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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기념 인터뷰

《월간조선》 창간 ‘숨은 주역’ 신동호 前 《스포츠조선》 사장

《세대》 품어 《월간조선》 낳은 ‘어머니’ 신동호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chosh760@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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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지 내놨다’는 정보 듣고 인수 협상 주도
⊙ 《월간조선》 편집인으로 직접 지면 제작 지휘하기도
⊙ “허술·오효진·조갑제가 《월간조선》의 판도 바꿨다”
⊙ “월간지 기사는 短文 위주로 박력 있게 전개해야 한다”
⊙ “갔구나! 아바이여”란 심금 울리는 기사로 筆名 얻어
⊙ ‘존경하는 언론인’으로 방우영 회장과 장기영 사장 꼽아

申東澔
1934년생. 서울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조지타운대학 수료 / 《조선일보》 사회부장·편집국장·논설위원·논설주간·편집인·대표이사 발행인·인쇄인·주필·부사장, 《스포츠조선》 사장, 동양위성방송(OSB) 대표이사 사장, 세종대 석좌교수 역임
사진=조준우
  2021년 3월 15일 자로 《월간조선》이 창간 41주년을 맞았다.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는 명품 시사 월간지’ ‘자유 대한민국의 중심을 잡아주는 잡지’를 모토로 41년간 수많은 특종으로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왔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월간조선》에도 ‘부모(父母)’와 같은 존재가 있다. ‘부(父)’에 해당하는 사람은 방일영(方一榮)·방우영(方又榮) 전 《조선일보》 회장이다. 친형제인 두 사람은 오늘의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중흥기를 연 주역이다. 수성(守城)을 이룬 두 형제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故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 사진=조선DB
  이들과 함께 《월간조선》의 초석(礎石)을 놓은 ‘모(母)’와 같은 이가 바로 신동호(申東澔·87) 전 《스포츠조선》 사장이다. 신동호 전 사장은 말 그대로 《조선일보》 역사의 ‘산증인’이다.
 
  1959년 《조선일보》 기자(수습 2기)로 입사해 일본 특파원,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부사장, 전무이사 등 신문사 중책을 거의 거쳤다. 그중 사회부장과 편집국장은 두 차례나 지냈다. 신 전 사장이 편집국장과 주필로 있을 때, 《조선일보》 부수는 100만 부에서 150만 부, 다시 200만 부를 넘보며 국내 최정상에 올랐다.
 
  신동호 전 사장은 《월간조선》 창간에 결정적인 기여도 했다. 그의 재빠른 판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월간조선》은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창간 41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신동호 전 사장을 만났다. 고령에 지병으로 인해 거동이 좀 불편해 보였지만 말과 기억력은 아주 또렷했다. 특히 인명(人名)과 직책, 그들의 약력(略歷)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대선배’가 쏟아내는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가 역사고 공부였다. ‘초긴장’으로 시작한 자리는 어느새 ‘산교육의 장(場)’으로 바뀌었다. 신동호 전 사장으로부터 《월간조선》 창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불발된 《사상계》 인수
 
故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 사진=조선DB
  ― 선생께서는 ‘정상 《조선일보》’의 주춧돌을 놓은 동시에 《월간조선》의 산파(産婆)였습니다. 오늘 《월간조선》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그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일제 때 이미 《조광(朝光)》이란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일제 말인 1944년 폐간됐습니다. 방우영 회장이 《조선일보》를 경영하며 안타깝게 생각한 것 중 하나가 《조선일보》에 《조광》과 같은 잡지가 없다는 거였어요. 일제 때 《조광》을 통해 우리 문학이 널리 알려졌거든요. 신문(조선일보)에는 시(詩) 정도나 실을 수 있었지, 《조광》에는 시는 물론 수필 이런 걸 다 실을 수 있었거든요.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려면 전달 매체로서 잡지가 반드시 필요한데, 해방 이후 상당 기간 《조선일보》에는 그게 없었습니다.”
 
