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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

“시민이 원한다면 울산시장 선거 출마하겠다”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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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계 은퇴 후 고향서 野人생활 10개월… 국회 시절보다 마음 편해
⊙ 현역 때 울산과기원법 통과, 암·권역별심뇌혈관·광역치매센터 개소 ‘성과’
⊙ 심각한 脫도시 현상으로 존립 위기 울산… “R&D 기능 보완 절실”
사진=정갑윤 제공
  다선(多選) 정치인의 숙명인 걸까. 은퇴를 해도, 한 게 아니다. 지난 2020년 5월 정계를 떠난 정갑윤(鄭甲潤·70) 전 국회부의장을 만났다. 그가 5선을 지낸 지역구, 울산 중구에서다. 정 전 부의장은 “국회 활동을 할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하다. 역시 고향이 좋다”며 웃었지만, 그 이면에는 문득 수심(愁心)도 묻어났다. 나라 걱정, 울산 걱정 때문이다.
 
  ― 야인(野人)이 된 지 10개월 정도 됐죠. 뭘 하며 지냅니까.
 
  “전 같았으면 공적 스케줄을 따랐을 텐데 요즘은 스스로 일정을 짜요. 1시간짜리 일정에 1시간30분~2시간을 쓰죠. 느긋합니다. 코로나19 정국만 아니었으면 고마운 사람들과 막걸리 한잔 했을 텐데, 그건 아쉽죠.”
 

  공식 행사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고 했다.
 
  “10개월 동안 딱 세 번 나갔어요. 현역들이 불편해하거든요. 제가 가면 ‘선배님’ 하면서 챙겨줘야 할 것 아닙니까. 주최 측에도 예의가 아니고요. 야인이 됐으면 잊힐 줄도 알아야죠. 미련은 없습니다.”
 
 
  ‘울산의 어른이 되겠다’
 
2015년 5월 여의도 국회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사진=정갑윤 제공
  장장 30년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1991년 경상남도 의원으로 시작, 2002년 제16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울산 중구에서만 내리 5선을 했다. 친박(親朴) 좌장(座長)으로 통했다. 19대 때는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한 번만 더 당선되면 국회의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20년 2월 17일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미래통합당 출범일.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심정이었다. 정 전 부의장은 “울산 지역 최초 국회의장이 된다는 건 정치사에서도 큰 의미”라면서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아쉬움은 다 털었다. 돌이켜보니 (불출마 선언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속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현역 시절 항상 ‘울산의 어른이 되겠다’ ‘후배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는 선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면서 “두 가지 목표는 나름 이뤘다고 자평한다”고도 했다.
 
  ― 요즘은 시민들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겠군요. ‘울산의 어른’이 보기에 지역 내 가장 큰 문제점은 뭡니까.
 
  “국가도 상당히 위기지만, 울산 또한 광역시가 된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시민들도 많이 체감하고 있더군요. 각종 경제지표가 하락하면서 탈(脫)울산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울산은 외지인 비율이 서울 다음으로 높아요. 원주민은 15%밖에 되지 않죠. 다들 일자리를 찾아 몰려온 건데, 그게 줄어드니 떠날 수밖에요. 울산 지역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처한 겁니다.”
 
  ― 불출마 선언 당시에는 정계를 아주 떠나겠다고 했는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앙무대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정 의원의 마지막 봉사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제법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회 떠날 때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의정 활동을 워낙 오래했고 나이도 있잖아요. 손톱만큼도 생각이 없었는데….”
 
  ― 없었는데, 지금은요.
 
  “사실 상당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6월쯤 되면 내년 지방선거 얘기가 슬슬 나올 텐데, 그때 시민들이 부르면 나서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라는 목소리도 불출마 결심에 한몫한 걸로 압니다만.
 
