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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과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검찰 정보보고서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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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권 차원에서 형제복지원 지원
⊙ 전두환 대통령 부산 방문으로 수사 지연
⊙ 당시 검찰 지휘부는 형제원 사건을 박종철 사건과 연결시켜 이해
⊙ 부산市, 本誌 보도 직후 형제원 고발·수사 의뢰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오른쪽)이 1985년 11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고 있다.(형제원 운영자료집)
  1987년 5월 16일 김용원(金龍元)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검사(現 법무법인 한별 대표변호사)는 울산지청장에게 형제복지원 사건 공소(公訴)계획을 정보보고 형식으로 서면(書面) 보고했다.
 
  검사는 수사 중인 사건의 상황, 공소장 내용, 언론 동향 등을 상부(上部)에 보고한다. ‘정보보고’라 불리는 절차로 사안에 따라 법무부장관에게까지 보고한다. 검찰 지휘부는 수사검사의 보고 내용을 확인(결재)하고 사건을 지휘한다. 따라서 사건 정보보고는 수사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당시 ‘검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사건 김용원 주임검사는 지청장에게 “박 원장의 횡령액을 11억4254만원으로 높이겠다”고 보고했다. 김 검사는 수개월 동안의 수표추적을 통해 물증을 확보했다. 횡령액이 10억원을 넘으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가법)에 따라 무기징역 이상의 처벌이 가능했다. 수사검사의 보고에 대해 울산지청장은 자필(自筆)로 다음 사항을 지시했다.
 
형제복지원 공소 관련 울산지청장 부전(附箋).
  1. VIP가 금주 내에 부산에 온다.
  2. 공소장 변경은 토요일까지 되도록 한다.
  3. 돈을 빌려 간 부산시 공무원의 신분이 노출 안 되게 이름 가운데 받침 하나를 빼라.
  4. 법원에 연기하도록 조치(1주일).

 
  VIP는 전두환(全斗煥) 전(前) 대통령을 의미한다. 1987년 5월 21일 부산에서 제16회 소년체육대회가 열렸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개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방문했다. 대통령의 부산 방문이 형제복지원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기자는 1987년 3월부터 5월까지 울산지청이 법무부, 대검찰청, 부산지검 등에 보고했던 ‘검찰 내부 정보보고서’를 입수했다. 또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의 유치장 면회 녹취록 일체를 확보했다. 입수한 자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처리과정에 대한 석연치 않았던 의문이 조금씩 풀렸다. 기자는 자료 분석과 당시 사건 주임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26년 전의 진실을 추적했다.
 
 
  검찰 지휘부, “때가 좋지 않다”
 
초창기 형제복지원.
  1987년 5월 16일 아침 6시30분 김용원 검사는 부산지검 검사장의 관사를 찾았다. 16일은 토요일이었다. 요즈음과 달리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정상 근무했다. 그의 증언이다.
 
  “석 달 가까운 수표 추적으로 박인근 원장의 횡령액이 10억을 넘었다는 사실을 밝혀 냈어요. 그런데 대검과 부산지검에서 ‘때가 좋지 않으니 기다리라’며 횡령액을 상향(上向) 조정하겠다는 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새벽에 검사장 관사를 찾았어요. 횡령액을 상향시켜 주지 않으면 사표를 쓰겠다고 검사장에게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검사장은 ‘사건 하나로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마’라고 말했어요. 옥신각신했지만 결국 저의 요구가 받아들여졌어요.”
 
  검사장이 횡령액 상향을 승인하자 김 검사는 그날로 공소장을 변경하려 했다. 그러나 검사장은 16일 오전에 전화로 18일(월요일)로 연기하라고 지시했다. 검사장 지시를 받은 직후, 김 검사는 지청장에게 “횡령액을 늘리기 위해 18일에 공소장을 변경하겠다”고 보고했다. 지청장의 자필(自筆) 메모는 김 검사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다.
 
■ 형제복지원 사건이란
 
  전두환 정권(1980~1988년)이 서서히 막을 내리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致死)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6월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는 6·29 민주화선언을 발표했다. 역사가 요동치던 그 시절, 12년 동안 531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형제복지원 사건은 충격 자체였다.
 
