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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

4전5기의 신화 홍수환

“한 방 크게 때리려는 사람은 한 방 크게 맞을 생각도 해야 한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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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한 아버지 따라 어려서부터 권투 구경 다녀
⊙ 아널드 테일러와 경기 전, 테일러에게 해고당한 트레이너가 찾아와 조언
⊙ 사모라와의 2차 방어전에서 패한 후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한 죄인’이라며 영창… 유격훈련 보내
⊙ “쫓아 들어가며 날린 펀치에 카라스키야의 눈이 휙 돌아가는 게 보였다”
⊙ “카라스키야는 나를 강사로서 평생 먹고살게 해준 은인… 만나면 지금도 반갑다”
사진=조준우
  한 시대(時代)를 담고 있는 인생이 있다. 한국에서는 홍수환(洪秀煥·71)이다. 그의 인생은 1970년대를 상징하고 대표한다. 1970년대는 ‘풍요’가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던 시대다. 절량농가(絶糧農家)가 사라졌다. 남북 종합국력에서 거대한 역전(逆戰), 골든 크로스(golden cross)가 일어났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근대화·도시화는 생활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수요를 낳는 법. 스포츠는 1970년대를 관통하며 새롭고 주요한 여가(餘暇)로 떠올랐다. 고교야구는 지역주의와 향토애(鄕土愛)를 대표했고 국가대표 축구는 국제화를 상징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아시아권 국가들이었다.
 
  우리 민족은 세계 정상(頂上)으로 나아갈 수 없는가. 이 콤플렉스를 채워준 스포츠가 바로 프로복싱이다. 1966년 김기수의 첫 세계 챔피언 등극(登極) 이후 프로복싱은 한국인이 세계인들에게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명함이 되었다. ‘우리도 잘하는 것이 있어요’라는 호소와 자랑. ‘세계 챔피언 보유국’은 국제사회에서 한 등급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모두가 믿던 시대다.
 
 
  ‘단군 이래의 멋쟁이’
 
  1968년 5월 김기수의 WBA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상실 이후 무관(無冠)의 세월을 보내던 대한민국에 멀리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승전보(勝戰報)가 들려왔다. 1974년 7월 3일, 만 24세의 파릇파릇한 청춘 홍수환이 들려준 쾌거였다. 승전 1성(聲)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였다. 어머니의 화답은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
 

  1970년대의 또 다른 아이콘 제세산업(制世産業) 신화의 주인공 이창우(李彰雨)는 3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 셀러 《옛날 옛날 한 옛날》에서 홍수환을 두고 ‘단군 이래의 멋쟁이’라고 평했다. 다른 선수들은 후원자에게 감사하며 비장한 문어체(文語體)로 승리 소감을 전했지만, 홍수환의 한마디는 기쁘다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살아 있는 언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홍수환은 일정 부분 불화(不和)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한국 사회는 시대를 앞서간 원더 보이의 개성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이고 억눌렀다. ‘네 존재 자체가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정도의 분위기였다고 할까. 신데렐라 보이의 탄생, 초반 KO패로 타이틀 상실 후 급전직하(急轉直下), 모두가 진다며 후원을 꺼렸기에 전 재산을 팔아 자비(自費)로 대전료(對戰料)를 마련하고 격돌한 리턴매치의 장렬한 신화(神話), 희망이 없던 존재가 다시 살아나 써 내려간 4전5기의 전설, 인기의 정점에서 느닷없이 터진 스캔들과 무기력한 패배…. 홍수환의 생애는 그래서 1970년대의 빛과 그림자의 축소판이다.
 
 
  야구에서 권투로
 
1977년 카라스키야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수경사 헌병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개선 퍼레이드를 벌이는 홍수환 선수. 그는 당시 국민적 영웅이었다. 사진=조선DB
  ― 고향은 어디입니까.
 
  “서울입니다. 1950년 5월 26일이 생일이죠. 아버지 홍경섭(洪京燮·1914~1964), 어머니 황농선(黃弄善·1921~1994) 두 분 모두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인 실향민(失鄕民)입니다. 가족 모두가 6·25 전에 월남했어요. 우리가 7남매인데, 형 두 분과 누님은 신의주 태생이고 저부터 밑으로는 서울 생입니다.”
 
  ― 아버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강원도 황지(지금의 태백)에서 광산도 경영하시고, 서울에서 버스 회사 일도 하시고…. 가끔씩 ‘빨갱이가 얼마나 지독한 줄 아느냐?’고 하신 말씀도 기억합니다. 우리 집안이 영락교회와 새문안교회를 다녔는데, 지금도 할머니가 성경 읽어주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가끔 교회에 안 나가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소주도 무척 좋아하셨고, 권투 팬이셨습니다.”
 
