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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십니까

初代 청와대 새마을 담당 류태영 건국대 명예교수

“새마을운동 정신 변함없어… ‘박정희 지우기’ 움직임엔 유감”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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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닦이로 야간高 진학… 대학 졸업 후 농촌부흥운동에 투신
⊙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해 국비유학생 선발… 덴마크 國父 그룬트비의 국민운동 연구
⊙ 박정희 대통령, 류태영을 청와대 초대 새마을 담당에 임명…새마을운동 초석 다져
⊙ 동양권 학자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벤구리온대학 교수 역임… 한-이스라엘 가교역
⊙ 2002년 농촌청소년미래재단 설립… 가난한 학생 지도자로 키우는 일에 여생 바쳐
사진=조준우
  ‘초등학교’ 때 아침에 일어나면 온 동네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가사의 ‘새마을의 노래’였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작사·작곡의 이 노래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1960년대 출생의 기자는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뇌가 반응한다. ‘마당을 쓸어야 한다’는 생각에 싸리 빗자루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1969년 8월 초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에서 주민들의 자발적 수해 복구 현장을 목격한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새마을운동이 1970년부터 시작되면서 경상북도 청도군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發祥地)가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올해로 50년, 반세기를 맞았다.
 
  류태영(柳泰永·84) 농촌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은 새마을운동의 산 역사다. 류태영 박사는 덴마크 국왕 프레드릭 9세의 초청으로 덴마크를 거쳐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농촌 개발 모델을 연구해, 우리나라에 새마을운동을 정착시킨 선구적 인물이다.
 

  1972년 3월,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청와대 초대 새마을 담당이 됐다.
 
  지난 10월 29일 용인세브란스병원 인근 실버아파트에서 만난 류태영 박사는 보청기만 착용했을 뿐 건강한 모습이었다.
 
  류 박사는 기자에게 《유태인 부모의 가치관 교육》(두란노)이란 책을 내밀면서 “이스라엘 벤구리온대학에 재직하면서 유대인 부모의 독특한 자녀교육법과 학교교육을 눈여겨보면서 참다운 교육 사례들을 소개하고 싶었다”며 “실패가 자명한 성공 위주의 교육법에 매여 있는 우리나라 부모들에게 인성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혁명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학 교과서에 새마을 관련 글 실려
 
1954년 서울, 미군부대 구두닦이를 하며 야간고를 다니던 시절의 류태영. 사진=류태영
  — 1976년 중학교에 입학해 박사님이 쓰신 ‘새마을 정신과 새마을운동’ ‘덴마크의 부흥과 국민운동’ ‘조국을 다시 찾은 이스라엘의 정신력’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걸 기억하는구먼. 1972년 당시 민관식(閔寬植) 문교부 장관이 장학실장을 통해 중학교 교과서용으로 새마을 정신과 덴마크와 이스라엘의 국민정신에 대해 써달라고 하기에 써주었지요.”
 
  류태영 박사는 1936년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마을에서 류흥섭(柳興燮) 선생의 8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정직했으나 재산이 없던 그의 아버지는 머슴살이로 자식들을 키웠고, 굶는 날이 많았다.
 
  “일자무식(一字無識) 아버지에게 일자무식 처녀가 시집을 왔어요. 그런데 자식은 일자무식이 더 잘 낳아요. 8남매나 낳으셨으니까(웃음).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되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일하는 아버지가 자식들 밥 하나 제대로 못 먹이는 것을 보고 가난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로 형과 누나들은 학교 문턱에 가본 적이 없고, 저는 아버지가 여덟 살 때 국민학교에 넣어주었어요. 비록 아버지는 배우지 못했지만 자녀들에게 매사에 성실하고 거짓말하지 마라, 부지런히 노력하라, 즉 근면・정직・노력을 가르치셨습니다.”
 
  — 18세 때 상경해 구두닦이 생활을 하며 야간고(동양공고)를 다녔다면서요.
 
