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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김진우 전 美 국무부 선임보좌관

스티븐 진우 김에서 김진우로… 한국계 미국인 핵전문가의 성공과 시련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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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에서 ‘나쁜 녀석들 전담팀’ 구동
⊙ 이라크戰 당시, 美 16개 기관 중 유일하게 ‘대량살상무기 존재 확신할 수 없다’ 의견 내
⊙ 美 국방부 마셜팀에서 ‘불가능한 일’ 연구
⊙ 헨리 키신저, 슐츠 전 국무장관, 딕 체니에게 핵 관련 브리핑도
⊙ 키신저에게 농담, “레득토처럼 노벨평화상 수상 거부했다면 존경했을 텐데”

김진우
1967년생. 美 조지타운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예일대학 박사 / 美 해군분석센터 작전분석그룹 군사작전・동아시아 담당 분석관. 美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에서 핵 비확산, 국토 및 국제안보 담당실 동아시아·북한 담당 선임분석관. 국제안보연구센터 연구위원. 美 국방부 장관실 총괄평가국 특별보좌관. 美 국무부 검증・준수・이행국 차관보실 총괄 선임보좌관 / 現 세르모그룹 대표, 세르모국제연구소 소장
사진=조준우
  대나무는 마디 때문에 높이 자란다. 마디는 대나무가 성장을 잠시 멈추고 힘을 모은 흔적이다. 대나무가 겨울의 추위를 잘 견뎌내면, 마디에 있던 생장점이 깨어나 나무를 키워낸다. 마디는 나무가 바람에 견딜 수 있는 무게중심 역할을 한다. 삶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위기를 지나고 있을 땐 잘 모른다. 그것이 마디의 시간인지, 그저 시련인지 말이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스티븐 진우 김 혹은 김진우(55) 박사.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2016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9세에 부모님 손을 잡고 도착한 뉴욕에서 자란 그는 조지타운・하버드・예일 대학을 거쳐 미국 정부의 핵심으로 올라갔다. 강대국의 정치와 외교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였다. 대학 시절 배운 역사와 정치학, 졸업 후 습득한 핵(核)에 대한 지식이 그의 셰르파였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과 한반도,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들이 참석한 무도회 장막 뒤를 지켰다. 부시와 푸틴, 후진타오, 고이즈미, 김정일, 사담 후세인… 시대를 풍미하거나 악명을 떨친 지도자들의 춤을 지켜보며, 음악의 속도를 미묘히 바꾸기도 하고, 홀을 비추는 조명의 방향을 조정하는 걸 도왔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아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으리라.
 
 
  예일대 역사학 박사과정 최초의 한국인
 
  지난 4월 9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어떤 뒷배 없이 오로지 두뇌만으로 미국의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의 핵심 부서를 오간 한 남자의 꿈과 악몽, 성공과 시련, 희열과 절망을 묻고 들었다. 꽤 여러 질문에 ‘기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예스!’, 서울에서 경기국민학교를 다니던 그가 순식간에 뉴욕의 어느 초등학교로 옮겨진 날이었다. 영어를 몰랐던 그에게 담임 선생님이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니?’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영어 단어 중 하나로 답할 뿐이었다.
 
  반년쯤 후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된 그는 때론 월반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는 예수회에서 하는 프렙스쿨(prep school)을 다녔다. 프렙스쿨은 일반적인 고등학교가 아닌 대학입학 예비학교다. 단순히 명문대에 입학하는 게 아니라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그야말로 예비학교다. 졸업 후엔 같은 예수회에서 설립한 조지타운대학에 진학했다. 자식들이 모두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걸 지켜본 부모님은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며 곧장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누나는 컬럼비아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 조지타운대학에선 역사를 전공했지요.
 
  “아버지는 원래 제가 의사 되길 원하셨어요. 고등학교 때 개구리로 실험을 하다 제가 기절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번엔 변호사가 되라고 하세요. 저는 역사를 택했어요. 그중에서도 외교·군사 분야를 택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동안 월스트리트에서 일했어요. 그땐 돈 많이 벌었어요. 3개월 지나니까 느낌이 오더군요. ‘아, 이건 아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밟은 후 예일대학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지원해 합격했다. 7년 여정의 시작이었다.
 

  ― 예일대학 역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가 어려운가요.
 
  “저도 몰랐는데 제가 예일대 역사학과 박사과정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었어요. 학생이 40명인데 교수가 70명이에요. 정말 깐깐해요. 그 레벨까지 가면 교수가 그래요. ‘너는 이제 내 경쟁자다.’ 학문적으로 계속 비판하고 자극을 줘요. 지적(知的)인 갑질이라고 할까요. 대부분이 중간에 포기해요. 제가 박사 학위 받기까지 7년이 걸렸어요. 예일대학 역사학과에서 두 번째로 빨리 졸업한 거였어요.”
 
