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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영화 〈국제시장〉 실제 인물 派獨 광부 출신 교수 권이종

“글뤽 아우프! 죽지 말고 행운을 가지고 살아 올라오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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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전라북도 장수군 지리산 산골의 貧農의 아들로 태어나
⊙ 1964년 10월 5일, 광부 신분으로 독일에 가서 1979년 2월 교수의 신분으로 귀국
⊙ 어둠 속 헤드랜턴 불빛에만 의지해 하루 노동 8시간씩 3년간 일해
⊙ 파독 간호사인 아내 만나 결혼… 아내 덕에 박사 학위, 대학교수가 되다!
⊙ 독일서 평생교육과 청소년 분야를 전공한 뒤 한국 교육에 접목
⊙ 파독광부협회 조직에 앞장서. 파독근로자기념관 초대 관장 역임

권이종
1940년생. 독일 아헨공대 교원대 학사·석사·박사 / 전북대·한국교원대 교수, 한국청소년정책개발원장, 한국청소년학회장, 한국청소년연구소장, 대통령자문기구 청소년보호위원, 서울시 청소년상담지원센터 소장, 파독근로자기념관장 역임 / 現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 이사장
  파독(派獨) 광부 출신 교수인 권이종(權彛鍾·82)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영화 〈국제시장〉 스토리의 실제 인물이다. 굶은 날이 부지기수였던 가난한 소년이 파독 광부가 되었고, 독일에 16년간 머무르며 교육학 박사・교수가 된 지금도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권이종 교수가 쓴 《파독 광부, 꿈을 캐는 교수로》(교육과학사 간).
  최근 자신의 삶을 정리한 《파독 광부, 꿈을 캐는 교수로》(교육과학사 刊)를 펴냈다. 지난 4월 1일 경기도 분당에서 권이종 교수를 만나 ‘기막힌’ 그의 일생을 함께 더듬어보았다.
 
  “1964년 10월 5일, 광부 신분으로 독일에 가서 1979년 2월 교수의 신분으로 귀국했어요. 광부 고용계약 3년이 끝나고 독일서 공부했고, 박사 학위를 땄어요. 광부로 독일에 간 사람들과는 좀 다른 삶을 살아왔어요.”
 
  그는 1940년 전라북도 장수군 지리산 산골의 한 오지마을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 보니 우리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내 위로는 형이 한명, 누나가 두명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하루에 세끼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마저도 밥보다는 소나무 껍질과 쌀겨로 만든 개떡이나 죽을 먹었다.
 
  “학교에 도시락 싸가는 것은 감히 꿈도 못 꿨죠. 부모님은 항상 굶주린 자식이 안쓰러웠는지 가끔 형님이 일하는 부잣집에 저를 딸려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독서와 일기 쓰는 것이 재미있었고, 공부하는 게 좋았다. 꽤 잘했다. 선생님들은 어린 권이종을 많이 예뻐해주셨다. 그런 선생님들을 보며 교사의 꿈을 키웠다.
 
  “가장 존경하던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이종이는 커서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에 용기를 얻어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종일 남의 집 앞에 앉아계시던 어머니
 
  공부를 이어가기에는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하지만 중학교가 너무나 가고 싶었다.
 
  “어느 날, 무언가에 이끌리듯 혼자 가출했고 전주에 가서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왔어요. 운 좋게도 전주 동중학교에 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엔 “우리 형편에 무슨 학교냐”고 했지만 이튿날 아침 아랫마을 부잣집에 쌀 한 가마니를 빌리러 갔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부잣집은 쉽사리 쌀을 빌려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찬바람 맞으며 종일 그 집 앞에 앉아계셨다. 해 질 무렵, 쌀가마니를 이고 온 어머니 덕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제게 ‘어머니’라는 말은 아무리 불러도 지치지 않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흔넷 연세에 40일 동안 곡기를 끊고, 스스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어머니는 갈 날을 미리 준비하고 계셨던 것처럼 본인 소지품 전부를 미리 정리하고 태우셨죠. 손주 사진들까지 다 정리하셨어요. 유일하게 제 박사 학위 취득 사진 한 장만 누워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걸어두셨어요.”
 
  중·고교 시절, 학업을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쌀 한 가마니를 얻기 위해 부잣집 대문 앞에서 사정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새벽과 저녁에는 신문 배달을 계속했다.
 
