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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

일본에서 만난 日中 역사의 흔적과 유산

100년 전 역사의 흔적이 日中 관계 악화를 막아주는 보험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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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으로부터 배워 중국을 혁명하려 했던 궈모뤄, 저우언라이, 루쉰, 왕자오밍, 장제스
⊙ 한·일·중 정상회의 후 중국공산당 외교수장인 연락부장 방일, 기시다 총리 등과 만나
⊙ 日中, 겉으로는 으르렁대면서도 물밑 교류 통해 관계 조율
⊙ 망명 생활 중인 쑨원을 평생 도운 일본인 미야자키
⊙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집에서 하숙했던 루쉰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중국 외교 실세인 류젠차오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장은 5월 31일 일본을 방문, 기시다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사진=신화/뉴시스
  5월 26일 거의 5년 만에 한일중(韓日中) 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 개최일이 불과 사흘 전인 5월 23일 발표됐다. 중국이 계속 미루다가 한국 측에 ‘최종 통보’를 하면서 갑자기 결정된 것이다. 게다가 황당하게도 3국 회담 개최일이 일요일이었다. 천지개벽 상황이나 전쟁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일요일에 정상회의를 하는 경우가 세상에 있을까? 중국이 일정을 갑자기 결정하면서 나타난 초유의 ‘일요일 정상회담’이었다.
 
  거기다 5년 만에 열린. 한국 외교를 핵심과제로 장시간 준비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1박 2일 회담 성과를 보면 텅 빈 말잔치에 불과하다. 약속이 따르는 공동성명(Joint Statement)이 아니고, 백화점 이벤트식의 공동선언문(Joint declaration)이 전부다. 인재양성, 문화교류, 경제활성화 전부 좋다. 그런데 3국 정상회담 단골 메뉴던 ‘한반도 비핵화(非核化)’가 아예 빠졌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 비핵화’가 기본이었다. 이게 21세기 들어서자 갑자기 한국도 포함하는 ‘한반도 비핵화’란 표현으로 바뀌더니 2024년에 이르러 마침내 ‘비핵화’라는 이슈 자체가 3국 회담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전부 중국의 입장 변화에 따른 결과다. 3국 정상회담은 3국의 공동이익을 위한 정상회담이 아니라, 3국 각자의 이견(異見) 발표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한국의 ‘셰셰 외교’
 
윤석열 대통령은 5월 2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리창 중국 총리와 한·일·중 3국 정상회의를 마친 후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대통령실
  중국의 일방통행 외교에 대한 한국 측 대응을 보면 너무도 한심하다. 중국의 한 미디어는 한국이 ‘하나의 중국에 대한 원칙’을 재확인했다고 전했다. 주고받는 것이 외교다.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에 관한 지적이나 개선책이 논의될 줄 알았다. 한국·일본·중국 그 어느 미디어를 살펴봐도 안 나온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만해협 주변에서의 중국의 힘자랑에 대한 한국 측 우려나 입장도 없다. 홍콩·티베트·위구르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이다.
 
  일본은 어떨까? 5월 26일 오후 한중 회담은 50분 정도 이뤄졌다. 일중 회담은 1시간 정도 진행됐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대만 문제는 물론, 홍콩·티베트·위구르 나아가 센카쿠(尖閣) 위협에 대한 우려를 중국 측에 ‘전부’ 전했다. 더불어 ‘하나의 중국’에 대한 일본 측 입장을 ‘원칙’이 아닌 ‘정책’으로 처리하면서 전달했다. ‘원칙’은 불변이지만, ‘정책’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하나의 중국’이란 생각도 국익(國益)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의 중국’에 대해 한국은 중국의 주장에 따라 ‘원칙’으로 받아들이지만, 일본·미국·유럽 심지어 인도도 ‘하나의 중국’은 ‘정책’으로 받아들인다.
 