  ― 논문 통과가 어려운가 봐요.
 
  “2년 코스워크를 하고 나면 3년 차부터는 논문을 준비해요. 1년 동안 책을 읽어요. 주전공에 관련된 책 1000권, 부전공 800권, 다른 관련 분야 500권, 총 2300권을 읽어야 해요.”
 
  ― 논문이 아니라 책을 2300권 읽는다고요.
 
  “그것도 어떤 책을 읽겠다고 교수에게 승인을 미리 받아야 해요. 시시한 보고서 같은 건 안 되고 제대로 된 학문서만 읽을 수 있어요. 읽은 후엔 구술시험을 봐요. 다 외진 못해도 큰 주제는 알고 있어야 하지요. 그런 다음 논문을 시작해요. 우선 1차 자료(primary sources)를 찾아요.”
 
  ― 그걸 어디서 찾나요.
 
  “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대를 연구했기 때문에 주로 세 군데를 다녔어요. 워싱턴DC의 국립문서보관소, 아이젠하워 고향 캔자스에 있는 아이젠하워 도서관, 케네디 대통령 기념관 다 다니면서 찾았어요.”
 
  ― 거기에서 뭘 찾나요.
 
  “말 그대로 대통령의 기록물이에요. 대통령이 참모에게 지시한 문서부터 사소한 메모까지, 필요한 걸 찾아서 복사해온 다음 정리하는 거예요.”
 
 
  폴 케네디가 지도교수
 
  ― 왜 이승만 대통령과 한미동맹을 논문 주제로 정했나요.
 
  “원래는 영국 외교사를 연구했어요. 지도교수가 저를 앉혀놓고 그러더군요. ‘다른 사람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너는 언어도 되고 자료도 찾을 수 있는데 왜 한국외교사를 연구하지 않냐고.’”
 
  그의 지도교수는 폴 케네디와 존 루이스 개디스(John Lewis Gaddis) 교수였다.
 
  ―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자료는 한국에서 찾았겠네요.
 
  “외교안보연구원에 가보니 자료가 있더라고요. 제가 거의 처음 열람하는 거였어요. 다른 자료도 봤지요. 연세대 유영익 교수님이 이 대통령 공식 기록들을 갖고 계셨어요. 저를 아들처럼 챙겨주셨어요. 이 대통령 자료들을 제대로 한번 살펴보라고 해서 다 봤지요.”
 
  ― 어떤 기록들인가요.
 
  “내무부 장관이나 외무부 장관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서류가 많았어요. 유 교수님이 원래 아이젠하워 도서관처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전쟁 작전 연구의 길로
 
  그 어렵다는 박사를 마친 그의 앞에 교수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
 
  “교수 채용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 이제 평생 40년 동안 18세, 19세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살아야 되는 건가’ 못 하겠더라고요. 논문을 책으로 만들고 쉬고 있는데 희한한 곳에서 인터뷰를 오라는 거예요.”
 
  ― 어떤 곳이었나요.
 
  “미 해군을 도와주는 연구소예요. 근데 들어가니 연구소가 아니에요. 전쟁 작전을 수행하는 곳이었어요.”
 
  그곳은 ‘미국 해군분석센터 작전분석그룹’이었다.
 
  ― 그런 곳에서 역사 전공자를 왜 뽑나요.
 
  “저도 물었어요. ‘나 잘못 들어온 것 같다’ 그랬더니 상사가 그래요. ‘우리는 기술적인 건 안다. 큰 그림은 못 본다’ 그러니까 전쟁을 하면서 어디를 공격해야 그 나라의 지도자가 꼼짝 못 한다, 그런 걸 판단하는 거죠.”
 
  ― 그런 걸 어떻게 알아내요.
 
  “1999년에 나토가 유고슬라비아를 공습했어요. 그 작전을 이 그룹이 담당했어요. 왜 성공했는지, 왜 실패했는지 작전을 저에게 검토하라는 거예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이 네 국가가 어디를 공격 타깃으로 정했고, 어떤 무기로 공격했냐 이런 걸 분석했어요. 장군들의 작전 지휘록을 다 봤어요. 그때부터 기밀 자료들을 보기 시작한 거예요.”
 
  그가 이때 만든 것이 ‘지배자-피지배자’ 가설이다. 전쟁 시 지도자의 의사 결정이 그 국가의 역사적 맥락과 국민의 정서에 좌우된다는 걸 논증했다. 예를 들면 독일 같은 경우, 전범 국가이기 때문에 적극적 공격엔 국민들이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식이다.
 
  ― 전쟁 작전 연구지만 통시적인 통찰력이 필요하네요.
 
  “현미경처럼 전장을 들여다보는 것뿐 아니라 광각 렌즈처럼 보는 관점도 필요한 거죠.”
 
