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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마오쩌둥의 ‘文革16조’와 문재인 정권

“정권 뒤집으려면 먼저 여론 형성하고 이데올로기 공작을 해야”(마오쩌둥)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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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無産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 발표… 많은 부분이 文 정권의 행태와 흡사
⊙ “중국공산당 治國이 가지는 근본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문제해결이 제도 마련의 측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운동에 의존한다는 점”(王丹)
⊙ 舊사상, 舊문화, 舊관습, 舊습관 전면 부정(문혁16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문재인)
⊙ “‘누가 우리의 敵이고,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가 혁명의 첫 번째 질문”… 문재인 정권의 편 가르기 정치와 통해
⊙ “가장 반동적인 우파를 고립시키고, 중도층을 쟁취하며, 대다수를 단결시켜야”
⊙ 교육개혁, 군대의 정치화, 경제의 정치화, 공권력의 선택적 적용 등도 흡사
  “‘문혁(文革)16조’라는 것이 있다. 지금 문재인(文在寅) 정권의 수법이 ‘문혁16조’를 닮았다.”
 
  이런 말을 듣고 의아했다. ‘문혁16조가 뭐더라?’ 싶어서 몇 년 전에 읽은 프랑크 디쾨터의 《문화대혁명: 중국인민의 역사 1962~1976》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총회 중에 중앙위원회가 내놓은 가장 주목할 만한 성명은 8월 8일에 대대적으로 홍보된,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이었다. 결정문은 주된 공격 목표가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당내 권력자들’이라고 선포했다. 그럼에도 진짜 권력은 지도부가 문화대혁명을 재가하자마자 중앙문화혁명소조에게로 넘어갔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의사결정 기관들을 사실상 완전히 장악했다.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은 순식간에 ‘16조’로 알려졌다. 결정문이 열여섯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까닭이었고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이 그 첫 번째였다. 결정문은 라디오를 통해서 신중하고 엄숙한 어조로 낭독되었다.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의지하고 대중의 주도권을 존중하라. 대자보와 대토론회를 적극 활용하여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대중이 무엇이 올바른 견해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모든 괴물과 악마를 적발할 수 있게 하라.’ 공장과 사무실과 학교에서는 사람들이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 방송이 나오기 3일 전에 주석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제목으로 직접 대자보를 휘갈겨 썼다. 간결하고 선동적인 말로 ‘반동적인 부르주아의 편에 서서 거센 파도처럼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운동을 억누르는 지도자 동지들’을 비난했다.〉
 
‘문혁16조’를 대서특필한 1966년 8월8일자 《인민일보》.
  여기서 총회란 1966년 8월 1~12일 열린 중국공산당 제8기 11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8기 11중전)를 말한다.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당내 권력자들’이란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 중국공산당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 등 이른바 ‘주자파(走資派)’를 말한다. 주석은 물론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이던 마오쩌둥(毛澤東)이다.(당시 총서기는 오늘날처럼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아니라 사무총장 격이었다. 당의 최고지도자는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문혁16조’와 오늘의 한국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16조’를 구해보고,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16개조의 내용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오늘날 한국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3反운동과 5反운동
 
  문혁16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오게 된 배경, 아니 문화대혁명[정식 명칭은 무산(無産)계급문화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정권(중공정권) 수립 이후 계속되어온 정치·사상 운동을 개략적으로라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89년 6·4톈안먼(天安門)사태 주역 중 한 사람인 왕단(王丹)은 “중국공산당 치국(治國)이 가지는 근본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문제해결이 제도 마련의 측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운동에 의존한다는 점”이라면서 “정치운동을 통해 사회적 동원을 진행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통치수법은 중국공산당의 전통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는 ‘정치운동’의 연속이었다.
 

  1951년에는 3반(反)운동이 일어났다. ‘반횡령·반낭비·반관료주의 투쟁’을 뜻하는 3반운동은 1949년 중공정권 수립 후 잠정적으로 정부 및 공공기관에 남겨놓고 있던 국민당 출신 공직자들을 축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이낙연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문재인 정부의 첫 총리로 취임한 직후 공무원들에게 ‘촛불혁명의 도구’가 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국정원·경찰청·국방부·문화체육관광부 등 각 부서에 적폐청산 TF를 만들어 공무원 조직을 굴복시키면서 정권의 도구로 만들어나간 것을 연상케 한다.
 
  마오쩌둥은 1952년에는 5반운동이라는 것을 벌이기 시작했다. 5반운동이란 뇌물수수, 탈세, 국가재산절도편취, 원료·작업 줄이기를 통한 부당이득 편취, 경제정보 절도 반대를 말한다. 이는 상공업 부르주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왕단은 “3반운동에서 5반운동으로 확장한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진정한 목적은 전면적 국영화(國營化), 사회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 통제, 사회생활의 모두를 국가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개조가 바로 5반운동의 진정한 목적이었다”면서 “5반운동은 정치투쟁이나 계급투쟁이지 경제투쟁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5반운동은 문재인 정권 들어와서 계속되어온 기업 옥죄기를 연상케 한다. 문재인 정권은 기업이 박근혜 정권 시절 정권 요청에 따라 공공 목적으로 출연(出捐)한 것을 뇌물수수, 적폐로 몰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52시간 근로 강요, 연·기금을 이용한 기업 통제(스튜어드십 코드) 강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소위 공정경쟁 3법 개정 등으로 기업을 계속 못살게 구는가 하면, 코로나 이익공유제라는 이름의 기업이익 편취까지 시도하고 있다. 아직 전면적인 국유화는 아니더라도 기업 활동의 자유는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한 각종 생활상의 규제는 왕단이 말한 ‘사회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 통제’를 연상케 한다.
 
 
  후펑사건
 
  1955년 5월 16일에는 후펑(胡風) 집단 사건이라는 것이 터졌다. ‘루쉰(魯迅)의 후계자’ 소리를 듣던 후펑은 공산정권 수립 이전에 공산당과 매우 가까웠던 지식인이다. 하지만 창작의 자유와 주관성을 강조했던 그는 공산정권 수립 이후에는 공산당에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문화예술 활동이 정치를 위해, 즉 공산당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오쩌둥은 후펑을 타도 대상으로 찍었다. 후펑을 비판하는 《인민일보》 논설은 마오쩌둥이 직접 꼼꼼하게 교열을 보았다. 후펑은 ‘반당(反黨)집단’의 수괴로 지목되었다. 2100여 명이 연루됐고, 62명이 격리 수감됐으며, 73명이 직무정지를 당했다.
 