  “제가 정치인이지 않습니까. 위기를 타개할 적임자는 정갑윤이다, 라는 요구가 있다면 그걸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내년 울산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분들을 보니, 모두 70대더군요.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어떤 경험을 갖췄느냐가 판단 기준이 될 거라 봅니다.”
 
 
  존립 위기 울산, 구하려면?
 
  ― 만약 시민들이 부른다면, 위기는 어떻게 타개할 생각입니까. 이를테면 탈(脫)울산 대책은 뭘까요.
 
  “울산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산업수도입니다. 그러나 대량생산 시대는 지났어요. 고품질 소량생산, 첨단 제품을 요구하는 때입니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연구개발(R&D)이 뒷받침돼야 해요. 현재 울산에는 R&D를 동반하는 기업이 거의 없습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의 연구소가 남양(화성)과 판교로 가버렸잖아요. 이제 울산은 단순 생산기지, 물류기지가 된 겁니다. 앞으로 더 어려워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저는 2004년부터 ‘호황일 때 미래를 준비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성장・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R&D 기능을 보완해야 합니다.”
 
  국회의원 시절 울산과학기술원법을 마련한 것도 그래서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를 울산과학기술원으로 전환해 지역 내 R&D 성장동력을 확충할 기반을 구축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울산 주력 산업의 고도화·첨단화를 지원하고, 연구 중심 대학으로서 지역 기업과의 R&D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중저준위(中低準位)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를 주장한 것도 그 차원이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울산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건 뭇매였죠. 어떻게 핵쓰레기장을 가져오자고 하느냐며 난리가 났고 결국 경주로 가버렸죠. 그때가 2005년, 공기업 지방 이전 즈음이에요. 저는 그때 한전을 패키지로 묶었어요. ‘한국전력공사 유치를 위한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라고요. 그런데 처리장만 왔어도 대박이었을 겁니다. 고위험이라고 하는데, 위험할수록 첨단 기술이 수반되는 법입니다. 울산에 그런 우수한 인재가 모여 산다면 경쟁력이 있었을 텐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는 울산 최초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지냈다. 3선인 박맹우 전 울산시장은 “정갑윤 전 부의장처럼 울산에 많은 예산을 확보해준 국회의원은 없었다”고 했다. 그만큼 성과도 많다. 도의원 시절 광역시 승격에 일조한 데 이어 국회 입성 후에는 KTX 울산역 유치에 힘썼다. ‘태화강 국가정원’에도 그의 땀이 배어 있다. 주거용지를 하천부지로 편입시키는 발상의 전환으로 토지보상비 727억원을 확보해, 태화강을 대한민국 제2호 국가정원으로 탄생시켰다. 의료서비스 개선에도 공을 들였다. 임기 동안 지역 암센터, 권역별심뇌혈관센터, 광역치매센터를 개소했다.
 
 
  내년 지방선거 의미 남다른 이유
 
정 전 의원은 울산에서 내리 5선을 했다. 지역민들과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사진=정갑윤 제공
  그는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부산에서 고등학교(경남고)를 다닐 때와 서울서 1년간 재수하던 때를 제외하곤 고향 땅을 떠나본 적이 없다.
 
  ―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고 2년 선배죠. 학교 다닐 때 마주친 적 있습니까.
 
  “아니요. 그땐 그냥 다 같은 촌놈이었으니까 특별히 서로 눈에 띄고 그러지 않았어요. 처음 본 건 제가 초선 때였을 겁니다. 온양온천에서 한국청년회의소 정기총회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문재인 대통령이 스피치를 했는데, A4용지 한 장을 달랑 들고 단상에 올라가더군요. 좀 단정하게 큐카드 같은 걸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게다가 마이크 조절도 잘 못 하기에 ‘수없이 많은 스피치를 했을 텐데 마이크 조절 하나 못 할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보니 대통령이 됐더군요.”
 
