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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피아니스트 한동일의 歸鄕

“人生은 긴 나그네 여행… 음악은 휴먼 스토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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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함흥에서 태어나… 소련군이 피아노 빼앗자 越南
⊙ 6·25 당시 해군 ‘정훈 어린이 음악대’ 활동… 美 제5공군 앤더슨 사령관 후원으로 渡美
⊙ 1956년 4월 28일 美 카네기홀 데뷔… 인디애나大·보스턴大 音大 교수로 재직
⊙ 2019년 영구 귀국해 국적 회복… “지금도 배우고 있어요. 내년 대선이 기대돼요”

韓東一
1941년생. 배재중 재학 당시 도미 유학. 줄리아드 음악대학원 졸업 / 1965년 레벤트리트 국제콩쿠르 우승 / 미국 인디애나대학·일리노이주립대·노스텍사스대학·보스턴대학 교수, 울산대·순천대 교수 역임 / 제7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심사위원회 위원장
피아니스트 한동일. 그의 모습 뒤로 홍난파 동상이 보인다.
  《조선일보》 1954년 6월3일자 2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 천재소년이라고 불리워지는 피아니스트 한동일(韓東一)군이 6월 1일 도미 유학(渡美 留學)의 장도에 올랐다. 1일 하오 0시12분 여의도 비행장에서는 특별장학생으로 미국 뉴욕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유학 가는 금년 열네살 난 소년 피아니스트 한동일군이 아버지 한인환(韓麟桓)씨를 비롯한 가족과 음악인의 환송을 받아가며 연달아 일어나는 보도 사진반의 “샷다” 소리도 요란스런 가운데…(하략)〉
 
  피아니스트 한동일(韓東一·81)은 그렇게 14세 무렵 모국(母國)을 떠났다. 그러고 눈 깜빡할 사이 세월이 무저갱 속으로 빨려 들었다.
 
  3년 전인 2019년 그는 ‘어머니 나라’로 영구 귀국했다. 잃어버린 국적도 되찾았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첫 투표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요즘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를 열심히 본다. 국민의힘 윤석열·최재형 대선 후보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지난 7월 7일과 26일, 우리는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홍난파(洪蘭坡·1897~1941) 선생 가옥이 보이는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미소년이던 그는 어느덧 노(老)신사가 되었다. 만면의 웃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그 재미로 살아요. 조금이라도 지혜를 느껴야 하거든요. 내년 대선에서 처음 선거도 한단 말이에요. 지금은 그냥 지켜보는데 내년에 판단이 서겠지요. 건반에 손을 얹고 베토벤 소나타와 브람스를 연주하면 답이 나옵니다.”
 
  ― 홍파동에 정착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65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복덕방(참 오랜만에 듣는 표현이었다!)을 찾아갔어요. 옛날 6·25 당시 이 부근에 살았거든요. 장독대가 있고 담장 너머로 부엌에서 김치 담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집을 구해달라고 했죠. 너무나 좋은 집주인을 만나 방 두 개를 빌려 살아요.”
 
 
  ‘어머니의 나라’로 영구 귀국한 이유
 
1954년 5월 29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고별 연주회를 가진 한동일. 그는 그해 6월 1일 미국으로 떠났다.
  ― 장독대 있는 집이 별로 없을 텐데요.
 
  “주변이 상전벽해(桑田碧海)해서 옛집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가장 비슷한 집을 찾았어요.
 
  6·25 때 저는 열한 살이었어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독립문과 서대문 사이를 오가며 초콜릿 장사를 했어요. (인민군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숨어 다녀야 하셨지요. 그런 추억을 더듬고 싶었어요.
 
  저는 1954년 6월 1일 혼자 미국으로 떠났죠. 긴 나그네의 여행이었어요, 익사이팅한 삶이었으나 외로운 인생을 살았어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2남1녀를 낳았지만 그냥 혼자 걸어가는 기분이었어요.
 
  이제 한국 나이로 여든하나입니다. 그사이 세월이 많이 흘렀고 볼 것도 다 봤어요. 1960년대에 이미 27개국에서 연주하며 여행했으니까요. 하하하. 더 여한이 없어요.”
 
《조선일보》 1956년 5월11일자 ‘대인기의 한동일군’의 기사에 실린 사진. 그해 4월 28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한동일. 그는 열여섯 살 때인 1956년 4월 28일 미국 카네기홀에서 데뷔했다. 뉴욕 필과 협연하며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프란치스카 여사가 축전과 장미를 보냈다. 그해 5월1일자 《조선일보》 1면 하단 ‘팔면봉’은 천재 소년의 데뷔를 한 줄로 축하했다.
 
