와서 노래하라”고 하셨다. 얼마 전, 퇴역 군인 한 분이 “의정부 레드 클라우드(Red Clouds)에서 32년 전 공연하는 것을 봤다”며 “아버님이 딸 자랑 많이 하셨다”고 했다.
 
  “울컥했죠. 저한테는 ‘가수 진미령’ 칭찬을 거의 안 하셨거든요. ‘왔나!’라며 힘차게 끊어지던 아버지 말투가 여든 넘어서는 ‘왔-나-’라고 살갑게 변했는데, 왜 제가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나, 지금도 후회를 많이 합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자면 이 이야기도 꼭 해야 한다. 불멸의 히트곡 ‘소녀와 가로등’(장덕 작사/작곡)을 부르지 못하는 사연이다.
 
  “1977년 MBC가 서울가요제를 만들었어요. 이듬해부터 국제가요제로 확대된 바로 그 행사입니다. 타미 킴 선생님이 출연을 제안하셨어요. 오빠와 둘이서 듀엣 ‘현이와 덕이’를 만들어 활동하던 장덕(張德·1961~1990년)과 저를 한 팀으로 붙여서 내보내면 그림이 될 거다, 보우 타이에 하얀 바지를 같이 입고 나가보자고 하셨어요.”
 
  장덕은 악단을 지휘했고 진미령은 노래를 불렀다. 입상은 하지 못했다. 사회는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 대상은 길옥윤(吉屋潤) 작사/작곡, 혜은이가 부른 ‘당신만을 사랑해’.
 
  하지만 주최 측은 이 노래의 잠재력을 간파, 가요제 LP음반 B-1면에 이 노래를 수록했고, 모두의 예상대로 이 곡은 10대, 20대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이내 전 세대의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다.
 
  “덕이 아버님도 개성 분이라 친근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나이도 제가 세 살이 많고, 덕이랑 교분이 많았던 사이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면 꼭 덕이가 옆에 와 있는 느낌이 들어요. 슬퍼서 노래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얀 민들레’
 
  또 다른 국민애창곡 ‘하얀 민들레’(1979)는 MBC 드라마 주제곡이다. 작곡가는 ‘슬픈 노래는 싫어요’, 이은하의 ‘밤차’, 윤승희의 ‘제비처럼’, 심수봉의 ‘당신은 누구시길래’ 등을 작곡한 유승엽. 방송국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음색에 꼭 맞는 곡을 썼다며 취입을 권했다. 드라마의 인기에 주제가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MBC가 나중에 엄청난 금액의 격려금을 작곡가 유승엽과 작사가 신봉승(辛奉承)에게 줬다는 전설이 있다. 〈행복을 팝니다〉의 후속 드라마 〈하얀 민들레〉는 4월 말부터 방영했고, 9시 뉴스가 끝난 황금시간대 9시35분에 나갔던 간판 일일 연속극이다. 극본은 신봉승, 연출은 박철(朴鐵)이었고, 김자옥, 박근형, 김용림, 김영란, 전운, 현석, 남성훈, 조경환, 김윤경, 오미연, 임예진, 김동현 등이 주요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제 노래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죠. 지금도 결혼식장에서 축가로 불러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습니다. 신랑·신부가 아니라 어머님·아버님께 드리는 노래라 생각하며 부릅니다. ‘나 옛날엔 사랑을 믿었지만 지금은 알아요 믿지 않아요~’로 시작하는 2절은 너무 슬퍼서 부르지 않고, ‘나 어릴 땐 철부지로 자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떠나는 것을~’로 시작하는 1절을 두 번 부르죠. 신부들이 많이 웁니다. 가사가 다들 자기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나 봐요.”
 
  유승엽은 2001년 ‘엄마 엄마 새엄마 눈물꽃 엄마!’로 시작하는 KBS 드라마 〈새엄마〉의 주제가 취입도 권했다. ‘새엄마의 심정은 새엄마가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겠느냐’는 이유였다. 진미령이 개그맨의 대부(代父) 전유성(全裕成·73)과 결혼한 뒤의 일이다.
 
