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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풍류 피아니스트 임동창

“음악엔 예언의 힘이 있어”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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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다섯 살에 피아노 입문해 음악 통해 네 가지 숙제 푼 내력
⊙ “우리 전통음악의 영혼은 ‘시김새’, 전 세계 음악 중 우리 음악에서만 돋보이는 요체”
⊙ 유학을 갔더라면 기껏해야 윤이상 같은 냄새 풍기는 음악을 만들었을지도
⊙ “재능, 노력보다 진정성이 우선. 진실하게 음악의 원천을 찾아 헤맨 이들이 곧 세상에 나타날 것”

林東窓
1956년생. 인천 용화사에서 송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계(이후 환속), 서울시립대 작곡과 졸업 / 앨범 〈영산회상〉(2010), 〈경풍년/염양춘/수룡음〉(2010), 〈수제천〉(2010), 〈1300년의 사랑이야기 1-정읍사〉(2012), 〈1300년의 사랑이야기 2-달하〉(2012), 〈우리 풀꽃 이야기〉(2012) 등 발표 / 저서 《마음의 거울》 《사랑의 거울》 《거울 경》 《노는 사람, 임동창》 출간 / 〈달성 100대 피아노〉 예술감독
사진=조준우
  숙제를 다 푼 후의 삶이란 어떤 풍경일까. 아니 그 전에, 인생의 숙제가 뭣인지 알아채는 건 어떻게 가능할까. 지난 1월 26일,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목적지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일부러 찾지 않으면, 평생 우연히 지나칠 일도 없을 한적한 마을로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이어졌다.
 
  사방에 야트막한 산의 봉우리들이 보인다. 위압적이지 않은 완만함 때문일까, 갇혀 있다기보단 아늑함을 느꼈다. 가톨릭 피정(避靜)의 집과 수녀회에서 하는 양로원 종교시설이 풍경 속에 스쳤다.
 
  곡선의 길이 끝나자 직선으로 된 현대적인 미색 건물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가만히 보니 두 채로 나뉘어 있다. 숙식을 하는 살림집, 그리고 일종의 강당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완주의 풍류학교
 
임동창씨가 기존의 피아노를 개량해서 만든 피앗고.
  이곳에서 임동창씨는 열두 제자와 살고 있다. 그와 제자들에겐 최전선이자 십승지(十勝地)다. 사람은 결코 바뀔 수 없다는 절망, 평범과 비범은 애초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예단(豫斷),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무구(無垢)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체념, 이런 세상의 통념에 약간의 금이라도 내기 위해 매일을 바치는 전선(戰線) 말이다. 스승과 제자가 소란한 세태에서 자신을 빼내어 조상들의 정신과 접속하며 풍류(風流)를 익히는 은신처이기도 하다.
 
  세상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임동창이라는 이름을 적어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터다. 스님 같은 외양의 기인(奇人) 음악인의 이미지라든가, 한때 떠들썩 회자됐던 한복디자이너 이효재씨와의 결혼생활을 먼저 떠올릴까. 그를 만나봐야겠다고 문득 생각한 건, 지난해 11월 26일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열린 그의 공연 때문이었다. ‘1300년의 사랑 이야기 달하.’
 
  역병(疫病)을 뚫고 그야말로 간신히 열린 음악회였다. 마스크를 끼고 거리 두기로 띄엄띄엄 자리한 청중 틈에 끼어 있는데, 언뜻 들어도 예사롭지 않은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작곡한 ‘수제천’이었다. 영화 〈러브 스토리(Love Story)〉의 주제가와 그의 음악 수제천이 어우러지는 대목은 글쎄, 깜짝 놀랄 만큼 좋았다. 사람 생각이 비슷한 건지, 연주가 금방 끝나면 어쩌나, 관객들의 조바심이 느껴졌다.
 
  강당처럼 널따란 공간에 그와 마주 앉았다. 제자들이 함께 공부하고 어울리는 곳이다. 한쪽엔 그랜드피아노 세 대가 놓여 있다. 그중 두 대는 그가 제작한 악기 ‘피앗고’다. 피아노의 현 부분을 변형해 개량했다. 언뜻 쳄발로와 비슷한 선율인데 훨씬 웅장하다. 입구를 기준으로 가장 안쪽은 그의 생활공간이다. 장식이라곤 일절 없다. 책상과 의자, 피아노, 악보들이 꽂힌 책장뿐이다. 그야말로 미니멀리스트다.
 

  차를 마시며 군산의 가난한 집 장남 임동창이 네 가지 숙제를 풀고 지금의 풍류 피아니스트가 된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거기엔 3번의 운명과 3명의 스승이 있었다.
 
  열다섯 살, 피아노를 처음 만났다. 피아니스트가 되기엔 비교적 늦은 나이, 그것은 숙명(宿命)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방학 끝나고 친구들과 처음 만난 날이라 정신없이 떠들고 있었어요. 음악 시간이 됐어요. ‘이 노래를 들어보라’며 선생님이 피아노로 음악을 들려주셨어요. ‘고향집에~ 홀로 계신~ 어머님 그리워~(가곡 고향집)’ 그때 그 선율이 몸속으로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학교 음악실은 그의 집이 됐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학교를 다녔다고 할까.
 
  “무척 가난했거든. 어머니가 후에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홍수에 떠내려온 피아노도 못 사줘서 두고두고 가슴이 아팠다고.”
 