  〈카네기홀의 소년 피아니스트 한동일군, 그 영예·국가·민족의 이름을 빛내다. 더욱 건투있기를!〉
 
  그는 1962년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파블로 카살스(Pablo Casals·1876~ 1973) 등과 함께 백악관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1965년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1990)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레벤트리트(Leventritt)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해 ‘한국인 최초 해외 콩쿠르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카살스가 쇼팽의 발라드(Chopin: Ballade No.1 In G Minor, Op.23)를 연주하던 ‘열아홉의 한동일’을 눈물을 흘리며 끌어안고서 “레어 탤런트(A rare talent·드문 인재)”라고 말한 기억도 잊을 수 없다.
 
  또 수많은 명(名)지휘자(버나드 아이팅크, 허버트 블롬슈테트, 데이비드 진먼 등)와 협연했으며 쇼팽과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10여장을 녹음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 일리노이주립대, 노스텍사스대학, 보스턴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
 
 
  6·25전쟁 당시 국방부 해군 산하 ‘정훈 어린이 음악대’에서 활동
 
《조선일보》 1954년 6월3일자 2면에 실린 한동일의 미국 유학 기사. 기사 제목은 ‘피아니스트 한동일군, 앤더슨 장군과 함께 장도에’.
  기자는 피아니스트 안희숙(安熙淑)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두 권의 책 《인생의 건반을 두드리다》(2019)와 《안희숙, 석영 딸의 못다한 이야기》(2021)를 그에게 건넸다.
 
  한동일의 두 눈이 잉어 눈처럼 커졌다. 책에는 그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한 안병원(安丙元·1926~2015)의 동생이자 그 곡을 작사한 안석주(安碩柱·1901~1950)의 딸이다.
 
  안병원은 6·25전쟁 당시 국방부 해군 산하 ‘정훈 어린이 음악대’를 조직해 전쟁의 상흔에 지친 이들을 위로했는데 그 음악단원 중 한 사람이 한동일이다. 당시 이화여대 음대생이던 안희숙 교수는 어린이 음악대의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다음은 《인생의 건반을 두드리다》의 한 단락이다.
 
  〈… ‘어린이 음악대’ 단원들을 잠시 소개할까 한다. 훗날 세계적인 프리마돈나이자 이화여대 성악 교수가 된 이규도, 13살 때 미국으로 이주해 훗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한 한동일, 이대 작곡과 교수가 된 이여진, 스웨덴으로 건너가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한 이희춘, ‘동심초’ 등의 가곡을 작곡한 김성태 교수의 장녀이자 훗날 이대 플루트 교수가 된 김귀옥, 서울시향 플루트 단원으로 활약하다가 남편 박인수 교수를 따라 도미해 오페라 디바로 활약한 내 동생 안희복 등 많은 이들이 훗날 음악을 평생 업으로 삼았다.
 
  어린 단원들은 부산 서대신동 시장 맞은편의 ‘기다란 단칸방’에서 부대끼며 지냈다. 애교 많고 예쁘며 입담이 좋았던 이규도 어린이가 얘기꽃을 피우면 모두들 재미있어 깔깔깔 웃음꽃을 피웠다. 그 방에서 어린이들이 장난을 치다 팔이 부러지기도 하고 소소하게 싸우기도 하는 등 희비가 교차하는 쌍곡선을 그렸으나 즐거운 일이 더 많았다. 일선에선 국군 UN군이 인민군 중공군과 매일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생사를 넘나들 때 ‘어린이 음악대’ 역시 애국을 했다고 할 수 있다.…〉(23~24쪽)
 
 
  “우리의 소원은 독립”
 
  이 책을 손에 든 한동일은 “오! 원더풀”을 반복했다.
 
  “어떻게 안희숙 선생님을 아세요? 놀랍습니다. 안부 좀 전해주세요. 우리 단원들은 기악 독주도 하고 합창, 독창, 무용도 했어요. (이)희춘과 피아노, 바이올린을 함께 연주했고 때로는 피아노 독주도 했죠.
 
  그러고 보니 안 선생님의 대학 졸업 연주회 때가 생각납니다. 베버의 콘체르트슈튀크(Konzertstu¨ck, in F minor for Piano and Orchestra, Op.79)를 연주했지요.”
 
  ―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
 
  “잊을 수 없지요. 그녀(안희숙)는 롱 가운을 입고 머리도 아주 기특하게… 예쁘게 단장하고서 (무대에) 나왔지요.”
 