  ― 1968년 창간한 《주간조선》이 있지 않았습니까.
 
  “방우영 회장은 《조광》 같은 월간지를 갖는 게 소원이었어요. 근데 정부에서 월간지 허가를 안 내줬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조선일보》가 처음으로 월간지 발행 기회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사상계(思想界)》 인수였어요.”
 
  ― 1970년 8월1일자 《조선일보》 사보(社報)에서 ‘《사상계》 제호를 개제(改題)한 《조선일보 사상계》를 내겠다’는 사고(社告)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부완혁(夫琓爀·1919~1984)씨란 분이 계셨어요. 부완혁씨가 《조선일보》를 나가서 장준하(張俊河)씨가 운영하던 《사상계》를 위탁 경영했는데, 이때 김지하(金芝河)씨가 쓴 ‘오적(五賊)’이란 시가 실려 박정희 정권의 미움을 사 폐간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걸 《조선일보》가 인수하려고 한 거죠.”
 
  ― 부완혁씨가 《사상계》를 선뜻 내주던가요.
 
  “그때 선우휘(鮮于煇·1922~1986) 편집국장 등이 부완혁씨를 만나 《사상계》를 《조선일보》에 다 넘겨주기로 어느 정도 교섭이 됐어요. 《조선일보》는 잡지 편집진 진용까지 다 짰고요. 근데 막판에 부완혁씨가 양도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바람에 《사상계》 인수는 불발됐어요.”
 

  여기서 잠시 1997년 출간한 방우영 회장의 자전적 에세이 《조선일보와 45년》을 살펴보자. 이 책에는 이 대목이 이렇게 적혀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원(原) 소유주인 장씨(장준하)와 판권 소유자인 부씨(부완혁)가 양도를 눈앞에 두고 감정적인 대립을 일으켜 법정 소송 사태가 일어나고 (1970년) 9월 25일 부씨가 일방적으로 양도 거부를 표명했다… 이렇게 해서 인수 계획은 어이없이 무산되고 인쇄 직전에 있던 ‘조선일보 사상계’ 제1호는 햇빛을 보지 못한 채 한 권의 기념물로 지금 조사부에 남아 있을 뿐이다.〉
 
  방우영 회장은 2008년 발간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시사 월간지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은 신문 경영에 뛰어들면서부터 지녀온 나의 오랜 꿈이었다”고 밝혔다. 그 정도로 방 회장은 월간지에 대한 애착이 컸다.
 
 
  ‘비밀 교섭’ 끝에 《세대》지 인수 약속 받아내
 
1978년 8월 31일, 방우영 사장(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신동호(서 있는 이) 편집국장 주관으로 체육, 주간, 사진, 조사, 교열부원과 회사 근처 식당에서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979년 10·26사태 직후, 다시 기회가 왔습니다. 선생께서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죠.
 
  “10·26사태로 할 일이 없어진 박정희 정권 참모들이 저와 매일같이 밥을 먹으며 소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같은 언론인 출신인 김성진(金聖鎭) 문화공보부 장관, 이광표(李光杓) 문화공보부 차관, 유혁인(柳赫仁) 청와대 정무수석이 그들이었죠. 저와 《조선일보》 수습 1기 출신이자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조동오(趙東午)씨, 《동아일보》 권오기(權五琦) 편집국장이 이들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우리 6명은 동년배로, 친동기간만큼이나 서로 친했어요.”
 
  ― 그 만남에서 《월간조선》이 태동(胎動)한 걸로 아는데 좀 자세히 설명해주시죠.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신문만 갖고 세론(世論)을 끌어가기 어렵다. 신문을 보조하는 잡지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정부가 잡지 허가를 안 내줘 창간은 어려운 실정이다’라는 말도 했던 거 같아요. 잡지가 필요하다는 의사를 내비친 거죠.”
 