  홍경섭 옹은 그냥 권투 팬이 아니었다. 월남(越南) 후 거의 모든 경기를 빠짐없이 관전한 골수팬이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어린 아들 홍수환을 데리고 다녔다. 홍수환씨는 아버지가 유독 아들 중 왜 자신만 데리고 다니셨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버지는 제가 운동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주먹맛 좀 보자며 배를 때려보라고 하시기도 했고…. 저를 그렇게 아껴주던 아버지가 1964년, 제가 중2 때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몸이 빠르고 머리도 좋은 홍수환 소년은 운동이 좋았다. 처음 고른 종목은 야구다. 중앙중학교에서 유격수로 뛰었지만, 고교 진학해서는 동급생 중에서도 후보로 밀려났다. 1966년 6월,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이 되어 카퍼레이드 펼치는 모습을 본 후 권투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김기수 경기를 보러 가서 경기가 끝나고 나면 그의 다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운동 마치고 명보극장 옆 목욕탕을 갈 때 따라간 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복싱을 하면 아버지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一聲
 
홍수환 모자. 수송초등학교 4학년 때 허바허바사장에서 찍은 사진 원본은 모 신문사에서 가져갔다. 뒷날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 팬을 자처한 화가가 그림으로 그려 선물해줬다. 사진=홍수환 제공
  앞집에 초대 한국 페더급 챔피언 김준호(金俊鎬, 서강일·염동균·김태식·이승훈 등 조련)가 이사를 온 것도 운명의 손짓이었다. 김준호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선수였고, 그의 아들 택구와는 동년배 동네 친구로 자주 어울렸다. 김준호는 아마추어 전적 2전2패를 기록한 홍수환에게 “차라리 프로로 가라”고 권했다. 김준호 집에서 합숙하며 데뷔 준비를 해 1969년 5월 10일 김상일을 상대로 4라운드 경기를 치른다.
 
  “데뷔전은 무승부였죠. 한데 제가 김준호 선생 밑에서 운동해서 비긴 거지, 사실은 진 경기입니다. 김상일 선수는 부산 선수였는데, 꼭 한번 보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KBS2 TV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제작진도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반대하던 여장부 어머니가 일성(一聲)을 발했다.
 
  “기왕 시작한 거, 한 번은 이기고 끝내라우.”
 
  황 여사는 이 경기 이후 매번 체육관을 찾아 링사이드에서 아들의 경기를 관전했다. 아버지 사후 어머니는 큰형과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 스낵바를 운영하며 7남매를 부양했다. 당시 평택에서 훈련받은 카투사(주한미군 배속 한국군) 중에 황농선씨가 끓여준 라면을 안 먹어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권투 그만두고 한동안 하와이에서 허드렛일
 
  일본 원정도 두 경기 치르고, 1968년 멕시코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장규철과의 경기도 승리로 이끄는 등 나름 잘나가는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김준호 선생과 파이트머니 배분 문제로 갈등이 생긴 것. 8개월 넘게 경기가 잡히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매니저 계약을 해약(解約)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한다. 홍수환은 이후에도 김준호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애증(愛憎)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렇게 8개월을 쉰 뒤 바로 마주한 상대가 한국 챔피언 문정호였다.
 
  “타이틀을 따고 나니 저하고 붙으려는 선수가 없었어요. 승산이 없다고 본 거죠. 그래서 11월 7일에 장충체육관에서 사츄니노 오루테가(필리핀)와 경기를 했습니다. 이 선수는 원래 라이트급 선수였어요. 지금 기준으로, 저보다 무려 4체급이나 위에서 활동하던 선수와 경기를 치른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죠. 그런데 불과 5일 뒤 괌에서 콜리 살로마와 또 경기를 하게 됩니다. 서울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다음 날 새벽 5시 괌에 도착해 그날 저녁 바로 링에 오르는,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어요.”
 
  9라운드까지는 일방적으로 밀렸다. 계속 맞다 보니 오기가 생겼다. 10라운드 마지막 회에서 보디블로(상대편 배와 가슴 부분을 치는 것)로 상대를 다운시켰는데 주심이 카운트를 느릿느릿 헤아렸다. 살로마가 겨우 일어나니 시간이 남았는데도 바로 공이 울리며 경기 종료. KO로 이길 경기가 판정패로 둔갑했다.
 
