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 사람

前 독립기념관장 김능진이 말하는 親日 청산 어떻게…

“친일 청산도 반대파를 청산하겠다는 것은 정략”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정확히 功過를 따져 친일파를 가려내고 그 외의 경우는 과감히 통합, 화합, 용서해야 합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궁극적 친일 청산은 克日입니다.”

⊙ 최근 선친 김재명의 독립운동 행적 찾아내… 조부 김병우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 주도
⊙ “이승만의 過가 있다고 해서 그의 큰 功이 무시될 순 없어”
⊙ “‘친일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빌어먹었다’는 이야기는 맞는 얘기”
⊙ “우리 민족의 역량이 克日을 위한 방향에 맞춰져야 해요. 독립운동 정신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의 정신”

金能鎭
1949년생. 연세대 화학공학과, 서울대 대학원(경영학 박사) 졸업 / 충남대 교수·경상대학 학장, 미국 위스콘신대(매디슨) 방문학자, 일본 나고야대 객원연구원, 전국국립대 경영대학원장협의회 회장 역임 / 독립기념관장(2011~2014년), 광복회 이사 역임
김능진 충남대 명예교수. 뒤편 벽에 걸린 글씨는 김옥균이 쓴 ‘진충보국(盡忠報國)’.
  지난 7월 23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통령이 국부(國父)라는 주장에는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부는 괴뢰 정권인가”라는 박진 의원(국민의힘)의 질문에 “우리의 국부는 김구(金九·1876~1949)가 됐어야 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며 이같이 답한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늘 이념에 따라 나뉜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폭력적으로 해체시키고 친일파(親日波)와 결탁했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이란 호칭도 붙이지 않았다. 광복절 기념사 파장은 정치권으로 번졌고 국민 여론은 둘로 쪼개졌다.
 
  제9대 독립기념관장과 광복회 이사를 지낸 김능진(金能鎭·70) 충남대 명예교수는 최근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친일 미(未)청산의 수렁에 빠져 꼼짝달싹 못 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조각내고 국민을 편 가르는’ 친일 청산, 친일파 (국립묘지) 파묘 주장에 침묵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그에게 ‘한국 사회의 기저(基底)질환’인 친일 청산 문제를 물어보았다.
 
  지난 8월 24일 대전 서구에 있는 김 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거실 벽에 김옥균(金玉均·1851~1894) 선생이 쓴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글씨의 마력이랄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한참이나 응시했다.
 
  “어릴 때 거꾸로 ‘국보충서’라고 읽었어요.(웃음) 선친 김재명(金在明· 1896~1963)이 남기신 유품인데, 글씨가 좋다시며 당신이 오래 머무시는 곳에 늘 걸어두셨어요.”
 
 
  장롱 가득했던 書畫의 90%는 가짜
 
대구 남산병원장이자 한센병 사회사업가였던 김재명 선생. 오른쪽은 세브란스 의전 재학 당시의 모습이다. 벽안의 독립지사인 스코필드 박사 오른쪽이 김재명 선생(동그라미)이다.
  어린 시절 김 교수의 집에는 붓으로 쓴 글씨나 그림 등을 표구한 족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친이 세상을 떠나자 족자를 팔아 생활비로 썼다.
 
  “제 기억으로 조선 전기 문신인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글씨를 3000원에 판 적이 있는데 당시 3개월 치 고교 등록금이 800원 할 때였죠.
 
  큰 장롱 가득 서화가 있었고, 90% 이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나중에 알게 됐는데 아버지는 가짜인 줄 아시고도 흔쾌히 사셨다는 겁니다. 돈이 필요한 이를 도와주려 그러셨대요.”
 
  김 교수의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은 ‘굽히지 마라’와 ‘빌면 용서해라’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몸집이 작아 아버지한테 이런 당부 말씀을 들었는데, 학교에서 큰 녀석이 부당하게 굴어 싸웠고 힘으로 도저히 안 돼 귀를 물은 적이 있어요.(웃음) 그러나 상대가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줍니다.”
 