  ―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니, 정부 측에서 새 매체 창간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정부 비판이 용인(容認)되지 않던 시절이긴 했죠. 그런 모임을 갖던 도중에 일본 출장을 갔다가 1979년 11월 30일 귀국했어요. 그날 유혁인씨랑 통화를 했어요. 유혁인씨가 ‘이낙선(李洛善·1927~1989)씨가 발행하는 《세대(世代)》지(誌)가 경영난에 빠져 인수할 사람을 물색하고 있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이낙선씨는 박정희 정권에서 국세청장과 상공부 장관을 지낸 분이죠. 이 사실을 안 김성진, 이광표, 조동오씨도 ‘《조선일보》가 《세대》지를 인수하면 어떻겠느냐’고 의사를 물어왔어요. 이광표씨의 경우, 이낙선씨가 상공부 장관을 할 때 상공부 대변인을 해 이낙선씨가 처한 곤궁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 그 후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조선일보》로서는 인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우영 당시 사장에게 《세대》지 인수에 관한 보고를 했죠. 이듬해인 1980년 2월, 코리아나호텔 일식당에서 방우영 사장과 이낙선씨, 유혁인씨,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만나 《세대》지 직원 퇴직금 조로 《조선일보》가 2000만원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인수가 결정됐습니다. 그게 지금의 《월간조선》이죠. 그로부터 얼마 안 있다가 《월간산》도 인수했죠. 잡지 매체가 속속 생기니 편집국과 별도의 직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출판국도 만들어졌어요.”
 
  방우영 회장은 《조선일보와 45년》에서 이 부분을 “신동호 편집국장이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을 갖고 왔다”며 “이낙선씨가 발행하던 《세대》지가 경영난에 빠져 지탱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조선일보》사에 넘겨줄 것을 제의했다는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이어 “다시 (월간지를 발간할) 기회가 온 것”이라며 “신 국장이 비밀 교섭 끝에 이씨(이낙선)로부터 《조선일보》가 인수한다면 미련 없이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썼다.
 
  ― 인수를 하긴 했는데 잡지 판권 허가가 제대로 났는지 궁금합니다.
 
  “《세대》지를 《월간조선》으로 제호(題號)를 바꾼 거잖아요. 창간은 창간이지만 사실 인수를 한 것이라 허가 절차는 그리 까다롭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렇게 《세대》지를 인수하고, 그해 3월 15일 4월호를 냈는데, 그게 《월간조선》 창간호죠.”
 
  ― 창간 당시 《월간조선》 진용이 화려했죠.
 
  “창간호 발행인 겸 인쇄인이 방우영 사장, 편집인은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지낸 유건호(柳建浩)씨, 출판국장은 조영서(曺永瑞)씨였어요. 문화부 차장으로 있던 이흥우(李興雨)씨가 출판국 부국장 겸 《월간조선》 주간(主幹)을 맡았고요.”
 
 
  ‘민족지가 펴내는 민중시대의 오피니언 매거진’
 
《월간조선》 창간호. 사진=조선DB
  《조선일보 90년사(史)》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선일보는 (1980년) 1월8일자로 직제 개편을 단행, 출판국과 월간부를 신설했다… 2월27일자 조선일보 1면 사고(社告)에 마침내 《월간조선》 창간 예고가 나갔다. 기치는 ‘민족지가 펴내는 민중시대의 오피니언 매거진’ ‘한국 지성의 정론지’였다. 3개월 산고 끝에 창간호가 3월 15일 4월호로 첫선을 보였다. 변형국판 400호의 창간특집은 ‘민주화의 길’이었다… 발행인 겸 인쇄인은 방우영, 편집인은 유건호, 출판국장 조영서, 기자는 송상옥(宋相玉), 이유곤(李裕坤), 백순기(白舜基), 염기용(廉基瑢), 박기용(朴基龍), 김서기(金瑞基), 김덕형(金德亨), 이중식(李仲植), 김명숙(金明淑)이었다… 창간호의 반응은 좋았다. 발간 2주 만에 일부 지역에서는 매진 사태를 빚었고, 서울·대전·광주에서는 월간지 판매 선두를 기록했다. 이와 함께 정기독자도 급증해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이후 월간조선은 한국 최고의 월간 시사 잡지로 자리 잡았다.〉
 
  《월간조선》은 창간호 ‘편집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잡지의 성격을 밝혔다.
 
