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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

1970년대 한국 축구의 전설 이회택

“생전 처음 밟아본 잔디의 감촉, 지금도 잊을 수 없어”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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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에서 회식 후 이회택 빼돌렸지만, 은인인 박병석 감독이 있는 성균관대 선택
⊙ 양지 시절 분데스리가의 영입 제안 받아… “그게 얼마나 좋은 기회였는지 아무도 몰랐다”
⊙ “밖에선 마구 놀러 다녔지만, 경기장 안에선 감독님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선수였다”
⊙ 북한 축구의 전설 박두익 감독의 주선으로 越北한 아버지와 상봉
사진=전형찬
  “엄마, 시집가지 마. 나랑 같이 여기서 살자.”
 
  어린 아들은 치마꼬리를 부여잡고 울면서 동구 밖까지 엄마를 따라간다. 엄마 손은 잡을 수 없다. 보따리를 이고 가시기 때문이다. 엄마는 말이 없다. 소리 없이 우시는가 보다. 김포(金浦) 벌판의 바람은 차가웠다. 어머니 성함은 정정희(鄭貞姬·1928년생), 소년 이름은 이회택(李會澤·1946~)이다.
 

  소년의 아버지 이용진(1929~?)은 월북자(越北者)다. 문제의 인물은 작은삼촌 이용복이다. 해방 전 인천에서 상업학교에 다니던 수재인데, 좌익 모임에 가담해 퇴학을 당했다. 6·25전쟁이 나자 둘은 이내 북으로 갔다. 열아홉에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전란 중에 남편을 잃고 연이어 갓난쟁이 딸도 병으로 잃었다. 죽은 동생에 대한 기억은 없다. 동네 사람 모두가 남의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지내던 시절이다. 그래서 ‘월북자 아낙네’가 휴전 후 동네에서 계속 살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동네에는 20대 초에 과부가 된 분들이 꽤 많았어요. 많이 재가(再嫁)하셨고, 그냥 (홀로) 사는 분도 몇 분 계셨죠. 어머니는 문산(汶山)으로 가셨는데, 그래도 3~4년에 한 번은 저를 보러 와주셨습니다.”
 
 
  里 대항 축구대회
 
  풍족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할머니(김인자·金仁子)는 장손(長孫)을 정성껏 챙겨주었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몸이 재빨랐다. 돼지 오줌보, 짚으로 엮은 공, 고무공, 미제(美製) 깡통 등 뭐든지 찰 수 있는 것은 다 차며 ‘축구 놀이’를 했다. 반 대항, 학교 대항 경기엔 늘 대표선수로 뽑혔다. 중학교 때 고등학생 형들보다 실력이 좋아서, ‘김포 바닥’에선 나름 이름을 날렸다. 축구와 진지하게 만난 건 고등학교 입학 무렵이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동네 축구’가 유행했습니다. 리(里) 대항전으로, 경기복도 맞추고 출향(出鄕)한 현역 선수나 은퇴 선수를 불러 출전시키는 등 나름대로 전력(全力)을 다해 맞붙는 진지한 행사였죠. 아버지 옷장에서 나온 축구 유니폼도 ‘리 대항전’의 흔적일 겁니다.”
 
  1961년 1월 김포 양촌면에서 열린 리 대항 축구대회에서 이회택은 생전 처음 ‘진짜 선수들’의 경기를 본다. 양촌면 양곡리 출신인 국가대표 라이트 윙 이현은 후배인 동북고-고려대 출신 선수들로 한 팀을 만들어왔고, 지역 라이벌 걸포리는 영등포공고-한양대를 나온 백원기 주도로 임국찬(林國燦) 등 현역 청소년대표들이 다수 포함된 호화 진용을 선보였다.
 
  “게임을 보러 갔는데 서커스 보는 것 같았죠. 기가 막히더군요. 리프팅, 패스, 킥. 우와, 이건 뭐… 동네 형들이랑 하던 축구와는 수준이 달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축구를 하자, 하고 싶다, 서울로 가서 축구를 배워야 한다’라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결심 뒤는 실천이다. 할머니가 주신 등록금은 김포농고 축산과로 가지 않았다. 이회택은 3분기 등록금을 모아 상경(上京) 자금을 만들었는데, 축구부 테스트 주선을 해주겠다던 한양공고 졸업생 선배가 돈을 들고 사라졌다. 한양공고 출신 친척의 주선으로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 합숙하며 테스트를 받았지만 결과는 낙방. 지방에서 올라온 50~60명의 축구부 지망생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무대였다. 김포농고에선 등록금을 내면 퇴학을 취소하고 다시 받아준다고 했다.
 
