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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開館 예술제 전문가 이상만

우리 曲만으로 음악축제 기획한 집념의 인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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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 기획(1962)… 전통 아악이자 궁중음악인 ‘수제천’ 연주
⊙ 제1회 서울음악제 기획(1969)… 종묘제례악 복원해 최초 공개연주
⊙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예술제 기획(1978)… 세계 16개국, 41개 예술단체 참여

李相萬
1935년생. 서울대 작곡과 졸업. 미국 UCLA, 예일대, 뉴욕대 대학원 수학 / KBS·동아방송 PD, KBS 음악계장·사업부장·방송위원, 월간 《객석》 편집인,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 음악분과위원장, 예술의전당 운영자문위원, 고양 문화재단 총감독 역임 / 5월 문예상(1968), 예총상(1978), 대통령표창(1975), 옥관문화훈장(1995) 수상
  ‘문화예술 이벤트의 마술사’라 불리는 이가 있다. 1세대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87)씨다.
 
  박정희(朴正熙) 혁명정부를 대외적으로 알린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1962년)를 기획했다. 대성공이었다. 우리만의 전통 아악(雅樂)을 광복 이후 처음으로 연주해 화제를 모았다. 피날레는 안익태(安益泰·1906~1965)의 ‘한국 환상곡’이 장식했다.
 
  1969년에는 제1회 서울음악제를 기획해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을 선보여 음악계에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광복 이후 최대 매머드 행사였던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1975년)와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예술제(1978년)도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늘 그의 이름 뒤에는 ‘공연장 개관(開館)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한국방송공사(KBS)에 적을 두었지만 정부 행사, 음악협회 행사에 차출되었으며 그때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집념으로 행사를 완성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 음악분과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1993년 대전 엑스포 문화행사 추진위원, 한예종 설립추진 상임자문위원, 예술의전당 운영자문위원, 고양문화재단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지금도 음악잡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며 한국 음악계 전체를 묵묵히 조망하고 있다. 그는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다채로운 경험과 실력으로 한국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서울대 부설 중등교원양성소와 서울대 작곡과 졸업
 
박정희 혁명정권을 대외에 알린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 당시 국내 초연한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 공연 직후 사진이다. 가운데 오재경 문공부 장관과 부인 신재덕 연세대 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지난 3월 2일 서울 인사동에서 이상만 선생을 만났다. 만년 청년 같은 미소로 재사(才士)가 번뜩이는 기억력을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선친은 정치를 조금 하던 분이신데… 6·25 때 납북되신 후 소식이 끊겼어요. 생사를 알지 못합니다. 평소 공학(工學) 공부를 권하셔서 서울대 공대 화공과 시험을 쳤는데 떨어지고 말았어요. 1953년 무렵입니다.
 
  아무래도 대학은 가야겠다 싶어서 동숭동 언저리를 배회하다 보니 서울대 음대 부설 중등교원양성소에서 사람을 뽑고 있었어요. 어릴 때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운 덕분에 합격했죠.”
 
  이상만은 어린 시절 바이올린과 오보에, 튜바를 불었고 고교 시절에는 브라스밴드부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중등교원양성소) 2년 과정을 마치고 그럭저럭 선생님들 눈에 띄었던지 전임강사 자리를 알선해주셔서 경기여고에 가게 됐어요. 당시 학교가 덕수궁 근처에 있었는데 가까이에 서울중앙방송국(지금의 KBS)이 있었어요. 방송에 흥미도 있었고 (교사직이) 따분하기도 해서 촉탁 사원으로 (방송국에) 입사한 겁니다. 그때가 1957년입니다.”
 
  방송국에 다니며 서울대 작곡과에 재입학해 직장과 대학 생활을 병행했다. 그래도 스승 이혜구를 만난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만당(晩堂) 이혜구(李惠求·1909~ 2010)는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 재학 시절 경성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왕립음악기관의 후신인 이왕직(李王職) 아악부에 드나들며 국악과 인연을 맺었으며, 1932년 일제 강점기 공영방송인 경성방송국에 입사해 국악방송을 담당했다. 그런 스승의 자취를 이상만이 따라 걷게 되었다.
 
