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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문인과의 차 한 잔 ① 소설가 박순녀

“30년 전 손녀와 ‘알콩달콩 행복쌓기 전쟁’을 책으로 펴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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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92년 쓴 할머니표 육아일기를 새롭게 손질한 《단비야 단비야 안녕》
⊙ 손녀 단비는 32세로 성장… 美서 영문학 박사 받아
⊙ 단편 〈아이 러브 유〉(1962)와 〈蘭〉(1968)에 등장하는 일본인 스승과의 인연 이어가
⊙ 남편 金利錫과 화가 李仲燮 등장하는 실명 소설집 《이중섭을 찾아서》 (2014) 펴내
⊙ ‘김이석은 내게 예술을 심었는데 나는 생업으로 붓을 들었다.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朴順女
1928년생. 원산여자사범,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 졸업 /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월간 《사상계》에 〈아이 러브 유〉(1962), 〈외인촌 입구〉(1964)로 추천 / 《어떤 파리》(1972), 《칠법전서》(1976), 《로렐라이의 기억》(1977) 등 다수 / 현대문학 신인상(1970), 한국소설문학상(1988), 펜문학상(1999) 수상
사진=조준우
  〈12월 30일
 
  11시쯤에 양하 부부가 떠났다.
 
  양하를 낳았을 때 남편이 말하기를, 우리 늘그막에 딸아이 덕을 좀 보자고 했다. 나는 그때 눈을 흘겼는데, 그 아이 양하가 지금 제 딸을 나한테 맡기고 떠난다. 머나먼 길 가면서
 
  “엄마, 나 갈게.”
 
  걱정 말고 어서 가라는 말이 나는 목 안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그 말을 못 하고 나는, 엄마 아빠는 떠나버리고 이제 나한테 홀로 남는 단비만 쓰다듬었다. 양하가 떠나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엄마, 나 가요.”
 
  목이 꽉 잠기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그 애들한테서 등을 돌리고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가라, 어서 가.”
 
  가을 논밭 새들을 쫓듯 했다.〉(13쪽)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출간한 소설가 박순녀(朴順女·93)의 육아일기 《단비야 단비야 안녕》의 도입부다. 책 커버에 ‘아기와 알콩달콩 행복쌓기 전쟁’이라고 적혀 있다.
 
  딸 내외가 미국으로 유학 가는 바람에 박순녀 선생이 외손녀 단비를 떠맡은 것은 30년 전인 1991년 12월 30일. 이듬해 12월 2일까지 단비를 키우며 겪는 일상을 책에 담았다. 1992년 2월 20일부터 4월 10일까지 《조선일보》에 7차례 걸쳐 연재해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하고 사실적인 할머니표 육아일기다.
 
  느긋하게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하던 ‘고고한’ 소설가 할머니의 일상은 와르르 무너졌다. 안아달라고 칭얼대고 업어달라 조르는 손녀와의 하루는 힘이 들지만 커가는 모습에 늘 감동하는 할머니. 점점 힘이 달리는데 손녀는 ‘열이 펄펄 나서 힘이 쭉 빠질 때까지’ 놀고 싶어 했다.
 
  간혹 아플 때는 가슴이 무너졌다. 아이가 새벽녘에 토하는 바람에 할머니는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기도했다. ‘이 어린것을 도와주세요! 이 어린것을 도와주세요!’ 하고.
 
 
  ‘이 어린것을 도와주세요!
  이 어린것을 도와주세요!’

 
지난해 말 출간한 박순녀의 육아일기 《단비야 단비야 안녕》.
  토하고 나서, 토한 것을 할머니가 치우고 있으면 아이는 “내가 토했지?” 했다. 그러곤 “이제는 토 안 할게”라며 할머니 마음을 어루만질 줄 아는 아이였다.
 
  당시 예순 초반의 할머니는 지금 아흔이 넘었다. 두 살에서 세 살 하던 아이는 지금 서른이 넘었고 결혼까지 했다.
 