 
  살면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
 
  하지만 이회택의 머릿속엔 오직 축구로 성공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김포로 내려와 국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는데, 매일 새벽 운동장에 나와 개인운동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걸포리 주장’ 백원기였다. 백원기는 이회택을 영등포공고 축구부에 소개했다.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죽기살기로 훈련했다. 합숙소가 없던 시절이다. 넉 달 후 기회가 왔다. 1962년 5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고등학교 대회였다.
 
  “생전 처음 밟아본 잔디의 감촉, 정식으로 경기에 나간다는 설렘, 깃발을 들고 검은색 심판복을 갖춰 입은 주심·부심, 경기장을 빙 둘러싼 관중석….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살면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이었죠.”
 
  ― 성적은 좋았습니까.
 
  “데뷔전인 부산상고전에서 제가 두 골을 넣어 2대 0으로 이겼어요. 두 번째 광주상고전에서도 또 두 골을 넣었고. 그러니까 다른 팀에서 부정선수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저는 축구협회에 선수 등록은 했지만, 영등포공고 학생은 아니었어요. 이듬해 학생으로 등록하면, 3년이 아니라 4년을 선수로 써먹을 수 있는 거니까. 그때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습니다. 그래서 결승전을 못 나갔죠.”
 
 
  인생의 은인 박병석 감독
 
국가대표로 활약한 1972년 무렵의 이회택 선수.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다음 대회 때도 영등포공고 소속으로 출전해 여러 번 골을 넣었더니 8월에 당시 전국 최강인 동북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동북고 박병석(朴秉奭·1924~2015년) 감독의 결정이었다. 박 감독은 이회택이 생각하는 인생의 은인이다.
 
  “제 스피드와 순발력을 주목해서 보셨던 거죠. 무적(無籍) 학생이니 다음 해 4월이 돼야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는데, 그 8개월간이 선수 이회택이 만들어진 시간입니다. 기본기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는데, 하루 10시간 이상을 연습해도 축구에 미쳐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훈련한 시절입니다.”
 
  박병석 감독의 지도법은 독특했다. 대성(大成)하려면 양발을 모두 쓰라고 했다. 오른발잡이에겐 왼발은 거드는 발에 불과하던 시절이다.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의 움직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인상에 남는다. 공격 진행 방향과 반대쪽으로 뛰다 급격하게 방향을 꺾어 수비수들을 따돌리는 법, 그대로 뛰며 수비수들을 유인해 다른 공격수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요령을 알려줬다. 공격수 이회택의 평생 자산은 이렇게 길러졌다.
 
  “장기나 바둑으로 치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두는 거죠. 박 감독님과 연습하면서 결정적인 찬스 만드는 기술을 익혔어요. 수비수를 순간적으로 따돌리면서 공이 오는 길목을 차지하는 겁니다. 제가 원체 빠른데다가, 미리 계획하고 움직이니까 실전에선 수비수들이 저를 따라오지 못했죠. 나중엔 수비 라인을 어디서 어떻게 뚫을지, 단독 찬스를 만드는 길이 어딘지 수비진의 예상 동선이 훤히 보일 정도였어요. ‘공을 안 가진 선수의 움직임’을 강조하신 건 지금 생각하면 첨단 이론인데, 박 감독님이 어디서 자료를 구하고 연구해서 저에게 가르쳐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려대와 성균관대의 스카우트전
 
  동북고 1년 선배 김기복(金基福). 나이도 두 살 위 형님이다. 1960년대 후반 한국 대표팀 붙박이 공격수였고, 1994년 전북 버팔로, 1997년 대전 시티즌의 창단 감독을 역임한 축구인이 바로 그이다. 청소년대표로 뽑혀 태극 마크 운동복을 입고 훈련하는 김기복 선배가 이회택의 목표였다.
 
  “김기복 선배를 뛰어넘지 못하면 제 미래는 없다고 봤어요. 최고의 지도자가 계셨고, 바로 눈앞에 훌륭한 선배가 있어서 끊임없이 자극을 받았습니다. 실력이 붙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있었을까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맹훈련의 열매는 달았다. 동북고 3학년이던 1965년 청소년대표로 뽑혀 4월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다녀왔다. 1966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8회 대회도 출전해 꿈에 그리던 태극 마크를 달았지만, 결과는 두 대회 모두 예선 탈락이었다.
 