  “식민지 일제 정책을 홍보하려고 한국어 방송을 한 게 결과적으로 일제에게 덫이 되었어요. 이혜구 선생님이 우리말 방송 PD를 맡으셨는데 한국의 전통문화와 지리, 풍속을 알리셨죠. 또 국악이나 가야금, 판소리 같은 민속음악을 하던 기생, 광대를 출연시키다 보니 민족적인 것에 자각 운동이 일어난 것도 그 무렵이지요.”
 
 
  방송 효과음악을 국악으로!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한 이상만은 KBS와 동아방송에서 음악 담당 PD로 재직했다.
  이상만 PD는 스승의 영향으로 방송 효과음악으로 국악을 썼더니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 시절 라디오 연속극 인기가 대단했어요. 대개 효과음을 서양음악으로 쓰던 시절이었죠. 이혜구 선생이 국악 효과음을 써보라 해서 〈장희빈〉이란 연속극에 썼어요. 당시 대본을 쓰던 분(이석우)에게 의견을 물으니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장희빈〉이 대히트를 쳤어요. 그 후로 사극에 한해 국악을 효과음악으로 쓰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어요.”
 
  방송 드라마에서 국악 효과음이 성공하자 영화에서도 같은 시도가 있었다.
 
  당시 신상옥 감옥의 〈성춘향〉,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동시에 크랭크인 됐는데 이상만이 〈춘향전〉 음악 효과를 맡았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다. 특히 카리스마 넘치는 사극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신영균, 김승호, 김진규, 최무룡, 최은희, 문희, 윤정희, 김지미 등이 캐스팅되어 불꽃 경쟁을 벌일 때였다.
 
  “〈성춘향〉은 최은희, 〈춘향전〉은 김지미가 출연했는데 〈성춘향〉이 흥행에서 〈춘향전〉을 압도했지요. 저는 흥행 실패로 돈도 제대로 못 받았죠. 어쨌든, 까딱했다가는 영화판으로 갈 뻔했어요.”
 
  ― 5·16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서울)국제음악제는 어떻게 해서 참여하게 된 겁니까.
 
  “박정희 대통령을 포섭하기 위해 간첩 황태성이 내려왔는데 미화 20만 불(달러)을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어마어마한 돈이었지요. 그 돈으로 텔레비전국을 만들었고 아세아영화제를 개최했어요. 남은 돈으로 국제음악제를 연 것인데 당시로선 누구도 국제음악제 경험이 전무해 난감했어요. 음악축제로 군사정부를 대외에 알리려는 의도였죠.
 
  때마침 일본에서 제3회 오사카국제음악제를 하더군요. 우리 정부의 동경공보관(東京公報館)에 근무하던 조둔준(趙敦俊)씨에게 사전조사를 했어요.”
 
  ― 행사에 앞서 어떤 밑그림을 그렸나요.
 
  “그땐 우리 음악이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 확고한 신념이 있었어요. 비록 서양음악 축제이지만, 우리 전통음악인 국악을 부각시키고 한국인이 작곡한 창작 음악도 이럴 때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궁중음악 ‘수제천’을 연주하다
 
이상만은 다양한 음악제를 기획하며 유명한 외국 연주자를 초청하는 순발력을 보이기도 했다. 왼쪽이 이상만.
  전야제 행사인 ‘국악의 밤’을 통해 1962년 5월 1일 국립극장에서 국립국악원의 김기수가 아악(雅樂)이자 궁중음악인 ‘수제천(壽齊天)’을 지휘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곡 선택이었다.
 
  “우리나라의 아악을, 전통음악을 국제음악제에 연주하리라 보통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할 때였어요.”
 
  당적·대금·피리·해금·아쟁·장구·좌고·박 등으로 편성된 악기에다 ‘처용무’를 반주할 때에는 삼현육각으로 연주했으니 깜짝 놀랄 만했다.
 
  “‘한국 작곡가의 밤’을 통해 관현악 세 곡을 소개한 것도 이례적이었어요. 구두회의 〈저지된 꿈〉, 김동진의 〈양산가〉, 김성태의 〈한국선율에 의한 기상곡〉을 연주했어요.”
 
  ― 당시 초청한 해외 오케스트라는 어떤 단체입니까.
 
  “그때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는 초청할 형편이 안 되어 14~15인 규모의 이탈리아 실내악단 ‘비르투오지 디 로마’를 초청했어요. 연주가 탁월했는데 훗날 ‘이무지치(I Musici)’ 악단의 전신이랄 수 있어요.
 