  고교 졸업 후에도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기에, 곧바로 입대했다. 제대 후 할 수 있는 것은 농사밖에 없었다.
 
  “서울서 살던 5촌 조카가 ‘서울에 올라올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서울 공사판에서 사람을 많이 뽑는데, 제 생각이 났다는 겁니다. 저는 ‘어딜 가든 농사보다 낫겠다’ 싶어 조카와 함께 기차를 탔죠.”
 
 
  “글뤽 아우프!”
 
광부 시절 권이종. 위 사진 맨 왼쪽. (아래 사진) 탄광에서 공부하던 독일어 책. 너덜너덜하도록 열심히 공부했다.
  서울 을지로에 있는 빌딩 건설 현장에 처음 찾아갔다. 사장은 왜소한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 사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사정사정했다. 철근을 자르거나 벽돌을 지고 나르는 일을 했다. 2년 가까이 건축 현장을 다니며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동료가 당시 한양대 공대생이었습니다. 제게 ‘파독 광부 모집’ 기사를 보여주며 함께 독일에 가자고 했죠. 파독 광부가 되면 말단 공무원 월급의 10배 정도를 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1963년 12월에 독일로 떠난 파독 광부 1진을 시작으로, 권이종은 파독 광부 2진에 합격했다. 광부 2진 모집에만 수천명이 몰렸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달리기’ ‘모래 가마니 어깨 위로 들기’ 등의 체력검사를 치렀고, 영어와 국사 과목 필기시험도 통과했다. 함께 시험 본 그 공대생도 합격했다.
 
  1964년 10월 5일 독일로 떠났다. 독일 공항에 도착해 다시 한 번 차로 이동했다. 각자 배정받은 탄광으로 향했는데, 권이종이 배정받은 탄광은 독일 아헨(Aachen) 지역 메르크슈타인(Merkstein) 아돌프 탄광이었다.
 
  “한국에서는 동굴처럼 생긴 탄광 입구로 광부들이 걸어 들어가는데, 이곳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000m 이상을 내려가서, 거기서 다시 수평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3~4km를 더 이동해야 막장이 나왔다”고 한다. 탄광 일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어둠 속 헤드랜턴 불빛에만 의지해 하루에 8시간 동안 일해야 했죠.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8시간 근무는 마치 영원(永遠)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점심 식사는 석탄 가루가 잔뜩 묻은 딱딱한 빵이 전부였죠. 지열은 섭씨 36도에 육박했고요. 땀이 비 오듯 쏟아졌어요.”
 
  탄광 안에 일하러 들어갈 때면 모두가 하는 인사가 있었다. 바로 “글뤽 아우프!”다.
 
  글뤽 아우프(Glück-auf)란 독일어로 ‘행운을 가지고 위로 올라오라’는 뜻이다. 광산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글뤽 아우프’로 인사를 한다.
 
  “탄광 일은 목숨을 걸고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기에,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내고 올라오라는 뜻에서 행운을 비는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1965년 6월 30일, 독일에 온 지 8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일하던 도중 갑자기 머리 위에 있던 집채만 한 바위 더미가 무너져서 그의 왼손을 덮쳤다.
 
  “한 달 동안 병상에서 보냈어요. 독일 의사와 간호사들의 정성 어린 치료 덕에 다친 손은 조금씩 좋아졌고, 퇴원 후 광산에 복귀했어요. 감독관이 저를 불쌍하게 봤는지 회복될 때까지 조금 수월한 일을 시켜줬어요.”
 
 
  로즈마리 부인의 손길… 독일에 남다
 
3년간 광부 일을 마친 뒤 계속 독일에 남아 학업을 할 수 있게 도와준 로즈마리 여사와 권이종.
  독일 감독관은 일에 있어서 매우 철저하고 칼 같은 사람이었는데, 광부들에게는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를 해주었다. 또한 근로조건과 임금 등도 독일인 광부들과 똑같이 대우해주었다. 권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종종 일어나는 외국인 노동자 차별대우, 임금체불이나 폭력 등의 일은 독일 광산에서는 전혀 없었다”며 “제가 광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감독관의 따뜻한 배려도 매우 컸다”고 했다.
 