  하지만 이회택의 재능과 득점력은 축구 관계자들을 사로잡았다. 고려대와 연세대, 성균관대가 스카우트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선수(先手)는 고려대였다. 고려대는 동북고 선수들을 초청해 불고기 파티를 열어준 뒤 이회택을 빼돌리는 작전을 썼다. 그를 선수단 관계자의 신당동 집에 ‘격리’시킨 것이다. 시내 모처 호텔에 스카우트 본부를 차리고, 작전을 기획하던 연세대의 허를 찌른 발빠른 행보였다.
 
  하지만 이회택은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 점을 꿰뚫어본 성균관대의 작전이 한 수 위였다. 성균관대는 박병석 감독을 창단 감독으로 영입하고 이회택을 기다렸다. 사제(師弟)의 정은 자력(磁力)이 강했다. 행방을 알 수 없던 톱스타는 자기 발로 성균관대의 명륜동 숙소를 찾아왔다. 하지만 성균관대 생활은 길지 않았다. 이회택은 그해 5월의 춘계대학연맹전까지 출전한 뒤 학교를 자퇴하고 석탄공사에 입단했다.
 
  “박병석 감독님 때문에 성균관대로 갔지만, 신생팀이라 축구 선수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실력을 기르려면 좋은 선수가 많은 곳에서 뛰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듬해 연세대로 가기로 하고, 1년만 실업팀에서 뛰는 것으로 양해를 구해 석탄공사에 입단한 겁니다.”
 
 
  연세대에 합격했지만…
 
  1966년 9월 축구협회가 발표한 대표팀 명단에 석탄공사 소속의 이회택이 있었다. 국가대표팀의 막내로 그해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안게임에 나갔지만 결과는 태국(0대 3)과 버마(現 미얀마 0대 1)에 연패하며 예선 탈락.
 
  귀국하니 김포공항에 동북고 5년 선배 김삼락(金三諾)이 나와 있었다. 연세대의 스카우트 작전이었다. 김삼락은 이회택을 유성 온천장으로 ‘납치’했다. 연세대 스카우트 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회택의 옷을 모두 벗겨 외출을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극도의 보안 끝에 시험을 치르고, 1967년 1월 연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연세대 소속으로는 출전 기록이 없다. 입학식을 앞두고 연습하고 있는데 검은 지프 한 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짜고짜 ‘병역 기피자’라며 이회택을 차에 태웠다. 중앙정보부가 창단한 ‘양지’ 축구 팀의 스카우트였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올랐다. 비(非)남미, 비유럽 팀으로는 최초의 쾌거였다. 이탈리아를 1대 0으로 꺾었고, 준준결승에서 포르투갈에 3대 0으로 앞서다 3대 5로 역전패한 탓에 성적 이상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국제사회에서 ‘코리아’는 북한, 대한민국은 ‘사우스코리아’라고 해야 알아듣던 시절이다.
 
  국가적 비상이 걸렸고, 어떻게 해서든 우리도 성적을 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북한을 축구로 이기자는 계획이 입안되었다. 그것이 양지 축구단 프로젝트다. 양지(陽地)라는 팀 이름은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 부훈(部訓)에서 나온 것이다.
 
 
  中情 축구팀 ‘양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북한의 박두익(왼쪽). 이 경기로 북한은 세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중앙정보부 양지팀 창설의 계기가 됐다. 사진=축구협회 제공
  1967년 2월, 중앙정보부는 육해공군 소속 선수와 입영 대상자를 중심으로 최정예 팀을 만든다. 매일 고기를 먹여주고 잔디구장에서 훈련하는 파격적인 지원도 했다. 이회택은 성균관대 자퇴 후 입영 대상자였다. 3월 입학식 이후라면 합법적 병역 연기가 가능했겠지만, 중앙정보부의 작전이 더 빨랐다. ‘합법적 스카우트’였기에 연세대 축구부는 별다른 항의를 하지 못했다.
 
  양지 축구팀 선수생활은 군 복무 기간으로 인정해줬다. 이회택의 선택은 해병대였다. 양지 축구단은 획기적 구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지원에 부응하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국내 최고’는 가능했지만 ‘우리보다 수준 높은’ 경쟁 상대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안주했고, 실력도 정체(停滯)했다.
 
  양지 시절은 이회택에게 빛과 그림자다. 1967년 6월 아테네에서 열린 국제군인축구선수권대회는 5월에 태국에서 지역 예선까지 치른, 당시에는 비중 있는 국제대회였다. 양지는 예선에서 태국과 베트남을 연파했다. 본선에서도 조별 리그를 돌파해 4강에 올랐다.
 
