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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독일 통일 30주년

박성조 베를린자유대 교수

“민주주의적 가치관보다 同族 개념 우선하는 건 위험”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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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무트 콜, 베를린장벽 붕괴 후 ‘민족’이라는 프레임으로 이성적 접근 주장하던 사민당 압도”
⊙ “통일 30주년 관련 특별한 움직임 없어”
⊙ 동독 사람들, “민주주의·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 “통일비용, 30년간 정부 부문 3000조원, 민간 부문 1500조원 정도 들어갔을 것”
⊙ “외교와 경제가 독일 통일의 원동력… 한국, 국제적 고립 계속되면 통일 불가능”

朴聖祚
1936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베를린대·파리대 정치학·경제학 수학, 베를린자유대 정치학 박사. 독일 보훔대 사회과학 분야 교수 자격 획득(1973) / 서울대 초빙교수, 독일 루르대 동양학부 학장, 베를린자유대 정치학과 교수 역임. 現 베를린자유대 명예교수
  독일 통일 30주년 특집을 준비하면서 박성조(朴聖祚·84) 베를린자유대 명예교수에게 독일 통일을 총론적으로 정리하는 글을 청탁하려 했다. 박성조 교수는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동양인 최초로 독일 사회과학 부문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특히 독일 통일 이후에는 거의 평생 동안 독일을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통일 문제에 대해 활발한 연구를 하면서 《통일 이렇게 하자》 《한반도 붕괴》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공저) 등의 책을 낸 바 있다.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는 박 교수는 바이마르공화국 시절부터 서독 시절까지 독일 외교관을 지낸 장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서 원고를 작성할 시간이 없다며 줌(Zoom)을 이용한 인터넷 화상(畵像) 인터뷰를 제안했다. 기자보다 30년 연상(年上)인 노(老)교수가 그런 첨단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이용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한 번도 줌을 이용해본 적이 없음에도 박 교수의 제안에 응했다. 줌에 회원 가입을 하고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사용법을 익히고, 연습을 해본다고 부산을 떤 후, 9월 5일 인터뷰를 했다. 막상 줌으로 인터뷰를 시작해보니, 두 사람 모두 초보여서 음성이라도 잘 들리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다.
 
  박성조 교수는 안부 인사를 하면서 “일부 독일 유튜브에서 ‘한국 정부가 코로나19 사태를 빌미로 기독교회를 탄압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독일에서는 교회 탄압의 문제를 굉장히 민감하게 여기는데, 주(駐)독일 한국대사관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최근 대선(大選)에서 있었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벨라루스 시위를 계기로 한국의 4·15총선 부정설에 대해 보도하는 독일 유튜브도 있다”고 말했다. 독일 통일의 단초가 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베를린장벽 붕괴 소식은 언제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날 밤 11시쯤 TV를 보다가 ‘장벽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동독 사람들이 장벽을 넘는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장벽 붕괴가 통일로 이어질 것 생각하지 못해”
 
  ― 그때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사실 베를린장벽 붕괴 이전에도 동독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해왔습니다. 그해 여름 헝가리에서 휴가 중이던 동독인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했고,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있는 서독대사관으로도 동독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았어요? 또 베를린장벽 붕괴 3개월 전, 장벽 붕괴 후 총리가 되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의 한스 모드로가 소련을 방문, 고르바초프에게 차관(借款)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우리도 글라스노스트(개방), 페레스트로이카(신사고·혁신)를 빨리 진척시켜야 하는 상황이라 당신들을 도와줄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동독의 붕괴는 피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 그럼 베를린장벽 붕괴가 독일 통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박 교수는 놀라울 정도로 단호한 음성으로 “천만에!”라고 답했다. 동독 공산 정권 붕괴는 일찍부터 예상했다면서 통일은 예상하지 못했다니 의외였다.
 