  〈《월간조선》은 일제 치하에 조선의 광명(光明)으로서 겨레의 어둠을 밝힌 《조광(朝光)》을 근원으로 하여 10년 전 발행이 좌절된 《사상계(思想界)》의 맥을 이어 등장한다. 이에 광범위한 독자층의 의견을 종합하며, 여론을 분석하여 제작하고, 독자들이 직접 논설까지 쓸 수 있는 오피니언 매거진인 동시에 한국 지성의 최고 권위지를 지향할 것을 다짐한다.〉
 
  《월간조선》은 초창기 ‘오피니언 매거진’을 지향했다. 고급 담론과 역사, 중·단편 소설 등으로 채워진 당시의 《월간조선》은 특종과 심층취재를 기반으로 하는 오늘의 《월간조선》과 많이 달랐다.
 
  《월간조선》 창간호는 5만 부가 팔렸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창간호 책값은 1500원이었고, 원고료는 200자 원고지 한 장당 3000원, 시(詩) 한 편에 3만원이었다. 당시의 경제 수준으로 봤을 때, 상당한 액수의 고료(稿料)였다. 방우영 사장은 “적자가 나도 괜찮으니 좋은 잡지를 만들라”며 《월간조선》 편집팀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신동호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허술·오효진·조갑제가 《월간조선》 완전히 뒤바꿔”
 
오효진 기자. 사진=조선DB
  ― 선생께서는 창간호에 어떤 기여를 했습니까.
 
  “그때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라 《월간조선》 창간호에는 직접적인 기여를 하진 않았어요. 당시 《조선일보》는 편집국 각부 부장들을 《월간조선》 창간 기획위원으로 삼아, 창간호를 어떻게 만들지 아이디어를 내게끔 했죠. 《월간조선》 창간호를 발행하기 위해 전사적(全社的)으로 움직였다는 얘깁니다. 신문사에서 잡지를 발행하는 데 있어 편집국 부장들까지 나선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겁니다.”
 
  ― 창간호 멤버 중에 기억나는 기자는 누가 있습니까.
 
  “거의 다 기억에 남아 있죠. 송상옥씨는 문화부 차장이면서 소설가였고요. 이유곤씨는 편집부 차장으로 있던 친군데 시인(詩人)이었어요. 백순기씨는 사회부 차장을 지냈고요. 이렇게 차장급들을 실무진으로 해서 《월간조선》을 만든 거죠.”
 
  ― 특집 ‘민주의 길’ 등 창간호 아이디어는 주로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겁니까.
 
  “사실 《월간조선》 창간호는 이흥우씨 작품이에요. 이흥우씨가 발이 참 넓은 사람입니다. 나중에 이흥우씨가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허술(許鉥)씨를 영입했는데, 허술씨는 잡지 편집자로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기자로서의 감각은 물론, 디자인 감각도 있었어요. 허술씨가 지금의 《월간조선》의 기초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선일보 90년사(史)》는 허술 편집장을 “《중앙일보》에서 잡지 편집을 시작하여 1980년 10월 월간 《마당》 창간 편집인 겸 주간으로 편집 경력을 쌓음. 허술 체제에서 월간지계의 후발 주자 《월간조선》이 최고 부수의 최정상 잡지로 도약함”이라고 특기(特記)하고 있다.
 
