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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희귀사진으로 보는 중국공산당 100년

한 알의 불씨가 曠野를 불사르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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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당시의 매스게임. 권력을 탈환하려는 마오쩌둥의 욕망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 전역을 大動亂 속으로 몰아넣었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租界)의 어떤 집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중국 곳곳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50명. 중국공산당 창당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회의에 참석하면 준다는 지원금에 혹해서 참석한 사람도 있었다. 그 지원금은 소련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얼마 후 프랑스 조계 공무국(工務局·경찰)의 추적이 시작됐다. 대부분이 흩어지고 12명이 상하이 인근 자싱(嘉興)으로 몸을 피했다. 회의는 7월 31일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시후(西湖) 연우루(煙雨樓) 앞에 띄워놓은 배 위에서 중국공산당 창당을 결의했다. 이들 중에는 후난성(湖南省)에서 올라온 28세의 청년 마오쩌둥(毛澤東)도 있었다.
 

  창당 기념사진 같은 것은 없었다. 오랜 투쟁과 도피 생활 속에서 처음 자신들이 모였던 프랑스 조계의 집이 어디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 회의 날짜에 대한 기억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1938년 5월 마오쩌둥은 제1차 당대회가 열린 달의 첫째 날인 7월 1일을 창당기념일로 하자고 제의했다.
 
상하이 인근 자싱의 西湖에 띄운 배 안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됐다.
  미국 언론인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홍군(紅軍)사령관 주더(朱德)와의 인터뷰를 기록한 책의 제목처럼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살랐다’. 12명으로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난창(南昌)봉기나 광저우(廣州)코뮌 같은 초기의 시행착오,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토벌전과 그 뒤를 이은 대장정(大長征) 같은 시련을 거치면서 살아남았다.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1923~1927년), 시안(西安)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1937~1945년), 중일전쟁은 미약하던 중국공산당이 성장하고 생존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일본이 패망한 후 재개된 제2차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했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天安門)에 올라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하면서 “신중국(新中國)이 일어섰다”고 외쳤다.
 
  장제스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실망하고 있던 지식인들을 비롯한 많은 중국인이 ‘신중국’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곧 산산조각이 났다. 토지개혁,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사회주의교육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 등으로 신중국에서의 나날들은 영일(寧日)이 없었다. 수천만명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얼어 죽고, 처형되고, 자살했다. 마오쩌둥 사후(死後)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중국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1989년 천안문사태나 2019년 홍콩사태에서 보듯 중국공산당에 대한 도전은 유혈(流血)사태로 막을 내리곤 했다. 티베트나 위구르인,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의 기회를 놓친 한국인들도 중국공산당의 희생자들이다.
 
1924년 6월 16일 황푸(黃埔)군관학교 개교식. 쑨원(孫文·가운데), 장제스(원 안) 등의 모습이 보인다.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있으면서 붉게 물들인 학생들은 후일 중국 공산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 당원은 9000만명에 달한다. 중국공산당은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를 당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는 공산당 찬양가요처럼 공산당이 있었기에 아편전쟁 이후 ‘100년 국치(國恥)’에서 벗어나 오늘날과 같은 강성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육과 경축행사들이 계획되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1989년 천안문사태 희생자 유족들의 모임인 ‘천안문어머니회’가 지난 6월 4일 공산당을 향해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최근 입수한 희귀사진들로 중국공산당 100년을 되돌아보는 특집을 꾸며본다.⊙
 
제1차 국공합작 당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부들. 당시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전부장 대리 마오쩌둥. 후일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의 수반이 되는 왕징웨이(汪精衛·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1927년 4월 28일 처형되기 직전 리다자오(李大釗). 초기 중국공산당 지도자 중 한명인 그가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으로 있을 때 그의 밑에 있던 사서 중 한명이 마오쩌둥이었다.
 
1922년 6월 8일 프랑스 유학생들은 중국소년공산당을 만들었다. 뒷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가 저우언라이다. 덩샤오핑도 소년공산당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10월 추수폭동에 실패한 후 1500여명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장시성(江西省) 징장산(井岡山)으로 들어간 마오쩌둥은 그곳의 산적 세력을 흡수해 ‘징장산소비에트’를 건설했다. 가운데가 마오쩌둥(원 안), 그 왼쪽이 린뱌오다.
 
초기의 공산당 여성 당원들. 앞줄 왼쪽이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鄧穎超)다.
 