  광부로서 3년이 순식간에 흘렀다. 귀국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로즈마리’ 부인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국의 광부를 친아들처럼 대해주었다. 로즈마리 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대학까지 나온 분이었다. 그녀는 “이왕 독일까지 왔으니 대학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가라”고 권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 로즈마리 부인과 딸 아스트리트가 공항까지 따라왔다. 그녀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생활비와 학비는 걱정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독일에 남으라”는 것이었다.
 
  “그날, 정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비행기에 타지 않았어요. 염치없지만 그분의 손을 잡았던 겁니다.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와 형제들 생각이 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만약 손을 뿌리치고 귀국했다면 지금의 권이종은 무얼 하고 있을까.
 
  대학에 입학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체류 비자도 얼마 남지 않았으며, 돈도 없었다. 로즈마리 부인은 교사가 되고 싶은 그의 꿈을 알고는 국립사범대학인 아헨교원대 학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뒤 푀겔러(Franz Pöggeler) 학장을 만났다. 상담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독일 사범대학은 우리나라처럼 국립대학이기 때문에 독일인만 입학할 수 있다. 또한 졸업 후 의무적으로 일정기간 독일 학교에 근무해야 한다.
 
  “그런데 푀겔러 학장은 눈물로 호소하는 제 모습을 보고, 고심 끝에 특별히 최초로 외국인 입학을 허가했어요. 또 제 처지를 알고는 대학도서관 아르바이트 자리도 만들어주고, 장학금까지 지원해주셨어요.”
 
  ‘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결국은 이루어진다’고, 그에게도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뛸 듯이 기뻤다. 개교 이래 최초의 외국인 학생으로 아헨교원대에 입학했다.
 
 
  동물원의 원숭이 같은 대학 생활
 
  대학 생활의 로망도 잠시, 공부는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처음 보는 낯선 동양인을 도와줄 친구는 없었다. 학교에 외국인 학생이 나밖에 없는데다 옷차림까지 남루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독일에서의 대학 수업은 한국에서 공부하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한국에서는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암기식으로 공부를 했는데, 독일에선 토론하며 수업을 이끌어가야 했다.
 

  그동안 그가 공부한 독일어는 생활 대화 수준이었다면, 대학교 수업에서 쓰는 단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전문적인 단어들이었다. 수업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 토론하고, 전공서를 읽는 것까지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수업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고,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니 과제나 시험은 당연히 엉망이었습니다. 공부에 자신이 없으니 우울증도 걸렸어요.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죠.
 
  힘들고 우울하고 배고플 때마다 혼자 학교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화장실만은 저를 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독일 화장실은 한국에선 볼 수 없던 수세식 화장실이라 앉아 있기도 편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난방도 들어와서 따뜻했고, 쪽잠도 잘 수 있었다. 유일한 피난처가 화장실이었다.
 
  권이종은 학교 화장실에 앉아서 중·고교 시절 좋아했던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를 달랬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힘든 날들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독일에서 아내를 맞이하다
 
독일 아헨지역 신문에 권이종·백정신 결혼식 기사가 실렸다.
  1년이 지나자 조금씩 친구들이 생겼다. 스터디그룹에 참여해 독일식 공부 방법을 익히니 수업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서서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2학년 어느 날, 함께 강의를 듣던 독일 여학생 ‘쉐퍼’가 말을 걸었다. 한국에 관심이 많던 쉐퍼는 한국 지리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에서 유학 온 여학생들을 인터뷰하러 갈 건데 약속을 잡기 위한 전화 통화를 도와달라고 했다.
 
  쉐퍼에게 받은 번호를 들고 아헨가톨릭대 사회사업대학 여학생 기숙사로 전화를 걸었다. “사실 아헨에 한국인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이튿날 한국 여학생 세 명을 만났다. 그중의 한 학생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동향 출신이었다. 그녀의 얼굴과 이름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전주여고 출신 백정신, 전주여고 출신 백정신….’
 
  1년 뒤 197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약혼식을 올렸다. 그러고 1971년 5월 22일에 아헨의 세바스티안 성당에서 결혼했다.
 
  “당시 아헨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데다, 한국인 두명이 아헨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니 많은 독일 사람의 이목을 끌었어요. 아헨 지역신문에 두 사람의 결혼식 기사가 났죠.”
 
  아내를 만나면서부터 그는 모든 면에서 안정을 찾았다. 굶주렸던 그를 배부르게 해주었고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었다.
 