  알제리에 1대 2로 패한 준결승도 졌다고 할 수 없다. 승부차기가 없던 시절인데, 잠깐 도입한 ‘판정승’ 때문에 내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실축한 페널티킥, 코너킥 등을 점수로 계산해 판정하던 제도로, 코너킥을 하나 더 얻은 우리가 판정승을 의식해 코너킥을 주지 않으려고 골키퍼가 골문을 비우고 공을 걷어내다 결승골을 실점한 황당한 경우였다.
 
 
  분데스리가의 영입 제안
 
  양지는 귀국하지 않고 7월 말까지 서독, 오스트리아・프랑스 등을 돌며 유럽 전지(轉地)훈련을 했다. 귀국 길에는 인도에 들러 콜카타에서 친선경기를 가졌다. 한국 축구사상 최초의 유럽 원정이자 훗날 ‘105일 원정’으로 불린 최장기간 전지훈련이다. 양지가 사실상의 대표팀이었으니, 1970년 월드컵 예선 통과를 목표로 무리를 한 것이다.
 
  “우리가 상대한 팀은 아마추어 강호, 프로 2군 등이었죠. 서독 육군선발과도 경기했어요. 1부 리그 정상권 팀들은 아예 시간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실력이 그럴듯하다는 소문이 나서, 프로팀 관계자가 보러 오기도 했습니다. 서독 분데스리가의 몇몇 클럽이 저한테 영입 제안을 했죠. 그때만 해도 유럽 축구에 정보가 없으니 그게 얼마나 좋은 기회였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상대방은 진지한데 제 반응이 영 시큰둥했으니….”
 
  그때 계약이 이뤄졌다면, 차범근보다 10여 년 앞서 한국 최초의 유럽 리거가 탄생할 수도 있었을 터다. 그랬다면 한국 축구사가 달라졌을까?
 
  8월에 열린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에서 한국은 5승 1무의 성적으로 버마(현 미얀마)와 공동 우승했다. 8월 11일 인도네시아(3대 1 승)와의 경기에서 득점한 마무리 골이 이회택의 대표팀 데뷔 골이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의 경기 등에서 총 3골을 넣으며 ‘아시아 올스타’에 뽑힌 이회택은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한국 축구의 에이스로 등극했다. 전성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제 전성기는 20대 초반이던 그때 끝났어요. 기량이 문제가 아니라 사생활 때문입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선수들에게 월급도 줬거든요. 계장급이 1만 얼마를 받을 때였는데, 제 봉급이 2만원이었습니다. 인기와 돈이 한꺼번에 생겼고, 선배들이 ‘스타는 공만 잘 차선 안 된다. 술·오락·연애 등 못하는 게 없어야 한다’며 여기저기 끌고 다녔죠. 중앙정보부 신분증이 있으니 겁날 것이 없고,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진지하게 축구만 알던 소년은 어느새 유흥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축구 반 방랑 반’이었지만 아무도 그의 실력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름 정도 마음잡고 훈련하면 몸이 돌아왔다. 연중(年中) 리그가 없고, 간격을 두고 대회가 열리던 시절이다. 그 정도로만 몸 관리를 하고도 경기에 출전하면 어김없이 골을 넣었다. 신(神)이 주신 몸이었다. 회복력이 남달랐다.
 
 
  ‘예선 통과 시 선수단 전원에게 집 한 채’
 
1970년 9월 5일 한국대표팀 1진 청룡과 포르투갈 벤피카 선수들이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친선경기에 앞서 찍은 기념사진. 후일 한국대표팀 감독을 지낸 코엘류(윗줄 왼쪽 첫 번째), 전설의 스트라이커 에우제비우(아랫줄 오른쪽 두 번째), 이회택(아랫줄 왼쪽 여섯 번째), 김호(윗줄 왼쪽 네 번째), 김정남(윗줄 왼쪽 여덟 번째), 대한축구협회장 장덕진(윗줄 왼쪽 열 번째)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조선DB
  선수로서 목표가 사라진 것도 방랑의 원인이다. 청소년대표, 국가대표 등 축구를 시작하며 세웠던 꿈을 이회택은 몇 년 사이에 다 이뤘다. 아시아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선수로서의 한(恨)이 남아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에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예선은 1967년 10월 도쿄에서 열렸다. 대만, 레바논, 베트남, 일본, 필리핀 등과 맞선 한국은 4승 1무 일본과 동률을 이뤘지만 일본에 골득실에 밀려 탈락했다. 10월 7일 일본과 3대 3으로 비긴 경기가 예선 탈락의 분수령이다.
 
