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美 최초 한인 州퍼스트레이디 ‘유미 호건’

박유미, 김유미, 그리고 유미 호건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양계장 집 막내딸에서 메릴랜드 州지사 부인이 되기까지
⊙ 세 딸의 싱글 맘… 단돈 2달러 없어 빌려야 했던 시절
⊙ 식당 일 하면서도 ‘화가 꿈’ 잊은 적 없어… 50세에 美大 졸업
⊙ 갤러리서 우연히 만난 노총각… 한국형 내조로 주지사 당선
⊙ ‘韓 차기 지도부는 미국 사회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면’
⊙ 내년 말 임기 후 ‘백악관 퍼스트레이디’ 도전 가능성은?
직접 꾸민 메릴랜드 주지사 관저 내 빅토리안룸에서. 사진=유미 호건 제공
  여기, 두 유미가 있다. 반남 박씨의 박유미(朴有美). 양계장 집 딸. 8남매 중 막내. 새벽같이 일어나 스스로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어린 소녀. 시간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 미국. 방이 54개인 관저(官邸)에서 눈을 뜨는 중년의 퍼스트레이디, 유미 호건(Hogan).
 
  언젠가 그를 만난다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어떤 유미 때가 더 행복한지다. 우문(愚問)인 걸 안다. 기어이 물을 기회가 생겼다. 에세이를 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가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면》이다. 이를 통해 “넓은 세상에 나보다 훌륭한 이들이 무수하지만 이만큼 살아보니, 포기하지 않으면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걸 배웠다”면서 “나도 했으니, 너도, 그 누구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10월 26일. 래리 호건(64) 미국 메릴랜드 주지사의 부인 유미 호건(61)에게 이메일을 보내봤다. 긴 대화로 이어졌다.
 
 
  양계장 집 8남매 중 막내
 
  미국에서는 50개 주(州) 지사의 배우자도 ‘퍼스트레이디’라 불린다. 주지사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만큼 세다는 뜻이다. 향후 대통령 출마 가능성이 높은 자리기도 하다. 특히 수도 워싱턴DC와 인접한 메릴랜드주는 더 그렇다. 그 주지사 관저 안방을 한국계 여성이 꿰찬 거다.
 
  전남 나주시 공산면,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집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다. 풍요롭진 않았지만, 끼니 걱정은 안 했다. 군대를 다녀온 큰오빠가 닭장을 지으면서 양계업을 시작하게 됐다. 동네 최초의 양계장이었다. 이후 이웃들이 하나둘 닭을 길렀다. 마을은 대단위 양계 단지가 됐다. 달걀이 귀하던 시절 계란 부침을 마음껏 먹던, 구김살 없고 당돌한 아이였다.
 
  ― 그 옛날 고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 뭔가요.
 
  “그때는 마을에 버스가 없어서 학교에 가려면 매일 십 리를 왕복으로 걸어야 했어요. 등하굣길 푸른 산과 들판,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진달래꽃, 아카시아, 개망초, 나리꽃이 떠올라요. 가을 산의 울긋불긋한 단풍도 참 예뻤죠.”
 

  ― 지금의 ‘유미 호건’이 십 리 길을 걷던 ‘박유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직은 잘 모를 거야. 지금의 아름다운 일상, 가족들과의 시간이 앞으로 수십 년 인생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동력이 될 테니 마음껏 행복해하고 꿈꿨으면 좋겠어.”
 
  ― 묻고 싶었습니다. 언제의 ‘유미’가 더 행복합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행복하고 감사한데요, 차이점은 있어요. 어렸을 적에는 걱정 없이 그저 막내딸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 명랑하고 당돌한 구석도 있고 언제나 즐거웠거든요. 지금은 책임감을 가지고 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자리에 있다 보니 어깨가 무겁죠.”
 
