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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이어령 선생이 말하는 코로나의 逆說, 죽음의 逆說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사자를, 저 괴물을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보여주고 만 것”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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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죽음은 추상적인 실체… 우리 안 사자, 철창 안 호랑이”
⊙ “코로나19는 ‘지금 죽을 수 있다’는 극적 현실과의 조우… 탈출한 사자, 호랑이가 언제 덮칠지 몰라”
⊙ “하루 수천명 죽고, 장작더미에 시체가 쌓여 있는 절망적 죽음 생각해봐요”
⊙ 17세기 영국이 페스트 겪고 문명의 변화를 경험, 과학의 이름으로 ‘위생’이 등장…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어져
⊙ 코로나19로 인해 ‘낭만적’ 메멘토 모리가 아닌 ‘실존적’ 메멘토 모리 체험

李御寧
1933년생.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문화부 장관 역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앞에서 이어령 선생. 사진=조선DB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는 ‘지성과 영성의 만남’으로 세상을 통찰하는 이 시대 스승이다. 세상을 텍스트 삼아 기호학의 분석으로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길어 올린다.
 
  스승의 말, 스승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된다. “성경 속 유목민들이 건넜던 저 광야의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스승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의 말이 기도 소리처럼 들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그 기도는 증발해버린다. 스승은 “늘 깨어 있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인류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경험하게 되었다. 세계대전(世界大戰)보다 더 거대한 죽음 앞에 벌거벗은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한 이불 속에 나란히 눕게 되었다. 죽음은 끔찍한 일상(日常)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은 이 죽음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지난 5월 4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스승을 만났다.
 

  ― 코로나19로 인해 죽음을 마주하게 됐어요. 죽음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일상과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을 추상적이고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겼는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달라졌어요.
 
  죽음은 그저 우리 안에 갇힌 사자, 철창 안에 갇힌 호랑이에 불과했어요.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죽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일종의 ‘판단 중지’지요.
 
  죽음이 갖는 무서움, 저놈이 날 잡아먹을 수 있다는 공포는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었지요.
 
  무시무시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자·호랑이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죠. 적어도 ‘오늘은 아닐 것이야’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겁니다.
 
  그런데 저 우리의 사자가….”
 
 
  “모래알 수만큼이나 막연했던 죽음이 갑자기 우리에게”
 
서울 평창동 자택 거실에 걸려 있는 이어령 선생의 그림이다.
  ― 죽음의 실체를 이제야 대면하게 된 것이지요. 죽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여긴 사자와 호랑이, 즉 죽음이 길거리로 뛰어나온 거지. 죽음의 공포, 굶주린 맹수의 습격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온 마을, 온 도시, 온 인류가 깨닫기 시작한 거야.
 
  생각해보세요. 으르렁대는 호랑이는 무섭기는 하나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놈이, 그 끔찍한 공포가 거리로 뛰쳐나온 겁니다.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사람이 타인이 아닌 코로나19를 겪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 저 사자가 안 보여.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 덮칠지 몰라요.”
 
  ― 죽음의 공포가 일상이 됐어요.
 
  “우리 안에 있던 죽음, 지금까지 알던 그 사자가 아니야. 두렵지만 그래도 안심하고 봤던 그놈이 골목 어귀에서, 출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 시장 가다가 딱 마주치게 된 겁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죽는다’는 철학자나 성직자의 가르침보다 더 강렬하게, 이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사자를, 저 괴물을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보여주고 만 겁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섰던 인류의 문화·문명이, 원폭(原爆)으로도 무너지지 않던 문명·문화가, 조그마한 바이러스[自然]한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지요.”
 
  ― 우리가 발 딛고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문화·문명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지요.
 
  “죽음 앞에 생(生)의 기원(origin)마저 힘을 잃어버렸어요. 진화론자의 주장처럼 호모사피엔스가 원숭이로부터 혹은 침팬지로부터 갈라진 역사가 사실이든 아니든 아니, 하나님이 창세기를 통해 인류 창조의 비밀을 밝히신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오늘날 이 무시무시한 사자가 날뛰는 아비규환 속에서는 의미를 잃어버린 겁니다.
 
  혹은 민주주의가 가르쳐온 ‘자유와 인권, 프라이버시의 보장’ 같은 생명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도 말 한마디 못하고 복종하는 상황을 가져온 것이지요.”
 