  “88분에 김기복 선배가 미드필드에서 패스를 받아서 바로 돌아서며 중거리 슛을 날렸습니다. 수비수 둘, 공격도 저까지 둘이었는데 골키퍼가 나온 것을 보고 바로 슛했죠. 누가 봐도 골이었는데, 크로스바에 맞고 튕겨 나왔어요. 골대에 맞고 나온 공이 리바운드를 처리하러 달려가던 제 머리 뒤로 한참을 날아갔을 만큼 강슛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연습하러 운동장에 나갔을 때, 크로스바 공이 맞은 자리에 그때까지도 흙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일본은 필리핀을 15대 0으로 이겼고 우리는 다섯 골밖에 넣지 못했다.
 
  “필리핀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일본하고는 첫 경기였는데 나름대로 공격도 하고 정상적으로 플레이했죠. 우리랑 할 때는 전력(戰力) 차이가 심하다는 것이 드러난 뒤니까 전원 수비를 한 겁니다.”
 
  일본은 멕시코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다. 한국의 전력은 일본과 비슷했다. 이때의 예선 탈락이 두고두고 아쉬운 이유다.
 
  1970년 멕시코월드컵 예선도 잊을 수 없다. 1969년 서울에서 벌어진 한국, 일본, 호주의 더블리그. 첫 경기를 일본과 2대 2로 비기고 다음 경기를 호주에 1대 2로 내준 한국은, 2차 리그 첫 경기에서 일본이 호주와 1대 1로 비겨준 덕분에 살길이 생겼다. 1승 1무 1패의 한국과 2승 1무의 호주가 맞붙은 10월 20일의 최종전. 한국이 이기면 동률 재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1대 1로 맞서던 65분, 이회택의 돌파를 수비수가 무리하게 저지하며 페널티킥. 하지만 키커 임국찬의 킥은 힘없이 골키퍼 정면으로 향했다. 어이없는 실축이었다. 지나치게 긴장해 ‘땅을 찬’ 것이다. 정보부장이 약속했던 ‘예선 통과 시 선수단 전원에게 집 한 채’ 공약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여담(餘談)이지만, 선수단이 받기로 했던 집은 이문동에 공사 중이던 중정 사택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빗물이겠지’
 
  1971년에 치른 1972년 뮌헨올림픽 예선은 이회택 인생에서 가장 후회가 남는 경기다. 1970년 한국은 메르데카배, 킹스컵, 아시안게임 등 3개 대회를 석권했다. 1971년 1월 13일부터 2월 21일까지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로 전지훈련을 다녀오기도 했다. 장덕진(張德鎭·1934~2017년) 축구협회장의 기획이었다.
 
  5월에는 국내 최초의 국제축구대회인 박대통령배가 열렸다. 한국은 버마와 공동 우승했다. 준비도 완벽하고 선수단 사기도 높았는데, 올림픽은 또 한번 한국 축구를 외면했다. 대한축구협회는 말레이시아, 일본, 필리핀, 대만이 속한 동부지역 예선을 유치했다.
 

  1971년 9월 25일, 서울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상대는 말레이시아. 서울운동장에는 ‘뮌헨은 부른다. 한국 축구를—’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후반 6분 한국 수비의 순간적인 실수로 류룬택이 오른편을 치고 들어왔고, 박병주(朴炳柱)의 태클을 피하고 올린 크로스를 골잡이 17번 아마드가 머리로 받아 넣었다. ‘아마도 빗물이겠지’로 불리는 한국 축구의 흑역사다.
 
  “그날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어요. 빨리 회복해서 멋진 경기를 하고 싶어서 ‘콘택600’ 두 알을 먹었죠. 원래 복용량은 한 알인데 욕심을 낸 겁니다. 밥 먹을 땐 몰랐는데 경기장에서 뛰다 보니 약 기운이 몽롱하게 퍼지는 느낌이었어요.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 찬드란의 벽을 넘지 못했죠. 후반이 끝나갈 무렵, 코너킥을 차려고 준비하는데 관중석에서 소주병이 날아왔습니다. 경기도 안 풀리겠다, 속은 상하겠다. 홧김에 공을 관중석으로 차버렸죠.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슈팅 수 32대 8의 압도적인 경기였지만 결과는 0대 1 패배. 또 예선 탈락이었다. 이회택은 첫 발탁 후 처음으로 대표팀에서도 탈락했다.
 