  그러더니 큰 목소리로 안석주·병원 작사·작곡의 ‘우리의 소원은 독립’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 이 나라 살리는 독립, 독립이여 오라~.”
 
  한동일은 ‘독립’이란 단어를 여러 번 곱씹어 말하더니 꼭꼭 묻어둔 옛 추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땐 ‘통일’이 아니었어요. ‘독립’이었죠. 독립….”
 
  1941년 저는 함흥에서 태어났어요. 함흥시 일출동 82번지. 할아버지의 과수원이 3만 평(9만9173㎡)이 넘었어요. 하루는 소련군이 들이닥쳐 집안 가재도구를 빼앗아갔어요. 그때 피아노도 빼앗겼어요.
 
  아버지는 군인들에게 호소했어요. ‘우리 아들이 피아노를 치니 이것만은 가져가지 말라’고요. 빈털터리가 된 우리는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어요. 함흥서 기차 타고 원산까지 내려갔어요. 내려가면서 어둠 속을 지났죠. 마을에 호롱불 하나 보이지 않았어요. 원산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동두천으로, 동두천에서 마차를 빌려 임진강까지 갔어요. 도강(渡江)을 막으려는 소련 초병(哨兵)에게 건빵을 줘서 건널 수 있었어요. 임진강 철교 저 아래 일렁이던 물결이 무서웠어요.
 
  피아노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강을 건너지 않았고, 도망치듯 피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 피아노는 언제부터 쳤나요.
 
  “아버지는 연희전문 상과를 나오시고 어머니는 이화여전을 나오셨는데 김자경(金慈璟·1917~1999) 선생과 동갑이셨어요. 음악을 너무 좋아하신 아버지는 함흥 중앙교회에서 교회 찬양대를 지휘하셨는데 찬양대원들이 늘 우리집에 왔어요. 저랑 형(한동휘)은 (찬양대) 앞에서 피아노 치는 사람만 쳐다봤어요.
 
  제가 첫돌이 지나, 그러니까 열석 달 될 무렵, 동요 ‘나비야’를 불렀습니다.”
 
  ― 그걸 어떻게 기억하나요.
 
  “글쎄, 기억나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나비야, 나비야~”
 
1954년 1월 일본 미 공군기지에서 연주하기 전에 만난 메릴린 먼로.
  카페에서 사람들이 듣든 말든 그는 한껏 동요를 불렀다.
 
  “세 살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피아노 때문에 서울로 피란을 왔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 고생… 고생하시며 제 뒷바라지를 하였는데 그래도 행복하게 사셨어요.
 
  집에 피아노가 없어 마포에서 서대문으로 가 전철을 갈아타고 다시 종로3가에서 김성복(金聲福·이화여대 피아노과 교수 역임) 선생님에게 1시간 교습을 받고 여기서 연습, 저기서 연습을 했지요.”
 
  아버지 한인환은 서울시향의 전신인 서울관현악단의 초대 팀파니 주자였다. 1971년 정년을 마칠 때까지 서울시향의 팀파니스트로 활약했다고 한다.
 
  “그 무렵 미(美) 제5공군사령부 강당(당시 서울 혜화동)에 놓인 피아노로 매일 2시간씩 연습했지요. 어느 군인이 다가와 ‘다음 주 코리안 VIP를 위한 쇼가 있는데 한 곡 쳐달라’는 겁니다. 그때가 1953년 9월 말 아니면 10월 1일이었을 겁니다.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Rondo Capriccioso Op.14)를 쳤는데 끝나자마자 앤더슨 사령관(Samuel E. Anderson·1905~1982)이 통역을 데리고 왔어요. 아버지에게 자신이 스폰서가 되어 저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한 겁니다.
 
  이후 앤더슨 장군 주선으로 당시 주한 미군기지 24곳을 돌며 모금 연주회를 했어요. 군인들이 5전도 내놓고 10전도 내놓고…, 어떤 장교는 1달러, 10달러를 내놓았죠. 일본 내 미군기지까지 순회 연주회를 가져 모두 4350달러를 모았습니다. 참, 일본 홋카이도에서 연주할 때 미국 여배우 메릴린 먼로도 만났어요.
 
  게다가 줄리아드가 제 연주를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장학금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줄리아드) 예비학교부터 시작(1954년)해 1968년 석사 학위 받을 때까지 스칼라십을 받았어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졸업할 때까지 제 성적이 늘 ‘EO’였어요. EO는 요즘으로 치면 A플러스죠. 이츠하크 펄먼(Itzhak Perlman·76)도 어떨 때는 저보다 못 했어요. 하하하.”
 
