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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문인과의 차 한 잔 ② 소설가 전상국

“내게 소설 쓰기는 놀이… 문법 파괴도 놀이였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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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정 생가 맞은편에 건평 165평 2층 규모로 ‘전상국 문학의 뜰’ 건립
⊙ 은사(黃順元) 권유로 김유정과 만나… 김유정문학촌장,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장
⊙ “넌 어휘력과 문장이 젬병이다”… 고교 문예반 선생님 한마디가 소설가 길 열어
⊙ 괴롭던 서울살이(중랑구 상봉동)… 《영자의 전성시대》 쓴 趙善作 만나 다시 팬 들어
⊙ 단편 〈동행〉 이후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동족상잔 비극을 소설로

全商國
1940년생. 경희대 국문과, 同 대학원 졸업 / 강원대 명예 교수 /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이 당선되어 등단. 작품집으로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등과 장편소설 《늪에서는 바람이》 《불타는 산》 《길》 《유정의 사랑》 등이 있다. /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한국문학상, 후광문학상, 이상문학특별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받았다.
강원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소설가 전상국 선생.
  소설가 김유정(金裕貞·1908~1937)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소설가 전상국(全商國·81)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강원대 명예교수인 그는 김유정을 알리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 아니, 미쳐 살았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상국, 그만의 문학적 성과가 “여울목 차돌들”(황순원 소설가)처럼 반짝인다. 각각의 중·단편 소설로 이뤄진 매끄러운 살결들이 때로는 가슴 시리게 때로는 따스한 훈기를 사람들에게 던졌다.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등과 장편소설 《늪에서는 바람이》 《불타는 산》 《길》 《유정의 사랑》 등이 있다.
 

  그의 소설에는 늘 ‘괴물’이 등장하는데 6·25전쟁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상처를 증언하는 인물이다. 그 폭력과 상처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 권력과 일그러진 자아(自我)의 문제와 닿아 있다.
 
  조만간 평생의 문학적 흔적을 담은 ‘전상국 문학의 뜰’이 세워진다. 김유정 생가(춘천시 신동면 증리) 맞은편에 건평 165평(545m2)으로 이뤄져 있다. 1층은 전시관, 2층은 책 곳간(庫間)으로 채워진다. 곳간에는 지금까지 모은 소설과 시집 1만5000권이 전시된다.
 
  지난 3월 4일 강원도 춘천의 김유정문학촌에서 전상국 교수를 만났다.
 
  “내가 평생 즐겨 쓴 소설은 물론 이 시대 우리나라 작가·시인들이 남긴 소설과 시들을 가볍게 만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생각한 겁니다. 책은 안 팔리지만 신명(身命)을 다해 글을 쓴, 한국 문학에 이런 작가·시인들이 있다는 걸 알리는 데 목적이 있어요.”
 
  “작가·시인들의 사인이 든 책들이어서 방문객들이 책을 펴는 순간의 느낌이 남다를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전상국 문학의 뜰’
 
  ― 1층에는 소설가 전상국의 모든 것이 전시되겠네요.
 
  “어느 날 김유정에 미쳐 사는 내게 아내(김옥자 여사)가 말했어요. ‘김유정 작가는 좋겠다. 젊어서 죽었는데 당신 같은 자식이 있어서’라고. 김유정 작품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조상 기일(忌日)마저 까마득히 잊고 있는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어요.”
 
  그래서 ‘문학의 뜰’을 구상하게 됐단다. “죽은 뒤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부족한 대로 정리하고 매기는 자기 검증, 자기 인증의 본때로 삼으면 어떠냐는 아내의 뜻이 간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내 것을 좋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전상국과 김유정은 강원도 출신이란 공통점 외에 《조선일보》 신춘문예(각각 1935년, 1963년)를 통해 등단한 이력도 같다. 전상국은 또 1990년 제1회 김유정문학상을 받았다는 인연도 있다.
 