  한국은 올여름부터 ‘글로벌 중추국가’를 내걸고 본격적인 해외 홍보에 나설 예정이라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선진 문명·문화가 ‘글로벌 중추국가’의 기반이다. 탈북자 강제송환 문제 하나도 못 꺼내고, 전 세계가 비난하는 대만·홍콩·티베트·위구르 문제에 눈을 감으면서 ‘글로벌 중추국가’를 자처하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중국을 상대로 한 ‘세셰(謝謝) 외교’는 야당만의 전유물이 아닌 듯하다. 중국 앞에만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은 여야(與野)가 매한가지다.
 
 
  중국공산당 중앙연락부장의 방일
 
  한국에서 3국 회담 성과에 관한 자화자찬이 이어지던 5월 28일, 일본에서는 흥미로운 뉴스가 나왔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장의 일본 방문 소식이다. 류 부장은 3박 4일간 머물면서 기시다 총리 등 일본 정부 인사들은 물론 여야 정치인들과의 공식 만남 수십 건을 소화했다.
 
  류젠차오는 현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인 왕이(王懿)의 뒤를 이을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2024년 현재 중국 외교진 가운데 가장 바쁜 실세(實勢)다. 사실 공산당 1당 독재체제 아래서 공산당의 외교 수장(首長)인 그는 외교부 수장보다도 더 높다.
 
  류젠차오 방일(訪日)은 한중외교와 일중외교의 격차를 잘 보여준다. 3국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중국 외교의 최고위급 인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하나의 중국’이란 ‘원칙’을 재천명하고, 탈북자 송환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한국은 건너뛰고, 대만·홍콩·센카쿠는 물론 중국에 사사건건 맞서는 일본을 중국공산당 외교 수장이 방문한 것이다.
 
  상식적 판단이지만, 아양을 떨면서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이라면 ‘안방 가구’ 정도로 처리될 뿐이다. 아양·친절 나아가 ‘셰셰’를 우정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방통행을 일삼는 주먹 대장의 눈으로 보면 ‘약자의 싸구려 웃음’에 불과하다. 눈웃음을 치면 칠수록, 한층 더 무시하고 힘으로 억누른다. 국제무대에서 중국을 비판하고 공산독재의 실상을 까밝히는 나라는 어떨까? 물론 중국으로서야 무시하고 억누르고 싶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동조하는 주변국과 함께 힘을 모아, 반대와 비판의 칼날을 한층 더 예리하게 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침묵하는 ‘안방 가구’ 같은 나라보다, 제 목소리를 내는 나라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일본 메이저 신문·방송은 민감한 외교 관련 뉴스는 ‘원칙적으로’ 정부 발표에만 의존한다. 물론 논평·분석·비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외교 문제일수록 언론의 제멋대로 보도는 없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인데 왜일까? 국익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달라도 국익 앞에서는 하나의 입장으로 정리된다.
 
  일본의 미디어 보도를 보면, 류젠차오 관련 뉴스 대부분은 중국 측 주장으로만 채워져 있다. “류젠차오는 기시다와 만나, 하나의 중국에 대한 일본의 ‘원칙’을 요구했다.” “후쿠시마(福島) 처리수 문제에 대한 이의(異意)를 제기했다.” “일중 사이에 난제가 쌓여 있다.”
 
  이러한 류젠차오의 주장에 대해, 기시다 총리와 일본 정부가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에 대한 보도는 없다. 당연히 기시다 총리는 일본이 ‘정책’으로서의 하나의 중국을 견지한다고 밝혔을 것이다. 처리수 문제는 물론 대만 문제에 대한 기시다 총리의 반응도 직전 3국 회담 때와 똑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미디어는 이에 대해서는 입을 닫다시피 하면서 구체적인 보도를 하지 않았다.
 
  류젠차오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하나의 중국이란 ‘원칙’이 아닌 ‘정책’을 재확인했다”라고 자랑하기 어렵다. 이 결과 류젠차오의 호통에 가까운 요구만 부각할 뿐, 정작 기시다의 반응은 생략된 기사만이 등장한다. 공산당 외교 수장의 체면은 살려주지만, 실제 회담 내용은 일본 주장 그대로 가는 식이다. 실제 상황이야 어찌 됐든, 승자·패자가 분명한 ‘제로섬(Zero Sum)’이 아닌, 모두 웃고 악수를 나누는 ‘윈-윈(Win-Win)’ 보도인 셈이다.
 
