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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탈북 국군포로 배상금 받아내려 경문협 앞 1인 시위 벌이는 박일남

“내가 해놓은 일들의 흔적을 지워나가고 싶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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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방송 들으며 주체사상 獨學… 중앙대 총학생회장, 서총련 부의장 지내
⊙ 1988년 大檢 점거 투쟁으로 5개월 복역… 전대협의 우상화 행태에 환멸 느껴 운동권 떠나
⊙ 박선영 의원 탈북자 북송 반대 단식 이후 물망초학교·(사)물망초 활동
⊙ “운동권 떠난 것 후회 안 해… 가난하지만 내 삶 성찰할 기회 갖게 된 것은 행운”
⊙ “從北 정도가 아니라 남조선혁명 戰士 같아”
서울 행당동 경문협 사무실 앞에서 탈북국군포로 배상금 추심에 응하라는 시위를 벌이는 박일남 물망초 부장. 사진제공=노비타TV
  〈맹세코 물만 마시며 있었건만 왜 그리 화장실은 가고 싶었는지…. 새벽녘에 화장실을 가려고 비실비실 천막을 나오면 언제나 덩치 큰 남자가 마당을 쓸다가 멈칫 돌아서 내가 지나갈 길을 터주며 고개를 숙이곤 했다. 어느 날은 콘크리트 마당에 비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엄동설한 속 배긴 잠을 깨곤 했다. 난 그 교회의 집사님이려니, 생각하며 수고하십니다, 하면서 남의 남자 얼굴도 안 쳐다봤다.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사람이 열심한 신자이긴 하나 그 교회 소속은 아니고 새벽, 오전, 오후, 밤중까지 어수선한 단식장에서 끝없이 휴지를 줍고 청소하고 교회 앞마당을 쓴다는 사실을. 우리 보좌진들도 그 사람 이름을 모를 정도로 그분은 말이 없고 항상 수줍었다.
 
  2012년 2월, 중국대사관 앞에서의 12일간 단식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그는 골수 운동권이었다. 서울시내 큰 대학의 학생회장 출신. 지금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임종석, 이인영, 우상호 등등과 같이 격렬하게 학생운동을 하다 검거돼, 곤욕을 치르고 재판 후 투옥.
 
  그런 경력 때문에 군대도 못 가고 방황하면서 그는 ‘배신자’가 됐다. 교도소에서 읽은 책들은 그에게 새 세상을 열어줬다. 같이 활동했던 각 대학 학생회장들인 임종석, 이인영, 우상호 등등 주사파들의 행태는 양념이었을 뿐, 운동권과 주사파의 실체를 확실히 깨달은 그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정치권을 기웃대지 않고 말없이 헌신하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2012년 겨울, 그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물망초학교 교사가 되었고 물망초학교 교감을 하다가 지금은 물망초에서 부장을 한다. 중간중간 생활고에 시달릴 때면 공사판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직한 그, 운동권 경력을 이마에 훈장처럼 달고 여권이든 야권이든 정치인으로 이 나라를 들쑤셔대는 세상에 그는 바보처럼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으며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자신의 대학 시절 운동권 활동이 이 나라 죄악의 시발점이었다며 말없이 속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임종석, 20대 대학 시절 같이 활동하던 그 도도한 임종석의 사무실 성동구 행당역 바로 앞에 있는 경문협,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북한에 저작권료랍시고 한국 언론사, 출판사 등에서 돈을 뜯어다 북한에 갖다 바치는 임종석의 사무실 앞에서 토요일이면 피켓 시위를 한다. 혼자서. 말없이. 법원의 추심명령을 이행하라고! 탈북 국군포로들에게 줄 돈을 왜 김정은한테 주려고 하느냐며, 탈북 국군포로 어르신들이 더 많이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내놓으라고.
 
  그렇게 40년 전 친구였던 임종석한테 박 부장은 토요일 오후 1시면 외치고 있다. 소리 없이 홀로 서서.
 