  오사카국제음악제에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극(歌劇) 〈살로메〉가 공연됐는데 주역 가수 세 사람만 우리 쪽으로 빼왔죠. 그래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국내 초연(初演)했어요. 한국인 가수는 우리말로, 외국인 가수는 독일어로 노래했는데 이런 시도는 굉장한 반응을 일으켰어요.
 
  《동아일보》에서 공연을 보고 ‘천지가 개벽했다’고 기사를 썼어요. 비록 관객을 많이 모으지 못했지만 그런 잔치로 혁명정부의 군사적 이미지를 조금 부드럽게 해줬다는 면만으로 굉장한 성과가 아니었나 싶어요.”
 
  ― 당시 프로그램 책자와 포스터 제작도 아주 눈에 띄었다고 하던데요.
 
  “행사 포스터나 엠블럼 디자인도 참 잘했어요. 훗날 산업디자인의 태두(泰斗)라고 불리는 민철홍 선생이 주도했고, 신진 작가들… 그때 막 뜨던 사람들이 포스터를 맡았어요.”
 
 
  “〈에텐라쿠〉가 한국에서 건너간 것 아니요?”(안익태)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의 화려한 피날레는 안익태가 지휘하는 KBS 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협연한 ‘한국 환상곡’ 연주였다. 또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을 안익태가 지휘했다.
 
  이상만 선생은 “사실 안익태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최초로 쓴 사람이 자신”이라고 고백했다.
 
  “안익태는 굉장한 존재였어요. 안익태라는 사람을 언론에서 비판한다든가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때였어요.
 
  그분이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을 여러 번 했는데 장충체육관을 새로 지어 공연했어요. 그때 어떤 작품을 지휘했느냐. 〈강천성악(降天聲樂)〉이라는 관현악곡이었는데 제가 들어보니 일본 음악이더군요.
 
  그래서 〈강천성악〉이 뭔지 따져 봤더니 일본 아악 〈에텐라쿠〉였어요. 〈에텐라쿠〉를 한자로 쓰면 ‘월천악(越天樂)’입니다. 그것(일본 아악)을 서양식으로 편곡한 작품이었어요. 이 〈에텐라쿠〉를 안익태가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회에서 위촉받아 연주를 했어요.
 

  제가 ‘일본 것을 가지고 우리 것처럼 발표했느냐’는 취지로 글을 썼어요. 안익태 선생이 아팠는지 저를 불러 따로 만났죠. 그때 선생이 그래요, ‘〈에텐라쿠〉가 한국에서 건너간 것 아니요?’라고요. 저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어요. 당시 그분과 저의 대화에서 그런 깊은 신념(〈에텐라쿠〉가 한국에서 건너온 것)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이 논란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안익태가 〈에텐라쿠〉를 1938년에 먼저 작곡했는데, 1959년에 이를 〈강천성악〉으로 교묘히 제목만 바꿔 대한민국을 농락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서기 794년 출범한 헤이안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에텐라쿠〉의 기원은 그보다 30~50년 전 활동한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 옥보고(742~765년 경덕왕 때 음악가)의 〈강천성곡(降天聲曲)〉에서 비롯됐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인 〈강천성곡〉이 〈에텐라쿠〉로 이어졌으리라 추정되지만, 〈강천성곡〉의 악보는 현존하지 않는다.
 
  ― 일본 아악곡이 신라에서 넘어갔다고 보는 측면이 옳지 않나요.
 
  “측면이 아니고 확실히 일본 아악이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다고 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문화인류학에서 ‘변방 잔존’이라는 법칙이 있지 않습니까. 본거지, 중심지에서는 모든 문화가 빨리 변하지만 변방에선 남아 있는 것이죠. 우리나라 음악뿐만 아니라 언어도 마찬가지예요. 소위 신라 이두문자가 일본에 건너갔는데, 일본 최고(最古) 시가집 《만엽집(萬葉集)》이 이두문자로 쓰였으니까요.”
 
 
  안익태에 대한 국내 음악계의 저항은…
 
이상만 선생과 아내 윤희 여사. 윤 여사는 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이다.
  이상만 선생은 “친일을 덮어씌워 안익태를 몰아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위대성이 폄훼되어선 안 됩니다. 그분은 훌륭한 일을 했어요. 실은 음악계에서 친일 논란이 있지만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죠. 조금… 저널리즘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것이죠.”
 