  “살로마에게 지고 나서 받은 대전료가 200달러, 당시 환율로 불과 4만원이었습니다. 복싱한 것을 그때 처음으로 후회했죠. 이렇게 무리한 일정을 잡아주는 매니저(당시 김준호와 해약하고 다른 사람이었다)와 계속 일을 해야 할지…. 그 와중에 2주 후 괌이나 하와이에서 한 경기를 더 뛰라는 겁니다. 한 달에 10회전 경기를 세 번 하라니… 어이가 없더라고요. 대전료도 제대로 못 받고, 이런 대우를 받는 제가 한심했어요. 복싱이 하기 싫어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죠. 어머니와 잘 아는 분이 하와이에서 식당을 운영한다기에 주소를 받아온 게 있었어요. 그곳에서 한동안 허드렛일하며 지냈습니다.”
 
 
  태국 복싱 영웅 수코타이와의 혈전
 
  실의(失意)에 빠져 있던 그에게 황농선 여사가 국제전화를 했다.
 
  “수환아, 개수작 떨지 말고 빨리 오라우.”
 
  다시 서울로 돌아온 뒤, 그 하와이 식당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 서울 모(某) 여고에 다니던 이진희씨다. 이진희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식을 올렸다. 남아공 더반에서 챔피언이 되기 4개월 전이었다.
 

  한국 타이틀을 세 차례 방어한 뒤 필리핀의 알 디아즈를 이기고 동양 타이틀 획득했다. 1973년 2월 9일, 빅매치가 잡혔다. 동양 타이틀 방어전으로 장소는 방콕, 상대는 태국의 복싱 영웅 타놈짓 수코타이.
 
  “이 경기가 제게 세계 챔피언 꿈을 구체적으로 꾸게 해준 경기입니다. 수코타이는 당시 세계 랭킹 4위의 강자로, 태국의 국민 영웅이자 차세대 세계 챔피언 0순위였죠. 언어장애인이지만 불굴의 전사로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선수였어요. 이날 세계 플라이급 타이틀전이 열렸는데, 저와 수코타이의 경기가 메인 이벤트로 열릴 정도였으니까요.”
 
  경기는 복싱사에 남을 만한 명승부이자 치열한 난타전이었다. 승자는 8회에 역전 KO승을 거둔 홍수환 선수. 경기 후 한동안 혈뇨(血尿)가 나왔을 만큼 힘든 경기였다. 세계 랭커가 되어 귀국한 홍수환은 그해 2월 13일 입대한다. 자대 배치를 받은 곳은 복싱부가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군대 동기가 훗날 세계 챔피언을 지낸 염동균, 동양 챔피언을 지내는 김영식·양홍수, 한국 챔피언 고생근 등이었다. 군(軍) 복무 중 세계 타이틀전 날짜가 잡혔다는 낭보가 들렸다.
 
 
  테일러, 쉬운 한국 선수 찾다가 홍수환과 대결
 
  1973년 11월 3일, 남아공의 아널드 테일러가 요하네스버그에서 멕시코의 로메오 아야나를 14회 KO승으로 이겨 새 챔피언이 된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해외 매치 메이커로 일하던 로이 킴이라는 교포가 테일러 쪽과 연결됐다. 테일러는 아야나와 서로 두 차례씩 다운을 주고받는 혈투 끝에 힘겹게 정상에 오른 상태였다. 1차 방어전은 상대적으로 편안한 상대와 쉬어 가는 기분으로 하고 싶었는지 로이 킴에게 ‘혹시 한국에 좀 쉬운 선수 하나 없냐’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로이 킴은 대전 성사를 위해 ‘막 세계 랭킹에 이름이 오른 선수가 하나 있는데, 펀치가 별로 없으니 아마 무난할 것’이라고 답하고 계약서를 만들었다. 남아공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일본에 가서 비자를 받고, 홍콩-스리랑카-세이셸-요하네스버그를 거쳐 종착지인 더반까지 비행시간만 36시간이 걸린, 아무도 홍수환이 이긴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쓸쓸하고 비장한 여정이었다.
 
  이기려면 이기는 쪽으로 좋은 운이 자석처럼 달라붙는다. 그리고 눈덩이처럼 좋은 기운이 불어난다. 그것이 세상사의 묘미다. 외항 선원 한 분이 양주 한 병을 들고 찾아온 것이 승리의 전주곡이다.
 