  후펑사건으로 지식인 사회는 침묵을 강요당했다. 모두가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지식인들은 후펑 공격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당대 최고의 중국 지식인 중 한 사람이던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궈모뤄(郭沫若)는 〈반사회주의적 후펑강령〉 〈후펑 반혁명집단을 엄히 진압하라〉 등의 논설을 발표하면서 후펑 공격에 앞장섰다. 왕단은 “그들은 권력자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서 어려움에 빠진 동일 업종 사람들에게 돌을 던졌다”면서 “이는 일부 중국 지식인의 저열한 근성을 반영한다”고 비판한다. 이른바 ‘사법농단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해서 선후배, 동료 법관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출세길에 오른 이른바 ‘진보 법관들’, 그리고 동료 법관을 탄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김명수 대법원장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왕단은 “마오쩌둥에게 후펑사건의 용도는 반혁명 분자 숙청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사회주의 개조의 길에는 혁명과 반혁명의 계급투쟁이 늘 존재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계속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보는 사회주의교육운동, 문화대혁명에서도 계급투쟁, 계속 혁명 주장은 되풀이된다.
 
 
  ‘뱀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다’
 
중국공산당 총서기 덩샤오핑의 득의의 시절. 1963년 7월 中蘇 공산당 지도부 회의 참석차 출국할 때의 사진이다. ①주더 ②류사오치 ③저우언라이 ④덩샤오핑 ⑤펑전 ⑥양상쿤 등의 모습이 보인다. 저우언라이 뒤에 보이는 소녀들은 마오쩌둥의 딸들이다.
  중국공산당의 ‘정치운동’ 가운데 압권(壓卷)은 1957년 벌어진 반우파(反右派)운동이었다. 그해 2월 마오쩌둥은 난데없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을 제창하고 나섰다. 민주당파(중공정권 수립에 들러리로 참여했던 군소정치세력) 및 지식인들에게 당과 정부의 업무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비판해달라고 청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우리 공산당원에게 비판적 제안을 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몸이 동강 날지라도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라”면서 비판적 의견을 내놓으라고 독려했다.
 
  이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발언하고 싶어 해온 중국 지식인들의 전통적 욕구를 자극했다. ‘신(新)중국’ 수립 이후 공산독재 아래서 숨죽이고 있던 지식인들은 지난 8년 동안 억눌렸던 비판적 발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로 언론·출판·학문의 자유 위축에 대한 불만 토로,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과 공산당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 등이었다.
 
  그런데 1957년 6월 마오쩌둥은 갑자기 〈이것은 왜인가〉라는 《인민일보》 사설과 〈힘을 모아 반우파의 미친 공격에 반격하자〉라는 당내 문건을 내놓았다. 마오쩌둥의 독려에 속아 순진하게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민주당파 및 지식인들은 순식간에 ‘우파’로 몰려 숙청 대상이 됐다. 마오쩌둥 스스로가 백화제방 백가쟁명은 ‘뱀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 반우파투쟁으로 중국 지식인 중 30% 정도, 55만명 정도가 ‘독재의 대상’ ‘반대분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이때 반우파운동의 선봉에 선 사람이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이었다.
 
 
  대약진운동과 마오쩌둥의 2선 후퇴
 
국가주석 류사오치(왼쪽)와 당 주석 마오쩌둥의 다정했던 시절.
  이렇게 해서 반대세력을 일망타진한 후 마오쩌둥은 1957년 의욕적으로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을 시작했다. 자립적 공산주의 국가 조기(早期) 건설이라는 환상의 대가(代價)는 무시무시했다. 프랑크 디쾨터는 “이 실험은 최소 4500만명 이상이 과로나 굶주림, 폭행으로 사망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살인사건으로 끝이 났다”고 말한다. 1998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출판사에서 낸 《공화국중대사건기록》도 “1959~1961년 비정상적으로 사망하거나 감소한 출생 인구 수는 대략 4000만명”이라고 실토했다. 왕단은 “2000여 년간의 중국사에서 1만명 이상이 아사(餓死)하는 일은 203차례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그러나 이 수치를 모두 더해도 2991만8000명”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1947~1952년 진행된 토지개혁 과정에서 사망한 150만~200만명은 포함되지 않는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마오쩌둥의 권력 약화로 이어졌다. 1959년 7월 2일~8월 1일 열린 중앙정치국확대회의, 같은 해 8월 2~16일 열린 8기 8중전, 일명 ‘루산(慮山)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 국방부장은 대약진운동이 야기한 참상을 고발했지만, 마오쩌둥의 역공을 받아 숙청당했다.
 
  1962년 1월 11일 베이징(北京)에서는 중앙 및 지방 공산당 지도간부들이 참석한 이른바 ‘7000인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공산당 2인자던 류사오치 국가주석은 1959년 이후 겪고 있는 경제난에 대해 “3할이 천재(天災)이고 7할은 인재(人災)”라고 지적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지만, 일단 물러서는 쪽을 택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 주석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국무(國務)와 당무(黨務) 일선에서 물러났다.
 
  실권자(實權者)로 떠오른 류사오치는 “절대 마르크스나 레닌을 자처하지 말라” “어떤 당원도 다른 당원 군중에게 자신이 지도자가 되거나 자신의 지도자 권위를 유지하는 것을 옹호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류사오치는 “우리가 일을 그토록 엉망으로 만든 것은 겸양의 부재(不在)와 경험의 부재가 주된 원인이다” “우리는 시장(市場)을 그 어떤 것보다 위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대약진운동을 반성하고, 경제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할 수 있다는 시사(示唆)였다.
 
 
  사회주의 교육운동
 
류사오치의 인도네시아 순방 당시 옷맵시를 뽐냈던 왕광메이(위 사진)는 문혁 시절 비슷한 옷차림으로 홍위병들에게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자신의 이상(理想)과 성취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던 것처럼, 류사오치도 언젠가 자신을 부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갈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1962년 9월 중국공산당 제8기 10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8기 10중전)에서 마오쩌둥은 “우리는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반동(反動)계급이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우리의 경제를 강화하는 한편 당 간부들과 일반 대중, 중·하급 관료뿐 아니라 젊은이들을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공산주의 체제는 수립되었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반동세력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와 함께 마오쩌둥은 “모름지기 한 정권을 뒤집으려면 먼저 여론을 형성하고 이데올로기 방면의 작업을 해야 한다. 혁명적 계급도 그렇고 반혁명 계급도 그렇다”는 말도 했다. 이 말은 4년 후 ‘문혁16개조’에 다시 등장한다.
 