 
  궈모뤄와 규슈대학
 
궈모뤄
  일중 관계의 진수(眞髓), 고차원 외교의 모델이라고 할까? 미중 디커플링(Decoupling) 구도와 함께 점점 험악해지는 일중외교지만, 기반이나 근본으로 가면 조화롭고도 향기로운 리듬과 박자로 채워져 있다. 3박 4일에 걸친 류젠차오 방일 일정을 봐도, 양국 간 심층에 흐르는 ‘특별한 공기’를 실감할 수 있다. 각계각층이 서로 간의 의견을 나눴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5월 31일 류젠차오의 규슈(九州)제국대 방문이다. 류젠차오는 방일 마지막 날인 이날 후쿠오카(福岡)현 지사와 만나고, 규슈대 학생들과 환담도 했다. 규슈대에는 현재 1400여 명의 중국인 학생들이 유학 중이다. 학부만이 아닌 박사 과정 중국 유학생도 많다. 규슈대는 화학·의료·환경·에너지 분야에 강한 곳이다. 이 대학에서 연구한 노벨상 수상자만도 두 명이나 된다. 바로 옆 구마모토(熊本)에 세워진 반도체공장 TSMC의 핵심 인력도 주로 규슈대학에서 제공될 전망이다.
 
  류젠차오가 왜 규슈까지 갔는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이런저런 분석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키워드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 바로 중국 공산당 문학의 대부 격인, 궈모뤄(郭沫若·1892~1978년)가 답이다. 1920년대 국민당 입당 후 다시 공산당원으로 변신한 뒤 1940년대 사회주의 선전문학을 창조해낸 궈모뤄는 1918년 규슈제국대 의학부에 입학해 공부했다. 중국인은 ‘규슈대=궈모뤄’로 알고 있다. 궈모뤄는 마르크스 사상을 담은 일본의 책들을 번역해 중국에 퍼트렸고, 이후 반봉건 사회주의 문학의 대부로 필명을 떨쳤다. 규슈대는 류젠차오를 중앙도서관으로 안내해, 궈모뤄가 직접 쓴 ‘실사구시(實事求是)’ 현판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국인이라면 궈모뤄가 일본에서 공부를 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공산당 외교 수장이 규슈까지 간 것은 궈모뤄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중국의 국부 쑨원
 
  일중 사이에 흐르는 특별한 공기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양국 관계에서 시작됐다. 청(淸)나라 말기 중국인 해외 유학생이 가장 많았던 나라는 일본이다. 한국(조선)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세상을 깊고 넓게 보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독립을 지키며 근대화에 성공한 아시아 최고 모델이었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년) 의사가 그러했듯이, ‘아시아주의’를 통해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자는 생각이 당대 지식인의 대세였다. 수많은 중국의 인재들이 이런 시대의 공기에 맞춰 일본 곳곳으로 몰려왔다.
 
  내년 2025년은 한 세기 전 일본에서 펼쳐졌던 일중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는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2025년은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1866~1925년)이 세상을 떠난 지 100주년째 되는 해다. 그는 말년에 간암으로 고생하다가 1925년 베이징(北京)에서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파란만장했던 혁명가의 삶을 마감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은 현재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과 거의 동격(同格)에 올라선, 중국 역사상 최대·최상의 절대권력자로 변신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진핑이라도 쑨원을 넘어설 수는 없다. 쑨원의 정통성과 위상은 중국은 물론, 대만 여야 정치인 모두에게도 통한다. 쑨원과 관련된 갖가지 행사가 2025년 중국과 대만에서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쑨원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는 일본에서도 열릴 것이다. 아마 중국의 쑨원 관련 행사가 초대형 일회성 행사라면, 일본에서는 작은 규모의 연중 이벤트가 계속 열릴 것 같다.
 
  왜 일본이 쑨원 사후 100주년에 주목할까? 중국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친일(親日) 인사가 바로 쑨원이기 때문이다. 쑨원은 중국 혁명의 모델을 일본에서 찾은 인물이다. 그가 청나라 스타일의 변발과 의상을 버리고, 서양식 머리와 옷으로 갈아입은 것도 1895년 일본 도착 이후다.
 
