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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독일 통일 30주년

독일의 對外정책과 통일정책

“첫째 목표는 자유, 둘째는 평화, 재통일은 세 번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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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나워, 동독 사람들에게 서독이 ‘매력적인 磁石’이 되어야만 독일의 자유통일이 가능하다고 믿어
⊙ 슈미트, 소련과 정상회담 후 정부 대변인이 “서독은 양대 초강대국들의 통역”이라고 하자 “서방정책의 충직한 통역”이라고 덧붙여
⊙ 콜, 베를린장벽 붕괴 前後해서 동독에 ‘민주적·합법적’ 정권 수립 요구하며 공산 정권의 지원 요청 거부
⊙ 소련은 물론 영국·프랑스도 독일 통일에 부정적이었지만, 미국이 앞장서서 설득
⊙ 과거사 청산 요구, 內在的 접근법, ‘동독은 잘 돌아가고 있다’고 헛소리한 언론인들, 반핵평화운동 등 한국과 흡사
⊙ 콜, “1989~1990년에 일어난 사건들은 아데나워의 견해가 옳았다는 것을 인상 깊게 확인시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동·서 베를린 시민들은 장벽 위에 올라가 환호했다. 사진=AP/뉴시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을 때 헬무트 콜 당시 서독(독일연방공화국) 총리는 폴란드를 방문 중이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아 국토가 분할 점령됐었고, 전쟁 후에는 자기들의 동부 영토(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일부)를 소련에 할양하는 대신 오데르-나이세강(江) 이동(以東)의 독일 동부 영토를 넘겨받았다. 그 때문에 독일에 폴란드는 늘 배려해줘야 하면서도 껄끄러운 존재였다. 더욱이 서독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하는 것은 1982년 폴란드가 자유노조 탄압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방문 첫날 베를린장벽 붕괴라는 대사변(大事變)이 터진 것이다. 대변인으로부터 “동독 사람들이 장벽을 열었다”는 보고를 받은 콜은 “그럴 리가… 정말이오?”라고 반문(反問)했다.
 
  콜 총리는 고민 끝에 폴란드 측의 양해를 구한 후 잠시 베를린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콜 총리를 태운 전용기는 폴란드에서 서(西)베를린으로 직행할 수 없었다. 베를린에 대한 4개국(미국·소련·영국·프랑스) 협정상 독일 공군기는 서베를린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콜 총리는 일단 함부르크로 간 후, 버논 월터스 주독(駐獨) 미국대사의 협조를 받아 미 군용기로 갈아탄 후 서베를린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콜, 자유베를린 지원해준 美·英·佛에 감사
 
  그날 서베를린시에서는 베를린장벽 붕괴를 축하하는 행사가 두 군데서 열렸다. 하나는 쇤네베르크에 있는 서베를린 시청 앞에서 사민당 소속인 발터 몸페르 시장이 주최하는 행사였고, 다른 하나는 게대히트니스키르헤 인근에서 서베를린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이 주최하는 행사였다. 동・서독 통일의 물꼬가 열린 마당에 그것을 축하하는 행사는 통일되지 못한 것이다. 여론의 관심을 끈 것은 당연히 쇤네베르크 시청 앞에서 열린 행사였다. 여기에는 콜 총리 외에도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 ‘동방정책’으로 유명한 빌리 브란트 전 총리 등이 참석했다.
 
  몸페르 시장은 “독일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국민”이라면서도 이날을 일컬어 ‘통일의 날’이라고 하지 않고 ‘다시 만난 날’이라고 표현했다. 겐셔 외무장관도 ‘통일’과 연관될 수 있는 말은 재주껏 피해가면서 이웃 나라와 세계를 향해 “앞으로 독일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도 갖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사회민주당(사민당) 지지자들의 야유 속에 단상에 오른 콜 총리는 “지금 중요한 것은 공동의 미래를 향해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라면서 신중하고 현명하게 행동해달라고 당부했다. 콜 총리는 이날 그 자리에서 연설한 유력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유베를린을 위해 보여준 지원과 단결에 대해 미국·영국·프랑스 친구들에게 감사하는 한편,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겸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했다.
 
