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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독일 통일 30주년

통일과 독일의 경제력

돈으로 통일을 샀다!

글 : 박상봉  독일통일정보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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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독, 소련군 철수 관련 비용 125억 마르크 등 550억 마르크 이상 소련에 지원
⊙ 통일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3~4% 성장
⊙ 동독 민영화 담당했던 트로이한트(신탁청) 대표 브로이엘, “공짜 버터빵은 없다!”
⊙ 20년간 2조 유로 투입… 60%는 사회보장, 40%는 인프라 구축·기업 보조금·동독 외채 상환 등에 소요
⊙ “점진적 통일은 생선수프가 수족관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것”

朴相鳳
1954년생. 연세대 독문과 졸업, 베를린자유대 경영학과 학사·석사, 강원대 박사(사학과) / 통일교육원장·민주평통 상임위원·명지대 객원교수 역임, 극동방송 〈통일을 향하여〉 〈남과 북이 하나되어〉 진행 / 저서 《트로이한트와 한반도 통일》 《독일통일 통일한국》 《남북경제통합론》 《북한 급변사태와 한국의 대응전략》(공저), 《통일패러다임과 북한 재건》 등
1990년 7월 16일 독소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서독은 그 대가로 소련에 막대한 경제지원을 했다.
  2020년 10월 3일, 통일 30주년을 맞는 독일의 경제성적표는 놀라움 자체다. 2019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3조4000억 유로로 유럽 1위다. 2위 영국의 2조5000억 유로보다 무려 9000억 유로가 많다. 무역은 수출 1조3000억 유로, 수입 1조1000억 유로로 총액 2조4000억 유로다. EU 27개 회원국의 무역총액 4조 유로의 60%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다. 2019년 한 해 흑자 규모만 2000억 유로, 한국의 수출총액 5242억 달러(약 4680억 유로)의 절반에 가깝다.
 
  1800만 동독인을 수용하고 이런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으니 독일의 경제정책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추진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역사상 전례가 없던 길을 갔는데 실수가 없을 리 없다. 증세(增稅) 없이 통일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판단부터 착오였다. 각종 세금이 올랐고 대외(對外)부채도 급증했다.
 
  국민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콜 총리는 1994년 3선에 성공했다. 콜의 정책적 노선이 맞았다는 방증이었다. 사사건건 콜 총리의 정책에 비판을 일삼던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하락을 면치 못했다. 특히 동독에서 사민당의 인기가 폭락을 이어간 사실이 흥미로웠다. 선입견을 버리고 통일 30년 독일이 이루어낸 ‘제2의 라인강의 기적’을 되돌아보기로 하자.
 
 
 
  베를린장벽 붕괴하자 사라진 에곤 바르
 
  베를린장벽은 1949년 이래 12년 동안 260만 인구를 빼앗긴 동독의 마지막 카드였다. 1961년 8월 13일 첫 삽을 뜬 후, 한 달 만에 장벽을 세웠다. 세계는 장벽을 주목했다. 착공 3일 만에 국경수비대원 콘라드 슈만(19)이 탈출해 제1호 탈출자가 되었다. 마지막은 1989년 2월의 크리스 구에프로이(19)였다. 슈만은 성공했고 구에프로이는 사살되었다.
 
  이 비극이 28년 만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끝났다. “베를린장벽은 자기방어의 상징이다. 함부로 허물려 말라”고 했던 ‘동방정책의 주역’ 에곤 바르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독선과 이념에 사로잡혔던 그의 행각은 일간지 《디벨트》의 한참 후인 2014년 11월4일자 보도에서도 확인되었다. 제목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자 행방불명이 된 에곤 바르’, 그는 11월 10일 장벽 해체 기념행사에 몸퍼(사민당) 베를린 시장의 초청에 응한다고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1989년 12월 28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동독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동독 공산 정권은 콜의 방문을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을 살릴 최후의 기회로 보았다. 개혁파 공산주의자 한스 모드로 총리가 나섰다. 그가 내민 카드는 40년간 금기였던 통일 카드였다. 그는 동·서독 경제공동체를 제안하며 긴급자금 150억 마르크를 요청했다.
 