 
  “실존적으로 우리가 ‘죽음’을 겪고 있다는 것이 핵심”
 
최근 인도 뉴델리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수많은 시신을 소각하는 모습이다. KBS TV 뉴스 화면 캡처.
  ― 코로나19가, 죽음이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인가요.
 
  “실존적으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죽음’을 겪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종교 다 그만두고, 진화론 다 그만두고서라도 말이죠. 그런데 이 죽음이 내일 몇 시 몇 분에 나타나는 게 아니고 언제 저놈이 날 잡아먹을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게 공포지요. 예정된 죽음은 공포가 아닐지 몰라요.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죽음, 느닷없는 공포가 정말 무서운 존재지요.”
 
  ― 코로나19로 인해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태껏 한국인의 종교는 서구인과 달랐어요. 종교가 파국적이고 부딪히는 것, 깨지는 것, 부서지는 역사를 거쳐온 면에서 치열하지 않았어요. 우리 신앙의 선조(先祖)들이 순교와 죽음으로 종교를 증거 했으나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믿음이 점잖다고 할까요? 치열하지 않았지.
 
  동양사상이 훌륭해서 그런지도 몰라요.(웃음)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그리스도교와는 달라요. 공자(孔子)를 떠올려봐요. 생김새부터 온화하잖아. 제자들 중에 배신한 제자도 없고 편안해요. 수레도 타고 다녀.(웃음) 예수님에게 수레가 어디 있었어요? 심지어 맨발이야. 제자들이 있긴 있는데 공자 같은 제자들이 아녀.
 
  공자 제자들은 먹을 것 다 벌어가지고 주군 모시듯이 했지만, 예수님 제자들은 배신을 밥 먹듯 합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기적), 만선(滿船)으로, 혹은 병든 환자를 싹 낫게 하는 기적을 보여줬지만 자기 살려고 배신을 했어.
 
  공자의 제자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데 예수님의 제자와 비교 불가야. 무식한 어부들도 있고. 이처럼 아주 드라마틱한 신앙이지만 동양의 믿음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거지.
 
  저쪽(예수교)은 세기(世紀)의 승자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신앙이지요. 그리스도교를 타 종교와 비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징이 그렇다는 거야.”
 
  ―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죽음, 드라마틱한 죽음의 공포를, 한국인이 코로나19를 통해 경험하게 됐다는 말인가요.
 
  “하루 수천명이 죽고 며칠 사이에 100만명이 확진 판정을 받으며 화장터에 흰 천으로 감싼, 코로나19로 인해 죽은 시체가 장작더미에 쌓여 있는 절망적 죽음을 생각해봐요.
 
  시신을 소각하는 연기가 온 천지로 가득한 그런 죽음…. 얼마 전 AP통신이 ‘인도에서 화장터가 붐벼 대기하고 있는 시신들이 있다’고 보도했잖아요.
 
  우리가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서양의 경우 확진자 급증으로 의료체계가 붕괴되었어요. 병원 화장실에 시신이 방치돼 있고 환자들이 배설물 사이에 누워 있는 모습이 공개돼 충격을 주었어요. 시신과 환자, 배설물 등이 널브러져 있는 처참한 참상을 떠올려보라고요. K방역이 성공하고 안 하고가 아니야.”
 
 
  “모든 질병에 대해, 소위 ‘과학’의 이름하에 위생이란 말이 생겨나”
 
대니얼 디포의 《A Journal of the Plague Year》(1772)의 독일어판 책 《Die Pest Zu London》 커버.
  ― 역병(疫病)의 역사를 보면 동서양이 따로 없지만,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의 흐름이 보여요.
 
  “우선 ‘바이러스’라는 말, 그리고 ‘백신’이라는 말부터 다 달라요. 바이러스는 독(毒)을 뜻하는 라틴어 ‘비루스(Virus)’에서 유래되었는데 그게 유럽에서 세계로 퍼지면서 우리는 영미문화권에서처럼 ‘바이러스’라고 불러요. 중국과 북한은 ‘비루스’, 일본은 독일식 ‘우이루스’라고 하고요. 또 우리가 ‘백신’이라 부르지만 일본은 ‘왁찐’이라고 해요. 동서양의 문명·문화의 차이도 분명하게 그 민낯을 드러낸 셈이지요.
 