 
  수소폭탄 개발한 리버모어 연구소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가 개발한 레이저를 이용한 우라늄 농축 장치. 사진=조선DB
  2년쯤 흘렀을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리버모어 연구소’였다. 정식 명칭은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LLNL), 미국의 양대 핵무기 연구소 중 하나다. 다른 한 곳은 최초로 핵폭탄을 개발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다.
 
  “어떤 곳인지 잘 몰랐어요. 채용 면접을 하자고 해요. 갔더니 일주일 동안 호텔에 재우면서 매일 8시간 동안 사람들을 만나게 해요. 정말 자세히 물어요. 이게 고문이지 무슨 면접인가 했어요.”
 
  ― 뭘 물어보나요.
 
  “별걸 다 물어요.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나, 너는 왜 미국에 로열티가 강하냐,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냐’…. 소시지 좋아하세요? 소시지 만드는 과정을 보면 못 먹는다고 하잖아요. 정책 만드는 것도 똑같아요. 그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는지, 압박 상황에서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거예요.”
 
  ― 리버모어와 로스앨러모스가 어떻게 다르나요.
 
  “로스앨러모스는 핵폭탄을 만들었고, 리버모어는 수소폭탄을 개발했어요. 두 연구소는 하버드-예일처럼 앙숙이에요. 자존심 싸움이죠.”
 
  ― 수소폭탄을 실제 전장에서 쓸 수 있나요.
 
  “못 쓰죠. 왠지 아세요? 땅이 없어져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을 때 땅이 없어지진 않았잖아요. 예전에 남태평양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어요. 아예 섬이 없어졌어요. 케네디 대통령 시절 실험을 중지했어요.”
 
  ― 그럼 리버모어에서는 어떻게 연구를 하나요.
 
  “실제 실험을 못 하니까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해요. 신개념 무기나, 새로운 에너지원도 연구해요. 아직 대체 에너지원을 찾진 못했지만 과학에는 실패가 없어요. 북한이 미사일 쏘면 언론에서 흔히 실패라고 하잖아요? 실패한 게 아니라 데이터가 쌓인 거예요. 그러다 나중에 성공하는 거예요.”
 
  ― 미국 영화에 나오는 연구소 같네요.
 
  “국방부, 에너지부와 밀접하지요.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엔 로스앨러모스나 리버모어 원장이 장관보다 더 높았어요. 냉전시대엔 필요 시 바로 대통령을 보러 백악관에 들어갈 수 있는 권위가 있었지요.”
 
 
  ‘나쁜 국가들’ 전담팀 만들어
 
  ― 그러면 냉전시대엔 핵보유국이었던 소련을 연구했겠고, 지금은 다른 나라의 핵 프로그램을 연구하겠네요. 중국, 이란, 북한 같은 나라요.
 
  “그렇죠. 연구소에 있을 때 ‘나쁜 녀석들(bad guys)’을 담당하는 팀을 만들었어요. 나쁜 놈들을 상대하려면 나쁜 놈들이 필요하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요. 핵무기를 담당하는 팀이었죠. 핵연료 주기의 특정 영역에서 최고 실력자들을 찾았어요. 광산, UF6, 재처리, 농축, 탄두 설계(1차・2차), 원자로, 미사일, 이미지, 조달, IAEA 전문가들이었죠. 국가에 대한 분석과 정보 분야는 제가 담당했습니다.”
 

  ― 굉장히 중요한 팀이었겠네요.
 
  “제일 친한 친구 중에 위성 사진만 보는 친구가 있었어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천재예요. 근데 그것밖에 할 줄 몰라요. 그런 사람들을 대여섯명 모았어요.”
 
  ― 그래서 미국이 북한 풍계리 같은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거군요. 소수의 정예 멤버만 모았네요.
 
  “제가 믿을 수 있는 멤버로만 구성한 거죠. 무슨 얘기인가 하면, 위에서 압박이 엄청나요. 한국도 그렇잖아요. ‘그 정보는 쓰지 마세요, 못 본 거로 합시다’ 그럴 때 대통령한텐 얘기 안 해도 나한테는 할까 안 할까. 그런 믿음이 서로 없으면 못 하는 일이에요.”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존재에 회의적
 
  ― 리버모어 소속으로 있으면서 국방부와 국무부에서 차례로 근무한 거죠? 왜 한 부서에서쭉 근무하게 하지 않나요.
 
  “한 사람이 너무 많이 알면 안 되거든요. 정보를 독점하고 부패할 수 있으니까. 한국에서는 그게 무기니까 정보를 공유 안 하지만 미국은 정보를 공유해야 해요. 예를 들면 인터에이전시(interagency) 프로세스가 있어요. CIA까지 16개 기관이 다 동의해야 그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올라가요. 보고서가 합의되기까지 그야말로 개싸움이에요. 그렇게 하니까 좋은 보고서가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때는 큰 실수로 이어져요.”
 