  이를 계기로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그해 5월부터 사회주의교육운동(사교운동)이 시작됐다. 마오쩌둥의 주장은 다분히 류사오치-덩샤오핑 등 당권파(黨權派)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 함의(含意)를 감지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로서 ‘계급투쟁’은 당연한 것이었다. 프랑크 디쾨터는 이 시기의 류사오치에 대해 “그는 자신이 결연한 혁명가이며 주석(마오쩌둥)을 계승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쩌둥 본인보다 더 극단적인 좌파의 길로 노선을 선회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류사오치는 아내 왕광메이(王光美)를 사회주의교육운동의 선봉으로 내세웠다. 부패관료, 불순분자 등으로 몰린 중·하급 간부들은 자아비판, 조리돌림, ‘제트기 자세’ 등의 고문과 폭행에 시달렸다. 류사오치와 왕광메이가 이때 자행한 일들은 문혁 기간 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 흐루쇼프 같은 인물이 등장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류사오치는 “문제는 바로 고위층에 있다”고 화답했다. 그해 여름부터 류사오치는 직접 사회주의교육운동을 이끌기 시작했다. 프랑크 디쾨터는 “한 역사가는 류사오치가 이끈 사회주의교육운동 기간에 500만명 이상의 공산당원이 처벌되고 7만7000여 명이 핍박당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했다”고 말한다.
 
 
  〈해서파관〉
 
  그러나 류사오치가 이끈 사회주의교육운동은 주로 농촌의 중·하급 간부나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원하는 것은 이런 하향식(下向式) 운동이 아니라 아래에서 당 상층부를 때리는 상향식(上向式) 운동이었다.
 
  마오쩌둥의 촉구에 따라 1964년 7월 초 중국공산당은 펑전(彭眞·베이징 시장. 후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역임)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문화혁명 5인 소조(小組)를 구성했다. 이듬해 1월 마오쩌둥은 사회주의교육운동 지침을 새로 만들었다. “당내 요직에 있는 주자파(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당권파)를 바로잡으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주자파’를 타격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들고나온 것은 문예비평이었다. 정변(政變)을 기획할 때마다 고전(古典)이나 문화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을 통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마오쩌둥의 주특기였다. 마오쩌둥 본인이 직접 나설 때도 있었고, 하수인을 내세울 때도 있었다. 이번에는 베이징 부시장이자 역사학자, 작가인 우한(吳)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이 타깃이 됐다. 해서는 명(明)나라 때 황제에게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올곧은 관리였다. 이 희곡에 대해 1965년 11월 10일 문예비평가 야오원위안(姚文元)은 대약진운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대약진운동을 주관했던 마오쩌둥은 어리석은 명나라 황제, 직간(直諫)한 해서는 전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를 오버랩시킨다는 얘기였다. 이는 우한의 상사(上司)로 베이징시를 장악하고 있는 펑전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1966년 3월, 1964년 7월 결성된 문화혁명 5인 소조 멤버 중 하나인 공산당 중앙선전부장 겸 문화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마오쩌둥 사상을 ‘비방’한 혐의로 물러났다. 이어 마오쩌둥은 펑전 베이징 시장 겸 베이징시당 제1서기, 뤄루이칭(羅瑞卿) 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루딩이, 양상쿤(楊尙昆) 중앙판공청 주임(후일 국가주석 역임) 등을 쿠데타 모의세력이라고 비난했다. 5월 16일에는 공산당은 펑전이 수도 베이징을 ‘수정주의(修正主義)의 요새’로 탈바꿈시켰다는 통지문을 고위층 인사들에게 회람시켰다. 이 ‘5·16통지’를 문화대혁명의 발단으로 본다. 펑전 등은 1966년 5월 말 해임됐다. 이들이 이끌던 문화혁명 소조는 천보다(陳伯達), 장칭(江靑), 장성(姜生), 야오원위안, 장춘차오(張春橋) 등으로 구성된 중앙문화혁명 소조로 대체됐다. 이런 일련의 사태 배후에 마오쩌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大字報의 등장
 
  마오쩌둥에게는 ‘혁명’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혁명예비군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바로 1949년 중공정권 수립 이후에 태어나고 교육받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정치운동들을 보면서 자라왔고, 문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사회주의교육운동을 통해 ‘당을 전복하려는 계급의 적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이들은 공산당이 마오쩌둥의 이념을 생활에서 실천했다고 하여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병사 레이펑(雷鋒)처럼 마오쩌둥의 충직한 투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베이징대 철학과 당 서기던 네위안쯔(元梓)는 5월 25일 ‘부르주아 세력이 베이징대를 장악했다’는 대자보(大字報)를 붙였다. 이 대자보의 사본을 받아본 마오쩌둥은 “파리 코뮌 선언문보다 훨씬 의미심장하다”고 칭찬했다. 네위안쯔가 붙인 대자보 내용은 6월 1일 방송을 타고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같은 날 중앙문혁 소조의 이론가 천보다는 《인민일보》에 발표한 논설을 통해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고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베이징의 대학, 중학 등에서 경쟁적으로 흑방분자(黑幇分子·공산당 내에 침투한 반동세력)들을 비난하는 대자보들이 나붙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마오쩌둥, 양자강을 헤엄쳐 건너다
 
  이렇게 세상을 흔들어놓고 마오쩌둥은 베이징을 떠나 우한(武漢)으로 내려갔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고, 코로나19가 시작된 바로 그 도시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갑작스런 사태 진전에 놀라 마오쩌둥의 지침을 구했지만, 마오쩌둥은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마치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 찍어내기를 할 때 문재인 대통령이 짐짓 자신은 그러한 사태와 관계없는 양 굴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마오쩌둥의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과거 사회주의교육운동 등을 벌일 때처럼 공산당 간부들로 조직된 공작조(工作組)를 편성해서 중학교, 대학교, 출판사 등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괴물과 악마’를 규탄하도록 학생들을 부추겼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해온 교사와 교수들에게 ‘반동학술권위’ ‘흑방분자’라는 낙인을 찍어 공격했다. 교사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조리돌림, 폭행, 고문, 감금당하는 일들이 빈발했다. 학생들은 출신 성분이 나쁜 학생들도 ‘흑방분자’로 규정하고 공격했다. 공작조는 학생들의 분노를 ‘흑방분자’로 낙인찍힌 교사나 학생들, 그리고 소수의 하급 간부들을 향하도록 유도했다. 반면에 공산당 ‘몸통’을 향한 비난이나 학생들의 급진적인 행위는 억제되었다. 이는 과거 공산당이 늘 써오던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상황을 잘못 짚은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조종하고 있는 이번 ‘문화대혁명’은 바로 그들 자신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문화대혁명의 ‘대상’임에도 그 ‘주체(主體)’인 것으로 착각했다.
 