  콜의 대응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모드로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자유·비밀·평등 선거를 통한 합법적 정권이 아니면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결국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이자 최후의 자유선거가 치러졌다.
 
  드레스덴 주민을 향한 콜의 연설은 더 치밀했다. “헬무트!”를 연호하는 시민들을 향해 ‘자유’를 강조했다. 민감한 통일 대신 자유를 내세운 것이다. 동독인들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구호로 화답했다. 물론 통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소련·폴란드 등 동구 공산권 국가들은 물론 서구 우방인 영국·프랑스, 그 밖에 독일의 침략을 받은 경험이 있는 유럽 여러 나라는 독일의 통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동독은 ‘다이아몬드 원석’
 
  독일 잡지 《슈피겔》이 2010년 9월 통일 20주년 특집기사를 냈다. 장벽 해체부터 통일을 최종 승인했던 2+4회담(동·서독+전승 4국)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제목은 ‘1 대(對) 100(Allein gegen Alle)’, 콜 총리 홀로 세계를 상대로 통일 도박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의미였다.
 
  역시 최대 걸림돌은 소련이었다. 하늘이 콜의 편이었을까? 상대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던 고르바초프였다. 그는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에서 “개혁에 늦게 동참하는 자는 평생 벌을 면치 못할 것”라며 호네커의 뒤통수를 때린 바 있다.
 
  당시 소련은 개혁·개방으로 천문학적 재정이 소요되는 상황이었다. 콜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향후 독일 문제는 독일인의 자율적 결정사항이라는 데 동의해주었다. 콜과 참모들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콜의 외교안보보좌관이었던 호르스트 텔칙은 “소련이 대가로 1000억 마르크를 요구해도 기꺼이 수락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소련이 독일 편으로 기울자 영국과 프랑스가 분노했다. 고르바초프의 결정을 번복시키려 했지만 허사였다. 전범국(戰犯國)에 통일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등 정치적 이유를 내세웠지만 정작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슈피겔》의 보도에 따르면, 진짜 이유는 독일의 경제대국 성장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동독은 ‘다이아몬드 원석(原石)’, 서독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되면 찬란한 다이아몬드 보석으로 거듭날 것을 시기했다는 것이다.
 
  1990년 7월 16일, 독·소 코카서스 정상회담은 다음과 같은 합의를 도출했다. ▲전승국은 그 권리를 포기하고 독일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 그 내용은 ▲미래 독일 문제는 독일의 자율적인 결정에 맡긴다. ▲독일은 ABC(핵·화학·생물) 무기를 포기한다. ▲독일은 소련군 철수의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 등이었다. 이는 소련이 사실상 독일 통일을 승인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언론은 이를 ‘코카서스의 기적’이라 불렀다.
 
  독일은 합의대로 동독에 주둔했던 소련군 철수와 관련된 모든 비용을 지원했다. 철수한 소련군을 위한 주택건설 비용, 재교육 지원비 등 공식적으로 125억 마르크(48억 유로) 규모였다. 하지만 《슈피겔》은 독일의 대소(對蘇) 지원 규모는 총 550억 마르크(211억 유로) 이상으로 추정했다. “독일이 돈으로 통일을 샀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동·서독 경제상황
 
  여기서 분단 시기 및 통일 이후 동·서독의 경제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분단 기간(1949~1989)
 
  동·서독에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난 1950년, GDP는 서독(2619억 유로)이 동독(372억 유로)의 8배였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의 해 서독 GDP는 1조3995억 유로, 동독 GDP는 2079억 유로를 기록했다. 40년 만에 GDP 차이가 약 1조2000억 유로로 벌어졌다(도표1). 1인당 GDP로 보면, 서독은 분단 40년 동안 5000유로에서 2만5000유로로 증가한 반면, 동독은 3000유로에서 7500유로로 늘어난 정도였다. 체제의 차이가 만든 결과였다(도표2).
 