  ― 그게 무슨 말이죠.
 
  “예를 들면 2003년 이라크전이에요. 당시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할지에 대해 우리 팀도 의견을 내야 했어요. 제 친구가 이라크를 35년간 연구한 전문가였어요. 당시 연세가 70이 넘어서 은퇴해 있었어요. 문제가 생겼으니 들어와달라고 했죠. ‘지금 워싱턴에서 압박이 크다, 어떻게 생각하나’…. 3일을 달라더군요. 예전 기록들을 살펴봐야 한다고요.”
 
  ― 3일 후에 만났나요.
 
  “2시간밖에 시간이 없다고 했죠. 2시간 뒤에 그래요. ‘100퍼센트라고 확신을 못 한다’는 거예요. 물었어요. ‘확실해?’ 사실 그런 업무에 확실한 건 없어요. 개인적 판단을 말해달라고 하자 그래요. ‘아닌 것 같아.’”
 
  ― 그래서 워싱턴에 뭐라고 답했나요.
 
  “‘우리는 CIA에 동의할 수 없다’… 상대 쪽에서 욕하고 난리가 났어요. 해고한다면서 길길이 뛰어요. 팀원들에겐 사직서 준비해놓으라고 했어요. 다른 기관들은 눈치를 보면서 CIA 의견을 따라갔어요. 결국 우리 의견을 배제하고 미군이 이라크로 간 거죠.”
 
  ― 이후에 평가를 받았나요.
 
  “나중에 의회 상원에서 애프터 액션리포트(after action report)을 만들었어요. 이때 각주에 넣었더라고요. ‘리버모어만 원칙을 지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는 이 한 줄 가지고 파티하고 난리가 났었죠. 우리 팀의 말을 들었으면 이라크전쟁은 안 일어났겠지요. 이런 얘길 하면 누가 믿겠어요. 제가 했던 프로젝트들은 이렇게 드러내놓고 인정이나 상을 받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 그런 보고서를 보고도 결국 최종 판단은 대통령이 내리잖아요. 미국 대통령이란 자리는 상당히 힘든 자리겠네요.
 
  “그러니까 대통령들이 취임할 땐 생생하다가 2~3년 지나면 늙잖아요. 다른 국가랑 비교를 하면 안 돼요. 미국인들은 토론을 많이 하잖아요. 상상해보세요. 파월이나 럼즈펠드같이 강한 사람들이 눈앞에서 다툰다고요. 그러면 보좌관들은 긴장하지요. ‘나 부르지 마라.’”
 
  ― 불러서 의견을 묻는 건가요.
 
  “저는 딕 체니-럼즈펠드와 같은 성향으로 분류됐거든요. 불러서 물으면 답해야죠.”
 
  ― 군사·외교 이슈에 막힘없이 의견을 말하려면 온갖 걸 다 알아야겠네요.
 
  “그래서 보통 한 분야만 해요. 정보면 정보, 정책이면 정책, 군사면 군사. 그런데 저는 세 분야를 다 했어요. 운이 좋았어요.”
 
  ― 그런 사람이 미국 정부 내에 많았나요.
 
  “많지 않죠. 그래서 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엄청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38세밖에 안 된 동양인이 키신저한테 전화 받고 백악관에 들어가고 하는데 주변에서 누가 좋아했겠어요.”
 
  ― 엄청 질투가 났겠네요.
 
  “질투 수준이 아니었어요. 30년간 연구해도 차관보에게 브리핑을 할까 말까인데요.”
 
 
  美 국방부 ‘마셜팀’에서 근무
 
‘펜타곤의 요다’로 불린 앤드루 마셜 전 美 국방부 총괄평가국 국장.
  2007년 국방부로 옮겨간 그는 ‘마셜팀’에 들어간다. 미 국방부의 전설 같은 부서다. 오랜 시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앤드루 마셜이 이끄는 팀이었다. 마셜은 42년간 8명의 대통령과 13명의 국방장관에게 안보정책을 조언했다. 2015년 93세로 은퇴했다.
 
  ― 마셜팀은 어떤 곳이었나요.
 
  “총괄평가국이라고 불렀어요. 간단히 말하면 사안을 전체적으로 보는 부서였어요. 상임 근무자는 6~7명밖에 없었어요. 마셜은 닉슨 행정부 시절부터 이 부서를 이끌며 미국이 당면한 위협을 분석했어요.”
 
  ― 예를 들면요.
 
  “예를 들 수 없지요. 기밀 업무였어요. 누구도 할 수 없거나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맡았다고만 말할 수 있어요. 펜타곤에선 마셜을 ‘요다’라고 불렀어요.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요다 말이에요. 그 밑에서 일하는 우리는 ‘제다이’로 불렸어요.”
 