  이후 쑨원은 수시로 일본에 머물면서 물심양면으로 일본 지사(志士)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 자금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쑨원은 일본 체류 중 일본 여성과 결혼해 딸도 하나 낳았다. 현재 쑨원의 증손자가 일본에서 살고 있다. 일본과 피로 맺어진 인물인 셈이다. 흔히 쑨원의 호(號)로 알려진 ‘중산(中山)’은 그가 일본에 망명하고 있을 때 사용했던 일본식 가명 나카야마(中山)에서 비롯된 것이다. 궈모뤄처럼 쑨원도 일본을 자신의 청춘과 새로운 세계관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일본이 쑨원을 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마 한국 좌파의 기준으로 보면, 쑨원은 중국인으로서의 영혼을 버리고 일본을 통해 중국을 개조하려 한 악질적인 친일파일 것이다. ‘파묘’ 대상인 것은 물론, 민족반역자 리스트 1위에 오를 듯하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친일파’를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일중 사이에 흐르는 특별한 공기는 이런 근현대사의 흔적 속에서 탄생하고 진화해왔다.
 
 
  나쓰메 소세키와 루쉰
 
나쓰메 소세키와 루쉰의 하숙집 터임을 알려주는 표지판.
  필자가 일중 사이의 이런 ‘특별한 공기’에 대해 주목하게 된 것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년)의 흔적을 훑던 중, ‘기묘한 공간’ 하나와 만났다. 도쿄대 정문 아카몬(赤門)에서 서쪽으로 1km 떨어진 집으로, 나쓰메가 도쿄대 영어 교수로 있을 때 살았던 작은 하숙집이다. 교수이자 문학가로 활동했던 나쓰메가 1906년 12월부터 8개월 동안 거주했던 곳인데, 당시의 흔적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었다. 그곳에 세워진 작은 기념비를 읽던 중, 같은 시대에 이 하숙집에서 살았던 의외의 인물에 대해 알게 됐다. 《아큐정전》 《광인일기》를 지은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1881~1936년)이 바로 그 사람이다.
 
  루쉰은 21세 되던 1902년 청나라 국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나쓰메가 머물던 하숙집에서 생활한 것은 1908년 4월부터 8개월간이다. 4명의 중국인과 함께 좁은 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일본과 중국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8개월 차를 두고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만약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하숙집에 머물렀다면? 100여 년 전 도쿄대 주변 하숙집을 상상하면서, 두 사람의 우연이자 필연적인 삶과 문학의 궤적이 너무도 신비하게 느껴졌다.
 
  비문을 보고 있는데 이 하숙집 자리를 구경하러 온 중국인 유학생들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일본을 찾는 중국인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성지(聖地) 중 하나가 이곳이라고 한다. 그들은 중국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아큐정전》의 내용도 전부 외우고 있었다. 루쉰의 젊을 때 사진도 보여줬다. 왜 중국인들이 나쓰메의 문학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이때 만난 중국인 유학생들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저우언라이가 즐겨 찾던 음식점
 
저우언라이
  사실 필자의 도쿄 내 중국 근대사 흔적 찾기는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로 식당이다. 도쿄가 주된 탐사 공간으로, 20세기 초 중국인과 인연을 맺은 식당은 거의 다 방문했다. 중국인 유학생 집단촌이었던 고서점 거리 간다(神田)에서부터, 긴자(銀座)에 흩어진 중국 요리 노포(老鋪)들을 돌아다니며 20세기 초 중국 청년들의 의식주 생활을 상상할 수 있었다. 1917년 7월, 19세 나이로 일본 유학에 나선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년)는 도쿄의 오래된 중국식당 곳곳에 남아 있는 전설이다. 저우언라이가 즐겨 먹었다는 요리나 음식 재료가 도쿄 노포 식당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당연하지만, 이 식당들은 일본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의 21세기 필수 방문지가 되고 있다.
 
