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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독일 통일 30주년

서독의 부흥과 6·25

6·25가 독일 부흥과 통일의 밑거름 됐다

글 : 서지원  전 駐獨 공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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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독, 6·25 계기로 재무장 허용되면서 서방의 일원으로 편입
⊙ 파산 직전이던 서독 경제, 6·25로 인한 特需로 起死回生
⊙ ‘통일의 비결’보다 근신하면서 이웃 나라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몸에 익히고 주변에 각인시키는 것을 배워야
⊙ 마르크貨 포기하면서까지 EU 핵심 멤버 자리 지키고, 미국의 유럽안보전략에 120% 동조

서지원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졸업 / 駐베를린·駐유엔·駐영국·駐미국·駐제네바 공보관, 청와대 공보·정무비서실 근무 / 저서 《도이치현대사》(역서)
1956년 2월 독일 연방군의 첫 훈련대대를 사열하는 아데나워 총리. 6·25를 계기로 독일 재무장이 가능해졌다. 사진=독일연방문서청
  독일연방공화국(BRD·Bundes Republik Deutschland)이 통일 30주년을 맞이했다. 아시다시피 1945년 당시 이 나라는 어느 누구의 동정도 받지 못한 채, 더 이상 가엾을 수 없는 처참한 처지였다. 점령국들은 국토를 넷으로 나누어 유린했다. 실어갈 수 있는 것은 죄다 빼앗아갔다. ‘그 참상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정도로 언급을 줄인다.
 
  그랬던 나라가 그 잿더미를 딛고 불사조(不死鳥)처럼 되살아나 독일이라는 문패를 당당하게 내걸고 재통일(再統一)을 하다니… 눈과 귀를 의심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로라하는 세계 석학들의 온갖 진단과 분석에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와 처방에 이르기까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열기는 아직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저런 명분으로 노벨상 받은 이도 여럿 나왔다.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가뭄으로 말라붙은 웅덩이에 몰려드는 뱃가죽이 등에 붙은 동물들처럼 1940년대 말 독일에는 상이군인·실업자·고아·과부에 거지들만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줄기 소나기가 내리더니 대지를 흠뻑 적시는 단비로 변했다. 한국에서 터진 6·25전쟁이었다.
 
 
 
  6·25가 안겨준 충격
 
  독일(서독)에 있어서 6·25는 대박이었다. 단언컨대, 스탈린이 김일성을 앞세워 6·25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한국군과 유엔연합군이 이를 물리치지 못했더라면… 미안한 말이지만 독일의 재기(再起)와 게르만 민족 재통일은 불가능했다. 코치·선수 할 것 없이 포기의 타월을 던지려던 찰나에 숨넘어가던 독일 경제를 벌떡 일으켜 세워주었고, 대(對)소련 방어 전략의 대소사를 기획·집행하는 서방연합국 최고 전략 사령부를 나치 독일군 출신의 독일 군사 브레인들로 잔뜩 채워 넣지 않을 수 없는 대이변을 불러왔다.
 
  6·25전쟁은 서방연합국, 특히 미국이 소련의 위협에 직면한 서유럽 방위는 독일 군사전문가들과 그들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 점은 승전국들이 마냥 얕잡아볼 수만은 없는 한 방이 나치 간판을 뗀 독일에 아직 조금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데나워가 깨닫게도 했던 것 같다. 아데나워는 히틀러가 물려준 유산은 모조리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몹쓸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6·25가 터지자 그는 ‘이거, 잘만 하면 독일을 선진국 반열로 되돌려놓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런 있을 법하지 않은 행운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자신은 물론 주변에 엄중한 표정 관리를 당부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6·25 발발을 전후(前後)한 시점에 아데나워를 정점(頂點)으로 한 독일 집단지성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세운 대처방안을 우리말로 하자면 ‘절에 간 색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이렇게 하자면 데꺽, “그러문입쇼”, 영국이 저리 하자면 “아무려면, 그리 안 하고 어쩌겠나”, 드골이 하는 말에도 “역시, 나하고 생각이 똑같아” 이러는데, ‘죽은 이들에게는 안됐지만 산 사람들끼리는 되도록 좋게 지내자’는 소리가 안 나오게 생겼나 말이다.
 