  ― 제다이 경험을 해본 이는 펜타곤 안에서도 극소수였겠네요.
 
  “그렇지요. 마셜은 국방부 장관 직속으로 일했어요. 국무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누구도 마셜을 건드릴 수 없었어요. 마셜을 해고하려던 장관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저 위에서 전화가 왔대요. 건드리지 말라고요.”
 
  ― 저 위가 어딘가요.
 
  “어디겠어요?”
 
 
  키신저와의 대화
 
조지 슐츠 전 장관과 함께한 김진우 박사. (왼쪽부터) 찰스 힐 예일대 교수,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김진우 박사.
  군사, 외교, 정책에 정통해서였을까. 어느 날 그는 헨리 키신저에게 ‘발견’됐다. 키신저가 그의 북핵 브리핑을 듣고 연락을 했다.
 
  ― 키신저는 어떤 사람인가요.
 
  “키신저는 무례하다고 할까요, 상당히 무뚝뚝하고 거친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민망할 정도로 관대했어요. 전화를 받았는데 키신저라기에, 처음엔 친구가 장난치는 건 줄 알았어요. 장난치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 키신저였던 거예요.”
 
  ― 뭐라 하던가요.
 
  “조지 슐츠 장관을 같이 만나자는 거예요. 슐츠 장관 집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연구소에 보고하니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키신저에게 못 간다고 했죠.”
 
  ― 그래서 못 갔나요.
 
  “일이 커졌어요. 키신저가 존 네그로폰테 국가정보국(DNI) 국장한테 전화해서 호통을 친 거예요. ‘이런 정치게임 나도 어렸을 때 겪었다, 3시간 안에 해결해라.’ 그러자 이번엔 네그로폰테가 리버모어 원장한테 전화해서 난리를 쳤어요. ‘내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키신저한테 혼나야 되냐?’ 이런 얘기를 나중에 키신저한테 직접 들었어요.”
 
  ― 키신저와 슐츠 전 장관에게 무슨 얘기를 했나요.
 
  “그야말로 모든 얘기였어요. 중국, 파키스탄, 북한 리더십, 탄도미사일. 그분들은 돌려서 얘기하는 게 없어요. 질문은 굉장히 날카로워요. 얘기 끝에 와인 한잔 하면서 키신저가 그러는 거예요. ‘대중국 외교 정책을 두고 내가 비판을 많이 받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뭐라고 답했나요.
 
  “‘다 잘하셨는데, 큰 실수를 하나 했다. 1973년에 베트남의 레득토와 함께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하지 않았냐, 레득토는 수상을 거부했는데 당신은 왜 거부 안 했냐, 거부했으면 존경했을 것 같다’ 이랬어요.”
 
  ― 화내지 않던가요.
 
  “웃으면서 저를 막 치면서 슐츠에게 그러더군요. ‘조지, 봐 이 친구가 날 이렇게 놀려.’ 그러더니 말하는 거예요. ‘딕도 이걸 들어야 돼.’”
 
 
  강경파 부통령 딕 체니
 
백악관에서 딕 체니 부통령과 대화 중인 김진우 박사.
  딕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를 말한다. 체니는 그저 부통령이 아니었다. 군사·외교 분야에서 부시를 대신해 실질적인 대통령 역할을 했다. 체니 쪽에서 연락이 왔다. 백악관으로 들어오라는 얘기였다. 15분의 면담 시간이 주어졌다. 백악관에서 15분이면 상당히 긴 면담 시간이라고 한다.
 
  ― 당시 체니 부통령이 뭘 궁금해했나요.
 
  “모든 거죠. 미국 정부는 시야가 굉장히 넓어요. 북한이 이렇게 하면 다른 나라엔 어떤 영향이 가는지 등 모든 걸 살펴요. 한국 정부는 그런 면에서 보면 시야가 좀 좁은 것 같아요. 15분 예정이었는데 질문이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45분 동안 앉아 있었어요.”
 
  ― 부시 정부 당시 체니-럼즈펠드는 대북정책에 있어 강경파(매파)였고, 콘돌리자 라이스-크리스토퍼 힐은 상대적으로 유화론자(비둘기파)였지요. 결국 어느 순간 부시 대통령은 콘돌리자 라이스 쪽의 손을 들어준 거죠.
 
  “그렇지요. 6자회담 당시 힐보고 타협하라 했잖아요. 만약 당시 다른 판단을 했다면 역사는 다시 쓰였을 거예요.”
 
  ― 북한을 타격했을 수도 있을까요.
 
  “여러 가지 계획이 있었지요.”
 