  EO(Exceptional Outstanding)는 ‘탁월하게 우수하다’는 뜻.
 
  “펄먼은 저보다 어렸는데도 벌써 대단했어요.”
 
  ― 이미 유명했나 봅니다.
 
  “유명하다기보다 ‘그는 그냥 천재(he is just genius)’입니다.”
 
  ― 같은 천재 아닙니까.
 
  “노(No)! 비교할 수 없어요.”
 
  《동아일보》 1956년 4월24일자 4면에 줄리아드 학생인 한동일의 인터뷰가 이렇게 실렸다.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천재라고 생각한대도 상관없어요. 돈이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공부하는 것은 대가들의 작품을 더 잘 연주하기 위해서입니다.”
 
 
  첫 레슨의 충격과 레빈 선생님
 
이승만 대통령과 한동일군. 한동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배려로 해외에 나가 좋은 교육을 배울 수 있었고 병역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스승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줄리아드의 로지나 레빈(Rosina Lhe´vinne·1880~1976) 선생님은 제게 엄마 같은 분이셨어요. 뉴욕 필이 주최하는 ‘영 피플 콘테스트’에 선발되면 영화관에 데려다주신댔는데 정말 뽑히니까 시네라마(cinerama)라는 특별한 영화관에 데려갔어요.
 
  그분에게 처음 레슨받았을 때가 잊히지 않아요. 저는 조금도 안 틀리게, 그저 완벽하게 치려고 했어요. 쇼팽 곡인데 아주 엄격하게 쳤어요.
 
  선생님은 다정하게 ‘음 하나 하나를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부모가 자식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이듯 음악의 톤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죠. 또 ‘피아노를,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휴먼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라 하셨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동안 완벽한 기계가 되기 원했는지 몰라요. 음악은 그게 아니었죠.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테크닉을 잘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오, 노! 피아노는 뭉클하게 만들고 (서로가) 통해야 하거든요.”
 

  ― 좋은 스승을 만나 금방 깨우쳤나 봅니다.
 
  “제가 열두 살일 때 밴 클라이번(Van Cliburn·1934~2013년·당시 19세), 존 브라우닝(John Browning·1933~2003년·당시 21세) 같은 상급생 형들이 있었기에 그분 연주를 듣는 것도 또 다른 배움이었어요.”
 
  밴 클라이번은 1958년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우승자이고, 존 브라우닝은 1955년 레벤트리트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한동일은 1965년 레벤트리트 우승자다.
 
  ― 어린 시절부터 주위 기대가 컸을 것 같습니다. 중압감 역시….
 
  “다른 사람이 천재라고 불렀고, 전 그냥….
 
  다른 점이 있었다면 미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겠죠.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시작해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많은 사랑을 선생님에게 받았습니다.
 
  남들 평가는 안 중요합니다. 의미 없어요. 그저 제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것밖에 없어요. 다만 ‘생스 갓(thanks god)’ ‘생스 로드(thanks lord)’….”
 
 
  ‘생스 갓’과 휴먼 릴레이션십
 
1959년 무렵, 피아니스트 파블로 카살스와 한동일. 19살 무렵이다.
  ― 천재와 노력하는 연주가의 차이점은?
 
  “태어나 열석 달 때 ‘나비야’ 음을 기억합니다. 그건 하나님이 주신 것이죠. 왜 내가 그런 재능을 가지게 된지는 알 수 없죠.”
 
  ― 재능이라는 게 무언가요.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 수 없어요. 다만 좋은 제자들을 많이 길렀어요. 대단히 많이. 1969년부터 인디애나대학 교수로 갈 때 28세였어요. 벨기에서 온 43세 박사과정 학생이 있었고, 또 독일의 33세 석사 학생도 있었죠. 저는 ‘휴먼 릴레이션십(Human Relationship·인간관계)’으로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어요.
 
  후배들에게 하는 것은 ‘브라보’라고 외치며 박수 쳐주는 것뿐이죠. ‘나는 이렇게 살았으니 너도…. 노! 그건 거만한 것이에요.”
 
  ― 진짜입니까.
 
  “진짜지요. 그렇게 물어보면 안 되죠.
 