  코로나19는 동쪽(동양)에서 시작돼 서쪽(서양)으로 번졌는데 과거 역병의 전파 경로도 이와 다르지 않았던 같아요.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페스트가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유입되었다는 설, 인도에서 시작돼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었다는 설,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평원지대에서 동유럽의 해상 교역로를 따라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설까지 다양하죠.”
 
  ― 역병을 통해 인류가 어떻게 변모하게 됐나요.
 
  “1665년 무렵 대역(大疫), 즉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영국 런던이 아수라장이 됐어요. 런던 인구 46만명 가운데 약 10만명이 사망했고 3분의 2는 시골로 피난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심지어 1666년 9월 2일 대화재(大火災)로 온 도시가 화염에 휩싸일 정도였어요. 그때 런던 가옥이 목조였어요. 빈민가의 비좁은 골목, 길바닥은 진창이어서 쥐들이 들끓기 딱 좋은 구조였어요.
 
  흑사병으로 도시는 황폐화되었고 수많은 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1660~1731)의 《저널 오브 더 플래그 이어(A Journal of the Plague Year)》(1772)를 읽으면 숫자가 많이 나오거든. 어디서 몇 명이 죽었다는 통계치가 다 나와요. 통계 숫자가 소설이 된 최초의 사례라고 하는데 그걸 겪은 런던이 어떻게 됐습니까.”
 
  유년 시절 디포는 끔찍한 페스트를 경험했고, 도시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대화재를 겪어야 했다. 그 결과 디포와 이웃 두 집만 달랑 살아남게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끔찍한 비극을 겪고서 런던 시민들은 목재 대신, 돌과 벽돌로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어요. 콘크리트와 석조 건물이 등장하게 된 겁니다. 쥐가 더는 창궐하지 못하게 말이야. 그러니까 동양은 목조, 서양은 석조라는 개념이 흑사병 이후 생겨난 거지. 그 이전에는 동서양이 모두 목조에서 산 거여. 물론 판테온(Pantheon) 같은 로마 시대의 신전은 특별히 석조로 지어졌지만 개인 집들은 죄다 목조야.”
 
  ― 페스트를 겪으며 서구인들의 삶이, 삶의 형태가 달라진 거네요.
 
  “이후 불타지 않는 벽돌집이 생겨났지. 쥐들이 갉아먹을 수 없는 돌과 벽돌이 등장한 겁니다. ‘위생(衛生)’ 개념이 등장하고 현미경이 1676년 고안되면서 세균의 실체가 밝혀졌어.
 
  이후 예방 의학이 등장해 탄저와 콜레라, 결핵의 원인이 박테리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역병이, 페스트가 미생물에 의해 일어났음을 그제야 알게 된 거야. 모든 질병에 대해, 다시 말해 소위 ‘과학’의 이름하에 위생이란 말이 생겨난 겁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메멘토 모리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 마련된 중앙예방접종센터 모습이다. 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이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 ‘위생’이란 단어는 낯설지 않은 현대인의 필수 개념이 됐어요.
 
  “위생이란 말은 그 전에도 존재했지만 근대화를 거치며 일본에서 위생이란 말이 나오고 한반도로 건너온 겁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식민 통치를 할 때도 전부 ‘위생’ 개념으로 통치했던 거죠.
 
  무력만으론 안 되는 거여. ‘살려줄게’ 해야 통치할 수 있었어요. 어떤 폭군도 죽인다고만 해서는 통치가 안 돼. 다 도망가니까. ‘너희, 살려줄게’ 해야 통치가 가능해요. 소위 푸코가 이야기하는 ‘생의 정치학’이지.”
 
  ― 위생이란 개념의 도입과 코로나19 방역도 비슷한 개념 같아요.
 
  “코로나19가 창궐하니까 ‘방역 독재’가 다시 등장한 거야. ‘너희 살려줄게!’라고. 전에는 ‘죽일게!’ 하니까 저항하거나 망명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내 말 들어. 백신으로 살려줄게’ 하니 순종하며 돌아와 스스로 노예가 되는 식이지.”
 
  스승은 “런던 시민이 흑사병을, 죽음을 겪으며 위생 개념이 등장하고, 결국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사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유럽 장원에서 농사짓던 농부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 땅이 아무리 많아도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농부의) 몸값이 올라갈 수밖에. 산업혁명기에 발생한 사회문제 중에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건강 문제도 있었어. 노동자의 수명이 비위생적인 전염병과 관련돼 있다는 현실을 발견하게 된 거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도 그제야 응시하게 되었어.
 