 
  펠레와의 대결
 
1972년 6월 2일 축구황제로 불리는 펠레 선수가 소속된 브라질의 산토스 팀이 내한 경기를 가졌다. 경기 시작에 앞서 장덕진 축구협회장과 악수를 나누는 펠레. 사진=조선DB
  복귀전은 1972년 4월이었다. 5월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선 이란에 밀려 준우승. 이 대회는 9번 차범근과 11번 이회택이 같이 출전한 첫 국제대회다. 막내 차범근(車範根)은 0대 0으로 비긴 이라크와의 조편성 경기 승부차기를 관중석으로 날려 보낼 만큼 초긴장 상태였다. ‘대스타’ 이회택의 한마디를 차범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30개, 40개 차다 보면 골 안 들어가겠냐.”
 
  6월 2일 펠레의 산토스와 서울운동장에서 격돌한 경기도 잊을 수 없다. 경기장 육상 트랙까지 관중이 들어찬 여름밤의 축제였다. 한국의 2대 3 패배. 후반 13분 산토스의 두 번째 득점자는 펠레였고, 한국의 득점자는 69분 차범근과 71분 이회택이었다. 이회택의 골은 스루패스를 절묘하게 잡은 뒤 골키퍼까지 속이며 기록한 ‘완성도 높은 한 방’이었다.
 
  경기 후 로커룸에서 펠레와 찍은 사진은 훗날 남미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브라질로 연수를 떠난 초년병 지도자 이회택이 휴일에 이구아수폭포를 방문했을 때다. 아르헨티나 비자가 없었지만, 펠레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통과를 허락했다.
 
  갑자기 웬 브라질행(行)? 사연은 이렇다. 1980년 포철에서 은퇴한 이회택은 서울 이태원 고갯길에 ‘청기와 집’이란 막걸릿집을 연다. 아내(임애린)가 묵묵히 따라준 덕이다. 장사는 잘됐지만 퍼주는 양도 만만치 않아서 가게 연 지 1년여 만에 모아둔 돈이 바닥을 보였다.
 
  축구가 그리웠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브라질로 지도자 유학을 떠났다. 6개월 동안 프로팀의 클럽 운영과 꿈나무 선수들의 지도 방법을 공부했다. 귀국하니 모교인 한양대가 자리를 줬다. 집이 없다고 하니 한양대병원 뒤에 있는 관사도 빌려줬다.
 
 
  한양대에서 포철로
 
  1972년 7월 메르데카배 준결승 일본과의 경기에서 이회택은 수비수 오기의 태클에 걸려 무릎을 다친다. 체계적인 재활(再活)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쉬다가 놀다가 연습하다 또 다치고, 1년 이상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회택이 뛰었더라면, 재경기 플레이오프까지 가는 격전 끝에 최종전에서 호주에 0대 1로 밀려 눈앞에서 분루(憤淚)를 삼킨 1974년 서독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을까?
 
  한양대에 진학한 사연도 재미있다. 양지는 1968년 말 김형욱 정보부장의 사임과 함께 사라졌다. 남북 대결도 이뤄지지 않았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이회택을 둘러싼 2차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진다.
 
  “이때 금융단 축구팀이 잇따라 창단했어요.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지는데, 거금을 들고 왔더라고. 외환은행이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계약금이라며 200만원인가 300만원을 줬죠.”
 
  동북고 선배이자 한양대 코치로 가 있던 김삼락이 한양대로 오라고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이미 유흥도 하고, 후배들 양복도 맞춰주고… 받은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한양대 김창기 체육부장이 소식을 듣고 학교 고위층을 움직여 돈을 만들어줬다. 4년 만에 대학생이 된 이회택은 노장, 퇴물 소리가 듣기 싫어 열심히 운동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최선을 다해 몸을 만들었다.
 
  1972년 3학년 2학기, 당시 국가대표 감독을 지내기도 한 한홍기(韓洪基·1924~1996) 선생이 만남을 청했다. 박태준(朴泰俊) 회장의 명(命)이라고 했다. ‘1973년에 포철 축구단이 창단된다. 초대 감독으로 발령이 났다. 박태준 회장이 직접 지명했으니 포철에 입단하라’는 전갈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설(私設) 국가대표팀으로 불린 포항제철 축구단에 창단 멤버로 합류한 이회택은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쇳물을 상징하는 짙은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었다.
 