  사람 대(對) 사람으로 주고받는 것이어야 해요. ‘넌 그것도 모른다’는 식이어선 곤란해요. 전 가르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서로 연구하는 거예요. 저도 제자를 통해 주고받아요. 원웨이(one-way·한 방향) 방식이란 있을 수 없어요. ‘감정’이란 게 중요해요.
 
  이렇게 생각해요. 이 우주가 얼마나 크고 넓나요? 저는 작은 개미에 불과하다고요. 때때로 자신이 요것밖에 안 된다고 여겨요. 하나님이 저를 심판하심이 옳아요. 저도 죄 많은 사람이니 죄를 생각하면 얼마나…, 저 자신을 조금이라도 거만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주변에서) 느꼈다면 아임 소 소리(I’m so sorry)….”
 
  그러더니 갑자기 어린 시절 기억을 들추었다.
 
  “아버지가 제 손을 꽉 잡았어요. 전 그 손을 뿌리치고 혼자 무대에 섰다가 내려왔어요. 주위에서 고집이 세다고 그랬어요. 아버지 앞에서 좀 반항적이었어요. 아마도 어린 시절 미국으로 떠나 혼자 살았기에….”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지…”
 
한동일은 1954년 미국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시작해 1968년까지 다녔다. 한국인 최초 해외 콩쿠르 우승자로 기억된다. 미국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동일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지, 저를 끌고 전차 타고 저기 가서 1시간, 여기 가서 1시간 (피아노) 연습을 시키셨죠. 아버지는 저 때문에, 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고 함흥에서 월남을 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얼마나,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그때는) 몰랐어요.”
 
  ― 아셨으니까 지금도 추억하잖아요.
 
  “노! 오래 살다 보니 느꼈어요. 정말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연습을 강요하지 말라고 하셨으나 아버지는 밤 12시까지 연습을 시켰어요. 그러나 당신의 그런 고집이 아니었다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 혹독한 연습 과정을 거쳤는데, 제자들에겐 인간관계(휴먼 릴레이션십)를 강조했어요.
 
  “앞서 말씀드린 줄리아드에서 만난 레빈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분을 통해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죠. 선생님은 저를 카네기홀로 데려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1887~1982), 에밀 길렐스(Emil Gilels·1916~1985),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04~1989) 연주를 보여주셨어요. 거기서 굉장히… 음악의 위대함을, 음악의 무게를 느꼈어요. 그것이 제 음악 수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고민했죠.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건반 위로) 끌어낼까…’.”
 
  ― 휴먼 릴레이션십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의 대답은 은유를 닮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말 같았다.
 
  “저는 욕심이 없어요. 릴레이션십을 통해 제가 반성할 때도 있고, 고치면서 인생에 대해 레슨을 받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해서 배웁니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아우성치지만 저는 심심한 게 없어요.
 
  얼마 전 리어커에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너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를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 할머니가 놀랍게도 ‘감사합니다… 안 받겠습니다’ 했어요. 깜짝 놀랐죠.
 
  그때도 (할머니에게) 배웠어요. 그 힘든 노동, 그런데도 안 받겠다니…. 할머니에게 정말 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도 인생에 대해 배우고 느끼고 있어요.”
 
한동일과 아버지 한인환
 
  피아노와 팀파니를 위한 父子 협주곡
 
2004년 6월 1일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한동일의 도미(渡美) 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뒤쪽에 팀파니를 치고 있는 아버지 한인환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한동일 제공
  《조선일보》 2004년 6월3일자 7면에 특별한 기사가 실렸다. 한동일과 아버지 한인환의 특별한 연주회 기사였다. 당시 보스턴대학 교수던 아들은 62세, 아버지는 91세였다.
 
  〈… 그것은 피아노 협주곡이 아니었다. ‘피아노와 팀파니를 위한’ 협주곡이었다.
  피아니스트 한동일(62)이 서울시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일명 ‘황제’)을 협연하면서 바라본 것은 지휘자의 비트(지시)만이 아니다.
  그는 지휘자 너머, 단원석 맨 뒷줄, 홀로 서서 팀파니를 치는 아버지에게 연신 눈길을 주었다. 까만 나비 넥타이를 맨 아버지 한인환(91)씨는 팀파니채를 힘차게 내리치며 아들의 연주를 기둥처럼 받쳤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고 한동일은 아이처럼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도 성큼 내달아 아들을 포옹했다. 관객은 일제히 기립박수로 벅찬 감격을 함께했다.…〉
 
  소년 한동일은 1954년 6월 1일 피아노를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미국 유학길이었다. 한동일이 미국에 도착해 처음 들은 곡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이었다. 뉴욕 필의 연주였다.
  꼭 50년 뒤인 2004년 6월 1일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바로 그 곡을 연주했다. 도미 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마련한 것이다. 한동일 선생의 말이다.
  “그날의 음악회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단순한 협주곡이 아니라, 피아노와 팀파니를 위한 협주곡, 혹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한 협주곡이었어요.
  제 음악 인생에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위대한지, 할머니 한영신 권사님이 얼마나 큰 믿음을 주셨는지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요.”
 