  ― 선친은 어떤 분이셨나요.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김재명은 세브란스 의전 졸업반이었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고향인 안동에 내려와 안동교회 장로던 아버지 김병우(金炳宇·1879~1936)에게 전달했다. 김병우는 그해 3월 18일과 23일의 안동읍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정부는 김병우에게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선친이 서울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안동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촉발시키셨으나 곧 만주로 도망쳐 옥고를 치르진 않으셨죠. 대신 조부가 징역형을 선고받으셨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이 하신 일에 대해 늘 말씀이 없으셨어요.”
 
  잠시 침묵하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안 좋아합니다. 대개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그분을 안 좋아해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좋아하기 힘들어요. 일제강점기 때 밀정(密偵) 노릇을 하다가 광복 후 경찰이 된 사람이 많아요. (이 전 대통령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으니 세상이 바뀌어도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기를 못 펴고 살았어요.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요.”
 
  김능진 교수는 놀랍게도 최근에 와서 일제강점기 당시 선친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독립지사 김병우의 3·1운동 행적
 
  지난해 8월 15일 출간된 《소설 의열단》(정만진 著)에는 김병우의 3·1운동 당시 행적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이 책은 대구시 선정 ‘2019 올해의 책’이었다. 3·1만세운동에 참가한 김병우는 2년형, 그의 동생 김재성(金在成·1897~1982)은 6개월형, 처남인 유후직(柳后稷·1894~1956)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다음은 《소설 의열단》 중 일부다.
 
  〈… 3월 18일 정오 무렵 기독교인 30여 명이 안동 삼산동 곡물전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곧이어 손기식 등 유림들도 합세했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 14명이 끌려가고 군중은 흩어졌다.
 
  오후 6시쯤 기독교인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재차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참여 인원은 점점 늘어 19일 0시50분경에는 2500명이 되었다. 당시 안동 인구가 5502명이었으니 노약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면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사격으로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23일 오후 7시30분쯤 3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은 안동면 인근의 주민들까지 가세해 시위대가 3000명을 넘었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법원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일제 군경이 실탄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30여 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138쪽)
 
  당시 안동 일원에서 모두 14차례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애국지사 중에 유독 경북 안동 출신이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김능진 교수의 말이다.
 
  “안동은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죠. 선비정신이 애국으로 승화되었다고 할까요? 고루한 동네지만 지킬 것은 확실히 지켰고 3·1운동 때 가장 격렬히 저항했어요. 한편으론 안동의 3·1운동을 교회가 주도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에요. 제 조부는 안동교회를 설립했고 교회 장로셨죠. 올해 교회 창립 111주년이 됩니다.”
 
  100년 만에 드러난 아버지의 행적
 
김능진 교수의 조부인 독립유공자 김병우 선생. 화가 이인성이 그린 초상화다.
  계속된 김능진 교수의 말이다.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의열단 단원인 서상락(徐相洛·1893~1923) 선생이 계셨어요. 일경을 피해 도망 다니다 당시 대구 동산병원 의사던 아버지 집을 야밤에 담을 넘어 찾아왔다고 합니다. 앞서 그날 오후 미리 담을 넘기로 약속을 해두었는데 그 메신저 역할을 선생의 어린 조카가 했대요.”
 
  ― 놀랍네요. 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진실은 밝혀지나 봅니다.
 
  서상락(본명 서영윤)은 김재명에게 ‘총독부 등을 폭파할 계획 아래 여러 동지와 함께 국내에 잠입했다 실패, 피신 중 잠시 몸을 숨겨야 하니 편의를 보아주기 바라오’라고 쓴 쪽지를 보냈다. 그러자 김재명은 ‘깊은 밤에 담을 타 넘어 들어오시오’라는 답신을 썼다고 한다.
 
  심야에 월장해 들어오라는 김재명의 말은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하는 노련한 답신이었다. 혹여 밀정이 주변에 있어 서상락이 담을 타 넘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더라도 그냥 도둑으로 여길 터이니 말이다. 의열단과 같은 독립지사가 캄캄한 야음을 틈타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상상 밖의 일인 까닭이었다.
 
  “서상락 선생이 선친을 찾아갔을 때 조부(김병우)는 수형 생활 중이었다고 합니다.
 
