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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취재

네팔 룸비니에서 ‘평화의 불’ 봉송한 禪默 慧慈 스님

“머지않아 평양에 남북 화합의 불을 밝힐 수 있을 겁니다”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ironin@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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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 탄생지 ‘룸비니 동산’에서 채화, 혜초가 걸었던 구법선사의 길 따라 18일 만에 봉송
⊙ ‌2008년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 300명 내전 중이던 네팔 전격 방문, ‘평화의 불씨’ 심어 주고 와
⊙ ‌2006년 결성, 전국 이름난 사찰 찾아 기도하는 ‘108산사순례기도회’에 매달 5000여 명 참가
⊙ ‌“산중에서 거리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가야 한다”는 스승 청담 스님의 법문 실천하고 있는 중

선묵 혜자 스님
⊙ 속랍 61세.
⊙ 14세 때 청담 스님을 은사로 삼각산 도선사에서 출가.
⊙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청담학원 이사장, 혜명복지원 이사장, 불교신문사 사장 역임.
⊙ 현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
⊙ 저서: 《절에서 배우는 불교》 《108산사 순례》 《그대는 그대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가》 등.
  “부처님은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에서 수행하셨고 길 위에서 열반하셨지요.”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을 때 선묵(禪默) 혜자(慧慈) 스님이 죽비를 내리치듯 던진 말이다. 기자는 이 말의 의미를 붓다의 고향인 룸비니에 다녀오고서야 깨달았다.
 
  기자는 지난 4월 15~19일 도선사 주지 선묵 스님을 따라 네팔을 방문했다. 선묵 스님이 회주(會主)로 있는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 60여 명이 동행했다. ‘108산사순례기도회’는 매달 한 번씩 전국 방방곡곡 이름난 사찰을 찾아 기도를 올리는 모임이다. 한 번에 5000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호응도가 높아 유사 모임이 많이 생겨났다.
 
  이번 일정은 룸비니 동산에 타오르고 있는 ‘평화의 불’을 한국으로 봉송해 오는 것에 맞춰 짰다. 선묵 스님 일행은 네팔에서 티베트로 넘어가 중국 란저우(蘭州), 둔황(敦煌), 시안(西安), 칭다오(靑島)를 거쳐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코스로 일정을 맞췄다. 이 길은 먼 옛날 혜업 스님, 혜룬 스님, 법륜 스님, 혜초 스님 등 구법선사들이 걸었던 순례의 길이다.
 
  이번 ‘네팔 룸비니 평화의 불 이운(移運)’ 행사는 정전(停戰) 60주년 기념에 맞춰 ‘분단의 벽을 넘어 평화를 꿈꾸다’를 주제로 진행되었다. 기자는 총 18일 일정 중 4박5일간의 네팔 일정만 소화했다.
 
룸비니 ‘평화의 불’ 이송 경로.
 
  부처 탄생지로 가는 苦行
 
네팔 룸비니동산에서 ‘평화의 불’을 채화하고 있다.
  룸비니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에서 룸비니로 가기 위해서는 험산준령(險山峻嶺)인 마하바라트레크산맥(해발고도 6946m)을 넘어야 했다. 한쪽은 바위와 토사가 흘러내려 언제라도 덮칠 것 같은 산이고, 한쪽은 천 길 낭떠러지인 도로를 타고 버스로 끝도 없이 달리는 길이다. 취약한 도로 사정 때문에 200여km의 거리를 장장 8시간 넘게 달려서야 겨우 룸비니에 닿을 수 있었다. 고행(苦行)이 따로 없었다.
 
  선묵 스님은 이미 익숙한 길인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스님은 네팔과 인연이 깊다.
 
  선묵 스님과 네팔의 특별한 인연은 2006년에 시작됐다. 당시 스님은 MBC 석가탄신 기념 특집 방송 촬영차 2주 동안 불교 4대 성지를 순례했다. 부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를 비롯해 수행처이자 득도(得道)한 곳인 보드가야, 5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說法)한 장소인 사르나트(녹야원), 고향으로 가던 중 열반에 든 곳인 쿠시나가르 등이다.
 
  이때 쿠시나가르 열반당을 방문했다가 그곳 주지인 갸네르슈아르 스님으로부터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9과를 기증받았다. 스님은 이 중 3과를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에 모시기 위해 한 달여 후 네팔을 방문했다.
 
  “부처께서는 29세에 출가해 35세에 깨달음을 얻으셨고, 45년 동안 중생을 상대로 설법하시다 80세에 열반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죽음이 멀지 않음을 아시고 고향 룸비니로 향했으나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지요. 그분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한국에 온 저는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들과 의논한 끝에 고향에 가시고자 했던 부처님의 염원을 뒤늦게나마 이뤄 드리고자 네팔을 방문했었지요.”
 