  “이분이 출항 전 제 동양 타이틀 방어전(1974년 4월 20일 부산 구덕체육관)을 직접 보고 배를 타셨다고 해요. 세계 타이틀전을 꼭 보고 싶은데 모레가 출항이라 경기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직접 찾아왔다고 하시면서 딱 한 잔만 하자는 겁니다. 그러니 거절할 수 없었죠.”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술꾼들에게 딱 한 잔은 없다. 375ml 조니워커를 두 사람이 깨끗하게 비워냈다. 경기 나흘 전 일이다.
 
  ― 경기 전 음주라니,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됐어요. 음주 후에 제가 돌덩이처럼 푹 잤거든요. 일어나니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시차 적응을 완벽하게 마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백인 놈 꼭 좀 이겨달라”
 
1975년 3월 사모라와의 타이틀전이 열리기 전 격려 방문한 전설의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 그는 홍수환의 복싱 스타일이 ‘스마트하다’며 칭찬했다. ‘1980년대의 전설’ 슈거 레이 레너드가 슈거 레이 로빈슨을 흠모해 지은 링 네임이다. 사진=홍수환 제공
  두 사람의 귀인도 승리를 도왔다. 숙소던 더반의 팜비치호텔 사장이 먼저 제안을 했다.
 
  “테일러 경기 필름이 있다. 보겠나? 단, 조건이 있다. 우리 호텔 로고가 박힌 가운을 입고 링에 올라가는 거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경기 필름을 보고 있는데 아널드 테일러 공략법을 알려주겠다며 귀인 하나가 더 찾아왔다. 테일러에게 해고당한 작전 트레이너였다.
 
  “그 양반이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조언했죠. 테일러는 스트레이트가 좋기는 하지만 정석이 아니라 다소 어정쩡할 때 나온다고 했어요. 필름을 보면서 코치를 받으니까 작전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인종차별로 신음하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응원도 큰 힘이 됐다. 흑인은 거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기타 유색인종은 그래도 기술직에는 취업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인도계 주방장은 “백인 놈 꼭 좀 이겨달라”며 밤마다 팔뚝 두 배만 한 랍스터에다 각종 고기를 방으로 갖다 줬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에 사기충천이었다.
 
  여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 경기 당일, 링에 오르는데 태극기가 보였다. 같은 한국인의 응원은 바라기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외항선을 타고 온 20여명의 대한 건아들이 링사이드 한쪽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술친구(?)는 가고 없었지만….
 
  “우리 국적의 배가 없어 우리 청년들은 다른 나라 배를 타고 세계를 누빈다. 우리나라 배였다면 어떻게든 홍 선수의 경기를 보고 갈 수 있었겠지만….”
 
  그의 말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승리 후 링 위에서 트위스트 춘 師弟
 
현역 시절의 홍수환. 1977년 11월 카라스키야와의 대결을 앞두고 맹훈련할 때의 모습이다. 사진=홍수환 제공
  “1974년 7월 3일 더반의 웨스트브리지 파크 테니스 경기장이었죠. 1회전에 첫 펀치를 주고받아 보니 ‘오늘은 내가 이긴다!’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테일러의 전 트레이너가 가르쳐준 대로 움직이니 테일러는 전혀 거리를 맞추지 못하더라고.”
 
  1라운드 중반, 제대로 라이트를 먹였는데 챔피언은 두세 걸음 뒷걸음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첫 다운. 5회전에도 다운을 빼앗으며 경기는 일방통행으로 흘렀다. 하지만 승리로 가는 길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제가 좀 나대는 성격이잖아요. 벌써 세계 챔피언이 된 것처럼 굴다가 6회전에서 제대로 한 방 맞았어요. 귀가 찢어졌습니다.”
 
  8회전부터 오른쪽 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작전을 바꿔 신중하게 나간 이유다. 12회전이 끝나고 위기가 찾아왔다. 과다출혈을 이유로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키려고 했다. 이대로 끝나면 테일러의 12회 TKO 승. 링닥터의 결정은 속행 가능, 김준호 트레이너도 ‘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이것도 행운이 작용한 결과였다. 테일러는 눈 위 지방이 많아 잘 찢어지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룰 미팅 때 부상이나 출혈이 심해도 선수가 경기 속행 의사만 있으면 경기 중단을 안 하는 것으로 사전 합의를 했다.
 
 
  육영수 여사의 하사금
 
  14·15회전에서 다시 다운을 빼앗으며 홍수환은 세계 정상에 올랐다. 경기 후 “수환아, 이기면 링 위에서 춤 한번 추자”던 김준호 선생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제(師弟)는 신나게 ‘트위스트 한 판’을 펼쳤다. 링 아래에선 선원들이 울면서 고함치듯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대한국민 만세다!”
 