  한동안 선친의 집에 숨어 있던 선생이 중국 지린(吉林)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을 때 선친은 위험한 가운데 잘 숨겨주고 후한 군자금까지 마련해주었다고 해요.”
 
  서상락 선생은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독일까지 갔던 인물이다. 그러나 김재명의 집을 떠나고 3년 뒤인 1923년 5월 28일 서른 살 젊은 나이에 괴한의 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서상락 선생이 떠나고 선친의 집에 종종 독립지사들이 찾아왔어요. 아버지의 병원 입원실과 시체안치실에 숨어들었던 거죠. 또 선생의 형인 서영로(徐永魯·1887~1969)와 선친이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다고 해요.”
 
  김재명은 1920년부터 1930년까지 10년 동안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했고, 1931년부터 1963년까지는 남산병원을 설립해 병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남산병원은 지금의 대구 계산오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병원 입원실과 시체실에 은신한 독립운동가들
 
1939년 김병우 선생 사갑제(死甲祭·돌아가신 분 환갑 제사) 잔치에 모인 가족.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부친 김재명 선생,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삼촌인 독립유공자 김재성 선생.
  서영로·상락 형제와 김재명 사이의 비밀스러운 일은 주로 서영로의 딸이 처리했다. 그 딸은 뒷날 자신이 직접 겪고 본 일들을 후손에게 종종 들려주었다고 한다. 서상락의 양손자 서일환과 서영로의 외손자 최기현 등은 지금도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증언하고 있다.
 
  예컨대 서상락이 일제 추격을 피해 김재명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가 안전하게 중국으로 돌아간 일은 물론이고, 만주 등지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이 남산병원의 입원실과 시체실 등에서 은신도 하고 회의도 한 일, 언젠가 일제가 병원을 수색하는 바람에 독립지사가 관에 들어가 주검인 척 위장하여 밖으로 탈출한 비화 등은 모두 그 후손이 증언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김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이 놀라운 이야기가 소설가 정만진의 손을 거쳐 최근 《소설 의열단》(국토 刊)이란 제목으로 출간됐어요. 선친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실려 있죠.”
 
  서영로 선생은 당시 대구 지역에서 실질적인 독립운동 세력의 좌장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시기였는데, 낮이면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이, 밤이면 구명 로비를 하려는 친일파들이 계속 찾아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대구 지역의 친일파 거물 박중양(일명 박작대기. 지팡이를 짚고 다녀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이 밤에 자주 찾아와 구명 청탁을 했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서영로는 아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물론 김재명과의 일화도 알리지 않았다. 서영로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편지나 쪽지 등을 보는 즉시 불에 태워 증거를 없앴다. 덕분에 그는 일제의 끈질긴 추적에도 한 번도 적발되지 않았다고 한다.
 
  ― 친일파 문제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
 
  “정치꾼들이 자꾸 친일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야기해요. 도무지 쓸데없는 일이야…. 마치 조선시대 3년상(喪)이니 5년상이니 싸울 때처럼 말이죠. 이 나라에 무슨 득이 됩니까.”
 
  ― 김구와 이승만, 어느 분이 건국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나요.
 
  “김구 선생님은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을 잡았고 정치를 잘못해 쫓겨난 측면도 있으니, 이런저런 것들이 섞여 자꾸 이야기를 만들고 있어요.
 
  축약된 현대사가 혼란의 원인이 아닐까요. 6·25라는 공산주의 위협이 없었다면 우리도 그런 일그러진 역사를 갖지 않았을 겁니다. 이승만의 과(過)가 있다고 해서 그의 큰 공(功)이 무시될 순 없어요. 평가는 상이할 수 있으나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역사에 남을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 안익태의 애국가도 친일 논란의 중심에 있어요.
 