  ―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1973년 서독 보훔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논문을 쓰게 됐을 때, 지도교수는 ‘언젠가 공산권이 망할 텐데, 그때 어떻게 공산주의 경제를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논문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당시 공산권 경제에 관한 자료들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 논문을 쓰려고 어렵게 구해서 연구해보니 공산권과 서방의 경제 격차가 무척 크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서방 일부에서는 소련이나 동독은 물론 중국·북한·쿠바 경제도 잘 돌아가고 있다고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막상 들여다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엉망이었습니다. 유럽 통합의 경우에서도 그렇지만, 서로 경제 수준이 비슷해야 가능한 겁니다.
 
  게다가 경제는 그렇다 쳐도 사회주의 체제의 정치나 이념, 그리고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모르는 거잖아요? 그런 이유에서 동・서독 통일은 어렵다고 본 거지요.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에는 독일에서 그게 통일로까지 이어질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일이 통일되면 큰일 난다, 동・서독이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 그럼 독일이 통일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언제쯤입니까.
 
  “1990년 7월 1일 경제·통화·사회 통합이 되는 걸 보고서야 ‘진짜 통일이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콜의 뚝심
 
  ―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독일 통일에 이르기까지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가 잘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독일 사람들에게도 이런 농담을 자주 했습니다. 콜이 고향 오거스하임의 자기 집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무언가 떨어져서 입에 들어 있기에 눈을 떠보니 ‘통일’이라는 사과였다고 말입니다.”
 
  ― 그건 콜한테는 너무한 얘기 아닌가요.
 
  “사실 콜은 그때 9년째 집권하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업적도 별로 없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콜은 눈을 뜨고 나자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뚝심 있게 통일을 밀어붙였습니다. 저는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동독인들의 시위구호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뀐 데에는 서독의 입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콜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콜 총리는 동독 경제가 붕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89년 10월 27일 슈러 동독국가계획위원장은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정치국에 ‘동독 경제가 망해가고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 때문에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했다는 유력한 주장이 있습니다.
 
  콜 총리는 외교는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자유민주당 총재)에게 맡기고, 자신은 ‘민족’이라는 프레임 안으로 동독 사람들을 밀어넣으면서, ‘동독을 살리겠다’ ‘통일이 되면 5년 내에 동독을 서독 수준으로 번영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동독 사람들은 콜의 그 약속에 반한 거지요. 좀 심하게 말하면 콜이 동독 사람들을 현혹한 것이지요. 그것을 리더의 뚝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폐통합
 
2009년 10월 31일 독일 베를린에서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 주최로 열린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 기념행사에서 독일 통일 주역 세 사람이 만났다. 왼쪽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사진=로이터/뉴시스
  ― 통일 외교 과정에서 겐셔 외무장관이 있기는 했지만, 총리던 콜의 역할이 컸을 텐데요.
 
  “저는 통일 외교에서는 1974년부터 외무장관을 맡아온 겐셔의 몫이 크다고 봅니다. 독일의 통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 등을 설득하는 데 특히 그의 역할이 컸습니다.
 
  물론 콜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특히 콜은 미국과의 관계가 좋았어요. 부시를 잘 모셨다고 할 수 있지요. 소련의 고르바초프와도 친했습니다. 코카서스에 있는 고르바초프의 다차(별장)에도 가고 그랬잖아요?”
 
  콜 총리가 동독 사람들을 ‘현혹’한 무기는 서독 마르크화(貨)였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무리하게 1대 1 교환비율로 화폐통합을 한 것이 통일 후 경제가 나빠진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 1대 1 화폐통합을 꼭 해야 했을까요.
 