  우수(雨水)처럼 안개 자욱한 이 아침, 우수(憂愁)의 상념에 젖어본다. 박 부장님의 건강을 빌며… 그의 영혼에 신의 은총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1인 시위 앞에 있는 사진들은 전부 물망초학교 교감 시절에 아이들과 어울리던 박 부장님. 180cm가 넘는 거구의 그는 언제나 탈북 어린이들의 장난감이자 선생님이고 아빠였다. 트라우마에 젖어 사는 탈북 학생들에게 그는 겨울철이면 연탄집게에 여자 그림을 오려 붙여 우울한 아이들에게 웃음을 줬다. 그의 별명은 ‘뚱이샘’.〉
 
 
  집안에서 글을 배운 첫 번째 사람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은 자유선진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2012년 2월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 중단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사진=조선DB
  지난 1월 24일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이다. 박선영 이사장은 국회의원 시절이던 2012년 탈북자 강제 북송에 반대하면서 서울 종로구 옥인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12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던 분. 그가 이렇게 특별히 기억하면서 감사해하는 ‘뚱이샘’이란 누구일까? 특히 그가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386세대 운동권 출신이라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기자와 연배가 비슷할 것 같았다.
 
  박선영 이사장을 통해 ‘뚱이샘’ 박일남(57) 물망초 부장과 통화했다. 박 부장은 “내가 어디 《월간조선》에서 인터뷰할 만한 사람이 되나”라면서 수줍어했다. “《월간조선》에 꼭 유명인사나 고관대작(高官大爵)만 소개하는 게 아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분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분들도 소개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박일남 부장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2가에 있는 사단법인 물망초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은 전철역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방배역 바로 옆에 있던 사무실이 그런 곳으로 이사한 것이, 북한인권운동단체들이 오늘날 처해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박일남 부장은 ‘뚱이샘’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집안 내력부터 물어보았다. 박일남 부장은 그야말로 ‘흙수저’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부산 출신으로 목공 일을 했다. 어머니는 전남 완도 출신. 박 부장은 서울 남창동에서 태어나 사당동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중앙대 부속중학교를 거쳐 서울기계공고 기계과를 졸업했다. 박 부장은 “우리 집안에서 글을 배운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고2 때까지만 해도 대학 진학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시험이라도 한번 쳐보자’는 생각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막상 시작해보니 할 만했지만, 동일계 진학 가산점 등 입시정보에 어두워 낙방했다. 1년 재수 끝에 중앙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집안에 돈이 없다. 동생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 왜 물리학과를 선택했나.
 
  “공대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물리학과를 나와 교직과정을 이수할 생각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보니 공고 출신이 나 하나였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혼자 열심히 하니 수석, 차석을 했다. 1학년 때는 학생운동과는 무관한 생활을 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북한 방송 듣기 시작
 
  ― 학생운동은 어떻게 하게 됐나.
 
  “1학년 말경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겨놓은 라디오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북한 방송이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국의 소리’ 방송이었다. 2학년 때부터는 의도적으로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학생 시위를 해도 국내 방송에는 안 나오던 때였는데, 그런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1986년 4월 전방입소거부투쟁을 벌이던 김세진·이재호 분신(焚身) 뉴스 같은 것은 당일 저녁 국내 방송에는 안 나왔는데, 그날 밤 ‘구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들었다. 그러면서 북한식 억양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그럼 특별히 운동권과 연계 없이 북한 방송 들으면서 운동권이 됐다는 말인가.
 
  “같은 과에 광주(光州) 출신 친구가 있었다. 맨날 데모하러 다니는 그가 부탁을 하면 대출(대리출석)을 해줬다. 그가 읽어보라고 책을 몇 권 줬는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책이었다. 그 친구가 세미나, 토론회에 나오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응하지는 않았다. 운동권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런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운동권 조직에서 거치는 과정이었다. 혼자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가 운동권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나는 무식하게 다 읽었는데, 걔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부분만 읽는 것 같았다.
 
  하여튼 북한 방송을 들으면서 ‘로동’ ‘군부’ ‘력사’ 같은 ‘민족언어’에 익숙해졌는데, 아직 어릴 때라서 그랬는지 북한 억양을 흉내 내는 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줬다.”
 
  ― NL(민족해방·주사파)과 PD(민중민주), CA(제헌의회) 같은 운동권 그룹 중에서 어느 쪽이었나.
 
  “중앙대에도 CA가 중심이 된 민반(민속학연구회), 나중에 NL이 되는 전반(전통예술연구회) 같은 게 있었지만, 특별히 어느 그룹에 속하지는 않았다. 3학년 때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에 충격을 받아서 한반도연구회라는 서클을 만들었다. 특정한 운동권과 연결된 것은 아니고 같이 시위하던 친구들과 함께 제국주의론, 제3세계론 같은 것을 공부하는 독서클럽, 학회 활동이었다.”
 