  그렇게 한바탕 세월이 흐른 후 알콩달콩 육아일기를 새롭게 손질해 펴냈다. 기자는 지난 1월 21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에 위치한 박순녀 선생의 자택에서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 서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그때 이미 젊지 않았다. 젊을 때는 자식을 힘으로 키우지만 이제 힘이 빠져버린 나에게 단비 키우기는 너무나,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그 죽을 만큼, 정말로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 기록이 바로 이 글이다.〉(7쪽)
 
  “눈만 뜨면 안아달라, 업어달라. 곱다, 곱다 하다가도 소리를 지르고 널브러져서 더는 꼼짝 못 할 것 같은데 또 노래를 불러야 하고 춤도 춰야 했다”고 한다. 글 쓰는 시간도 빼앗기고 개인적인 친교, 외출도 거의 못 했다. 1년 뒤 아이를 제 부모에게 보내고 오랜만에 몸단장하고는 거리에 나섰는데 친구가 “어쩐 일이니. 너 십 년은 팍 늙었다”고 했단다.
 
  ― 그런 단비가 벌써 서른이 넘었군요.
 
  “지금 서른둘인가? 단비가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연초에 한국에 왔어요. 이미 결혼까지 했고요.
 
  지난여름, 그 삼복더위에 겨울 털 구두를 보내왔습니다. ‘이 더위에 웬 털 구두?’ 하니까 단비가 말하기를 ‘지금 신을 구두는 너무 비싸 자기네로서는 살 수가 없어서 70% 할인하는 겨울 털 구두를 사서 보냈다’는군요. 나는 눈물이 비어져 나오는 얼굴로 크게 웃었어요.”
 
 
  “단비야! 요 지지배야!”
 
박순녀 선생의 자택 책상 앞에 붙여놓은 이용악 시인의 ‘그리움’.
  〈5월 25일: 혈압이 오른다 혈압이. 180은 됐을 거야.
 
  단비 약을 먹일 때마다 되풀이되는 일인데, “자아, 단비 약” 하면 벌써 요 쥐방울이 입을 틀어막는다.
 
  “안 돼. 잘 먹어야 돼.”
 
  그러면서 시럽 병을 가져오면 방에서 도망을 친다. 해롱해롱 웃으면서 도망친다. 우선 부드럽게 나간다.
 
  “단비야, 약 먹고 어야 가자.”
 
  방에 들어온다. 방에 들어온 것을 보고 숟갈에 시럽을 따르고 거기에다 가루약을 갠다.
 
  “자아, 단비야.”
 
  숟가락을 가져가면 “헤헤헤” 하고 다시 도망을 친다. 달래고 도망을 치고, 화를 내고 도망을 치고, 그때쯤 되면 내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올라가 있다.
 
  “단비야! 요 지지배야!”(181쪽)〉
 
  30년 전 ‘전쟁’이 눈에 보이듯 문장이 생동감 있다. 소설 쓰는 할머니는 가끔 멋진 시(詩)도 손녀에게 들려주었다. 손녀가 시를 이해할 나이는 아니지만 할머니는 “내게도 그리운 게 있다”며 이용악(李庸岳·1914~?)의 시 ‘그리움’을 읊었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
  연달린 산과 산 사이 / 너를 남기고 온 /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이용악의 시 ‘그리움’ 중에서

 
  ‘눈이 오는가 북쪽엔’으로 시작되는 시를 보면서 박순녀 선생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는지를 알게 된다.
 
  선생은 1928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단신 월남했다. 1960년 단편 〈케이스 워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64년 단편 〈외인촌 입구〉로 《사상계》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떤 파리〉 〈시간의 기둥〉 〈난(蘭)〉 〈아이 러브 유〉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이 있다. 지난 2004년 펴낸 창작소설집 《이중섭을 찾아서》가 ‘세종도서’로 선정됐다.
 
 
  “한창 글 쓸 때 오셨으면 굉장히 반가워했을 텐데, 호호호”
 
  박순녀는 여전한, 쉬지 않는 현역이다. 고운 얼굴, 목소리 역시 느릿느릿하지만 단아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억양에 함경도 방언이 남아 있다. 북쪽 고향이 아직도 그리울까.
 
  “한창 글 쓸 때 오셨으면 굉장히 반가워했을 텐데, 호호호. 이제는… 하하하.
 
  제 생각에 정신은 맑은 것 같아요. 그런데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거예요. 조금 무리하면…, 하여간 글은 쓰고 싶은데 집중을 못 하는 것이죠.”
 

  ― 구술로 녹음하시면….
 
  “그런 것(녹음기) 다 없애버렸어요. 밖에 나갔다 오면 의욕이 생기고 세상을 느끼게 되는데…, 하여간 집에만 있으니 영 재미가 없어요. 컴퓨터 워드 작업은 할 수 있는데 인터넷을 깔지 않았어요. 내가 워드로 써놓으면 우리 아이들이 담아서 (출판사에) 보내줘요. 인터넷을 깔았으면 할 수 없이 (컴퓨터) 공부를 했을 텐데….”
 