  2008년 2월 스님은 300명의 순례단과 함께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네팔을 방문했다. 당시 이 행사는 국내외 많은 언론이 ‘2552년 만에 이뤄진 부처님의 귀향(歸鄕)’이라는 내용으로 보도했다. 스님은 “당시 네팔 방문이 쉽지만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네팔은 왕정(王政)이 무너진 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1996년 마오쩌둥 노선을 추종하는 마오이스트들이 입헌군주제 폐지와 공산국가 건설을 목표로 무장 봉기해 정부군과 대치하면서 내전(內戰)이 끊이지 않았죠. 내전은 2007년 공산반군과 정부의 휴전협정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잦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즈음 우리 선교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해 정부에서는 여러 경로로 우리 순례단의 네팔 방문을 막으려 했어요.”
 
  자칫 잘못하면 300명의 순례단이 공산반군의 인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국정원에서는 총무원을 통해 네팔 방문 취소를 요청해 왔다. 반면 네팔 정부는 “300명 규모의 성지 순례단이 전세기를 타고 네팔에 오는 것은 처음”이라며 어떻게 하든 순례단을 유치하려 했다. 거듭된 내전으로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경제적 타격이 크자 대규모 한국 순례단을 통해 네팔이 안전한 나라임을 전 세계에 홍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순례단을 공식 초청한 네팔 정부가 안전 문제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해 방문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수만 개의 연등 ‘룸비니 동산’ 밝혀
 
  그로부터 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룸비니에는 그 사이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탄생지에서 가까운 곳에 호텔도 생기고,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박물관도 들어섰다.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탄생지 주변에는 수천m에 이르는 연못이 조성되는 등 성지로서의 면모를 갖춰 가는 중이다.
 
  불교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세계 불교 국가들의 문화 각축장이기도 하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태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17개국이 탄생지 가까운 곳에 사찰을 세웠다. 그중 만리장성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어마어마한 규모의 중국 사찰이 가장 눈에 띄었다. 선묵 스님은 “중국은 작년에 1억 달러를 룸비니에 보내 108m짜리 불상을 세우려 했지만 유네스코가 허락하지 않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룸비니 동산 안으로 들어가자 친근하면서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수천 개의 연등이 호수 위를 수놓고 있었던 것. 연등의 중심에 ‘진신사리 봉안 탄생불 불사리탑’이 화강암으로 조성돼 우뚝 서 있었다. 스님은 “이곳이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들이 조성한 ‘평화의 공원’”이라며 “유네스코 관리 지역 안에 탑을 세운 건 우리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작년 2월에 조성한 이 불사리탑에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평화의 공원’은 룸비니 동산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데다 규모도 9240m²(2800평) 정도로 큰 편이었다. 선묵 스님은 “이 땅은 2008년 네팔 방문 당시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 수상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008년 이곳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 불사리 이운 법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는데 코이랄라 수상께서 ‘붓다가 2552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도 기쁜데, 평화의 불씨까지 심어 주고 가니 고맙다’며 ‘108산사순례기도회가 다녀간 기념비를 하나 세울 의향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망설임 없이 ‘네팔 정부가 땅만 주면 기념비를 세우겠다’고 답했습니다. 코이랄라 수상이 각료회의를 통해 ‘유네스코 지역 안에 6600m²(2000평) 규모의 땅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구간은 부처 탄생지를 중심으로 99만m² 규모다. 이 중 6600m²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코이랄라 총리가 이렇듯 큰 선심을 쓴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묵 스님의 설명이다.
 
  “저희 순례단이 내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네팔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네팔 정부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네팔 정부는 순례단이 방문 중이던 6일 동안 이 약속을 지켰지요. 저희가 가는 지역에는 공산반군이 점령한 곳도 있었는데, 길을 터 주어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희 순례단의 안전을 위해 서로 대치 중이던 양측 대표가 모여 극적으로 합의를 했다고 하더군요. 순례단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이운하는 동안에는 서로 싸우지 않기로 말입니다. 코이랄라 수상은 저희 순례단의 방문이 계기가 되어 네팔이 진정한 평화를 찾았다며 고마워했어요.”
 