  ― 앞서 ‘국가도 상당히 위기다’라는 말을 했는데요,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국가 정체성 자체가 무너지고 있잖아요. 경제는 살리면 되지만, 국가 정체성은 다시 살리기 힘듭니다. 사회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 그 갈림길에 서 있다고요. 사회주의는 3~5%의 지도부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나머지는 다 빈곤층으로 만들어야 해요. 지금 보세요. 그때그때 재난지원금 쥐여주며 따라오게 만들잖아요. 정말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도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어요. 앞으로 한 번 더 정권을 빼앗기면 회복 불능 상태가 될 겁니다. 내년 지방선거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죠.”
 
  ― 선거에 있어 ‘울산 토박이’라는 한계는 없겠습니까. 지역 이해도는 높겠지만 한편으로 혁신성이나 유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역자치단체가 된 1997년 이래 총 4명의 시장이 있었습니다. 심완구 초대 시장 이후 3선 한 박맹우 시장, 김기현・송철호 시장까지요. 이 중 세명은 원주민이지만 객지에 있다가 선거만 여기서 치렀죠. 저처럼 오랜 세월 고향에만 있던 사람이 잘 없긴 해요. 그만큼 애정, 애향심이 강하다고 자부합니다.
 
  또 다른 차별성은, 다른 분들은 이곳이 거쳐 가는 곳이지만 저는 마무리하는 자리입니다. 제가 시장을 하다가 국회의원을 한다거나, 대통령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요. 인생을 매듭짓는 단계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장점으로 작용할 거라 봅니다.”
 
  ― 보통 거쳐 가는 자리에서 더 열심히 하지 않나요.
 
  “제 경험상, 그런 욕심에서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울산시장은 어려운 자리
 
  ― 송철호 울산시장의 시정 활동은 어떻게 봅니까.
 
  “남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언론 보도에 보면 그의 직무평가가 (타 지자체장과 비교했을 때) 거의 꼴찌 수준이던데, 사실 이는 울산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와 맞물린 결과라고 봅니다.”
 
  지난 4월 9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발표한 전국 시도지사의 3월 직무수행 평가에 따르면 송철호 울산시장은 17개 시도지사 중 가장 낮은 점수(32%)를 얻었다. 송 시장은 앞서 수차례 여론조사와 직무평가 등에서 항상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 구조적 한계이지, 개인 역량과는 별개다?
 
  “참 열심히 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실제로 송철호 시장에게는 남다른 장점이 있어요. 노무현 정부 때 장관급 자리인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냈고, 문재인 대통령과는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이는 다른 말로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위치라는 건데, 사실 그런 사람이 광역단체 선거에 출마하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 의리가 있다는 건가요, 청렴하다는 건가요.
 
  “단정 지어 말하긴 그렇고요. 정부 정책사업 예산을 얻는 데 누구보다 유리한 위치인데도 계속 성적이 좋지 않잖아요.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맡았을 때는 과연 어떻겠냐는 거죠.”
 
  ― 울산시장직이 그만큼 어려운 자리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봐야죠.”
 
  ― 그런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원하면 나서겠다?
 
  “울산 시민들이 오늘날 정갑윤을 만들었고, 저는 여기서 뼈를 묻을 사람입니다. 시민들이 원하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지요.”
 
  보통 지방에서 국회에 입성하면, 가족들은 서울로 적(籍)을 옮긴다. 지역구에는 적당히 머물 곳을 마련해둔다. 정 전 부의장은 반대였다. 집은 울산에 두고 서울에서는 원룸을 얻어 생활했다. 그 때문에 아내 박외숙 여사와는 오랜 기간 주말부부로 지냈다.
 
 
  부인의 조용한 내조
 
5선의 위엄을 달성한데는 아내 박외숙 여사의 조용한 내조가 한몫했다. 박 여사는 정 전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기 훨씬 전부터 지역 내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사진=정갑윤 제공
  ― 서울로 이사를 왔다면 편했을 텐데요. 굳이 그 긴 시간 주말부부를 한 이유가 뭡니까.
 