  1987년 2월 4일 형제복지원을 현장 조사한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의원들의 진상보고서는 복지원의 현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 중 무작위로 추출된 원생 100여 명을 원장실로 불러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이번 사건(형제복지원)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가려서 진상조사 활동이 때늦은 감을 인정하고 조사에 착수한바, 가히 인권사각 지대라 할 만큼 인권말살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되었고, 박인근 일가의 엄청난 부정과 비리행위, 관계당국의 직무유기 등이 조사결과 나타난데 대해 온 국민과 함께 경악과 충격을 금할 길이 없다. 수용자들은 형제원을 ‘아오지탄광’, ‘감옥보다 더한 곳’, ‘박인근 공화국’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박인근(원장)을 아바이 동무로, 그의 둘째 아들 박두선(요양원 총무)을 정일 동무로 부르고 있다. (수용자들이) ‘왜 이제 왔느냐’는 질책과 ‘제발 살려 달라’, ‘제발 집으로 가게 해 달라’는 호소를 들으며 (중략) 그곳은 법의 사각지대이며, 인간 매립장이었고, 부랑아 복지원이 아니라 양성소였으며 (중략) 특히 내무부 훈령 410호에 의해 대공관계법 위반자들이 마땅히 형무소에서 일정기간 형을 삶으로써 면죄하고 재생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평생 감옥보다 더한 지옥 같은 곳에서 생활해 왔다는 사실에 우리는 몸서리를 쳤다.”
 
  1987년 6월 박인근 원장은 징역 10년과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87년 11월 1차 항소심에서 벌금형이 사라진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1988년 7월 2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형으로 낮아졌다. 결국 1989년 3월 3차 항소심에서 2년6월형이 확정됐다. 많은 사람이 박 원장이 형제원 사건으로 처벌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사건의 핵심인 인권유린 부분에 대해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징역 2년6월형은 특경법(업무상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 인권유린과는 관련이 없는 죄목이었다.
 
  《월간조선》은 2012년 10월호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재조명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형제원이 아직도 건재하고 부산시와 유착까지 의심된다는 ‘부산시와 형제재단의 수상한 동거-형제복지원의 부활에 쏠리는 의혹’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월간조선》 보도 직후 방송, 신문 등에서 관련 의혹을 심층 보도했고, 피해자 한종선씨의 증언록 <살아남은 아이>가 출간됐다. 사건을 재구성한 연극 <해피투게더>가 올해 11월 중순에 막을 올렸으며, 영화·다큐멘터리 제작이 추진 중이다.
 
 
  ■ 부산시 특별점검
 
  본지(本誌) 보도 직후 부산시는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에 대한 특별점검을 실시했다. 부산시 조사 결과 제기된 의혹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부산시는 총 16건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부산지검에 고발·수사 의뢰(표 참조)했다.
 
  부산시는 특별점검에서 ‘2005년부터 2007년 사이 실시된 형제복지지원재단의 수익사업부(사상 온천 등) 증축공사로 인하여 2005년부터 2009년 사이 부산시로부터 공사비 관련 명목으로 허가받은 차입금과 상환명목 등으로 허가받은 기본재산 처분허가 등과 관련한 각종 의혹’을 확인했다.
 
  부산시는 특별점검 직후 “형제재단의 법인회계와 수익사업 분야 등에 대한 장부관리 부실 등으로 차입금 집행, 기본 재산 처분과 각종 회계 집행 확인을 위한 전반적인 확인·점검이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요 의혹사항 등에 대하여 집중 점검한 결과 드러난 횡령 또는 유용 혐의에 대하여 수사 의뢰하고 전반적인 회계장부의 부실에 대하여는 회계법인 등의 외부 회계감사를 받도록 조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산시는 본지가 제기한 ‘부산시와 형제재단 유착의혹’에 대해서는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다 할 해명을 하고 있지 않다.