  더욱이 통계적 오류를 차치하더라도, 동독의 삶은 수치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사회주의 특성상 GDP 중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다 해도 생필품의 질(質)은 비교 불가였다. 예를 들어 동·서독 자가용 보유비율은 54 대 67로 비슷했지만, 사실은 벤츠와 트라반트(트라비)의 차이였다. 트라반트는 동독에서 생산한 자동차로 2기통에 차체도 플라스틱이었다. 어느 마을의 경우, 전화 한 대를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통일 후(1990~ )
 
  통일 후 경제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2003년 IT 분야의 거품경제와 2009년 세계금융위기 때를 제외하고는 플러스 성장세였다. 미국 부동산 폭락으로 야기됐던 금융위기 전후에도 3~4%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불확실했던 동독 변수가 사라지자 투자가 활성화된 결과였다(도표2).
 
  특히 1인당 GDP의 경우, 동독의 증가율은 서독의 서너 배에 달했다(도표3). 다만 통일 초기 동독의 경제적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보도됐던 것은 통일비용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사유화(私有化)로 인한 대량실업으로 사회적 불안이 가중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업(失業)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고용과 성장 두 마리 토끼를 잡아왔던 서독이 1980년대 들어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를 맞았다. 신기술로 강성 노조에 대응해온 결과였다. 콜 총리가 사민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1982년은 실업자 수가 고공(高空)행진 중이었다. 집권 4년 차인 1986년 실업자 수는 220만명을 기록했다. 마(魔)의 200만명을 넘어선 기록이었다.
 
  문제는 통일 후 대량실업과 같은 부작용이 이어질 경우, 동독의 개혁과 시장화(市場化)가 무산될 상황이었다. 명목상 완전고용을 자랑하던 동독 경제는 허울뿐, 기업의 노동생산성은 서독의 2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동구권 바르샤바조약기구 내에서는 높은 경쟁력을 갖췄다고 했지만, 허상(虛像)에 불과했다.
 

 
  私有化는 공산당 권력의 해체 의미
 
  1990년 7월 1일 동·서독 경제·사회·화폐통합조약 발효 이후 구체적 정책인 동독 재건 프로그램이 가동되었다.
 
  화폐통합은 동독 재건의 1호 정책이었다. 7월 1일 당일 460톤(275억 마르크 상당)에 달하는 서독의 지폐와 동전이 동독 은행에 전달됐다. 연령에 따라 동독 마르크 2000~6000까지 1 대 1로 교환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예금·해외재산 및 법인재산의 교환비율은 2 대 1 또는 3 대 1이었다. 동독 국가은행 금고에 쌓여 있던 돈은 모두 폐기되었다.
 
  동·서독 모두 우려가 컸다. 서독은 예산이 강탈당한다는 불만, 동독은 기업파산에 떨었다. 서독 중앙은행장 은 사직서를 냈다. 가격경쟁력을 잃게 된 동독 기업의 파산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다. 콜 총리는 왜, 이런 화폐통합을 강행했을까?
 
  첫째, 통일 굳히기였다. 곧 한 나라가 될 텐데, 동독 마르크를 놔둔 채 외부 투자를 기대할 수도, 재건의 기초도 쌓을 수 없었다. 어차피 파산할 동독 기업이라면 생명을 연장할 이유도 없었다.
 
  둘째, 서독으로의 대량 이주를 막기 위한 긴급 처방이었다. 장벽 붕괴 후에도 1990년 1월까지 50만명 이상이 동독을 떠났다. 방치했다간 동독은 유령도시가 될 지경이었다. 탈(脫)동독 이유는 이미 월요 데모의 구호 “서독 마르크를 달라. 아니면 우리가 갈 것이다”에서도 확인된 바 있었다.
 
  사유화 없는 동독 재건은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사유재산을 보장하고 시장의 기초를 세우지 않고서는 동독 재건은 불가능했다. 특히 동독 사유화는 단순한 민영화(民營化)라는 의미를 넘어 ‘공산 권력의 해체’를 의미했다. 재산의 공유라는 명목하에 사회주의통일당이 관리하던 인민재산이야말로 독재 권력의 원천이었다. 이 원천을 봉쇄하려던 트로이한트(신탁청)의 로베더 대표가 독일적군파에 의해 암살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독일의 대처’ 브로이엘
 
  트로이한트는 동독 전체의 재산을 관리하고 판매했던 슈퍼 기구였다. 기업 8500여 개, 2만5000여 도·소매업, 8000여 호텔 및 자영업, 농지 230만 헥타르, 토지 190만 헥타르 등이 대상이었다. 또한 사회주의통일당 및 슈타지(국가보안부·비밀경찰) 보유재산과 은닉재산들도 찾아내 관리・판매했다.
 