  ― 당대 안익태와 국내 음악계 간 온도 차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겁니까.
 
  “안익태 선생이 오셔서 우리나라 음악계 판도를 바꾸는… 그러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어요. 음악계에 힘 있던 사람들은 안익태에 대해 굉장한 거부반응을 가졌어요. 자기네 권력과 일자리가 안익태로 인해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저항이, 음악계 내에 만만치 않았어요.
 
  예를 들자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을 하나의 국립교향악단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사도 (안익태가) 냈고, 경쟁관계인 두 교향악단을 합연하게 만든 이가 안익태였어요.
 
  그러니 국내 음악계가 좋아할 리 없죠. 결국 국내에서 설 자리를 잃었던 겁니다. 심지어 서울국제음악제 조직위원장에 안익태와 굉장히 반대되는 분을 앉혔습니다.”
 
  ― 안타깝네요.
 
  “(안익태 선생의) 성격이 독선적이고… 그때 지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 독선적이었죠. 독일 지휘자는 제왕(帝王) 같은 위치이지 않습니까. 능력은 탁월했지만… 안타까운 것이죠. 그래도 우리 사회가 그런 분도 끌어안아야 하는데….”
 
  ― 스승인 이혜구 선생은 어떤 입장이었나요.
 
  “안익태에 대해 창조적인 능력이라든지, 발랄한 생각을 긍정적으로 봤어요.
 
  제가 쓴 글을 보시고 나무라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안익태에게 훌륭한 점이 많이 있다’고 하셨어요. 어떻든 국립묘지에 묻힌 것 외에 선생은 저작권료 한 푼 못 받았어요. 우리나라가 안익태에게 빚진 것이 많죠.”
 
  ― 안익태 선생이 저작권료를 요구한 적도 없어요.
 
  “그 시대에, 그처럼 돈키호테 같은 기질이 없었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죠.”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최초 복원
 
  이상만은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를 마치고 1962년 동아방송 PD로 직장을 옮긴다. 3년 3개월간 재직 후 다시 KBS로 복귀한다. 1966년의 일이다.
 
  “1962년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를 마치고 최창봉(崔彰鳳·1925~2016)씨라고 우리나라 방송계 대부라는 분이 있어요. 그분 눈에 들어서 동아방송이 개국할 때 PD로 입사해 3년 3개월간 재직했어요. 그리고 KBS로 다시 복귀했는데, 당시만 해도 민영방송의 여건이 훨씬 좋을 때였어요. 그래서 KBS 복귀가 큰 화제가 됐어요. 언론이 광고주의 노예가 되는 게 싫어서 다시 돌아갔어요.”
 
  KBS로 복귀할 때 직책은 음악계장. 이상만은 KBS의 음악 프로덕션 일을 총괄했고, KBS 교향악단도 그의 소관 아래 있었다.
 
  1969년 제1회 서울음악제가 한국음악협회 주최로 열리게 됐다. ‘우리나라 신(新)음악 8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같은 해 11월 2일부터 7일까지 시민회관, 국립극장, 종묘에서 열렸는데 이상만은 음악제 사무국 차장을 맡았다. 음악협회 일에 차출된 것이다.
 
  “음악제 프로그램 구성에 전부 관여했어요. 당시 음악제 일주일 동안 모든 작품을 우리 곡으로 연주했어요. 관현악뿐만 아니라 피아노 독주, 오페라, 실내악 모두를.”
 
  31명의 국내 작곡가가 가곡, 실내악, 교향곡, 가극 등 50여 곡의 신작을 발표하며 수백명의 성악, 기악가가 출연한 그 시절 초유의 페스티벌이었다.
 
  ―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연주자들이 우리 곡을 부끄럽게 여기고 서양곡만 연주하더군요. 우리 작품이 있어야 한국 음악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 음악에 뿌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전야제에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을 복원해 공연한 겁니다.”
 
  조선 역대 군왕의 신위(神位)를 모시는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의 제향(祭享)에 쓰이는 음악이 종묘제례악이다. 그러나 중요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된 것은 1964년 12월이다.
 