  ― 이번에 책을 새로 내셨네요.
 
  “그때 급하게 써서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옛 육아일기를) 다시 뒤졌어요. 본문은 별로 손 안 대고 이를테면 아이와의 기록이 아닌 부분에 내 생각을 더러 집어넣었어요. 좋은 시도 넣고…. 세월이 흘렀지만 이제야 완성된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00부를 찍었고 인세도 받았어요. 《조선일보》에 신문 광고도 냈잖아요. 호호호.”
 
  ― 손녀 단비가 대학 가서 전공을 택한 게 아무래도 할머니 영향을 받진 않았을까요.
 
  “전혀….”
 
  박 선생은 대학에서 영어교육, 손녀는 미국에서 영문학을 배웠는데 “전혀”라니. 독립적인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할머니의 믿음이 담긴 말이었다.
 
  “단비가 어릴 때 영어로 대화한 녹음테이프들이 어디 있었는데, 그걸 어디에 둔다는 생각을 못 하고 이사 다니면서 하나씩 하나씩 없애버렸어요. 지금 미국 대학의 강사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미국 사람이 아니니까 아직 기다리나 봐요.”
 
  ― 단비가 여름에 털 구두를 살 만큼 지혜로운가 봐요.
 
  “살림살이를 잘하네요. 그러나 털 구두보다 더욱, 더더욱 값진 단비 선물은 두세 살짜리 단비와 나의 이 ‘전투기록’일 겁니다.”
 
  박순녀는 신간 《단비야 단비야 안녕》 뒤에다 남편 김이석(金利錫·1914~1964)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내 남편인 김이석 선생님, 당신의 딸 양하의 딸이 단비입니다. 어느 눈이 많이 쌓인 날입니다. 당신이 눈이 쌓인 우리 집 대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술을 너무 마셨던 거지요. 그런데 정신이 없는 당신의 꼬옥 쥔 손바닥에 알사탕 몇 개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밖에 나갔다가 올 때는 꼭 그 손에 뭔가가 있었습니다. 양하 준다고. 절대로 빈손으로 오는 일이 없었지요. 나는 단비를 당신이 눈 속에서도 놓지 않고 꼭 쥐고 있었던 그 눈사탕처럼 키웠습니다. 단비가 그날을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그 애가 당신이 우리에게 심어준 ‘무엇으로 사는가’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살아주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322~323쪽)
 
 
  “이 책을 내 인생의 기념품으로 간직할 생각이오”
 
일본인 스승의 딸 나가하마 가쓰코(長浜和子)의 지인이 소설 〈난(蘭)〉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다.
  소설가 박순녀는 1960~70년대 주옥같은 단편을 많이 썼다. 그녀의 소설엔 전통적 가족 질서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 의지를 갖고 생활하는 학생이나 인텔리 여성이 흔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녀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어쩌면 단편 〈아이 러브 유〉(1962)와 〈난(蘭)〉(1968)을 떠올릴지 모른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일본인 스승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박순녀는 함남 고등여학교(1944), 원산여자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1945)한 후 월남,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1950)했다.
 
  소설 〈아이 러브 유〉는 전시동원령으로 숨 막혔던 일제 말 여학교가 배경이다. 일본인 교장 네로는 조선 여학생에게 참전을 노골적으로 강요한다. 양심적인 일본인 야마끼 선생은 조선인 여학생에게 적십자 간호원 지원을 거부하도록 충고한다. 야마끼는 학생들 사이에서 ‘육발 선생’으로 알려졌다.
 
  ‘나’는 교장실로 끌려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고문을 당한다. 야마끼 선생은 교장 네로와 싸우며 “학생을 수사당국에 넘긴다는 건 언어도단”이라 반발한다. 결국 퇴학으로 결정이 났고 때마침 8·15 해방을 맞았다. 본국으로 송환되는 일본인 무리 속에 ‘나’는 스승을 발견하고 허리 굽혀 인사한다. 야마끼 선생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며 싱긋 웃는다. 소설 속 야마끼 선생은 박순녀가 학창 시절 만났던 실제 스승인데 본명은 야마모토(山本)다.
 
  한편, 소설 〈난〉에서도 일본인 체육선생 이누오(犬尾)가 등장하는데 원산사범 기숙사를 무대로 소설이 펼쳐진다. 이누오 선생은 민족적 편견을 갖지 않고 조선인 여학생들의 독립정신을 동정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소설 〈난〉이 출간되고, 이누오의 실제 인물인 이나다 주조(稻田十三) 선생이 내한해 사제가 재회하기도 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68년 3월3일자 기사 중 일부다.
 
