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孔魯明 전 외교부장관의 대한민국 외교 50년 (下)

全斗煥 대통령, ‘안보 경제협력 차관’ 명목으로 日本에 100억 달러 요청

정리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6·3 사태 당일 워싱턴서 귀국해 亞洲局 출근… 중학 동기 廉普鉉 마포서장 부상
⊙ 구보타 妄言으로 한일회담 4년간 표류… 親韓인사 기시, 야쓰기 특사 통해 관계 회복
⊙ 포철 건설하려는 朴正熙, 가네야마 주한 대사에게 “사토 총리에게 答 없으면 올 필요 없다”고 말해

孔魯明
⊙ 82세. 서울대 법학과 졸업. 英 런던대 정경대 연수.
⊙ 동북아 과장, 아주국 심의관, 아주국장, 정무차관보, 주브라질 대사, 뉴욕 총영사, 주러시아 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 주일본 대사, 외무부장관(제25대), 한일포럼 회장,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 세종재단 이사장 역임.
⊙ 現 동서대 석좌교수,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1964년 5월말, 나는 워싱턴 주미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일주일간의 휴가를 보낸 뒤 외무부 아주국 동북아과로 출근했다. 당시 동북아과는 한일회담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해 3월 24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돼 전국적으로 확산 일로에 있었다.
 
  이 시위는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을 전후해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탄생한 이후 이듬해 12월 3일부터 65년 6월 22일까지의 약 7개월 동안 한일회담의 마무리를 위한 제7차 한일회담이 개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60년대 빈곤에서 벗어나 조국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선행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굳은 신념에서 국교정상화는 후세의 역사적 판단에 맡기고, 소신을 갖고 국교정상화를 실현하자”는 뜻으로 김동조(金東祚) 전 차관(정몽준 의원의 장인)을 주일대표부 대사 겸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동원(李東元)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외무부장관으로 기용했다.
 
  내가 동북아과에 출근한 날이 하필이면 ‘6·3 사태’가 일어난 그날이었다. 6월초 공화당 김종필(金鍾泌) 의장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 3일 정오를 기해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정오,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 시내 1만2000명의 학생들은 경찰과 충돌을 벌이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학생들이 거리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나는 구총독부 건물 4층의 중앙청 동북아과 사무실에서 시위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검정 제복을 입은 대학생들로 광화문 네거리는 새카맸고, 시위대의 “우~웅” 하는 함성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대학생 7000~8000명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 중앙청 앞의 바리케이드는 이미 무너졌고, 경찰은 청와대로 올라가는 통의동 앞에 저지선을 만들어 놓았다.
 
  얼마 후 경찰병력을 태운 GMC 트럭 대여섯 대가 청와대에서 광화문 쪽으로 향했다. 트럭 위 화물칸에는 직경 2m가 넘는 대형 선풍기가 실려 있었다. 경찰들에게 “선풍기의 용도가 뭐냐”고 하니, “최루탄을 쏘고 나서 선풍기로 시위대를 향해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금 있으니 트럭들의 엔진소리가 중앙청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트럭 위에는 경찰 대신 학생들이 잔뜩 타고 있었고, 이들은 중앙청 앞까지 진출해 철봉으로 만든 가슴 높이의 중앙청 담장을 단숨에 뛰어넘어 갔다.
 
  다급한 경찰은 중앙청 건물 뒤에서 재편성을 한 다음 저지에 나섰다. 서양 궁궐들의 성곽(城郭)이 군사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중앙청 문을 닫아 걸으니 철옹성(鐵甕城)이 되는 것이었다. 경찰은 중앙청 안에서 재편성해 학생 시위를 진압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나의 경기중학 동기인 염보현(廉普鉉) 당시 마포경찰서장(서울시장 역임)도 있었다. 그는 후에 시위대의 돌에 맞아 정강이뼈가 보일 정도의 부상을 입고 경찰병원으로 후송됐다.
 
 
  김종필-오히라 메모 공개 요구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도쿄에서 회담을 갖고있는 모습. 이들은 이날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했다. 오른쪽 사진은 김-오히라 메모 원본.
  그날 오후 8시 일몰(日沒)이 되면서 박 대통령은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해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정시켰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시위가 금지됐다.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 오던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이 사임했다.
 
  당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이명박(李明博) 이재오(李在五) 손학규(孫鶴圭) 김문수(金文洙) 안상수(安商守) 김덕룡(金德龍) 이정일(李正一) 홍준표(洪準杓) 등 200여 명의 6·3 동지회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외무부장관실로 몰려와 “박정희 정권은 여론을 무시한 채 3억 달러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한국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平和線)’을 일본에 내주기로 작정하고 있다”면서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1962년 10월 20일과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무장관 사이에 합의한 문건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학생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합의”라며 대단한 이면합의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장관은 2장짜리 메모를 공개해 의혹을 풀기로 했던 것이다. 김-오히라 메모라 불리는 이 합의에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를 10년간에 공여하며,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일본 측이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김-오히라 메모는 우리 동북아과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김정태(金正泰) 당시 동북아과장(인도대사 역임)이 메모지를 들고 정일권(丁一權) 외무부장관에게 다녀왔다. 김 과장은 “정일권 장관과 학생대표를 만나 메모를 보여주었다”면서 “김-오히라 메모에 의혹을 갖고 있던 학생들이 메모를 보고는 허탈해했다”고 전해 주었다. 일본 문구업체인 고쿠요 수첩에 연필로 적은 메모는 지금 서울 서초동 국립외교원 사료관에 있다.
 