 
 
  전두환, “박 원장 덕분에 거지가 없다”
 
  당시 울산지청장은 김 검사의 주장을 승인(결재)했다. 그러나 지청장은 서류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지시사항을 적어서 김 검사에게 돌려줬다. 공소장 변경은 승인하지만 대통령이 부산을 찾는 시기이니, 일단 시기는 조절하라는 의미였다. 김 검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 부산을 찾은 전두환 대통령이 복지원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부산시장에게 ‘박인근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으냐’고 말했다고 대통령을 수행하던 공무원으로부터 전해 들었어요. 대통령의 인식이 이러니 검찰 수사 역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어요. 지청장은 이런 상황에서 소신대로 처리하도록 승인했어요. 다만 증거가 불충분했던 공무원 뇌물수수 부분은 보완에 유의하고 공판 일정을 조정하라고 지시했어요. 아마 대통령이 부산에 머무르는 동안 언론에 복지원 관련 의혹이 크게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통령 방문 이틀 전 횡령액 하향
 
1981년 4월 전두환 전 대통령 지휘서신.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제공.
  지청장의 허락으로 박 원장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일요일을 지내고 난 18일 월요일, 상황이 변해 결국 횡령액은 낮춰졌다. 김용원 변호사는 “직무상 명령이라며 압박하는 대검과 부산지검에 굴복했다”며 “이미 밝혀진 횡령 내역을 가위로 오려내서 횡령액수를 7억 이하로 낮췄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횡령액은 6억8178만원이 된 것이다.
 
  대통령 부산방문 이틀 전이었다. 대통령이 박 원장에게 호의적인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불과 일 년 전에 대통령은 원장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박인근 원장은 1985년 11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부산시 부랑인 일시보호소 운영에 대한 실적을 높이 평가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전 전 대통령이 박 원장을 칭찬한 것은 이런 이유로 보인다.
 
  형제복지원 부흥에 전두환 정권은 큰 역할을 했다. 1981년 4월 10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특별지시를 내렸다. 당시 대통령 친필 지휘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리 귀하
 
  별첨 정보보고서와 같이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는바 실태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하에 일절 단속 보호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81년 4월 17일 관계부처 연석회의가 열렸다. 조치는 신속했다. 이틀 뒤인 20일부터 연인원 1만9300여 명의 공무원이 투입되어 부랑인을 단속했다. 8일 만에 1850여 명이 걸려들었다. 정부는 부랑아 관리 업무에 복지법인을 끌어들였다. 1982년부터 개인이 운영(경영)하는 복지법인에 대해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부랑인 관리가 ‘봉사’에서 ‘사업’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기록에 의하면 형제복지원 사건 발생 1년 전인 1986년 전국 36개소에 1만6149명이 수용된 부랑인 시설이 있었다. 시설에 지원된 국고 보조금은 80억원에 이르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왜 부랑인 관리 사업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당시 부산에서 치안 업무를 담당했던 경찰(現 부산소재 경찰서 수사과장)은 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당시는 거리에 거지가 많았어요. 사회 문제였던 것은 맞아요. 부산은 특히 심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요즈음 서울역에 가면 노숙자들이 많잖아요. 그 시절에는 거리마다 노숙자들이 있었던 것이죠. 올림픽도 해야 하고 하니까 이들을 수용할 시설이 필요했어요. 지금이야 인권을 중요시하지만 당시에는 노숙자들을 잡아가니까 시민들이 잘한다고 칭찬했어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복지원 운영이 사업으로 변질된 것인데, 사실 요즈음 사회복지시설 가운데 순수하게 봉사만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얼마나 될까요. 정부지원금을 이용해 재단을 키워서 자녀들에게 물려주잖아요. 월급까지 받으면서요. 병원, 학교까지 거느리는데 문제가 많아요.”
 
  정권 차원에서 부랑아 관리 사업을 밀고 있었던 시기였다. 당연히 형제복지원 사건을 파헤치는 것을 불편해했을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 아니었다. 검찰 지휘부가 ‘때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 데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박종철 사건과 연결시켜 이해
 
  공교롭게도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정국이 흔들리고 있었다. 김용원 변호사는 “전두환 정권에서 형제원 사건 수사를 박종철 고문 사건과 연결시켜서 이해했다”며 “고문 사건으로 흔들리는 정권에 타격을 주기 위해 형제원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모함이 계속됐다”고 말했다. 실제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 과정에서 수사를 담당했던 울산지청은 대검에 “형제원 사건과 박종철 고문 사건은 무관하다”고 해명하는 등 두 사건의 연결고리를 끊는 데 주력했다. 이와 관련해 사건 수사 착수 직후인 1987년 2월 4일 울산지청이 검찰 수뇌부에 보낸 해명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 검찰에서 수사 착수 당시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을 염두에 두었는가.
 