  또 성직자에 의한 성경의 독점, 진리의 독점이 아니라 가내수공업, 중소 상공업이 길드를 통해 협력하는 것과 같이 소수의 선(善)이 아닌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사회개혁, 종교개혁, 나아가 산업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어요. 흑사병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들인 셈이지.
 
  지금의 코로나19도 비슷해요. 죽음이라는 것이 바이러스, 질병을 통해 개개인의 마음속에 들어와 경험하게 되고,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죽음이 자기 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죠.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겁니다. 이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볼 일이지.”
 
  ―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그런 죽음이 아니더군요.
 
  “메멘토 모리(Me mento mori)라는 말이 있잖아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지. 우리는 낭만적인 메멘토 모리, 술 먹고 인생을 논하는 메멘토 모리쯤으로 죽음을 생각했잖아요.
 
  임모털(immortal·죽지 않는)한 존재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거지. 하나님 이외의 존재는 다 죽어. 그게 원죄야, 이게 모털(mortal·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인 거지. 생명이라는 것은 다 죽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메멘토 모리를 다시 깨닫게 된 겁니다.”
 
 
  “이제야 죽음을 발견했지만 그건 경험에서 오는 죽음 이상의 것”
 
  스승의 사유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먹던 창세기의 선악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창세기 비유였다.
 
  “신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어겼고 그 선악과로 말미암아 인간은 스스로를 알게 된 거지. 바보는 자기가 바보인지 몰라. 지혜가 있는 사람만이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나’와 ‘바보’를 분리하는, ‘바보 아닌 나는 누구야’라고 질문을 던지는 식입니다.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그렇지, 내가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 봐. 끝없이…. ‘자기 언급’ 같은 질문을 계속 하다 보면 결국 신에 가까워지는 것이거든. 그걸 영성이라 하고, 의식이라고 하지.
 
  결국 ‘자기 언급’, 즉 ‘나는 바보야’라고 생각하는 게 선악과가 의미하는 지식의 열매인 거지. 그 열매가 미추(美醜)의 열매고 진선미(眞善美)고 의식주(衣食住)지.”
 

  ― 네? 의식주요?
 
  “지식이, 지혜가 바로 의식주여.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는 게 식(食)이잖아. 선악과를 먹고 창피해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어. 그게 의(衣)지. 그리고 하나님이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니 덤불 속에 숨었는데 그게 주(住)라고.
 
  생각해봐요. 먹고, 입고, 숨으면서 인류의 의식주 걱정이 드디어 시작됐다고. 의식주 걱정이 바로 지식의 열매에서 나온 겁니다.
 
  벌거벗은 자신과 마주하게 된 지식의 열매가 궁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죽음’이었지. 그게 페스트고 코로나19야. 코로나19를 통해 죽음의 실체와 대면하게 된 거야. 물론 죽음이라는 걸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베일에 가려졌던 그 얼굴이,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흉하고 무서운 얼굴로 도시 전체, 나라 전체, 지구 전체로 일시에 드러난 거야.
 
  그게 팬데믹이야. 팬은 범(汎・모두)이라는 뜻이고 데믹은 민(民)이야.”
 
  ― 이 죽음은 단순히 경험으로서의 죽음, 감각으로 느끼는 죽음은 아닌 것 같아요.
 
  “죽음이 뭔지 모르던 사람이 이제야 죽음을 발견했지만 그건 경험에서 오는 죽음 이상의 것이지. 하나님의 영(靈), 영성(靈性)에 가까워진 거야.
 
  선악과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깨닫듯이 소위 오성(悟性)이라는 어려운 철학용어로 알려진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죽음을 깨닫고 마주하게 된 거야.
 
  센서빌리티(sensibility), 소위 감각(感覺)은 수동적이야. 감각대로라면 이 세상의 ‘개(犬)’는 하나도 같은 게 없어. 우리가 경험하는 개는 다 다르니까. 그러나 개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개를 언더스탠딩(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
 
  ― 죽음도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말씀이지요.
 
  “죽음…, 감각으로서의 죽음은 흉측해, 피 흘리는 모습을 떠올려봐. 죽은 시체를 보면서 절망하지. 시체를 보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센서빌리티야. 여기에는 천 개의, 만 개의 죽음만 존재해. 그러나 ‘저게 죽음이지만 나의 죽음일 수 있다’는 콘셉트는 기존에 알던 죽음과 다른 것이지. 눈이 환해지는 거지. 경험만으론 안 돼. 육체만으로 안 돼. 이성을 통해 느낄 수 있어야 해.”
 