 
  일본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온 平和線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이승만(李承晩) 정부 들어 시작된 한일 간 국교정상화 회담을 회고해 보면, 첫 회담부터 가시밭길이었다. 한일회담 개최는 미국의 대일강화조약 체결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대륙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이듬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등 공산세력이 기승을 부리자, 미국은 일본을 동맹으로 삼기 위해 대일강화조약을 서두를 필요성을 느낀다. 미 국무성은 1951년 3월 20일 한국 측에 대일강화조약 시안을 제시하고 이를 검토한 후 한국 정부가 요구할 사항이 있을 경우, 제시하도록 요청해 왔다.
 
  한국 정부는 한국이 대일강화조약 당사국의 일원이 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일 선전포고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연합국과 제휴해 싸운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9월 30일 대한민국 정부의 첫 시정연설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주의의 완전한 포기와 민주주의 국가 재건을 엄중히 선언하고, 앞으로 한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강화조약에 참가할 것을 연합국에 요구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이 대통령은 공화당 외교정책의 대변인이며 대일강화조약 체결 교섭의 책임을 지고 일본을 왕래하던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을 1950년 6월 17일 서울에 초청하고, 한국의 서명국 자격 획득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 국무성은 “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정식으로 전쟁 상태에 들어가지 않았다”며 전쟁 당사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옵서버’로 초청했다.
 
  대일강화조약의 당사국으로서의 참가가 좌절된 한국 정부는 미국 측 요청에 따라 강화조약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 측은 한국 측 의견의 일부를 채용하고, 그 결과를 대일(對日) 평화조약안이 공표되기 직전인 1951년 8월 31일 한국 측에 통고해 왔다. 이에 따라 한국은 이 조약의 한국독립 승인(제2조), 청구권 포기(제4조), 어업협정교섭(제9조), 최혜국 대우(제12조) 등의 이익을 받기로 제21조에서 규정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항은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한국 정부는 제2조의 영토규정과 관련해 초안에는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가 한국 영토에 포함돼 있었으나, 독도가 빠져 있어 이의 명기를 요구했다. 둘째, 시안 제4조 A항에서 한국 내 일본 국유 공유 사유재산 및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그들의 청구권도 특별협정으로 처리한다고 했다.
 
  그러나 재한 일본인 재산은 미군정이 군정법령 제33호로 귀속시킨 후, 한국 정부수립 직후 ‘한미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으로 한국 측에 이양한 것이므로, 남한 정부는 일본과의 별도 협정 체결을 거부하고 강화조약문에 완전한 한국 권리 획득 조문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조약 제4조 B항으로 이것이 명문화됐다. 하지만 후에 일본이 제1차 한일회담에서부터 재한 일본인 재산 권리를 청구해 제4차 회담에서 스스로 철회할 때까지 이슈로 남게 된다.
 
  셋째, 맥아더 사령부가 1945년 9월 27일 일본의 남획을 방지하고자 어로금지선인 ‘맥아더 라인’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 해역에서 한국의 연간 총 어획고의 절반인 14만톤을 잡고 있었다. 이에 일본의 독립과 맥아더 라인이 없어지는 것에 대비해 한국 정부는 인접 수역에 대한 주권선언을 통해 속칭 ‘평화선(일본은 李라인이라고 부름)’을 설치했다. 평화선의 존재는 한일 간의 현안 해결과 국교정상화에 소극적이던 일본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온 요인이 됐다.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는 강화조약의 법 조항에 대해 일본과 직접 교섭의 필요성도 있고,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수립을 위해 평화조약 발효 이전에 양국 간 현안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 내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의 알선으로 일본 정부와 1951년 10월 20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내의 회의실에서 최고사령부 외교담당 국장인 윌리엄 시볼드(William Sebald)의 주재하에 처음으로 대면했다. 이 회담은 그 후 7차까지 횟수를 거듭해 가며 1965년 한국과 일본이 제 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14년간이나 이어진 지루한 회담의 첫 출발이었다.
 
 
  구보타 妄言
 
1955년 12월 1일 부산에서 在釜 수산단체가 ‘평화선 사수 어민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시위 군중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백만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자’라고 씌어있다.
  1953년 10월 6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제3차 한일회담은 그해 9월까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 70여 척을 나포한 상태에서 열었다. 일본 측은 어업 문제, 청구권 문제를 조속히 해결할 용의가 있다며 회담을 다시 열자고 했으나,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수석대표의 망언(妄言)이 돌출하는 바람에 이 회담마저 중단되고 만다.
 
  구보타는 우리 측 홍진기(洪璡基) 대표를 향해 일본의 강화조약 체결 전 한국 독립은 국제법상 위반이며, 36년간 일본 식민지 지배는 한국민에게 유익한 것도 있었다는 요지의 망언을 했다. 이에 한국 측은 발언 취소를 요구했으나 일본 측이 응하지 않자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회담은 4년이나 표류하게 된다.
 