  ‘뒤주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도 하나 틀리지 않아, 나치 피해자 배상 요구에도 웃는 얼굴로 ‘당장 그렇게 하자’는 식으로 나갔다. 세상 물정과 담 쌓고 살던 동독 공산당 패들은 “우리는 나치 청산을 철저히 해서 이미 나치와는 사돈의 8촌도 아닌 남 사이인데, 나치가 친 사고를 왜 우리더러 물어주라 마라 참견이냐”고 우기면서 1988년까지, 그러니까 끝까지 버티었다. 김일성과 호네커가 자주 만났다더니 그런 시침 떼기, 오리발 내밀기 노하우를 주고받기 위해서였나?
 
 
  6·25를 西歐 침공의 前兆로 이해
 
  6·25전쟁의 파장을 좀 더 들여다보자. 우선 스탈린주의자들은 비열하다는 사실을 서방 세계에 새삼 일깨워주었다. 포츠담 회담 때부터 드러낸 음험한 비협조적 태도, 베를린 봉쇄, 동구의 공산화 과정 등 소련이 취한 일련의 뒤통수 때리기를 심상치 않게 지켜보던 서방 지도자들은 6·25 도발을 방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보았다. 우선 전후(戰後) 평화질서 유지의 주축이던 유엔에서 안보리 결의를 통한 공식 규탄에 이은 유엔군 파견 등 즉각적인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했다. 소련이 서독을 상대로 해서도 똑같은 사달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모두가 6·25 도발을 미국의 서구 방어 의지 타진 겸 부동항(不凍港) 확보를 노린 스탈린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암수로 본 것이다. 6·25를 일개 30대 전직 소련군 장교가 일으킨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얼빠진 위인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막 출범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놀라우리만큼 일치단결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의 피에 굶주린 살상과 파괴를 목숨 던져 막아내고, 마침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기개를 보여준 것도 서구 열강의 경탄을 자아냈다. 어찌 보면 스탈린주의의 실상을 몸으로 겪은 백성 가운데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한민국 국민들로서는 제 나라 제가 지키는 데 몸을 던져 무도한 무리를 응징하고 도와준 자유 우방들이 고맙지, 그런 호평과 찬사는 오히려 쑥스러운 노릇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대한민국 ROK의 신인도는 이때부터 이미 기초가 닦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 최근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세계적 명장(名將) 백선엽(白善燁)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벌어진 근간의 스캔들은 대한민국의 평판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반역적 행위였다.
 
  하여튼 스탈린주의자들의 6·25 불법 기습공격과 대한민국의 세찬 반격 및 자유 진영의 승리는, 스탈린주의자들의 기도와는 정반대로 서독이 자국(自國) 군대를 가지면서 서구 안보를 거들게 하는 작업의 출발 신호탄만 하릴없이 쏘아준 셈이 되었다.
 
 
  “독일은 패배한 적국으로서 점령될 것”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26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유럽 미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보낸 미 합참 문서[문서번호 JCS(Joint Chiefs of Staff)-1067호]를 보자.
 
  〈독일의 무자비한 전쟁행위와 나치의 광적인 저항이 독일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 혼란과 고통을 불가피하게 한 만큼, 독일 인민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독일은 해방의 목적이 아니라 패배한 적국으로서 점령될 것이며… 연합국의 주 목표는 독일이 다시금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전범(戰犯)국가 나치의 제3제국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흔적도 없이 지워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 세계 공통의 인식이었다. 미상불(未嘗不)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 전승(戰勝)연합국들의 나치 점령 목표는 게르만의 씨를 말리고 그 근거지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지가 되도록 철저히 파괴, 초토화한다는 단순명료한 것이었다. 유대인 문제도 그랬지만, 특히 소련 침공 시 ‘전쟁 보급물자의 현지 조달’이라는 전쟁방침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지옥의 참극(慘劇)을 저지른 나치 잔당들은 복수심에 사로잡힌 연합국 군인들이 벌이는 살기등등한 앙갚음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야말로 게르만 족속 중에 그나마 괜찮은 것들이 있다면 ‘뒈진 사내놈들이나 겁탈할 계집뿐’이라는 정훈교육을 받은 연합국 군대로부터 개·돼지 취급을 받게 된 패전 나치. 그들에게 1945년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정지된 영시(零時·Stunde Null)였던 것이다.
 