  “1953년에 고향 임실에서 엄병학(嚴秉學) 장로(5대 국회의원)의 입주 가정교사로 두 자녀를 가르치며 18세란 나이에 중학교를 들어가 졸업했어요. 이듬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대방동 미군부대 근처에서 구두닦이를 하는데, 처음으로 ‘유학’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유학을 가기로 그때 마음을 먹었어요. 야간고를 마치고 1957년 낙원동에 있던 건국대 법정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용복장학회를 운영하는 김용복(金龍福·87) 서울영동농장 명예회장이 동기생입니다. 김 회장은 단돈 7달러만 가지고 농부 4명과 함께 삽 4자루로 사우디 사막 한가운데서 ‘기적의 야채농장’을 일군 황무지의 개척자입니다.”
 
  해군정훈감을 지내고 대령으로 예편한 김건(金鍵) 축산대학 초대 학장은 류태영에게 “대한민국 농촌부흥운동의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려면 먼저 공신력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류태영은 농촌계몽가인 수필가이자 농학자인 류달영(柳達永) 박사, 한국성서대학을 설립한 강태국(姜泰國) 목사, 정남규(鄭南奎) 초대 농촌진흥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만남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진로를 개척했다.
 
 
  덴마크 국왕에게 무작정 편지를 쓰다
 
  강태국 목사의 권유로 류태영은 한국성서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는 이때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목사(사회운동가)의 서적을 읽으며 농촌 개발에 기독교 신앙을 접목하는 방법을 배웠다. 청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강태국 목사가 김용기(金容基) 장로(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와 함께 설립한 용인복음고등농민학교에서 1968년까지 약 2년간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꿈꿨던 유학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 덴마크를 유학지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류달영 박사의 1953년 덴마크를 둘러보고 쓴 《새 역사를 위하여》란 책에서 힌트를 얻었지요. 전쟁으로 황폐화한 덴마크의 농촌이 덴마크 중흥의 국부 니콜라이 그룬트비(Nikolaj Grundtvig)에 의해 세계적인 복지국가로 탈바꿈한 기록을 읽은 후 덴마크 유학을 결심했어요. 그룬트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흙을 사랑하자’며 박토(薄土)를 개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류태영은 덴마크로 무작정 편지를 쓰기로 했다. 우리나라 농촌에 관한 비참한 현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쓰고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난 자신의 소개서를 붙였다.
 
  “‘오직 내가 바라는 건 한국 농촌이 잘사는 것이다. 당신네 나라처럼 훌륭한 나라에 가서 배워가지고 우리 농촌을 잘살게 하는 데 내 인생을 바치겠다. 그것을 위해서 생활비와 전액 장학금을 좀 줄 수 없겠느냐’고 썼어요. 엉성한 영어였지만 나로선 최선을 다했어요.”
 
  — 어떻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나요.
 
  “오직 책 한 권을 읽고 감명받아서 행선지는 덴마크로 정했지만 덴마크에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덴마크에서 제일 높은 사람에게 보내기로 했죠.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프레드릭 9세 국왕이 덴마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백과사전엔 왕궁(王宮) 주소가 나와 있지 않았어요. 그렇더라도 덴마크 우편배달원이 설마 국왕의 집이 어딘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편지 겉봉에 ‘덴마크, 코펜하겐, 프레드릭 9세 국왕 폐하’라고 써서 보냈지요.”
 