  “제가 5선을 할 수 있었던 건 울산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배지를 달아준 겁니다. 근데 그걸 저버리고 갈 수 있겠어요? 아내가 함께 못 왔던 것은, 집사람이 IMF 즈음해서 울산에서 식당을 운영했었습니다.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1998년 개업해서 한 십몇 년 했어요. 그걸 갑자기 접을 수가 없기도 했죠.”
 
  ― 갑자기 못 접을 정도면 맛집이었나 봅니다.
 
  “갈빗집이었는데, 단기간에 맛집으로 소문이 나긴 했죠. 손님이 바글바글했으니까요. 국회의원 되기 전에는 제가 점심, 저녁때 가서 발레 파킹을 해줬어요. 1998년부터 2001년까지인가 그래요. 그때는 염색을 안 해서 머리가 셌거든요. 제가 ‘키 꽂아놓고 가세요’ 할 거 아닙니까. 어느 날은 어떤 손님이 키를 안 꽂고 식당 카운터로 가더니 ‘저 밖에 머리 흰 아저씨한테 차키 맡겨도 되느냐’고 하더군요. 허허. 명색이 도의원도 하고 국회의원 출마도 했는데, 집사람이 그 얘기 듣고 기분이 별로였는지 ‘염색하자’고 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누이 “울산 시민 덕분”이라고 했지만 부인의 내조가 없었다면 5선의 위엄은 달성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박 여사는 묵묵히 울산에 머물며 지역민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정 전 부의장이 국회의원이 되기 훨씬 전인 1992년부터 봉사활동을 했다. 일주일에 몇 번이고 급식소 봉사를 하고, 김장 등 철마다 치르는 행사에 빠지지 않고 나가 일꾼이 되길 자처한다.
 
  그렇다고 ‘국회의원 부인’ 타이틀로 활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실제로 인터넷 검색창에 ‘정갑윤 부인’이라고 쳐보면 이렇다 할 기삿거리를 찾기 힘들다. 정 전 부의장은 “아내에게 항상 ‘당신 이름으로 단상에 올라가는 건 괜찮지만 남편 이름으로는 결코 올라가지 마라’고 말한다”고 했다.
 
 
  재산 불리기보다 나누기 바빠
 
  부창부수다. 정 전 부의장은 산골 농부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됐지만, 가난 때문에 그저 소 먹이고 나무하고 풀 베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사는 어르신께 천자문을 익히는 것으로 배움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건 동네 이장 덕분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문 배달을 하며 직접 용돈을 벌었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울산에서 공부깨나 하는 학생들만 간다는 부산 경남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경사였지만, 입학금 7350원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 성금을 모아줬다. 대학생이 되자 큰형님의 목재소 사업이 번창해 형편이 나아졌다. 여유가 조금 생기자, 그간 받은 만큼 나눠줘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야학에 나가 학생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고, 방학이 되면 면 단위마다 있는 재건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정 전 부의장은 “5선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다”면서 “나는 지금까지 ‘가슴으로 하는 정치’를 해왔다. 이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흔히 다선 의원이라고 하면 재산을 많이 일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고정관념”이라면서 “의원직 마무리하고 나니 딱 집 한 채, 차 한 대, 그리고 빚 조금이 남더라”고 했다.
 
  현역 시절에도 재산 불리는 데엔 관심이 없었다. 정 전 부의장의 한 지인은 “그의 집에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5선 의원의 집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소박했다”고 했다. 그보다 나누기 바빴다. 2008년부터 매월 세비의 약 10%를 지역복지단체 5곳에 쌀로 기부했다. 2012년과 2015년에는 각각 장기와 각막 기증에 서약했다. 긴 세월 쌓은 나눔 철학으로 국회의원 중 두 번째로 ‘아너 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기부자 모임)’ 회원이 됐다.
 