  ― 선생께서 훗날 《월간조선》에서 이름을 날린 오효진(吳效鎭)·조갑제(趙甲濟) 기자를 영입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효진 기자는 허술씨가 편집장으로 있던 1984년 2월에 입사를 했어요. 오효진 기자는 내가 주필일 때 출판국 《월간조선》에서 편집국 사회부 차장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출판국과 편집국 간의 교류를 위한 시도였는데, 오효진 기자가 사회부 차장으로 있으면서 글을 참 많이 썼습니다. 오효진 기자 입사 직전(1983년 10월)에 조갑제 기자도 들어왔죠. 허술·오효진·조갑제, 이 진용이 기존 《월간조선》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꿨습니다.”
 
  ― 어떻게 뒤바꿨습니까.
 
  “오효진·조갑제 기자의 기사 덕에 부수가 폭증했죠. 10만 부 선을 훌쩍 뛰어넘었으니까요. 그게 다 세 사람의 엄청난 추진력 덕분이었습니다.”
 
 
  편집인으로 잡지 제작에 적극 관여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조선DB
  ― 선생께서는 《월간조선》 편집인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미국 조지타운대학에 연수를 갔다가 돌아온 뒤, 《월간조선》 편집인이 됐지요(1982년 4월호). 미국에서 돌아오니 방우영 사장이 ‘《월간조선》 편집인을 맡아줘야겠다’고 권유해 편집인에 취임한 겁니다. 유건호, 선우휘씨에 이은 《월간조선》 3대 편집인이었죠.”
 
  ― 편집인이 되실 때 《월간조선》이 ‘책임 편집제’를 시행했는데 그건 어떤 의미였습니까.
 
  “유건호·선우휘 두 분은 편집인이긴 했지만, 《월간조선》 제작에 크게 관여를 안 하셨어요. 저는 직접 지면 제작을 지휘했죠. ‘이번 달에는 이런 테마로 글을 써보자’라는 식으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으니까요. 편집인으로 약 1년간 있으면서 《월간조선》 권두언(卷頭言)도 썼고요. 198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부터 편집인 자리는 없어졌습니다.”
 

  ― 초창기 ‘오피니언 매거진’에서 지금의 ‘시사 매거진’으로 《월간조선》의 성격이 바뀌는 데 선생께서 기여를 한 거네요.
 
  “그런 셈이죠. 그때부터 신문 기자 출신들이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요. 이름을 날린 《월간조선》 기자 대부분이 신문 기자 출신이에요. 조갑제는 《국제신문》 출신이었고, 오효진은 신문사는 아니지만 MBC에 있었고요. 물론 잡지사에서 기자로 시작해 이름을 날린 경우도 있어요. 손세일(孫世一)씨는 《사상계》 기자(편집장)로 시작해 《신동아》 부장을 했고요. 《조선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유경환(劉庚煥)씨도 《사상계》 기자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일각에선 오효진 기자를 연파(軟派)형, 조갑제 기자를 경파(硬派)형으로 평가하던데, 이렇게 분류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두 사람은 취재와 글재주도 있었지만, 거기에 더해 기사를 기획하는 두뇌가 있는 기자였습니다. 잡지는 기획기사가 좋아야 하는데 두 사람은 그 부분에도 특출한 재능이 있었어요. 저는 두 사람이 기사를 가장 잘 쓰는 기자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도 그런 기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편집국에 있다가 출판국 《월간조선》으로 발령을 받는 데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지 않았나요.
 
  “그걸 일본말로 ‘시메다시(締め出し)’라고 했어요. ‘쫓겨난다(축출된다)’는 말인데, 일종의 좌천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있긴 있었죠. 편집국이든 출판국이든 어디에 속해 있든지 간에 가장 열심히 뛰는 기자들이 종국엔 이름을 남깁니다. 기자는 글로 승부를 거는 직업이지, ‘소속 부서가 어디냐’로 말해선 안 됩니다.”
 
 
  “월간지 기사는 이미지로 각인되게끔 써야”
 
  ― 《월간조선》을 위한 고언(苦言)을 좀 부탁드립니다.
 