 
  죽음의 인식과 數學
 
서울 평창동 서재에서 이어령 선생이 ‘겨울 나그네’를 읽고 있다.
  ― 철학자 베이컨은 ‘최고의 증거는 단연 경험’이라고 했는데, 경험론자는 결국 경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어요.
 
  “수학(數學)이라는 학문을 생각해봐요. 수학은 배우지 않고 알 수 있나요? 절대 안 되거든. 숫자라는 것은 경험적인 게 아니거든. 우리는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지. 그러나 아냐. 수학만 하더라도 경험과 언더스탠딩만으로는 안 돼. 이성의 힘을 가졌을 때만이 수식을 계산할 수 있고, 사칙연산을 할 수 있고, 대수와 기하학을 배울 수 있는 거야. 경험적인 게 아냐.
 
  각 나라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1+1=2, 2+2=4는 어디서든 통해요. 이성은 달나라에서도 통하고, 지구에서, 우주에서도 통해요. 인간이 없어도 통합니다.
 
  (수학은) 인간 경험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초등학교 선생님이 수학을 경험으로 가르치려 하는데 잘못된 거여.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아이들에게 던져. ‘사과 5개 중에서 3개를 먹으면 얼마나 남았어?’라고. 아이가 ‘3개 남았다’고 답해. 선생님이 짜증을 내며 ‘아니, 2개 남았지 왜 3개야?’ 하고 되물어. 아이가 태연하게 이렇게 말해.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먹는 게 남는 거래요’라고.(하하하)
 
  수학은 경험만으로 답을 찾을 수 없어. 이성이라야 풀 수 있어.
 
  고대 이집트의 수학 지식을 적어놓은 두루마리인 《린드 파피루스》에 낙타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주 흥미로워요. 아버지가 자식 셋에게 낙타 17마리를 나눠 가지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장남에게 전체 낙타의 2분의 1, 차남에게 3분의 1, 막내에게 9분의 1을 가지라’고 한 거지.
 
  삼 형제가 머리를 싸맸어. 아버지 유언대로라면 장남은 17마리의 2분의 1인 8.5마리, 차남은 17마리의 3분의 1인 5.666…마리, 막내는 17마리의 9분의 1인 1.888…마리를 가지게 되는 셈이야. 그런데 온전한 낙타를 죽여서 나눌 수 없으니, 형제들은 답답했어요.
 
  이때, 지나가던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어요. ‘내 낙타를 한 마리 빌려줄 테니 다시 한 번 나눠보는 게 어떻겠소?’라고.
 
  삼 형제는 갸우뚱하면서 낙타 18마리를 기준으로 다시 계산을 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장남은 낙타 18마리의 1/2인 9마리, 차남은 18마리의 1/3인 6마리, 셋째는 18마리의 1/9인 2마리를 가지게 된 거야. 게다가 형제들이 낙타를 다 나누고도 신기하게 노인의 낙타 한 마리가 남았어.”
 
  ― 와! 신기하네요. 가공의 숫자를 넣으니 정확하게 9+6+2+1이 될 수 있다니….
 
  “수학이라는 게 인간 경험과 관계없는 숫자적 질서, 이성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
 
  복잡하게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코로나19를 통해 감각으로만 느끼던 죽음, 일상적 경험만으로 알 수 없던 죽음을, 이제야 이성을 통해 만나고 알게 된 거지.
 
  코로나19 현상은 이성을 통해 내다보는 ‘메타언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경험적 지식을 인간을 초월한 이성적 질서로 바라보게 된 것이지. 감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실체를 언더스탠딩하게 된 거지.”
 
 
  “완벽한 죽음의 모든 요소를 가진 죽음”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이 레스코프.
  ― 역설적인 발견이네요.
 
  “인류가 절대 선을, 초월적인 것을 못 느꼈는데 이 포스트 코로나로 인해 경험을 떠난 초월적 상태로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된 겁니다. 저 아프리카든, 서양이든, 동양이든 인류가 다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로서 코로나19를 똑같이 경험하게 됐다는 거야. 놀라운 역설이지.”
 
  ― 포스트 코로나에서 죽음의 문제를 새롭게 직시하게 된 거네요.
 