 
  학생권익운동
 
  1985년 이후 전두환 정권이 학원자율화 조치를 하면서 유화(宥和) 국면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는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하려면 일정 학점 이상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른바 메이저 대학에서는 그런 조항이 무력화(無力化)되어서 학생회장 후보를 세우면 학교 측에서 입후보를 인정해줬는데, 마이너 대학에서는 여전히 학점 규정이 살아 있었다. 메이저 대학에서는 학도호국단이 있어도 민주총학생회가 사실상 총학생회 역할을 수행했는데, 중앙대 같은 마이너 대학에서는 민주총학생회를 세워도 학교에서 예산을 주지 않아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즈음 중앙대에서는 임철순 당시 재단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재일교포 김희수씨가 새로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운동권들은 정권타도 투쟁에 매달릴 때였지만, 박일남은 학생복지, 학생권익투쟁이라는 틈새를 찾아냈다. 그는 새 재단에 자판기, 복사기 운영 권한을 학생들에게 넘겨주면 그걸로 근로장학금 등을 지급하도록 하겠다고 요구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 단과대별로 학생권익위원회라는 자치기구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총학생회의 전 단계가 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종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 당시 그럼 무슨 자격으로 학생운동을 한 것이었나. 학생권익위원장이었나.
 
  “아니, 위원장은 아니고, 그냥 학생권익 활동을 했던 거였다.”
 
  ― 총학생회장은 어떻게 하게 됐나.
 
  “중앙대에서는 1987년 11월이 되어서야 정식 총학생회 선거를 하게 됐다. 당시 중앙대는 CA(제헌의회파)가 주류였다. 나는 학회나 학생권익운동을 하던, 운동권 색깔이 그리 강하지 않은 그룹의 지원을 받아 후보로 나섰다. 4명의 후보 가운데 36.6%를 얻어 당선됐는데, 묘하게도 그해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얻은 득표율과 같았다. 학내 운동권 주류였던 CA를 물리치고 내가 당선된 것은 충격이었다.
 
  총학생회가 출범하면서 나는 ‘혁신하는 전투적 총학생회’ ‘주체 구현의 선봉’을 구호로 내걸었다. 교가를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 해서 중앙대 애국교가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 노래가 불리고 있다. 중앙대를 세운 임영신 선생께서 지은 교가를 그렇게 만들어놓았으니, 큰 죄를 지었다.”
 
 
  주체사상 獨學
 
  ― ‘주체 구현’을 내세운 것은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방송 강좌를 듣고 어설프게 주체사상을 독학(獨學)한 셈이지만…. 운동권에서 주체사상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은 1987년 가을이었다. 그때부터 선배들을 통해 주체사상 관련 문건들이 내려왔다. 남들은 ‘사람 중심 철학이 유물론에서 맞는 것인가?’ 고민했고, CA나 민민투 친구들은 운동권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방송으로 들었던 《조선력사》나 《김일성로작》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미 1986년쯤부터 북한 방송을 통해 들은 얘기들이었다.”
 
  ― 도대체 주체사상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정서적으로 맞았다. 당시 국내 대학 운동권은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 같은 걸 하면서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인지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방송은 ‘모든 투쟁을 미제(美帝)에 맞춰야 한다’ ‘조선반도 모순 해결의 궁극적 목적은 미제 축출이다’라고 했는데, 그런 게 충격이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갈등에 대한 얘기 같은 건 내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보다는 일제(日帝)와의 투쟁, 민족통일전선 같은 이야기들이 더 가슴에 와닿았다. ”
 
  박일남 부장은 “북한 방송에서 들었던 얘기들이 묘하게 나하고 잘 맞았다”고 말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말보다는 민족자본가와 근로계층, 청년학생 같은 말들이 더 좋았다. 원래부터 나는 후배들에게 굳이 ‘파쇼’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나, ‘파쇼’가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나, 그냥 군사독재라고 하면 안 되나, 어차피 쟤들하고 잘 싸우기만 하면 되는 건데, 이런 식이었다. 북한 방송에서는 현실・현장에 맞는 투쟁을 강조했는데, 특정 계파에 속하기보다는 학내 학생권익투쟁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평소 후배들에게 하대(下待)하지 말자, 청소 잘 하자, 이런 것들을 강조했는데, 그게 주사파가 말하는 ‘품성론(品性論)’과 통했다. 나로서는 기독교를 믿는 집안 출신이었지만, 주체사상이 기독교를 크게 해하는 사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총련 부의장
 
1988년 6월 전대협은 남북학생회담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진=조선DB
  ― 전대협 활동은 어떻게 하게 됐나.
 