  “통일 후 한동안 ‘거리에서 비닐 봉지를 들고 있는 사람은 동독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습니다. 동독 시절 한두 달에 한 번 오렌지나 바나나 같은 걸 팔았는데, ‘오늘 몇 시부터 판다’고 알리는 식이어서 그에 대비하기 위해 봉지를 들고 다니던 버릇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럼 통일 후 오렌지나 바나나를 살 돈은 어디서 생겼느냐? 화폐통합으로 생긴 돈이지요. 화폐 교환비율을 놓고 4대 1로 하자, 2대 1로 하자, 1대 1로 하자, 말이 많았습니다. 결국 콜 총리와 테오 바이겔 재무장관이 ‘2대 1 교환으로 하면 동독 사람들이 계속 서독으로 올 것이다. 1대 1 통합으로 해야 동독에 머물 것이다’ 해서 1대 1로 결정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서독의 일당이 20~25마르크, 동독이 12마르크 수준이었으니, 1대 1 교환을 해야 동독 사람들이 그대로 머물 것이라는 얘기는 맞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동독에 일자리가 없어 결국 서독으로 넘어오게 되기는 했지만….”
 
 
  콜, ‘민족’을 차지
 
  ―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사회민주당이 통일 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사실 분단 시기에 기독교민주당은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었습니다. 동독 문제에 큰 관심은 없었습니다. 서베를린 시장을 지낸 빌리 브란트와 그의 핵심 참모인 에곤 바르는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직접 느꼈고,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점진적 접근을 통해 독일의 갈등, 유럽의 갈등을 해소해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브란트의 뒤를 이은 헬무트 슈미트는 이성적·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사민당 중진이던 에플러 해외협력부 장관은 동독과의 접근 강화를 추진했지요. 심지어 독일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유럽 통합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민당의 오스카 라퐁텐은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의 상황에서도 통일보다는 여성·환경 문제 등을 더 중요한 이슈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민당의 태도는 이성적·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기민당의 콜이 들고나온 ‘민족’이라는 프레임 앞에서는 무력(無力)했습니다.”
 
  ― 한국에서는 좌파가 민족주의 프레임을 차지했는데, 통일 당시 독일에서는 그 반대였네요.
 
  “민족이라는 개념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내세웠던 히틀러식의 ‘민족’이 있는가 하면, 조선 말기 이후 다른 민족의 핍박을 받아온 한국이나 쿠르드족이 생각하는 ‘민족’이 있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군중(群衆)으로서 ‘민족’도 있습니다. 독일인들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 전,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을 때에도 피(被)지배 민족이 생각하는 ‘민족’이 아니라 자존심이 있는 ‘민족’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박성조 교수는 “동독은 북한과는 달랐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독은 통일 전까지는 자신들이 동구에서 가장 잘산다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동·서독 간에는 제한이 붙기는 했지만 인적 왕래도 있었고, 동독 사람들은 서독 TV를 보고 서독 사람들과 통화도 하면서 서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는 계몽된 민족이었습니다.
 
  동독은 동구권에서 여성해방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앞선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동독 인민기업(VEB)의 공장장 가운데 절반가량, 엔지니어의 40%가량이 여성이었습니다. 대학교수도 상당히 많았고, 여성 이혼율도 동구권에서 가장 높았죠. 북한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얘기입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국민 모두가 DMZ를 걸으면 그 마음이 북한 당국자들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런 거 해서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통일연구자, 별로 없다”
 
  ― 통일 30주년을 맞는 독일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코로나19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별로 특별한 건 없어요. 작년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때에도 그렇게 넘어갔어요.”
 
  순간 당혹스러웠다. 독일 사람들이 통일 30주년을 무덤덤하게 넘어간다면, 일껏 독일 통일 30주년 특집을 마련한 《월간조선》은 뭐가 되나….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니, 6·15남북정상회담 20주년이니, 4·19혁명 60주년이니 하면서, 북한식으로 표현하면 꺾어지는 해마다 요란하게 기념하는 게 촌스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작년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이나 올해 독일 통일 30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사건들을 되돌아보면서 통일에 대해 성찰해보는 움직임 같은 게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통일을 하고 보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더 좋은 정책을 내놓지 못했고, 정치의 도구화가 됐다’는 반성은 늘 있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독일에서는 통일 문제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10년 전까지는 꽤 있었는데…. 근래 연구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2016년부터 독일 최근세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진행하고 있는 ‘대화여행(Diaogreise)’이라는 연구입니다.”
 