  주권국가의 대권(大權) 중 하나는 영토 방어에 필요한 자국 군대, 즉 국군을 가지는 권리다. 그러나 1949년 당시 서독은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여러 해 동안 서독에 그 대권을 누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은 그냥 공리(公理)였다. 서독은 공식적으로는 포츠담 의정서에 의해, 도덕적으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이웃 나라들을 침공하는 데 그 군사력을 악용했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철저한 무장해제를 당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와 나치 장군의 화해
 
1955년 11월 테어도어 블랑크 국방장관은 나치 독일군 출신 아돌프 호이징거(왼쪽), 한스 슈파이델(가운데) 장군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사진=독일연방군
  그랬던 것이 1947년 3월 모스크바 3상(相)회의를 마지막으로 동서 양 진영의 전시(戰時)동맹이 지속될 것이라는 환상이 사라지고, 소비에트의 동구권 장악을 공고히 한 1948년 체코 쿠데타, 베를린 봉쇄 등에 이어서 6·25전쟁까지 터졌다. 점령 3개 연합국 정부는 물론, 서독과 점령연합국 국민들 사이에 서구 방어를 위해 서독이 어떤 형태로든 기여하게 해주는 것이 전체 서방 세계의 민주국가에 이익이 되겠다는 인식이 급속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6·25 발발 보름 후인 1950년 7월 11일 프랑스의 샤를 드골은 서독의 재무장이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인정했다. 재무장에 대한 서독 국내 여론은 본래 3분의 2 이상이 반대였다. 6·25 직후 발표된 요제프 프링스(Josef Cardinal Frings) 쾰른 대주교의 강론(講論)이 그 분위기를 반전(反轉)시켰다. 대주교는 “국가는 공격을 당했을 때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며 아데나워의 재무장 추진을 성원했다. 사회민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 당수도 거들었다.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럽에서의 전쟁을 다룬 그의 저서에서 나치 군대를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악한 무리’라고 불렀다. 1945년 5월 랭에서 있은 항복문서 조인식에서는 패배한 적군 나치 장군과의 악수를 차갑게 거부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1951년 1월 서독 방문 시 그는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여주었다. 프랑크푸르트 소재 미(美) 점령군 고등판무관 저택에서 아데나워의 군사고문관으로서 참석한 두 사람의 전(前) 나치 독일군 장군을 만났을 때는 만면에 백만불짜리 ‘아이크(Ike) 미소’를 활짝 머금고 커다란 손을 쑥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 미소와 악수로 과거 적대관계였던 이 두 사람의 나치 출신 장군이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원념(怨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 두 사람과 함께 준비한 성명서에는 그 전에 자신이 가졌던 독일군에 대한 편견을 반성하는 내용의 화끈한 사과와 함께 “독일군 장병들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잘 싸웠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6·25전쟁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NATO 및 EU와 긴밀하게 연계
 
  한일(韓日)관계도 이렇게 가는 것이 정도(正道)다. 김일성주의에서 한발짝도 헤쳐 나오지 못하는 북한 지도부가 북한 주민들을 옥죄는 데 써먹고 있는 쇄국주의적 반일주의에 동조해주지 않아서 남북 화해의 진전이 불가능하다면 시간의 신비로운 치유 능력에 맡겨둘 일이다. 애꿎은 일본 때리기에 공연히 동조할 이유가 없다. 남북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 나라들과 좋게 지내는 것이다. 더군다나 중국이 골목대장 하겠다고 껍적거리고 있는데, 우리와 좋게 편먹기로 하고 물심양면으로 신경 쓰고 있는 일본임에 있어서랴!
 
