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추적] 10·26 직전 金載圭가 朴正熙 생일 선물로 준비한 2만 달러짜리 파텍 필립 시계의 행방

10·26 사건 뒤 朴槿惠씨에게 전달되다!

배진영    ironheel@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1979년 8월 하순 제네바 대표부에 구입 지시, 10월26일 파텍 필립社 시계 제작 비용 「청구서」 발송. 全斗煥 中情 부장서리의 손을 거쳐, 朴槿惠씨에게 전달돼
殺意의 탄생
金載圭가 주문한 파텍 필립 회중시계의 모습. 시계를 본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합성했다.
  1979년 10월26일 오후 4시 40분경, 중앙정보부장 金載圭(김재규)는 鄭昇和(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셨습니까, 鄭총장. 오늘 저녁 뭐 바쁜 일 있습니까』
 
  『특별한 일 없습니다』
 
  『저도 별일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면서 조용히 시국 이야기나 합시다』
 
  金載圭의 『저도 별일이 없습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30분쯤 전 車智澈(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저녁 때 대통령 만찬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대통령 만찬장 옆으로 鄭昇和 육군 참모총장을 부를 때 金載圭의 마음속에 「朴正熙를 죽이겠다」는 살의가 강렬했을 것이다.
 
  金載圭가 朴正熙 대통령을 살해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은 언제였을까?
 
  金載圭는 재판과정에서 朴正熙 대통령 시해를 「민주회복 국민혁명」으로 규정했다. 그는 『3군단장 시절이던 1973년 朴대통령이 우리 부대를 방문했을 때, 유신을 단행한 朴대통령을 감금하고 사임을 강요할 생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9년 4월에도 朴대통령을 살해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요지의 진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金載圭는 1979년의 朴正熙 대통령의 생일(11월14일)에 맞춰 선물하기 위해 스위스의 「파텍 필립」社에 최고급 회중시계를 주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79년 10월26일 만찬장에서 권총을 빼들 때까지, 金載圭는 朴대통령의 마음을 얻어 자신의 곤경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는 미련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8월 하순 첫 지시 내려와
 
  駐제네바 대표부에 근무하던 N서기관(후에 안기부 해외정보국장 역임)은 1979년 8월 하순 서울의 중앙정보부로부터 電文(전문)을 한 장 받았다. 당시 제네바 대표부 대표는 5共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盧信永(노신영)씨였다.
 
  「일요일 오전 10시에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는 KAL기 편으로 긴급문서를 보내니, 기장으로부터 직접 문서를 수령해 결과를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N서기관은 제네바에서 300km 떨어진 취리히 공항으로 갔다. 공항의 KAL 사무소장으로부터 서류 봉투 하나를 받았다.
 
  서류 봉투 안에는 세계적인 名品시계 제작업체인 파텍 필립社에서 제작한 회중시계 사진과 함께 편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편지는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의 金모 행정비서관이 쓴 것이었다.
 
  <사진과 같은 회중시계를 파텍 필립社나 피아제社에 주문하되, 11월 중순까지 물건이 서울에 도착해야 한다. 회중시계는 18K로 하고, 시계 前面과 後面의 도안은 나중에 보내겠다>
 
  N서기관은 다음날 아침, 파텍 필립社와 피아제社를 차례로 방문했다.
 
  파텍 필립社의 영업담당 책임자는 『11월 초순까지는 시계를 만들기가 어렵겠다』고 했다. 「시계의 金型(금형)을 새로 제작해야 한다. 시계 표면의 조각과 부속품 제작을 匠人(장인)들이 手작업으로 해서 빨리 만들 수 없다. 시계를 만들고 나서 한국의 기후와 습도 등을 고려해 한 달 동안 시험 가동을 해야 한다. 최소한 6개월 전에는 주문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N서기관은 그날 오후 피아제 本社를 찾아갔다.
 
  피아제社는 당시 김포공항 면세점에서 自社제품을 팔고 있었다. N서기관은 피아제社의 극동지역 영업담당자와 친한 사이였다. N서기관의 얘기를 들은 극동지역 영업담당자는 다음날 아침 『시간이 너무 빠듯하지만, 한국과의 거래 관계 등을 고려해 시계를 제작하겠다』는 연락을 주었다.
 
  N서기관은 이런 사실을 중앙정보부에 電文으로 보고했다.
 