 
  미국 이민
 
1970년대 후반 MBC 라디오 〈싱글벙글쇼〉. 남자 진행자는 가수 서수남이다.
  1970년대 중후반은 진미령에게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였다. 아침에 라디오 생방송을 하고, 서울역으로 달려가 부산행 기차를 타고 지방공연, 행사를 마치고 침대차를 타 새벽 4시 서울역에 도착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여름 특집방송을 하면, 당일치기로 동해안·서해안 해수욕장을 다녀와야 했다. 지금과 달리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정상(頂上)에 오르면 마(魔)가 끼는 법. ‘그때 누구누구만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후회할 만한 일들이 있어 미국행을 결심했다. 어머니도 함께였다. 가수가 꿈이 아니었기에 절실함이 없었던 것도 훌쩍 이민을 결심한 배경인지도 모른다. 1981년의 일이다.
 
  “언니, 오빠와 어머니 친척분들이 미국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민이 아니라 가족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었어요. LA로 가서 생활인으로 살았습니다. 장난감 좌판 장사도 하고, 공장에서 재봉 일도 했죠. 바짓단을 가공하면 한쪽에 25센트, 한 벌에 50센트를 받았습니다. 하하. 저녁에는 랭귀지스쿨도 다니고, 비즈니스 어카운팅도 공부했어요.”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교포 사업가가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에서 월 3000달러의 고소득 자리를 제시했지만 바로 거절했다. ‘노래를 계속할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했을 것’이라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 최초의 고정 직업은 보르네오 가구 창고지기. 롱비치에서 들어오는 가구들을 품목별로 정리하고 출고하는 일이었다. 버몬트 8가 매장에서 일하던 아가씨가 갑자기 사직해서 ‘시내’로 직장을 옮겨 가구를 팔았다. 진미령이 일한다고 소문이 나서 교포들의 걸음이 잦았다. 미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신발장 등 한국식 가구가 진미령이 기억하는 이때의 인기상품이다.
 
 
  이주일·조용필 권유로 귀국
 
이주일과 진미령이 함께 활동하던 시절. 음악하던 분들과 함께.
  1980년대 초는 교포 상대 위문 공연이 빈번하던 시절이다. 연예계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기에, 마음이 흔들릴까 싶어 아는 친구들이 와도 걸음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7년 이주일(李朱一)과 조용필(趙容弼)의 방미(訪美)는 외면할 수 없었다.
 
  “두 분 다 제게는 오빠 같은 분이시거든요. 두 분이 톱스타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입니다. 하춘화 선배님 지방공연, 김세레나 선배님 극장쇼 등, 이주일 선배님이 사회 보시는 공연에 제가 출연도 했죠. 강남터미널 옆 ‘청록’이라는 극장식당에서 셋이 같이 일했는데, 일이 끝나면 포장마차를 전세 내서 편하게 뒤풀이를 하기도 했어요. 여기 있는 안줏값 다 얼마냐 물어보고 5만원에서 7만원 드리면 주인 아주머니가 다른 손님은 안 받으셨죠.”
 
  두 사람은 “아깝지 않냐, 지금은 우리 둘 다 너를 도울 수 있다, 용필이가 곡도 써줄 수 있다”며 진미령에게 귀국을 권했다. 미국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따고, 내근과 판매를 겸하며 보험 일에 재미를 붙여가던 중이라 많이 망설였다. 장기간의 고민 끝에 귀국을 결심한 것은 1989년이다.
 
  “집 팔고 차 팔고 서울에 왔는데 두 분께 연락을 안 드렸습니다. 이주일 선배님은 ‘홀리데이 인 서울’이라는 업소를 운영하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고, 조용필 선배님은 가정사 때문에 주변 일에 신경 쓰시기 어려웠거든요.”
 
  어머니도 “두 분을 생각해서,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일이 꼬이니 노래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신인의 자세로 돌아가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다. 오디션 결과는 합격. 1989년 7집 〈From LA To Seoul 하나 그리고 둘/아하〉, 1991년 8집 〈Golden Album 혼자가 좋아/가라지〉, 1994년 9집 〈여자 나이 서른/그대 곁에 나만이〉 등을 연이어 발표한 배경이다.
 
  일도 쏟아졌다. 1989년 4월엔 MBC 라디오 〈즐거운 오후 2시〉를 고영수와 진행했고, 11월에는 나스타샤 킨스키 인터뷰, 주윤발(周潤發) 내한 공연에 통역 겸 아티스트로 참가했다. 앞서 이야기한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전야제 사회는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행사 1년 전에 확정한 스케줄이다. 1990년 7월에는 장덕 추모음반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유성과의 결혼
 
  1990년 가을, KBS 라디오가 가을 개편을 하며 〈일요공개쇼〉 MC를 부탁했다. 이 프로그램의 남성 진행자가 바로 전유성이다. 처음엔 별 느낌이 없었는데 1992년 청혼을 받았다.
 