  미국은 한일회담 재개를 위해 집요하게 조정을 했고, 급기야 1954년 7월 27일 이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이 분노를 터뜨리는 사태로 발전한다. 이날 오전 10시 백악관에서 열린 제1차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일 국교정상화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이 대통령은 “구보타처럼 망언을 하는 일본과 어떻게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느냐”고 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과거는 여하튼 양국 국교정상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내가 재임하는 한 일본과의 수교는 없다”고 단언했다.
 
  일본에서는 하토야마 내각이 물러가고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내각이 탄생했으나 2개월도 되지 않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에게 정권이 이양된다. 기시는 총리로 취임한 당일인 1957년 2월 25일, 보수정객 야쓰기 가즈오(矢次一夫)의 주선으로 유엔 총회 참석 후 귀국길에 있던 김동조 정무국장을 롯본기(六本木)의 외상 관저 뒷문으로 불러들여 비밀리에 면담한다. 기시 총리가 막 천왕을 만나고 나와, 그의 외상 관저 앞에는 취재진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1953년 한일회담 일본 측 수석대표였던 구보타 간이치로 외무성 상담역(왼쪽)이 김용식 한국 측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기시 총리는 이 만남에서 “귀국하면 양국 관계에 대한 나의 의견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해 냉각된 양국 관계를 타개하도록 부탁한다”고 했다. 기시는 또 “나는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신으로 이곳의 하기항(萩港)은 도쿠가와(德川) 시대부터 대한 무역선이 빈번히 출입하던 항구로, 내 혈통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정도”라며 “나는 일본의 과거 식민통치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며, 조속히 양국 관계 정상화에 노력할 각오이니 이러한 나의 의중을 이 대통령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대통령은 이 뜻을 전해 듣고 기시 총리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반성한다는 데 만족하면서 “그 사람은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한국을 제대로 보는 인물인 것 같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기시 총리의 생일인 그해 3월 26일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우호적 분위기 속에 1957년 5월 제4차 회담을 위한 예비교섭이 개시됐고, 일본 측이 대일 청구권을 처음으로 인정했으나 이 대통령은 회담 재개에 관한 합의문 조인 직전에 자구(字句) 수정을 이유로 재가를 미룬다.
 
  그리고 5월 하순 김유택(金裕澤) 주일대사 임명식에서 “적어도 40세 이상의 한국인들이 다 죽은 후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된 국교정상화가 불가능하다”며 “김 대사는 듣고만 있고 본국 정부에 보고만 하면 족하니 나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말라”며 타결을 뒤로 미뤘다. 이는 일본 측이 재산청구권 주장을 철회하고 한국 측만이 대일(對日) 재산청구권을 논의한다는 내용의 합의 표현을 넣기 위해서였다.
 
  사실, 한일 청구권 문제는 1952년 제1차 한일회담 당시 일본 측이 한국의 청구권 주장에 대항해 대한(對韓) 재산청구권을 주장했을 때, 미국 측에 대일강화조약 해석을 의뢰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강화조약 제4조 B항에 의해 주한 미군 정부의 관계법령 및 처분에 의해 한국 관할권 내의 재산에 대한 일본인의 모든 권리, 권익 및 이권이 박탈됐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면서 “그러나 미국은 한일 양국이 미 군정부에 의한 재한 일본 재산 처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는 위의 해석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 측은 해석각서에서 모호한 해석을 한 것이다.
 
  일본은 이를 대일강화조약에서 대한 청구권 권리와 청구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권리와 청구권은 효력을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했고, 새로 외무장관으로 취임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郞)는 외무성 내 강경론자의 후원을 얻어 기시 총리의 대한 청구권 주장 철회에 제동을 걸었다. 또한 후지야마 외무장관은 구보타 망언 취소에도 강경한 주장을 해 기시 총리와 충돌했다. 그러나 부산에 억류된 1000여 명의 불법어로 일본인 어부 문제 때문에 일본은 구보타 망언 취소에는 동의한다.
 
  결국 양측의 예비교섭은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57년 12월 24일 억류자 상호 석방에 관한 각서, 구보타 발언의 정식 취소, 일본의 대한 재산청구권 주장 포기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에 대해 《마이니치신문》은 “일본이 한국 측에 항복문서를 쓴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박정희, “옳고 그름은 후대 역사에 맡기자”며 한일수교 결단
 
1961년 11월 11일 일본 총리 관저 만찬회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담소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가운데). 왼쪽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군사혁명정부는 쿠데타에 대한 국제적 이해와 지지의 획득,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대외 경제협력의 강화와 대일 현안 해결, 해외 동포의 지도보호 등의 주요 외교목표를 시정(施政)의 주안으로 삼았다.
 
  군사정부는 우선 외무부를 증강 개편하고, 외교 요원을 추가 충원한다. 군사혁명정부는 쿠데타로 중단된 한일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1961년 10월 20일에서 1964년 4월까지 제6차 한일회담을 개최한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과 조건으로 현안을 해결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기한다는 기본방침을 밝힌 군사혁명정부는 과거 5차례의 회담이 사무적 절충에 치우쳐 진척을 보지 못한 경위에 비추어 정치적 절충도 병행하기로 했다.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 간에 열린 회담에서 양측은 조속한 시일 내에 현안을 해결해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으나, 실무 절충에 있어서는 여전히 진전을 볼 수가 없었다.
 