 
  태화강 국가정원을 걷다
 
울산 십리대나무숲에서 정갑윤 전 의원. 사진=정갑윤 제공
  인터뷰가 끝나자 오후 5시 무렵이 됐다. 정 전 부의장은 “해가 지기 전에 태화강 국가정원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차로 10분 거리. 가는 동안 그는 이따금씩 차창 밖 지형물에 대해 설명했다. 중구 우정동 앞을 지날 때는 “저곳이 옛 목재소가 있던 자리”라고 소개했다.
 
  공원은 무척 넓었다. 50만m2(약 15만 평)이니, 축구장(7140m2)의 약 70배 크기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느냐”며 감탄하자 “이게 다 시민들이 만든 공원”이라고 했다. 특히 십리대나무숲은 장관이었다. 지난 태풍 때 쓰러진 대나무 몇 그루를 보고는 자식 일처럼 안쓰러워했다. 산책을 나온 시민들은 정 전 부의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렸는데도 다들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 만일 시민들이 정갑윤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면 다음 계획은 뭡니까.
 
  “아이고. 이제는 마, 쉬어야죠. 제가 어디 울산시장 자리가 탐나서 한답니까. 울산을 구하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하면 간다는 거예요. 안 부른다면 더 이상 할 이유가 없지요. 빚은 쪼매 늘겠지만요,허허.”⊙
 
정융기 울산대병원장
 
  “암센터 건립, 울산 지역 의료서비스의 비약적 발전 도왔다”
 
2019년 울산대병원 울산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 개소식. 왼쪽에서 일곱 번째 흰 가운이 정융기 울산대병원장이다. 사진=정갑윤 제공
  10년 전만 해도 울산 시민들은 암 치료를 받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가야 했다. 2011년 울산대병원에 암센터가 생기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지역 내 암 환자의 무려 50%가 이곳을 찾는다. 원래 지역암센터는 국립대학병원에만 건립할 수 있었다. 울산대병원은 사립병원이다.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은 국회 예결위원장 시절부터 사립대병원도 지역암센터를 건립할 수 있도록 입법 활동을 하는 등 팔방으로 뛰었다. 암센터 건립 시 건축추진 단장을 맡아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 정융기 울산대병원장은 “울산 지역 암센터 건립은 지역 내 의료서비스를 개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면서 “이와 더불어 울산대병원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울산대병원은 2019년 울산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도 개소했다. 심혈관센터, 뇌혈관센터, 심뇌재활센터, 예방관리센터를 운영해 심뇌혈관질환의 예방과 치료, 재활까지 통합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자연히 고객 만족도도 올랐다. 지난 3년간 암, 심뇌질환 등 중증질환에 대한 정부의 각종 의료 질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1등급을 받았다. 보건복지부가 퇴원 환자를 대상으로 직접 조사하는 환자 경험 평가에선 전국 4위에 올랐다. 이를 바탕으로 영남권 1위, 전국 6위라는 성적을 거머쥐었다. 최근에는 상급종합병원으로 재지정되기도 했다.
 
  정 병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1987년)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병원 연수를 마쳤다. 간담도와 췌장 등 복부 영상 분야 권위자로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을 거쳐 1998년 울산대병원에 부임했다. 기획실장과 진료부원장 등 주요 보직을 거쳐 지난 2017년부터 병원장을 맡았다. 올해 세 번째 연임했다. 그는 “병원 내 요직에 있다 보니 지역사회의 여러 리더를 알게 됐다”면서 “특히 지역 내 최다선 의원인 정 전 부의장은 의료계 발전에 관심이 깊고 품이 넓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분”이라고 했다. ‘지역사회 리더들’에게 바라는 점도 덧붙였다. 정 병원장은 “의료서비스는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지만, 보통은 간헐적, 혹은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면서 “병원을 어떠한 ‘큰일’이 있어야 가는 곳이 아닌, 생활밀착형 기관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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