  ― 그게 뭡니까.
 
  “4명의 남녀 학자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군(郡) 정도에 해당하는 옛 동독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주민과 그 지역의 문화, 정치 참여, 생활, 통일에 대한 생각, 경제 수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리한 것인데, 곧 책으로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래도 동구에서 제일 잘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유지해오던 생활 방식이 통일 이후 하루아침에 바뀌어 당혹스럽다’ ‘통일 후에 서독에서 민주주의·자본주의가 들어왔는데,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같은 얘기들이 나옵니다.”
 
 
  ‘제3세대’의 등장
 
2015년 10월 옛 동독 지역인 독일 드레스덴에서 극우 페기다 회원들이 이슬람 난민 유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진= AP/뉴시스
  ― 통일 후 ‘오씨(Ossis·동독놈)’ ‘베씨(서독놈·Wessi)’ 하면서 갈등하던 것은 좀 나아졌습니까.
 
  “몇 년 전부터는 스스로를 ‘제3세대’라고 말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동독인도, 통일독일인도 아닌 ‘통합된 유럽의 시민’이라는 것이죠. 통일이 되기 4~5개월 전에 ‘감정정체(感情停滯·Der Gefuelsstau)’ 이론을 통해 ‘동독인과 서독인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했던 동독 출신 정신과 의사 한스-요하힘 마아츠는 올해 《분단된 통일》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2019년 《월간조선》 1월호에 실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박성조 교수는 마아츠의 ‘감정정체 이론’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이론을 다시 한 번 소개한다.
 
  〈사회주의를 내건 동독 정권은 개인에게 각종 시혜적(施惠的) 사회보장을 제공하는 한편, 주민들을 체제에 순응시키기 위해 공포와 위협을 사용했다. 주민들은 한편으로는 공포와 위협에 순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체제가 제공하는 시혜에 의존하게 됐다. 결국 이런 체제하의 인간은 정신적 미성숙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듯이 국가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의식과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도전정신을 전혀 키우지 않게 된 것이다.
 
  마아츠는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권위주의적 천진난만함’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천진난만함’이라는 것은 ‘진실한 자아(自我)에 대해 모른다’는 의미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된다.
 
  이러한 정신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사회주의 체제하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시받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끊임없이 보거나 남과 비교하면서, 그들로부터 인정과 애정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불안과 공포를 느낄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 성향과 또래 집단끼리 뭉치는 내집단(內集團) 성향, 즉 감정정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마아츠의 주장이다.〉
 
  ‘감정정체’ 주장은 독일 통일 이후 왜 하필이면 옛 동독 지역에서 극우(極右)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지도 설명해준다.
 
  이와 관련해 박 교수는 “통독 이후 옛 동독 지역에서는 민주사회당(PDS·동독 시절 집권 공산당이던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이 10~15%를 득표해왔는데, 근래에는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6~20%를 득표, 민사당을 제치고 주(州)의회, 연방의회 등으로 진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당은 요즘은 온건한 축이 되어버렸지만, AfD는 상당히 과격합니다. 멤버들도 대부분 젊은 사람들입니다. 극우세력이 득세하는 것은 결국 이슬람 난민에 반대하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작센주 드레스덴(옛 동독 지역)에서 생긴 페기다(Pegida·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들)라는 극우세력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메르켈 총리
 