 
  이길환 선생님
 
  독학으로 피아노를 치던 그는 곧 한계를 느꼈다. 군산의 부자 동네를 무작정 돌아다니다 피아노 교본을 든 애들이 들락날락하는 집을 발견했다. 첫 번째 스승 이길환 선생을 그렇게 만났다. 레슨비는 3000원. 당시 가치로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어찌어찌 첫 달 레슨비를 마련한 제자의 형편을 눈치챘는지, 선생은 그에게 말했단다. ‘다음 달부턴 레슨비 가져오지 마라.’
 
  ― 좋은 선생님을 어떻게 우연히 만나셨네요.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순박한 분이었어요. 일본 사람한테 배웠대요. 선생님이 그때 군산에서 피아노, 성악, 작곡을 가르쳐서 최고 학교에 다 보냈어요. 우리나라 피아노계의 황제 정진우 서울대 교수, 돌아가신 바리톤 오현명 한양대 교수, 서울대 작곡과 정회갑 교수, 이런 분들이 방학 때면 전화를 해요. 선생님 만나려고요. ‘나 없다고 해라’, 그러면 제가 전화를 받아서 둘러대요. 최고 수준의 사람을 만나야 현주소를 쉽게 알잖아. 그런 대단한 분이셨기에 제가 시간을 줄일 수 있었어요.”
 
  ― 너무 늦게 시작해서 지치진 않으셨나요.
 
  “한 번도 절망한 적은 없어요. 늦게 시작해서 더 열심히 했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가난이 더 큰 열정을 만들었어요. 세계적인 대가의 음반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것도 사람이 한 건데, 죽어라 해보자. 다 사람이 하는 거다’… 음악으로 박수갈채를 받고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그런 건 털끝만큼도 심중에 없었어요.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할까 그것뿐이었어요.”
 
 
  용화사에서 출가
 
바람결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임동창 피아니스트. 사진=곽풍년
  고등학교도 자퇴하고 피아노를 치던 그는 작곡의 길로 옮겨갔다. ‘나만의 음악을 만들자’… 그러자 곧 다음 질문과 맞닥뜨린다. ‘나는 누구인가.’ 답을 얻기 위해 인천 용화사로 향했다. 1977년의 일이다. 출가(出家). 음악을 위해 학교를 떠났듯 나를 찾기 위해 속세(俗世)를 등졌다.
 
  용화사에서 두 번째 스승 송담 스님을 만났다. 송담 스님은 경허, 만공, 전강 선사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의 정통 선맥(禪脈)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선사다. 9개월간 행자 생활을 한 후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보림(寶林)’.
 
  ― 막상 절 생활하니까 싫지 않았어요.
 
  “절에 가서 참선법을 배웠는데 최고야. 너무 좋았어요. 화두로 들어가기 전에 예행연습으로 수식관(數息觀)을 해요. 처음 수식관을 하는데 기가 막혀. 10단계까지 한 방에 가버렸어요. 정신이 이렇게 깨끗하게 몰입이 되면 못할 일이 없다 싶더라고.”
 
  ‘정말 스님이 되려 하느냐’는 친척들의 만류에도 산문을 나서지 않던 그를 끌어낸 건 군대였다. 입대영장이 나왔다. 군악대에 배정됐지만 ‘이 뭐꼬’ 화두를 놓고 싶지 않았다. 절로 돌아가려 탈영까지 했다. ‘군대생활 3년도 못 하면서 어찌 평생 중노릇을 하겠냐’는 다른 스님의 일갈에 그는 결국 군대로 돌아갔다.
 
 
  첫사랑과 조우, 還俗
 
  제대 후 그는 결국 환속(還俗)했다.
 
  ― 왜 절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돌아갔는데 못 하겠더라고.”
 
  ― 왜요.
 
  “첫사랑에 빠져서. 스물여섯 살에 제대를 했는데, 바로 절에 못 들어갔어요. 같이 제대한 군악대장님이 나를 서울에 있는 피아노학원에 소개를 해줬어요. 거기서 애들 가르치고 있으니,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첫사랑이 내가 제대한 걸 알게 된 거야. 전화가 왔어요. ‘지금 동아 콩쿠르 준비하고 있는데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안 만나려고 했거든. 결국 만났지. 그러자 그동안 막혀 있던 게 터져버린 거지. 제대하고 한 달 후쯤 되니까 죽겠더라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다시 절에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못 하겠더라고. 이미 마음이 여자한테 가버린 거야. 음악 한다고 스물여섯이 돼서야 첫사랑이 시작된 거예요. 승복 다 벗고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켜 먹으면서 그랬어요. ‘다신 중 안 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한번 정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런 게 내 운명이고 잘된 것 같아요.”
 
  ― 왜요.
 
  “수행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에요. 전부라 하더라도 산에 틀어박혀 수행을 한다는 게 지금 봐서는 너무나 어리석은 거예요. 그런 면에서 제 운명이 참 잘 펼쳐졌어요.”
 