  “그동안 죽음은 개별적인 죽음에 불과했어요. 그러나 영국 철학자 로스(Ross)의 말처럼 한 개인의 결단은 결코 외로운 섬이 아니었어요. 이병철씨가 소위 재벌로서 빈틈없이 살아오다가 죽음에 직면하면서 24가지 질문에 부딪힌 것과 같아요. 코로나19는 개별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죽음이거든. 이병철 회장이 죽음에 직면하면서 이성의 세계, 초월의 세계에 들어갔듯이 말이죠. 24가지 질문을 포스트 코로나에서 재벌이든 가난한 자든 다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도 암을 통해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었어요. 겉으로 보기에 단절(isolation)의 죽음, 격리된 죽음이었어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죽음이죠. 친척도 못 만나. 죽어도 장례식을 못 해. 포로수용소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더 절박해지고 더 불안해졌어요. 옆에서 눈물 흘려줄 사람도 없이 그냥 죽습니다. 상징적으로 보면 거의 완벽한 죽음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어.”
 
  ― 포스트 코로나는 스스로 결단하고 성찰하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페스트를 겪으며 무신론이 나왔지만 거꾸로 더 기독교적인 게 나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포스트 코로나에서는 교회에 갈 수 없고 교회가 병균의 온상지처럼 비칩니다. 결과적으로 포스트 코로나 이후 기독교가 타격을 받는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새롭게 보이고, 소위 ‘얼굴이 드러났다’, 민낯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영어의 페르소나(persona), 즉 ‘숨어 있는 얼굴’과 만나게 된 겁니다. ‘어, 저 사람 안면 바꾸네!’ ‘어, 저 사람 자기의 숨겨져 있던 얼굴을 드러냈네!’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인격이 어느 순간 드러나는 거지요. 골프 치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하잖아요. 보통 때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골프 치면 막 속이고…. 운전을 하면 자기 성격이 드러난다고 하듯이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죠. 숨어 있는 제 모습이, 감춰져 있는 제 얼굴이 드러나는 게 바로 ‘품격(品格)’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예수님의 얼굴이 드러난 거야. 보통 때 볼 수 없던 교회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난 겁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하는 소위 ‘얼굴’이 드러나 보이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선생은 니콜라이 레스코프(Nikolai Semyonovich Leskov·1831~1895)의 중편소설 〈땅끝에서〉(1876)를 길게 이야기했다. 이 소설은 러시아정교회의 대주교가 시베리아 원주민과 겪었던 사건을 회고 형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누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는가
 
동방정교회의 대성당이던 아야소피아에 있는 13세기 예수의 모자이크상. 백인 얼굴에 갈색 긴 곱슬머리와 턱수염을 하고 있다. 터키 아야소피아 박물관(옛 동방정교회 대성당)에 있는 13세기 예수의 모자이크상.
  “어느 도시의 수도원장 객실에서 저명한 인사들이 모여 예수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어요. 원장인 대주교가 자신이 젊은 사제 시절 ‘예수님 얼굴’을 본 기억을 떠올리면서 소설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성으로는 절대로 접할 수 없는 ‘예수님 얼굴’을 스토리텔링으로 만나게 됩니다. 어때요? 궁금하지 않아요? 그가 본 ‘예수님 얼굴’ 말이에요.”
 
  일부러 뜸을 들이던 스승의 이야기는 오늘 나눈 우리 대화의 큰 마침표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주교의 열혈청년 시절 그는, 시베리아 오지를 지망하여 이교도인 야쿠트인들이 사는 시베리아 변방의 수도원장으로 가게 된 거지. ‘저 미개한 교구’, 그러니까 러시아 변방, 죄수들이나 샤먼을 믿는 이교도 원주민이 사는 시베리아 벌판에 도착한 거야.
 
  사명감을 갖고 뛰어든 것인데 그가 마주한 현장은 엉망진창이었어. 엉터리야. 교리가 뭔지, 기도드리는 법도 몰라. 성경도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는 반(半)문맹자에다가 이교도를 보드카로 개종시키는 선교를 하는 거야. 하나에서 열까지 교리에 어긋난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수도원 내 암자에서 생활하던 ‘유로비지뷔’의 키리아크라는 수도사의 행각에 대해 젊은 사제는 요즘 시쳇말로 ‘왕 뚜껑’이 열린 거야. ‘유로비지뷔’를 ‘성우(聖愚)’라고 번역하는데, 문자 그대로 ‘바보 미치광이’같이 생활하면서 자신의 삶을 신(神)에게 바치려 고행을 자처하는 자야. 중세 러시아에서 유행하여 많은 성인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 열혈 수도원장과 성격이 180도 다른 ‘성우’ 한 사람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셈이지.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이교도와 잘 소통하는 ‘성스러운 바보’ 수도사와 더 가까워요.
 