  다른 한편 투자자들은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구조조정을 해야 했고, 대량실업이라는 부작용을 동반했다. 화살이 트로이한트로 향했고 ‘기업의 저승사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로베더 대표가 암살된 후 비르기트 브로이엘 부대표가 대표직을 이어받았다. 주(州) 경제부 장관을 지냈다고 해도 여성으로 역사적 과제를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기우(杞憂)였다. 브로이엘의 일성은 “공짜 버터 빵은 없다!”였다. 로베더의 임무를 더욱 강력하게 이어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브로이엘은 동독인에게 시장의 철학을 주지시키는 한편, 신속하게 사유화를 밀어붙였다. 경쟁력이 부족한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기업이 퇴출(退出)되었다. 한계(限界)기업에 대한 구제도 최소화했다. 하지만 청산 대신 구제금융으로 도산(倒産)을 유보한 기업들도 퇴출시켜야 한다는 비판도 컸다.
 
  언론은 브로이엘을 ‘독일의 대처’라고 불렀다. 하지만 말 많고 탈 많던 사유화 작업의 결산은 788억 유로의 적자였다. 동독의 총재산이 마이너스였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북한을 동독과 비교하면서 ‘통일 불가(不可)’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새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신(新)도시를 구(舊)도시가 아닌 빈 땅에 건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통일 후 콜 총리는 당장 서독인 6100만명은 물론 새로 편입된 동독인 1600만명의 생명과 재산도 지켜야 했다. 즉시 실업급여, 사회적 보조금 지급 등은 물론 동독 재건을 위해 20년 동안 2조 유로의 재정을 투입했다. 소위 ‘통일비용’이었다.
 
  통일비용의 가장 큰 비중은 사회보장성 비용이었다. 2조 유로의 60%, 1조2000억 유로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갑작스런 통일로 이념적·정치적·사회문화적 충격에 빠진 동독인의 불안을 방치할 수 없었다는 명분에 일정 동의한다 해도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나머지 40%에 해당하는 8000억 유로는 철도·도로·통신 등 인프라 구축에 3000억 유로, 기업 보조금 및 정책자금에 2600억 유로, 동독 대외채무 변제에 588억 유로, 환경복원에 78억8000만 유로, 트로이한트 지원금 788억 유로, 화폐통합 248억 유로가 쓰였다.
 
  특히 인프라 구축은 민간투자 유치를 위해 시급한 과제였다. 동·서독을 잇는 고속도로와 철도가 신설 및 증설되고 낙후한 통신시설이 개선되었다. 전화선 365만 회선이 증설되었고 무선통신 시설이 완비되었다.
 
  콜 정부는 통일비용을 다음과 같이 조달했다. 연방과 주 정부가 독일통일기금 1150억 마르크로 급한 불을 끄고 증세, 대외채무, 긴축재정을 통한 자금 확보에 나섰다. 통일 1년 차인 1991년 7월 1일 연대세(連帶稅·통일세)를 도입했고, 1993년 1월 1일부터 부가가치세 세율을 14%에서 15%로 인상했다.
 
  1조2000억 마르크였던 국가부채는 1993년 1조8000억 마르크, 1995년 2조 마르크, 1997년 2조2000억 마르크로 급증했다. GDP의 1%에 불과했던 국가채무가 2~3%로 증가했다. 연대세는 소득세·자본소득세 및 법인세의 7.5%를 부가(附加)하는 특별세로 규모는 2019년까지 2765억 유로에 달했다. 종합해보면, 독일의 통일비용은 대외부채 75%, 증세 18% 및 긴축재정 6%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점진적 통일 vs 급진적 통일
 

  서독 기본법(헌법)에는 통일과 관련해 2개 조항이 있었다. 제23조와 제146조였다. 전자(前者)가 동독을 서독의 연방체제로 편입하는 방안이었다면 후자(後者)는 단계적 점진적 통일방안이었다. 기민당은 제23조, 사민당은 146조를 공론으로 채택했다.
 