  이 대화는 경기 후 중계석에서 국제전화로 날린 멘트다. 1회전이 끝나고 승리를 감지한 MBC 고(故) 이철원 캐스터가 방송국 고위층에게 허락을 구했다.
 
  “얼른 집에 가서 황농선 여사를 방송국으로 모셔옵시다!”
 
  덧붙이자면, 2010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나이지리아와 2대 2로 비기며 사상 첫 원정 16강의 위업을 달성한 곳도 바로 더반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에 대한민국이 열광했다. 홍수환 육군 일병이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치는 장면을 TV로 생중계했다.
 
  7월 18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홍수환과 황농선 여사를 청와대로 초청했고, 그 자리에서 육영수(陸英修) 여 사가 특별 하사금 200만원을 건넸다. 당시 서울 시내 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홍수환은 100만원을 한국권투위원회 발전기금으로 쾌척하고, 경기 중 혼수상태에 빠져 입원하고 있는 문정호 선수(홍수환과 두 번 대결)의 치료비로 나머지 100만원을 전달했다. 통 큰 여장부 어머니의 뜻이었다.
 
  ― 그해 12월 28일 필리핀의 페르난드 카바넬라를 판정으로 이겨 1차 방어전에 성공합니다. 다소 부진한 경기였는데, 그때도 현역 군인이었죠.
 
  “챔피언이 되고 나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왔어요. 동양 챔피언 방어 할 때가 더 편할 정도였죠. 대스타가 됐으니 군대 내에서도 이분 저분 찾는 사람이 많고, ‘높으신 분 술은 받고 내 술은 안 받냐?’고 따지는 분도 있었고…. 밖으로 운동하러 갈 때도 트럭을 타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대한극장 앞 육교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죠. 어린 마음에 ‘괜히 챔피언이 됐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권투가 하기 싫어졌어요.”
 
  이 말이 사실이라면, 1975년 3월 로스앤젤레스(LA)에서 벌인 멕시코 알폰소 사모라와의 2차 방어전은 시작부터 이미 지고 들어간 경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경기는 진짜 실력으로 진 것이 아닙니다. 우선 군 생활 분위기가 제가 집중해서 방어전을 준비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트레이너인 김준호 선생을 한국권투위원회가 제명하는 일도 있었죠. 어머니가 청와대에 민원을 해서 김준호 선생이 겨우 LA에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현지에서도 문제가 많았어요. 계체량을 하는데 200g이 오버로 나왔거든요. 사우나를 들락날락한 끝에 거의 탈진된 상태에서 간신히 통과했는데, 곧바로 다른 체중계로 재보니 200g 미달이었어요. 당한 겁니다. 계체량부터 속았다는 허탈감, 우리 진영의 내부 분열 등 여러 상황이 겹치니까 정말 경기하기 싫더라고요. 숟가락 들 힘도 없었어요.
 
  게다가 경기 전에 정신을 차리려고 먹은 꿀에 취해서 인사불성이었습니다. 1회전을 제외하고는 두 발이 링 위에 붕 떠다니는 느낌이었죠.”
 
 
  집 팔아 대전료 마련
 

  무기력한 4라운드 KO패에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사실 권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죠. 그런데 타이틀을 잃고 돌아오니 한가하게 은퇴를 고민할 상황이 아니더라고요. 군대에서 곧바로 일주일 영창을 보내더군요. 영창에서 나오자마자 계속 유격훈련을 보내고. 정신상태가 엉망이어서 졌다는 겁니다.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거였죠. 당시 제대가 1 년 이상 남았는데, ‘차라리 복싱을 계속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차려가 가혹했습니다.”
 
  사모라에게 진 뒤 2개월여가 지난 1975년 5월 21일 재기전(再起戰)을 시작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는 사이, 마침내 10월 16일 사모라와의 리턴 매치 날짜가 잡혔다. 제대 장병 홍수환은 승리를 확신했지만, 주변의 반응은 달랐다. 당시 사모라는 27전 27KO승에 세계 타이틀을 네 차례나 방어한 철권(鐵拳)이었다. 모든 프로모터가 발을 뺐다. 남은 방법은 하나. 홍수환은 자비(自費)로 대전료를 댄다는 배수(背水)의 진(陣)을 쳤다. 대전료 외에 사모라 측 체재비 모두를 홍수환 측에서 대주는 조건에 동의하고, 그동안의 대전료로 마련한 후암동 목욕탕과 동부이촌동 집을 팔아 8만 달러를 만들었다. 모자란 4만 달러는 종로 YMCA 옆에 있던 삼아양복점 사장님이 만들어줬다.
 