  류사오치는 교사와 학생을 모두 합친 수의 1%인 30만명을 ‘우경(右傾)세력’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며 할당량까지 제시했다.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미리 할당량을 세워서 사람을 때려잡는 것도 토지개혁 이래 공산당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무리한 ‘우경분자’ 할당량 제시는 류사오치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우한으로 내려간 76세 노인 마오쩌둥은 7월 16일 양쯔강(揚子江)을 헤엄쳐 건넜다. 이는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는 정치적 시위(示威)였다. 마오쩌둥은 이를 기념하는 시(詩)를 남겼다.
 
  “바람이 나를 때리고 파도가 나를 쳐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왕궁의 정원을 거니는 것보다 더 느긋하게 그 모든 것에 맞선다.”
 
  중국 전역에 수영 열풍이 불었다. 국가체육위원회는 각급 학교에 마오쩌둥을 본받아 수영을 하도록 지시했다. 베이징에서는 군민(軍民) 8000여 명이 유서 깊은 이허위안(和園) 호수에서 수영을 했다.
 
 
  王의 귀환
 
  이제 사태의 키를 마오쩌둥이 잡고 있다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졌다. 7월 18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글자 그대로 왕(王)의 귀환이었다. 다음 날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호출해 “도대체 누가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것인가”라고 힐책했다. 7월 24일에도 마오쩌둥은 당 지도부를 접견하고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공작조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천보다는 7월 26일 공작조 철수 선언을 했고, 7월 28일 베이징 시내 각급 학교에서 공작조가 철수했다. 학생들은 환호했다. 이제 마오쩌둥은 그들이 마음대로 날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해방자였다.
 
  다음 날인 7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 1만명의 중학생·대학생들 앞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자리를 비운 동안 공작조 사업을 잘못 조직하고 이끈 데 대해 자아비판을 했다. 이 행사가 끝날 무렵 대회장의 커튼이 열리면서 마오쩌둥이 나타났다. 학생들은 “마오 주석, 만세!”를 연호했다.
 
  중국공산당 제8기 11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8기 11중전)가 열렸다. 회의 첫날 류사오치는 “공작조가 국내외 문제에서 중대한 착오를 범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은 내게 있다”고 자아비판을 했다. 천보다는 “그동안 공작조가 못된 짓을 많이 했다”면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군중과 이탈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헌법까지 꺼내 든 마오쩌둥
 
문혁 초기 류사오치(왼쪽)와 장칭.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류사오치의 얼굴은 굳어 있는 반면, 장칭은 《마오쩌둥어록》을 손에 들고 활짝 웃고 있다.
  8월 4일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청(淸)나라 말기 북양군벌(北洋軍閥)이 학생운동을 진압했고, 국민당이 학생운동을 진압했는데, 지금은 공산당도 학생운동을 진압하고 있다”면서 “문화혁명은 학생운동이 스스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는데, 공산당이 이를 진압했다. 이는 당 중앙이 스스로 자신들이 내렸던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무산계급의 청원(請願)운동을 허락해야 한다”면서 “언론·출판·집회·결사(結社)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산독재국가에서 헌법은 장식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오쩌둥 자신도 다른 자리에서는 “어쩌다 보니 헌법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기는 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끼리 결정하는 것”이라고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물론 마오쩌둥은 앞서 반우파 투쟁이나 사회주의교육운동, 후펑사건의 희생자들을 위해 헌법적 보호를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내걸고 거리의 군중을 선동하고 동원해서 권력을 탈취하는 모습은 2016년 이른바 ‘촛불혁명’을 떠오르게 한다. 또 ‘무산계급의 청원운동을 허락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합니다’를 내건 청와대 국민청원을 연상케 한다. 물론 문재인 정부는 ‘검찰개혁’이나 ‘사법적폐 청산’처럼 자기들 입맛에 맞는 청원에는 열심히 답하고, ‘탈(脫)원전 중단’이나 ‘문재인 대통령 탄핵’ 같은 청원에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었다. 또 보수단체 집회는 코로나19 방역을 앞세워 엄단하고, 민노총 집회는 허용하는 문재인 정권의 행태는 자기가 동원하려는 홍위병(紅衛兵) 집단에게는 헌법상 자유를 허용하고, 반대파들은 억압했던 마오쩌둥의 행태와 똑 닮았다.
 
 
  ‘문혁16조’의 등장
 
마오쩌둥(오른쪽)의 지시를 받아 정리하는 린뱌오(가운데). 그 내용을 곁눈길로 들여다보는 저우언라이의 표정이 재미있다.
  마오쩌둥은 군부(軍部)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린뱌오(林彪) 국방부장을 불러냈다. 국공내전(國共內戰)의 영웅인 린뱌오(林彪)는 1959년 루산회의를 비롯해 마오쩌둥이 밀릴 때마다 마오쩌둥의 편에 섰다. 프랑크 디쾨터는 “린뱌오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대약진운동이 ‘환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완전한 실패’라고 털어놓았을 정도로 사실상 펑더화이보다 훨씬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주석을 최대한 치켜세우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디쾨터에 의하면 린뱌오는 마오쩌둥에 대해 “그는 자기도취가 심하고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가졌으며 자신을 매우 사랑한다. 성공한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공을 차지하려 들지만 실패한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려 한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고 한다. 마오쩌둥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린뱌오는 8기 11중전에서 마오쩌둥을 전력으로 지원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향후 6개월 동안 자산계급이든 무산계급이든 잠잘 수 없을 정도로 폭풍을 만들고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서 세상을 뒤집어엎을 것”이라고 호언(豪言)했다. 이런 충성에 대한 대가로 린뱌오는 2인자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러고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을 내놓았다. 문혁은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라고 불리게 됐다. 약칭 ‘문혁16조’ 혹은 ‘16조’라고 불리는 이 문건은 한마디로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주자파’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자, 문혁에 대한 지침서였다. 이는 1962년 7000인 대회 이후 실권을 내놓아야 했던 마오쩌둥의 권력탈환 청사진이자, 그가 중공정권 수립 이래 계속해서 강조해온 계급투쟁, 계속혁명에 대한 비뚤어진 이상의 집대성(集大成)이기도 했다. 《인민일보》 등은 이를 즉각 사론(社論)으로 대서특필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사회주의혁명의 신단계
 
2016년 12월 촛불시위 당시 일부 중학생들은 ‘중고생혁명’ 운운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나섰다. 사진=조선DB
  ‘16조’ 서문에 해당한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영혼을 되살리는 하나의 대혁명이며 우리나라 사회주의혁명 발전의 더 깊고 광활한 새 단계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이 조항은 이어 “모름지기 한 정권을 뒤집으려면 먼저 여론을 형성하고 이데올로기 방면의 공작을 먼저 해야 한다. 혁명적 계급도 그렇고 반혁명 계급도 그렇다”고 한 마오쩌둥의 8기 10 중전 발언을 상기시킨다.
 
