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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천년경영》 펴낸 홍하상 작가

“세계 최장수 일본 기업 金剛組, 창립자는 백제 부여서 건너간 류중광”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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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초청으로 사천왕사 지은 건축 名匠 류중광… 성덕태자 命으로 日에 정착
⊙ 류중광이 578년 설립한 건축전문회사 금강조, 가업 승계 1400년 동안 이뤄져
⊙ 금강조 가문 비결 알기 위해 5년간 붓글씨로 연하장 보내… 23년 걸려 출간
⊙ 망한 기업을 왜? 출판사 11군데서 퇴짜… “백제 건축 기술 뿌리 적은 유일한 책”

洪夏祥
1955년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 ‘상인열전’ 강의 / 포스코전략대 일본담당교수, KAIST 책임연구원 교수 역임 / 現 전국경제인연합회 교수 / 日韓문화교류상(일본 외무성), 백상 출판문화상 수상
  백년 기업도 대단한데, 천년 기업이다. 지금은 파산한 일본의 금강조(金剛組·곤고구미), 세계 최장수 회사다. 정확히는 1428년. 감도 안 오는 세월이다. 일본에서는 “금강조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도 있었다. 이 ‘위대한’ 기업의 창업주는 백제인이다. 서기 578년, 백제 부여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의 역사가 한반도 건축 기술의 역사이자, 일본 건축 역사의 뿌리인 셈이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마터면 묻힐 뻔했다. 때는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알게 된 ‘금강조’의 뿌리
 
서기 578년 충남 부여에서 건너간 류중광이 설립한 세계 최장수 기업 금강조의 본사 앞에 서 있는 대목수들. 사진=홍하상 제공
  일본 오사카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시텐노지)라는 절이 있다. 일본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왕실 사찰이다. 서기 598년에 잠실야구장 4배 크기로 지어졌다. 1994년 어느 날. 사천왕사를 둘러보던 홍하상 작가는 궁금했다. 중장비도 없던 시절 누가 이렇게 큰 절을 지었을까. 어렵게 주지 스님을 만났다. 다키토손 아쓰시. 그는 놀라운 얘기를 들려줬다.
 
  “당시 일본에는 이런 절을 지을 만한 기술자가 없었다. 일본의 성덕태자(聖德太子·쇼토쿠 태자·574~622년)가 백제에서 기술자를 초청했다. 그때 건너온 사람 중에 금강중광(金剛重光·곤고 시게미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안이 1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천왕사의 모든 건축물을 보수·관리하고 있다.”
 

  홍 작가가 지금 금강 집안은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주지 스님은 “그 가문은 건축 전문회사가 됐고, 명칭은 금강조”라고 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가서 서쪽 방향의 한 건물을 가리켰다.
 
  ― 그 길로 금강조를 찾아간 거군요.
 
  “사천왕사 서문에서 100m가 채 안 되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어요. 대로변에 있는 5층짜리 자그마한 빌딩이었죠. 요시카와(吉川) 총무차장을 통해 며칠 뒤 39대 사장인 금강리융(利隆)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3시간.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14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알기엔 턱없이 부족했어요. 앞으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즉답을 피하더군요.”
 
  금강조 집안은 현지 언론과도 인터뷰를 잘 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햇수로 5년간 연하장을 보냈다. 붓글씨로 쓴 장문의 글이었다. 1998년, 비로소 답변이 왔다. 그 무렵 NHK 촬영팀도 금강조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면전에서 쫓겨났다. 담당 PD가 ‘한국인에게는 허락하면서 왜 우리는 거부하느냐’고 하자 금강리융 사장은 “당신들은 언제 나에게 5년 동안 연하장을 보낸 적이 있소?” 했다고 한다. 홍 작가는 그렇게 16일간 매일 금강조 회사를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며 금강리융 사장을 독대(獨對)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2017년까지 금강조를 약 60회 방문한 뒤 쓴 책이 《천년경영》이다. 책 한 권을 쓰는 데 23년이 걸렸다.
 
 
  백제인 금강조, 일본 건축을 쓰다
 
성덕태자의 초상화.
  ― 성덕태자는 부여에 있던 류중광을 어떻게 알고 초청했습니까.
 
  “성덕태자가 류중광을 특정한 것이 아니라, 백제의 위덕왕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왕실 사찰을 지으려는데, 건축 명장(名匠)을 보내달라고요.”
 