  김유정은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태생이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 입학해 현대식 교육을 받다 제적당해 귀향했을 때가 스물두 살(1930년)이었다. 연상의 기생 박록주(朴綠珠·1906~1979)를 향한 연정(戀情)을 이루지 못한 한(恨)에다 몇천 석 집안의 몰락까지 겹친 상황에서의 낙향이었다.
 
  김유정은 고향의 자연 속에서 일제강점기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담 너머로 넌지시 바라보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 그네들 이야기가 소설 〈동백꽃〉 〈봄·봄〉이 되었다.
 
  전상국은 경희대 대학원 시절, 은사인 황순원(黃順元·1915~2000)의 권유로 동향의 김유정과 만났다. 그것이 김유정과의 첫 인연, 평생 함께할 필연이 되었다.
 
 
  “새로운 어휘를 찾는 즐거움”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 〈동행〉으로 등단할 당시의 전상국.
  전상국 소설가의 말이다.
 
  “김유정이 강원도 출신 작가라는 걸 잘 몰랐어요. 그 작가에 대해 관심이 없었어.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그제야 가치를 알게 되었지. 와! 이런 매력 있는 문장, 매력 있는 작가가 있다니…. 이런 작가를 내가 연구하다니…. 그의 소설에 미치게 되더라고. 작지만, 작은 것이 문학에서 갖는 가치, 그것을 알게 되면서 김유정에게 미치게 되더라고….”
 
  ― 뭐가 보이던가요.
 
  “작가로서의 천재성 같은 거지. 어눌해 보이는 천재성. 내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앞서 했던 것…. 나는 우리 문학에 있어 의성어(擬聲語)·의태어(擬態語)를 제대로 활용한 작가가 김유정이 아닌가 싶어요. 새소리, 물소리 같은 의성·의태어를 묘사한 문장을 읽으며 나도 의성·의태어의 묘사에 미쳐 갔거든.
 
  국어사전에 나온 의성·의태어는 안 썼어요. 내가 만들어 썼지. 내가 듣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만들어 썼어요. 또 초성으로 된 문장을 내가 처음 썼잖아요.”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행〉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다.
 
  〈그러면서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ㅎㅎㅎㅎㅎㅎㅎ
 
  눈 덮인 산속, 아직 눈 조용히 비껴 내리고 있는 밤이었다.〉
 
  지금은 소셜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로선 파격이자 해체였다.
 
  “헤헤, 후후, 흐흐, 쿡쿡 등과 다른 다소 자학적인 음울한 이미지의 웃음소리 ㅎㅎㅎ을 발상한 것이지요.
 
  내 문학의 즐거움은 관행적인 것들, 문법을 파괴하는 것인지 모르겠어. 그것(관행, 문법)을 지켜선 다른 사람을 넘어서지 못하겠더라고.
 
  내게 소설 쓰기는 놀이야. 문법 파괴도 놀이로 생각하며 형식 실험을 즐거움으로 삼았어요. 내가 만든 재미, 이를테면 새로운 문장을 쓰는 즐거움, 어휘를 찾는 즐거움이 내 문학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죠.
 
  1970~80년대 당시 소설이 메시지 중심일 때 나는 디테일을 전달하는 방식, 예컨대 문장이라든가 어휘에 초점을 뒀는데… 그건 내가 문장력이 취약했으니까….”
 
 
  ‘넌 어휘력과 문장이 젬병이다’
 
  ― 그럴 리가요! ‘탄탄한 문장력’ 하면 ‘전상국’ 아닌가요.
 
  시골 책방에 꽂힌 탐정소설 몇 권을 읽었을 뿐 문학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던 소년 전상국이 고교(춘천고 32회) 2학년 때 문예반에 들어갔다. 1학년 담임이자 시인인 이희철 선생님(작고)의 영향 때문이었다.
 