 
  달랑 80달러 손에 쥐고 떠난 유학길
 
1968년 덴마크 유학 시절, 덴마크 왕국 교회부장관을 방문한 류태영. 사진=류태영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40일 뒤 답장이 왔다. 동양에서 온 편지에 감동한 국왕이 이 건을 행정부에 넘겼다는 국왕보좌관의 편지였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겠다’고 적혀 있었다. 덴마크 국왕이 편지 한 장을 통해 유학생을 초청한 역사는 당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여권을 내러 간 날, 외무부 과장이 류태영의 초라한 행색(?)에, 덴마크 정부의 초청장, 그리고 덴마크 외무부 장관의 사인 증명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는지 “어떻게 덴마크 국왕의 초청을 받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1968년 7월, 33세에 아내 이소영(李素英)과 큰딸을 남겨둔 채 달랑 80달러를 손에 쥐고 덴마크 유학길에 오른다. 그가 덴마크에 도착하자 현지 언론은 덴마크 정부 초청 최초의 한국 장학생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덴마크에 도착한 류태영은 덴마크어 어학코스를 이수하면서도 자신이 덴마크에서 무엇을 배워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100년 전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옥토를 빼앗겼지요. 덴마크 국민들은 실의(失意)에 빠졌고, 국가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어요. ‘돈도 기술도 의욕도 없었던 덴마크가 어떻게 선진국이 되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 비결만 배우면 우리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개월간의 최단기간 어학코스를 끝내고 그룬트비 목사가 추진한 국민운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노르딕농과대학(Nordic Agricultral College)에서 덴마크의 국민운동에 관해 2년간 공부하고 난 후, 여타 유럽 국가의 농촌부흥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는 덴마크 외무부에 “유럽제국(諸國)의 농촌정책을 비교시찰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덴마크 정부는 그의 엉뚱함에 처음엔 거부하다 마침내 그의 진정성에 탄복해 특별예비비 3만 달러를 편성했다. 독일, 프랑스, 베네룩스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등 주재국 덴마크대사관이 해당국과 교섭해 류태영에게 2개월 동안 유럽 국가들의 농업 기술과 현장을 견학하도록 주선했다.
 
 
  이번엔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편지
 
  류태영 박사는 “그 당시 덴마크는 복지국가로 이미 완성된 상태여서 실제로 농촌 유토피아의 발전을 경험해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며 “건축으로 말하자면 완성된 건물과 설계도만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류태영은 이번엔 실제 부흥운동이 진행 중인 이스라엘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류태영은 이번에도 이스라엘 대통령 잘만 샤자르(Zalman Shazar)에게 편지를 썼다. 이스라엘 외무부로부터 항공권·생활비·의료비·학비 등 모든 지원을 약속받은 그는 1969년 11월부터 1970년 4월까지 6개월간 텔아비브의 아프리카・아시아연구원(Afro-Asian Institute)에서 이스라엘 농촌개발과 농촌지도에 대해 공부한다.
 
  1970년 4월 귀국한 류태영은 한국성서신학교의 전임강사로 1년 남짓 ‘기독교 교육론’과 ‘덴마크 발전사’ 등을 강의하다 민중병원과 정치대학(건국대) 설립자인 유석창(劉錫昶·1900~1972) 박사를 만난다. 대학 시절 그를 아꼈던 기독교 사회운동가 이대위(李大偉) 박사(건국대 부총장 역임)가 그를 유석창 박사에게 소개한 것이다. 1971년 2월 첫 만남에서 유석창 박사는 류태영의 인생스토리를 2시간가량 듣더니, 박사도 교수도 아닌 그를 건국대 생활관장 서리(署理)로 특채(特採)했다.
 
  류태영은 건국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틈나는 대로 류달영 박사의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 농부들에게 덴마크 농촌 소식과 새로운 농업지식을 전수했다. 1970년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이천 지역에서는 ‘류태영식’ 새마을운동이 농민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농촌전문가 자격으로 KBS 라디오에 출연해 3년간 덴마크와 이스라엘의 농업혁명을 이야기했고, 청취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1970년대 초, 전국적으로 50년 만에 대 한발(旱魃)을 만나면서 농업 생산 구조가 무너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농민들의 못 살겠다는 비명이 높아만 갔다.
 
  1972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홍성철(洪性澈) 정무수석비서관(내무부 장관·대통령비서실장·통일원 장관 역임)에게 “농촌전문가를 모셔오라”는 특명(特命)을 내렸다. 홍 수석은 청와대 정무비서관 출신인 김태경(金泰卿) 경기지사에게 농촌전문가를 수소문했다. 김 지사는 때마침 새마을운동 바람이 일고 있는 용인·이천·여주 지역에 나가보라고 권했다. 홍 수석은 현장에서 농민들의 입을 통해 ‘류태영’이란 청년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 새마을사업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래서 청와대 홍성철 수석의 연락을 받은 건가요.
 