  “1987년 11월 당시에는 이인영(현 통일부 장관)이 제1기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우상호(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가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었다. 나는 아직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이기는 했지만 처음 만들어진 공식적인 중앙대 총학생회장 자격으로 전대협에 참여하게 됐다.”
 
  ― 이인영, 우상호 등과 같이 활동했나.
 
  “그때는 그들이 수배 중이거나 대외투쟁에 열중할 때여서 전대협이나 서대협 회의에는 총학회장 권한대행이나 부총학생회장들이 나오곤 했다. 나는 이듬해 서대협이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으로 개편됐을 때, 서총련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의장이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오영식(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코레일 사장)이었다.”
 
  ― 당시 학생운동 분위기는 어땠나.
 
  “노태우 정권 초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경찰은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해 수배는 해도 적극적으로 잡으려 드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의장은 수배 중이라는 이유로 집회 등에서 연설만 하고 사라지고는 해서 불만스러웠다.
 
  당시 서울대 등에서 운동권은 6·10남북학생회담을 들고나왔다. 나는 서총련 1기 부의장으로 6·10남북학생회담 남측 학생대표단 부단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서총련 의장단과 전대협 조직국은 그해 상반기의 감상적 조국통일투쟁에 대해 반성하면서 ‘5공 비리 전두환-이순자 구속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해 6월 서울 지역 5개 대학생 13명이 대검찰청 점거, 농성을 했다. 이 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그해 6월 25일 구속됐다.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5개월간 복역한 후 출감했다.”
 
 
  점거투쟁은 운동권 명퇴 과정
 
  ― 대검 점거투쟁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달라.
 
  “점거투쟁을 앞두고 대학별로 점거투쟁을 벌이다가 구속자(점거투쟁하다가 구속될 학생들)의 명단을 제출해달라고 했다. 대개 점거투쟁은 ‘운동 낙오자 처리 코스’ 내지 ‘시체처리용도’였다.”
 
  ― 그게 무슨 의미인가.
 
  “운동 과정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점거투쟁에 보내 일정 기간 형(刑)을 살고 나오면 ‘명퇴’(명예퇴직)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학내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키운 것이 아니어서 누구보고 감옥에 들어가라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구속자를 안 내는 대신 내가 들어가겠다고 했다.”
 
  ― 총학생회장이 ‘명퇴’를 자처한 것인가.
 
  “만일 그해 8월 15일까지 그냥 있었으면 나는 그해 구성되는 제2기 전대협에서 부의장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학생운동에서 무엇을 더 하고 싶은 욕심도, 자신도 없었다. 내가 학생운동에 더 기여할 것도 없다 싶었다.”
 
  ― 왜 그런 생각이 들었나.
 
  “제2기 전대협 시기부터는 그전 이인영, 우상호 등이 활동할 때와는 다른 풍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령(首領)의 무오류성(無誤謬性)’ 논리가 들어오면서 전대협 의장을 ‘우리 단결의 구심(求心)’이라면서 스타 만들기가 시작된 것이다. 전대협 회의에 가서는 의장을 떠받들고 거수기(擧手機) 노릇을 하면서도 스스로 거수기가 됐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학교에 와서는 자신이 우상화(偶像化)의 대상이 됐다. 학우들은 나 개인보다는 깃발을 보고 나를 지지해준 것인데, 한 사람을 우상화하는 풍토를 나부터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그런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 일었다는 얘기인가.
 
  “그 이전까지는 최소한의 상식은 있었다. 하지만 이때쯤 이미 학생운동권은 남조선혁명의 전사(戰士)가 꿈인 세포, 기계가 되어 있었다. ‘한 번이라도 수령님의 얼굴을 보면 언제 죽어도 좋다, 아니 북한에서 온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봤으면’ 하면서 불나방처럼 쏠렸다. 나는 임수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신(神)을 만난 심정이었을 것이다.
 