 
  1곡에 1000원 받는 ‘오브리빵’
 
2010년 10월 울산 울주군 신불산 간월재 정상 억새평원에서 열린 ‘울주 오디세이’에서 임동창씨가 야외 연주를 하는 모습. 사진=울주문화예술회관
  열다섯 피아노 선율과의 만남이 숙명이었다면, 첫사랑과의 조우 또한 운명이었을까. 그는 음대 2학년생이었던 첫사랑과 울릉도로 도망갔다. 첫사랑 부모님이 이들의 만남을 반대한 탓이었다. 하필 울릉도로 간 이유는 군악대 동기 때문이었다. 같은 군악대 출신 세 명이 울릉도에서 밤무대를 뛰고 있었다. 전자오르간으로 그도 밴드 생활을 시작했다. 여관방을 신혼집 삼아, 여자는 피아노 연습을 하고, 남자는 술집에서 생활비를 벌었다.
 
  ― 클래식만 연주하다 밤무대 반주를 하려니 힘들었겠어요.
 
  “군악대에서 팝송이나 영화음악을 많이 연주해요. 군악대에 딴따라 하다 온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신중현과 뮤직파워’에서 신중현 선생을 뺀 나머지 남성 멤버들은 전부 제 군악대 선배들이었어요. 트럼펫 하는 선배가 제대 후에 인순이 매니저한테 저를 소개해서 인순이씨와 방송도 같이 하고 그랬어요.”
 
  ― 군대에서 익힌 걸 울릉도에서 써먹으셨겠네요.
 
  “즉석반주를 ‘오브리빵’이라고 했어요. 피 터지는 프로의 현장이야. 노래 1절 반주에 1000원이에요. 손님이 2절까지 부르면 2000원. 모르는 노래를 하겠다고 하면, 일단 시작하라고 해요. 멜로디를 듣고 따라가는 거예요.”
 
  ― 손님 중에 뱃사람들이 많았겠어요.
 
  “울릉도 경제의 중심은 오징어예요. 뱃사람들이 오징어를 많이 잡으면 기분이 나서, 난리가 나요. 선주들은 10만원짜리 수표에 침을 뱉어서 이마에 붙이고 놀아요. 대여섯 곡 부르고 그 수표를 주는 거예요. 우리는 노다지 캐는 거예요. 원래는 5곡이면 2절까지 불러도 1만원인데, 10만원을 주니까. 미쳐버리지. 그 양반이 오징어를 못 잡으면 반주를 그냥 해줘요. 진짜 재밌었어.”
 
  딸을 찾던 부모님이 끝내 울릉도에 찾아왔다. ‘학교는 졸업하고 결혼하라’는 말에 그럴 순 없다고 반발했다. 원래는 울릉도에서 아이를 갖고 허락을 받으려 했는데,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 후 이별이 찾아왔다. 여자가 먼저 섬을 떠났고, 그도 얼마 후 뭍으로 나왔다. 1년여의 오브리빵 생활도 그렇게 끝났다.
 
  ― 그 이후에 첫사랑을 만난 적이 있나요.
 
  “딱 한 번. 그 친구가 유학 다녀온 후에 같이 아는 지인(知人)의 연주회였어요. 먼발치에서 보고 말았어.”
 
 
  독일 유학 포기
 
임동창·이효재 부부. 200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조선DB
  첫사랑과 헤어진 후 육지에서 이리저리 헤매던 그를 붙잡아준 건 결국 음악이었다. 세 번째 스승을 만난다. 작곡가인 최동선 서울시립대 교수다. 최 교수 밑에서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하며 시립대에 입학했다. 스승의 권유로 졸업 후 독일 유학을 가게 됐다. 입학 허가를 받고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세 번째 운명이었다.
 
  ― 왜 유학을 안 갔어요.
 
  “한 친구가 주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전해줬어요. 함께 음악 했던 이들이 저를 죽이고 싶었던 거예요. 저는 최선을 다하는 건데, 잘난 척하는 걸로 봤어요. 인간은 타인을 자기처럼 보거든. 너무 분했어요. 일주일간 아무것도 안 먹고 방문을 잠그고 방안에만 있었어요. 다시 머리를 밀었지. 인연을 싹 끊어버렸어요.”
 
  ― 유학 안 간 걸 후회하진 않았어요.
 
  “아니, 엄청난 약이 됐어요. 운명이라는 게 저에게 적절하게 펼쳐진 거예요. 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고 유학을 갔더라면 기껏해야 윤이상 같은 냄새 풍기는 음악을 만들었을지 몰라요. 국악의 골수를 파먹고 발효된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는 아이디어, 소재를 갖다가 논리적으로 끼워 맞춰서 생산해내는 식으로. 끔찍한 일이지.”
 
 
  국악의 영혼, 시김새
 
  ― 유학 안 가고 뭘 했나요.
 
  “인사동 수운회관 옆에 카페가 있었어요. ‘지리산 북촌 산9번지’, 소설가 지망생이 차린 무허가 술집이었어. 거기서 막걸리만 마셨지. 사물놀이 상쇠 이상수 선생을 거기서 만났어요. 그러면서 당대 최고의 국악 명인 명창들을 만나게 됐어요. 어마어마한 공부를 쉽게 하게 된 거죠.”
 
  ‘임동창식 풍류’의 시작이었다. 서양 클래식과 우리 음악, 피아노와 사물놀이가 한자리에서 어우러지는 축제다.
 