  “지금도 인생에 대해 배우고 느끼고 있어요”
 
한동일은 한국을 떠난 지 65년 만에 영구 귀국했다. 한국 국적을 다시 회복한 뒤 기뻐하고 있다.
  ― 왜 할머니가 안 받겠다고 했을까요.
 
  “할머니는 화내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무조건, 존경하는 마음밖에 안 생겼어요. 제 나이 여든이지만 계속 인생에 대해 레슨을 받고 있어요.”
 
  ― 참 겸손하세요.
 
  “저는 일찍부터 혼자 살았기에… 모임 같은 것은 피해요. 그러다 보니 지금껏 못 배운 게 많아요. 그러니까 재미있어요. 정치도, 세상 돌아가는 것도 배우고….
 
  지금 ‘로켓 시대’라고 하잖아요. 저는 ‘프로펠러 시대’를 살았으니 요즘 세상을 보면 어메이징합니다. 그래도 그 시대가 참 좋았어요.
 
  아날로그 시절, (클래식) 레코딩을 들을 적마다 ‘원더풀!’을 외쳤어요. 너무 좋았으니까요. 1960년대 안톤 브루크너 교향곡 4번,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을 즐겨 들었죠. 그런데 얼마 전 서대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덜렁덜렁 가는데 프로코피예프 심포니가 들리는 거예요. 아마 운전사님도 클래식 라디오를 좋아하나 봐요.
 
  지옥과 천국 사이 연옥이 있다는데 만일 그런 교향곡을 듣는 이들은 지옥보다 조금은 (연옥 쪽으로) 올라가지 않을까요? 하하하. 아이 러브 마을버스, 라이프 이즈 어메이징!”
 
  ― 음악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슈베르트 소나타, 혹은 브람스의 곡을 연주하면 진심을 느낄 수 있어요. 음악인끼리는 그런 (진심의) 소통이 가능해요. 제자들과 가끔 만나 그런 대화를 나누죠.”
 
  한동일 선생은 보스턴에서 18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뒤 2001년 울산대에 석좌교수로 처음 내한했다. 2005~2007년 울산대 음대 학장을 지냈고 이후 순천대 석좌교수로 4년을 가르쳤다. 또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엘리자베스 음대에서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외국 제자들이 많지만 그의 손을 거쳐 간 한국인 제자도 많다.
 
 
  2001년 이후 울산대·순천대에서 피아노 가르쳐
 
피아니스트 한동일. 한국인이 낳은 해외파 연주자 1세대로 기억된다. 사진=조선일보DB
  그의 계속된 말이다.
 
  “언젠가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1903~91)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그것은 음악이 아니고 인생에 대한 정말, (인생의) 지혜’라고. 아라우 선생님에게 가서 제가 ‘생큐 소 머치,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어요. 이분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통해 인생의 경험, 인생의 느낌, 인생의… 심장을 움직였던 분입니다.
 
  에밀 길렐스 콘서트에서 저는 들었어요. 저, 리스트의 ‘소나타 B 마이너’를 통해 말이죠. 그때 《뉴욕타임스》는 마치 피아노가 불을 뿜었다고 리뷰했어요. 불이 뿜어 나오는 화산…. 그런 데서 배우고 느껴 여기까지 온 겁니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Vladimir Ashkenazy·1937~ )의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를 통해, 길렐스의 브람스 Op.116을 통해 배운 것이 많아요. 그 연주를 듣고 영감을 얻었습니다.”
 
  ― 그래서 다들 음악 유학을 가는군요.
 
  “노! 모든 사람이 자기 인생길을 걸어가며, 혹은 자신의 능력에 감사하면서 배울 기회를 가지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 예컨대 이웃과 친구, 제자들의 인생과 죽음을 함께 경험하며 배우고….
 
  제가 순천대에 가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너 한 사람 한 사람의 라이프가 다 똑같이 중요하다.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1941~ )나 아슈케나지의 인생이 똑같이 중요하듯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종종 사람들의 자살뉴스를 보면… 제일 가슴이 아파요. 그것도 젊은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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