  사민당은 통일비용을 이유로 급진적 통일에 반대하고 점진적 통일을 주장했다.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인 스웨덴 경제학자 애스런트는 점진적 통일을 “생선수프가 수족관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점진적 통일은 개혁의 과정에서 공산 권력을 배제할 수 없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개혁의 대상이 개혁에 참여하는 모순이 점진적 통일에 숨겨져 있다는 논리였다.
 
  급진적 체제 전환을 했던 체코·폴란드 등과 달리 점진적・단계적 전환을 택했던 구소련 국가 및 불가리아·알바니아 등은 여전히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내의 경우 점진적 통일을 주장하는 전문가가 다수다.
 
  통일 후, 투자 등 경제지표는 우려한 것과 달랐다. 인프라 투자가 경기를 선도하는 한편, 경화(硬貨)를 손에 쥔 동독인들의 구매력이 살아났다. 40년 이상 참았던 1600만명의 소비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며 기업의 숨통을 터주었다. 가히 통일특수(統一特需)였다. 동독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60%가 사회보장성에 과도하게 치우쳤다는 비판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경제성 자료에 따르면 동독의 설비투자는 1991~2000년까지 10년 동안 8203억 유로에 달했다(도표4). 매년 평균 800억 유로로 1인당 약 4500유로에 달했다. 참고로 2000년 한국의 설비투자는 50조원, 당시 환율로 약 500억 유로, 1인당 100만원 수준이었다.
 
  실업률도 2005년부터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물론 초기에는 고용이 실업을 커버하지 못했고 동독 실업률이 서독의 2배를 상회하자,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2등국민 논란도 컸다. 바로 이즈음인 1998년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총리직에 올랐다.
 
  슈뢰더는 하르츠를 노동개혁위원장으로 임명하고 2002년 개혁안을 만들었다. 핵심은 노동의 유동성을 높이고 실업급여 등 사회보장성 지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친노(親勞) 성향의 사민당 정권이 노조에 반하는 정책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 개혁으로 통일 후 8년의 기민당 업적의 그늘이었던 실업문제를 해소할 전기가 마련되었다. 기민당과 통일 방안은 달랐지만, 통일 후 드러나는 문제에 함께 힘을 합친 모습이었다.
 
 
  “한반도 통일이 독일보다 쉽다”
 
  독일 《디차이트》, 2013년 4월28일자에 ‘북한 재건’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밤베르크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울리히 블룸의 글이었다. 요약하면 “한국은 시간이 있을 때 통일 대비에 만전을 기하고 유일한 전례인 독일 통일의 경험을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얻은 교훈, 시행착오 및 경험을 담은 ‘코리아 카탈로그’를 선보였다. 한국이 본받아야 할 내용으로 ▲재산권 반환의 원칙을 보상으로 대체 ▲인프라 촉진법 가동 ▲북한 기술자 보호 및 활용 ▲공장 건설 등 직접투자에 중점을 둘 것 ▲인민군 조직을 활용할 것 등을 제시했다.
 
  콜은 동독 재건 초기 인민재산과 관련해 원소유주에게 반환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고향에 토지·주택 등을 두고 탈출했던 이주자들이 서둘러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이 원칙이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았고 기업은 재산권 반환 소송에 휘말렸다. 정부는 곧바로 투자우선권을 제정해 시정 조치에 나섰지만 부작용이 컸다.
 
  인프라 구축은 민간투자 활성화를 위한 핵심적인 과제임을 재확인했다. 또한 북한의 2등국민화를 경계해야 하며 대안으로 핵·미사일·군사 분야 북한 기술자들을 십분 활용하고 북한에 R&D 등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토록 하라는 제안도 덧붙였다.
 
  직접투자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동독 기업이 서독 공장 작업장의 연장이라는 불만으로부터 얻은 경험이었다. 또한 150만명의 인민군 조직을 해체하기보다 적당한 활용 방안을 찾으라는 것 등이었다.
 
  종합하면 “한반도 통일이 독일보다 쉽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시행착오를 분석해 대비책을 마련할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독일 통일=흡수통일=돈 먹는 하마’라는 등식을 깨야 할 때다. “남북관계를 개선해 경제적 교류와 협력을 늘려 북한 경제를 성장의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 통일해야 비용이 적게 든다”는 희망고문에 빼앗길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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