  공통점도 있다. 어떤 유미든, 항상 꿈을 꿨다는 거다. ‘화가의 꿈’이다. 학창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미술에 소질이 있구나.’ 중학생 당시 미술 교사였던 오상암 선생의 말이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됐다. 이왕이면 큰 나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이었다.
 
 
  세 딸의 싱글 맘
 
  부족하진 않았지만, 유학을 갈 정도로 넉넉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처럼 따르던 분의 지인으로부터 선 자리를 제안받았다. 스물넷의 재미교포 미군. 결혼하면 ‘기회의 땅’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혼남에다, 네 살짜리 딸까지 있는 남자였다. 애 딸린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다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막내딸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겨우 스무 살. 대범했다.
 
  ― 그렇게 도미(渡美)한 거군요. 미술 유학은 유럽으로 많이 가는데 왜 미국이었습니까.
 
  “지금도 많은 분이 더 나은 사회, 교육환경을 찾아 미국으로 오는데요, 1970년대 바깥의 시선에서 본 미국은 얼마나 선진국이었습니까.(웃음) 그야말로 기회와 자유의 땅이었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미국을 생각한 거예요.”
 
  살림은 이민 가방 세 개가 전부. 처음 정착한 곳은 텍사스주 오스틴의 시골 마을이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동네. 이게 미국이야?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어컨이 없어 찜통 같았던 방 두 칸짜리 작은 집. 그곳에서 전 남편의 성을 받아 ‘김유미’로 살았다. 전처소생의 딸에다, 딸 둘을 더 낳았다. 언젠가부터 남편은 술과 도박에 빠졌다. 결혼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20대, 싱글 맘이 됐다. 아이들 밥값을 벌려면 하루 십수 시간씩 일해야 했다. 서빙도 하고 계산원(캐셔)도 했다.
 
  ― 그 시절을 돌아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면요.
 
  “정말 힘들었을 때는 수중에 단 2달러가 없었어요. 아이들 밥을 먹여야 하는데요. 그걸 꾸러 다녔던 기억, 가게에서 일하며 장사를 돕겠다고 서툰 영어로 어찌저찌 했던 기억…. 여러 장면이 스틸 컷처럼 스칩니다.”
 
  ― 지난날을 되짚으면 어떤 감정이 듭니까.
 
  “말로 다 할 수 없이 힘든 시기였어요. 한국의 가족들이 보고 싶어 울기도 많이 울었죠. 이게 정말 현실인가, 하고 되물을 정도로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손을 놔버리면 아이들은 어떡해요. 아플 시간도 없었어요.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돌아보면 다 귀중한 추억이구나, 싶습니다. 그 순간들, 고비를 잘 견뎠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거니까요.”
 
  ― 버티고, 견뎌야만 했던 나날이었군요. 그럴 수 있게 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아이들은 제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딸들도 그에 부응하듯 기특하게 자라줬어요. 어릴 때부터 성숙해 저를 많이 도와줬지요. 또한 ‘언젠가는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힘이 됐어요. 지친 몸을 잠자리에 뉘면서도 항상 화가가 될 거라 다짐했어요.”
 
  아이들은 그야말로 복덩이였다. 첫째 딸 킴은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다. 엄마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다, 그 방식대로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친딸 이상의 깊은 정이 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미대, 남편과의 만남
 
지난 2004년 5월 결혼식 당시. 호건 주지사는 유미 여사가 홀로 아이 셋을 키운 것에 감동했다고 한다. 사진=유미 호건 제공
  둘째 제이미는 학원 한 번 안 가고도 미시간대학교에 입학해 장학금을 받아 왔다. 학교 수업과 레스토랑, 모자가게, 베이비시터, 잔디 깎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집안 살림에 보탰다. 첫째 딸은 회계사, 둘째 딸은 검사가 됐다. 막내 쥴리도 장학금을 받고 미시간대학교를 졸업했다. 어느 정도 컸을 때, 딸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엄마 차례예요. 그동안 우리에게 모든 걸 바쳤잖아요. 이제 열정과 꿈을 따르세요.”
 