  〈…해방이 되고 서로 헤어져 소식조차 모르는 25년이 지났지만 박순녀 여사는 그때의 도전(稲田·59) 선생을 못 잊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朴) 여사에게 의외의 국제편지가 날아왔다.
 
  “그리운 내 제자(弟子)가 한국에서 여류작가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해 마지않았소. 작품 속에 그려진 나를 보고 다만 조그마한 신념으로 살아온 내 인생의 보람을 얻은 것 같소. 문학과 교육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소. 새삼 서울의 하늘이 보구 싶구려. 나는 이 책을 내 인생의 기념품으로 간직할 생각이오.”
 
  바로 도전씨에게서 온 편지였다. (하략)…〉
 
 
  일본인 스승과의 이야기를 담은 두 편의 소설
 
《조선일보》1968년 3월3일자에 실린 박순녀 선생의 일본인 스승인 이나다 주조(稻田十三)에 대한 기사 〈25년만에 다시 이어진 사제〉.
  ― 두 편의 소설이 발표된 이후 사제 간 인연이 어떻게 이어졌을지 궁금합니다.
 
  “소설 〈난〉이 많이 팔렸어요. 여학생들이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닐 정도였어요. 애초에 3부작으로 시작했는데 1부만 내고 못 냈죠. 〈난〉에 등장한 이나다 선생님의 딸이 수소문해서 저를 찾아왔어요. 성함은 나가하마 가쓰코(長浜和子)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정년퇴직 후 아버지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번역하기 위해 한국외대 외국어학당에서 반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어요. 일본에 돌아가서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자기는 한국말을 배울 정도로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죠. 해마다 봄, 가을마다 한국을 찾아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에서 한 달씩 봉사하고 돌아갔죠.
 
  나가하마 씨가 소설 〈난〉을 일본어로 번역해 나에게 보내주면 내가 손질해 다시 보내주는 식으로 전문(全文) 검토를 세 번이나 했어요. 한 번 하는 데 약 1년쯤 걸렸어요. 본문은 어지간히 일본어로 해도 내 표현과 비슷한데 (본문 속) 대화는 달랐어요. 내가 쓴 소설의 대화는 낡은 한국식 대화야. 그런데 그 여자가 대화를 손질하면 현대식으로 대화가 싹 살아나더라고요.
 
  그 작품을 출간하기까지 한 10년은 걸렸을 거예요. 3~4년 전 200권을 인쇄했어요.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자기네 가족들이 읽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생전 아버지가 이다음에 120% 행복하거든 20%를 사회에 환원하라고 하셨는데 20%를 환원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봉사도 그렇게 해왔다’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굉장히 찡해요. 물어봤어요. ‘해외여행을 어디 갔느냐’고. 나가하마 씨 말이 ‘아무 데도 간 적 없고 오직 한국에 와서 매년 두 차례 봉사하고 간다’는 거예요.
 
  지금도 그분과 연락이 닿는데, 화가인 지인이 소설 〈난〉의 주인공에 반해 그림 4점을 그렸어요. 그중 한 점이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거예요.
 
  제가 2점을 선물 받았는데 한 점은 경기도 산본도서관에 기증하고, 한 점은 갖고 있어요. 지금도 (나가하마 씨가) 1년에 한두 번씩 소포를 보내와요.”
 
  ― 이나다 주조 선생님과 직접 만나기도 하셨죠.
 
  “소설 〈난〉이 《조선일보》를 통해 알려지면서 내 또래의 남성 8명이 찾아왔어요. 바로 이나다 선생님 제자들이었어요. 내 고향 함흥 출신도 있었죠. 그분들 중 한 분이 일본을 상대로 무역을 해서 이나다 선생님이 사시던 곳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선생님 내외가 한국에 오셨죠. 저는 원산사범 동기 대여섯 명과 마중을 갔어요.”
 
  ― 소설 〈아이 러브 유〉에 나오는 ‘육발 선생님’과도 만나셨나요.
 
  “그분 실제 성함은 야마모토 선생님이셨는데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 ‘육발’로 알려졌어요. 학생들이 육발을 보려고 맨날 쫓아다녔어요. 하하하.
 