  “안익태(安益泰·1906~1965) 때문에 애국가를 부르는 게 아닙니다. 애국가는 이미 국민의 마음속에 애국심으로 깊이 각인된 상징물이죠. 일제강점기 당시 미주 한인회가 건의해 임시정부에서 애국가로 결정한 겁니다. 애국가를 부르며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했어요. 역사성이 있는 국가(國歌)입니다. 이해찬 총리 시절에 안익태 선생의 부인에게 훈장을 주기로 약속하고 추진한 일이 있지 않나요? 오히려 보훈처 심의위원회의 부결로 서훈이 무산된 적이 있었죠. 차라리 이게 더 나은 처사일지 모릅니다. 제발 정치인들은 이 문제에서 빠져주세요.”
 
 
  “김원웅은 광복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자”
 
김능진 교수의 부모님. 김재명 선생과 김이남(金二南) 권사.
  김능진 교수는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전공을 바꿔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이후 충남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해왔고, 기술경영과 생산관리 분야를 주로 가르쳐왔다. 2011년부터 3년간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직했다.
 
  “우리나라 민심의 흐름이 이념에 따라 보수와 진보로 나뉘었지만 합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가 뭐냐, 독립운동 정신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독립운동 정신이야말로 통합의 정신입니다. 양반, 상놈, 부자, 빈자, 종교, 남녀 다 초월합니다. 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반도의 20세기 100년을 되돌아보면 너무도 넘기 힘든 4개의 큰 산맥을 넘었습니다. 큰 산맥을 역사적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일본 제국주의, 공산주의, 빈곤, 권위주의 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들 도전 하나하나가 극복하기 힘든 엄청난 과제들이었는데 불과 1세기의 짧은 기간 동안 그런 엄청난 도전들이 연속적으로, 때로는 동시대에 복합적으로,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이루어졌던 것이 우리가 지나온 현대사입니다.
 
  압축된 역사를 거치며 이긴 세력들이 다 같이 공동체에 살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인정 안 해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일제와의 투쟁도 위대하였으나 공산 침략이나 민주화를 위한 싸움도 일제와의 투쟁 못지않게 위대한 전쟁이었어요. 산업화를 위한 투쟁, 빈곤과 싸운 것도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서로가 인정을 안 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웁니다. 김원웅 사태를 겪으며 우리 독립운동 세력들도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민주화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데 너무 기세등등해요. 교만하다고 생각해요.”
 
  ― 김원웅의 광복절 기념사에 동의하지 않는 독립운동가 집안도 많을 것 같아요.
 
  “광복회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모임입니다. 회원들의 생각은 여러 가지 현안문제에 다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광복회장이 한쪽의 극단적인 부류의 생각을 전 국민 앞에 공표하는 것은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극단적인 관점에서 선동으로 일관해 국민 마음에 상처만 안겼어요.
 
  광복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나라에도 짐만 되었어요. 광복회 회원의 한 사람으로 국민에게 송구한 마음입니다.”
 
 
  “지금도 파묘가 진행 중”
 
  ― “친일 매국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살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빌어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맞는 얘기죠. 맞는 얘기인데 이제는 국력이 커져서 꼭 맞는 말은 아니에요. 물론 못사시는 분의 숫자가 훨씬 많죠. 가난으로 말미암아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측면이 있어요. 이런 부분을 정부가 정교하게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그런 예산을 많이 풀었어요.”
 
  ― 그런 예산이란….
 
  “예를 들어 그전에는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밑에 장자 한 분만 연금 혜택을 받았는데, 그 혜택의 일부를 가문을 위해 쓰면 바람직하지만, 대개는 그렇게 하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손 중에 생활고를 겪는 분들에게 국가 예산을 지원했어요. 예산 중 일부는 광복회가 친일파 재산을 환수해 조성한 기금 200억원이 포함돼 논란이 있었습니다.”
 
  ― 판사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이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친일파들의 묘를 현충원에서 파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 친일파 파묘 주장이 확산됐습니다. 국가기관 조사 기준 친일파 11명이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고 합니다. 친일파 파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지금도 파묘가 진행 중입니다. 코로나19 전만 하더라도 이틀에 한 번은 대전현충원을 찾아가 둘러보았는데 분명히 묘가 있던 자리가 빈터로 변한 경우를 확인할 수 있었죠.
 