  “그런 건 하기 싫은데…. 뭐 한마디 한다면 이런 게 있을 겁니다. 뉴스를 전달하는 데 있어 시차(時差)상 가장 빠른 게 방송이고, 그다음이 활자 매체죠. 과거엔 신문과 같은 활자 매체가 뉴스 전달 수단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방송 매체가 활자 매체를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월간조선》은 가장 늦게 전달되는 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게 저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데일리 뉴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월간지 기자는 독자에게 가장 늦게 뉴스를 전달하는 메신저입니다. 그런 만큼 독자의 심리를 잘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월간지 기자가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에 대한 많은 고민이 필요해요. 그게 없으면 월간지 기자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자로서의 사명의식이겠지만요. 일간지 기자, 주간지 기자, 월간지 기자로 제각기 위치가 바뀔 때마다 그 위치에 맞는 사고방식을 갖는 게 필요합니다.”
 
  ― 월간지 기사는 호흡이 깁니다. 요즘 사람들은 긴 기사를 잘 읽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런 약점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글을 잘 쓰는 수밖에 없죠.”
 
  ― 평범한 진리지만 그거야말로 가장 난제(難題)입니다.
 
  “월간지 기사는 글이 얼마나 박력 있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됩니다. 월간지 기사는 독자에게 형상화돼야 합니다. 즉 활자를 읽는다는 느낌을 줘선 안 되고 기사가 머릿속에 이미지로 각인돼야 합니다. TV 아나운서가 하는 말이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듯이 월간지 기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 참고해서 읽을 만한 글에는 뭐가 있습니까.
 
  “《조선일보》 ‘팔면봉(八面鋒)’ 코너죠. 팔면봉은 짤막하지만 그 짧은 글에 촌철살인과 재미가 다 담겨 있잖아요. 월간지 기사도 그렇게 단문(短文) 위주로 써서 빠르게 읽히면서 독자의 머릿속에 이미지화하는 요령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팔면봉도 조금 서툴러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프린스’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은 까닭
 
《조선일보》 논설주간이던 1983년 4월, 북한에서 미그기(機)로 귀순한 이웅평(오른쪽)과 인터뷰하는 신동호 전 사장. 사진=조선DB
  신동호 전 사장은 경기도 용인 출생이다. 그의 조부는 군수를 지냈고, 선친은 국회의원을 지냈다. 집안이 유복한 편이어서 젊은 시절 직접 차를 몰며 선친의 국회의원 선거를 돕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왜 기자로 투신한 걸까. 그의 기자 입문기를 들어보자.
 
  ― 왜 기자를 하려고 했습니까.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문예반과 문학서클(정문회)에 몸담았어요. 원래 글 쓰는 게 취미였죠. 꿈은 작가였고.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소설가 황순원(黃順元·1915~2000) 선생을 알게 됐습니다. 그분이 서울고 국어 교사를 했거든요. 그분이 제게 자신이 쓴 글을 200자 원고지에 필사(筆寫)하라고 한 적이 있어요. 책을 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어요. 그렇게 필사를 하면서 신문 기자로서의 문장력을 갖추게 된 것 같아요.”
 
  ― 《조선일보》에 입사한 계기는 뭐였습니까.
 
  “처음 응시한 언론사는 《조선일보》가 아닌 《서울신문》이었어요. 《서울신문》 면접 시험 보러 가는 날이 하필이면 큰아버지 제사였어요. 그래서 우리 집안 식구들이 전부 경기도 김포를 가야 했어요. 조카인 저도 안 갈 수 없어 일단 제사에 갔다가 뒤늦게 면접 시험에 갔죠. 보니까 《서울신문》 면접관이 우리 조부께 세배하러 오던 분이었어요. 또 부친 친구가 《서울신문》 주필이었고, 사장인 김법린(金法麟)씨 역시 부친의 친구이자 함께 국회의원을 지낸 막역한 사이였어요. 만약 미리 그런 배경을 얘기했다면 《서울신문》에 채용됐겠죠. 그런데 면접 시험 치르면서 그런 얘긴 일절 안 했어요. 별로 가고 싶지 않아 묻는 말에 오히려 삐딱하게 대답한 기억이 나요.”
 