  이 무렵 이케다 총리는 7월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재선돼 정권의 안정 기반을 다짐에 따라 한일회담 추진에 적극성을 보이며, 한국의 군사정권을 상대로 양국 간 현안을 타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은 청구권 카드의 윤곽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첫째, 정부 대 정부의 청구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 청구권만으로 우편저금, 보험, 은급(恩級·일제 강점기의 年金) 등의 미지급분으로 7000만 달러를 계상한다. 둘째, 경제협력 명분으로 무상원조 1억 달러 규모를 제공한다. 셋째, 기타 한국의 5차 5개년 계획 협력을 위해 장기 저리(低利) 차관을 제공한다. 넷째, 한국 정부의 청구권 관장 범위를 38도선 이남으로 국한하되, 협정에는 이를 기록하지 않는다.
 
  1962년 10월 20일과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 사이에 청구권 문제를 합의하고, 이 타결로 교섭의 초점은 평화선과 어업 문제로 옮겨가게 된다. 나는 당시 워싱턴에 근무 중이었는데, 김종필 부장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초청으로 워싱턴 방문길에 일본에 들렀다.
 
이승만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9년 12월 14일 975명의 재일교포 북송 1진이 니가타항을 출발한 이래 1984년 북송 종료시점까지 약 187차에 걸쳐 9만3340명이 북으로 떠났다. 북한은 당시 진행중인 한일회담을 이간하고 노동력 부족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북송에 적극성을 띠었다.
  1962년 12월 5일 열린 회담에서 한국 측은 평화선 대부분을 전관수역으로 하자는 안을 제시했고, 일본 측은 12해리로 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그 후 1963년 7월 5일 일본은 40해리의 전관수역과 상당 액수의 어업협력을 한국 측에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듬해 7월 김용식(金溶植) 장관과 오히라 외무장관 사이의 회담에는 한국 측에서 최규하(崔圭夏) 대사와 배의환(裵義煥) 한일회담 수석대표가, 일본 측에서는 시마(島) 외무차관과 우시로쿠(後宮) 아시아 국장이 참석했다. 일본 측은 적절한 규모의 규제수역 설치와 어업협력자금 공여를 할 용의가 있다고 했고, 어업협력자금으로 한국은 1억7800만 달러, 일본은 3000만 달러를 제시했다.
 
  1964년 무렵, 나는 김정태(金正泰) 아주국장을 따라 평화선 관련 차트를 짊어지고 청와대 회의에 참석했고, 김 국장이 박 대통령 앞에서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박 대통령은 국무위원들 앞에서 상당한 정치적 결심을 한 듯, “옳고 그름은 후대 역사에 맡기고, 지금 상황에선 우리가 꼭 해야겠다”고 결론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정일권 총리가 일어나 “각하의 뜻을 받들어 내각의 제1장관(수석장관)인 저를 비롯해 이하 각료들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총리를 영어로 ‘프라임 미니스터(prime minister)’라고 하는데, ‘프라임이 ‘제1’이란 뜻이로구나’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어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화선을 철회하며 한일회담을 밀어붙이는 박 대통령의 결단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5·16 군사혁명 직후 1인당 국민소득 180달러에 불과하고 국제 신용도도 제로에 가까웠던 대한민국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한일회담을 통해 외자를 도입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한일회담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낸 것이었다.
 
  1965년 6월, 도쿄에서 한일기본관계조약 외에 ‘어업협정’ ‘청구권·경제협력협정’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대우협정’ 등 관계 문서의 조인이 이뤄져 그해 12월 18일 서울에서 비준서를 교환했다. 그날 한일 국교정상화에 관한 제협정 비준을 위한 국회 특별위원회(위원장 민관식)가 열렸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의원 등 국회의원들의 반대 목소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인촌 김성수(金性洙) 선생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민정당 이중재(李重載) 의원(전국구)은 고려대 경제과를 졸업한 ‘재무통’답게 숫자를 들이대며 조목조목 따지는 통에 외무부 관리들이 부담스러워했다.
 
  1952년 1월 18일, 한국 연안수역 보호를 위해 현재의 배타적 경제수역과 비슷한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일명 이승만 라인)을 그은 것이 그 뒤 한일교섭에서 한국이 유리한 고지에 서도록 만든 측면이 강하다. 한일 관계에서 일본은 평화선 문제가 나올 때만 유일하게 약자로 전락했다. 일본 사람들이 평화선 때문에 배가 잡혀가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고기를 잡아서 나눠먹자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
 
  어업협정에 대해서는 평화선을 포기하고 전관수역(12해리)과 공동규제수역, 공동조사수역을 설정한 데 대한 불만과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어업 문제의 해결 없이는 현안의 일괄타결이 불가능했던 만큼, 박정희 정부는 9000만 달러의 대일어업협력자금을 도입해 조속히 우리 수산업계의 능력과 세력의 확장을 기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던 것이다.
 