  “문예반에 들어가니 큰 벽이 있어. 딱 한 번 참가한 백일장에 입상조차 못 했을 뿐 아니라 며칠 뒤 문예반 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호출하더군. 선생님 왈(曰),
 
  ‘넌 어휘력과 문장이 젬병이다’.
 
  젬병이 문학가를 꿈꾸다니…. 선생님이 내민 작문 원고를 제대로 받지 못해 묶음이 풀린 원고지가 교무실 바닥에 흩어졌죠. 흩어진 원고를 주워 들고 교실로 돌아올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가는 전혀 기억에 없어요.”
 

  며칠 뒤 학교 본관 현관 앞, 백일장에 나갈 문예반 학생들이 자신들을 백일장에 데리고 갈 문예반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휘력과 문장이 형편없다는, 며칠 전 그 선생님의 그 ‘젬병’ 판단을 받은 전상국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그러나 매정하게도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느덜은(너희는) 백일장에 나갈 자격이 없다.”
 
  열외로 밀려난 몇몇 학생은 서로 눈길도 한 번 안 맞춘 채 뿔뿔이 흩어졌다. 한 녀석이 개구멍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가자 다른 녀석들도 사이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상국 역시 개구멍으로 빠져나와 소양강 강둑까지 걸어갔다.
 
  “소양강의 4월, 봄빛 속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이 뭐 그리도 아름답던지.
 
  미루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기가 무섭게 끄억끄억 울음이 터졌어. 더럽게 서러웠어요.”
 
  울면서 무심히 훔쳐본 소양강 강물은 여전히 뻔뻔스레 아름다웠다고 한다. 실컷 울고 난 뒤 열없는 마음으로 경춘선 철길을 따라 걷다 보니 공지천의 뱀산 앞에 다다랐다. 뱀산 절벽에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제기랄, 그 진달래꽃이 왜 또 그렇게 아름답던지, 철길에 주저앉아 또 울었다.
 
  전상국 교수의 말이다.
 
  “그때 그 장면을 보게 된 거야. 철길 아래 움막에서 한센인 부자(父子)를 봤어요. 예닐곱 살 된 남자아이가 손가락이 뭉그러지고 눈썹도 없는 나환자 아버지의 얼굴에 무슨 약인가를 바르고 있는 장면이었어. ‘아! 저런 사람도 있구나’. 열외로 밀린 밑바닥 그 절망에서 새로운 세상을 본 것입니다.”
 
  며칠 후 그는 공지천 그 철길 위에서 내려다본 움막 속 한센인 아이를 서술자로 하여 이야기 하나를 꾸며냈다. 거짓말 이야기를 꾸며내는 일이 되게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산에 오른 아이〉
 
  “어휘력이 없고 문장이 형편없다는, 문예반 선생님의 그 말씀. 어쩌랴. 불편하면 편하게 하기. 못난 것을 감추다 보면 도리어 잘 아는 척 뽐내게 되잖아요. 열등감 극복의 방법, 최선의 길이 바로 거기 있었어요.”
 
  그때부터 국어사전을 뒤졌다. 한 단어에 많은 유의어가 있음을 발견한다. 낱말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컸다. 낯선 낱말들, 문장들에 밑줄을 치고 노트에 옮겨적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낱말이 되더란다.
 
  또 “여러 개의 낱말을 써놓고 그중에서 그럴듯한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주술 관계를 바꿔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글 쓰는 일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은 언어의 특수한 구조잖아요. 내가 꾸며내는 이야기 내용에 걸맞은 괜찮은 낱말, 그럴듯한 문장을 만드는 노력을 즐기죠. 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걸 담는 그릇 만드는 일에서 글쓰기의 진짜 즐거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원고지 60장 남짓한 한센인 부자의 이야기를 쓴 〈산에 오른 아이〉는 당대 중·고교생의 문예 등용문이었던 제6회 학원문학상(1959년) 고등부 소설 부문 응모작 350여 편 중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그해 조해일, 양문길, 황석영 등이 함께 입상했다고 한다.
 