  다음 일요일, 서울에서 시계 도안과 김갑수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피아제 시계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시계 제작 문제는 金載圭 부장님의 각별한 관심사항이니 차질 없이 처리하라. 시계는 반드시 파텍 필립社에서 제작하되, 기일內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
 
 
 
 「근축 탄신 1979」
 
  N서기관은 시계 도안 사진을 보는 순간, 그 시계가 朴正熙 대통령 생일 선물용이라는 것을 알았다. 회중시계 덮개에 봉황 紋樣(문양)의 대통령 紋章(문장)이 새겨지고, 가운데에는 훈장을 패용한 朴正熙 대통령의 반신상 사진이 들어가도록 도안되어 있었다. 회중시계 뒷면 좌우 양쪽에는 여러 개의 무궁화가, 가운데에는 「근축 탄신 1979」라는 글씨가 새겨지게 되어 있었다.
 
  N씨의 기억이다.
 
  『「어떤 놈이 이런 걸 선물할 생각을 했나」 하고 화가 났어요.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역겨웠죠.「朴대통령이 이런 것을 받고 좋아한다면, 朴 대통령도 말기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날 아침, N 서기관은 파텍 필립社 영업담당 책임자를 다시 찾아갔다.
 
  다급한 사정을 설명하고, 시계제작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N서기관이 딱해 보였는지 영업책임자는 匠人을 한 사람 불렀다. 匠人은 N서기관의 설명을 듣고, 도안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이 시계 제작에만 전념하게 해 준다면, 기일內 제작이 가능하다. 시간 외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파텍 필립社가 金載圭 부장이 주문한 시계 제작을 맡게 됐다.
 
  시계 제작을 주문할 때 일정 액수의 보증금을 내게 되어 있었다. 파텍 필립社에서는 N씨가 외교관 신분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제네바 대표부 명의의 작업요청 公翰(공한)으로 대신하게 해 줬다.
 
  작업요청 공한은 「작업을 의뢰한다」는 취지로 쓴 글에 제네바 대표부의 官印을 捺印(날인)한 것이었다. N서기관은 盧信永 대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10월 중순 파텍 필립社에서는 送狀(송장·Invoice-제작비용 청구서)을 보내왔다. 手제작 시계의 경우, 匠人의 인건비가 가장 큰 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작업이 진척되고 나서야 送狀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시계 가격은 1만9000달러였다. N서기관의 1년치 봉급과 각종 수당을 합친 금액과 맞먹는 액수였다.
 
  N서기관이 送狀을 제네바發 외교행낭 편으로 한국으로 발송한 것은 현지시각으로 10월26일 오전이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10월26일 오후, 궁정동 만찬이 결정되고, 車智澈 경호실장과 金載圭, 金載圭와 鄭昇和 육군참모총장 사이에 전화가 오고갈 무렵이었다.
 
  제네바 현지 시각으로 10월26일 오후 9시경, 영국 BBC 방송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긴급 뉴스를 내보냈다. 제네바 대표부 직원들은 대개 이 방송을 청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金載圭 中情 부장이 朴正熙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N서기관은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렇게 대통령에게 아부하려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기억했다.
 
  N서기관은 그날 한잠도 못 잤다. 시계의 送狀은 서울로 발송했는데, 시계를 주문했고, 시계 값을 내야 할 金載圭 中情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10월29일 월요일 아침(제네바 현지시각), N서기관은 처음 자신에게 시계 관련 서신을 보냈던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의 金모 행정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립 파텍에 맡긴 시계 제작을 취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N서기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N서기관은 10월30일 아침 파텍 필립社 영업책임자를 찾아갔다. 영업책임자는 대뜸 『당신이 온 이유를 안다. 시계 제작을 취소하러 온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뉴스를 보고 회중시계 도안의 인물이 피살된 朴正熙 대통령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朴대통령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표한 후, 『이 문제는 내일 열리는 이사회에서 논의하겠다』고 했다.
 
 
 
 파텍 필립社, 『구입 않으면 시계 박물관에 전시하겠다』
 
  N서기관은 11월1일 다시 파텍 필립社를 찾아갔다.
 
  영업 책임자는 『이사회에서 국가적 재난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기로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영업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사회 결정 이후 회중시계를 제작하던 匠人에게 작업 중단을 지시했다. 그는 「내가 만든 시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고, 이제 마무리 작업만 하면 된다. 일과 시간 후에 개인적으로 작업을 계속해 시계를 완성하겠다」고 한다. 匠人들이 좀 독특한 사람들이다』
 
  파텍 필립社의 영업책임자는 제작 중인 시계를 사무실로 가져와서 N서기관에게 보여줬다. 시계는 마무리 손질만 조금 남은 상태였다.
 