  주사파는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센터에서 내려주는 지령에 따르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개인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인간이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 근대를 모르는 노예, 봉건신민(封建臣民)이었다. 주체를 얘기하면서도 그들에게는 주체성이 없었다.”
 
  ― 태생적으로 운동권 내에서 입지가 모호했던 점도 작용한 것 아닌가.
 
  “그런 점도 있다. 전대협 2기라는 과도기에 잠시 서총련 부의장을 맡기는 했지만, 운동권 인자(因子)들에게 밀리게 된 것도 있다. 내가 대검 점거투쟁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그들은 앓던 이가 빠진 듯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후회는 1도 없다”
 
2003년 8월 10일 신계륜·송영길·임종석 의원, 이인영·우상호·허인회 위원장 등 민주당의 운동권 출신 정치인 26명은 남북경제협력 지속 발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조선DB
  ― 감옥에서는 어떻게 지냈나.
 
  “성경책도 읽고…. 심심해서 감기약 콘택600 캡슐을 열어서 알갱이가 정말 몇 개인지 세본 적도 있다. 603~610개였고, 600개 이하는 하나도 없었다. 같은 감방에 있던 이부영씨가 이감(移監)되면서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책을 주고 간 게 기억난다.”
 
  ― 이부영씨도 그렇고,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 당시 운동하던 사람들은 국회의원, 장관 등으로 잘나갔다. 운동권을 떠난 후회는 없나.
 
  “요즘 흔히 하는 말로 ‘1도 없다’(‘하나도 없다’는 의미). ‘586운동권’이라고 추앙받는 사람들이 하는 짓들을 봐라. 입으로는 반미(反美)·반일(反日)을 선동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열매는 다 따먹고 있다.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그걸 자기 자식들에게까지 대대손손 물려주겠다고 부정으로 자식들을 대학에 들여보내고 있지 않나. 조국, 윤미향, 안희정 등이 저지른 일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고 명예다.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다.”
 
  ― 물망초 교사라든가, 물망초 부장이 돈이 생기는 자리는 아니지 않나. 어떻게 생활을 해왔나.
 
  “강남 보습학원 등에서 수학이나 과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노가다(막일)를 하기도 하고… 형틀 목수 조수, 족발집 주방 보조도 해봤다. 지금 내 형편이 물질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다. 다행히도 아내가 애들을 신앙(기독교) 안에서 바르게 양육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줘서 고마울 뿐이다.”
 
  ― 세상사에 달관한 것 같다.
 
  “어머니는 술주정뱅이 목수의 아내고, 자신은 파출부였지만, 한 번도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남조선혁명 戰士들 같다”
 
  ― 지금 잘나가고 있는 옛날 전대협 운동권 출신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그들에게 ‘빨갱이’라고 하면, 그건 오히려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얘기다. 그들에게 그 정도의 철학이라도 있으면 북으로 가서 무너진 공화국을 재건할 일이지, 그것도 못 하면서 대한민국에 기생(寄生)하고 있지 않나.”
 
  ― 그래도 그들은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내세운다.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그들은 가두시위에도 별로 나오지 않았고, 경찰 수배를 피해 다닌다는 핑계로 맹목적인 집단의 보호 속에서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살았던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감옥에 갔던 학우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에게 ‘네가 뭘 그리 떳떳하게 살았느냐’고 묻고 싶다.”
 
  ― 그들이 친북(親北)·종북(從北) 세력이라고 보나.
 
  “그 정도가 아니라 북한을 위해 존재하는 남조선혁명전사들 같다. 학생운동 때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反)문명·반인권적인 전체주의 북한 사회를 부러워하면서, ‘백두혈통일가’를 대변하면서 북한과의 통일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물망초학교
 
물망초학교 시절의 박일남 부장. 당시 그는 ‘뚱이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박선영 이사장은 박 부장에 대해 쓴 페북 글에서 ‘속죄의 삶’이라는 표현을 썼다.
 
  “죗값을 치른다기보다는… ‘내가 해놓은 일들의 흔적을 지워나가고 싶다’는 생각이라고 할까.”
 
  박일남 부장은 2012년 박선영 이사장의 단식투쟁 때부터 시작, 이후 440여 일간 옥인교회 앞에서의 탈북자 북송 반대집회, 기도회 등을 돕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일남 부장은 박 이사장이 설립한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代案)기숙학교인 물망초학교에서 교사, 교감으로 일했다.
 