  “작가가 안 됐으면 창피해서 자랑을 못 하겠지만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인식의 힘이 아니겠어요? 극복한 것, 극복하는 즐거움이 내 문학의 길입니다.”
 
 
  처녀작 〈동행〉
 
《조선일보》 1963년 1월1일자에 실린 전상국의 당선작 〈동행〉.
  1963년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행〉은 전상국 교수의 처녀작이다. 작품 구상은 경희대 1학년 겨울방학 때 했다. 그해 서울에 처음으로 상경한 촌놈 대학생으로 난생처음 새 구두 하나를 사 신었고 그 새 구두를 신고 4·19혁명의 현장인 신설동에서 광화문까지 주로 뒷골목으로 잽싸게 뛰어다니다 발뒤꿈치가 움푹 파일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 구두를 신고 그해 겨울방학 고향에 내려갔고 고등학교 때 문학 서클을 함께하던 친구들을 만났다. 술김에 선배가 사는 춘천 근교의 장학리라는 시골 마을을 찾아가는데 폭설이 내린 그 밤, 길을 잃어버려 생눈길을 헤매야 했다. 야산 눈길을 엎치락뒤치락 넘던 그 즐거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뭔가 그 눈길을 배경으로 그럴싸한 얘기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감상적인 톤을 갖게 될 것이고 좀 더 서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이야기면 더 좋았어요.”
 
  당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6·25 전후의 상황을 통해 자신의 머리에 각인된 몇 개의 사건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과정의 어른들 눈에 서렸던 그 살기(殺氣)를 본 사건들이었다.
 
  “그래, 동족상잔의 그 비인간적 싸움을 모티브로 하되 6·25 이야기 그 이상의 어떤 인생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하자!”
 
  전상국의 수필집 《우리가 보는 마지막 풍경》(2010)에는 〈동행〉을 구상한 이야기가 담담히 실려 있다. 인용하면 이렇다.
 
  〈… 좀 더 극적이고 긴장감 있는 이야기면 더 좋겠지. 춘천에서 살인사건이 생기고 그 살인범이 눈 내리는 밤, 자기 고향을 찾아간다. 그는 6·25 때 부역자로 10년 징역을 마치고 나온 날 범행을 한 것이다. 그 범인을 잡기 위해 폐병 3기인 형사가 역시 그 눈길에 나서고 두 사람은 드디어 동행하게 된다.
 
  길을 함께 가고 있기도 하지만 살인범은 아버지 무덤에서 자신의 기구한 삶을 마감하러 가는 것이고 그 형사 역시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마지막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의 동행이 인간적 화해로 결말을 맺는 그런 감동적 이야기….〉(239쪽)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원고지 70장 정도의 작품을 써서 은사인 황순원 선생님한테 불쑥 내밀었다. 대학 2학년 2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동행〉은 이후 내 작품이 만들어지는 하나의 등식이 되어버렸어요. 주인공이 고향을 찾아가는 귀소(歸巢) 의지라든가 6·25 얘기를 다루되 반드시 오늘의 현실과 혹은 인생의 어떤 문제와 결부시키자는 작가의 의도 같은 것이지.
 
  어떻든 〈동행〉은 내 출세작이고 처녀작입니다. 또 아직도 내 작품의 중심 모티브이며, 내 소설 구성의 등식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지금도 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동행〉 속 그 밤 눈길을 걸어가는 두 사내의 발 소리가 들립니다.”
 
 
  趙善作과의 운명적 만남
 
춘천고 시절 문예반 동기들과 함께. 앞줄 오른쪽이 전상국. 뒷줄 가운데가 시인 이승훈.
  〈동행〉 이후 단 두 편의 단편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전상국은 귀향했다. 원주 육민관고등학교의 국어 교사로 시작한 교직 생활은 강원도교육청 교원 임용고시를 통해 춘천의 공립학교 선생으로 이어졌다. 내리 7년을 3학년 담임을 맡았다고 한다.
 