  마오쩌둥의 이 발언은 우리 현실에도 부합한다. ‘촛불혁명’에 앞서 세월호 사건, 농민운동가 백남기씨 사망사건, 최순실 사태 등을 빌미로 한 ‘여론 형성’ 공작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비롯된 한국 현대사 흔들기, 1980년대 주체사상 등 좌파 이념 확산 등을 통한 지식인 사회의 의식화와 전교조에 의한 한 세대에 걸친 학생 의식화 작업 등 ‘이데올로기 방면의 공작’ 덕분이었다. 그 결과 좌경화된 세대들이 법조계·정계·문화예술계·학계·종교계·언론계와 학교 심지어 관계와 경제계 등에 대량 포진하게 됐고, ‘촛불혁명’ 이전에도 보수정권의 지지 기반은 이미 매우 취약해져 있었다.
 
  제1조는 이어 “자산계급은 이미 전복(顚覆)되었지만 착취계급의 구(舊)사상, 구문화, 구관습, 구습관을 이용하여 대중을 부패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여 복벽(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무산계급은 마땅히 이데올로기 면에서 자산계급의 모든 도전에 맞서야 하며, 자신의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 새로운 관습, 새로운 습관을 사용하여 사회의 정신면모를 바꾸어야 한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물리치고, 자산계급의 반동학술권위를 비판하고, 자산계급과 모든 착취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교육을 개혁하고, 문화예술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오쩌둥의 과거로부터의 유산에 대한 전면적 부인과, 자신이 머릿속에 그려왔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습니다”라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생각난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2. 주류와 곡절
 
  제2조는 누가 문화대혁명의 주체인지를 규정하고 있다. 제2조는 먼저 “광대한 노동자·농민·병사, 혁명적 지식분자, 혁명적 간부가 문화대혁명의 주력군(主力軍)”이라고 선언한 후 “잘 알려지지 않은 혁명 청소년들”을 박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띄워준다. “그들은 대자보를 이용하여 큰 변론의 형식으로 크게 소리치고 크게 내지르며 크게 폭로하고 크게 비판하며, 숨어 있는 자산계급의 대표인물과 행동을 공격한다”고 한 구절은 학생·청소년층으로 이루어진 홍위병들을 조장하는 발언들이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는 늘 있어왔다. 루쉰은 자신의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 4000년 동안의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식인(食人)’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그려내면서 ‘거기에 길든 사람들은 예전부터 내려온 방식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살아갈 뿐’이라고 고발한다. 그리고 ‘인간을 먹은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를 구하라’고 간구(懇求)한다. 이는 새로운 세대가 나와 중국을 바꾸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루쉰의 기대와는 달리 ‘신중국’ 건설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도 이어지는 정치투쟁과 문혁의 와중에서 손에 피를 묻히고 인육(人肉)을 먹고 말았다(비유로서가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는 적대세력의 인육을 먹는 일이 실제로 있었다).
 
  그들을 그런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을 일러 혹자는 “마르크스의 후예라기보다는 토머스 모어의 후예”라고 말한다고 하지만, 그가 만든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Dystopia), 아니 지옥이었다.
 
  청소년들을 혁명의 새로운 주력으로 동원하고자 그들을 한껏 부추키는 ‘16조’의 제2조를 보면, 최순실 사태와 박근혜 탄핵의 와중에 한 무리의 학생이 ‘중학생이 주체 되어 혁명정권 수립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광화문 시내를 행진한 것이 떠오른다. 그들을 거리로 내몬 세력은 도대체 어떤 자들이었을까?
 
 
  3. 과감하게 군중을 동원하라
 
홍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장칭(왼쪽 끝). 홍위병들은 스스로를 ‘각성한 대중’으로 여겼지만, 실은 ‘동원된 대중’에 불과했다.
  ‘문혁16조’의 제3조는 공산당에게 과감하게 군중을 동원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한다. 머리끄덩이를 당겨 끄집어내듯이 대중을 놓아주고 동원하라면서 그런 이들에게 문화대혁명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공산주의 전사(戰士)들이며 마오쩌둥 주석의 훌륭한 학생들이라고 칭찬하면서 이들이 대자보와 대변론으로 대중을 고무하고 일체의 우귀사신(牛鬼蛇神)들, 즉 주자파 등 반동들을 폭로하도록 장려하라고 촉구한다.
 
  이와 함께 제3조는 과감하게 나서지 않고 오래된 규칙과 규정을 고수하거나, 대중이 들고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여전히 주자파의 영향력 아래 있는 간부들을 비판하면서, 약하고 무능한 간부들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게 바뀌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들이 열렬히 자기비판을 하고 대중의 비판을 받아들인다면 당과 대중의 용서를 받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대중운동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과 함께….
 
  오늘날 우리 현실과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바로 이런 식으로 ‘대중운동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순순히 따라오라고 간부들을 겁박하는 부분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친(親)기업적 입장을 보이는 민주당 정치인들에게는 ‘대깨문’들의 문자메시지 폭탄이나 저주의 댓글이 쏟아진다. 공수처법을 비판한 금태섭 전 의원은 온갖 비난을 받은 끝에 징계당하고, 공천을 못 받고, 결국 당을 떠나야 했다. 심지어 당 대표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가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신의 말을 거두어들여야 했다.
 
 
  4. 대중이 스스로 자기를 교육하라
 
  제4조는 문화대혁명을 수행하는 대중에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교육하라고 독려한다. 그러면서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을 의지하며, 대중의 개척정신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제거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혁명은 우아하고 문질빈빈(文質彬彬)하고 온량공검(溫良恭儉)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대자보와 대변론을 활용한 ‘우귀사신’들과의 투쟁을 다시 강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중이 의식을 높이고, 재능을 키우고, 시비(是非)를 식별하고, 적과 우리를 구별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말이 좋아서 ‘스스로 자기를 교육하라’는 것이지, 정권의 요구에 맞게 의식화된 대중을 혁명운동에 동원하라는 요구나 마찬가지다.
 
 
  5. 당의 계급노선을 견결하게 집행
 
  ‘적과 우리의 구별’로 마무리한 제4조에 이어 제5조는 “누가 우리의 적(敵)인가?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이 질문은 혁명의 첫 번째 질문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했던 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어 제5조는 “당의 지도부는 좌파 발견을 우선하고, 좌파 대오를 발전시키고 장대하게 하며, 혁명적 좌파에게 견결하게 의존해야 한다”면서 “그래야만 우리는 가장 반동적인 우파를 고립시키고, 중도층을 쟁취하며, 대다수를 단결시킬 수 있다. 마지막에 가서 우리는 95% 이상의 대중과 95% 이상의 간부를 단결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자기편인 좌파를 단결시키고, 중도층을 끌어안으면서, 적인 우파를 고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 또한 지금 우리가 많이 보고 있는 모습이다.
 