  - 당 지청에서 먼저 복지원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었으므로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 당 지청에서 내사에 착수한 것이 1986년 12월 초이고 일단의 자료를 수집 완료한 것이 1987년 1월 12일이며 직접 피의자 임의동행을 염두에 둔 것은 동월 13일인바, 이에 반하여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87년 1월 14일이고 고문치사의 혐의가 있다고 발표된 일자도 1987년 1월 18일이며 고문치사가 명백하다고 발표된 것은 1987년 1월 19일임.

 
  형제복지원 사건과 박종철 고문 사건은 그 시기가 놀랍도록 비슷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객관적인 사실로 볼 때 두 사건은 관련이 없었음에도, 정권에서 울산지청을 바라볼 때에는 정권을 흔들려는 시도로 보았던 것이다.
 
 
  울산지청, 표적수사 否認
 
1987년 1월 12일 김용원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검사가 확보한 형제원 강제노역 사진. 수사 착수의 시발점이 된 사진으로,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노역자들을 감시하고 있다. 김용원 변호사 제공.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시 울산지청은 수사 착수 배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박종철 고문 사건과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표적(標的)수사가 아닌 정상적인 수사 절차를 밟았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경위
 
  - 1986년 12월 초순경 울주군 청량면 사람들로부터
 
  *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산속에서 산을 마구 파헤치고 있다.
 
  * 몽둥이를 든 자들과 경비견을 몰고 있는 자들이 일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다.
 
  * 몽둥이를 든 자들이 일하는 사람들을 마구 구타하기도 한다.
 
  * 일하는 사람들 주위에는 철조망이 있는 곳도 있다.
 
  라는 말을 듣게 되고 당청 직원의 견문보고도 이와 동일하여 당 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가 내사에 착수하게 된 것임.
 
  -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을 때에는 임야 등을 훼손하는 장소의 지번조차 자세히 몰라서 지번을 울주군청에 문의하기도 하였으며 군청에서조차 형제복지원의 규모와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으므로 당시 부산 소재 형제복지원의 규모와 내용에 대하여는 전혀 염두에 두지도 못하였음.
 
  - 1986년 12월 말경 및 1987년 1월 초순경 검사가 현장에까지 갔으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원거리에서 위 사실을 확인.
 
  - 1987년 1월 12일 먼 거리에서 망원렌즈로 강제 노역시키는 장면과 몽둥이를 들고 있는 장면 및 경비견을 몰고서 지키고 있는 장면 등을 촬영하게 되었음.
 
  - 1987년 1월 16일에 박인근 등을 임의 동행, 동월 17일에 영장을 발부 받아 구속하기에 이르렀음.
 
  ○ 수사 착수 당시, 당 지청에서 형제복지원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던 내용
 
  - 당 지청에서는 울주군 청량면 삼정리 소재 목장 축사 내에 감금당하면서 강제노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안점을 두어서 수사했기 때문에 형제복지원의 규모와 내용에 대하여는 파악하지 못했음.
 
  - 수사가 진행되면서 복지원은 필요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기화로 원장 등이 악용하고 있는 점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어 검찰이 개입하면 사사로운 단체가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 밝혀질 것으로 확신하였으며, 그 결과 국가가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을 것으로 단정했음.

 
 
  박 원장, “부산시장, 두고 보자”
 
형제복지원에 도착한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이렇듯 울산지청은 수사의 순수성을 검찰 지휘부에 주장했지만, 이후 대검 등에서 횡령액을 줄이라는 압력이 계속되는 등 윗선을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용원 변호사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휘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형제원 운영은 정권의 정책목표와 일치했다”며 “청와대, 보사부, 부산시 등 박인근 원장의 힘이 안 미치는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인근 원장과 부산시가 유착되어 있었다는 의심을 살 만한 문건도 있다. 1987년 3월 11일 정보보고에서 수사검사는 구속기소된 박 원장과 관계자들의 면회 시 특이(特異)발언을 보고했다. 당시에는 주요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피의자 면회에는 유치장 간수가 동석해 발언 내용을 수기(手記)로 기록했다. 박 원장 발언 내용은 이렇다.
 