  7세기 일본을 통치한 성덕태자는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적 통일을 이룬 인물이다. 일본 내 위상도 높다. 1930년 100엔 지폐를 시작으로 일곱 차례나 지폐 도안 인물로 쓰였다. 그런 태자의 피 속에는 한반도 도래인(渡來人)의 피가 흘렀다. 아버지는 574년 일본 31대 왕인 요메이(用明)지만 어머니가 백제계 후손으로 당시 야마토 정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였다.
 
  ― 듣자하니 파견 나간 건데, 절을 다 짓고 왜 부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성덕태자가 류중광에게 ‘앞으로 너의 자손은 대대손손 사천왕사를 영구히 보수·관리하라’는 명(命)을 내렸거든요. 그만큼 실력이 대단했다는 거죠. 왕실에서 ‘금강’(金剛·곤고)이라는 성을 받아 금강중광으로 이름을 바꾼 뒤 일본에 정착한 겁니다. 그리고 일본 고대 사찰의 건축과 수리를 전담하는 회사를 만든 거죠.”
 
  ― 우리 입장에는 인적자원이 유출된 것 아닙니까.
 
  “글쎄요… 당시 백제에는 류중광 같은 기술자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 일본의 가장 오래된 사찰이 백제인의 작품이라는 것, 일본에서도 이를 인정합니까.
 
  “오사카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이들은 뿌리가 백제니까요. 백제인이 건너오면서 오사카가 도시 기틀을 갖추기 시작했잖아요. ‘사천왕사 왔소’ 축제도 그래서 연 거고요. 백제인들이 선진 문물을 싣고 사천왕사로 들어간 것을 재현한 행사죠. 그러나 도쿄나 중앙(정부)에서는 아무래도 이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하죠. ‘왔소’ 행사도 차츰 축소되는 걸로 압니다. 오사카부(府) 재정도 좋지 않고 중앙정부의 눈치가 보이니까요.”
 
  ― 금강조 가문은 스스로를 백제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합니까.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피보다는 DNA, 정신을 얘기하면서요.”
 
오사카 사천왕사의 전경. 사진=조선DB
  ― 류중광이 한국에 남긴 건축물은 있습니까.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지은 것 말입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없어요. 그러나 지금은 다 불타고 오중탑과 절터만 남은 부여의 정림사는 그가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천왕사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가람 배치)에 따라 지었는데, 정림사 또한 양식이 똑같아요.”
 
  ―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압니까.
 
  “금강리융 회장이 그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1000년이 넘은 기업이니 보유하고 있는 문서가 어마어마합니다. 그 집안에서 아직 해독을 다 하지 못했을 정도로 기록이 방대해요. 제가 얼추 본 것만 (양팔을 쭉 펴며) 이 정도의 두 배니까요.”
 
  ― 만일 그 가문에 대가 끊기면 백제 건축 기록도 없어지는 겁니까.
 
  “그런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최대한 발굴해서 남겨놔야죠.”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
 
금강조 신년행사에 쓸 고려척을 만드는 39대 사장 금강리융 씨. 사진=홍하상 제공
  ― 천년기업을 가까이서 보니 어땠습니까. 뭐가 달라도 달랐을 텐데요.
 
  “가장 큰 차이점은 ‘기술 중시’입니다. 금강조의 건축물은 ‘진도10에도 안 넘어간다’고 합니다. 고베에 계광원(戒光院)이라고 금강조가 지은 사찰이 있어요. 1995년, 고베에 대지진이 났지 않습니까. 16만 채 건물이 완파됐고, 사망자만 6000명이 넘었죠. 그런데 금강조가 지었다는 대웅전만은 멀쩡했습니다. 서까래 일부가 비틀렸는데 그나마 1년이 지나자 저절로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금강리융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 그 ‘기본’이라는 게 뭡니까.
 
  “그게 궁금해 공사 현장으로 가는 사장을 따라 나선 적이 있습니다. 당시 75세 고령인데도 ‘사각지대가 있으면 곧 부실로 이어진다’면서 32개 공사현장 개요를 일일이 종이에 직접 작성해 들고 다니더군요. 그걸 또 달달 외웁니다. 금강리융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충실하라’고 현장직원들에게 누차 당부하더군요. ‘보이지 않는 곳’을 보여달라 했더니 현장감독이 천장을 뜯어 보였어요. 컴컴한 천장 속에 들어가 보니 어느 곳 하나 빈틈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돼 있었습니다. 천장 속에 들어간 자재가 더 비쌉니다. 기초공사 때도 콘크리트를 50cm만 타설하면 될 것을 70cm나 해놨어요. 그 밖에도 ‘무리하게 회사의 규모를 확장하지 않는다’ ‘사장은 현장에 살아야 한다’는 원칙도 지켰어요. 그 때문에 금강조 사장은 1000년 대대로 회사 건물에서 살았습니다.”
 