  실제로 협력자금 9000만 달러로 현대적 장비를 갖춘 중고 일본제 어선을 도입해 어로(漁撈)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과의 어업협정 체결 수년 후에는 우리 어선들의 근해 및 원양에서의 어로활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해 거꾸로 우리 어선들이 일본 근해에서 나포당하는 격세지감의 일까지 벌어졌다.
 
 
  朴正熙 대통령, 직접 일본 총리에게 포철 건설 협조 요청
 
1965년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왼쪽)가 지켜보고 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제7차 한일회담에서 청구권 및 경제협력은 김·오히라 합의에 따라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와 1억 플러스 알파의 상업차관’이 골간을 이뤘다. 한일 양측은 상환조건과 이자율에 관한 구체적 절충을 이 기간 중에 했다.
 
  한국 측은 김·오히라 합의에 대한 국내의 강한 불만을 감안해 조금이라도 유상협력의 조건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이자율의 하향조정에 주력했다. 이러한 한국 측의 노력에 대해 당시 대장성 대신이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는 “유상 2억 달러의 이자경감보다는 상업차관을 보다 더 많이 끌어내 공장을 건설해 경제를 궤도에 올리는 것이 유리하지 않느냐”고 김동조 수석대표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이 적어 굴욕외교를 했다는 여론이 당시에는 강했다. 하지만 결국 이 무상·유상자금 5억 달러가 우리에게는 대단히 유용하게 쓰였다. 경제기획원이 청구권 자금을 집행한 지 10년 만인 지난 1976년 발표한 《청구권자금백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선 현 시점의 한국경제 규모에서 볼 때 그렇게 큰 자금이었다고 말할 수 없겠으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재원으로서 긴요하게 사용된 것을 고려할 때 동 자금의 효과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실제로 이 자금은 경운기와 동력 분무기(噴霧器)의 보급,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든 경부고속도로와 103만톤 규모의 포항제철 건설, 소양강 다목적댐의 건설 등에 사용돼 우리 경제의 근간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1993년 주일대사로 부임했을 때, 전임자 오재희(吳在熙) 대사가 김동조 장관의 회고록을 일본에서 번역해 출간했다. 도카이(東海)대 교수였던 하야시 다데히코(林建彦)는 번역 후기에서 “한국에서 출간된 청구권 자금 백서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일본 언론조차도 기사화하지 않았다”고 의문을 표시했다.
 
  전국 1일 경제권 건설의 핵심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경우, 월드뱅크가 자금지원을 위해 구간 타당성 조사를 한 결과, 서울-대전 구간과 대구-부산 구간은 경제성이 있으나, 대전-대구 구간은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해 애를 태우던 판국에 한일 국교정상화로 매년 5000만 달러 자금의 일부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할 수 있었다.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포항제철 용광로에 불을 붙이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 오른쪽 끝에 박태준 회장이 보인다.
  특히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현장에서 활약한 인물 가운데 제2대 주한 일본대사(1968~1972)를 지낸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그는 1997년 11월 1일 88세로 별세하면서 “내가 죽으면 뼈를 한국에 묻어 다오. 저 세상에서도 한일 양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그의 유언대로 경기도 파주의 가톨릭묘지에 묻혔다. 한국을 사랑해 한국 땅에 묻힌 것이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시멘트 생산에 이어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했다. 철광석과 유연탄을 모두 수입해야 하는 우리는 톤당 생산비용이 140달러로 국제시장 가격(120달러)보다 비싸 세계은행은 한국 정부의 차관 신청을 경제성이 없다며 거절했다.
 
  가나야마 대사가 박 대통령 친서를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포항제철 건립 지원을 호소한 일화를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난다. 폴란드 대사로 임명된 지 석 달도 안 된 1968년 6월, 갑자기 한국 부임 명령을 받은 그는 두 나라 관계 발전의 ‘매개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을 필두로 경제건설에 매진할 때였다.
 
가나야마 마사히데 주한 일본대사. 천주교 신자인 고인의 유골은 1997년 일본 전통예식에 따라 화장돼 도쿄 인근 후추(府中)시 가톨릭묘지에 모셔져 있으며 그 일부를 파주 가톨릭묘지에 가져와 안장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술 한잔 하자며 가네야마 대사를 청와대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대사는 주한 일본대사 아니냐. 그럼 한국 일도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사토 총리에게 내 친서를 전하고 답(答)이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외교관으로 부임해 국가 원수와 마주한 영예에 감격한 가나야마 대사는 박 대통령의 ‘특사’를 자청, 일본 외무성에 들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총리 관저로 직행해 사토 총리를 만났다. 그는 사토 총리에게 “이것을 박 대통령이 써 줬는데 답이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며 긴장을 시켜 놓았다. 편지를 열어 본 사토 총리는 “이것(포철 건설)은 안 돼. 안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라고 잘라 말했다.
 