  메이지(明治)대 중앙도서관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는 노포 ‘간요로(漢陽樓)’도 그중 하나다. 유학생 저우언라이의 단골 식당으로, 그가 매일 즐겼다는 사자두(獅子頭) 요리를 지금도 맛볼 수 있다. 사자두는 돼지고기로 만든 초대형 미트볼로, 1300엔만 주면 저우언라이가 먹던 당시 맛 그대로 먹을 수 있다. 식당 내부에는 20여 년 전 들렀던 저우언라이의 가족 사진도 걸려 있다. 맛을 통해 이어진 100년 일중 역사가 작은 식당 안에 흐른다.
 
  저우언라이가 도쿄에 온 직후 다녔던 일본어 학교의 흔적도 노포 간요로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일본어를 배우러 온 중국인이라면 모두가 들른다는 동아고등예비학교 옛터다. 원래는 고등학교 역사를 기념하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중국인이 몰리면서 저우언라이가 공부했던 학교라는 점이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
 
 
  쑨원선생좌석
 
도쿄 하쿠산 신사에 있는 쑨원선생좌석. 사진=유민호
  도쿄의 하쿠산 신사(白山神社)는 쑨원 서거 100주년 기념식이 열릴 경우 각광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곳 중 하나다. 현재 쑨원을 기리는 공공장소는 일본 전역 10여 군데에 달한다. 이 가운데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하쿠산 신사다. 노포 간요로에서 북쪽으로 3km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본당 바로 오른쪽에 쑨원 얼굴을 청동으로 새긴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쑨원선생좌석(孫文先生座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청동 얼굴 바로 밑에 붙어 있는 평평한 돌을 지칭하는데, 방문한 중국인들 모두가 손으로 어루만진다고 하는 행운의 검은 돌이다.
 
  신해혁명 1년 5개월 전인 1910년 5월, 쑨원은 하쿠산 신사 주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혁명을 준비하며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긴 꼬리의 혜성을 만났다고 한다. 무려 10일간이나 계속된 혜성으로, 쑨원은 매일 같은 장소에 나와 혜성을 지켜봤다. 혁명이 성공할 것이란 계시가 담긴 신호라면서 기쁜 마음으로 매일 지켜봤다는 것이다. 당시 혜성을 지켜봤다는 자리의 돌이 바로 ‘손문선생좌석’이라는 검은 돌이다. ‘쑨원이 혁명 성공을 확신한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쑨원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지명수배된 상태였다. 죽이든 살리든, 쑨원을 잡을 경우 현시세 1억원에 상당하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청나라 정부는 도쿄에 암살단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하쿠산 신사 주변은 도시 빈민이 사는 슬럼가에 가까웠다. 일부러 청나라 정부의 눈을 피해 숨어 살았던 것이다. 그런 불안하고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밝은 혜성이 나타났으니 이를 지켜보는 혁명가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쑨원의 맹우 미야자키 도텐
 
망명 시절의 쑨원(앞줄 오른쪽 끝)과 미야자키 도텐(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작년에 대만 국립중정기념관(장제스기념관)에서 만난 특별전시회가 기억난다. 일본 체류 중 쑨원 행적에 관한 전시회다. 놀랍게도 쑨원은 인생의 약 9년 정도를 일본에서 보냈다. 1895년 청일 전쟁 후 처음으로 일본에 망명한 이래, 1924년 고베(神戶)에서의 연설을 끝으로 1년 뒤 사망할 때까지 일본을 터전으로 혁명운동을 벌였다. 중정기념관에서는 이 같은 혁명가의 고난한 삶을 담은 무성영화 흑백필름이 상영되고 있었다.
 
  필자가 눈여겨본 것은 쑨원 바로 옆에 서 있는 일본 옷을 입고 수염으로 얼굴이 뒤덮인 남성이다. 쑨원의 주요한 행적과 관련해 여기저기서 반드시 등장하는 일본인이다. 한국인이라면 일본 옷을 입은 일본인이 국부의 바로 옆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만 최고 권위의 기념관에서는 자랑스럽게 그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대만은 물론 중국인 지식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1871~1922년)이란 인물이다. 쑨원보다 다섯 살 아래로, 평생을 중국혁명 지원에 바쳤던, 쑨원 자신이 형제이자 동지로 받아들였던 인물이다. 그는 1897년 처음으로 만난 이래, 쑨원보다 3년 앞선 1922년 세상을 뜰 때까지 생사를 함께한 근대 일본의 자유사상가다.
 