  ― 1963년작 〈동행〉 이후 소설을 단 두 편 쓰곤 안 쓰셨더군요.
 
  “그 시절 단 한 편의 작품도 쓰지 못했는데 문학이 나를 떠났기 때문이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적인 삶이 그것이었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거든.”
 
  그때 쓴 단 두 편이 〈광망〉(《현대문학》 1964년 2월호), 〈해바라기 시계〉(《문학춘추》 1966년 1월호)였다. 그러다 1972년 봄 은사 조병화(趙炳華·1921~2003) 선생의 주선으로 직장을 서울로 옮겼다. 경희고 국어 교사가 된 것이다.
 
  “원치 않게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문학 동네’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잦아졌어요. 가뜩이나 서울 생활에 적응을 못 해 괴로운 판에 만나는 사람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해 한없이 왜소해졌어요.”
 
  신경성 위장병과 속 쓰림을 앓게 되었고 이에 ‘노루모산’ 같은 위장약이 주식이 되었다. 체중이 58kg(키 178cm)까지 빠지면서 마음은 고향으로 도망칠 궁리만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수돗물도 안 나오는 산동네 셋방에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림한 아내가 무리를 해 중랑구 망우리고개 밑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했다”고 한다.
 
  서울 중랑구 상봉동 105-37번지. 그런데 운명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의 집에 방이 3개였는데 방 2개는 세를 놓았다. 어느 날 퇴근을 해 집에 들어서는데 방 2개를 세 내 사는 인근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인사를 청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기 방’을 당당히 쓰고 있는 그 초등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그 선생님 왈, ‘문패를 보니 혹시 오래전 단편 〈동행〉으로 당선한 그 전상국이 아니냐’는 것이었어요. 자신이 대전사범을 나와 입대했을 때 신문에서 그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겁니다.”
 
  그가 바로 장편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를 쓴 조선작(趙善作) 작가였다.
 
  “당대 산업사회의 뒤안길 그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그려낸 《영자의 전성시대》가 바로 우리 집 방 한 칸에서 연재되고 있었던 겁니다. 당시 조선작 작가는 조해일, 최인호 등과 함께 신문 연재를 도맡아 하는 1970년대 작가 사단의 대표 작가 중 한 분이었어요.
 
  이런 경우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고 하던가. 치명적이었어요. ‘그동안 왜 소설 안 쓰신 겁니까’ 하며 조 선생이 내게 소설 쓰기를 권유했어요.”
 
 
  〈아베의 가족〉
 
1993년 잡지 《현상공모》 커버를 장식한 소설가 전상국.
  몇 달 뒤 조선작 작가가 자기 집을 짓고 이사를 갔다. 그가 쓰던 사랑방을 전상국이 차지하게 됐다. 그의 인생 최초로 ‘내 방’이 생긴 것이다.
 
  “그 방에서 등단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소설을 썼어요. 원고지 앞에 앉을 수 있는 주말이 기다려졌어요. 원고지를 메우기 시작하면서 입에 달고 살던 소화제도 찾지 않았지.”
 
  조선작을 만난 뒤 쓴 첫 작품이 〈전야〉(《창작과비평》 1974년 가을호)였다.
 
  이후 수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1977년 단편 〈사형〉과 〈껍데기 벗기〉로 제22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첫 작품집 《바람난 마을》(창작문화사)도 그 무렵 나왔다.
 
  1979년에 나온 중편 〈아베의 가족〉은 지금의 전상국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아베의 가족〉으로 제6회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자유문학 부문)을 받았다. 또 1980년 〈우리들의 날개〉로 제14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전상국 교수의 작품은 6·25 참상이 낳은 고향 상실의 분단문학을 지향해왔다. 아버지의 권위 추락과 분단 상황 인식이 병진하는데 어린 시절 자신이 겪은 전쟁 체험이 문학적 인식의 밑그림이 되었다. 〈하늘 아래 그 자리〉 〈산울림〉 〈동행〉 〈안개의 눈〉 〈외등〉 〈고려장〉 〈여름의 껍질〉 〈아베의 가족〉 등에서 6·25 참상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주돼 나타난다. 전 교수의 말이다.
 