  문재인 정권 들어선 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일련의 적폐청산 작업들을 생각해보자. 청와대 국정농단 사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국정원 특활비 사건,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기무사의 세월호 관련자 사찰 사건, 기무사 계엄 문건 사건, 검찰 개혁, 검찰의 법관 사찰 사건, 윤석열 검찰총장 장모 사건….
 
  이런 사건 가운데 상당수는 법원에 의해, 혹은 조사당국에 의해 무죄나 무혐의로 결정됐다. 애당초 사건이 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권은 왜 그런 사건을 쉼 없이 발명해냈을까? 바로 정권의 반대 세력을 ‘극우(極右)세력’ ‘적폐세력’으로 낙인찍어 고립시키고, 자기편을 결집시키기 위해서였다. ‘적과 우리를 구별’한다는 것, 그것은 카를 슈미트가 말했듯이 정치의 요체(要諦)이기 때문이다.
 
 
  6. 인민 내부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라
 
2019년 2월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김경수 경남지사의 무죄를 주장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사진=조선일보DB
  “성격이 다른 두 가지 모순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민 내부의 모순인가? 아니면 적과 인민 사이의 모순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제6조는 마오쩌둥의 ‘모순론(矛盾論)’과 관련 있다. 전자(前者)는 내부 모순, 후자(後者)는 외부 모순이다. 내부 모순은 당 내부에서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극복할 수 있지만, 외부 모순은 그렇지 않다.
 
  내부 모순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도 그것을 외부로 들고나가서 떠들면 그건 외부 모순이 된다. 그렇게 되면 좋게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가령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숙청당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가 사망 후에도 복권(復權)되지 못한 것은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앞에서 덩샤오핑의 권력행사 등에 대해 비판하는가 하면, 실각(失脚) 후에도 톈안먼 사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외부로 흘려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부 모순을 외부 모순으로 만든 것이다. 반면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됐다가 권력을 덩샤오핑에게 빼앗겼던 화궈펑(華國鋒)은 사후(死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내부 모순을 외부 모순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6조도 “인민 내부 모순을 적과 우리 사이의 모순으로 바꾸지 말고, 적과 우리 사이의 모순을 인민 내부 모순으로 바꾸지 말라”고 요구한다.
 
  “문투(文鬪·글싸움)만 하고 무투(武鬪·폭력투쟁)는 하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이 또한 내부 모순일 때의 얘기다. 실제로는 테러는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홍위병 집단 간에 장갑차, 전차(戰車), 대공포, 야포, 포함(砲艦)까지 동원한 내전(內戰)을 방불케 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러면서 제6조는 “인민 대중들 사이에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은 정상”이라면서 “때로는 진리가 소수의 손에 있기 때문에 소수를 보호하라. 소수의 의견이 틀리더라도 논쟁이 허용되고 자기 의견을 지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내부 모순’일 때의 이야기다. ‘외부 모순’일 때에는 처절한 투쟁만이 있다. 설사 류사오치 같은 당의 최고위직에 있던 사람이라도 ‘적’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투쟁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런 모습도 오늘날 한국에서 많이 본다. 우선 ‘적폐세력’으로 낙인찍히면 인정사정 없다. 본인은 물론 친척, 지인들까지 괴롭히는 바람에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 같은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설사 같은 민주당 사람이더라도 대깨문들에 의해 ‘적’으로 낙인찍히면 끝장이다. 당내에서 친문(親文)세력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내던 조경태·이언주·금태섭 전 의원 같은 이들은 결국 당을 떠나야 했다.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말조심 몸조심 해야 하고, 혹시라도 실수한 게 있으면 바로 거두어들이고 백배사죄해야 한다.
 
  반면에 자기편이라면 아무리 파렴치한 짓을 했어도 너그러이 용서가 된다. 이른바 내로남불이다. 김경수 경남도 지사,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그렇게 결사옹위(決死擁衛)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오히려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박 전 시장의 비서가 온갖 공갈협박과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그녀가 내부 모순으로 덮어야 할 문제를 외부 모순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7. 혁명대중을 ‘반혁명’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조심하라
 
  제7조는 일부 학교, 단위(각급 기관), 공작조의 책임자들이 문혁 초기에 대자보 활동 등을 한 대중들을 진압한 것을 비판하면서 “반당・반사회주의 우파분자들이 대중운동의 결점이나 착오를 이용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반혁명’으로 몰고 있다”고 경계한다.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경고이자 반대세력의 비판에 대해서는 귀를 막겠다는 소리다.
 
  이는 현 정권의 행태와 잘못들을 지적하면 ‘적폐세력의 농간’이나 ‘가짜 뉴스’로 모는 행태와 흡사하다. 얼마 전 문재인 정권이 북한에 원전(原電)을 지어주려고 했다는 의혹이 나오자 여당이 ‘망국적 색깔론’이니 ‘북풍(北風)공작’이니 하면서 펄펄 뛰었던 것도 연상된다.
 
 
  8. 간부 문제
 
  공산당 간부들을 ①좋은 간부 ②비교적 좋은 간부 ③엄중한 잘못이 있지만 아직 반당·반사회주의 우파분자는 아닌 간부 ④소수의 반당·반사회주의 우파분자로 나누고,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항목이다.
 
  반당·반사회주의 우파분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폭로하고, 싸워서 쓰러뜨리고, 숙청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출로를 제공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아마 덩샤오핑 같은 경우는 ‘엄중한 잘못이 있지만 아직 반당·반사회주의 우파분자’는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목숨을 건지고 재기할 수 있었지만, 류사오치는 ‘반당·반사회주의 우파분자’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해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은 게 아닌가 싶다.
 
  이와 관련해서 관심을 끄는 것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현 여권(與圈)이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총장을 찍어내려고 하고, 윤 총장이 그에 극렬하게 저항할 때에 윤 총장은 친문세력을 비롯한 여권의 공적(公敵)이었다. 하지만 지난 1월 18일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 총장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면서 “윤 총장이 정치를 염두에 두고, 정치할 생각을 하면서 검찰총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야권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되는 윤 총장을 살살 달래가면서 그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몸짓이 아닌가 싶다.
 
  물론 ‘좋은 간부’는 우리 편이니 당연히 감싸 안아야 한다. 현 정권을 위해 복무해온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을 한사코 유임시킨 것처럼 말이다.
 