  이곳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탄생 석주를 세운 것이 작년 2월이다. 탄생불 불사리탑에는 ‘불사리 이운 평화 기원 대법회 기념’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선묵 스님은 “이렇듯 깊은 인연으로 이번에는 룸비니 동산에 있는 평화의 불을 모시러 온 것”이라며 “이 평화의 불이 남북 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돼 있는 한반도에 평화를 불러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네팔 대통령이 직접 불 전달
 
람 바란 야다브 네팔 대통령이 카트만두 외교부 청사에서 ‘평화의 불’을 선묵 스님에게 직접 전달하고 있다.
  “2600년 전 이곳 룸비니 동산에서 첫발을 내디디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된 지 17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현재, 한반도는 동서, 남북 간의 갈등으로 불안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네팔 정부와 국민들의 원력으로 세계 평화의 정착과 남북한 화해를 기원하는 ‘평화의 불’을 성대하게 봉송하는 것은 정말 뜻 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네팔 방문 4일째인 지난 5월 18일 룸비니 동산에서 ‘평화의 불 한국 이운 기념법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꺼만 싱 라마(Kaman Singh Lama) 주한(駐韓) 네팔 대사 등 주요 인사와 500여 명의 불자가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평화를 기원하는 양국의 전통 민속 공연과 채화식 후 석가모니 탄생 석주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거행됐다.
 
  ‘평화의 불’은 1986년 당시 네팔 가넨루러 비터 왕세자가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해 3000년 동안 타고 있는 ‘꺼지지 않는 불’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가져온 불씨를 합쳐 룸비니에 유지해 온 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 유엔 가입국들 사이에 ‘평화의 불’은 ‘자비와 평화의 화신’으로 상징되고 있다고 한다.
 
  룸비니에서의 일정을 마친 순례단은 ‘평화의 불’을 안고 카트만두로 향했다. 300여km를 버스로 13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순례단을 태운 버스가 무글링, 치투완(나랑가드) 등 불교 신자들이 많은 도시를 지날 때마다 수만 명의 인파가 거리로 나와 보리수 잎과 꽃잎을 뿌리며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더러는 버스 안으로 들어와 바나나와 사과 등의 과일을 주고, 화환의 의미인 색색의 스카프를 목에 걸어 주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얼굴의 시민들은 “‘평화의 불’이 한국까지 무사히 이송돼 남북 화합의 불꽃으로 타오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입을 모았다.
 
  선묵 스님은 “순수한 마음으로 진심을 모아 평화를 기원하는 저 사람들이야말로 부처”라며 감동스러워했다.
 
  네팔 일정의 마지막 날인 4월 19일 오전에는 카트만두 대통령궁에서 ‘룸비니 평화의 불 한국 이운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람 바란 야다브 네팔 대통령을 비롯해 크힐 라즈 레그미 네팔 수상, 란 구마르 쉬레스타 문화부 장관, 마더브 프라사드 기미래 내·외무부 장관 등 네팔 정부 주요 인사와 김일두(金一斗) 네팔 주재 한국 대사가 참석했다. 룸비니에서 채화해 온 ‘평화의 불’은 네팔 대통령이 직접 선묵 스님에게 전달했다.
 
 
  이송 중 중국 사찰에도 불 나눠 줘
 
  초여름 날씨라지만 연일 30℃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선묵 스님은 4박5일의 네팔 일정을 쉼 없이 소화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까지 나온 스님은 탈진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티베트와 중국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지난 5월 7일 삼각산 도선사에서 스님을 만나 네팔 이후의 이송 과정을 들었다. 스님은 “이번 ‘평화의 불’ 이운 과정엔 육해공의 모든 교통수단이 총동원됐다”고 말했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티베트 라싸까지는 비행기로 갔고, 라싸에서 칭다오까지는 열차와 버스를 번갈아 탔어요. 카트만두나 라싸 공항은 몸이 힘들어 휠체어를 탔는데, 그 덕에 불씨를 안고도 무사히 통관할 수 있었습니다. 혹여 통관이 안 될 것을 우려해 여러 사람의 가방에 불씨를 나눠 넣었는데, 그중 한 분이 엑스레이 검사에 걸려 재검 명령을 받았지요. 모두가 ‘걸렸구나’ 생각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머리에 뿌리는 스프레이가 문제였다며 압수하곤 통관시켜 주더군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도우셨구나 싶었어요.”
 