  영업책임자는 『朴대통령의 유가족이나 측근들 가운데 이 시계를 구입할 만한 사람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봤다. N서기관은 『현재로서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지만, 한번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영업책임자는 『한국에서 구입해 갈 사람이 없으면, 완성된 시계를 우리 회사의 시계 박물관에 전시할 생각』이라며 N서기관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시계박물관에 전시되면 역사적인 물건이 되어 나중에 비싸게 팔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N서기관은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됐다. 그의 회고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생일 선물로 주문했다가 대통령의 피살로 주인을 찾지 못한 시계가 파텍 필립社 시계박물관에 있다는 것이 알려져 봐요. 해외토픽감 아닙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씹어대고, 억측이 나돌겠어요? 나라 망신이고, 돌아가신 朴正熙 대통령에게도 큰 累(누)가 되는 거죠. 시계 값이 내 봉급의 서너 달치 정도만 됐어도, 내 돈으로 샀을 거예요. 1년치 봉급이나 되는 高價여서 그럴 수도 없고…. 그때 제가 마음 고생한 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돌파구는 이듬해인 1980년 3월에 열렸다.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직무대리 尹鎰均·윤일균)는 대통령을 시해한 범죄집단으로 낙인찍혀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12·12 이후 부상한 保安司(보안사)에 밀려 숨도 크게 못 쉬던 시절이었다.
 
  中情에서는 간부들을 보내 해외 파견 요원들을 격려하도록 했다.
 
  유럽으로는 金琯奉(김관봉) 국제정보국장이 파견됐다. 金국장은 유럽 주재 요원들을 이탈리아 로마로 소집했다.
 
  회의가 끝난 후 N서기관은 金琯奉 국장을 獨對(독대)했다. 문제의 파텍 필립 회중시계에 대해 털어놓고,『나라와 朴正熙 대통령에게 累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中情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N씨의 회고다.
 
 
 
 구입지시와 번복, 그리고 再번복
 
  『金국장은 「이런 엄청난 일이 있었나」라며 깜짝 놀라시더군요. 그는 내 얘기가 옳다면서 「이는 역사적 사건의 物證이 되는 만큼 반드시 해결되도록 하겠다」며, 그동안 중앙정보부 비서실과 주고받은 관련 서신과 電文들을 보내 달라고 하더군요. 저녁 식사 때 金국장이 여러 차례 잔을 권했고, 저는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어요』
 
  제네바로 돌아온 N서기관은 金琯奉 국장에게 관련 문건들을 보냈다. 1980년 4월10일경, 中情 본부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회중시계를 구입하기로 결정했으니, 가격과 물품 인수 가능 일자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N서기관은 파텍 필립社 영업 책임자를 찾아가 시계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파텍 필립社는 처음 제시했던 가격대로 1만9000달러를 요구했다. 물건 인도 시기는 20일 후로 결정했다.
 
  한숨을 돌린 N 서기관에게 1주일쯤 지나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中情에서 「시계 구입을 보류하기로 했으니, 파텍 필립社에 가서 이 사실을 통보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N서기관은 처음 시계를 억지 주문했을 때부터의 일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파텍 필립社에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분노와 허탈감을 술로 달래며 시간을 보냈다.
 
  닷새쯤 지나서 中情에서 다시 통보가 왔다. 「시계를 구입하기로 결정됐고, 대금을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中情 본부가 파텍 필립 시계 구입 문제를 놓고 우와좌왕한 것은 국내 정치정세 때문이었다.
 
  1980년 4월14일 全斗煥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중앙정보부장 署理를 겸임하면서, 「이미 집행하기로 결정된 지출이라도 일정금액 이상인 경우 再결재를 받아 집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파텍 필립 시계 구입에 대해 再결재가 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실무자들이 「일단 보류」 지시를 제네바에 내렸던 것이다.
 
  朴대통령 생일선물로 만든 파텍 필립 시계는 어디로 갔을까?
 
  N씨는 『나는 파텍 필립에 시계값을 전해주고 1980년 7월에 귀국했다. 그 시계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N씨는 『당시 中情 본부의 담당 국장에게서 「파텍 필립 시계를 全斗煥 부장서리에게 전달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金琯奉 당시 中情 국제정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다가 中情에 들어갔던 그는 1980년 中情에서 물러난 후 학계로 돌아가, 경희大 평화복지대학원장 등을 지냈다.
 
 
 
 시계는 全斗煥씨 손을 거쳐 朴槿惠씨에게 전달
 
   ―N서기관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파텍 필립 시계 대금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난 朴正熙 대통령도, 金載圭 부장도 존경하는 사람이오. 돌아가신 분들에게 累가 될 수 있는 얘기는 하지 않겠어요』
 
  ―사실 여부만 확인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尹鎰均 당시 中情 부장직무대리나, 崔圭夏 대통령에게 물어보세요』
 
  ―그럼 그 일이 尹鎰均씨나 崔圭夏 대통령에게 보고가 올라갔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 거네요.
 