  “안 해본 일 중에 면사포 쓰는 일이 있었고, 유성이 형 주변에 화가, 포수, 스님, 치과 의사 등 정말로 다양한 지인이 많았어요. 제가 평소에 만나지 못했던 분들이죠. 그래서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
 
  전처(前妻) 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일부러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93년 결혼식을 올렸고 2011년 갈라섰다. 결혼식 자체가 퍼포먼스였고, 5년 단위로 상호 합의해서 계약을 연장하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유성이 형은 착하고 좋은 남자죠. 갈라서기로 한 건 경제 관념의 차이 때문입니다. 모든 이권을 남한테 줍니다. 노후(老後)에 쓸 돈이 없으면 사람들한테 가서 달라고 하겠대요. 본인은 좋은 마음에서 남들에게 다 베풀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저는 뭐든지 정확하고 분명한 것이 좋고, 신세 지기 싫어서 밥값도 제가 내야 편한 성격인데 그런 점들이 맞지 않았던 거죠.”
 
  2012년에 발표한 ‘미운 사랑’ 가사 중엔 ‘이렇게 살라고 인연을 맺었나 차라리 저 멀리 둘걸/ 미워졌다고 갈 수 있나요 행여나 찾아올까 봐/ 가슴이 사랑을 잊지 못해 이별로 끝난다 해도/ 그 끈을 놓을 순 없어 너와 난 운명인 거야’라는 대목이 있다.
 
  “이럴 걸 왜 헤어졌냐”고 하는 분이 있는데, 가사와 개인사는 전혀 상관이 없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이 노래는 2021년 1월 TV조선 〈사랑의 콜센타〉에 출연해 임영웅과 듀엣으로 불렀고, 9년 전에 만든 진미령 독창 음원 버전은 유튜브 조회 수 3100만을 넘기며 신나게 역주행(逆走行) 중이다.
 
 
  ‘요리사 진미령’
 
진미령은 프랑스 요리를 비롯해 요리에도 솜씨가 있다. 사진=조선DB
  전유성에게 감사한 일이 있다. 1995년 7월 인사동에 차렸던 카페 ‘학교 종이 땡땡땡’ 프로젝트다. 입구에 3m 정도 철길을 깔고, 1960~70년대 물건들을 모아 당시의 교실 풍경을 재현한 명소였다. 오늘날 복고풍 식당과 카페의 유행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진미령은 또 다른 자아(自我)와 만났다. ‘요리사 진미령’이다.
 
  “제가 요리를 좋아하거든요. 여섯 살 때부터 부엌을 출입하며 음식을 만들었어요. 외할머니도 개성 음식을 제대로 가르쳐주셨죠. 제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맛있게 드실 때 희열을 느낍니다. 기본을 지키면서도, 창조적인 응용 없이는 ‘나만의 요리’를 만들지 못한다는, 말하자면 전통(傳統)과 파격(破格)이 공존하는 요리의 속성도 제 성격에 딱 맞아요. 1972년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목포시장을 하셨는데, 방학 때 관사로 내려가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봐서 아버지 식탁을 차려드렸죠. 제가 생각하는 제 ‘요리사 데뷔’입니다.”
 
  1997년 《유성아 뭐 먹고 사니?》, 1998년에는 《진미령의 행복한 식탁》이라는 요리책을 냈다. 집에 있는 재료로, 최대한 간단한 조리법으로, 누구나 쉽게 맛있는 요리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부제(副題)도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이런 요리책 처음이야’로 지었다. 1997년 11월 〈한선교의 좋은 아침〉에 출연, 재한(在韓) 프랑스 방송인 이다도시와 프랑스 요리 대결을 펼쳤고, 1998년에는 연극배우이자 정통 서울 요리 연구가인 이정섭이 진행하는 요리쇼 〈맛있는 인생〉에 나가 갓김치를 선보였다.
 
  책을 내고 방송을 하니 ‘전문성’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2003년,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 한국 분점을 1기로 졸업한 배경이다.
 
  “꼬박 1년을 무쇠 같은 프랑스 조리 냄비들을 수없이 들었다 놓았다 정말 열심히 배웠습니다. 왼쪽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 깁스까지 했을 정도죠. 공부를 마치니 250여 가지의 프랑스 요리를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게 되더군요.”
 