  “우리의 전쟁이, 특히 내가 어린 시절 겪은 분단이 그랬어요. 시골서 태어나고 자란, 그 고향의 상실, 아름다웠던 파괴, 우리의 전통적 미덕의 무너짐, 뒤집힌 질서, 이런 것들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정치꾼들의 몰염치…, 이런 모든 것의 현재진행형이 나의 현실 인식의 단초가 됐던 거지.”
 
 
  ‘빨갱이’에 대한 기억들
 
경희대 국문과 재학 시절 전상국(왼쪽). 가운데가 시인 이성부다.
  어린 시절 전상국이 ‘빨갱이’를 인식한 계기는 이렇다.
 
  “여덟 살 때 홍천경찰서 앞이 우리 집이었는데 빨갱이들이 경찰서에 잡혀왔다고 해 그 사람들은 얼굴이 빨간 줄 알고 구경을 갔다가 정말 놀랐어. 그 빨갱이 중에 내 옆집 아저씨도 있었던 거지. 빨갱이 얼굴도 모두 우리와 똑같고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땐 정말 충격이었어요.
 
  한번은 인민군들이 집에 왔는데 열여섯, 열일곱이야. 우리 집 대청에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할머니가 ‘어이구, 이 녀석아!’ 하고 말하니, 울기도 하고… 애들이야, 애들. 자기 키만 한 장총을 잘못 다뤄 총소리가 나자 울고 그랬어요.
 
  어릴 때 본 인민군 모습이 깨지지 않는 거야. 적(敵)이라는 개념보다 무언가 다른… 하여튼 다 희생자로 생각되는 거야. 가해와 피해의 악순환이란 인식이 생긴 거지. 그럼 뭐야? 결국 다 피해자다.”
 
  ― 평생 분단문학을 하셨지만 지금 우리 사회도 여전히 분단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무서워지는 게 편 가르기입니다. 내 편, 니(네) 편. 편의 힘… 점점 심화되고 있어요. 결국 적이에요. 그전에는 전쟁이 났어도 증오라든가 불신이 덜했어요. 지금은 편 가르는 게 바로 불신과 증오야.
 
  내 소설 모티브가 불신과 증오입니다. 남북이 나뉠 때 이데올로기로 나뉘는데, 한 가정이 갈라지는 것과 똑같더라고. 그 ‘엄마’는 갈라진 ‘아비’를 죽일 놈으로 만드는 거야. 북쪽, 남쪽 어디에서도 사람이 아닌 거야. 자기 체제를 위해 불신과 증오를 심어준…. 그 아이들이 점점 물들어가는 것이고. 이게 참 무섭더라고. 잘못 쓰이는 힘, 그 힘을 교활하게 쓰는 어른들이 바로 정치꾼이야.
 
  내가 연작 〈사이코〉(1990년 중편 〈사이코 시대〉로 제1회 김유정문학상과 강원도 문화상 수상. 1996년 작품집 《사이코》로 출간됐다)를 썼는데, 나는 지금도 정치가에 대한 기대가 있어요. 그런데 정치꾼만 있는 거야. 오직 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김유정과 다시 만나다
 
평생의 문학 스승 황순원(가운데), 조병화 선생과 함께.
  상경하여 새로이 시작한 작품 활동을 10여 년 동안 보통 이상으로 꽤 즐긴다 싶던 어느 날, 그의 안에 다시 바람이 일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 내지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것, 낯선 세계에 대한 선망, 이것이 아닌 저것으로, 모든 것이 지리멸렬하고 하는 짓이 모두 진부했다”고 한다. 방황, 주말마다 청량리역 광장에서 출발하는 산악회를 따라 산행에 나서는 일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가끔 산에 오르는 일은 자연에 대한 갈증만 키울 뿐 돌아오면 다시 더 큰 허망이 생겼다.
 