  애초 계획은 카트만두에서 라싸까지도 육로를 이용해 버스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네팔에서의 강행군으로 스님의 체력이 이미 바닥이 난 데다 해발 5000m 고지의 히말라야산맥을 넘다 보면 고산병이 찾아올 것을 우려해 코스를 급히 조정한 것이라고 한다. 스님은 “통관이 안 될 경우를 생각해 한 팀은 예정대로 육로를 통해 라싸까지 갔다”고 말했다. “오는 길에 란저우 보은사, 톈수이(天水) 길상사, 시안 법문사, 뤄양(洛陽) 소림사에 들렀는데, 가는 곳마다 수백 명의 신도들이 마중 나와 환영해 주더군요. 또한 ‘평화의 불’이 남북 관계에 좋은 역할을 했으면 한다는 기도도 정성껏 해주었습니다. 평화는 세계 어디서나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스님은 들르는 사찰마다 ‘평화의 불’을 분화해 주었고, 신도들은 “영원히 꺼트리지 않고 보존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스님은 “중국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톈수이 길상사에 들렀을 때 법문을 했는데, 수많은 신도들이 제 앞에 100원, 200원 시주를 하더군요. 중국 돈 100원이면 꽤 큰돈입니다. 나중에 모아 보니 150만원 정도 되었어요. 여기에 좀 더 보탠 돈을 쓰촨성 지진 이재민 돕기 성금으로 냈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법문사는 선묵 스님이 주지로 있는 도선사와 자매결연을 맺은 사찰이다. 중국 최대 사찰인 이곳에는 불지(佛指)사리가 봉안돼 있다. 불지사리는 석가모니 손가락 사리를 이른다. 스님은 법문사와 자매결연을 맺게 된 사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2005년 법문사 불지사리가 한국으로 이송돼 잠실 펜싱경기장에서 법회를 가졌습니다. 법회 후 불지사리가 전국 사찰 중 유일하게 봉안된 곳이 도선사였어요. 당시까지만 해도 법문사와 특별히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연히 그렇게 저희 절로 오게 된 것이었죠. 보통 인연이 아닌지라 이듬해인 2006년 5월 108명의 신도를 모아 법문사를 방문해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108산사순례기도회’ 아이디어를 얻어 귀국 직후 결단식을 갖고 시작하게 되었지요.”
 
 
  108산사 순례하며 108 염주 완성
 
네팔에서 티베트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봉송한 ‘평화의 불’을 선묵 스님이 임진각에 마련한 봉화대에 점화하고 있다.
  ‘평화의 불’은 5월 2일 칭다오에서 인천항까지 배로 이송된 후 임진각에 도착했다. 애초 목표는 중국에서 평양으로 들어가 판문점을 통해 임진각에 도착하는 것이었지만 북한 당국과의 협상이 이뤄지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날 임진각 평화누리광장에서는 자승(慈乘)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해 박보희(朴普熙) 한국문화재단 총재, 이윤구(李潤求) 대한적십자사 총재, 안철수((安哲秀) 의원 등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분단의 벽을 넘어 평화를 꿈꾸다’ 법회가 열렸다.
 
  박보희 총재는 축사에서 “오늘부로 4000만 하나하나의 가슴속에 평화의 불꽃이 심어졌고, 북한 2000만 동포에게도 심어질 것”이라고 말했고, 이윤구 총재는 “저 강 건너 개성에서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동해안 거진에서 금강산을 거쳐 원산으로 함흥으로, 그리고 두만강까지 평화의 횃불 행진이 오늘 시작된다고 믿는 제 가슴은 뛴다”며 감격해했다.
 
  선묵 스님은 “머지않아 평양에도 ‘평화의 불’을 밝힐 날이 올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 ‘108산사순례기도회’가 오는 23일이면 80번째 사찰인 영월 보덕사에 갑니다. 7년째 진행하고 있는 이 순례기도회가 108산사를 모두 채우려면 앞으로 2년여가 남았지요. 앞으로 남은 28개 사찰 중에는 신계사, 성불사, 보현사 등 북한에 있는 3개 사찰도 포함돼 있습니다. 남북 긴장 관계가 완화되면 이곳 사찰로 순례를 떠날 예정이지요. 그곳에 가면 ‘평화의 불’을 나눠줄 계획입니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어요.”
 
  선묵 스님은 사찰 순례를 갈 때마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 스님은 “앞으로는 ‘평화의 불’도 함께 가지고 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방문하는 사찰마다 ‘평화의 불’을 분화해 줄 것이라고 했다.
 