  ― 당시 어린 딸들에게 습관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면요.
 
  “‘감사하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요.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말라고도 했어요. 그랬더니 막내딸이 초등학생 때 ‘엄마 우린 참 행운아지’라며 그 이유로 당시 자신이 가진 사소한 것들에 대해 늘어놓더라고요.”
 
  그 무렵 지인의 소개로 가게 운영을 하며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이후 메릴랜드로 이주해 ‘메릴랜드예술 디자인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뒤 메릴랜드예술대학교(MICA)에 입학했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일찍 일어났다. 매일 일등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교수에게 인정도 받았다. ‘그룹전에 꼭 참여하라’고 했다. 그 그룹전에서 남편 래리 호건을 만났다. 꿈을 잃지 않은 덕에 찾아온 선물 같은 인연이었다.
 
  “교수님의 권유로 2000년, 메릴랜드 하워드 카운티의 한 갤러리에서 미국 작가들과 그룹전을 했어요. 웬 미국인이 다가오더니 명함을 주더군요. 부동산 사업가인데, 근처에 부동산을 보러 왔다가 갤러리에 들른 거였어요. 딸들에게 얘기했더니 ‘만나보라’며 성화였죠.”
 
  ― 그 전까지는 재혼 생각이 없었습니까.
 
  “가끔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돈 벌랴 공부하랴 산적한 일을 해치우다 보니 외로움조차 사치로 느껴졌어요. 중매가 들어와도 모두 사양했어요. 아이들에게 나의 결혼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불투명했고, 너무 이른 나이에 쓴맛을 봐서 결혼에 환상도 없었죠.”
 
  래리 호건은 당시 44세 노총각(?)이었고, 유미 여사는 41세였다. 첫 데이트 때 망설임 없이 “장성한 세 딸을 둔 엄마”라고 소개했다. 래리 호건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재혼도 미루며 혼자 세 아이를 키워낸 것에 크게 감동했다. 4년 연애 끝인 2004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전통 폐백도 했다. 시아버지인 로렌스 호건은 절을 받고 난 후 밤과 대추를 던지며 “아들을 낳으라”고 했다. 래리 호건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예쁜 세 딸이 있는데 누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답했다. 시아버지는 2017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미 호건을 ‘늦게 얻은 딸’처럼 여겼다고 한다.
 
 
  243년 동안 재선 공화당 주지사는 단 두 명
 
주지사 취임 축하 갈라파티에 참석하는 호건 부부. 사진=유미 호건 제공
  메릴랜드주는 대표적인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민주당 텃밭)’다. 공화당 후보가 당선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래리 호건은 이 난관을 뚫고 지난 2015년 취임했다. 주내 5.5%를 차지하는 아시아계 지지도가 한몫했다. 한인 사회에서는 첫 선거 자금으로 7800달러(약 1000만원)를 모아주기도 했다. ‘한국인 부인 역할이 컸다’는 얘기가 나올 만했다. 래리 호건 역시 누누이 “아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작 그는 공(功)을 남편에게로 돌렸다.
 
  ― 당선 비결을 뭐라 봅니까.
 
  “남편은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에요. 당파를 떠나서 주민들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더니 사람들이 믿어준 거라고 생각해요. 진심이 통한 거죠.”
 
  호건 주지사의 부친 로렌스 호건은 FBI 출신으로 연방하원의원을 세 번 지냈다. 어릴 때부터 정치 환경에 익숙했다. 아홉 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백악관을 들락날락할 정도였다. 보고, 듣고 자랐지만 정치를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사람들은 메릴랜드를 변화시킬 새 지도자를 기다린다’고 하더군요. 출마 의지를 비친 거예요. 주지사가 왜 하고 싶은지, 되면 뭘 할 건지 물었더니 지역경쟁력을 향상시킬 구체적인 방안을 얘기했습니다. 확고해 보였고, 이미 결심이 선 것 같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죠.”
 