바르톨로메오스 정교회 세계 총대주교. 2018년 서울 마포구 한국정교회 대교구청에서 열린 ‘성 니콜라스 대성당 건립 50주년’을 기념해 방한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시베리아의 이교도 마을에 선교하러 가게 됐어요. 혹한의 시베리아 설원 한복판에서 조난을 당하게 되었어요. 한심한 바보 수도사, 게다가 들짐승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공포의 이교도 개썰매꾼과 함께 말이지. 이 개썰매꾼에게서 순록 가죽의 악취와 말린 생선의 썩은 냄새, 사람의 땀 냄새 등 온갖 것이 섞인 냄새가 나.
 
  그런데 고립무원 상태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이 두 사람이 ‘잘난’ 수도원장을 구하기 위하여 눈보라 속에 몸을 던진 거지.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 결론만 서둘러 말할게요.
 
  결국 그 ‘유로비지뷔’의 미치광이 수도사는 젊은 수도원장을 살리기 위해 설원의 한 움막집을 발견하고 끝내는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돼. 그때 수도원장이 죽은 수도사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미소를 띤 평화롭고 온화한 얼굴, 바로 ‘예수님의 얼굴’이었던 것이지.”
 
  ― 평소에 알던 미치광이 바보 얼굴이 아니었군요.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본 것이군요.
 
  “그래요. 그랬지요. 그것을 러시아 말로 ‘리치노스트’라고 해요. 고어(古語)로 거슬러 올라가면 ‘얼굴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숨어 있던 ‘페르소나’, 자신도 모르는 영혼의 깊은 바닥에서 드러나는 영원한 생명의 얼굴을 뜻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만난 예수님의 미소
 
  ― 놀랍네요. 바보 같은 수도사가, 이교도인 원주민이 더 예수님의 얼굴과 닮았다는 사실이 말이죠.
 
  “경전을 모르는 바보 같은 사제, 이교도를 차별하지 않는 멍청한 사제가 오히려 똑똑하고 교회 예절과 경전에 능통한 사제보다 더 예수님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지. 바로 키리아크 수도사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된 거야. 남의 목숨을 위해 설원을 묵묵히 걸어가는 개썰매꾼 모습에서 말이지.
 
  그 두 사람의 모습에서 진정한 선과 본질적인 종교적 심성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그때 나타난 것이죠. 생각해보라고요. 어쩌면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예수님의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을 테고, 코로나19로 격리된 공간에서 외롭게 죽어갈 때 아마 예수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야.”
 
  ― 어쩌면 코로나19가 은총일 수도 있겠네요.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살다가 처음 ‘격리’를 경험하는 거야. 넘쳐나는 시간과 마주하는 거지. 그런데 그 시간이 고문과 같은 시간이야. 숨어 있던 선한 예수님 얼굴을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코로나19가 누구에게는 은총, 누구에게는 고통인 거지.”
 
  ― 코로나19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자는 말씀이지요.
 
  “마스크를 보라고. 마스크는 나를 병균에서 보호하지만 다른 이에게 병균을 안 옮기는 이타적인 역할도 하고 있잖아요. 마스크를 쓰면서 내 얼굴이 감춰지는 게 아니라 드러나 보여. 그게 페르소나야. 가면을 쓰면서 내 성격이 드러나는 거야. 가면무도회가 바로 그거라고.
 
  나는 제자들이 많은데 게네가 그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는지 요즘에야 알게 됐어요. 일흔이 된 늙은 제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나를 찾아왔어요.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주름이 하나도 안 보여. 하하하. 눈만 보이는데, 와… 눈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게 되니, 새롭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눈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제야 참된 얼굴이 드러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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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cmaca    (2021-05-24) 찬성 : 0   반대 : 1
공자님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원래부터 지식인은 아니고, 공자님과 에수님이 그렇게 가르쳐서, 하느님을 알고, 仁이나 사랑을 배운것에 해당됩니다.

2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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