  다음은 2020년에 펴낸 산문집 《작가의 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 신명을 잃으면 버리기,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그것이 내 주특기였다. 어쩌면 그것은 전업 작가가 되고 싶은 유혹, 출구 찾기, 그 욕구가 얼굴을 내민 것일 수도 있었다. (중략) 교직과 글쓰기, 내가 걷는 그 두 길 모두에서 매너리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 자신을 본 것이다.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본 것이 문제였다. 모든 것이 다 뻔하고, 사사건건 낡고 데데했다. 창의의 실종,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죽을 것만 같았다.…〉(59쪽)
 
  그 위기의 순간, 1985년 봄, 기회가 왔다. 대학 학부는 물론 대학원도 함께 다닌 작가 김용성이 국립 강원대 교수 채용에 넣었던 원서를 도로 찾아오면서 뜻하지 않게 그에게 길이 열린 것이다. 결국 강원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서울을 떠나며 탔던 경춘선 성북역 앞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강원도에 가면 당신도 자연이 된다.’
 
  12년 만에 서울 탈출, 고향, 자연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춘천으로 돌아온 것은 1985년. 그때 등산로도 없던 652m 금병산을 내려오다가 노란 동백꽃의 알싸한 그 향기를 맡았다. 만 스물아홉 살에 요절한, 그래서 영원한 청년인 김유정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김유정 소설에 빠지면서 김유정을 기리는 일에 미치기 시작했어. 사실은 글쓰기의 즐거움보다 김유정 뒤에 숨어 사는 일을 더 즐겼다는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지요.
 
  숨었든 미쳤든 그 값을 치러야 했어요. 김유정 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전상국 소설가’라는 직함을 내려놓아야 했으니….”
 
 
  김유정역이 생기게 된 사연
 
김유정 흔적이 있는 춘천 금병산 수리봉을 등반한 전상국과 아내 김옥자씨.
  “김유정문학촌장,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작가 전상국’보다 훨씬 명예로운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그 눈높이에 맞추었다.
 
  “그 나이에 사경(私耕) 한 푼 안 받고 김유정네 머슴이 웬일이냐”고 비아냥거리는 동료 교수도, “작품을 쓰지 않고 이런 일에 시간을 뺏기는 게 안타깝다”는 문단 동료들도 많았지만, 그는 미친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딜 가서 이야기할 때도 내 문학 이야기는 5분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다 김유정 이야기만 했어요. 여기(김유정문학촌) 온 사람들에게 내가 작가라고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남들이 들으면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거든. 내가 작가라는 것을 철저히 내려놓았어. 내 문학 이야기는 여기서 절대 안 했어요. 이곳 마을 사람 누구도 내가 작가라는 걸 아는 사람이 없어.
 
  이 지역 문화예술인들도 내가 작가보다 촌장, 이사장 자리가 대단해서 모든 걸 쏟았다고 생각하고, 시기하고, 왜 (직함을) 내려놓지 않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 ‘김유정역’이 된 유래가 복잡하다고 들었어요. 마을 주민들에게 무릎 꿇고 설득했다고 하던데….
 
  “원래 역 이름이 ‘신남역’인데 주소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입니다. 동료 교수 한 분이 신남역 근처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술 먹고 택시 기사에게 ‘신남 갑시다’ 했더니, 인제군 남면 신남리로 가더란 거야.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여기(신남역)는 신동면이고, 인제군에 신남리란 지명이 있어 택시 기사가 헷갈린 거죠. 인제에 군부대가 있어 잘못 알고 오는 사람도 많았어.
 
  그래서 문헌을 뒤져봤더니 1939년 신남역이 개통될 당시 신남면이었어. 이후 면 이름이 계속 바뀌어 이듬해 남부 이장면이 되었더라고.
 