 
  9. 문화혁명 소조, 문화혁명위원회, 문화혁명대표대회
 
2018년 6월 11일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린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 정문 앞에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관련자들의 형사고발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조선DB
  제9조는 중앙이나 지방의 각종 기관에서 문화혁명을 수행하는 단위인 문화혁명 소조, 문화혁명위원회, 문화혁명대표대회를 조직하고, 대표를 선출하고, 이를 상설기구화 하는 방안에 대한 것이다. 문재인 정권 등장 후 국정원, 검찰, 경찰청, 국방부, 문화체육관광부, 보훈처 등에 적폐청산 TF라는 것을 만들어 기존 정부기구의 기능을 마비시키면서 해당 부서를 장악한 것이나, 법관대표회의라는 것을 앞세워 사법부의 독립을 무너뜨린 것을 연상케 한다.
 
 
  10. 교육개혁
 
  제10조는 “낡은 교육제도를 개혁하고, 낡은 교육방침과 방법을 개혁하는 것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매우 중요한 과제”라면서 “자산계급 지식분자가 학교를 지배하는 현상을 철저하게 바꾸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교육이 무산계급 정치를 위해 복무하고 교육과 생산노동을 상호 결합시켜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교육방침을 그 해답으로 제시한다. 학제 단축, 과정 간소화, 교재 개혁 등도 요구한다. 이와 아울러 학생들에게는 학문뿐 아니라 노동, 농업, 군사도 함께 요구하며, 자산계급 문화혁명과의 투쟁에 수시로 참가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 역시 전교조나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이 이미 행하고 있는 일들이다. 그들은 특수목적고등학교, 자립형사립학교 등 ‘가진 자’들을 위한 학교들을 기를 쓰고 폐지하려 드는 한편, 이른바 진보적 교육을 실험하고 전교조 출신 교사들을 쉽게 채용하고 승진시킬 수 있는 혁신학교는 학부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늘려가고 있다.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이름의 교재를 만들어 자기들의 이념과 역사관을 무차별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정부가 만드는 교과서에서도 시장(市場)의 역할, 대한민국의 정통성, 천안함 폭침 등 북한의 도발에 대한 내용들은 사라진 반면, 아직 역사적 평가는커녕 임기도 끝나지 않은 문재인 정부의 치적들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1. 언론보도에서 실명을 거론하는 문제
 
  제11조는 여러 학문 및 문화예술 영역에서 자산계급 대표인물, 반동학술권위에 대한 비판을 조직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특정 인물의 실명을 거론하여 비판하는 보도를 할 때에는 동급(同級)의 당 위원회에서 논의해야 하고, 일부는 더 높은 수준의 당 위원회의 비준(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요인이나 저명인사들에 대한 비판보도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2. 과학자, 기술자와 일반 공작인원에 대한 정책
 
  과학자, 기술자, 일반 공작인원(실무자)들은 애국적이고, 적극적으로 일하고, 반당·반사회주의적이지 않고, 외국과 내통하지 않는 한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문화대혁명이라는 난리 속에서도 중국의 핵(核)개발 등은 계속되었다.
 
 
  13. 도시·지방의 사회주의교육운동의 상호결합 부서 문제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문화대혁명 운동과 지방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사회주의교육운동을 상호 결합하는 문제에 대한 조항이다. 지역과 부서의 특색에 맞게 진행하되, 기존의 사회주의교육운동이 잘 진행되어온 경우에는 기존에 해오던 대로 해도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4. 혁명을 움켜쥐고 생산을 촉진하라
 
  정치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하면서 이를 경제발전과 조화시키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사람들의 생각을 혁신하여 모든 작업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잘, 더 경제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대중이 충분히 동원되면 문화혁명과 생산이 보장될 수 있고, 모든 공작(작업)의 높은 품질이 보장될 수 있다”면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우리 사회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강력한 추동력(推動力)” “문화대혁명과 생산발전이 대립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천하대란을 일으켜 공장을 멈추게 하고, 노동자들을 정치투쟁으로 내몰고, 자원 배분을 왜곡시키고, 교통·물류(物流)를 마비시켰으면서도, 입으로만 문화대혁명이 경제활동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시킬 것이라고 떠들고 있는 셈이다.
 
  이는 전형적인 ‘경제의 정치화(政治化)’인데, 이런 모습은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권의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까지 나서서 적폐청산이 기업활동에 부담이 된다고 아무리 호소해도 귀를 막고, 이른바 공정경쟁 3법에 대한 비판과 읍소(泣訴)가 이어져도 “기업 경영의 투명성 및 책임성과 우리 경제의 건전성이 제고되고 기업에 대한 신뢰와 시장의 활력을 높여 공정경제와 혁신성장을 뒷받침해 궁극적으로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대꾸하는 문재인 정부의 모습 말이다.
 
 
  15. 군대
 
린뱌오와 홍위병들. 린뱌오는 문혁 기간 중 인민해방군을 극도로 정치화시켰다.
  군대에서의 문화대혁명에 관한 것으로 “군부대에서의 문화대혁명운동과 사회주의교육운동은 중앙군사위원회와 총정치부의 지시에 의해 진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규정은 간단하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인민해방군은 공산당의 2인자이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의 지휘 아래 정치의 도구로 이용당했다. 홍위병의 난동을 무력(武力)으로 진압한 것도 인민해방군이었다. 인민해방군은 그 출발부터 국방군(國防軍)이 아니라 당군(黨軍)이었지만,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정치화(政治化)되었다. 인민해방군의 군사적 역량은 땅에 떨어졌고, 그 결과 인민해방군은 1979년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지금 한국군은 다른 의미에서 우려스러울 정도로 정치화되어 있다. 문재인 정권은 출범 초기 이른바 ‘공관병 갑질’ 사건을 부각시키면서 4성 장군을 욕보이고 육사(陸士) 출신 장교단을 망신주었다. 계엄 문건 작성 및 세월호 유가족 사찰 사건 등을 만들어 기무사령부를 해체하고 군사안보지원사령부라는 것을 만들어 그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無力化)시켰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시민운동가 겸 동성애운동가에게 국방부 장관과 장군들이 설설 기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문재인 정권은 또 과거사 TF 활동, 5·18 과거사 특조단 등을 통해 국군을 ‘반민주 집단’으로 몰았다.
 
  거기에다가 9·19남북군사합의, 한미연합훈련 중단 등으로 국군의 전쟁 준비 태세를 망가뜨렸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필요하면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북한과 협의할 수 있다”는 소리까지 했다. 세콤(보안장비) 설치하면서 도둑놈과 의논하겠다는 격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각군 참모총장, 장성들 가운데서 한마디도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카터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나왔을 때, 감연히 그에 반대하고 군복을 벗었던 주한미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과는 참 대조적이다.
 