1991년 4월 각료회의에서의 헬무트 콜(뒤) 독일 당시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당시 여성청소년부 장관. 콜 전 총리는 동독 출신의 정치 신인이던 메르켈을 발탁했다. 사진=AP/뉴시스
  ― 그래도 통일된 지 불과 15년 만에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가 되어 15년이나 집권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 사람 능력이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박 교수의 말투에서는 마뜩잖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독일에는 연방의원, 주정부 총리, 연방장관, 정당 지도부 등 총리가 되려면 밟아야 하는 일정한 코스가 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상당히 우연에 힘입어 총리까지 올라갔습니다. 동독 시절에는 베를린의 물리화학연구소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근래 스위스의 유튜브 등을 보면 그 시절 행적이 불투명하다는 얘기들이 있어요. 통일 직후 콜이 내각에 동독 출신 여성 각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당시 37세던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발탁해준 덕분에 정치적으로 크기 시작했죠. 1999년 콜 총리의 정치자금 스캔들로 콜 총재와 볼프강 쇼이블레(현 하원의장) 등 상사(上司)들이 낙마(落馬)하자 동독 체제하에서 배운 정치적 술책으로 당권(黨權)을 장악하고, 총리 자리까지 오른 거죠.”
 
  ― 메르켈 총리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동독이라는 비(非)경쟁 사회에서 성장해서 그런지 독일 정당 내에서의 경쟁, 정당 간의 경쟁이라는 걸 잘 몰라요. 당내에서도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을 키우지 않아요.
 
  유럽연합이나 미국과의 관계는 잘 하고 있고, 유럽 재정위기를 잘 넘겼다고 하지만, 독일 경제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독일의 경제침체에 대한 책임이 메르켈 총리에게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독일은 제2차 산업혁명 시대의 산업인 자동차·기계·부품·제약 등에서는 여전히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제4차 산업혁명, 즉 디지털화·인공지능(AI)·브로드밴드 등의 분야에서는 한국보다도 뒤처져 있어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경제혁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성조 교수는 “서독 사람들은 메르켈 총리에 대해 ‘크게 잘하는 것도, 크게 잘못하는 것도 없다’고 평가하는 반면, 동독인들은 ‘서독 사람 아닌 서독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없다”고 말했다.
 
  ― 동독 출신 인사들의 공직 진출은 어떻습니까.
 
  “메르켈 총리가 동독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주요 각료나 정부 각 부서 요직, 기관장 등에 동독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동독 출신 민간 기업 중역(重役)도 거의 없고. 물론 능력이나 경력이 안 되는 사람을 억지로 자리에 앉힐 수는 없겠지만….”
 
 
  “기업 아닌 재정이 동독 먹여 살려”
 
  ― 통일 이후 옛 동독 지역 기업의 민영화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통일 당시 동독 지역에는 220개 정도의 콤비나트와 1만2000개의 인민기업이 있었습니다. 이 기업들을 트로이한트(신탁청)가 민영화했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정부에는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어요. 삼성전자, 삼성SDS, 삼성SDI 등이 들어왔었지만 다 빠져나갔지요.”
 
  ― 근래에는 어떻습니까.
 
  “BMW가 라이프치히에, 미국 GM이 아이제나흐에 자동차 공장을 세웠는데, 손익분기점이 되려면 25만 대를 생산해야 하지만, 10만 대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브란덴부르크주에는 테슬라 공장이 들어왔지요. 독일이 전기차, 수소차, 하이브리드카 등의 방면에서는 좀 늦어요. 그래도 작센주 드레스덴을 중심으로 스타트업 기업들이 나오고 있는데, 실리콘밸리를 본따서 이를 드레스덴밸리, 작센밸리라고 합니다.
 
  콜 총리가 ‘동독 사람들을 먹고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기는 했는데, 기업이 아니라 재정을 갖고 그렇게 했습니다.”
 
  ― 통일비용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통일 후 10년 동안 1000조원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2019년 정부의 동독 지역에 대한 지원인 연대(連帶)지원협력이 끝나기는 했지만, 코로나 지원금까지 합치면 올해까지 3000조원쯤 들어간 것으로 저는 봅니다. 이건 공적(公的) 지원, 즉 정부재정지원만 얘기한 것입니다. 비(非)정부 지원, 즉 교회·시민단체·학교·노조·기업 차원의 지원과 자원봉사들까지 치면 매년 500조원, 총 1500조원 정도가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정부 지원과 비정부 지원을 모두 합치면 4500조원 정도라고 볼 수 있겠지요. 돈을 그렇게 많이 쏟아부었지만, 콜이 당초 약속했던 ‘3~5년 내 번영’은 없었습니다.”
 