  연설을 마친 후 콜 총리는 동·서 베를린 접경에 있던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로 향했다. 트라비(동독제 대중차)를 몰고 동베를린에서 밀려들고 있던 동독인들은 콜 총리를 알아보고 “헬무트 콜!”을 연호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콜 총리는 자신의 외교안보보좌관인 호르스트 텔칙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여기 와서 봤지?”
 
  수도 본으로 돌아온 콜 총리에게 루돌프 자이터스 총리실장은 동독 측이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서기장 에곤 크렌츠와 콜 간의 양독 정상(頂上)회담을 제의해왔다고 보고했다. 이어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조지 H.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잇따라 전화를 걸어왔다.
 
 
  零時의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라는 역사적 순간에 벌어진 이 장면들은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329일간 콜 총리가 헤쳐나가야 했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敗戰國)으로 서베를린에 대한 통제권을 비롯하여 주권의 일부를 여전히 전승(戰勝) 4대국이 유보(留保)하고 있고 통일을 위해서는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미국의 지지, 폴란드 등 이웃 나라들과의 풀리지 않은 과거사 문제, 통일을 둘러싼 독일 내부의 정치적 갈등 (특히 좌파 세력의 딴지), 흔들리는 동독 공산 정권과의 관계 설정 문제, 서독의 자유와 풍요에 대한 동독인들의 동경(憧憬)….
 
  이러한 난제(難題)들을 안은 선장 헬무트 콜은 이날부터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배를 몰고 ‘이념으로 분단된 나라의 평화적 통일’이라고 하는 미증유(未曾有)의 대항해(大航海)길에 올랐다. 329일 후 독일연방공화국은 ‘통일’이라고 하는 항구에 안착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모처럼 도래한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쥔 독일의 외교력(外交力)일 것이다. 물론 그 외교력은 하루아침에 쌓인 것은 아니었다. 분단 이후 수많은 고민과 모색, 시행착오, 경험의 소산이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영토의 4분의 1은 폴란드와 소련에 넘어가고, 나머지 영토와 수도 베를린마저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전승 4대국에 분할당한 것은 독일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전후(戰後)에야 비로소 유대인 학살의 참상(慘狀)을 알게 된 독일인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뒤늦게 깨닫고 그야말로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1871년 독일제국(제2제국)이 성립된 후 70여 년간에 걸쳐 이룩한 모든 성취가 박살 난 당시 상황을 독일인들은 ‘영시(零時·Stunde Null)’라고 불렀다. 무너진 나라를 재건해야 했지만 어떤 길을 택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아데나워, 처칠보다 앞서 ‘철의 장막’ 예견
 
  한쪽에서는 분단을 거부하고 재통일[독일에서는 ‘통일’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한 통일을 지칭하며,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통일은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라고 표현]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존경받던 사회민주주의 정치인인 사민당의 쿠르트 슈마허는 물론 보수정당인 기민당의 야콥 카이저 같은 사람들이 이런 입장이었다.
 
  반면에 재통일보다는 안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구축, 밖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로의 편입을 통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면서 통일을 위한 실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초대(初代) 총리가 된 콘라트 아데나워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미 1945년 7월 한 언론사 편집국장에게 보낸 사신(私信)에서 “러시아가 철(鐵)의 장막(帳幕)을 치고 있다”고 경고했다. 윈스턴 처칠이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하기 꼭 8개월 전이었다. 아데나워는 ‘서방세계, 특히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수립’을 대외(對外)정책의 제1로 내세웠고 “우리 독일을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계명(誡命)”이라고 믿었다. 아울러 국내적으로는 서독이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번영을 구가(謳歌)하게 되면 동독 주민들이 서독에 대해 엄청난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므로, 아무리 혹독한 공산주의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동독 주민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아데나워는 국내정치적으로도 든든한 사회보장제도와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국민 대다수가 일체감을 갖는 국가 내지 사회를 만들어내서 동독 사람들에게 서독이 ‘매력적인 자석(磁石)’이 되어야만 독일의 자유통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후의 역사는 아데나워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독일조약·유럽방위공동체조약·런던 외채협정 체결(1952년), 나토 가입(1955년), 유럽경제공동체 창설(1957년), 독불협력조약 체결(1963년) 등을 통해 서방세계로의 통합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외교정책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해 아데나워는 1955년까지 자기가 외무부 장관직을 겸임했다.
 