1927년 8·7 회의가 열렸던 현장. 장제스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진 후 열린 8·7회의에서 공산당은 무장폭동 노선을 결의했다. 이후 공산당은 난창봉기, 광저우코뮨, 추수폭동 같은 무모한 폭동을 이어갔다.
 
大長征을 마치고 옌안(延安)에 도착한 홍군. 1934년 10월 장시성 루이진(瑞金)을 출발한 홍군은 370일간 1만2500km에 달하는 ‘고난의 행군’을 했다. 8만6000여명에 달하던 병력이 60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대장정 이후부터 제2차 국공내전 시기까지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옌안은 오늘날 ‘革命聖地’가 되었다.
 
옌안 시절의 마오쩌둥과 그의 아내 장칭(江靑), 딸 리너(李訥). 리너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의 충실한 추종자 노릇을 했다. 후일 마오쩌둥의 경호원과 결혼했다.
 
집도 절도 없는 거지도 애국심은 있다! 중일전쟁 기간 중 방위성금 모금에는 거지들도 동참했다.
 
중일전쟁 중 철도를 파괴하는 항일 유격대원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투쟁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46년 1월 7일 벌어진 내전반대 시위. 하지만 이미 내전은 시작되고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후 충칭(重慶)에서 만난 장제스(가운데)와 마오쩌둥은 駐中 미국대사 패트릭 헐리(왼쪽)의 중재 아래 내전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중일전쟁 시기의 홍군 총사령관 주더(朱德·가운데)와 덩샤오핑(원 안). 덩샤오핑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에 후일 ‘10대 元帥’가 되는 군인들 못지않은 戰功을 세웠다. 이러한 군사적 경력이 후일 그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동북민주연군(제4야전군)의 작전회의를 이끄는 린뱌오(林彪·가운데), 린뱌오는 국공내전 승리의 일등 공신이었다. 오른쪽 끝이 펑전(彭眞·前 베이징시 제1서기, 전인대 상무위원장).
 
1949년 1월 베이징 점령 직전 공산당軍의 마지막 지휘소였던 서백파(西柏坡) 지휘소에서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왼쪽).
 
1949년 1월 베이징 함락 후 ‘베이핑(北平·당시 베이징의 이름)해방대회’를 앞두고 천안문에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사진이 걸렸다.
 
1964년 10월 중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물리학자 첸쉐썬(錢學森)은 ‘매카시 선풍’ 당시 중국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후 중국으로 귀국해 ‘중국 핵개발의 아버지’가 됐다.
 
1958년 국무원 부총리 시중쉰(習仲勳)과 두 아들. 왼쪽이 당시 5세던 시진핑(習近平) 현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다. 가운데는 시진핑의 동생 시위안핑(習遠平).
 
문화대혁명 초기의 문혁소조 지도부. (왼쪽부터) 치번위(戚本禹), 천보다(陳伯達), 장칭.
 
문화대혁명 당시 소총을 들고 혁명무용을 하는 소녀들. 험악한 시대였다.
 
1971년 5월 1일 천안문 성루에서 열린 마오쩌둥(왼쪽)과 린뱌오(오른쪽)의 마지막 만찬. 넉 달 후 린뱌오는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탈출하려다가 내몽골 사막에 추락해서 사망했다.
 
1976년 10월 6일 공산당 지도자 ‘4인방’(장칭·야오원위안·왕훙원·장춘차오)이 체포된 후 그들의 인형이 나무에 매달렸다. 4인방 체포에 환호하던 인민들은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될 때에는 4인방에게 환호했었다.
 
중국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의 상징과 같은 증권거래가 시작됐다.
 
1979년 1월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후야오방(胡耀邦). 1980~ 1987년 공산당 총서기로 개혁·개방을 이끌었다. 1986년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학생시위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이듬해 실각했다. 1989년 그의 죽음은 6·4 천안문사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산업현장을 시찰하는 덩샤오핑(원 안). 중국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실용적 지도자였지만, 천안문사태를 유혈진압한 냉혹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덩샤오핑(왼쪽)과 김일성. 젊어서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김일성은 중국 지도자들과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
 
북한노동당과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만남. (오른쪽부터)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 북한 부수상 박성철,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중국 정보총책 캉싱(康生).
 
미국 닉슨 대통령은 1972년 2월 중국을 전격 방문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손잡으면서, 중국이 국제무대로 복귀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시진핑과 중국 원로 과학자 우민. 시진핑은 원로 과학자들을 깍듯이 예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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