  박 교수는 “통일비용이라고 하면 통일이 된 1990년 이후에 들어간 돈만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분단 시절에 서독이 동독 고속도로·철도·운하 등을 보수(補修)하는 데 투입한 비용도 통일비용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그 규모는 엄청나게 커지겠죠. 우리나라에서는 독일 통일 후 10년간 1000조원이 들어간 것만 갖고 ‘그 정도면 우리도 감당할 수 있지 않으냐’고 하는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 통일비용은 어디에 쓰인 겁니까.
 
  “우선 연금·실업보험 같은 사회통합 비용으로 45%가 들어갔습니다. 동독 공산 정권이 이쪽으로는 해놓은 게 없었거든요. 처음에는 서독 사람의 50% 수준으로 연금 등을 지급하다가 지금은 85~90% 수준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동독 지역의 노동생산성이 대략 서독 지역의 85~90% 수준인 것을 생각하면 합리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국제적 고립 계속되면 통일 불가능”
 
1984년 9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격전지인 베르덩 인근 두오몽에서 손을 잡고 전몰용사들을 참배하는 콜 독일 총리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왼쪽). 이런 신뢰가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AP/뉴시스
  ― 독일 통일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우선 독일 외교정책의 수월성(秀越性), 즉 미국과의 절대적인 동맹관계, 소련과의 면밀한 우호관계, 서구 진영 속으로의 치밀한 통합, 유럽연합과의 협조, 프랑스·폴란드와의 신뢰할 수 있는 협력관계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국이 지금처럼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행보를 계속한다면 통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분단 후에도 지속적으로 동독과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던 독일 경제의 수월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 그게 뭡니까.
 
  “‘통일’을 좁은 의미에서 본다면, 독일 통일은 정치적·법적·행정적·군사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거의 완벽하게 성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경제적·사회적·문화적·심리적으로 아직도 동·서독 사람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특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골자인 ‘자유’라는 가치관(價値觀)의 공유(共有)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한 독일 최근세사 연구자들의 ‘대화여행’에서 나온 옛 동독인들의 볼멘소리, 즉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배운 적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는 얘기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성조 교수는 마지막으로 “독일 통일의 가장 큰 문제는 ‘같은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뒤로 미루거나 등한시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은 위험”
 
  “저를 비롯해서 독일 통일을 연구해온 학자들이 경험적으로 얻어낸 결론은 통일을 위해 서로 공유할 ‘민주주의적 가치관’보다 감상적·우연적, 때로는 조작된 ‘동족(同族) 개념’을 우선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독일 통일과 관련해서 지적되는 문제점들도 대부분 ‘같은 민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급속도로 통일을 밀어붙인 데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남(南)과 북(北)은 피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토론하면서 통일을 하는 것도, 북한과 접촉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그 접촉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 ‘이웃 나라’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가 우선이냐 ‘통일’이 우선이냐 하는 괴이한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라는 가치관에 관해서는 특별한 토론이 필요 없지만, ‘민족’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이 필요합니다.
 
  지금 북한은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고 있고, 문재인 정부의 통일 정책도 그런 기조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북에 있는 ‘우리 동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김가네 세습독재체제의 노예들이잖습니까? ‘우리는 한 민족이기 때문에 토론은 필요 없다’는 식의 접근은 곤란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같은 핏줄’이 아니라 ‘같은 가치관’을 가진 나라와 사람들끼리 통합하고 동맹을 맺는 시대입니다.
 
  빌리 브란트는 ‘같은 민족이 같이 있게 되면 자연적으로 서로 무성(茂盛)해진다’고 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현실은 아직 볼 수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삼성 같은 몇 개의 대기업이 북한에 투자하고, 남북한이 합쳐지면 무섭게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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