당선 소감 발표 후 선서하는 래리 호건 미 메릴랜드 주지사. 사진=유미 호건 제공
  선거를 1년 앞둔 시점이었다. 말마따나 이름 없는 ‘복덕방업자’인데다, 공화당 후보였으니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유미 여사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용기를 줬다. 그러고 함께 발로 뛰었다. 만나는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했고 사소한 얘기에도 귀 기울였다. 선거 캠페인 광고를 디자인하고 지역 언론에 배포했다. 바닥이었던 지지율이 꿈틀거렸다. 호건 주지사의 체중이 14~18kg 줄고, 유미 여사의 목소리가 다 쉬고 난 후, 당선됐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청천벽력이 날아들었다. 남편의 혈액암 3기 판정. 취임 첫해인 2015년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병간호는 고됐다.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극진히 돌봤다. 그러면서 주지사 연설도 대신 다녔다. 무엇보다 남편을 잃을까 겁났다. 병상 앞에서는 애써 웃었지만, 집으로 와서는 옷장 안에 들어가 울었다. 행여 경호원이 들을까 소리조차 못 냈다. 6개월 후. 기적은 또 찾아왔다. 회복했고, 이후 5년간 재발하지 않았다. 지난해 완치 판정을 받았다.
 
  당시 메릴랜드 내에서는 ‘호건 스트롱(Hogan Strong)’이라는 캠페인까지 일었다. 그의 완치를 바라는 응원이 하나의 사회현상이 됐다. 곧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사람들은 이 슬로건을 적은 팔찌와 티셔츠를 제작해 입었다.
 
  여세를 몰아 2018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해 선거는 공화당의 전국적 대패였다. 호건은 10%포인트 이상의 격차를 냈다. 메릴랜드주에서 공화당 후보가 재선한 건 243년 동안 두 번뿐이다. 한때 직무지지율은 80%를 육박했다. 2020년 ‘(50명 중) 가장 인기 있는 주지사’로 꼽히기도 했다. 스타 정치인이 됐다.
 
 
  어머니 같은 마음, 한국형 내조
 
한국에서 진단 키트를 들여오는 과정은 ‘작전’을 방불케 했다. 키트가 도착하던 날 직접 공항에 마중 나간 호건 부부. 사진=유미 호건 제공
  래리 호건의 주요 업적으로는 경제성장이 꼽힌다. 무엇보다 소기업 활성화에 주력했다. ‘비즈니스에 개방된 메릴랜드’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불필요한 규제들은 완화, 폐지했다.
 
  유미 여사는 남편의 ‘빈 곳’을 조용히 채워나갔다. 이민자, 싱글 맘, 홈리스,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찾아다녔고, 손을 잡아줬다. 본격적인 기지는 코로나19 때 발휘됐다. 2020년 3월. 메릴랜드주에 첫 확진자가 발생했다. 사흘 만에 그 수는 급속히 늘었다. 진단 키트가 필요한데, 미국 내에는 부족했다. 연방정부와의 조율도 녹록지 않았다. 유미 여사는 한국의 진단 키트를 살펴보기로 했다. 메릴랜드주 코로나19 대응팀과 정보를 공유하는 동시에 한국 정부 핵심 인사와 연락을 타진했다. 그 과정은 ‘작전’을 방불케 했다. 그 결과 22일 만인 3월 말 전세기를 띄워 50만 회 검사 분량의 한국산 진단 키트를 공수할 수 있었다. 래리 호건은 “아내가 이번 작전의 챔피언”이라고 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호건 주지사의 결단력도 빛을 발했다. 첫 감염자가 나오자 빠르게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늑장 대응으로 질타받던 트럼프 전 대통령과는 달랐다. 휴교령, 식당·술집·영화관 등 폐쇄, 50명 이상 모임 금지 등의 조치를 잇달아 시행했다. 자택 대피령을 내리며 “더는 집에 머물라고 요청하거나 권고하지 않는다. 이제부턴 명령이다”라고 경고한 뒤, 고의로 위반하는 사람은 1년 이하 징역형이나 5000달러 이하 벌금형에 처하겠다고도 했다. 그때 《뉴욕타임스》는 “그의 발 빠른 조치에 메릴랜드주의 일부 민주당원마저도 지지 의사를 표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당시 민주당 지지자의 70%가 “그의 초당(超黨)적 주정(州政) 운영을 지지한다”고 했다.
 