  “종묘제례악을 복원했더니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반대를 했어요. 진짜 종묘제도 아닌 음악회에 제례악을 붙이느냐는 것이었어요. 제가 진명여고 이세정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이야기하니 큰 도움을 줬어요. 종친회를 설득한 거지요.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당시 전야제를 KBS에서 실황 중계했습니다. 진공관이 든 TV 카메라가 6대 있었는데, 그날 중계 과정에서 2대가 고장이 났어요. 행사장 곳곳에 켜놓은 횃불 탓에 진공관이 터져버린 겁니다. 제가 원망을 얼마나 받았겠어요? 문공부 신범식(申範植) 장관도 참석하는 자리여서 대놓고 야단을 칠 수 없어서 무마가 됐지요.
 
  하여튼 우리 작품으로만 음악축제를 시도한 사례는 이전에 없었어요. 제1회 서울음악제부터 우리 연주인의 손으로, 우리 작곡가의 곡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어요.”
 
 
  광복 30주년 기념음악제와 백건우·윤정희 스캔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광복 30주년 기념 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는 내용의 기사. 《조선일보》 1975년 8월8일자 7면에 실렸다.
  1975년 광복 30주년을 기리는 매머드 기념음악제가 8월 15일부터 3주일간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광주 등지에서 열렸다. 당시 기념음악제집행위 사무국장이 바로 이상만.
 
  연주자 선정과 연주 스케줄을 그의 손으로 확정했다. 국악과 양악, 창작과 연주, 그리고 리사이틀과 협주회, 오케스트라 연주 등 다양한 형식의 연주회와 레퍼토리가 펼쳐졌다. 언론에선 “해방 이후 지난 30년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라고 보도했다.
 
  당시 음악제 하이라이트는 젊은 연주가들의 내한 공연이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활약하던 30세 미만의 젊은 연주자들이 참여했는데, 이들 중에 프랑스에서 체류하고 있는 백건우(白建宇)가 있었다. 당시 나이 29세였다.
 
  또 피아니스트 문용희(文龍姬)·이대욱(李大旭),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金永旭)·김남윤(金南潤) 등이 스위스와 미국, 독일 등지에서 내한했다.
 
  “당시 백건우·윤정희가 프랑스에서 만나 한창 연애할 때였어요. 두 사람의 연애 사건이 신문 사회면을 다 덮었는데, 사무국장 일을 하다 보니 음악제 얘기는 안 나오고 스캔들 이야기만 나오니까 난감했어요.
 
  백건우와는 앞서 인연이 조금 있었어요. 1971년인가 그를 미국에서 만났는데 첫인상이 좋았습니다. 사람이 너무 착실하고 생각이 깊더라고요. 그때 군 문제가 걸려 제가 귀국해서 비자 연장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어요.
 
  정부 사무관급 이상의 공무원이 보증을 서야 (비자 연장이) 되는데, 아무도 보증을 안 서서 할 수 없이 내가 섰어요. KBS에서 사무관급이었으니까. 결국 백건우가 돌아오지 않아 벌금 80만원을 대신 내야 했는데, 그 돈은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이야. 할 수 없이 내가 물게 됐어요.”
 
  ―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중에라도 백건우에게 받았나요.
 
  “못 받았지요. 하여튼 광복 30주년 음악제를 앞두고 백건우 부모를 만났더니 ‘윤정희와의 결혼을 막아달라’는 겁니다. 내가 실질적으로 두 사람 결혼을 반대했어요. 그랬더니 당시 장·차관들이 ‘(결혼에) 관여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하라’고 그랬어요.
 
  백·윤이 광복 30주년 음악제를 앞두고 그해 8월 초 귀국하는데 윤정희가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결혼을 공식화하려고 미리 계획을 짜놓았어요. 그래서 김포공항에서 백건우를 뒤로 빼돌렸어요.
 
  윤이 ‘사무국장 지가 뭔데, 남의 결혼을 반대해? 이놈 오면 뺨따귀를 갈기겠다’고 했는데… 어쨌든 닭 쫓던 개지 뭐. 그런 비화가 있었어요.”
 
  ― 백건우씨는 광복 30주년 음악제에 참석했나요.
 
  “했지요. 연주회에 앞서 연습해야 돼서 피아노가 있던 오재경(吳在卿·1919~2012)씨 집에다 백을 맡겼어요. 하하하. 어쨌든 그 후로 그는 군에 안 가게 됐어요. 특혜를 받은 거지.”
 