 
  “그만큼 놀았으면 들어오게”
 

  한홍기는 이회택의 자유인 기질을 존중했다. “그만큼 놀았으면 들어오게”라는 한마디로 방랑자를 순치(馴致)했다. 숙소 밖을 전전하던 이회택은 군말 없이 숙소로 복귀해, 보름 사이에 몸을 만들고 팀을 우승시켰다. 공격수 이회택을 막을 만한 수비수는 김호(金浩) 정도였는데, 김호가 포항제철에 입단하면서 천적(天敵)도 사라졌다. 여전히 그는 국내 1인자고 풍운아였다.
 
  ― 선수 시절 말년에 포철이 밀리는데 수비 가담을 하지 않고 하프라인에서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화만 내던 것을 기억합니다. 국제경기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서 매너가 나쁘다고 대놓고 저격한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래요, 인정하고 반성합니다. 그런데 오해가 있어요. 수비에 가담을 안 한 건 감독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결과입니다. 절대로 하프라인을 넘어오지 말고 공격에 집중하라고 하셨거든요. 밖에선 마구 놀러 다녔지만, 저는 경기장 안에선 감독님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선수였습니다.”
 
  1977년 초 홍콩 세미프로 하이펑에서 단기 용병으로 활약한 건 득(得)이었을까 독(毒)이었을까. 따뜻한 곳에서 운동하니 몸이 올라왔다. 최정민(崔貞敏) 감독은 국가대표팀에 이회택을 호출했다. “제 기량은 제가 잘 안다”며 거절했지만, 월드컵 본선 진출의 국민적 여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30대 현역이 흔하지만, 당시엔 20대 후반이면 벌써 노장 소리를 듣던 시절이다. 트레이드마크 11번은 차범근이 달고 있었기에 기꺼이 양보하고 13번을 달았다.
 
  7월 3일 부산에서 열린 최종 예선 이란과의 경기. 전반을 마치고 최정민 감독이 “후반에는 회택이가 빠지고 김재한(金在漢)이 나간다”고 했다. 공중볼 다툼에서 장신의 이란 선수들에게 밀린 결과였다. 이회택은 168cm, 김재한은 190cm다. 순간적으로 화가 올라왔다. 축구화를 벗어서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항명이었다. 그 경기가 이회택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였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 거죠. 나중에 감독을 해보니 최 감독님 결정이 백 번 옳았습니다.”
 
  최종 예선 장기 레이스 결과는 6승 2무 이란의 월드컵 진출, 2위는 3승 4무 1패의 한국이었다.
 
 
  황선홍·홍명보 발탁
 
1990년 6월 4일 타워호텔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대표팀 결단식. 김우중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이회택 감독에게 선수단기를 건네주고 있다. 사진=조선DB
  감독을 할 때, 선수들에게 화가 나면 이회택은 늘 이때의 일을 떠올렸다. 현역 시절 본인의 행동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그랬더니 성적이 따라왔다. 은퇴 후 모교 한양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곧바로 우승했다. 41세에는 프로축구 포항제철 지휘봉을 잡았다. 1988년 우승팀 감독 자격으로 국가대표 감독도 맡았다.
 
  1988년 시즌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개막을 앞두고 박태준 회장이 “이 감독, 집 없지? 우승하면 집 사준다”고 했다. 이런저런 관리 소홀로 집을 날리고, 그때까지 한양대의 배려로 학교 관사에서 지내던 사정을 알고 한 약속이다. 우승한 뒤 받은 포상금은 1억200만원. 서울 송파의 아파트를 사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다음 자리는 대표팀 감독. 다시 태어나도 축구는 할 것 같다. 하지만 대표팀 감독은 맡을 생각이 없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아시아 지역 예선을 9승 2무, 30득점 1실점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통과했는데 본선에선 힘 한번 못 쓰고 허무하게 무너졌어요. 현지에 한 달 전 도착해서 시차 적응도 하고 연습경기도 충분히 치르고 싶었는데, 개막 일주일 전 현지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었죠. 3전 전패로 예선 탈락했는데, 마지막 우루과이전이 가장 잘한 경기였어요. 우리가 상대한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는 직전 대회인 1986년 월드컵 때 모두 8강에 오른 강팀이니 정상적으로 붙어도 조별 리그 통과는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제대로 붙어보고 졌더라면 후회가 남지 않았을 겁니다.”
 
  이탈리아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이회택은 대학생 무명선수 둘을 우기다시피 뽑았다가 비판을 받았다. 공격수는 고교 시절부터 관찰한 인재였고, 수비수는 추천을 받고 검증을 거쳐 선택한 재목이었다. 그 둘의 이름은 황선홍(黃善洪)과 홍명보(洪明甫)다.
 