  ○ 부산시와의 관계에 대하여
 
  - 부산시에서 신문에 보도되는 것 같이 형제원을 생각한다면 섭섭하다(2월9일).
 
  - 부산시에서 형제원의 임시이사를 여러 명으로 구성하려고 한다면 잘못이다(2월9일).
 
  - (동생 박○○에게) 안기부, 시장을 찾아가라(2월9일).
 
  - 부산시에서 관선이사 선임 못하도록 해라(2월11일).
 
  - 부산시장이 너무하는구나, 두고 보자(2월19일). (면회 오지 않는 것이 유감이라는 뜻 포함)
 
  ○ 형제복지원 운영에 대해
 
  - 복지원 운영을 종전과 동일하게 하라(2월20일).
 
  - 시와 경찰에서 계속 수용을 하라고 해도 받지 마라(2월26일).
 
  - 도망자가 없게 하라, 정신병동 관리를 잘하라(3월2일).
 
  - 환자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놀리지 마라(3월4일).
 
  - 여기서 서류 결재하겠다(3월6일).
 
  ○ 기타
 
  - 변호사가 약하다. 장○○의원에게 자료를 제출하라(2월5일).
 
  - 카지노에서 딴 돈(7200만원)으로 울산작업장 부지를 구입했다(2월16일).
 
  - (박 원장 질문)밖으로 나가길 원하는 원생들은 모두 내보내라고 했는데 어찌되었느냐(2월7일).-(면회자 답변)부산시장이 반대하고 있다.

 
 
  부산시와 형제복지원 유착 의심
 
  박 원장은 자신의 발언이 기록되고 담당 검사에게까지 보고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발언을 한 것으로 봐서 당시 형제복지원과 부산시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정보보고에 따르면 박 원장이 구속 중인 상황에서 버젓이 밖에 나가 목욕을 하고 식사까지 하고 돌아온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호송담당 간수장(경찰관, 경사)은 직무유기 등으로 기소됐다. 다음은 정보보고에 나타난 간수장의 범죄사실이다.
 
  ○ 1987년 5월 5일 10시30분경 횡령 등 혐의로 구속 중인 피의자 박인근이 관절염 물리치료차 울산시 중구 가락병원 호송 담당자로서 피의자를 바로 동병원에 호송 치료시키지 않고 인근 만금장여관에 데리고가 수갑을 풀어 준 후 그곳을 떠나 약 1시간가량 혼자 목욕케 하여 직무를 유기.
 
  ○ 동월 16일 10시30분 박인근이 관절염 물리치료차 동병원 호송 치료 중에 인근 식당에 박인근 동생과 같이 돈까스를 먹으면서 약 1시간 동안 감시 근무를 포기, 직무유기.
 
  ○ 같은 날 12시경 박인근을 치료 후 바로 유치장으로 데려와야 함에도 피의자 집에 데리고 가 약 1시간 동안 목욕시키는 등 직무를 유기.

 
  당시 범죄사실 기록을 보면 호송 간수장은 박 원장에게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현금과 물품을 뇌물로 받았다.
 
 
  奉仕가 事業으로 변질된 대표적 사례
 
  취재를 하면서 26년 전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씨앗은 1975년 12월 15일 내무부 훈령 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지침’에서 뿌려졌다. 1975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시대이다. 이런 이유에서 박근혜 정부에 흠집을 내는 것이 취재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과거를 제대로 보아야 현재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나아가 《월간조선》은 2012년 10월호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형제복지원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피해자들의 고통도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피해자들이 대책위를 구성해 피해보상을 받기 위해 노력 중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의 박종철 고문사건, 6·29 민주화선언 등 역사의 회오리 속에 묻힌 측면이 있다. 피해자들은 형제복지원 출신임을 감추려 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심지어 일부 시민들은 “복지원이 없어져서 노숙자들이 많아졌다”며 박인근 원장을 두둔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억속에서 사라졌던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것은 현재의 복지사업의 구조적 한계를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빈민보호 ‘봉사’가 ‘사업’으로 변질되는 잘못된 역사의 첫 단추가 형제복지원 사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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