 
  ‘반역죄’ 혐의
 
  2008년부터 그는 미 국무부 검증・준수・이행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나서 2009년 6월이 됐다. 6월 11일 ‘폭스뉴스’의 제임스 로젠 기자는 북한에 대한 기사를 썼다. ‘북한이 유엔(UN) 결의에 맞서 추가적인 핵실험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20여 년간 언제 보도됐어도 이상할 것 없는 어찌 보면 평이한 내용의 기사였다. 당시 《조선일보》나 《요미우리신문》 등 세계 여러 매체에서 유사한 내용의 보도를 했다. 로젠 기자는 기사를 쓰기 전에 김 박사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 검찰은 스티븐 김이 해당 정보가 1급 기밀 또는 민감한 정보(TS/SCI)임을 알면서도 기자에게 고의로 누출했다며, 2010년 8월 간첩법 위반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그의 삶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미국 내에서도 무리한 기소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를테면 NBC의 마이클 이시코프 기자는 이렇게 썼다.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오바마의 전쟁》을 쓰며 최고위층에서 얻은 게 분명한 정보를 활용했는데, 그런 고위층은 추적하지 않고 실무자였던 스티븐 김엔 강경 대응하는 이중 잣대로 대응하고 있다. 스티븐 김이 발설했다는 정보 역시 놀랄 만한 게 아니다.”
 
  ―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저는 공식적으로 한 가지 혐의로 기소됐어요. 처음에 검찰 쪽에서 저에게 뭐라고 한지 아세요? ‘AP, 폭스, ABC에 나온 이 기사들 봐라. 너 리비아, 이라크, 파키스탄 담당했지?’ 그러면서 처음엔 15개 혐의를 적용하려 했어요. 그러다 그게 너무 말이 안 되니까 1개로 줄었지요. 정치적 기소였어요. 제 추측으론 CIA 안에서 누가 저를 계속 노린 게 아닌가 싶어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부시에서 오바마 행정부로 정권이 막 바뀐 참이었다. 오바마 정부 들어 ‘위키리크스’에 미 정부 기밀을 넘긴 미 육군의 매닝 일병 등 내부고발자들이 여러 번 등장했다. 정보 유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검찰은 처음엔 비밀재판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의 변호사 애비 로웰은 이렇게 반발했다고 한다.
 
  “여기가 소련인가? 그럼 그냥 반역죄로 즉결 처형이라도 하지 그러나.”
 
  검찰은 기소 전에 플리바겐(plea bargain)을 제안했다. 3년 6개월 수감되는 안이었다. 플리바겐 또는 사전형량조정제도(事前刑量調停制度)는 검찰이 수사 편의상 관련자나 피의자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거나 증언을 하는 대가로 형량을 조정하는 협상제도다.
 
  ― 왜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저는 항상 어두운 지하에서 일하던 사람이에요. 싸워서 지면 납득할 수 있지만 존재도 없이 한 번도 안 싸워보고 죽긴 싫었어요. 그래서 변호사한테 ‘한번 해보자’고 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스티븐 김의 외로운 전쟁은 4년간 이어졌다. 기소된 후에는 집에서 40km 이내에만 머무를 수 있었다. 재판 준비에 드는 돈을 대기 위해 한국의 부모님이 집을 팔았다. 그와 변호사는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재판에 증인으로 신청하려 했다. 정말 ‘한번 해보려’ 한 셈이다.
 
  재판을 두 달 앞두고 그와 검찰은 플리바겐에 합의했다. 13개월 형. 뭐라 표현하기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지금은 당장 ‘힘든 결정’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 힘든 결정이었겠어요.
 
  “그때 어린 아들한테 제가 물었어요. ‘아빠가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할까?’ 아들이 답했어요. ‘15년 갔다 오는 것보다는 1년이 낫지.’ 만에 하나 재판에 가서 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변호사와 저도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큰형님 오셨습니까’
 

  그것이 만약 미국 행정부 내부 단속을 위한 다분히 정치적인 기소였다면, 특별한 배경 없는 이민자의 아들이라 본보기로 그가 정해진 게 아닐까. 그의 말이다.
 
  “제가 백인이에요? 제 아버지가 록펠러인가요,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많이 냈나요. 제 파워는 제 두뇌밖에 없었어요. 이걸로 좋은 학교 가고 높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어요. 당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오바마 정부가 미쳤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닥터 김을 건드리면 아시안 아메리칸 사회가 난리 날 거다.’”
 
  볼턴이 한국을 과대평가한 걸까. 스티븐 김 구명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등 교포사회 차원의 구명활동은 있었지만, 아시안 아메리칸 사회의 봉기나 한국에서의 지원은 전무했다. 그는 2014년 7월 7일 메릴랜드주 컴벌랜드 소재 연방 교도소에 수감됐다.
 
  ― 수감 생활은 어땠나요.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밖에 없어요. 할 일이 없으니 신문을 샅샅이 읽어요. 교도소에 처음 들어갔는데 한국계 미국인들이 있더라고요. 보험 사기범들이었어요. 저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들어가자마자 한국인 세명이 기다리고 있어요. ‘큰형님 오셨습니까!’ 저에게 본인이 신던 운동화를 주겠다는 둥,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난리였어요.”
 