  어설프게 독일에서 통일의 비결을 알아내겠다고 부산을 떨 일이 절대 아니다. 동독이 자멸하고 나서도 한참을 지켜본 다음 집어삼킨 게 서독의 통일, 즉 동독 접수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독일에서 중점적으로 배울 것이 있다면 근신(勤愼) 또 근신하면서 이웃 나라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내 몸에 익히고 주변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1951년 가을 영국에서는 처칠의 보수당이 다시 집권했다. 프랑스에서는 소련이 꾸민 서독과 그 맹방(盟邦) 간 이간질에 곧잘 넘어가던 사회주의·공산주의 지지 세력이 약화되면서 독일(서독) 연방군 창설을 응원하는 지도부가 들어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1952년 2월 8일 독일 연방하원은 다수결로 연방국군 창설 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절대 서두르지 않았고, 어떤 경우라도 유럽연합(EU) 및 나토(NATO)와의 타이트한 연계가 최우선이었다. 작전권 회수 같은 것은 그 비슷한 말도 꺼낸 적이 없었다.
 
 
  파산 직전에 起死回生한 서독 경제
 
  6·25전쟁은 또한 루르 조례, ERP(경제재건계획) 협약, 페터스베르크 협약, 슈망 플랜 등 이미 발효됐거나 검토 중이던 각종 규약에 따라 서독에 허용되었거나 일응 장려해온 민수(民需) 공산품에 대한 서방 세계의 수요를 엄청나게 창출해, 서독 경제를 일거에 살려내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재무장 계획에 따른 군수(軍需)물자 생산에 치중하게 되면서 세계적으로 막대한 민수 공산품 수요가 발생했다. 말하자면 군수품 생산이 서독에는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졸지에 세계 유일의 철제 기계류 및 화공 제품의 대량생산 가능국이 돼버린 서독으로 서구 거의 모든 나라로부터 주문이 물밀 듯이 쇄도한 것이다. 1950년 가을부터 뛰어오르기 시작한 강철과 공산품의 국제 시세는 서독에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이윤을 안겨주었다. 1951년 2월부터는 외환(外換) 수지가 완전히 역전(逆轉)되어 외화(外貨)가 문자 그대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해 5월로서 IMF 차관과 유럽결제동맹(EPU·European Payment Union) 차입금의 상환이 완료되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지만 EPU는 주택과 빈민구제 문제 이외에도 서독 재건에 소요되는 수입물자 대금지급 문제에, 나치의 공적·사적 채무 문제를 떠안고 있던 아데나워 정부의 다자간 대금결제를 지원하기 위해 1947년 이래 미국이 설립을 추진해온 기구다.
 
  이 기구는 우여곡절 끝에 1950년 9월 19일에야 겨우 공식 출범했다. 출범과 거의 동시에 서독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은 그동안 얻어 쓴 자금이 식량과 원자재 구입으로 이미 소진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IMF에 특별 융자금을 신청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1950년 가을은 서독 경제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 부담스럽던 빚을 6·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 5월이 접어들기 무섭게 일거에 다 갚아버렸다니, 이게 있을 법한 일인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진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1946년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개혁파의 대표 격이던 야콥 카이저는 “부르주아 시대는 지나갔다”고 천명하면서 새로운 도이치의 도덕적·정치적 기반을 닦으려면 부(富)의 재분배가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부르주아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즉각 맞받아쳤다. 그의 동조자들은 자신들의 비전을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라고 명명(命名)하고선 강력한 국가권력이 독점과 카르텔로부터 자유경쟁과 자유기업을 보호해주는 길만이 최선이자 국민의 번영과 안정, 그리고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시장(Freie Markt)만이 보편적 번영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사회적이라는 논지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 그리고 그들의 고위 보좌관들은 모두 사회적 시장경제가 중·장기적으로 국민 모두에게 복리증진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말이었지, 당장 임금을 충분히 올려줄 묘수를 장만해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 숙성 기간을 거치면 경제가 나아진다는 원론적인 입장이었는데, 6·25가 서독 경제의 전면 가동을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속도로 앞당겨준 것이다. 동독에서는 소련이 악랄하게 생산시설을 뜯어가고 인프라 전반을 해체했지만, 서방연합국 점령지 일부에는 요행히 얼마간의 생산 기반과 인력이 남아 있었기에 밀려오는 수요에 젖 먹던 힘을 짜내서 감당하려는 엄두라도 냈다.
 