  ― 코로나19 발발 초기 적극적인 대처가 많이 회자됐죠. 메릴랜드주는 일상을 어느 정도 회복했나요.
 
  “메릴랜드주는 현재 50개 주 중 백신 접종률이 가장 높은 주 중 하나예요. 주민들께서 주정부의 보건 전문가들의 노력을 이해하고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라준 덕분이죠. 학생들도 모두 등교하고 있고 자영업자들도 많이 회복한 상태입니다. 정말 다행이죠.”
 
  ― 팬데믹 당시 미 전역에 퍼진 아시아인 혐오 범죄를 진정시키는데도 일조했죠.
 
  “중국발 바이러스라는 이유에서 모든 아시아인이 ‘묻지 마 폭행’ 대상이 됐고, 강도가 점점 세졌죠. 바이러스보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더 무섭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지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언론사에 기고문을 보내 ‘인종 차별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며 개선을 위한 정계의 행동을 촉구했어요. 그게 촉매가 되어 시민들은 혐오 반대 운동을 펼쳤고요.”
 
 
  코리아타운, 태권도의 날 지정
 
지난 2018년 8월 6·25 참전용사 환영식에서 참전용사들과 함께한 유미 호건. 사진=조선DB
  그는 “메릴랜드가 한 가정이라면 나는 가족들을 돌봐야 하는 어머니”라면서 “가족 중 그 누구도 아파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영락없는 한국인 정서다. 그 정서는 곳곳에 스몄다. 매년 관저에서는 ‘바이 로컬 쿡아웃(Buy local cookout)’을 연다. 지역 농수산물로 만든 음식을 홍보하는 행사다. 이를 통해 매해 한식을 직접 만들어 알린다. 불고기도 만들고, 김치 버거도 만들었다. 관저 텃밭에서는 오이, 고추, 밭 미나리, 깻잎, 부추를 직접 재배한다. 해마다 김장도 한다. 그는 “메릴랜드와 한국은 닮은 점이 많다”면서 “산, 들, 바다, 농사짓는 밭이 골고루 많이 있고, 사계절도 뚜렷하다”고 했다.
 
  1870년에 세워진 관저는 주도(州都)인 아나폴리스에 있다. 50개 주 관저 가운데 두 번째로 크다. 방이 54개나 된다. 요리사 세 명이 교대로 근무하며 삼시 세끼를 차려준다. 빨래, 청소를 담당하는 직원도 따로 있다. 극진한 대접이 아직도 익숙지 않아 손수 팔을 걷는 일이 많다. 관저에서 34년을 일한 수석 요리사 멧포드 캔비는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에서 주방으로 와 요리하거나 설거지한 건 유미가 처음”이라고 했다. 관저에는 아예 김치냉장고도 들여놨다.
 
  지난 10월에는 한인 상권 밀집 지역에 코리아타운도 만들었다. 메릴랜드주 497만명 인구 중 한국계 미국인은 1만2000명이다. 앞서 2016년에는 이 일대 도로에 ‘한국로(Korean Way)’라는 이름도 달았다. 그 밖에도 태권도의 날 지정,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기념식 마련도 했다. 지난해 한국 정부로부터 동백장을 받았다.
 