  ― 모친이 《조선일보》의 토대를 세운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1884~?) 선생의 수양딸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그것이 《조선일보》 입사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에요. 《서울신문》 면접 시험이 끝난 6개월 후에 《조선일보》 시험을 치렀는데, 그때도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입사하고 나서 사주(社主) 일가와 그런 인연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됐죠.”
 
  ― 방일영·방우영 회장이 선생을 많이 아꼈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 두 분만 알지, 나는 모르죠. 일선 기자와 데스크로 있을 때에는 그저 일밖에 몰랐어요. 아침에 눈뜨면 신문, 자기 전에도 신문, 그저 신문이 전부였어요. 술도 많이 먹었지만, 그건 신문을 만들기 위해 먹은 술이었지 술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어요.”
 
  ― 두 분하고의 추억도 많겠습니다.
 
  “1969년 여름에 방일영 회장 모시고 후지산(富士山) 오른 게 기억에 남죠. 그때 앞서 말한 조동오씨가 《중앙일보》 일본 특파원이었는데, 그분도 같이 등산길에 올랐죠. 방우영 회장하고는 추억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하기조차 힘듭니다.”
 
  신동호 전 사장은 《조선일보》에 입사한 지 7년 만인 1966년, 사회부장에 발탁됐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파격적인 인사라 그를 두고 ‘프린스’ ‘황태자’라는 호칭이 따라붙었다. 방우영 회장은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신 전 사장에 대해 “사사로운 인연을 제쳐두고라도 그는 객관적으로 능력이 출중한 기자였다”고 평가했다. 능력이 뒷받침돼 중용한 것이지, 사주 일가와의 인연만으로 요직에 기용된 게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기자 신동호’는 사회부 기자로 필명(筆名)을 날렸다. 1962년 속초 앞바다에서 어선이 침몰해 80명이 실종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때 사회 초년병이던 신동호 기자는 현장 스케치 기사를 송고했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을 전한 기사였는데, 제목은 〈갔구나! 아바이여. 마(魔)의 해변에 만기(輓旗)가 숙연(肅然)〉이었다. ‘만기’란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상여 등에 거는 깃발을 말한다. 이 기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갔구나! 아바이여” 기사로 筆名 얻어
 
  〈아바이여 갔구나. 혼이라도 봬지 않소봬! 고향 땅은 함경도지만 현주소는 동해 앞바다. 소식이 끊긴 남편 무덤인 마의 해변에서 ‘아즈마이’들이 딩동당동 굿을 올렸다…. 만기가 해풍에 날리는 통곡의 바다! 고향과 내 집이 그리워 파도의 두려움도 잊었던 뱃사람들의 끝장은 저녁노을처럼 덧없고도 쓸쓸한 것이었다.〉
 
  가슴 뭉클한 이 문장은 당시 큰 화제가 됐다.
 
  ―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기사를 많이 썼다고 들었습니다. 그랬던 이유가 있습니까.
 
  “그 당시 나는 차가 있어서 다른 기자보다 새벽에 일찍 경찰서를 둘러볼 수 있었어요. 내 담당이 마포, 서대문, 종로, 동대문, 성북 이렇게 5개 서(署)였는데, 거길 차로 돌다 보면 남들보다 풍부한 기삿거리를 얻을 수 있었죠. 그 덕에 가십이나 1단 같은 자질구레한 기사부터 통신 기사 정리까지 도맡아한 거죠. 연문성(軟文性) 스케치 기사도 많이 썼고요. 이런 경험이 나중에 데스크가 됐을 때 큰 도움이 되더군요. 열심히 쓴 덕분에 윗사람한테 인정도 받았어요. 웬만한 사람들보다 출근도 일찍 했고.(웃음)”
 
  ― 《조선일보》의 ‘정신적 교열부장’이라고 들었습니다. 가령 시제(時制)가 불일치하는 기사가 있으면 ‘텐스(시제)가 안 맞잖아!’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면서요.
 