  당시 야하다 세이테쓰(八幡製鐵所·新日鐵의 전신)는 한국의 제안에 대해 “나사 하나 못 만드는 나라가 제철회사를 세우겠다니 우습다”며 콧방귀를 뀌었다고 한다. 가나야마는 “일본이 제철회사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가 한국을 보는 것처럼, 유럽 선진국이 일본을 비웃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일본은 무리해서 야하다 세이테쓰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든 것이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야하다의 조강능력은 800만톤). 한국 정권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논리로는 수긍을 못한다”며 사토 총리를 설득했다. 사토 총리가 신일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사장에게 “저녁에 만나자”는 전화를 걸면서 야하다는 적극적인 지원으로 돌아섰다.
 
 
  다나카 전 총리, “안보경협 가능”
 
  외교부 정무차관보로 부임하던 1981년 말 무렵,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방미가 가장 큰 이슈로 떠올랐다. 1982년 1월 20일 미국에 레이건 행정부가 새로 들어서면서 전 대통령이 미국을 공식 방문했고, 방문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김경원(金瓊元) 청와대 비서실장이 나를 불러 “이제 이 서류는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며 서류 한 뭉치를 주었다. 서류를 살펴보니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취임 이후 해외로 보낸 취임 특사들의 귀국 보고서였다. 그중에는 전 대통령의 육사 11기 동기생 정호용(鄭鎬溶) 특전사령관(국방부장관 역임)의 ‘한일 안보 경협’ 관련 내용도 들어 있었다.
 
  1981~83년 사이 한일 두 나라 사이의 가장 큰 외교 문제는 한국 정부가 요청한 100억 달러 ‘안보 경제협력차관’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한반도 방위는 곧 일본의 방위이며 일본이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로 추진한 이 장기저리 차관 문제는 당시 한일 간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1983년 1월 나카소네 총리는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공식 방한해 전 대통령과 두 차례 회담하고 경협차관 규모를 40억 달러로 낙착시켜 타결 지었다. 그러나 그 협의 과정에서 한일 간에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 10·26, 12·12, 광주사태를 거치면서 일본 정치인들은 불안한 눈으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정희, 김종필 등 일본에 친숙한 정치주역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그룹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접촉창구를 갖고 있지 못했다.
 
  1980년 가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소위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 대통령은 신생 정부를 해외 주요 국가에 알리기 위해 외교사절들을 파견했다. 전 대통령은 현역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워싱턴에 보낸다.
 
  정 장군은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길에 일본에 들러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만났다. 다나카 전 총리는 정 장군에게 “일본이 조선 식민통치를 할 때 용산(20사단)과 함경북도 나남(19사단) 등지에 2개 사단을 주둔시켰다”면서 “따라서 일본이 최소한 2개 사단을 유지하는 만큼의 안보협력 명목의 경제협력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호용 사령관은 귀국해 2개 사단이 1981년부터 90년까지 한반도에 주둔하는 경비를 약 200억 달러로 추산해 내고 이 정도는 일본 정부가 한반도와 일본국의 공동안보를 위해 부담해야 할 것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후에 주한미군이 2개 사단을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연간 20억 달러라는 것에 착안, ‘안보경협 차관’ 규모를 100억 달러로 수정했던 것이다.
 
  1981년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그는 ‘한일 안보경협’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1981년 8월 20일 노신영(盧信永) 외무장관은 한일 외상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소노다 외상에게 “한국의 제5차 5개년 계획 기간 중 100억 달러의 공공차관을 제공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방위분담적 발상에 의한 경제협력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같은 해 9월 11~12일 이틀간 서울에서 있었던 한일 정기각료회의에서 최창락(崔昌洛) 경제기획원차관은 기조연설에서 60억 달러의 공공차관에 덧붙여 40억 달러의 수출입은행융자 등 100억 달러 규모의 안보경협을 요청했다. 소노다 스나오(園田直) 외상은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 ‘외교경로를 통해 계속 협의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안보경협의 불씨를 살려나갔다.
 
 
  세지마, ‘안보 경제협력 차관’ 제공의 막후 역할
 
안보경협차관 도입을 위해 막후교섭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 세지마 류조 이토추상사 전 회장.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당시 대장성 대신은 ‘안보경협 차관’ 협의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정부 대표끼리 얘기하면 진척이 되지 않으니 최고 책임자가 신뢰하는 인물에게 맡겨 협의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 뒤 안보경협 협상은 공식, 비공식 두 가지 채널로 추진됐다. 양쪽 외교 채널간 공식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양국은 1982년 들어 경협의 의미를 방위분담이 아닌 일반적인 경제협력으로 바꾸어 계속 협상했다.
 
  이때 ‘한일 안보경협’을 추진하기 위해 권익현(權翊鉉)씨와 세지마 류조(瀨島龍三)가 등장한다. 세지마는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의 실제 모델로, 당시 이토추상사(伊藤忠商事) 부사장이었다. 일본 육사 44기인 세지마는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태평양전쟁기의 작전 수립에 간여하다 소련군 포로가 돼 1956년 8월까지 포로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권익현씨는 전두환 장군과 육사 11기 동기생으로, 1973년 윤필용(尹必鏞) 장군 숙청사건에 연루돼 전역하고 삼성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 권익현씨의 등장에 대해, 이병철 회장이 삼성정밀 전무로 있던 권씨에게 평소 친분이 있던 세지마 씨를 소개해 전두환 장군(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만나게 했다는 풍문도 있었다.
 