  ― 물망초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초등학교 중퇴로 무학(無學)이었던 학생의 검정고시 준비를 도와준 일이다. 영어 알파벳은 고사하고 곱셈도 서툴렀는데, 성실하고 공부 욕심이 많았다. 다행히 중학·고교 과정 검정고시를 차례로 합격해 지금은 대학교 4학년 학생이 되었다. 그는 지금 탈북자들을 돕는 자원봉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물망초학교 김중수 교장선생님이다. 서울대 치의과대학 학장까지 지내신 분이 물망초학교 교장을 자원했다. 매주 1박 2일씩 기숙사에 머무르면서 대학교 지원자들의 고교 과정을 지도했고, 새벽부터 일어나 주말 텃밭농장을 돌보셨다. 태풍이 몰아치며 장맛비가 쏟아지던 여름날 새벽, 밭고랑을 고르고 각종 작물을 돌보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물망초학교 시절 가장 어려웠던 점에 대해 묻자, 그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거듭 묻자 그는 마지못한 듯 말했다.
 
  “의식의 차이가 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김중수 교장선생님은 탈북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입은 학생들의 심리치료를 위해 텃밭농장을 만들고 학생들도 이를 돌보는 일에 참여하도록 했는데, 일부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북한에서 있었던 노력(勞力) 동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있었다. 그런 식의 오해와 갈등이 많이 있었다.”
 
  아마 2018년 물망초학교 폐교 이후 그가 한동안 물망초를 떠나 있었던 것도 그런 갈등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문협 앞 1인 시위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의 단식 투쟁 이후 박일남 부장은 탈북자 북송반대 시위 등에 앞장섰다.
  ― 요즘 하고 있는 북한인권운동은 어떤 것인가.
 
  “나는 ‘북한인권운동가’는 아니다. 북한인권 문제는 분단 이후 70여 년간의 차이가 만들어낸 문제다. 그걸 극복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문제다.”
 
  ― 그럼 지금 물망초에서 하고 있는 활동은 무엇인가.
 
  “탈북 국군포로들이 북한 김정은 정권으로부터 받아내야 할 손해배상금을 내놓으라고 작년 12월부터 매주 토요일 경문협(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작년 7월 7일 서울지법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김정은에게 탈북 국군포로 두 명에게 북한에서의 강제노역에 대한 위자료 21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지원해온 물망초는 북한의 남한 내 저작권 대행 사무를 맡아온 경문협이 북한에 지급해야 할 돈 21억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착목(着目)했다. 대한민국 내 북한 자산에 해당하는 이 돈을 추심(推尋)하겠다는 것이다. 물망초 변호인단은 작년 12월 16일 추심금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아직 재판부조차 구성되지 않고 있다. 박일남 부장은 경문협 앞에서 이 돈을 내놓으라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 경문협 이사장이 전대협 의장 출신 임종석이다.
 
  “경문협의 존재, 그리고 그 이사장이 임종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도 놀랐고, 분개했다. 하지만 전대협이 하던 것처럼 화염병을 던지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냥 평화롭게 1인 시위를 할 뿐이다.”
 
 
  탈북 국군포로 돕는 일에 나선 이유
 
  ― 왜 국군포로들을 위한 활동에 나섰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분단 70년의 소산인 북한인권 문제나 3만3000여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을 돕는 일은 내 능력 밖이다. 하지만 국내의 탈북 국군포로는 이제 20여 분 남짓이고, 여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분들을 돕는 일은 미력(微力)이나마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백선엽 장군 관련 책 등을 읽으면서 내가 6·25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다. 내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6·25 때 목숨을 바쳐 이 나라를 지켜낸 국군,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들, 그리고 국군포로들에게 너무 죄스러웠다. 6·25에 대해 좀 더 일찍, 제대로 알았더라도, 내가 방황하는 일이 없었거나, 방황을 했더라도 빨리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문협 시위는 단순히 임종석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탈북 국군포로의 피맺힌 한(恨)을 풀고, 그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해서이다.”
 
  헤어지기 전, 박일남 부장이 “경문협 사무실 호수(號數)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그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415호다. 이게 우연일까? 참 궁금하다.”
 
  4월 15일은 김일성의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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