  ― 무모하리만큼 모든 걸 걸었네요.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집안의 전 재산을 건 겁니다. 이렇게 이기면 옵션도 제가 갖게 되니 방어전을 제가 원하는 상대와 원하는 장소에서 치를 수 있잖아요? 원금 회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기는 지금은 사라진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열렸다. 그러나 홍수환의 복수혈전은 12회 TKO패로 끝났다. 문제는 주심이 대놓고 편파 판정을 했다는 것. 문제아 옥타비오 메이란은 1990년 도쿄에서 마이크 타이슨과 더글러스의 경기 롱카운트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로 그 멕시코 심판이다.
 
 
  판정은 무효, 경기는 유효
 
  “정말 억울한 경기였습니다. 9회전에 내 원투 스트레이트를 맞고 사모라의 무릎이 꺾였죠. 로프가 없었다면 다운이었어요. 쫓아 들어가 레프트 한 방을 더 날리려는 순간, 주심이 저를 가로막고 사모라를 살려줬습니다. 반면, 11회전에서는 종료 공이 울린 뒤 사모라가 저를 가격하는 걸 방치했죠. 공이 울린 뒤에 맞은 펀치는 대미지가 컸어요. 맞을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복부에 연타를 허용한 거니까요. 12회전에 제가 몰린 건 맞아요. 하지만 방어 능력을 상실한 건 아니었습니다.”
 
  주심은 일방적으로 경기를 끊고 사모라의 TKO승을 선언했다. 문제는 이 결정이 당시 WBA 규칙위반이었다는 점이다. 규정에 따르면, 주심이 바로 경기를 중단할 권한이 없었다. 이 점은 당시 WBA 감독관도 인정한 사항이다. 다음 날 양측이 ‘판정은 무효지만 경기는 유효하다’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결론을 내린 배경이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경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 사모라는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하는 것이고, 파이트 머니도 챙겨서 귀국했다. 나중에 WBA는 사모라의 12회 TKO 승으로 기록을 정정했다.
 
  패배가 아쉬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사소한 욕심이 경기를 망쳤기 때문이다.
 
  “강인해 보이고 싶어서 새로 산 검은색 권투화를 신고 링에 올라갔죠. 그런데 스텝을 밟을 때마다 엄지발가락이 조이듯이 아팠습니다. 신발을 갈아 신을 수도 없고…. 연습 때 신던 낡은 흰색 권투화를 신고 대결했다면 제가 일방적으로 이겼을 겁니다. 다 운명이죠.”
 
 
  사표 쓰고 생중계 강행한 TBC 스포츠국장
 
홍수환은 1977년 카라스키야와의 대결에서 극적으로 승리, ‘4전5기’의 신화를 썼다.
  거의 폐인(廢人)처럼 지내던 홍수환에게 운명의 여신이 다시 한 번 미소를 보낸다. WBA가 주니어 페더급을 신설한 것. 홍수환은 챔피언 결정전을 향해 다시 신발끈을 조인다.
 
  1977년 6월 국내 선발전 상대는 염동균. 1976년 11월부터 1977년 5월까지 동급 WBC 왕자였고, 군대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다. 이 경기를 10회 판정승으로 통과한 홍수환은 4개월 후 다나카 후타로를 꺾고 챔피언 결정전 출전권을 손에 넣었다. 모두가 선수 생활의 황혼기라고 했지만, 홍수환의 생각은 달랐다.
 
  “밴텀급으로 세계에 도전할 때보다 오히려 더 희망에 부풀어 있었어요. 두 체급의 차이가 2kg 200g인데 복서에겐 어마어마한 차이죠. 주니어 페더급으로 올려 운동을 하니 힘이 남아 돌았어요.”
 
  마침내 초대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결정전(1977년 11월 26일). 이 경기가 한국 스포츠에 길이 빛나는 영원한 신화 ‘4전5기’다. 상대인 17세 소년 복서 엑토르 카라스키야의 전적은 11전 11KO승, 별명은 ‘지옥에서 온 악마’였다. 1977년 11월 28일이 파나마의 독립기념일. 그들은 이 경기를 독립기념일 행사의 일부로 기획하고 ‘세계 최연소 챔피언 탄생, 세계 챔피언 4명 동시 보유’의 축가를 부르려고 했다.
 
  국내 사정은 반대였다. 이리역 폭발사고, 장성 탄광 연쇄사고, 1978년 월드컵 예선 2위 탈락으로 사회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홍수환 경기 일주일 전 푸에르토리코에서 김태호가 WBA 주니어 라이트급에 도전, 챔피언 사무엘 세라노에게 역전패한 것도 문제였다. 2회 연속 원정 KO패는 국민 사기 저하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TBC가 홍수환 경기 중계를 망설이자 당시 스포츠국장이던 김재길이 “지면 내가 그만둔다”며 사표를 쓰고 현지 생중계를 강행했다.
 