  “결혼한 뒤, 우리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각자의 위치에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만난 뒤부터 공부도, 경제도, 배고픔도 해결되었어요.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박사 학위도 취득했고, 대학교수도 되었습니다.”
 
 
  푀겔러 지도교수의 헌신적인 제자 사랑
 
  독일에서는 교사가 되려면, 초등교사는 세 과목, 중등교사는 두 과목을 전공해야 했다. 권이종은 초등교사가 되고 싶었기에 교육학, 수학, 물리 세 과목을 전공했다.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직후, 그는 독일에 최초로 ‘한글학교’를 두 군데 열었다. 독일에 사는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것인데, 독일 학교를 빌려 주말에만 운영했다. 권이종은 교장 겸 교사로 봉사했다. 아이들은 한국의 역사, 문화, 언어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아했다. “지금은 독일 대도시마다 한글학교가 설립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부모 형제들은 대학만 졸업하면 귀국하기를 원했지만, 막상 독일에서 공부를 시작하니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웠다. 또 학사 졸업장만으로는 한국에서 교사 생활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푀겔러 지도교수의 권유에 힘입어 대학원에 진학해 ‘평생교육학’과 ‘청소년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 제게 ‘독일 생활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첫 번째는 아내와의 만남, 두 번째는 지도교수와의 만남, 세 번째는 박사 학위를 받은 것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고, 박사 학위를 받아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푀겔러 교수님을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한국도 그렇지만 특히 외국에서 공부하는 데에는 지도교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한 예로, 지도교수에게 사고가 발생하면 다른 지도교수를 찾아 공부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로 독일에서는 지도교수를 ‘독터파더(Doktorvater·박사 아버지)’라고 부른다. ‘학문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1979년 2월 9일 드디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독일 순수교육학 박사 학위 1호를 받은 한국인’이 되었다. 박사 학위는 16년 독일 생활의 결실이었다. 탄광에서 목숨을 걸고 일했던 것, 힘들게 대학에 입학한 일, 수업을 못 따라가 홀로 속앓이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해냈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사논문 심사와 구두시험이 끝나고 스승으로부터 ‘권 박사, 축하합니다’라고, 처음으로 ‘박사’ 소리를 들은 그 순간의 감정은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벅차고 좋았습니다. 13년간 아들처럼 돌봐주신 스승님의 품에 안겨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어요.”
 
 
  1979년 고국으로 돌아오다
 
결혼 당시 권이종과 아내 백정신씨.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전북대 교수로, 1985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국교원대에서 교수로 계속 교편을 잡았다.
 
  처음에는 한국의 대학에서 독일 수업 방식으로 강의하는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전북대에서 1년간 교수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이었던 이규호(李奎浩·1926~2002) 장관이 독일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편지를 썼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간 일, 독일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온 것까지 제 인생의 스토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교육에 기여하고 싶다는 내용을 편지에 담았죠.”
 
  답신이 왔고,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교육부에서 청소년 분야 상임자문위원을 맡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평생교육과 청소년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타이밍이 잘 맞은 셈이었다.
 
  “그렇게 교육부 상임자문위원으로 파견 근무를 하며 이규호 장관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3년간 함께 일했습니다. 독일에서 배운 모든 것을 최대한 우리 교육에 접목시키고자 열심히 일했어요.”
 
  평생교육과 청소년 교육정책과 관련된 학과를 관련 기관과 대학에 신설했다. 특히 개방대학을 기획・설치했고 한국청소년연맹 창설, 한국청소년정책개발원 신설에도 기여했다. 2001년부터는 차관급인 한국청소년정책개발연구원 원장으로 근무했다. 대통령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 민주평통 체육청소년분과위원장과 교육과 청소년 자문위원, 중앙 정부의 각종 정책위원직 임무도 수행했다.
 
  “1982년 교육부에서 일할 때 ‘대한민국 사회교육법(현 평생교육법)’을 제정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자부합니다. 평생교육법을 제정한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양질의 교육을 받고 삶의 질이 향상되었으면 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영화 〈국제시장〉과 나
 
한국개발연구원 휴먼 스토리존에 권이종 교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2007년 어느 날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협회(이하 ‘파독협회’)를 조직하고 협회 회장을 지낸 김태우 회장(작고)의 전화가 왔다. 파독협회를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사단법인 조직을 위해서는 회원이 필요했다. 비공식적으로 서울 지역에서 연락이 닿은 회원 20~30명과 함께 충무로 김 회장 사무실에서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그 후, 고용노동부와 행정안전부를 통해 파독 광부 출신 1000여명의 주소록을 확보했다.
 