  음악제 후 문공부는 백건우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어마어마했던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예술제
 
1978년 4월15일자 《조선일보》 1면. 세종문화회관 개관을 기념하는 기사다.
  세종문화회관 개관식이 1978년 4월 15일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영애 근혜(朴槿惠)양,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 정일권(丁一權) 국회의장, 구자춘(具滋春) 서울시장, 이효상(李孝祥) 공화당 의장 서리, 이은상(李殷相)씨 등이 참석할 정도로 정권의 관심이 뜨거웠다.
 
  개관 기념예술제도 성황이었다. 그해 4월 중순부터 12주간에 걸쳐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16개국에서 41개 예술단체 3426명의 저명 예술인이 출연해 모두 158회 공연을 가졌다. 연(年) 출연인원만 1만여명, 관객 27만명이 참여한 예술제였다.
 
  교향악단만 해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유진 오르만디 지휘)와 뉴욕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리히 라인스도르프)를 비롯해 일본 NHK 교향악단(볼프강 자발리쉬 지휘) 등 3개 단체가 내한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팔마 오페라단과 오스트리아 오페라단, 세계 최정상의 영국 로열발레단도 전 단원이 한국을 찾았다.
 
  이 개관 기념예술제도 이상만이 참여했다. 1975년부터 1978년 8월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서울시민회관 개관기념예술제 사무국장’이란 직책으로 개관의 준비 업무를 총괄했다.
 
  “앞서 1972년, 그러니까 서울시민회관이 문화방송 개국 기념행사 때 불탔지만 직제가 살아 있어 배문환 이사관이 관장으로, 박위민 서기관이 과장으로 건립 업무를 총지휘했죠. 당시 서울시장인 구자춘씨와 제1부시장 김성배(金聖培)씨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서울시는 국무총리실 산하에 있어서 기획조정실장 박승복, 조정관, 이명춘, 이연택씨 등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들의 의지가 깊숙이 배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관이 협동하여 개관기념예술제 집행위원회를 만들어 거국적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서울시의 건물이지만 거국적인 중지를 모아 건립했던 것이다.
 
  “‘세종’이 들어간 이름을 짓는 데 관여했는데, 당시 예술원 회장이던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1901~1981) 선생의 도움을 받아 ‘세종문화회관’으로 명명한 것도 큰 보람의 하나였어요. 그 뒤 세종대왕 동상도 회관 앞에 우뚝 세우고, 한글의 거리와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몸 바쳐온 선열의 추모함이 서게 되었죠.”
 
 
  “박정희 정권도 (막을 내릴) 때가 왔구나”
 
1978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개관 당시의 모습이다. 개관 기념 예술제 팸플릿에 실린 사진이다.
  이상만 선생의 말이다.
 
  “개관 기념예술제를 한다고 박수는커녕 300원짜리 자장면을 먹고 고생했어요. 혜택받은 것은 포니 자동차를 한 대 줘서 타고 다닌 게 전부였어요. 최규하 총리가 저한테 훈장을 주겠다고 몇 차례 공언했지만 결국 감사장 하나도 안 줬어요. 그때 미국 《타임》지 도쿄지국장이 한국계 미국인인데, 서울에 특파원 7명을 보내 이 잡듯 취재를 했어요.
 
  이 친구가 기사를 잘 써주겠다기에 제가 빌었어요. ‘절대 제 이름을 부각시키지 말라’고. 만일 내 이름으로 된 박스 기사가 나오면 죽으니까요.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분이 오해를 했어요. 제가 너무 겸손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타임》 기사에 ‘촛불 같은 사람’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기사 말미에 ‘박정희 정권의 시한이 1년밖에 안 된다’는 뉘앙스를 간접적으로 풍기더군요. 속으로 ‘아! 박정희 정권도 (막 내릴)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예술제를 마치고 KBS에 복귀하자마자, 미국 풀 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어요.”
 
  UCLA, 뉴욕대, 예일대 등지에서 공부하며 비교문화, 예술경영, 극장경영, 예술철학 등을 배웠다. 그러나 1979년 뜻하지 않게 10·26이 터지는 바람에 귀국하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언론이 통폐합될 때 해직됐지만 그는 다시 살아났다. 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 음악분과위원장과 개폐회식 전문위원을 맡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후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이상만 선생은 풍운아 같던 자신의 팔십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사회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개인적… 풍파가 심했고….”
 
  풍파가 심했으나 그는 탁월한 감각과 추진력으로 모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나름 과도기 한국 음악과 국가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던졌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선생은 불가능을 모르는 집념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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