  『하여튼 나는 할 얘기가 없어요』
 
  尹鎰均 당시 중앙정보부장 직무대리(中情 차장보·同차장 역임. 예비역 공군 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1980년 봄 金琯奉 국장이 「金載圭 부장 시절, 파텍 필립社에 朴正熙 대통령 생신 선물로 시계를 발주했다가 인수하지 못해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보고해서, 처리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시계를 주문했다가 인수하지 않으면 나라의 위신에 관계되는 일 아닙니까. 「예산 문제가 있겠지만, 처리해야 할 것 아니냐」라면서 처리를 지시했어요』
 
  ―崔圭夏 대통령에게도 그 건이 보고됐다던데요.
 
  『全斗煥 합수본부장과 매일 崔圭夏 대통령에게 1일 보고를 했어요. 보고를 했으면 그때 했겠지만, 그 문제만 따로 보고한 기억은 없네요』
 
  ―혹시 문제의 시계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난 그해 5월 中情을 떠났는데, 내가 있는 동안에는 그 시계가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취재결과, 문제의 파텍 필립 시계는 朴槿惠 한나라당 대표에게 전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1974년 8·15 저격사건 이전에는 陸英修 여사, 이후에는 朴正熙 대통령을 모셨고, 지금도 朴正熙 대통령 유족들과 자주 접촉하고 있는 金斗永(김두영) 前 청와대 비서관은 시계의 행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0년엔가, 保安司에서 사람이 나와서 朴槿惠씨에게 그 시계를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朴槿惠씨는 「받아 놓기는 했지만, 별로 기분 좋은 물건도 아니어서 어디 한 구석에 처박아 놓았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고 하더군요』
 
  朴槿惠 한나라당 대표에게 『시계가 있다면 사진 촬영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朴대표 측에서는 『흉물스러운 시계라 잘 보관하지 않았고,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10·26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 金載圭 부장이 파텍 필립 시계를 朴正熙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金斗永 前 대통령 비서관은 이렇게 말했다.
 
  『朴대통령께 양말 한 켤레도 선물할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金載圭 부장이 그런 호화시계를 朴대통령에게 드렸다가는 불벼락을 맞았을 거예요. 朴대통령이 차시던 세이코 시계는 요즘 가격으로 하면 10만원짜리쯤 됐을 거예요. 朴대통령은 고급 공무원들이 롤렉스 시계 등 고급 시계를 차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긋이 노려보셨어요』
 
 
 
 『양말 한 켤레도 선물 못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걸 잘 알고 있을 金載圭 中情부장이 왜 호화 시계를 외국에까지 주문했을까요.
 
  『그런 고급 시계로 朴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했으니, 金載圭가 미련했던 거죠』
 
  ―朴正熙 대통령 시절, 中情부장이나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이 朴대통령에게 생신 선물을 한 적이 없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국무총리나 국무위원들은 어땠습니까.
 
  『아무 것도 안 하고 넘어가기는 뭣하고 해서, 「국무위원 일동」 명의로 蘭 화분을 하나 마련해서 총무처 장관이 청와대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어요』
 
  尹鎰均 前 中情 부장직무대리도 『中情부장이 대통령 생신 선물을 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며 『생신 잔치를 中情이 관리하는 安家에서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행사 준비는 경호실에서 했다』고 말했다.
 
  金載圭 부장이 朴正熙 대통령에게 高價의 파텍 필립 시계를 선사하려 한 이유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대체로 일치했다.
 
  시계 주문을 맡았던 N씨의 얘기다.
 
  『朴대통령의 신임을 잃어가던 金載圭 부장이 朴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통령 탄신일에 맞추어 특별히 주문 생산한 회중시계를 선물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검절약하던 朴正熙 대통령이 그런 선물을 받고 기뻐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巨金을 들여 朴대통령의 생신선물을 하려고 했던 金載圭가 과연 민주화를 위해 朴대통령을 시해한 「義士(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尹鎰均 前 중앙정보부장 직무대리는 『파텍 필립 시계는 金載圭씨가 마지막 순간까지 朴正熙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애썼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했다.
 
  金載圭는 朴대통령 생일(11월14일)을 19일 앞둔 1979년 10월26일 저녁 朴正熙 대통령을 살해했다.
 
  金載圭가 시해현장을 뜨자 金桂元(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현장에 있던 中情 직원들과 함께 朴正熙 대통령을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옮겼다. 朴대통령은 車中에서 숨졌다.
 
  군의관들은 그 시신이 朴正熙 대통령임을 알지 못했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합수부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 (朴대통령)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 처치 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손목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도금이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6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