  그 명단으로 파독협회 조직의 취지와 필요성을 담은 공문을 발송했는데, 70여명만 가입 의사를 밝혔다. (2008년 70명, 2009년 150여명, 2010년 200여명, 2011년 400여명, 2012년 450여명, 2013년 700여명, 2017년 1000여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2013년 5월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파독근로자기념관이 들어섰다. 그해는 우리 광부들이 독일에 파견된 지 꼭 50년이 되는 해였다. (간호사들은 1966년에 파견됐다.) 또 한독(韓獨) 수교 13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기에 파독근로자기념관 개관의 의미가 더욱 컸다. 권이종은 파독근로자기념관의 초대 관장을 맡게 되었다.
 
  “1963년 12월 21일 최초로 광부, 간호사, 간호조무사가 먼 이국땅 독일로 파견되었어요.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고난의 벽을 넘어 기적을 이루어낸 라인강 독일로 갔고, 그곳에서 그들이 흘린 땀방울은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014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주말 새벽에 갑자기 손녀가 왔다.
 
  “할아버지, 오늘 우리 좋은 영화 보러 가요.”
 
  들뜬 손녀를 따라 영화관에 갔다. 영화의 제목은 〈국제시장〉이었다. 이 영화는 실제 파독 광부였던 권 교수의 스토리를 모델로 만든 영화다. 영화가 인기가 많은지 조조시간 말고는 자리가 없었다.
 
  “글뤽 아우프!”를 외치며 광부들이 광산에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독일 광산을 정말 완벽하게 담아내서 신기할 정도였다. 광산 에피소드를 볼 때는 그 시절 생각이 나 눈물이 앞을 가려 영화를 제대로 못 봤다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손녀 앞에서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습니다. 딸은 말없이 저를 안아주었죠. 손녀는 집에 가는 내내 제 손을 잡고 놓지 않았어요. 20대의 저는 매시간, 매초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후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과 친지들, 지인들이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TV와 라디오, 언론사로부터는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독일문화원과 독일 TV 다큐멘터리도 그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일본, 동남아, 독일, 스위스 등 여러 나라에서도 동영상이 만들어졌다. “동남아 국가 출장 중에는 그 나라마다 인생 여정에 대한 인터뷰 요청과 보도 요청이 많았다”고 한다.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권이종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모습과 6·25전쟁 직후 한국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은사의 말씀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도 전 국토가 잿더미였다고 해요. 아헨 지역만 해도 전체 건물이 폭격당해 도시의 70~80%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베를린 같은 대도시는 90% 이상이 폐허가 됐대요. 전쟁 후 독일 국민 역시 가난과 굶주림이 이어졌어요.
 
  1948년 한 신문 기사에는 ‘국민의 20%가 아침을 굶고 일을 나갔다’고 써 있었어요. 루르 지방의 라인강 다리 공사현장에서는 노동자를 일찍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해요. 그 이유는 굶주린 노동자가 허기증 때문에 강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어요.”
 
  더욱이 큰 문제는 전쟁에 끌려간 남자들이 대부분 사망하거나 부상자로 돌아온 것이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주로 여성이나 미성년자뿐이었다.
 
  베를린의 경우 전쟁 후 잔해를 치우는 데, 작업 도구도 없이 여성과 아이들 6만여명이 동원되었다. 물자가 부족하여 벽돌 한 장 한 장 모아서 건물을 짓고, 나무 한 토막까지도 다 수거하여 땔감으로 사용했다.
 
  빈 땅이 있으면 채소와 곡식을 심어 생계를 유지했다. 베를린 현 국회의사당 광장을, 당시에는 밭으로 일구어 곡식을 심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절망 국가를 희망 국가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 독일 국민입니다. 그랬던 나라가 지금은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어요. 우리나라도 전쟁 후 독일과 유사한 환경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권이종 교수는 “독일에 처음 갔을 때, 독일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독일 음식점에서 손님이 간 뒤 접시에 음식이 남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독일에서는 음식을 남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죠. 제가 독일에 살 당시에는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독일인들은 과일을 껍질을 깎아서 먹지 않는다. 사과도 감도 기타 과일도 껍질째 그냥 먹고, 씨까지 다 먹는다.
 