  매달 5000여 명이 참여하는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은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다. 이 때문에 사찰 순례가 있는 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수십 대의 버스가 지정 사찰로 몰려드는 통에 인산인해를 이루곤 한다. 사찰 순례가 끝나면 스님은 신도들에게 염주 한 알씩을 선물로 준다. 108산사를 찾아 108배 참회하고 108번뇌를 소멸하는 동안 108염주를 만들어 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사찰 순례가 끝난 후 사찰 근교에는 직거래 장터가 열립니다. 처음에는 반대했는데, 신도들이 하루 종일 집을 비웠으니 저녁에는 식구들에게 지역에서 나는 좋은 재료로 밥을 지어 먹이고 싶다고 해서 허락했지요. 신도들은 부담 없는 가격에 좋은 농산물을 살 수 있어서 좋고, 지역 농민들은 정성껏 키운 농산물을 제값에 팔 수 있어 상부상조가 되더군요. 지역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직거래 장터뿐만 아니라 사찰 부근 군부대에 초코파이를 보시하는 일도 하고 있다. 지금까지 회원들이 부대에 전해 준 초코파이가 300만 개가 넘어 생산업체로부터 감사패까지 받았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와의 남다른 인연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선묵 스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4세에 불가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 진학이 어렵게 되자 도선사에 스님으로 있던 먼 친척이 “절에 가면 네 한 입 덜고 한문 공부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해 선문(禪門)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보릿고개 시절이라 당시에는 불가와 특별한 인연이 없어도 일찍부터 절에 들어가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 역시 도선사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불가와 인연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교회를 다니고, 어머니는 성당을 다니셨으니까요.”
 
  배곯지 않기 위해 들어온 절이었지만 어려운 시절이라 절집에도 먹을 것이 풍부하지만은 않았다. 스님은 행자 시절을 ‘툭하면 졸음이 오고, 툭하면 배가 고팠던 시절’로 기억했다. 불쑥불쑥 속가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고개를 들 때면 한없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계곡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유, 우리 동자 스님 고생이 많네. 내가 빨아 줄게, 이리 줘요.”
 
  스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스님들이 아시면 혼나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괜찮습니다. 우리 스님은 나중에 큰스님이 되실 겁니다”라는 덕담과 함께 빨래를 해 주었다고 한다.
 
  선묵 스님은 기도를 마치고 떠나는 날에서야 그 아주머니가 육영수 여사였다는 것을 알았다. 스님은 “어느 광복절에 육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마치 속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도선사 명부전에는 육영수 여사뿐만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몇 해 전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때 석가 탄신에 맞춰 도선사를 방문했다. 30여 년 동안 박 전 대통령 내외의 제사를 도선사에서 모시고 있었지만 그 딸이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인연의 실타래는 실로 묘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40여 년 전 내 마음을 움직였던 그분의 미소가 인연의 씨앗이 되어 그 따님의 발걸음을 이곳 도선사로 이끌었으니 말입니다. 따님의 얼굴에서 육영수 여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지요.”
 
 
  스승 청담 스님의 뜻 이룰 터
 
  어린 행자를 가르쳐 지금의 스님으로 키운 이는 청담 스님이다. 정통 선종(禪宗)의 맥을 이은 청담 스님은 광복 이후 왜색불교인 대처승 제도를 청산하기 위해 불교정화운동을 주창했던 인물이다. 선묵 스님에게 “청담 스님이 어떤 분이었느냐”고 묻자 “근엄하고 엄하셨지만 자애로운 분이었다”며 일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상좌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봄날 청담 큰스님이 출타 중인데, 보살 한 분이 큰스님 드리라고 호박떡을 해 왔다. 호박색이 곱게 우러나 먹음직스럽게 생긴 떡이었다. 스님은 큰스님이 돌아오면 드리려고 호박떡을 염화실 한쪽에 잘 보관했다. 그런데 누군가 들어와서 그만 그 떡을 다 먹고 말았다.
 
  얼마 후 큰스님이 돌아왔고, 그는 여느 때처럼 붓글씨를 쓰는 큰스님 옆에서 열심히 먹을 갈았다. 그런데 그때 호박떡을 해 온 보살이 찾아와 큰스님에게 “스님, 떡 잘 드셨습니까”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스님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그 보살은 “아침에 큰스님 드시라고 호박떡을 갖다 드렸는데…”라고 하자 큰스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아, 그 떡. 호박떡이 아니라 꿀떡이더구먼. 맛있게 잘 먹었어요”라고 답했다. 보살은 세상에 없이 기쁘고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선묵 스님은 보지도 못한 떡을 “잘 먹었다”고 말한 청담 스님의 그 한마디가 무언(無言)의 법문 같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큰스님을 위해 정성껏 해 온 떡을 큰스님이 먹지 않았다고 하면 그 보살이 얼마나 서운해했을 것이냐는 것이다.
 
  청담 스님은 그에게 “산중에서 거리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가야 한다”는 법문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 그는 “스승의 법문을 좇아 산사순례기도회를 열심히 쉬지 않고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룸비니 동산에서 이운해 온 ‘평화의 불’이 검게 그을린 스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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