  훗날 선생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선생님 부인을 만났어요. 내가 한일우호협회 초청으로 일본에 갔을 때 만났어요. 학교 다닐 때 야마모토 선생은 총각이셨는데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가 결혼하신 거죠. 그 부인과 여러 번 편지 왕래가 있었어요.”
 
 
  “난 한국에 교육자로 왔지, 다른 것은 없었다”
 
박순녀 선생의 학창 시절 모습. 함남 고등여학교(1944), 원산여자사범학교 강습과를 나왔다.
  ― 진짜 육발이던가요.
 
  “그 부인에게 확인했지. 소설에는 육발을 확인한 것처럼 썼지만 확인은 못 했거든요. 호호호. 선생님 부인 말씀이 ‘육발은 아닌데 조금 기형이라고…’ 하하하.”
 
  ― 이나다 선생님은 체육, 야마모토는 국어 선생이셨군요.
 
  “참 좋은 선생님이셨어요.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원산에서 귀국하는데 참 비참했어요. 양말, 신발조차 신지 않은 분들이 많았어요. 아이들 발바닥에 돌멩이가 박혔죠. 그런 시절인데, 이나다 선생님이 (일본인 무리에 섞여) 어디를 갔다고 하면 그곳에 사는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주먹밥을 드리곤 했대요. 선생님 딸인 나가하마 씨가 그래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국에서 제자들이 찾아왔다’고. 참 괜찮은 선생님이셨던 거죠.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유골을 분골해 한강에 띄우더라고요.”
 
  ― 이나다 선생님은 한국에 대한 기억이 좋았던 모양이네요.
 
  “그렇죠. 선생님이 다시 서울에 오셨을 때 무슨 이야기 끝에 그러시더라고요. ‘난 한국에 교육자로 왔지, 다른 것은 없었다’고요. 식민지 시절, 나쁜 짓 많이 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러나 선생님은 ‘교육자로 와서 교육만 했을 뿐’이라 하셨어요.”
 
  ―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요즘도 친일 청산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어요.
 
  “그 치하에 살아본 사람과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확연하게 다르더라고요. 학창 시절, 그 사람들이 좋은 교육을 하면 좋은 교육을 받은 것이고, 나쁜 교육을 시키면 나쁜 교육을 받은 것이고…. 그렇게 받아들이니 범위가 좁아요. 결국 (체험이란) 개인 대 개인의 것이거든요.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큰 틀에서 말하잖아요.”
 
  ― 큰 틀에서 집단적인 폭력을 이야기하니까….
 
  “큰 틀에 놓고 보면 일본을 공격할 수밖에 없죠. 당연히 공격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미 식민지 교육이라는 틀 속에 갇혀, 말하자면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구별하는 것이죠.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큰 틀을 놓고 생각은 못 하는 거예요.”
 
 
  월남 1세대 여성 작가… 사촌오빠가 영향 끼쳐
 
박순녀 선생의 젊은 시절. 6·25 전쟁 후 중앙방송국(지금의 KBS)에서 방송 드라마를 집필했고, 서울 동명여고 교사로 재직했다.
  박순녀는 월남 1세대 여성 작가다. 해방 직후 학업의 열정으로 단신 월남했다. 월남 체험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외상적 체험으로 자리한다. 소설 〈어떤 파리〉 〈잘못 온 청년〉 등 많은 작품 속에서 남과 북을 오가는 지식인의 갈등을 담았다.
 
  6·25전쟁 후 중앙방송국(지금의 KBS)에서 방송 드라마를 집필했고 서울 동명여고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다 1958년 6월 〈실비명〉을 쓴 소설가 김이석과 만나 결혼했다. 안타깝게도 결혼한 지 6년이 되던 1964년 9월 남편 김이석이 급서(急逝), 졸지에 홀로 되어 딸 하나(현재 이화여대 교수)를 키우며 창작을 이어갔다.
 
  ― 젊은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나는요, 항상 배경에 누가 있어요. 호호호. 그 시절, 사촌오빠가 한 분 있었는데 요새 말하자면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이었어요.
 
  그 오빠에게 여동생이 있었는데 나를 더 예뻐했어요. 이 오빠가 아무튼 여자는 배워야 한대요. 그때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 유학 가려 했지만 패전국이 되어 갈 수 없었고 평양에는 대학이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로 왔죠.
 