 
  연기자로도 활동
 
  이후로도 진미령은 왕성하게 활동했다. 2014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은 진미령이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상이다. 최근 작은 2021년 초 SBS가 방영한 아침드라마 〈불새〉. 주인공의 고모 서희수 역으로 출연했다. 1995년 2월 뮤지컬 〈심수일과 이순애〉에 출연하는 등 연기자로서 활동했던 연장선이다. 2018년 6월에는 KNN(부산경남민방)에서 제작, 방영한 화요 시트콤 〈날아라 메뚜기〉(최인한 극본/임혁규 연출)에 출연하기도 했다. 30분씩 총 20화로 방영한 이 작품은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임랑 마을과 임랑 해수욕장이 배경. 방송국 홍보자료에는 ‘여름 파출소를 준비하는 라소장과 수영 국가대표인 그의 딸 지원, 할머니 미령을 중심으로 사랑, 가족, 치유 등 따뜻한 이야기를 코믹하게 담았다’는 문구가 나온다. 진미령의 역할은 서울에서 내려간, 약간 치매기가 있는 예쁜 60대 깍쟁이 할머니였다. ‘예쁜 할머니’의 2021년 12월 현재 의복 사이즈는 44. 엄격한 식단 관리와 하루도 거르지 않는 홈 트레이닝의 결과다.
 
  최근에는 사업가로 변신, 또 다른 삶의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다. 회사의 이름은 ‘주식회사 진미령’. 확실하게 명예를 걸고 해보자는 마음에 아예 회사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생산 품목은 프리미엄 김치다. 소고기 사태 삶은 물을 쓰고, 찹쌀풀이 아니라 누룽지풀로 김치를 담그는 것이 특징이다. 2021년 초 회사를 만들었고, 11월에 홈쇼핑에 론칭했다. 고객들의 반응은 ‘좋아요’가 94%를 넘을 만큼 압도적이다. 곰탕, 갈비탕도 제휴 생산 중이고, 개성식 보쌈도 곧 출시할 예정이다.
 
  “공장은 강원도 평창에 있습니다. 5·16 후 대령으로 예편하신 아버지의 첫 부임지가 삼척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삼척 명예시민입니다.”
 
 
  “《월간조선》은 아버지가 애독하시던 잡지”
 

  모윤숙(毛允淑) 시인의 후일담 중에는 “1960년대 초 삼척군수 시절 큰 수해를 당해 위문단이 현지를 방문했을 때, 웬 젊은 홍보요원이 브리핑을 잘해서 놀랐고, 그분이 군수여서 또 놀랐다”는 대목이 있다. 김동석 이야기다.
 
  “제가 곱슬머리거든요. 그래서 비를 맞으면 엉망이 됩니다. 다섯 살 땐가, 군수 관사가 죽서루(竹西樓) 근처에 있었는데, 제가 엉망이 된 얼굴로 인근 유치원에 찾아가서 ‘저 군수 딸인데 여기 좀 다닐 수 있나요?’라고 물었어요. 유치원 선생님 한 분이 저를 데려다주시면서 진짜 군수 딸 맞는지 확인했던 일이 있죠. 꼭 다시 뵙고 싶은 분입니다. 김치도 드리고, 보쌈도 드리고, 옛날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사업가의 일정표는 미팅과 회의로 빼곡했다.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버지 부하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월간조선》은 아버지가 생전에 한 호(號)도 거르지 않고 애독하시던 잡지인데, 인터뷰 내내 ‘내가 효도하고 있구나, 기사를 보여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대중은 ‘진미령의 아버지 김동석’이라고 하지만, 저는 ‘김동석의 딸 진미령’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영웅의 딸은 일화가 많다. 예를 들자면, 코로나19로 대구시가 봉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비로 부대찌개 팩 1000인분을 구입, 대구 소방본부로 즉시 배달한 일이 있다. 아버지만큼 기민한 행마(行馬)였다. 필자는 ‘영웅께 올리는 효도에 미력이나마 참여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답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책이 나오면 진미령은 영웅의 유택(幽宅)을 찾지 않을까? 진미령의 이름이 박힌 책과 김치, 보쌈을 읽고 먹으며 어쩌면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일지도 모른다. 딸은 생전에 다 못한 마음속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려드릴 것이다. ‘나 어릴 땐 철부지로 자랐지만~’이라는 노래 한 자락을 곁들일 수도 있겠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협 어부바 콘텐츠 공모전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20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