  그는 국악의 요체(要諦)로 ‘시김새’를 들었다. 시김새는 ‘음을 꾸며내는 모양새’를 뜻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판소리 ‘쑥대머리’를 떠올려 보자. ‘쑥~대~머리~’라는 대목을 부를 때 ‘쑥’과 ‘대’ 사이는 평탄한 한 개의 음절로 연결되지 않는다. 높이가 변화무쌍하다고 할까. 악기 연주에도 시김새가 있다. 가야금을 탈 때 오른손으로 현을 튕기면 ‘띵~’ 하고 음이 직선으로 뻗지만, 현을 튕긴 후 왼손가락으로 현을 흔들면 음이 변한다.
 

  ― 서양 음악엔 시김새가 없나요.
 
  “있는데 우리와 달라요. 우리 음악에 비하자면, ‘수박을 먹자’ 하면서 수박 껍질만 핥고 있는 식이에요.”
 
  그러면서 그는 푸치니의 ‘오 미오 바비노 카로(O Mio Babbino Caro)’ 한 대목을 불렀다. 의외의 미성이라 좀 놀랐다. 한 음절 한 음절 단정히 뻗어 나가는 것이, 우리 음악과는 확실히 달랐다.
 
  “우리 음악은 아~리아~리랑~ 얼큰하게 흔들리잖아요. 시김새는 음악의 영혼이에요. 음악의 영혼은 그 음악을 만든 인간의 영혼이거든. 한국, 중국, 일본의 시김새가 다 달라요. 조상이 남겨준 시김새야말로 우리 민족의 영혼인 거예요.”
 
 
  클래식이 죽은 시대
 
  ― 시김새가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나요.
 
  “일제 강점기가 없었으면 우리 전통 대중음악이 이어져 왔을 거예요. 그게 민요고 판소리예요. 일제 시대에 임방울 선생의 쑥대머리 음반이 100만 장이 팔렸어요. 그때까지도 우리 민초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노래를 불렀던 거예요. 지금은 어때요?”
 
  ― 판소리 음반이 100만 장이 팔렸다니 꿈같은 얘기네요.
 
  “일제 때부터 천대받은 국악인들이 순전히 자기가 좋아서 전통을 이어왔다는 게 할렐루야 아멘 너무 고마워요. 지금도 누가 국악을 한다? 무조건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자기 게 귀한 줄 모르고 엉뚱한 데 붙어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거예요. 우리 걸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해서 이 시대에 맞는 대중음악을 만들어야 되거든.”
 
  ―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클래식 공연장에 가보면 젊은 층은 많이 없던데요.
 
  “그렇게 된 지 오래됐어요. 유명하다는 음악학교도 동양인 없으면 문 닫을 판이고. 서유럽의 클래식이라는 게, 현대음악으로 오면서 작살이 났어요.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성과 상관없이 너무 실험적으로 가버린 거예요. 재즈도 봐요. 백인들이 손대서 망해버렸어요.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아무 노림수 없이 깔끔하게 자기 흥으로 했던 걸 인위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걸 빤히 보면서도 우리는 그걸 따라가고 있어요. 기가 막힌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 이걸로 뭘 할 생각을 못 하는 거예요. 안타깝죠.”
 
  그는 국가를 바꾸자는 주장을 한다.
 
  ― 애국가로 충분하지 않나요.
 
  “음악엔 예언의 힘이 있어요. 우리 민족이 잘되려면 애국가도 우리다워야지. 우리답지 않은 음악을 우리를 대표하는 노래로 삼았으니 안타깝지. 새로 작곡할 필요가 없어요. 아리랑이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잖아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된 노래예요. 가사만 대국민 공모로 정하면 돼요. 남북의 통일 국가(國歌)로 삼을 수도 있어요.”
 
  ― 아리랑은 좀 구슬프지 않나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리랑 가락엔 치유의 기능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아리랑이 늘 약간 처량하게 들린 건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식의 가사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소리꾼 장사익 발굴
 
부인의 옷이었던 조끼를 입은 임동창 씨. 200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조선DB
  ― 만나신 명인 명창 중에 다시 만나고 싶은 분이 있나요.
 
  “가야금, 아쟁 하신 백인영 선생. 즉흥 연주에 아주 뛰어난 분이셨어요. 구례 동편제 공연장에서 판소리 공연이 열렸을 때예요. 당대 최고의 명인 명창들이 내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소리를 했어요. 피아노로 고수(鼓手)를 한 거지. 그때 백인영 선생은 불치병에 걸려 있었어요.”
 
  ― 불치병에 걸려서 기력이 없었던가요.
 
  “와, 이 양반이 죽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니까 다 놓아버리는 거예요. 이런저런 붙들고 있던 걸. 그러니 이게 열리는 거야. 놔버리니까. 다 풀어져서 긁어대는데, ‘야, 다음부터 이 형님이랑 자주 놀아야지’ 싶었어요. 그런데 바로 돌아가셨어. 제일 아쉬워요.”
 
  오롯이 그가 찾아낸 소리꾼이 있다. 장사익. 장사익은 데뷔 후 인터뷰 때마다 ‘내 삶의 은인은 똥창이 성’이라고 말하곤 했다.
 
  ― 장사익씨 목소리를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첫 만남 때는 기억이 안 나요. 내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사익이 형이 노래를 했다는데, 제가 술이 떡이 돼 있었어요. 그때 형 말로는 내 반주에 뿅 갔다고 하더만. 첫사랑처럼 느껴졌다고. 두 번째 만났을 땐 제가 술을 안 마셨어요. 서유석씨가 노래를 했는데 그때 누가 그래요. ‘장사익이도 해봐.’ 피아노도 없어서 반주 없이 노래를 했어요. 제정신으로 처음 들은 거예요.”
 