  서울에 오니까 오빠와 (일본에서 대학을) 같이 다녔던 청년이 날 찾아왔어요. 내가 자주 사촌오빠에게 편지를 썼는데 오빠는 그 편지를 기숙사 친구들이랑 다 돌려 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기숙사에 날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 청년은 한국에 오니까 스승이 없는 거야. 서울대에서 무슨 강사를 하는데, 계속 있으면 서울대 교수도 될 수 있겠지만 뭐가 밑천이 있겠냐는 거예요. 더 배우고 싶다는 거지요.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간다며 나더러 같이 가자는데 배를 타려면 돈이 있어야…. 그 후로 소식이 끊어졌죠.”
 
  학창 시절, 박순녀에게 영향을 미친 사촌오빠 이름은 허준(許準)이었다. 그는 ‘만경봉호’를 타고 북으로 갔다고 한다.
 
  〈허준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진 역경을 이겨내면서 보기 드문 친화력으로 자신을 키워 일본의 일고(一高)를 거쳐서 센다이 대학을 나온 사람이다. 그는 무엇을 기대했던지 나 어렸을 적부터 내게 열정과 꿈을 가질 수 있게 부단히 도와주었다. 말로, 글로, 행동으로 그는 나에게 주문했다. 공부를 하라고, 글을 읽으라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하리라고 마음먹은 것은 전적으로 그 오빠의 영향이었다.
 
  해방이 남북을 갈라놓은 뒤 나는 남으로 왔지만 그는 조총련계여서 나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고 그는 나를 찾지 않았다. 색깔을 거론하면서 너와 내가 서로를 마구 죽이던 시절이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는 만남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글 쓰는 박순녀가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345쪽, 《이중섭을 찾아서》)
 
 
  남편 김이석과의 만남
 
소설가 김이석의 생전 모습이다.
  ― 월남하실 때 부모님은 못 오신 거죠.
 
  “내가 도망쳤어요. 도망쳐서 오니까, 사흘 만에 우리 엄마하고 오빠가 잡으러 왔어, 서울에. (웃음) 아무리 가자고 해도, 내가 안 가니까 타협안을 내신 거야. ‘일단 가면, 집에서 다 허락을 받아 짐을 꾸려 보내준다’는 거예요. 그때 서울에 오려면 조선은행권이 있어야 하는데, ‘집 안에 모아둔 조선은행권을 다 줄 테니 일단 가기만 해달라’는 겁니다. 그걸 믿고 도로 돌아왔어요. 집에 오니까 보낼 생각을 안 해요. 단식투쟁을 했지요. 우리 집에서 딸 하나를 잃을까 봐 손들고 정식으로 보내줬지.”
 
  ― 몇 남 몇 녀 중 몇째?
 
  “7남매 중에 셋째 딸이에요. 딱 가운데야.”
 
  ― 교사를 그만두시고 이듬해(1960년) 신춘문예에 당선되셨잖아요. 그 전부터 소설을 써오신 것인가요.
 
  “내가 방송국에 있으면서 드라마를 썼거든요. 이를테면 잡문 같은 것을 많이 썼어요.
 
  방송국 원고는 굉장히 쓰기 쉬워요. 원고지를 다 메꾸는 게 아니고 대화가 몇 줄, 거기다 뮤직 넣고 하면 200자 원고지에 글은 3분의 1이 들어갈까 말까 해요. 하룻밤에 100장도 막 썼는데, 하지만 쓰고 싶은 것은 소설이지….
 
  방송국에 오는 문인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의 원고 심부름을 하거나 고료를 전하곤 했는데, 어느 분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소설 쓰고 싶다’고 그랬겠죠. 나더러 ‘진짜 쓰고 싶으면 방송국 원고를 접어라’는 겁니다.
 
  소설은 막 써 내려가는 게 아니니까. 내가 그 충고를 따랐어요. 딱 끊어버렸지. 그러고 소설 쓰기 시작한 게… 아이고, 힘들어. 하하하.”
 
  박순녀는 김이석의 소설 〈실비명〉을 읽고 결혼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실비명〉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권번(券番) 인력거꾼 덕구는 아내를 급성 폐렴으로 잃었다. 슬하에 일곱 살 딸 도화를 두었다. 덕구는 도화를 의지해 살아간다. 덕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생들을 싣고 대동강 강변길을 달리는데 어느덧 도하가 소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덕구는 도화가 여의사로 자라길 꿈을 꾼다. 인력거를 끄는 것도, 독신으로 사는 것도, 먹고 싶은 술을 절주하는 것도, 아이를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의사가 된 딸의 인력거를 끌어보겠다는 단순한 그 마음에서다.
 