  ― 그 ‘기본’을 1000년 동안 끌어온 동력은 뭐라 보십니까.
 
  “32대인 금강희정(喜定)이 남긴 50쪽 내외의 유언집에서 이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후대에 이렇게 당부했어요.
 
  첫째는 조상의 묘에 매년 헌향하며 유불선(儒佛禪) 3교의 책을 읽어 세상과 사람을 알고, 둘째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친척들이 모여 상의하라. 셋째는 견적 입찰에 주의해서 끝까지 마음에 어긋남이 없이 잘 기록해놓을 것이며, 넷째는 금강조의 나아갈 방향을 써놓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일의 중요성을 느끼며 기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다섯째는 목수로서 기본적인 마음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야 하며, 능력이 없는 자에게 공사를 맡겨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술을 많이 마시지 마라.”
 
  ― 현지에서 금강조 회사나 그 일가의 명성은 어떻습니까.
 
  “대단하죠. 오사카 건축사협회의 후쿠모토 부회장은 ‘금강조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가 흔들린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유명세는 말할 것도 없고요. 금강리융 사장과 밥을 먹으러 갔는데 식당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볼 정도였으니까요.”
 
 
  기술력 중심의 후계자 계승
 
지난 1993년 홍하상 작가와 금강조 39대 사장의 부인인 금강광자. 금강광자는 류중광의 직계 후손이다. 사진=홍하상 제공
  ― 금강리융은 어떤 사람입니까.
 
  “고지식하고 딱딱하고 눌변이었어요. 딴엔 신중하게 말한다고 그랬겠죠. 또 검소했고요.”
 
  ―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회사 건물 내에 있는 그의 집에 가보니, 거실 한쪽 벽에 신단이 있더군요. 가운데는 자그마한 조각상이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성덕태자였습니다. ‘대대손손 사천왕사를 지키라’고 말한 그를 1400년 동안 모시고 있었던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경배를 하면서요. 왕과의 약속을 1000년 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금강리융은 몇 시에 일어나며 취미는 무엇입니까.
 
  “오전 5시30분이면 일어나고, 취미는 따로 없었어요. 골프도 안 쳤고요. 굳이 말하면 가라오케 가서 맥주 한 잔 시켜놓고 노래하는 것? 32대 사장 유언에 따라 술은 딱 한 잔만 하더군요.”
 
  ― 노래는 잘하던가요.
 
  “그냥 투박하게 불렀어요.”
 
  ― 검소하다는 건 무얼 보고 알았습니까.
 
  “일단 금강조 사장은 비서를 안 둬요. 집에도 사치의 흔적이 전혀 없더군요. 집 안이 썰렁해요. 서랍장 위에 일전에 제가 선물한 문배주를 올려놨기에 ‘저 빈 병을 왜 올려놓았냐’고 했더니, ‘아름답지 않아요?’ 하더군요.”
 

  ― 사장의 재산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 질문에는 답을 안 해주더군요. 추정컨대 연매출이 1000억원이니 이것저것 제하고 연봉 2억원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손녀가 둘인데 둘 다 국제학교를 다녔어요. 봉급을 아마 거기에 다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 검소하지만 손녀 교육에는 과감했네요.
 
  “어느 할아버지든 손녀한테는 껌뻑 죽는 법이죠, 허허.”
 
  금강리융은 2013년 세상을 떠났다. 40대 사장직은 그의 아들인 금강정화(正和)가 이어받았다.
 
  ― 금강조의 후계자 계승은 어떻게 이뤄졌습니까.
 
  “혈연, 지연이 아닌 기술력 중심의 계승이었습니다. 족보를 봤더니 직계가 아닌 경우가 많더군요. 돌림자가 바뀌는 지점이 있어요. 직계 자손이라고 해도 토목기초부터 성실, 책임감 등 여러 조건을 꼼꼼히 따졌어요. 39대인 금강리융도 원래 그 회사 직원이었습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다른 건설회사를 다녔는데, 워낙 성실하고 능력이 뛰어나 가문에서 평사원으로 입사시킨 겁니다. 이후 집안의 데릴사위가 됐죠. 실력 위주의 계승자 선택도 1000년을 이어온 비결 중 하나입니다.”
 