  “홍성철 수석이 곽종원(郭鍾元) 총장을 거쳐 내게 오전 11시경 전화를 걸었어요. ‘나 청와대 정무수석입니다’라고 하기에, ‘대통령이 수석(水石) 모으는 비서관도 두었나’고 생각했어요. ‘차를 보낼 테니 청와대에서 뵙기를 원합니다’라고 정중하게 이야기하는데, 거기에다 대고 ‘근무시간에 어떻게 나가느냐. 퇴근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죠. 결국 퇴근 후인 오후 5시에 차를 타고 청와대에 들어갔습니다. 자동차 내부의 카폰과 청와대 출입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그때 처음 봤습니다(웃음).”
 
  청와대 정무수석실 비서관들은 그에게 농촌 발전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다. 류태영은 자신의 농촌 경험 및 선진국의 발전 모델을 소개하며 우리나라 농촌 발전을 위한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했다. 오후 7시에 시작한 그의 ‘특강’은 자장면까지 시켜 먹어가며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 박 대통령은 언제 만났나요.
 
  “홍성철 수석이 이튿날 박 대통령께 보고를 올렸대요. 이튿날 정종택(鄭宗澤) 정무비서관(농수산부·정무1·환경부 장관 역임)과 함께 일과 시간 이후에 가서 박 대통령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덴마크 예를 들고 이스라엘 예를 들고, 우리나라 농촌에서 못 살던 경험과 머슴살이 하던 얘기 등 5시간 동안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대통령이 ‘내일부터 여기 와서 농촌운동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 학교에서도 농촌운동을 하는데, 어떻게 내일부터 여기에 와서 하느냐’고 했더니 ‘학교 사표 내라’고 하더라고요. ‘곤란하다. 어떻게 오늘 밤 10시에 사표 내고 내일부터 오겠느냐고…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알았다. 가라’고 하대요. 없던 일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12시 반이 됐어요.”
 
 
  초대 새마을 담당이 되다
 
  이튿날 아침 8시쯤 학교에 출근했더니 학교가 떠들썩했다. 유석창 이사장과 곽종원 총장이 학교에 나와 류태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져가지고 간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중앙정보부·청와대·문교부에서 전화를 걸어서 ‘내일 아침 류태영 선생이 출근을 하면 아무런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서 청와대로 보내라’고 했대요. 총장님이 그러더라고요. 사무인계고 강의고 아무 걱정 말고 지금 얼른 들어가라고요.”
 
  이튿날 새벽 청와대에서 유석창 이사장에게 특별히 부탁했고, 류태영은 졸지에 대통령 비서실 초대 새마을 담당으로 임명됐다. 비서동 지하 15평 정도의 공간에 새마을담당실을 만들었다.
 
  “그때 홍성철 수석 밑에 있었던 정종택 비서관과 함께 다니면서, 송언종(宋彦鍾) 장흥군수(초대 민선 광주시장·체신부 장관 역임), 한호선(韓灝鮮) 농협중앙회 지도과장(농협회장·국회의원 역임), 서정선(徐廷善) 농촌진흥청 연구원을 불러들여 시작한 게 새마을사업(새마을운동)이에요. 사람들 다 나만 쳐다봐요.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래서 덴마크에서 배운 것을 100% 써먹은 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 100% 써먹었다는 것이 ‘정신개조’예요. 온 국민의 정신을 개조해서, 농촌·도시·학교·군대·직장의 생활을 개선하고, 경제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1972년 3월 15일, 류태영은 농촌혁신운동인 새마을운동의 담당자로 임명됐고, 새마을운동 초창기의 핵심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류태영이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이야기한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은 박 대통령이 ‘근면·자조·협동’이란 세 가지 요소로 정리해 새마을운동의 표어로 삼았다고 한다. 새마을운동 표어는 현재 새마을운동본부 연수원 박물관에 박 대통령의 친필(親筆)로 보관돼 있다.
 