 
  독일의 동맹 관리방법 배워야
 
1955년 서독은 나토에 가입했다. 사진=독일연방군
  우리는 어떠했는가?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함과는 별개로, 독일에 비하면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의 공업생산 기반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6·25는 그것을 아예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스탈린주의자들이 한반도를 두들겨 부순 대가로 서독 경제는 상상도 못 한 도약의 기회를 거머잡은 것이다.
 
  스탈린의 과욕(過慾)과 모험주의의 사생아(私生兒)인 6·25전쟁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했던 서독의 관민(官民)은 침착한 실용주의적 대응으로 재(再)무장이라는 ‘군사주권 회복’과 ‘민생(民生)의 선진화’라는 ‘실질적 의미의 나치 청산’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6·25는 서독으로 하여금 훗날 무혈(無血) 재통일이라는 행운을 쟁취할 수 있도록 내공을 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우리 자신은 당사자로서 겪은 스탈린주의자들의 기습공격 6·25가 지구 반대편에서 죽음의 골짜기를 헤매던 서독을 되살려냈다는 엄연한 사실을 눈 뜬 장님처럼 간과한 채 그 무슨 통일 비결을 독일의 경험에서 찾겠다고 부산을 떨어왔다. 동방정책이나 동독에 대한 내재적(內在的) 접근방식 등에 관한 논의들이 다 그런 아류(亞流)이다.
 
  그러나 나치 체제가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고 있던 독일의 형편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게르만 민족 통일을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거나 요란하게 통일 이니시어티브를 취할 처지가 결코 되지 못했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이 막강한 도이치 마르크화(DM)를 포기하면서까지 유럽연합(EU)의 핵심멤버 위치에서 결단코 밀려나지 않으려 애쓴 것이나, 나토(NATO)의 최전방을 자처하며 미국의 유럽방어전략을 이견(異見) 없이 120% 실천하는 확실한 동맹국의 모범을 보인 것은 모두 ‘독일연방공화국은 나치와 완전히 결별한 새로운 정치적 실체(實體)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그들의 필사적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해주는 사례다. 이는 우리가 안보 동맹국들과 관계를 어떻게 유지·관리해야 하는지 새삼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그 길만이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번영과 평화를 보장하는 ‘신(神)의 한 수’라고 믿었음을 확인시키는 방증(傍證)이 아니겠는가.
 
 
  독일 통일과 6·25 간의 因果關係
 
  한때 베를린에서 온 학자라는 사람이 내재적 접근방식이라는 수상한 얼개를 들고 와서 설치는 바람에 국내외 통일 논단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영화 〈대부(代父)〉에서 돈 코를레오네의 장남 쏘니가 다른 조직에 암살당한다. 아버지가 막내아들 마이클에게 당부한다.
 
  “잊지 마라. 암살자와 화해를 주선하겠다고 나서는 놈이 바로 배신자라는 것을.”
 
  김여정의 남북연락사무소 불법 폭파에 이은 푸틴의 정적(政敵)에 대한 독극물 테러, 하필이면 그 독극물을 독일이 검출해내는 데 성공하고 메르켈 총리가 그 책임 소재와 사실 규명을 촉구하는 등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6·25전쟁의 데자뷔를 본다. 거침없는 파괴와 인명살상이 그처럼 공산 체제의 본질이라면, 동독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무너지기를 기다려 같은 민족이라는 책임감으로 그 뒤처리를 맡은 서독의 통일방식은 그 이상의 산 교훈이 없을 것 같다.
 
  독일 통일과 6·25 사이에 간단치 않은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있었다는 사실, 우리 선열(先烈)의 고귀한 희생과 값진 승리가 비단 대한민국만의 자유민주 발전의 초석이 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지구 반대편의 서독을 비롯한 자유 세계 전체의 번영과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컸다는 사실 확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의 통일 논의가 이를 바탕으로 좀 더 내실 있게 검토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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