 
  금강조의 파산
 
금강조 본사 내에 있는 성덕태자의 신단. 사진=홍하상 제공
  ― 40명의 사장 중 단 한 명도 ‘일탈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까.
 
  “그게, 참… 40대 금강정화에 들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금강정화는 바닥부터 실력을 키운 게 아니라 아버지의 후광으로 미국 버클리대학 건축과에 진학한 후 금강조에 입사한 인물입니다. 사장의 아들이라는 이유에서 부사장이라는 지위까지 얻었죠. 금강조의 사업 영역은 사찰, 목조건축 위주입니다. 무엇보다 치명타는 2004년, 그가 ‘우리도 아파트, 타운하우스를 짓자’며 연립주택 사업에 손을 댄 겁니다. 그러면서 무리하게 40억 엔의 빚을 내 부동산 투자를 했어요. ‘무리하게 회사의 규모를 확장하지 않는다’는 천년기업의 철학과 완전히 배치되는 결정을 한 거죠.”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 파산하고 말았죠.”
 
  ― 이런… 천년기업의 말로가 너무나 허무합니다.
 
  “이후 콘크리트로 설계·시공하는 사업 부분은 일본 중견 건설사인 다카마쓰 건설에 인수됐고, 본업인 목조건축 부문은 40대 계승자인 금강정화가 금강조의 앞 자를 영문으로 표기한 ‘케이지 건설’로 바꾸어 운영하다 이 회사 또한 2년이 안 돼 파산했죠.”
 
  ― 지금 40대 사장은 뭘 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나중에 안 사실인데 병원에 입원해 빈사지경을 헤매고 있다고 하더군요. 1400년간 이어오던 금강조가 자신의 대에 와 도산한 데 대한 충격이 커서 그런 걸로 보여요.”
 
  ― 다카마쓰 건설은 금강조의 ‘정신’까지 인수했습니까.
 
  “다행히도 그렇습니다. 다카마쓰 건설사의 회장은 평소 금강조를 존경하던 사람입니다. 건물과 120명의 금강조 기술자를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금강조의 명맥을 이어가겠다’면서 사내(社內)에 ‘신(新)금강조’라는 부서도 만들었어요.”
 
  ― 금강조는 파산했지만 그 얼은 살아 있다고 봐도 됩니까.
 
  “창업주 류중광의 자손이 6000명에 달하는데 그들 중 일부는 현재 신금강조 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40대를 넘기지 못했지만, 파산이라는 것은 금강조 역사의 단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금강조의 기술은 영원히 남아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에는 왜 ‘금강조’가 없을까
 
매년 11월 오사카에서 열리는 ‘사천왕사 왔소’의 모습. 고대 한반도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된 과정을 재연하는 축제다. 사진=조선DB
  ― 류중광이 만일 부여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우리나라에 금강조 같은 회사가 있었을까요.
 
  “아니요.”
 
  ― 왜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백제 땅에 있는 모든 사찰에 불을 지르고 다시 지으며 백제 흔적을 모두 지우지 않았습니까. 그때 백제인이 갖고 있던 기술 중심의 DNA가 다 없어진 거죠. 백제가 패망하고 백제인이 대거 나라·아스카로 넘어가 실제로 일본에 백제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 최초의 절 산전사(山田寺·야마다데라) 지붕에는 백제 기왓장이 아직도 13장이 남아 있어요.”
 
  ― 류중광이 일본에라도 백제인의 DNA를 남겨준 게 다행인가요.
 
  “그렇다고 봐야죠.”
 
  ― 현대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왜 우리나라에는 장수기업이 드뭅니까. 흔히 상속세 등 가업 승계에 애로사항이 많아서라고 하는데, 일본도 상속세가 만만치 않죠.
 
  “사적 이익을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기술 중시가 아니라 혈연, 학연, 지연을 더 중시하고요. 작은 음식점만 해도 보세요. 강원도에 단골 막국숫집이 있었어요. 할머니가 하실 때는 정말 맛있었어요. 포대를 목에 걸고 장사했어요. 계산대에 돈 넣을 시간이 없어서요. 아들과 며느리가 물려받고는 금세 맛이 없어졌어요. (이윤을) 더 많이 남길 생각만 해서 그런 거죠.”
 
  ― 그런데 장수기업이 무조건 좋은 겁니까. ‘배달의 민족’이나 한국계인 ‘쿠팡’ 같은 회사는 천년기업의 가치와는 다소 상충되는 ‘도전’과 ‘혁신’이 낳은 결실인데요.
 