 
  크리스마스를 독방에서
 
  ― 다른 재소자들이 조직 폭력배 두목인 줄 알았겠어요.
 
  “원래 처음 교도소에 간 이들은 깔보거든요. 옆에 있던 아프리카계, 라틴계 재소자들이 제가 마피아 두목인 줄 안 거예요. 감옥에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요. 맞거나 강간당해요. 특히 첫 일주일 동안 절대 울면 안 돼요. 울면 그날부터 ‘계집애’ 취급을 받아요. 이것저것 시키죠. 감옥에 있을 때 몸이 정말 좋았어요. 독방에 있을 땐 하루에 푸시업을 3000번씩 했어요.”
 
  그는 그해 크리스마스를 창문도 없는 캄캄한 독방에서 보내야 했다.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어머니 친구분이 제 상황을 알게 돼서 책을 보내주셨어요. 그 안에 드라이플라워를 넣어서 보내주셨는데 그게 부서져서 가루가 된 거예요. 간수들이 편지를 열었는데 가루가 퍽 날리니까 탄저병 균을 생각한 거예요. 봉투엔 알아볼 수 없는 한글이 쓰여 있지, 개봉한 사람들은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고 난리가 났어요.”
 
  ― 꽤 심각한 상황이었네요.
 
  “그 안에선 저를 ‘닥터 김(김 박사)’이라고 불렀어요. 젊은 교도관 한명이 옆에서 그래요. ‘이 사람 정치적 이유로 들어와 있는 거야, 북한에 대해 너무 많이 아니까 북한 같은 데서 죽이려고 하는 거 아니야?’ 다른 교도관이 ‘조용해’라고 하더군요.”
 
  ― 들으면서 기가 막혔겠군요.
 
  “편지가 어디서 온 건지 확인될 때까지 제 신변 보호를 위해 일주일 동안 독방에 있었어요. 하루 한 시간 밖에 나가 햇빛을 볼 수 있었는데 나가면 덩치가 이만한 재소자들이 노려요. 그래서 전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 어떻게 독방에서 나왔나요.
 
  “한국에 전화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처음 걸었을 땐 연결이 안 됐고, 두 번째 걸었을 때 다행히 한국 부모님 집을 방문 중이던 누님과 연결됐어요.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이 됐죠.”
 
 
  감옥 안에서 북한을 간접 경험
 
  ― 아무리 그 안에서 김 박사로 불려도 감옥 생활은 힘들지 않나요.
 
  “감옥 안에는 지하경제가 있어요. 교도소 침대가 엄청 안 좋아요. 누우면 등 밑에 돌이 있는 것 같아요. 교도소에 오래 있는 재소자들은 빳빳하게 펴는 기술이 있어요. 교도소 안에선 손바닥만 한 참치 팩 한 개가 1달러예요. 그거 다섯 개를 주면 일주일 동안 침대와 시트를 빳빳하게 관리해줘요. 세탁부에서 일하면서 날마다 새 담요를 훔쳐다 주던 친구도 있었어요.”
 
  ― 정이 들었겠어요.
 
  “전쟁터랑 같아요. 그 안에서 겪은 걸 누구한테 얘기하겠어요. 얘기해도 이해 못 해요. 그 안에서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 다른 재소자들이 좀 다른 사람으로 봤겠네요. 다들 강도, 살인, 사기 같은 범죄로 들어왔는데 김 박사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렇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에게 조언을 구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다른 재판에 증인으로 서면 형기를 깎아준다는 제안을 받았는데 어떡할까요?’ 근데 감옥에선 다른 건 다 봐주는데 밀고하면 맞아 죽어요. 밀고했다는 걸 바로 알아내요. 얼마나 정보가 빠른지. 북한을 더 이해하게 됐어요.”
 
  ― 북한 사회 자체가 감옥이니까요.
 
  “아, 북한이 이렇게 사람을 컨트롤할 수 있겠구나, 느꼈죠. 사람을 음식으로 조종할 수 있어요. 그 안에선 항상 배가 고파요. 지금도 제가 어떤 음식을 허겁지겁 먹으면 어머니가 막 우세요. 그 안에선 정해진 시각에 밥을 주잖아요. 차례로 문을 열어줘요. 교도관들이 문 열어주는 시각 갖고 장난을 쳐요. 그걸 뒤에서 보는데 눈물이 났어요. 북한도 이렇겠구나. 사람이 배고프면 별짓을 다 해요.”
 
  ― 북한 주민들은 출소의 기약도 없네요.
 
  “이런 농담을 했어요. ‘감옥 가기 전엔 내가 미국 정부 내에서 북한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다. 감옥을 갔다 온 후에 그게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다.’”
 