 
  박자를 못 맞추는 이유
 
  ― 어떻던가요.
 
  “그 모임 끝나고 바로 얘기했어요. ‘형님, 노래하시오. 공식적으로 해야 돼.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해선 형 가슴 속에 있는, 노래 속에 박혀 있는 한(恨)이 안 풀려.’”
 
  ― 뭐라던가요.
 
  “못 한다는 거야. 대금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 박자를 못 맞췄거든.”
 
  ―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원래 가수가 하고 싶었대요. 군대도 문화선전대로 가고. 제대를 했는데 가수 되기가 쉽지 않잖아요. 혼탁하다고 느끼고 에이, 접은 거예요. 살길이 막막하니 세차장에서도 일하고 뭣도 하고 그랬대요. 부인과도 헤어지고 혼자 어린 새끼들 밥해 먹이면서 서럽잖아. 도시락 싸면서 설거지하면서 시시때때로 흥얼거린 거예요.”
 
  ― 관객 없는 공연을 혼자 해온 거군요.
 
  “그러니 멜로디에 감정만 몰입을 해서 연습을 한 거예요. 리듬과 멜로디의 균형을 맞춰서 연습을 한 게 아니라. 왜냐? 부담이 없잖아. 가수 하려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놔버리고 감정에만 몰빵해서 가는 거에 자기도 모르게 절어 버린 거지.”
 
  ― 박자를 가르쳐주셨나요.
 
  “박자를 배우겠다기에 그랬어요. ‘형, 그냥 그렇게 살아. 자식을 낳았는데 다리를 절어, 엄마 배 속에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 거기서 자기 흥이 나오면 돼. 절대 배워서 하려 하지 마. 그러면 지금 그 감정마저 놓친다. 그대로 해. 옷은 내가 입힐게.’ 그렇게 나온 게 장사익 1집 〈하늘 가는 길〉이에요. 그게 그렇게 뜰 줄 몰랐지.”
 
  1995년, 장사익의 나이 46세에 발매된 〈하늘 가는 길〉은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
 
  ― 장사익 이후로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을 또 만난 적이 있나요.
 
  “한 사람 있었어요. 사익이 형 공연 뒤풀이에서 이 친구가 ‘한오백년’을 불러요. 그런데 사익이 형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거야, 노래도 잘하고. 나중에 그 사람하고 작업을 하고 싶어서 찾아냈어요. 판소리 하는 사람이더라고.”
 
  ― 작업을 같이 하셨어요.
 
  “늦었더라고. 그 시기가 지나버렸어. 공부를 안 했더라고. 실력이 내려간 거야.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또 하나의 스타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겠지.”
 
  ― 노래 실력이 그렇게 내려가기도 하나요.
 
  “그럼요. 서양 오페라 가수들 중에 바그너 부르는 가수가 빨리 죽어요. 힘드니까. 높은 음을 쉽게 내는 게 아니라 힘들게 내거든. 그런데 힘들게 낼 때 또 매력이 있어요. 발성을 제대로 터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느낌만 갖고 부르면 오래 못 가요. 그나마 연습까지 게을리하면 더 오래 못 가요. 어려운 일이죠.”
 
 
  수제천 모티브로 작곡
 
  2000년, 그는 세상과 소통하는 걸 잠시 멈춘다. 라디오와 TV에 정기적으로 출연해 연주와 강의를 하고 있던 차였다. 숙제를 풀기 위해서였다.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하고 싶다는 숙제는 풀었다 쳐도, 나머지 숙제는 아직이었다. ‘오롯한 내 음악은?’ ‘이 뭐꼬?’ ‘사랑이란 무엇인가’. 자신만의 음악을 찾던 그에게 전통음악 ‘수체천’이 다가왔다. 옛 음악을 붙들고 분석하고 연구했다.
 
  ― 왜 수제천이었나요.
 
  “우리 전통음악을 정악과 민속악으로 나누잖아요. 수제천은 양반들이 했던 음악 중에서도 좀 달라요. 원래는 민속악이었어요. 정읍 살던 여인이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부른 노래 ‘정읍사’를 조선 시대에 관악합주곡으로 편곡한 게 ‘수제천’이에요. 사랑 얘기지. 격조가 기가 막혀요. 수제천 한 곡에 정악 장르의 요소들이 다 들어 있어요.”
 
  ― 그러곤 수제천을 주제로 작곡을 한 거군요.
 
  “수제천이라고 하는 하나의 재료를 가지고 14개월 동안 작곡을 했어요. 평생 먹은 거 다 나오는 거지. 다 비워져 버린 거야. 14개월 동안 단식한 거랑 똑같아요. 그러곤 국악 음원을 들었어요. 혼이라고 할까, 텅텅 비어 있는 곳에 다 들어가 버리는 거야. 전통음악을 만든 조상을 만나버린 거야. 와 얼마나 행복한지 화두가 없어져 버렸어. 내 음악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없어져 버리더라고. 그렇게 행복했어요.”
 
  ― ‘내 음악’은 포기했나요.
 