  “확실히 풍토와 기질의 차이는 있죠. 굳이 말하면 우리나라 국민은 95%가 ‘사냥개’이고, 일본은 95%가 ‘사육견’입니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장수기업이 꼭 필요한 이유는 기술의 축적 때문입니다. 장수라고 꼭 구태의연한 ‘옛것’을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기술도 진보를 하는데, 이는 켜켜이 쌓인 기반 기술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거예요. 전쟁이 났다고 칩시다. 전쟁을 결정하는 건 대통령이지만, 그 이후에는 과학의 대결입니다. 일반 전투기 대(對) F35, 청동포 대 철포. 여기에 쓰이는 기술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집니까. 기술 축적이 있는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대등했죠. 우리는 전쟁 당시 일본과 북한을 이길 수 있을까요.”
 
  ― 삼성은 천년기업이 될 수 있을까요.
 
  “어렵죠. 여러 장수기업의 공통점은 기술 중심으로 한 우물을 판다는 겁니다. 삼성이 전자에만 집중한다면 300년은 갈 거라 봅니다. 1000년은 왜 안 되느냐. 우선 오너의 문제입니다. 도요타 아키오 사장을 예로 듭니다. 도요타 창업자의 4세(世)죠. 은행에 다니다 28세 때 평사원으로 이력서를 쓰고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명예회장이던 부친이 ‘너를 상사로 모시고 싶어 할 직원은 없다’고 해서죠. 계장으로 승진했다가 실수를 해서 다시 평사원으로 강등되기도 하면서 한 단계씩 진급했어요. ‘빽’이 아니라 될 만하니까 사장까지 된 겁니다. 우리 같으면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제품의 문제인데, 스위스의 시계를 예로 들어봅니다. 일본이 세이코로 스위스 시계를 이길 수 있을까요. 300년을 간다는 롤렉스도 스위스에서는 저렴한 편입니다. 그 위에 콘스탄틴이 있어요. 명품이죠. 오랜 세월을 견디는 게 명품이라고 했을 때 삼성 제품이 과연 명품일까요. 물론 보급품으로는 1등이죠. 1200만원짜리 뱅앤올룹슨 텔레비전과 220만원짜리 삼성 텔레비전에는 똑같은 패널이 들어갑니다. 똑같은 패널을 쓰면서 왜 1000만원의 차이가 날까요. 삼성이 TV를 만드는 동안 뱅앤올룹슨은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삼성은 명품이 될 수 없는 거죠.”
 
 
  “반드시 남겨야 할 기록”
 
  홍 작가는 스스로 잡화상(雜貨商) 전문가, 혹은 노포(老鋪) 전문가라고 칭했다. 대학 졸업 이후 38년간 논픽션을 썼다. 그중 30년은 일본을 취재하러 다녔다. 오사카만 200번 드나들었다. 베스트셀러로 《오사카상인들》 《교토천년상인》 《일본의 상도》 등이 있다. 한국 기업에도 관심이 많다. 《이건희(그의 시선은 10년 후를 향하고 있다)》 《이병철 경영대전》 《정주영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도 인기였다. 그뿐만 아니다. 《중국을 움직이는 10인의 CEO》 《프랑스 뒷골목 엿보기》 《유럽 명품기업정신》을 출간하며 시야를 세계로 확대했다.
 
  ― 수많은 기업가를 보면서 직접 기업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예술가는 하나만 잘하면 되지만, 기업가는 기술·경영·대인·대민관계까지 10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업가는 21세기형 예술가예요. 쉽게 접근할 일이 아니죠.”
 
  ― 이미 여러 베스트셀러를 냈죠. 그중 《천년경영》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원래 앞으로 99권의 책을 더 쓰겠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더 이상 안 써도 여한이 없겠다 싶습니다. 《천년경영》을 출간하기 전에 출판사 총 11군데서 거절을 당했습니다. ‘망한 회사 얘기를 누가 읽겠느냐’ 하더군요. 아주 간신히 나온 겁니다. 그것만 해도 보람을 느껴요.”
 
  ― 책은 잘 팔립니까.
 
  “안 팔립니다. 하루에 딱 세 권 팔린답니다.”
 
  ―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닐 텐데, 출판을 강행한 이유는요.
 
  “이 책을 안 썼더라면 30년 후에는 금강조의 기록이 희미해졌을 겁니다. 이제는 후학에서 이어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금강조를 왔다 갔다 하며 쓴 돈이 아마 1억원은 될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돈 버는 것과는 별개로 이는 반드시 남겨놔야 할 기록이었어요. 그게 작가의 의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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