  ― 덕분에 메릴랜드주가 친한(親韓) 지역이 됐군요. 한국인 입장에서는 반갑지만 다른 이민자들은 소외감이 들 것 같기도 한데요.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많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죠. 뿌리가 그런지라 한인과 한인 사회에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행여 소외감을 줄까, 의식적으로 항상 노력을 합니다. 한인 외에도 유대인, 히스패닉 커뮤니티, 그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커뮤니티(호건 부부는 기독교 신자다)까지 포용하고 찾아뵙습니다. 중요한 건 메릴랜드도, 미국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다문화 사회라는 점이에요. 앞으로는 더더욱 그렇게 될 거고요.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게 사회 전반에도 도움이 되고, 반대로 한국인들도 다른 커뮤니티와 연결해 서로 배우고 이해하는 게 우리 앞날의 안정과 평화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영부인의 가장 큰 덕목
 
유미 호건 여사는 한국식 내조로 유명하다. 지난 2015년에는 주지사 관저 주방에 김치냉장고를 들여놨다. 사진=조선DB
  마냥 그립고 아름다운 고국. 막상 그 땅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은 사정이 조금 다를 수 있다.
 
  ― 메릴랜드주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협치(協治)한다지만, 한국 정치권은 분열이 심각합니다. 작은 땅덩이에 지역감정도 극복해야 할 문제고요. 사회 전반적으로 갈등이 심화된 시기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서로를 이해하는 게 참 중요해요. 우리는 각자 다른 색을 지니고 태어났으니까요. 정치든 무엇이든 결국 사람이 하는 일 아니겠어요. 나랑 다른 사람, 가끔은 나와 다투는 사람도 품어주고 포용해야 하겠죠.”
 
  실제로 ‘호건 패밀리’ 내에도 다양성이 존재한다. 미국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 나아가 둘째 딸과 사위는 공화당원, 큰딸 내외와 셋째 딸 내외는 모두 민주당원이라고 한다. 서로에게 정치색을 강요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 한국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요. 메릴랜드주와의 협력에서 나아가 한미 관계 증진까지 끌어내기 위해서 어떤 지도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봅니까.
 
  “제가 정치인이 아니다 보니 딱 떨어지는 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한인 동포와 메릴랜드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고, 미국이라는 사회와 나라에 대한 이해를 잘 하는 분이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평화롭고 서로를 이해하며 잘 지내는 게 최우선이라는 것을 알아주는 인물이면 좋겠고요.”
 
  ― 퍼스트레이디의 가장 큰 덕목은 뭐라 생각합니까. 한국의 예비 영부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얘기를 하자면요.
 
  “제가 예비 영부인께 귀감을 드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겸손한 처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스스로 덕목이라고 느낀 것을 말씀드리자면, 아무래도 ‘진심’이에요, 그리고 항상 어려운 분들을 살피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 최대의 고비, ‘어둠 뒤의 빛’
 
  한국 나이로 50세가 되던 지난 2008년. 비로소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아메리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 과정 동안 조교로 경험을 쌓았고 석사 학위 취득 후 모교인 메릴랜드예술대학교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어려워도 포기하지 마라.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미술치료 프로그램 ‘유미 케어스’를 운영 중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소아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돕고 있다. 메릴랜드대학 아동 병원에서 이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도 도입을 논의 중이다.
 
  ― 흔히 예술가는 내면세계와의 소통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주민들 만나고 때로는 공개석상에서 연설하는 일이 버겁지 않습니까. 그만두고 싶다고 그럴 수 있는 자리도 아닌데요.
 
  “물론 처음에는 대중에게 나서는 게 익숙지는 않았어요. 게다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연설을 할 때도 있었고 미국 풍습도 고려해야 했으니, 어려웠죠. 7년째 되니 한결 수월해졌어요. ‘내가 미국 사람도 아닌데, 좀 틀리면 어때’ 하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까요.”
 
  ― ‘내 인생 최대의 위기’를 소재로 수묵화를 그린다면 그림의 제목은 뭐로 붙이겠습니까.
 