  “‘시제 일치’는 기사에 있어 기본이지…. (시제가) 안 맞으면 그게 기사라고 할 수 있나?”
 
  ― 편집국장 시절, 소설가 고(故) 최인호(崔仁浩)씨 소설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 걸로 압니다.
 
  “원래 황순원 선생의 소설을 연재하려고 했는데, 황 선생이 최인호를 추천하더라고요. 최인호도 서울고 출신이거든요. 그때 최인호는 새내기 작가였어요. 서울고 재학 시절인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촉망받는 작가였지만, 신문 연재 소설 작가로 초빙하기에는 너무 젊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 연재 소설은 원로 작가들이 쓰는 게 거의 관례였어요. 제가 최인호더러 ‘일주일 치 원고를 써 갖고 오라’고 해서 가져왔어요. 그게 그 유명한 소설 《별들의 고향》입니다. 원래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어요. 조간 신문 소설 제목에 ‘무덤’이란 말이 들어가는 건 부적합하다고 생각해 ‘고향’으로 바꾸자고 했더니 최인호가 흔쾌히 승낙하더군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無慾
 
  ― 재밌는 사연 중 하나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특종입니다. 본인 특종을 후배가 ‘재탕했다’고 들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 기억 착오였습니다. 그건 원래 허문도(許文道) 기자(전 국토통일원 장관) 특종이었어요. 제가 주일(駐日) 특파원이던 시절(1970년)에 한 특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허문도 기자가 1978년 4월12일자 《조선일보》에 한 특종이 첫 번째더군요. 그로부터 10여 년 후 내가 주필일 때 일본발(發) 북관대첩비 관련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죠. K 기자(당시 주일 특파원)가 내 특종을 재탕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과 달랐죠. 조사를 해보니까 K 기자는 북관대첩비에 대해 전혀 모르고, 그런 기사를 송고한 적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저와 K 기자는 북관대첩비에 관한 기사를 쓴 적이 없는 거죠. 더구나 1978년은 내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시절인데….(웃음)”
 
  ―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은 누굽니까.
 
  “방우영 회장과 장기영(張基榮· 1916~1977) 전 《한국일보》 사장이죠. 1950~60년대는 그야말로 《한국일보》가 독보적이었습니다. 제가 《조선일보》에 입사했을 때에만 해도 《조선일보》 부수는 채 10만 부도 안 됐어요. 《동아일보》도 그랬고요. 반면 《한국일보》는 장기영의 추진력으로 쑥쑥 커가고 있었습니다. ‘기자 사관학교’라고 불렸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국내 신문사 중 100만 부수를 돌파한 건 《한국일보》가 아니라 《조선일보》였죠. 방우영 회장은 신문사 경영주이지만, 편집국장을 능가할 정도로 기획력이 뛰어났습니다. 1960~70년대 《조선일보》 유명 연재물과 기획물 중 상당수가 방우영 회장 아이디어였으니까요. 그 덕에 《조선일보》 부수가 급증한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신 전 사장은 인터뷰 말미에 지인(知人)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말이 지인이지 그에게 편지를 쓴 이들은 기라성 같은 언론계 인사를 비롯해 우리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정·관계 인사들이었다.
 
  신동호 전 사장이 들려준 이야기 중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화(秘話)도 많았다. 그가 들려준 진귀한 이야기와 편지가 사장(死藏)되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회고록을 쓸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신 전 사장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은 이제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국내 최정상 언론사의 주필까지 지냈음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초연함. 그러한 무욕(無慾)이 오히려 강렬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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