  독일 식당에서는 공짜로 물을 주지 않는다. 사서 마셔야 한다. 지역에 따라 물에 석회가 많아서 건강상 수돗물을 마시지 않는다. 커피포트를 오래 사용하면 바닥에 석회가 굳어 있고, 샤워를 하면 바닥에 석회가 보일 정도다. 독일은 또 화장실 물 사용료를 내야 한다. 공중화장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대부분의 식당 화장실도 사용료를 받는다.
 
 
  “독일엔 교복과 두발 통제가 없다”
 
권이종 교수는 한국교원대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권 교수는 독일에서 산 물건 중 지금까지도 쓰는 것들이 있다. 결혼할 때 선물받은 부엌칼, 포크, 탁상시계와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아내가 사준 탁상과 의자 등이 그것이다. 세탁기와 냉장고 역시 40년 넘게 사용했지만 고장 나지 않았다. 다만 녹이 슬어서 버린 경우는 있다. 물건을 이렇게 오래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 제품이 굉장히 견고하게 만들어진 덕분이다.
 
  “제가 독일의 견고한 물건을 얼마나 선호했으면 귀국할 때 수세식 변기, 샤워 꼭지, 전기 배선과 이중창 문고리 등 건축 자재를 한국에 가지고 왔어요. 귀국하면 집을 지을 요량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에 사느라 집을 짓진 못했지만 귀국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샤워 꼭지 등의 일부 물건은 보관하고 있어요.”
 
  독일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과 얼마나 다를까. 교육제도는 또 어떨까.
 
  권이종 교수는 “독일엔 교복과 두발 통제가 없다”고 했다. 독일 학생들은 옷을 물려 입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발과 가방도 브랜드 제품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1980년 초 권 교수가 교육부에 근무할 당시 “국내 최초로 교복과 두발 자율화를 도입하자”고 주장한 일이 있다. 결국 학교장 재량에 따라 교복과 자유복을 선택하게 되었다.
 
  독일은 휴대전화를 쓰는 청소년이 많지 않다. 부모도 사주지 않고, 본인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독일에는 결혼 축의금이 없다. 결혼하기 전에 신랑・신부가 필요한 물품 목록을 작성하여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리 알리면, 초대받은 사람은 그 목록을 보고 자신의 형편에 따라 목록에서 골라 선물한다.
 
  “결혼식에도 아주 가까운 관계 외에는 초대하지 않아요. 하객이 아무리 많아도 50명이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최근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거리 두기를 하여 결혼식 인원을 50명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런 제한은 독일에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장례식 역시 부의금이 없다. 대부분은 꽃을 사서 간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끝나면 가까운 사람들을 가정으로 초대해 간단한 파티나 식사를 한다.
 
  독일도 우리나라처럼 자원이 많은 나라는 아니다.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초토화돼도 세계 4대 경제 대국과 기술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교육의 힘이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제이며, 독일 초등학생들은 오전 수업만 합니다. 중·고등학생도 오후 3~4시경이면 모두 귀가하죠. 독일 사람들은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독일 학교에서는 친구 사귀는 것을 적극 권장해요.”
 
  독일 중등교육 제도의 특징은 초등학교 4년을 마친 이후 학생들의 학업 능력에 따라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세 분야로 나뉜다는 것이다.
 
  먼저 9년 과정의 일반계 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 6년 과정의 실업학교인 레알슐레(Realschule), 5년 과정의 직업학교인 하우프트슐레(Hauptschule)로 나뉜다. 혹은 통합형 인문 실업 종합학교인 게잠트슐레(Gesamtschule)에 진학할 수도 있다.
 
 
  입시경쟁, 사교육도 없어
 
  학생의 학업 수준에 따라서 상급 학교를 결정한다. 김나지움은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 학교이다. 레알슐레는 실업계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김나지움에 비해 기술적인 과목들을 가르치지만 하우프트슐레와는 달리 조금 더 높은 이론적 이해 능력이 요구된다. 하우프트슐레는 인문 교육과 동시에 수공업과 산업체에서의 직업 생활에 필요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무 준비 교육을 병행한다.
 