 
  출소 후 5년간 서로 연락 금지
 
  2015년 6월 15일 그는 사회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8월 출소였지만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형기가 단축됐다.
 
  ― 감옥 안 친구들과 출소 후 연락을 나누기도 하나요.
 
  “서로 연락 못 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출소하면 사회에 적응을 못 해요. 그럼 또 마약 팔 거 아니에요? 누구랑 거래하겠어요? 감옥에서 함께 있던 친구랑 거래하는 거예요. 그렇게 또 범죄 저지르게 되잖아요. 그래서 미국은 출소 후 5년 동안 절대 연락하지 못하게 해요. 위반하면 또 수감될 수 있어요. 그 안에서 절 도와준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든 연락하고 싶어요.”
 
  ― 출소 후에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었나요.
 
  “한창 검찰과 대치 중일 때 제 변호사 애비가 그랬어요. ‘난 이해가 안 된다. 한국에 100만 달러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너처럼 많은 걸 알고 있는 존재가 있으면, 내가 한국이라면 너를 지금 도울 텐데.’ 4년간 싸우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거든요. 지금까지도 한국 정부 측에서 전혀 그런 요청은 없었어요.”
 
  ― 돌아보면 깊이 후회되는 순간이 있나요.
 
  “제가 결정한 것들을 후회하진 않아요. 다만 그런 생각을 해요. 부모님이 조금 더 젊으셨을 때 제 일을 접었다면 어땠을까. 나올 수 있었거든요. 제가 안 나왔어요.”
 
  ― 정부를 떠나 학계로 나오든지 하는 식으로요.
 
  “어느 순간엔 감이 오잖아요. 멈추고 싶었는데, 일이 상상 못 할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일을 해냈을 때 만족감은 설명을 할 수 없어요. 한번은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호텔에 있었는데, 혼자 방에서 에라 모르겠다 제일 비싼 샴페인 두 병과 햄버거 하나 룸서비스로 시켜놓고 잠옷 바람으로 먹으면서 혼자 울었어요. 너무 감동받아서요.”
 
 
  ‘역사를 바꾸기 위해 역사 전공’
 
  ― 전 세계인들과 연관되어 있는 사안에 영향을 미치는 기쁨, 그런 종류의 희열이 가장 얻기 힘든 희열일 테니까요.
 
  “저는 기억 못 하는데 친구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는 역사를 바꾸기 위해 역사를 전공했다.’ 제가 무슨 일을 했다고 드러내놓고 말할 순 없지만 전 역사를 바꿨어요. 누구도 못 할 일들에 마약처럼 중독되어 있었어요.”
 
  ― 가까운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기쁨이니, 더 중독성이 컸겠군요.
 
  “제가 감옥 다녀오고 나서야 부모님이 제가 어떤 일을 했는지 조금 아시게 됐어요. 그전엔 자주 물으셨어요. ‘도대체 넌 어떤 일을 하니?’ 한번은 서울로 비밀 출장을 왔어요. 그런데 잠실역 앞에서 부모님과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 어머니가 얼마나 화가 나셨겠어요.”
 
  ― 양쪽 다 정말 놀랐겠어요. 출소 후에 왜 한국으로 돌아오셨나요.
 
  “이유는 딱 한 가지였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신 부모님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미국 정부가 절 ‘국가의 적(enemy of state)’으로 낙인찍었잖아요. 사람들은 모르지만 제가 미국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검사한테 제가 그랬어요. ‘내가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반역자로 사형시켜라.’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결심했어요. ‘나는 이제 스티븐 김이 아니다, 김진우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교육계에 종사 중이다. 서강대와 경기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미국으로 유학 가려는 이들을 돕는 일도 하고 있다. 예일대 박사를 마친 뒤, 스스로 피했던 교단에 다시 돌아온 셈이다.
 
  ―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어떠셨어요? 소위 지식인들에 대한 인상이 궁금합니다.
 
  “일단 한국의 배달 서비스는 참 좋은 것 같아요. 제일 마음 아팠던 게 교수들이 너무 정치적이란 거예요. 교수는 ‘내 할 말 하면서 학생들 가르치겠다, 평생 젊게 살겠다’ 결심한 사람들 아니에요? 정치 욕심, 권력 욕심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지식인들이라고 할까요, 이분들은 너무 얕아요. 공부를 안 하는 거 같아요. 글 잘 쓰고 분석 잘하려면 많이 읽어야 해요.”
 
  스티븐 김의 여정은 잠시 멈췄지만 김진우의 삶은 한창 진행 중이다. 12년 전 어느 날 찾아왔던 시련은 그의 삶을 더 높이 뻗어 나가게 할 마디의 시간이었을까. 분명한 건 그가 모든 걸 이기고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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