 
  국무회의 때 배석한 ‘류 박사’
 
  국무회의 때도 박 대통령은 일개 담당에 불과한 류태영을 꼭 배석시켰다. 경제부처에서 새마을 관련 예산을 처리할 때면 보고 자리에도 옆에 앉혔다. 대통령이 장관에게 정책을 지시하면 장관들이 류태영 담당에게 “각하의 뜻이 무엇이냐”고 찾아오겠다며 줄을 서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류태영 박사는 “한 번은 국무회의 때 대통령께서 말석에 앉은 내게 ‘류 박사~’ 하고 부르셨는데, 류혁인(柳赫仁) 정무수석이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대답하자, ‘임자 말고~’라고 해서 머쓱해 한 적이 있었다”며 “그 후 장관들이 박 대통령 목소리를 흉내 내며 ‘류 박사’로 부르는 바람에 별명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덴마크와 이스라엘에서 연구하고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적인 아이디어와 실행방안을 대통령에게 제안했는데,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관해 나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내 기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오죽하면 홍성철 정무수석이 ‘각하께서 정무수석인 나를 제쳐놓고 류 박사와 알아서 새마을 사업을 하셨다’고 공개석상에서 이야기를 했을까요.”
 
  —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담당관실을 꾸리고 어떤 일부터 손을 댔나요.
 
  “대통령께 건의하기를 측근에 있는 사람(비서관・행정관・경호관)들이 맨 먼저 새마을운동에 관한 정책 배경과 대통령의 뜻을 이해하고 솔선수범을 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사흘 후 대통령 특명으로 청와대의 모든 특별 보좌관, 수석비서관, 행정관, 경호실 간부들 250여 명이 지하 대강당에 모여 3시간 동안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았습니다.”
 
 
  청와대 식구부터 ‘새마을 전도사’로 만들기
 
새마을운동이 캄보디아에 처음 보급된 2007년 캄퐁트날 마을 주민들이 새마을 깃발 아래서 폭 3m의 진입로를 만들고 있다. 사진=조선DB
  류태영 새마을 담당은 그곳에서 새 국정지표의 하나인 새마을운동에 관한 정책기조와 정책방향, 그리고 계획된 사업내용, 추진방법 등을 발표했다.
 
  “내가 청와대 특강을 한 그날 저녁 오후 6시, 육영수(陸英修) 여사 초청으로 본관에 올라가서 대통령 가족들을 만났고, 밤 11시가 넘도록 대통령 내외분과 함께 대화를 한 것이 일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밤늦도록 피곤한 줄도 모르고 나라의 발전과 농촌, 농민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잘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선진국의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질문하는 데 한도 끝도 없었어요. 나는 이때 처음으로, 그분의 인간성과 지도자적 자질, 그리고 국가 지도자로서의 집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류태영 박사는 1972년 가을 광주에서 전국 지방장관 확대회의를 개최했을 때의 일을 기억하면 박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확산에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당시 관련 부처 장관·도지사·시장·군수 등 1000여 명이 광주체육관에 모였을 때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미 내 특강을 세 차례나 들은 분입니다. 새마을운동 초창기에 청와대 지하 강당에서 대통령과 가족들, 비서관들 앞에서 특강했고,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때 전 각료에게 했으니까요. 내게 광주체육관에서 열린 지방장관 확대회의에서 다시 하라고 하셨어요. 그럼에도 대통령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셨고, 그 때문에 다른 고위 공직자들도 이석(離席)하지 못했습니다. 국가 지도자로 이토록 철두철미하게 농촌과 농민을 생각하고 고민하며 국가 경제 발전에 낙후된 계층을 배려한다는 것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습니다.”
 
  — 새마을운동을 전 세계에서 벤치마킹하고 있죠.
 