  “몇 달이 흐른 뒤 배꼽 밑에서 올라오는 거야. 영감이라고 할까. 허튼가락의 조짐이에요. 그놈이 자라서 꽉 찰 때까지 기다렸어. 서해안, 남해안 헤매다가 집에 돌아와 몸을 풀었어. 두 달 동안 마흔한 곡의 가곡을 쏟아냈지. ‘동창이 밝았느냐’. 허튼가락이 탄생한 거지.”
 
  ‘허튼’은 ‘허튼소리’의 그 허튼이다. 그의 설명을 빌리면 허튼가락은 ‘시간 예술인 음악의 그물망을 뜯어내고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다.
 
  ― 창의력도 공부해서 기를 수 있나요.
 
  “창조는 완전히 갈아엎는 거예요. 예를 들면 경기민요를 마르고 닳도록 잘 부르는 명창이 있어. 그 사람이 작창(作唱)도 해요. 그러나 노래를 만든 사람의 창의력과는 완전히 달라요. 창조를 하려면 어마어마하게 공부를 해야 해요. 근데 안 하잖아요. 그냥 재주로 하거든? 이것저것 먹을 거 많으니까 갖다 발라서 퓨전음식 만들 듯이 하는 거, 몇 발자국 못 가요. 잔머리 굴려서 번쩍이는 아이디어 버무려 만드는 건 한계가 있어요.”
 
  ― 번뜩이는 순간의 영감(靈感)이 창조의 시작인 게 아니군요.
 
  “엄청난 공력과 노력을 통해 하나를 건져 올려야, 거기에서 파생되는 게 오래가거든. 어렵게 건져 올려야 해요. 창조는 속으로 파는 거예요. 자기만 파요. 거기서 건져 올려야 돼요. 이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에요. 그 공부를 한 사람이 없어요.”
 
 
  재능, 노력보다 진정성이 우선
 
  ― 재능이 더 중요한가요, 노력이 먼저인가요.
 
  “진정성이에요. 내가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지, 음악이 내 출세의 도구인지 스스로 명확히 밝혀야지.”
 
  ― 진정성을 중시하는 이들이 있을까요.
 
  “거의 다 수단이에요. 출세하고 밥 빌어먹고. 그러면 그렇게 살아야지 절대 그 이상 안 나와요. 그러나 진정한 창작자가 안 보이는 데서 노력하고 있는지 몰라요.”
 
  ― 어떤 한 사람이 흐름을 싹 바꾸기도 하잖아요.
 
  “옛날 어른들이 그래요. 피라미가 많으면 거기 붕어가 있다고요. 피라미 많은 게 아니라, 붕어가 있겠다 그거 보고 가는 거예요. 붕어 한 마리가 모든 피라미를 일거에 정리하거든요. 나훈아가 ‘테스형’ 부르니까 다른 트로트 가수들이 순간 잊히잖아요.”
 
  세 번째 숙제는 ‘이 뭐꼬’ ‘나는 뭔가’. 불교의 핵심 화두다.
 
  “절에서 한 방법으론 못 뚫겠더라고. 그동안 피아노 치면서, 작곡하면서 깨달은 방법을 이용했어요. 내 음악을 만들어냈으니까 걸로 해결을 봤어요.”
 
 
  “사랑은 理解”
 

  마지막 숙제 ‘사랑’은 가장 빨리 마친 숙제란다.
 
  ― 사랑이 뭔가요.
 
  “이해예요. 삐친다는 건 전부 오해고 미움이에요. 이해가 되면 미움이 안 생겨요. 그게 사랑의 시작이에요. 인연은 두 사람 관계에서 오는 거니까,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끝내면 돼요. 억지로 눌어붙을 이유가 없지. 그런데 내가 뭔가 노림수가 있는 사랑을 꿈꾸면 피곤해져요. ‘쟤가 나한테 잘해줄 것 같아’ 가서 눌어붙거든? 막상 가보면 아니야. 그럼 빨리 끝내야 되는데 계속 물고 늘어지고 싸우고 서로 상처 주고. 상대도 똑같이 노림수를 갖고 있어. 노림수의 공통점이 뭐냐, 나한테 잘해줘, 내가 원하는 걸 해줘.”
 
  그는 부인 이효재씨와 떨어져 지낸 지 오래다. 한복디자이너인 아내는 도시에서 활동하고, 남편은 남원, 완주에서 제자들과 생활한다. 그는 ‘각시’를 두고 천재라고 했다.
 
  “우리 각시는 살림만 하고 싶다고 했어요. 내 뒷바라지하겠다고. 내가 보니까 천재야. 부지런하고, 쉬는 시간이 없어요. 같이 앉아서 차를 한잔 할 수가 없어. 오죽하면 내가 따라다니면서 그래요. ‘각시, 차 한잔 하자, 차 한잔 하자’… 생각했어요. ‘아 저 사람은 내 거 아니다. 내 개인의 것으로 살아선 안 되겠다. 그렇게 살면 우리 둘 다 못 산다. 나가서 일해라’… 나가자마자 바로 떴잖아요. 사람은 다 고유의 삶의 형태가 있어요. 지금도 각시는 통화해보면 너무 재밌게 잘 살아요. 지금까지 내 뒷바라지만 했다고 생각해봐요.”
 