  이미 경협 원칙에 합의를 해 둔 양국의 관계자들은 세지마-권익현 채널의 중계에 따라 공감대를 확인하고 일본의 외무성 관료들을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1981년 4월 전 대통령은 한일의원연맹 창설 작업으로 바쁜 권 의원을 불러 일본으로 가 정계 실력자들을 만나고 오라고 지시했다.
 
  권 의원은 일본으로 가 다나카 전 총리, 나카소네 당시 행정관리청 장관, 다케시다 자민당 부간사장, 소노다 외상 등을 만났다. 1982년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과 세지마 두 사람은 12월 9일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비밀리에 회동했다.
 
  양국 정상의 특명을 받고 온 두 밀사는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와 한일 경협차관 문제로 냉각된 두 나라 관계를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방한으로 일괄 타결한다’는 기본입장에 합의했다. 그 자리에서 세지마는 경협차관 규모를 40억 달러로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때 우리 정부 고위층에는 노신영 안기부장, 이범석(李範錫) 외무장관, 권익현 총장 등 경협 문제 특별대책반이 있었다. 권 총장은 김해공항에서 세지마 씨와 헤어져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특별대책반을 통해 전 대통령에게 세지마와의 면담 결과를 보고했을 것이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저격사건의 배후조사와 조총련 해체를 주장하는 우리 측 요구와 한 해 전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 관련 일본측 조사협조 요구가 맞물려 심각한 외교문제로 대두됐다.
  며칠 뒤 이번에는 권 총장이 당시 최동진(崔東鎭) 외무부 아주국장(영국대사 역임)을 대동하고 오사카로 날아갔다. 나는 1982년 말, 권 총장과 함께 도쿄로 가 세지마와 일본 외무성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실제로 한일 양국 외교라인들은 회담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권 총장과 세지마 단둘이 만나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모양새였다.
 
  당시 일본 측은 20억 달러선을 제시하고 있었고, 전 대통령은 내심 50억 달러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러나 ‘한일 경협차관’은 막판까지 진통을 겪은 끝에 1983년 나카소네 총리가 방한하고서야 40억 달러로 극적 타결을 보게 됐다.
 
  40억 달러의 안보 경협차관 규모는 일본정부개발협력자금 18억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차관 21억5000만 달러로 나뉘어졌다. 1982년부터 7년간 40억 달러를 목표로 해 평균금리 6% 선으로 차관을 제공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1982년 12월 30일 세지마 씨는 공식적으로 나카소네 총리의 특사로 외무성의 동아시아 과장을 데리고 청와대로 전 대통령을 방문, 나카소네의 방한에 따른 준비작업을 마무리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1983년 1월 11일에 서울에 와서 두 차례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우리 정부는 1988년까지 40억 달러 경협차관 중 일본 정부차관인 18억5000만 달러를 전액 도입했다. 합천댐, 주안댐, 서울 중랑천 하수처리장, 임하댐, 영산강 방조제, 대전시 상수도 확장, 서울지하철 건설공사, 부산지하철 건설공사 등에 썼다.
 
  21억5000만 달러로 책정됐던 일본수출입은행의 상업차관 중에서 약 8억 달러를 빌려 썼다. 평택화력발전소의 LNG화, 호남화력발전소 1호기 건설, 광양제철소 건설, 포항제철소 현대화 등에 쓰였다. 외환사정이 좋아지고 엔고현상이 발생하자 우리 정부는 나머지 상업차관은 도입하지 않았다. 총 26억5000만 달러의 경협차관이 실제로 쓰인 셈이다.
 
  한국에서는 ‘망언 제조기’로 불렸던 소노다 스나오 외상은 일본 국회에서 노신영 외무장관을 염두에 두고 “내 평생 돈을 빌리러 온다는 자가 100억 달러에서 한 푼도 깎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안보 경협차관’은 추진과정에서 큰 진통 끝에 성사됐다.
 
 
  ‘金大中-오부치 선언’의 의미 되새겨야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서명한 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일 관계의 정랭현상(政冷現狀)은 군대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 문제 등 부(負)의 역사적 유산 문제에 기인한다. 금년은 1965년 한일수교로부터 반세기를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러한 부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반성과 사과는 1951년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의에서 시작된다. 이 회담에서 한국의 양유찬 수석대표가 일본에 대한 구원(舊怨)을 잊고 양국은 화해하자고 했을 때, 일본 측 교체수석대표는 무엇을 화해한다는 것이냐(What are the hatchet to bury?)고 되물었다고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유진오(兪鎭午) 박사는 메모에 남기고 있다.
 
  이러한 일본이 “과거의 국책의 잘못을 뉘우치고 침략과 식민통치로 아시아 인민에게 다대한 고통과 피해를 끼친 것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무라야마 총리담화가 나오기까지 41년의 성상을 필요로 했다.
 
  이후 한일 관계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까지로 발전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시 발표된 김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 간의 공동선언에서는 일본 측의 “진지한 반성과 심심한 사과”를 하고, 한국은 이를 “평가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할 것”을 다짐했던 것이다.
 