 
  ‘일본의 대혁명가’
 
  쑨원이 하쿠산 신사 주변에서 혜성을 보며 혁명 성공을 확신할 당시, 바로 옆에서 힘이 된 사람도 바로 미야자키다. 오갈 데 없던 쑨원을 자신의 집에 초청해 도쿄 반청(反淸) 중국인 연락사무소로 활용됐던 곳이 미야자키의 집이었다. 미야자키는 당시 일본 육사에 유학 중이던 장제스(蔣介石·1887~1975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쑨원과 연결시켜주기도 했다. 중국혁명은 물론 국민당 창당의 산파역을 한 인물이 미야자키다. 필자 생각에는 무보수에 개인 자격으로 미국 독립운동에 참전했던 프랑스의 라파예트(1757~1834년)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다.
 
  음모론적인 관점에서 미야자키를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는 일본 정부의 공작원도 아니었고, 부자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일본인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생활고에 허덕이며 가난과 싸워야만 했다. 평소에 미싱으로 옷을 만들어 판매한 돈으로 쑨원을 도왔다고 한다. 그는 24시간 청나라 정부가 보낸 밀정에게 쫓기면서 대외활동에 적극 나설 수 없었던 쑨원을 대신했다. 일본 내에서 쑨원의 활동은 모두 미야자키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1922년 미야자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쑨원은 즉시 ‘일본의 대혁명가, 중국혁명의 절대적 공로자’라는 조문 전보를 보냈다. 쑨원은 평소에도 둘과의 관계를 ‘추심치복(推心置腹)’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마음을 열고 성의를 다해 만난다’는 의미의, 평생 동지이자 친구란 말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1905~1972년)와 마오쩌둥의 교유는 한국의 지식인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만은 물론 중국의 지식인들은 에드가 스노보다는 쑨원과 미야자키 사이의 우정에 더욱 주목한다. 같은 동양인으로, 아시아 공화정과 평화주의를 논했던 혁명사상가의 정열과 우정이 30년 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매국노 왕자오밍의 무덤
 
왕자오밍
  5월 도쿄에 머물면서 스기나미(杉並)구에 있는 소타이지(宗泰寺)란 유서 깊은 절에 들른 적이 있다. 14세기 창건된 사찰로 선(禪) 수행자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들른 이유는 중국 근대 최고의 매국노(賣國奴·漢奸)로 악명 높은 왕자오밍(汪兆銘·1883~1944년)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왕징웨이(汪精衛)란 이름으로 통하는 그의 무덤이 소타이지 경내에 있다. 수만여 개의 무덤이 늘어선 곳이지만, 사찰 내 도우미를 통해 간단히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아오는 중국인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무덤 현장에는 ‘왕자오밍 선생’이란 큰 비석과 함께, ‘애국자 쑨원의 고제(高弟), 동아(東亞)의 위인 여기 잠들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무덤 바로 옆에는 100년은 넘었을 벚나무가 서 있다.
 
  중국 역사에 밝다면 왕자오밍의 행적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원래 쑨원이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던 인물은 장제스가 아니라 왕자오밍이었다. 쑨원의 비서 출신인 왕자오밍은 쑨원 사후 그의 후광을 배경으로 한때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군(軍)을 장악한 장제스는 무력을 배경으로 왕자오밍을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왕자오밍은 외교를 통해 전쟁을 끝내자고 주장했다. 왕자오밍도 청나라 국비장학생으로 1904년 일본에서 공부했던 인물이었다. 일본은 왕자오밍을 내세워 난징(南京)에 친일 괴뢰정부를 만들어 장제스와 공산당에 대항했다. 이 때문에 왕자오밍은 한국에서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이듯, 중국에서 희대의 매국노로 불리게 되었다.
 