  두 사람은 결혼할 때 일종의 합의를 했다고 한다. 그가 효재씨에게 한 제안이다. ‘첫째, 자유롭게 살자. 함부로 대하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자유를 말한다. 둘째, 당분간 공부하느라 공연 다닐 여유가 없다. 난 하루 세끼 밥만 먹으면 되는데 밥 먹고 살게 해줄 수 있나.’
 
  ― 이효재씨와 결혼생활을 두고 질문을 많이 받았지요.
 
  “별소리 다 해요. 자기는 개판으로 살면서, 자기가 사는 게 답인 양. 그게 다 자기 모습이여. 나를 빌려서 자기 얘기 하는 거야. 우린 진짜 편하게 살아.”
 
  인터뷰를 위해 잠깐 만난 기자가 그들의 관계를 어찌 알겠냐마는, 적어도 그가 아내 이효재씨를 생각하는 마음은 세상의 호기심보다 훨씬 깊은 듯했다. 그가 공연이나 인터뷰를 할 때 자주 입는 조끼가 있다. 낡아서 여기저기 천을 덧댄 주황색 조끼다. 원래는 부인의 옷인데, 부인이 안 입는다 해 남편이 근 10년간 즐겨 입었단다. “이 옷이 나를 지켜주는 것 같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다.
 
 
  14년째 합숙 중
 
  ― 숙제 푼 후엔 뭘 보고 살았나요.
 
  “제자들 보고 살았어요. 아는 사람이 놀러 올 때 같이 누가 왔어요. 차 마시고 얘기하더니 내 옆에 좀 있고 싶다는 거야. 왜 그러냐니까, 행복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한테 배우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돼서 지금까지 14년째예요.”
 
  그와 열두 제자는 함께 생활한다. 밥도 같이 먹고 함께 또는 각자 공부한 것들로 함께 공연도 한다. 제자들은 ‘타타랑’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선다.
 
  ―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얼마 전부터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 세상에 와서 50년은 내 내면의 숙제를 풀었고 이제 나머지 시간은 내 외면의 숙제를 푸는 시간이구나. 난 일단 인연이 되면 같이 목을 걸어버려요. ‘힘드니까 안 해’ 이런 건 난 못 해요. 애들을 만나고 힘들고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어요.”
 
  ―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요.
 
  “새벽에 죽을 것 같아서 응급실 여러 번 갔어요. 애들 가르친다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그래도 안 피해요.”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타인의 고민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건 진지하게 파고들자면 끝도 없이 진 빠지는 일이다.
 
 
  “사람은 바뀔 수 있다”
 
  ― 타인의 고통을 나누는 건 힘들잖아요.
 
  “21년 전에 각시가 나한테 그랬어요. ‘사람 안 바뀝니다. 애쓰지 마세요.’ 제가 뭐라 했을까요. ‘아니다, 바뀐다. 아직 그런 예를 못 봤을 뿐이다. 나는 반드시 바뀐다고 본다.’ 다른 사람들도 그래요. ‘왜 애들한테 그리 공을 들이냐, 그 공을 네 작품, 네 활동에 들이면 더 좋을 거 아니냐.’ 지금은 그런 소리 안 하지. 애들을 보면 전혀 다르거든. 몇 년 전에 각시가 그래요. ‘사람이 바뀌네요.’”
 
  ―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요. 배신감을 느끼신 적은 없었나요.
 
  “없어요. 문제는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에요. 저도 인간이 안 됐으면서 애들을 가르치니까 그런 거예요. 먼저 자기 숙제를 풀고, 애를 만나야 해요. 애하고 함께 가면서 같이 죽어버려야 돼. 자기는 안 죽고 가르치려고만 하니까 변화가 안 돼요. 같이 죽어야 돼요. 논개처럼 같이 끌어안고 뒈져버려야 돼.”
 
  ― 사실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라 원래 모습을 찾는 거 아닌가요.
 
  “그렇죠. 바뀐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에요. 원래 아름다운 성품이 있는데 그걸 덮고 산 거뿐이야. 덮개를 떼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주변에 아무도 그렇게 안 사는데 혼자 하려니까 힘든 거예요. 자기를 돌아보고 무슨 일이 생기면 삐치지 않고 내 탓을 해서 나를 돌아보고 나를 깨끗이 하고 산다. 이런 사람 없잖아요. 교회를 가도, 절을 다녀도. 우리 애들은 적어도 그렇다는 건 알아요.”
 
  ―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요.
 
  “어릴 때부터요. 사람이 사람과 개운하게 소통 못 하는 게 제일 답답했어요. 지가 친구 하자고 해놓고, 지가 삐쳐서 말 안 해요. ‘너 뭐 있냐’ 물으면, 눈 피하면서 ‘뭐 없어’. 얘기 좀 하자고 해봤자, 이미 마음은 굳어져서 돌아서 버린 거예요. 그게 미치겠는 거야. ‘왜 살아 젠장, 이러려고 살아?’ 불편해서 견딜 수 없는 거야.”
 
  ― 어떻게 했나요.
 
  “백날 대화해도 대화도 안 되고. 불편한 마음을 빨리 해결해야지. 어릴 때부터 연습했어요. 저놈은 어떤 놈이라는 고정관념을 지우는 연습. 이제까지 살면서 만난 사람 중 누구도 안 삐치는 사람이 없어요. 자잘하게 다 삐쳐요. 겉으론 괜찮은 척하고 살아도 어느 순간에 다 하나씩 삐쳐요. 계속 만나면 숨기기 때문에 몰라요. 세월이 많이 흘러서 오랜만에 만나보면 다 나타나요.”
 