 
  “이길 준비가 돼 있다!”
 
홍수환은 1978년 2월 일본의 가사하라 유와의 대결에서 가지야마를 5번 다운시키면서 판정승을 거두었다. 사진=홍수환 제공
  이번에도 승리의 여신이 우연을 가장하고 다시 찾아왔다. 경기 당일 계체량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주심을 만난 것. 미국인 국제심판 제이 에디슨이 “굿 럭” 하며 인사를 건넸다. 평범한 인사였지만 왠지 “어차피 질 텐데 잘 버텨라”는 말로 들렸다. 반발심이 생겨 곧바로 “이길 준비가 돼 있다(I’m ready to win)”라고 받아쳤다. 제이 에디슨이 반색하며 “훌륭한 영어다, 영어를 어디서 배웠냐?”고 했다. 대답은 “하이 스쿨”. 주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상대에게 기죽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코트라에서 빌린 삿갓을 쓰고 링에 올랐죠. 그만큼 자신이 있었어요.”
 
  1회전은 홍수환이 기억하는 인생 최고의 라운드다.
 
  “어차피 판정으로 가면 승산이 없다고 봤어요. 상대는 우리가 아웃복싱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 심리를 역이용해 초반부터 밀고 들어갔죠.”
 
  연속으로 날아오는 펀치를 두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허리 반동만으로 피하자 카라스키야가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작전대로 완벽하게 흘러갔다.
 
  2라운드, 첫 다운은 속칭 반짝 다운이다. 오른손이 들어오고 왼손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한 번 더 오른손이 들어왔다. 두 번째 레프트 훅에 의한 다운은 충격이 상당했다. 충격을 위장하려고 달려들다 세 번째 다운. 네 번째 다운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다운이다.
 
  한 라운드에 세 번 다운되더라도 선수가 싸울 의사만 있으면 자동 KO패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프리 녹다운제로 규칙을 바꾼 것이 행운의 결정판이다. 네 번째 다운을 당한 홍수환은 남은 40초 동안 샌드백이 되어 일방적으로 난타당했다. 끊어도 할 말이 없는 경기였지만, “이길 준비가 돼 있다”는 홍수환의 말을 제이 에디슨이 잊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네 번 다운당할 때 허용한 펀치보다 이때 맞은 펀치가 더 많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코너로 돌아오자 세컨들이 그러더군요. ‘수환아, 이러다 너 죽는다.’
 
  형은 연신 암모니아를 제 코에 갖다 대고…. ‘죽을 때 죽더라도 딱 한 라운드만 더 하자’고 말하고 링으로 돌아갔습니다. 3라운드가 시작됐을 때 저는 모든 것을 걸고 나섰고, 카라스키야는 저를 깔보고 나왔을 겁니다. 그 차이가 승부를 바꾼 거죠. 복부에 펀치가 들어갔는데 뒷걸음치더군요. 쫓아 들어가면서 날린 펀치에 카라스키야의 눈이 휙 돌아가는 게 보였습니다. 복싱을 하면서 그런 눈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로프에 걸리며 무너지듯 쓰러지는 카라스키야의 복부에 내리찍듯 마지막 펀치를 터뜨렸다. ‘기관총으로 대포를 잡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텔레비전 앞으로 되돌아온 팬들을 위해 TBC는 당일에만 전 경기를 수십 번 재방송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이 땅의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전국의 모든 체육사를 뒤져 권투 글러브 재고를 모조리 바닥내는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국민적 축제에 동참했다.
 
  2라운드에서 홍수환이 세 번째 다운을 당하자 귀빈석에서 경기를 구경하던 파나마 부통령이 옆 자리의 한국 대사에게 “선수 건강을 위해 경기를 중단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며 말을 건넸는데, 경기가 끝나자마자 황급히 자리를 뜨더라는 이야기. 두 번째 다운을 당한 직후 우리 해설위원의 “수환아, 붙들어라!” 하는 고함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는 전설이 신화처럼 퍼져나갔다.
 
  통컷으로 기분을 낸 다음 날 《일간스포츠》 머리기사 제호는 ‘지옥에서 온 악마를 지옥으로 보내버렸다’.
 
  홍수환의 그림 같은 역전 KO승은 우울한 사회 분위기를 한 방에 쓸어버린 거대한 축포였다.
 