  “남편의 암 투병 때가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였는데요, 제목은 뭐랄까요… ‘어둠 뒤의 빛’ 정도로 하면 좋지 않을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어둠이 드리운 것처럼 절망적이고 슬펐지만, 결국 이겨내서 빛을 봤고, 오히려 그 경험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됐고, 새 삶을 얻은 후 남편뿐만 아니라 저 역시 주변의 어려운 이들과 메릴랜드 주민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면서 ‘빛’을 나눠주고자 하니까요.”
 
  ― 지금도 많은 이가 이민을 꿈꾸고, 계획합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이 모두에게 실현되지는 않겠죠.
 
  “예비 이민자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게 미국이든, 세계 어디가 됐든 나의 행복, 희망, 꿈을 찾을 수 있는지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길 바란다고요. 어디에 사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앞으로 닥칠 여러 역경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마음이 있다면, 언제든 도전할 수 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 이민 1세대로 살아남는 것은 여전히 쉽지만은 않아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회와 꿈의 땅인 건 맞다고 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저도 오늘날까지 굽이굽이 인생길을 잘 헤쳐 나왔잖아요. 여러분 모두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보다 더 잘할 거예요.”
 
 
  차기 대통령 출마 가능성은?
 
지난 2015년 관저에서 한국·중국·베트남계 200여 명과 음력 설 파티를 연 자리에서 아시아계 출신 정부 관료들과. 사진=조선DB
  메릴랜드주는 최대 재선까지만 허용한다. 내년 말이면 관저를 떠난다. 새로운 보금자리도 이미 마련해뒀다. 관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동네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조심스레 호건의 차기 대선(2024년) 출마 가능성도 제기한다. 만일 당선될 경우 첫 한국계 백악관 안주인이 탄생한다.
 
  ― 너무 김칫국을 마시는 걸까요.
 
  “남편에게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습니다. 우선 메릴랜드 주정에 집중하라고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잘 마무리하고 그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 거죠. 이후 어떤 일이 주어지든 열심히 해야겠죠.”
 
  ― ‘꿈’ 얘기를 많이 했는데요, 미국 전체의 영부인이 되겠다는 꿈은 꿔본 적 없습니까.
 
  “제가 뭐라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계획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요. 다만 지금의 제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면서 하루하루 알차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가는 게 전부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임기 후에는 우선 그동안 바빠서 챙기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어요. 엄마, 할머니 노릇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요. 또 미술치료 프로그램을 주 전역으로 확대해 질병, 가난, 가정폭력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혹자는 유미 호건을 더러 ‘신데렐라’라고 한다. 몰라서 하는 소리다. ‘미국 최초의 한인 퍼스트레이디이자, 메릴랜드 역사상 첫 아시아계 퍼스트레이디.’ 이는 험준한 생의 여정 가운데 ‘덤’으로 얻은 타이틀일 뿐이다. 그는 ‘개척자’에 더 가깝다. 유미 여사는 “이 수식어가 지난 7년간 어깨를 무겁게도 했지만 동시에 더없는 영광이었다”고 했다.
 
  ― 결국 아메리칸 드림은 이룬 겁니까.
 
  “미국에서 공부해 화가가 됐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아티스트로서 교육자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습니다. 딸들도 잘 뒷바라지해 결국 그들도 각자의 꿈을 실현했고요. 퍼스트레이디로서 아메리칸 드림은 조금 달라요. 이민자로 이 땅에 와보니, 저마다 사정은 다양하지만 함께 공유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 손자, 손녀들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더군요.”
 
  얼마 전 관저 마당에는 무궁화와 동백꽃을 심었다. 한국의 딸이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다. 어쩐지 모든 게 한 편의 영화 같았다.
 
  ― 만일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든다면 주인공역에는 누가 어울릴까요.
 
  “하하. 글쎄요. 이제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연령별로 다른 배우들이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독자분들께 반대로 질문을 드리고 싶네요. 아무래도 체격이 저처럼 작아야 할 것 같아요. 살면서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평을 많이 들었거든요. 호호.”⊙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협 어부바 콘텐츠 공모전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