 
  16. 마오쩌둥 사상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행동지침이다
 
  마지막으로 제16조에서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 사상의 커다란 붉은 기를 높이 들고 무산계급정치를 이끌며, 광범위한 노동자·농민·병사, 광범위한 간부, 광범위한 지식분자들 사이에서 마오쩌둥 주석의 작품을 배우고 적용하기 위한 운동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8월 6일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 선집 3500만 부를 찍기로 결정한다. 이후 마오쩌둥 어록을 담은 소책자며, 마오쩌둥 배지 등이 문화대혁명 기간 내내 중국 대륙을 뒤덮었다.
 
 
  150만~200만명 사망
 
1966년 류사오치 축출 직전의 중국공산당 지도부. (왼쪽부터) 마오쩌둥, 린뱌오, 류사오치, 주더, 둥비우.
  중국공산당이 ‘문혁 16조’를 공표하면서 문화대혁명은 홍위병의 광란(狂亂)으로 폭주(暴走)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조반유리(造反有理·반란이 일어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라면서 “사령부를 포격하라”고 부추겼다. 프랑크 디쾨터는 “마오쩌둥은 자신의 주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일부러 사회를 뒤집어엎고 수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미친 시대가 도래했다. 학생들이 혁대 버클이나 망치, 몽둥이로 선생을 때려죽이고, 머리카락에 불을 붙이고, 뜨거운 석탄 덩어리 위를 뒹굴게 했다. 치안책임자인 공안부장 셰푸즈(謝富治)의 대응이 가관이었다. 그는 공안(경찰)들에게 “우리는 홍위병을 지지해야 한다” “홍위병과 대화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라. 그들에게 명령하지 말라. 그들에게 악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들이 흥분해서 누군가를 때려 죽인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지시했다. 보수단체의 광화문집회는 눈을 부릅뜨고 단속하고, 민노총 집회에는 손을 놓고, 법무부 법무실장의 폭행 사실이 나타난 동영상에 대해서는 “못 본 걸로 하겠다”고 덮는 오늘날 한국 경찰의 행태와 흡사하다.
 
  1978년 12월 13일 예젠잉(葉劍英)은 중국공산당 중앙업무회의에서 연루된 사람을 포함해서 ‘문혁’ 기간에 해를 입은 사람은 1억명 이상이라고 보고했다. 프랑크 디쾨터는 “문화대혁명이 진행된 10년 동안 150만~20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끊임없이 계속된 비난과 허위자백, 투쟁대회, 박해운동 등으로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의 삶이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리셴녠(李先念)은 1979년 12월 20일 문혁 기간 중 5000억 위안 상당의 국민소득 손실을 보았다고 보고한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 왕단은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30년간의 시설 투자 총액의 80%에 해당하고 전국 고정자산 총액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의 모든 경제적 성과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 실패 후 권력 탈환을 노리던 마오쩌둥과 그 일당이 자행한 대동란(大動亂)이었다. 하지만 토지개혁, 3반운동, 5반운동, 반우파운동, 사회주의교육운동 등에서 보듯 문혁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운동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돌연변이가 아니라 늘상 있어온 일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지난 1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의 통화에서 시 주석에게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중국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은 나날이 강해졌다. 두 번째 100년(2049년 건국 100주년) 분투 목표의 실현을 향해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말했다. 중공정권의 피의 역사를 알고서 한 소리인가, 모르고서 한 소리인가? 그게 말끝마다 ‘사람이 먼저다’를 외쳐온 자칭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할 말인가?
 
 
  한국의 5·16, 중국의 5·16
 
  공교롭게도 문혁의 시발점이 된 ‘5·16통지’가 내려온 것은 1966년 5월 16일이었다. 한국에서 ‘5·16혁명’이 일어난 지 꼭 5년 후였다. 한국의 5·16은 ‘군사혁명’이었지만, 중국의 5·16은 언필칭 ‘문화대혁명’이었다. 5·16이 일어날 무렵 세계 최하위권의 빈국(貧國)이던 한국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무렵이던 1979년에는 중진국이 되어 있었다. 문혁으로 10년 대란을 치른 중국은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던 1976년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1979년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덩샤오핑이 세상을 떠난 1997년 무렵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 들어와 있었지만, 중국은 거대한 후진국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은 한국을 부러워하면서 한국의 경험을 배우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위상은 역전되었다. 중국은 1인당 국민소득에서는 아직 한국의 절반 수준이지만, 경제의 총량에서는 한국의 9배 이상이다. 중국은 한국의 번영을 이끌어온 중화학공업, 전자공업 등의 분야에서 한국을 바싹 추격하거나 추월한 것은 물론 전기차, 태양광 발전, 드론, AI(인공지능) 등 미래산업에서 한국을 앞서나가고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국인들이 문혁의 광기에서 벗어나 돈맛을 알아가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 한국의 젊은이들은 마오쩌둥이 만들어낸 레이펑을 공부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미쳤구나” 하고 혀를 찼다고 한다. 레이펑을 공부했던 그 젊은이들이 88 서울올림픽 이후 여행 자유화가 되자 중국을 드나들면서 문혁16개조를 수입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文革에 대한 신영복의 생각
 
  그리고 그 세대가 지금 대한민국의 정권을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정권의 수장(首長)인 문재인 대통령은 신영복 교수를 가장 존경한다고 수없이 공언(公言)했다. 통혁당 사건으로 20여 년간 수감되었던 신영복 교수는 1980년대 중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졌다. 기자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후 석방된 신영복 교수를 한 대형서점이 주최한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기자는 신 교수에게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통혁당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했던 ‘빨갱이’이기는 하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휴머니즘을 보여주었던 신 교수라면 뭔가 문혁에 대해 남다른 성찰(省察)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때 신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문혁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서 역사를 추동(推動)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순간 ‘박정희 정권은 무고한 젊은 지식인을 감옥에 가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마땅한 마성(魔性)을 가진 혁명가를 감옥에 가둔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서 역사를 추동한다’는 신영복 교수의 말은 ‘문혁16조’를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 맞아 죽고 굶어 죽거나, 자살했다. 그런 소리를 한 신영복 교수를 ‘위대한 사상가’라며 존경한다는 대통령을 가진 나라, ‘문재인 보유국’이 바로 2021년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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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지키미    (2021-02-27) 찬성 : 0   반대 : 1
문죄인이놈이 하는 짓이 전부 다 어디서 배웠는가 했더니, 바로 여기가 거기구만.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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