  과거 친일 행적에 대한 데이터베이스화가 상당 부분 진척이 됐어요.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실린 조그마한 1단 기사도 확인이 가능해요. 과거엔 모르고 서훈을 했다가 나중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 훈장이 취소되고 국립묘지에서 파묘를 합니다.
 
  문제는 친일을 했으나, 다른 업적이 있는 분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공산당과 싸워 공을 세운 분들, 예를 들어 백선엽 장군의 경우 친일은 맞지만 젊을 때 한 일이고 6·25 때는 사령관으로 나라를 구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문제를 정략적으로 논하지 말고 좀 더 긴 역사로 봐야 합니다.
 
  만약 백선엽 장군을 파묘한다? 군인들이, 군 출신 인사들이 그냥 있겠습니까. 정말로 정략적으로, 정치적으로 결정해선 안 됩니다.”
 
 
  독립운동의 성지, 大邱
 
1999년 일본 나고야대 객원연구원 시절의 김능진 교수와 아내 이은희 여사.
  김 교수는 현재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구는 인구 대비 독립운동가 배출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서울의 1.6배, 부산의 3배, 인천의 5배다. “그런데 대구 사람들이 이런 자랑스러운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1925년 당시 경성(서울) 인구는 34만2625명, 부산은 10만6642명, 대구는 7만6534명, 인천은 5만6295명이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당시 독립운동으로 훗날 유공자가 된 이는 서울 427명, 부산 73명, 대구 159명, 인천 22명이었다.
 
  “대구에는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 사령부가 여러 개 있었어요. 대한광복회는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됐고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國債)를 국민 모금으로 갚기 위해 전개된 국채보상운동도 대구에서 시작됐습니다.
 
  1920년대 무장 항일 결사의 상징인 의열단이 창립될 때 최초 10명 단원 중 3명이 대구 일원의 지사들이었죠. 의열단 창립 초기 군자금을 조달한 지사도 대구 사람 이종암이었습니다. 호남·충청·경상도 등 삼남(三南)의 애국자 176명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어요. 이는 서울 서대문형무소(175명)보다 많은 수입니다.”
 
  ― 대구형무소 자리는 어디입니까.
 
  “대구 삼덕교회 백주년기념관 자리입니다. 삼덕교회는 대구형무소 사형장 터에 벽을 세우고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기려 ‘내가 죽어 다른 이를 살리는 십자가 정신’이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삼덕교회) 근처에서 셋방살이를 했어요. 두 칸짜리 함석집에서 1년 반을요.”
 
  대구는 국채보상운동 주역 서상돈,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 명성황후 시해 후 최초로 창의(倡義)한 문석봉, ‘광야’의 시인 이육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최연소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 중 순국한 구찬회 등 무수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다.
 
 
  “친일 청산하되 통합, 화합, 용서해야”
 
독립유공자 후손인 김능진·이은희 부부와 손자 손녀들.
  ― 지금이라도 친일 청산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2001년 광복회가 ‘친일민족행위자 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죄상을 조사해 사초에 남기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반민특위의 선정 기준을 그대로 적용했는데, 반민특위 간부를 포함해 12명 위원에 전원합의제로 운영됐어요.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희선·김원웅 씨도 위원 중 한 사람이었죠.
 
  광복회장이 윤경빈(尹慶彬·1919~ 2018)씨였는데, 고(故) 김대중(金大中·1924~2009) 대통령의 장남인 홍일씨의 장인이었죠. 광복회장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당시 심의위는 반민특위에서 선정한 처벌대상자와 비슷한 수인 692명을 선정했지요. 그러나 정치인들의 반대로 (친일민족행위자 선정이)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자기네들이 넣기 바라는 이가 빠졌다는 이유였죠.
 
  친일 청산도 반대파를 청산하겠다는 식이면 정략입니다. 정확히 공과(功過)를 따져 친일파를 가려내고 그 외의 경우는 과감히 통합, 화합, 용서해야 합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느끼는 궁극적 친일 청산은 극일(克日)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량이 극일을 위한 방향에 맞춰져야 해요. 독립운동 정신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의 정신이니까요.”⊙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011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신협중앙회 여성조선 공동 주최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