  내가 그걸 알고 마을 사람을 설득했지. 신남역이란 역명의 정체성(正體性)이 없다고. 한번은 춘천시장을 만나 ‘김유정역으로 만들자’고 하니 시장이 ‘김유정이 누군지 모르는데 되겠습니까’ 하고 반문해요. 그래서 ‘이 시대는 할 수 있다’고 설득했어. 시장이 얼마 후 서울 철도공사를 찾아갔나 봐.
 
  시장에게 전화가 왔어요. ‘김유정역으로 하기로 했다’고. 그러고는 춘천시 관보에 발표해버린 거야. 근데 문제가 생겼어요. 마을 사람 동의 없이 발표부터 한 거야.”
 
 
  “코로나19가 끝나면 다시 많이들 올 거예요”
 
최근 펴낸 전상국 소설가의 책들. 전상국 중단편소설 전집 12권이 차례로 출판될 예정이다. 먼저 《동행》 《하늘 아래 그 자리》가 지난해 9월 간행됐다. 왼쪽은 수필집 《작가의 뜰》.
  마을 사람들이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장가도 못 가고, 폐병으로 죽은 김유정을 역명으로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반대했다. 결국 춘천시는 김유정역을 포기하고 말았다.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주민들을 불러 설명했지요. 그분들 말씀을 들으니 ‘폐병쟁이, 단명한 사람을 역명으로 붙이는 게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자체가 마을을 위해 해준 게 없다’는 섭섭함이 컸던 겁니다. 게다가 멋대로 역명까지 바꾸니 화난 것이죠. 그래서 역명을 바꾸면 좋은 점을 설명해 어렵게 동의를 구했어요.
 
  그런데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던 노인과 어른들은 그 자리에 안 온 거야. 노인정에 다시 가서 무릎 꿇고 ‘허락해주십시오. 바꾸면 정말 좋다’고 말씀드리니 ‘그럼 한번 해보슈’ 해서 바꾸게 된 겁니다.”
 
  ― 김유정역 이후 다른 지자체들이 덩달아 역명 변경을 추진했지만 제동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한용운 선생의 고향에서 만해역(충남 홍성)으로, 경주 근처 간이역을 김동리역과 박목월역으로 만들자며 우후죽순처럼 요구하니까 안 됐던 거지요.
 
  고(故) 김윤식 선생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전(상국) 선생이 김유정역을 만든 사람이야. 그거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 하며 칭찬하셨어요. 덕분에 일제 때 지은 옛 역사(驛舍)가 그대로 보존됐어요. 경춘선 전체로 볼 때 김유정역이 유일해요.”
 
  ― 김유정면으로 바꾸는 지명 변경은 실패했다고….
 
  “내가 신문 칼럼에다 지금의 신동면을 ‘김유정면’으로 바꿔야 한다고 썼는데 마을 사람이 반대해서 안 됐어요.”
 
  ― 언제든 바뀔 개연성도 있겠네요.
 
  “돼야지요. 됐으면 좋겠어요. 한 작가를, 내가 좋아하는 매력 있는 작가를 널리 알리기 위해 ‘김유정면’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걸 넘어서 지역 정체성과 관광자원화 모두를 이룰 수 있어요. 이어령(李御寧) 선생이 문화부 장관 시절에 평창 이효석문학관을 처음으로 만들었잖아요. 지금 연 200만명이 찾고 있어요. 그 일을 이어령 선생이 한 거라고. 김유정문학촌에도 연 100만명 이상이 오거든. 대단한 거예요.
 
  작가 이효석이 봉평에 메밀꽃을 피운 뒤 그것을 가꾸고 수확을 하는 일에 봉평 주민들이 앞장섰듯, 작가 김유정이 피운 동백꽃 가꾸기에 이곳 실레마을 주민들도 앞장서고 있어요. 코로나19가 끝나면 다시 많이들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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