  그리고 게잠트슐레는, 위 3단계 학교 제도는 호환성이 결여되어 학생들의 잘못된 진로 선택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보완하여 진로 선택의 기회를 한 번 더 주기 위한 방안에서 생겨난 종합학교이다.
 
  “상급 학교 진학 결정은 교사, 부모, 학교 측이 협의하여 정합니다. 단, 성적이 낮은 자녀임에도 꼭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학교에 보내겠다고 하면 기회는 줍니다. 그러나 그 학교의 학업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면 다시 수준에 맞는 학교로 전학을 해야 해요.”
 
  김나지움에 다니는 학생들은 졸업연도에 대학 입학 자격시험인 아비투어(Abitur) 시험을 보는데, 합격하면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재밌는 것은 시험에 합격만 하면 언제든지 본인이 원하는 학과에 입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첫해에 경쟁이 심해 못 들어가면 다음 해에 입학할 수 있어요. 누구나 시험을 본 지 3년째 되는 해에는 거의 다 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다르게 입시 경쟁이 없고, 학원과 과외 등의 사교육도 없다. 또한 대학 진학 문제로 고민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 교사, 부모가 없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시험 때문에 비행기 이착륙을 통제하는 나라는 없다.
 
  독일 대학 입시에서 학교 성적 반영은 20% 정도밖에 안 된다. 우리에게 좋은 대학이라고 알려진 전통 있는 독일 대학들이 있지만 사실상 서열화는 없다. 부모도, 선생도, 사회도 명문과 비명문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처럼 서울 안에 있는 대학과 지방 대학을 차별하지 않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낸다.
 
 
  코로나19가 준 행복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병의 유행에다 81세 고령이라서, 작년 초부터는 현역 봉사기관의 이사장 직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만 머물고 있다. 때로 답답하고 우울했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지하 땅속 1000m 깊이의 섭씨 35도의 탄광보다는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죠. 저는 평생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숨을 쉴 수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하죠.”
 
  권 교수는 매일 ‘오늘이 생명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코로나19 이후, ‘코로나 시간표’를 짜서 실천하고 있다. 매일 규칙적으로 실천하려 노력한다.
 
  권 교수는 박목월의 시를 가곡으로 만든 ‘이별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올해 81세, 이제는 해가 지고 있는 나이다.
 
  “이 노래를 예전보다 자주 듣고 부르면서 제 생활과 마음을 정리합니다. 평생의 삶이 누군가에게 태양처럼 따뜻했기를 바라며….”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독일 교육의 특징 2가지
 
  세미나 수업, 토론 수업
 
  한국 교육은 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정면 수업이다. 독일에는 이런 수업이 없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교사나 교수는 가능한 한 말을 적게 하고, 학생들의 질문과 토론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독일의 일선 학교나 대학 현장에서는 세미나식 교육을 가장 많이 한다. 사전에 과제를 주고, 준비한 내용 중심으로 학생들의 발표·토론, 교수의 코멘트 등으로 진행된다. 서로 가르쳐주고 서로 배우는 쌍방 간의 학습이다.
 
  “지도교수던 푀겔러 교수는 수업 때 거의 빈손으로 강의실과 세미나실에 오셨다. 자료, 노트, PPT 없이 수업을 진행해야 더 교육적인 효과가 있으며, 그래야 창의적 세미나가 진행되기 때문이라 하셨다.”
 
  독일 학교에서는 토론식 수업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가정과 학교 모두 학생들의 사고력과 창의력, 문제해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격의 없는 토론이 이루어지고, 학교에서도 토론식 수업을 통해 교육과 삶 속에서 논술 능력이 길러진다.
 
  초등학생 때부터 신문 사설을 요약함은 물론 정치, 경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토론을 통해 경험을 쌓아나간다. 한국처럼 암기식 교육은 통하지 않는다.
 
  “토론을 잘하면 논술도 잘한다. 대입시험인 아비투어(Abitur)를 통과해야 진학할 수 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초·중·고교까지 모든 과정에서, 고전부터 현대의 문학작품과 신문 기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통해 연습한다.”
 
  또 주어진 텍스트를 요약하고 다른 학생들 앞에서 발표한다. 학교 수업 중에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다른 학생들과 질문을 주고받으며 논쟁하는 연습을 한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독일이 토론 문화가 발달된 것은 국민이 책을 많이 읽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 가는 아주머니도 장바구니에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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