  그러나 도화는 남학생과 놀아나다 퇴학당하고 만다. 어느 병원의 견습 간호원으로 들어간 딸이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덕구는 인력거를 미친 듯이 몰다 교통사고로 숨진다. 결국 기생이 된 도화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절대로 인력거만은 안 타기로 결심한다.
 
  ― 김이석 선생님과 어떻게 만나셨어요.
 
  “내가 방송국에 있을 때 글 쓰는 사람들이 용돈 떨어지면 방송국 원고를 가지고 찾아와요. 김 선생도 시시때때로 원고를 써가지고…. 그때 많은 문인들이 왔죠. 그런데 아마 소설 〈실비명〉이 강력하게 내 인상에 남았던 것 같아.”
 
 
  이중섭과 남편 김이석,
  소설 《이중섭을 찾아서》

 
박순녀가 2014년 펴낸 소설 《이중섭을 찾아서》.
  김이석보다 14세 연하인 박순녀는, 아내를 사랑하고 딸을 위해 헌신하는 ‘덕구’를 그린 김이석에게 반했던 것일까. 그러나 남편은 결혼한 지 6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신문 부음기사 제목이 이랬다.
 
  ‘청빈(淸貧) 속에서 숨진 작가 김이석씨. 51세로 사망. 〈실비명〉 등의 작품 남기고’(《조선일보》 1964년 9월20일자 5면)
 
  “그땐 문단이 좁아서 다 알았지. 신문에 크게 났어요. 게다가 두어 시간 만에 가버리니까 너무 충격이었어요.
 
  제가 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제자가 스승의 날에 찾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자기가 대학에 다닐 때 영화관에 갔던 이야기를 해요. 그땐 영화 상영 전에 〈대한뉴스〉라는 게 있었어요. 뉴스를 보는데 선생님이 막 우는 게 나오더라는 거예요.
 
  내가 그 시절 뉴스에, 뉴스거리가 없어 〈대한뉴스〉에 나온 사람이에요. 호호호.”
 
  박순녀가 2014년 펴낸 소설 《이중섭을 찾아서》는 비운의 화가 이중섭(李仲燮·1916~1956)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중섭의 상대역이 남편 김이석이다. 소설은 사실과 허구를 오가는데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이다. 박순녀는 생전 남편에게 이중섭과의 교우를 들었다고 한다. 소설 첫 문장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인용한다.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 지금은 그 생각뿐이다. 죽음 뒤의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불에 타 재가 되어도 좋고 물에 잠겨 고기밥이 되어도 좋고, 이 거랑치 옷 입은 그대로 관 속에 놓여 땅에 묻혀도 좋다. 이렇게 중섭은 말했었다. 불길이 악마 혓바닥처럼 날름대며 그가 잠들어 누운 관을 크게 입 벌린 아가리에다 밀어 넣는 순간, 말없이 서 있던 모두는 빨려 들어가듯 관을 따라 아궁이 앞으로 다가섰다. (중략) 이게 뭐야. 그렇게 살다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김이석은 문득 이중섭이 그리워질 때마다, 그를 떠나보낸 마지막 날 풍정을 내게 들려주며 탄식을 토하고는 먼 곳으로 눈길을 보내곤 했다.〉(11쪽)
 
  전후(戰後) 서울 명동 동방살롱을 배경으로 이중섭은 참혹하기 그지없는 빈한한 삶을 이어간다. 이중섭은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 웅크리고 앉아 그림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화포나 화첩이 없으니 합판이나 종이, 담뱃갑 은지에도 그렸다.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이중섭은 김광균의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벋는 소리’라는 시구를 좋아했다. 이중섭의 아내 남덕 부인이 김광균 앞으로 남편에게 쓴 편지를 보내면, 이중섭은 자기가 가지 않고 김이석이 갖다주기를 바랐다. 이중섭과 김이석,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이중섭의 아내 남덕(본명은 야마모토 마사코. 이중섭은 그녀를 남쪽에서 얻었다고 해서 ‘남득(南得)’이라 부르다 ‘남덕’이 되었다)은 ‘돈이 없고 벌이가 시원치 않으며 있는 돈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제적인 무능 속에서’ 남편의 작품이 생겨난다고 믿었다. 이중섭이 지닌 비극적 천부(天賦)를 철석같이 의지한 것이다.
 
 
  “가난하지만 스스로를 굉장히 위대하다고 굳게 믿고”
 
  ― 전후 작가들은 왜 자신을 학대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했을까요.
 