  왕자오밍은 1944년 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와서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다. 사후 난징의 쑨원 무덤 바로 옆에 안장됐지만, 1년 뒤 일본이 패망한 후 장제스에 의해 무덤이 파괴되었다. 도쿄 소타이지의 왕자오밍 무덤은 당시 난징 무덤 주변의 파편을 모아 다시 만든 것이다. 도쿄 아오야마(靑山) 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무덤처럼 신체가 아닌 무덤 주변 파편이나 소지품 머리카락 몇 개로 채워진 상징물인 셈이다.
 
 
  앙시앵 레짐에 저항했던 ‘젊은 그들’
 
도쿄 시내 소타이지 경내에 있는 왕자오밍의 묘비. 사진=유민호
  필자가 소타이지를 찾아간 것은 왕자오밍을 재조명하거나 추앙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쑨원·왕자오밍·저우언라이·장제스·궈모뤄·루쉰 모두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면서 청(淸)으로 상징되던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구체제)’ 타도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들 선각자들이 청년 시절에 가졌던 ‘단심(丹心)’이다. 열심히 세상을 배워 나라와 국민에게 도움을 주려 노력했던 꿈과 용기가 너무도 부럽고 존경스럽다. 실패도, 좌절도, 배신도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일본은 당대 중국 선각자들의 무대였다. 그들은 일본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고, 일본의 근대화 성공 스토리에 주목하면서 도움도 받았다. 중국·대만은 물론 일본도 이 같은 선각자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박수를 보낸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중무장한 중국 순시선 네 척이 센카쿠 앞바다에 출현했다는 소식이 속보(速報)로 떴다. 중무장한 중국 순시선은 언제라도 공격할 듯한 태세라고 했다.
 
  이처럼 일중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험악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인이 잘 모르는 겉모습일 뿐이다. 필자는 일중 관계는 속으로는 한국이 생각하는 만큼 거칠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 곳곳에 남아 있는 20세기 초 중국인들의 흔적들이 그 증거다.
 
 
  중국의 反日, 한국의 反日
 
  중국은 반일(反日) 하나만으로 세상을 재단(裁斷)하지 않는다. 미래와 상호번영을 위해서라면 반일도 한순간에 잊어버리기도 한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반일은 있지만, 절대적 가치이자 주문(呪文)인 ‘닥치고 반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일중 관계가 험악해질수록 서로를 자제시킬 쿠션 모드가 배후에서 가동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 한국은 반일이란 잣대 하나로 세상 전부를 재단한다. 반일 잣대를 통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고 ‘친일파’ ‘적’이라고 비난한다. 20세기 초 일본에서 공부했던 수많은 문화예술인, 군인, 관료, 경제인들은 그렇게 매도당하고 있다.
 
  일본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는 명구(名句)가 하나 있다. “일본인은 칼로 사람을 죽이지만, 한국인은 (반일이나 주자학 대의명분을 통한) 입으로 상대를 죽인다”는 말이 그것이다. 필자는 하나 더 첨가하고 싶다.
 
  “일본인은 칼, 한국인은 입, 중국인은 돈으로 상대를 죽인다.”
 
  돈은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는 개념과 무관하다. 주고받으면서 돌고 도는 것이 돈이다. 필자는 중국인이 돈에 열중하는 한, 일중 관계는 ‘결코’ 극단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100여 년 전 일중 관계의 흔적은 이 같은 ‘상식’을 지켜주는 양국의 든든한 자산이자 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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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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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    (2024-07-13) 찬성 : 0   반대 : 0
명문입니다. 한중일 관계의 뿌리에 대한 배경과 역사적 사건의 인물 중심으로 그들의 행적과 한 일에 대해 조명 하고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근거 있게 제시해 주신 글, 근래 최고입니다. 우리의 젊은 세대가 더욱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분야별, 인물별로 구분하여 소상하게 책으로 발간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많은 한중일 관계 연구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참조 할 만한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일본은 칼로, 한국은 말로, 중국은 돈으로 사람을 죽인다 100% 공감 합니다.
  lee    (2024-06-26) 찬성 : 0   반대 : 0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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