 
  박두익
 
  월드컵을 마치고 귀국한 후 대한축구협회는 이회택은 감독으로 재신임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강원도 산골로 피신하고 연락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변수(變數)가 생겼다. 북에 있는 아버지를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때 북한의 박두익(朴斗翼) 감독을 처음 만났어요. 가서 인사를 했습니다. 양지 시절 정보부에서 틀어준 북한의 월드컵 경기를 보고 또 보면서 공부했거든요. 남 같지 않았고, 축구인으로서 정말 존경스러운 선배였습니다.”
 
  1987년 포항제철 감독 시절 출전한 태국 킹스컵. 북한 대표팀이 참가했고 박두익 감독이 선수단을 이끌었다. 박 감독은 구면인 이 감독을 바로 알아봤다. 대(大)선수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챙긴 것이다.
 
  이회택 감독은 용기를 냈다. “아버지가 혹시 북쪽에 살아계실지도 모른다, 생존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나?”라고 묻고 아버지 이름과 생년월일이 담긴 쪽지를 건넸다. 기약 없는 부탁이었지만 몇 년 후 답이 왔다.
 
  198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남북 대결 전 박두익 감독이 슬그머니 다가와 ‘아버지가 살아계신다. 거주지는 황해남도 신계군 신계읍’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새로 결혼해 딸 셋을 뒀고, 삼촌도 생존해 있다며 아버지의 사진과 편지를 줬다.
 
 
  父子 상봉
 
2013년 2월 13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회동한 역대 국가대표팀 감독들. (왼쪽부터) 최강희, 허정무, 김정남, 조광래, 김호, 정몽규 회장, 박종환, 이회택, 차범근 감독. 사진=뉴시스
  이듬해 기적처럼 부자(父子) 상봉의 길이 열렸다. 1990년 10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 대한축구협회는 이회택 감독에게 고문 직함을 주고 평양행을 주선했다. 10월 10일 만남의 장소는 고려호텔 2층 로비. 남과 북의 방송사 카메라와 기자들이 빽빽하게 운집했다.
 
  “우리 쪽 요원이 저한테 그랬어요.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제발 슬피 울지 말라’고. 북에서 두고두고 선전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죠. ‘노력은 하겠지만 40년 만에 만나는 건데 울음이 나올지 안 나올지는 장담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이용진·당시 78세)와 삼촌(이용복·당시 75세)이 로비로 들어왔다.
 
  “회택이구나. 아이고, 회택아.”
 
  태어나서 처음 듣는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 바로 아버지를 알아보셨나요.
 
  “네, 핏줄이란 게 무섭더군요. 보자마자 그냥 바로 느낌이 왔습니다.”
 
  아버지를 끌어안는데 돌발사태가 생겼다. 아버지는 아들을 밀치고 “미(美) 제국주의 놈들 아래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나는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은혜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눈물이 쑥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30분만 상봉을 허락한다며 내일 다시 만나라기에 “40년 만에 만난 부자를 이렇게 떼어놓는 법이 어디 있냐?”며 따졌다. 남북 관계가 좋았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북한 당국이 특별 만남을 허락했다.
 
  그날 밤, 아들은 아버지, 작은아버지와 호텔 방에서 같이 잤다. 다음 날 북한이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이회택 감독의 생일잔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입에 생일떡을 물려줬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기자들이 먼저 울었다. 아들과 아버지도 눈물이 터져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1990년 10월 13일 오전, 한국 선수단이 서울로 떠날 때 작별인사를 드린 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아내
 
  가족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덧붙이자. 축구인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이회택 인생의 가장 큰 은인이 한명 더 있다. 1976년 결혼한 아내다. 소개로 만나 몇 년 동안 연애하다 식을 올렸다. 아내는 ‘사람 좋아하고 사고 많이 치는 남자’를 다 큰 아들 하나 더 키운다는 심정으로 받아주고 살펴줬다. 아버지 만나러 갈 때 선물이며 용돈, 가족사진을 꼼꼼히 챙겨주고 눈물로 배웅하던 광경도 잊을 수 없다. 사업을 한다며 여러 일을 벌이고 실패할 때도 묵묵히 수습하고 남편을 도왔다. 나중엔 올림픽공원 옆에 일식집을 차려서 몇 년간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는 이회택의 흉상이 있다. 김포에는 ‘이회택거리’가 있고 현역 시절 그의 활약을 재연한 동상이 있다. 이회택의 마음속에는 흉상과 동상이 하나씩 더 있다. 아내의 흉상, 아내의 동상이다. 풍운아(風雲兒)의 노년은 후덕(厚德)한 아내가 있기에 불우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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