  “당시 진짜 가난했고 어렵게 살았죠. 그 병폐가 다 예술지상주의예요. 가난하지만 스스로를 굉장히 위대하다고 ‘굳게’ 믿었어요. 제가 보기에 참 우습거든요.(웃음) 그러나 아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데 이 사람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 공부를 하지 않는데 뭘 밑천으로 위대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 문인들의 폐단이 그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다 낙오되고, 자기들은 걸작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걸작이 아니고….”
 
  ― 당시 한국 작가들은 인류가 겪어야 했던 식민지, 독립, 이념투쟁, 동족상잔, 전쟁과 분단 등을 모두 압축적으로 겪지 않았나요? 그들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일본 작가들이 한국 작가를 부러워하는 점이 그거예요. ‘당신들은 온갖 것들을 다 겪었다’는 것이죠. 일본은 패전 후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당대 모든 걸 소화해 명작을 쓰기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자기가 겪었다고 해서 명작이 나올 수는 없거든요.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남북전쟁 후 100년이 지나서 나왔잖아요. 미첼이 도서관에 다니며 자료를 찾아 작품을 썼어요. 단편적으로 어느 한 지점에 포커스를 두고 작품을 쓸 수 있지만 역사를 아울러 큰 작품을 만드는 것은 우리 후손에게 기대해야 할 것 같아요.”
 
  ― 소설가 김이석은 어떤 사람인가요.
 
  “김 선생은 조금 독특한 사람이에요. 이북에서 ‘단층’ 동인으로 활동했는데, 한 동인 슬하의 남매가 아버지 없이 할머니랑 이남에 왔어요. 게네가 수소문해 김 선생을 만났지요. 부산 피란민 시절부터 돌보기 시작했는데 사실, 김 선생도 재력이 없잖아요.
 
  남자아이는 어느 평양 출신 부자에게 맡겼는데 여자아이는 맡길 데가 없었어요. 고료가 나오면 얼마를 보태주곤 했는데 나와 결혼할 무렵이었죠. 고료를 1만원인가를 받았는데 내게 5000원, 그 여자아이에게 5000원을 주며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아저씨가 이제 가정을 가졌으니까 이제 도와줄 수 없다. 마지막’이라고요. 그 말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이중섭을 돌본 것도 이를테면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어요. 이중섭이란 인물은 돈 관리를 못 하는 거예요. 있으면 쓰고, 없으면 거지처럼 살고. 돈이 들어오면 쓰지 않고는 못 배겨서 써요. 쓰지 못했을 때의 그 처참함!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쓸 때의 그 우월감!
 
  이중섭이 제대로 (돈과 그림을) 관리할 수 있었다면 김 아무개가 그 옆에서 얼쩡거리지 않았겠지. 혼자서 못 하니까, 보통 사람은 피하니까, 피하는 상황에서 이 사람(이중섭)을 도와준 겁니다.”
 
 
  그는 내게 예술을 심었는데 나는 생업으로 붓을 들었다
 
박순녀 선생은 “남편 김이석이 내게 예술을 심었는데 나는 생업으로 붓을 들었다”고 말했다.
  ― 김이석 선생이 생전 이중섭 이야기를 많이 하셨나 봐요.
 
  “가끔씩 하더라고요.”
 
  ― 소설 속 이중섭의 탄식(‘죽음 뒤의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도 김이석 선생이 직접 들었다고 하던가요.
 
  “그건 모르겠는데…. 내가 지은 거겠죠. 하하하.”
 
  박순녀는 아직도 김이석을 예술지상주의자이며 인도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김이석은 그녀에게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쳐주었다. “해방이 되면서 우리는 모두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 거듭났지만 김이석은 그 속의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묘수를 가졌었다”고 회고한다. “김 선생은 사이비들, 가짜들을 너무너무 싫어했다”는 것이다.
 
  소설집 《이중섭을 찾아서》의 끝자락에 김이석에 대한 박순녀의 믿음, 변치 않는 사랑이 실려 있다.
 
  〈그(김이석)는 내가 어떤 땅에 어떤 척박한 조건으로 태어난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노력뿐이라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그는 내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어서 나는 3년 남짓 맹렬하게 책만 읽을 수가 있었다. 길을 잃어도 제자리로 돌아올 지표를 마련해준 것이다. 겉돌면서 산 나에게 스스로를 올바로 알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그가 내 곁을 떠나버렸다. 그는 내게 예술을 심었는데 나는 생업으로 붓을 들었다. 고통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346~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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