  1965년 수교 이후 격동의 한일 관계를 막전막후에서 지켜본 당사자로서, 주일대사(1993년 4월?94년 12월) 시절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에 군(軍)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고노 담화’와, 한국 식민지 통치에 강도 높은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의 ‘경주 발언’이 나왔다. 아시아 침략 사실에 대해 사죄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의 ‘무라야마 담화’가 나온 것은 내가 외무장관(1994년 12월~96년 11월) 재직 중일 때였다.
 
  지금도 일본의 과거 식민통치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일본 국회 결의로 한다거나 또는 천왕의 방한을 통한 반성과 사과가 아이디어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참다운 양국의 역사적 화해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가해자였던 일본은 역사에 겸허하고 피해자인 한국은 관용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도 그렇다. 일본은 1993년 고노 담화를 내놓기 전 직접 한국에 와서 조사를 했고 미국에 가서까지 자료를 찾았다. 자치성 차관 출신의 엘리트 관료인 이시하라 노부오(石原信雄) 관방부장관이 실무지휘를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강제동원의 직접적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무슨 위안부냐, 성노예지’라고 일갈하지 않았는가.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2012년 7월 30일 미국 글렌데일 시립 도서관 앞에 제막한 평화의 소녀상 옆에 앉아 소녀상을 쓰다듬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국제사회에서 인권 문제로 부상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아 있는 동안 일본이 정부 차원의 보상과 적절한 사죄를 통해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표 윤미향)의 요구처럼, 단 55명밖에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 줄 해법은 정부 보상금을 골자로 하고 총리 사과편지와 이를 주한 일본대사가 직접 위안부 할머니를 방문해 전달하는 이른바 ‘사사에(佐佐江) 안’이 해결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 외교부는 1993년 고노 담화 발표 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선 더 이상 일본 정부에 협상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초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할머니의 존엄성과 명예회복이 가장 큰 과제였고, 이 분들이 정신대로 끌려갔던 과정을 밝히고자 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가 강제성을 공식 인정했고, 피해자들에게 총리가 사죄하는 서한도 작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외교이슈로 삼지 않겠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일본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Asian Women's Fund)’이라는 민간재단을 만들어 위로금도 일부 피해자들에게 지급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인정하라고 지난 20년 동안 매주 집회를 해 왔다. 양국 정부가 잘못한 것은 20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이런 요구가 있었다면 뭔가 해결책을 찾았어야 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일본에 요구하는 법적 책임 인정과 사죄, 금전적 보상 등은 1990년대 초 하던 것과 똑같다.
 
  일본 정부의 사과와 인도적 조치를 위한 자금지원 등 위안부 문제 해법을 담은 이른바 ‘사사에 안’도 이제는 거론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지난 민주당 정부에서 일본이 먼저 제안한 것이지만, 지금의 일본 정부는 그러한 합의가 된다 해도 그걸로 끝나는 것인지 확신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현 아베 정부는 ‘사사에 안’에 대해 내키지 않아 한다.
 
  외교는 상대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한다. 상대가 항복하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안 된다면, 그 대신 적절한 선에서 ‘마중물’을 보내 타협하는 것도 양국 국가 지도자가 발휘해야 할 정치력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다시 강구해야 한다. 김영삼 정부는 일본의 금전적 보상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피해자들은 일본이 주는 위로금 대신 한국 정부가 주는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위안부 할머니들을 진심으로 어루만져 주고, 일본이 정부 예산으로 금전적 보상을 한다고 하면, 우리 정부가 말릴 길은 없다. 법적 책임 문제를 갖고 20년 이상 논쟁을 해 왔지만 이것은 끝이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한국 측 정대협이나 일본 측이 모두 동의하는 해결책이 나올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난 1월 9일 서울 종로구 세종빌딩에서 열린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의 회고록 《나의 외교노트》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이 건배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한 전 외교부장관, 이승윤 전 부총리, 윤병세 외교부장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공 전 장관, 김수한 한일친선협회장(전 국회의장),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 유명환 한일포럼 회장(전 외교부장관).
  양국 정치인, 경제인, 전직 관료, 학자, 언론인 등이 참여하는 한일포럼 한국 측 회장을 2003년 8월부터 10년간 맡아오다 지난해 유명환(柳明桓) 전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넘겨주고 고문이 됐다. 우리 측에서는 아베 신조 정권 출범 후 일본에서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듯한 역사 인식에 우려를 나타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에서 망언도 자주 있었지만 큰 흐름은 반성이었다. 얼마 전 정권을 내놓은 민주당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베 총리가 소속한 자민당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흐름이 아베 정권 출범 후 크게 후퇴하고 있다. 국교정상화 이후 50년 가까이 쌓아 놓은 공든 탑을 지금 와서 왜 무너뜨리려고 하는지 아베 총리에게 묻고 싶다.
 
  지금 아베 총리 주변에는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운영·감독에 관여했다고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전 관방장관 같은 인물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는 1992년 7월 6일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내각 당시 관방장관 자격으로 일본정부가 군 위안소 설치와 운영·감독에 관여했다고 처음으로 인정한 이른바 ‘가토 담화’를 발표했다. 당시 일본이 위안부 강제연행을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끝에 이듬해 ‘고노 담화’가 나오기도 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협 어부바 콘텐츠 공모전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20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