 
  가수 옥희와의 스캔들
 
젊은 시절의 홍수환과 가수 옥희. 이후 두 사람은 곡절이 많은 인생을 엮어갔다. 사진=조선DB
  1978년 2월 1차 방어전은 일본의 가사하라 유에게 도쿄에서 판정승. 무려 다섯 번 다운을 시킨 일방적인 경기였다. 언론은 ‘4전5기가 5전6기도 만들었다’고 환호했다. 누구나 홍수환의 롱런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1차 방어전 이후 5월 7일 장충체육관에서 리카르도 카르도나와 2차 방어전을 치를 때까지 3개월 동안은 ‘복서 홍수환’의 흑역사다. 가수 옥희와의 스캔들이 터졌고, 가정폭력으로 조사를 받았다. 체육관으로 “제발 (경기에서) 져라!”는 여성들의 전화가 걸려올 정도였다.
 
  “부부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다만, 이 이야기는 하고 싶습니다. 첫 부인의 모친과 오랜 기간 심각한 갈등이 있었어요. 제 자식들 성을 ‘홍씨’가 아니라 첫 부인의 성인 ‘이씨’로 쓰라고 했습니다. 가사하라 유와의 경기를 준비할 때 옥희씨와 동거 중이었어요. 연애와 경기력은 상관이 없었지만, 여론은 달랐습니다.”
 
  2차 방어전은 엉망이었다. 1라운드에서 상대 버팅으로 눈이 찢어졌다. 규칙대로 하자면, 노 콘테스트 판정을 하고 경기를 중단해야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옵션을 쥐고 있던 일본인 프로모터 아라시다는 홍수환의 패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자신의 권리가 연장되기 때문이다. 결과는 12라운드 KO패. 피가 굳은 상처 위로 다시 피가 흘러내릴 정도의 악전고투(惡戰苦鬪)였다.
 
  이 경기 후 한국권투위원회는 홍수환의 선수 자격 박탈을 논의하다가 2년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린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반강제 은퇴 후 1980년대 초반 김철호(金喆鎬), 장정구(張正九) 등의 트레이너를 맡아 복싱계에 복귀했지만, ‘선수 도망 방조’ 등의 오해를 받고 첫 부인이 살던 알래스카로 건너갔다.
 
 
  링보다 인생이 무섭더라
 
홍수환과 대결했던 카라스키야는 이후 정치인으로 성공했다. 홍수환은 그를 “은인”이라고 말한다. 사진=조선DB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차선 그리기,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고된 나날을 보냈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마음이 편했다. 영주권 취득이 목표였지만, 1984년 11월 마약 밀매사건이 터져 귀국을 결심한다. 택시기사 6개월 만에 단골손님의 부탁으로 서류를 날라줬는데 그가 마약상 두목이었고, 서류 봉투 안에 마약이 들어 있었다. 2주 동안의 구치소 생활과 2년 여의 재판 끝에 무혐의 판결이 났지만, 심신이 피폐해졌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목도 《링보다 인생이 무섭더라》다.
 
  귀국 후 강사로 시작한 제2의 인생, 1992년 옥희와 재결합,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단체가 갈라진 사연 등은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자. 그래도 마무리 질문은 던지고 싶었다.
 
  ― 카라스키야는 누구인가.
 
  “나를 강사로 평생 먹고살게 해준 은인이다. 만나면 지금도 반갑다. 시장도 하고, 상원의원도 하는 등 정치인으로 성공한 인생의 승자다.”
 
  ― 그렇다면 사모라는?
 
  “역시 은인이지. 2차전에서 이겼다면 4전5기 신화는 없었을 테니까. 지금 붙어도 자신 있다.”
 
  ―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첫 책 제목이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다. 하지만 한 방 크게 때리려는 사람은 한 방 크게 맞을 생각도 해야 한다. 수비를 잘하며 한방을 노려야 한다. 남보다 먼저 움직여라. 로마의 칼은 짧았지만 먼저 움직여서 세계를 제패했다.”
 
  ― 앞으로의 꿈은.
 
  “프로복싱이 다시 인기 스포츠로 살아나는 것이다. 단체가 갈라지는 등 최근 프로복싱 난맥상에 대해 권투계 인사의 한 사람으로서 팬들에게 죄송할 뿐이다. 실향민의 아들로서 통일 후 남북 통합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그들 가운데 세계 챔피언이 나오는 것을 꼭 보고 싶다는 꿈도 있다.”
 
  그의 꿈을 응원한다. 한국 복싱을 응원한다. 챔피언은 쓰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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