  ― 흔히 상대한테 화난 걸 숨기는 걸 교양 있고 인내심 있는 태도라 하지 않나요.
 
  “자기 혼자 화난 걸 숨기고 있으면, 그 생각이 무엇을 결정해요. 그놈이 굳어져. 그 사람 만나면 그게 바로 클릭 돼요. 그게 죽음의 길이에요. 뜯어내 버려야 돼요.”
 
  ― 그게 왜 죽음의 길이에요.
 
  “자기도 구렁텅이로 처박히고, 남도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부부를 보세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뜯어먹잖아요. 결국 미워하잖아. 사랑한다면서 실제로는 미워해.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내가 사랑이 돼서 저 사람한테 아무것도 요구하는 게 없어야 돼, 자연처럼.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왜 나한테 안 해줘’ 맨날 거래만 하고 있는 거예요. 시시비비 왈가왈부 그런 걸 다 털어내야 해요.”
 
 
  프랜시스 레이와의 만남
 
  ― 그게 쉽나요? 늘 부대끼며 일상을 살아야 하잖아요.
 
  “생각이 많아서 부대끼는 거예요. 생각이 복잡하지 않으면 부대낄 게 하나도 없어요. 영화 〈러브 스토리〉 주제가를 작곡한 프랜시스 레이(Francis Lai)를 만났어요. 제 다큐멘터리 촬영 때문이었어요. 프랑스로 가서 그분 작업실에 막 들어섰는데 그분의 첫마디가 이거예요. ‘어, 이 사람은 아무것도 없네.’”
 
  ―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들은 전부 뭐가 있다는 거예요. 노림수죠. 그러더니 저에게 하루를 다 투자했어요. 그분이 그런 분이 아니래요. 자기 시간을 철저히 관리한다는 거예요. 다큐멘터리 감독이 깜짝 놀라더라고. 생각이 많으면 그게 다 삐칠거리예요. ‘난 언제든지 삐칠 준비가 되어 있어. 데이터가 충분해’ 이거거든. 난 수십 년 사람을 만나도 데이터가 없어요. 편하게 사람을 만나지.”
 
  그는 국가도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해온 방식을 고수하면 반드시 망해요. 빨리 바꿔야 돼요. 중국은 절대 G1이 못 돼요. 그들은 제국주의로 나라를 운영해요. 그중에서도 공산당 일당 독재예요. 그걸 바꿔야 중국이 살아요.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정치 공학상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우파 눈치 보느라 못 바꾸고 있어요. 그러면 망해요.”
 
  ―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하나요.
 
  “앞으로 올 시대를 예상해서 적응해야지요. 결국 인간은 진화하고 있어요. 박정희 대통령 때 우리 얼마나 배고팠어? 대통령 선거에 나온 후보가 이런 구호를 외쳤어요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살길 찾자!’ 그때 한일협정 맺고 받은 그 돈으로 우리가 살았어요. 배고픈 시절에 배고픈 걸 해결했잖아. 그런데 그게 굴욕적인 협정이었어? 탓하면 안 돼요. 그때 그런 걸 어떡하라고. 이제 와서 역적이니 다 죽이란 말이야? 삼성이 글로벌 기업이 됐는데 때려죽이라고? 안 돼. 체질을 바꿔서 살려야지. 그게 다 같이 잘사는 길이거든.”
 
  ― 변화는커녕 과거를 걸고 넘어지잖아요.
 
  “정리를 안 해서 그래요. 벌을 주라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정리를 해야지. 정리를 한다는 건 연관 없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걸 빼내는 거예요. 정리를 안 하면 나머지 사람들의 머리에서 안 사라져요. 이걸 빼줘야 돼요. 빨리 체질을 바꿔야 돼요.”
 
 
  재능과 열정 많은 한민족
 
  선사 같은 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탄허 스님이 생각났다. 젊은 사람들 말로 ‘국뽕’이라 하지만, 가끔은 그의 예언을 뒤적이며 들뜨고 싶다. 탄허는 생전 한반도의 국운을 두고 이렇게 예언했다.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와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모든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 여러 나라의 귀감이 될 것이며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다.’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말이다.
 
  ― 한국이 문화의 중심이 되는 날이 올까요.
 
  “워낙 우리 민족이 재능이 많고 열정도 많아요. 한류도 결국 재능과 열정의 산물이거든. 매력이 있는 민족이라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봐요. 다만 준비된 인재들이 많이 나와줘야지. 나올 거야 앞으로. 지금은 욕망의 화신들만 나와서 까불고 있거든. 물밑에서 진실성을 가지고 끈질기게 찾아 헤맨 그 사람들이 드디어 물의 원천을 뚫어서 그 맑은 물을 가지고 나오는 그때가 올 겁니다. 지금은 좀 일러요.”
 
  그와 제자들의 환송을 받으며 서울로 향했다. 그는 조상이 남겨준 음악에 바탕한 우리의 대중음악을 만들겠다고 했다. 세상의 중심으로 나가기 위해 그와 제자들은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겠다고도 했다. 알 듯 모를 듯한 그의 말이 몇 년 후 어떤 음색으로 세상에 선보일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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