  “유엔은 새마을운동을 바탕으로 한 ‘새천년마을계획’이라는 아프리카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할 만큼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기문(潘基文) 전 유엔 사무총장도 재임 시절,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워볼 것을 권고했습니다. 현재 해외 74개국으로 새마을운동이 수출됐고, 개인적으로도 18년간 37개의 미개발 국가와 개도국들을 상대로 가르쳤습니다. 중국도 18차례 방문해 중국 지도자들에게 강연하고 정책조언을 했습니다. 북한 함경북도를 방문하고 북한에 농촌개발을 위한 수많은 제안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기록물은 2013년 6월 18일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난중일기(亂中日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새마을운동에서 朴正熙를 지우려는 세력들
 
이스라엘 벤구리온대학 교수 시절 담당한 학생들과 함께. 가운데가 류태영 교수. 사진=류태영
  — 대한민국의 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시대정신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새마을운동의 정신은 초창기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시행방법을 현재의 사회구조, 문화수준, 생활수준에 맞게 재조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새마을운동이 가난하던 시절의 운동이기 때문에 소득 수준이 높아진 지금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분들은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모르는 분들입니다. 심지어 새마을운동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을 빼고 ‘흔적 지우기’를 시도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저개발국가들이 새마을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문화와 정신을 배우려는 우리의 훌륭한 정신적 자산을 포기하는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류태영 박사는 국내 최고의 이스라엘 전문가다. 1973년 3월 류태영은 청와대 새마을 담당을 1년 남짓 하다 박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새마을운동은 이미 기초와 틀이 잡혔고, 더욱 발전시키려면 이스라엘에서 더 연구를 하고 싶다”는 류태영의 이야기에 박 대통령은 흔쾌히 허락했고, 떠나는 류태영에게 “유학비에 보태라”며 전별금 300만원을 봉투에 넣어주었다.
 
  류태영은 이스라엘 히브리대학(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국비유학생으로 4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대학원에서 농촌사회학을 전공했지만, 유대인 친구들을 통해 유대인 사상과 탈무드 철학 또한 배웠다. 벤구리온대학에서 첫 동양인 교수로 재직하며 히브리어로 한국문화사를 가르쳤다.
 
  1978년부터 2001년까지 건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탁월한 연설가, 교육자, 학생들의 멘토였다. 한국의 수많은 대학생이 그가 이미 뚫어놓은 길을 따라 이스라엘로 유학을 떠나고 있다. 250명이 넘는 학생들이 그의 장학금 주선으로 해외 유학을 떠났고, 아시아 최초로 건국대에 히브리학과를 설립했다. 건국대를 졸업하고 이스라엘에서 공부한 50여 명의 학생들은 ‘건국 친구들’을 뜻하는 ‘건국 하베림’으로 한-이스라엘 친선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 키부츠와 모사브 협동농장 개념도 우리나라에 도입하셨는데, 현지에서 느낀 그들의 개척정신은 어떻던가요.
 
  “1969년 키부츠에서 이스라엘을 건국한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을 만났습니다. 조립식 주택에서 야전용 침대를 놓고 생활하고 있었어요. 그는 죽으면서 절대로 예루살렘 수도에 묻지 말라고 했답니다. 자신이 죽으면 문상(問喪)을 올 것이고, 이 깊숙한 사막까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 이 사막은 옥토로 바뀔 것이라고요. 결국 그가 묻힌 사막에 ‘세데 보케르(새벽 들판)’란 훌륭한 농장이 세워졌습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을 지낸 모세 다얀 장군 부부와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식사하다 빈 케첩통을 쓰레기통에 버렸더니, 모세 다얀 장군 부인이 그것을 주워 내용물을 꺼내먹는 것이었어요. 방위성금으로 600만 달러짜리 전차(戰車) 20대를 선뜻 기부한 분이었습니다.”
 
  류태영 박사는 현재 농촌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국가와 사회의 지도자로 성장시키기 위해 2002년 설립했다. 32권에 달하는 출판물 수입과 강연료로 모은 개인 자산 4억3000만원 및 후원회의 모금을 합쳤다. 류태영 박사는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며 “꿈을 잉태하면 해산할 날이 반드시 온다”고 했다. 5학년 때 마을에 교회가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껏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이 늙은 농촌개혁가는 ‘가난이 반드시 불행하지만은 않다’는 살아 있는 증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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