 
  스탈린각서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前 독일 하원의장.
  소련이 서독과 서방의 결속을 굳게 하려는 아데나워의 행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스탈린은 1952년 3월과 4월에 전(全) 독일 자유선거에 의한 재통일을 제안하고 나섰다(스탈린각서). 스탈린은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독일의 군대 보유 허용도 약속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노림수가 있었다. 통일독일은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는 서독이 나토 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사민당의 쿠르트 슈마허는 물론 기민당의 야콥 카이저 같은 정치인들도 ‘통일의 마지막 기회’라며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열렬히 촉구했다. 하지만 아데나워 총리는 스탈린의 제안이나 국내의 압력을 일축했다. 그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독일 재통일을 가져올 유럽질서의 재편은, 서방세계가 소련에 대해 외교적·정치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주장할 수 있을 만한 힘을 충분히 길렀을 때나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하원의장은 1954년 4월, 기민당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면서 “독일의 첫째 목표는 자유이고, 둘째는 평화이며, 재통일은 세 번째에 불과하다”고 공언했다.
 
  독일사 연구자인 데니스 L. 바크와 데이비드 R. 그로스가 《도이치현대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구권의 공산주의 체제가 동시에 바뀌지 않는 한 통일독일이 민주국가로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보고, 독일의 통일은 동구권의 자유화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 아데나워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실제로 그로부터 38년 뒤 독일은 정확히 그렇게 통일되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우리는 여러분에게 속한다”
 
아데나워의 선거포스터. ‘실험은 안 돼!’라고 적혀 있다.
  1955년 5월 5일 그동안 서독을 속박해왔던 점령조례(占領條例)가 폐지되고 주권을 회복하던 날, 아데나워는 연방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와 떨어져 자유롭지 못하게 불법적인 국가에서 살도록 강요받고 있는 동독 동포들이여! 여러분은 우리에게 속하며 우리는 여러분에게 속합니다. 우리가 다시 얻은 자유에 대한 기쁨은 여러분이 이를 누리지 못하는 한 계속해서 반감(半減)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믿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인권을 얻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쉬지 않고 자유세계와 함께 투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데나워의 이 연설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에 즈음해서 발표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담화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차후도 당분간 공산압제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우리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동포여, 희망을 잃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목표, 즉 북쪽에 있는 우리 강토와 동포들을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 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서독 정부는 자신들이 독일의 유일 합법정부이며, 대외적으로도 자신들이 전체 독일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는 나라와는 단교(斷交)한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이를 ‘할슈타인 원칙’이라고 하는데, 1973년 6·23평화통일외교특별선언이 나올 때까지 대한민국도 이 원칙을 준용(準用)했다.
 
  한편 서독 정부는 1961년 동독의 인권탄압 행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기록하는 잘츠기터중앙기록소도 만들었다. 이 기구의 존재는 동독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동독은 잘츠기터중앙기록소의 폐지를 계속 요구했고, 일부 사민당 정치인도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이 기구는 동방정책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사민당의 변화
 
  처음에는 아데나워의 정책에 완강하게 반대하던 사민당도 아데나워의 정책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1959년 사민당은 바트 고데스부르크에서 강령을 개정, 종전의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의 변모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헤르베르트 베너 등 사민당 지도부는 나토 가입, 연방군 건설 등 아데나워의 외교·안보정책을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후일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빌리 브란트 등 사민당 내 젊은 정치인들도 친미반공(親美反共) 노선을 지지했다. 훗날 빌리 브란트가 추진하게 되는 동방정책도 큰 틀에서는 아데나워가 만들어놓은 국가 정체성(正體性)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진행된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1960년대에 접어들자 아데나워의 방침에 대한 회의(懷疑)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미국과 소련 간에 서서히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국경선과 소련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소련과 대화를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1년 8월 베를린장벽 구축은 이를 확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45년 이후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에서 서베를린-서독으로 탈주한 사람들은 줄잡아 300만명에 달했다. 이러한 추세는 1961년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급속해져서 그해 8월까지 20만명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의사·엔지니어 등 고급 인력이었다. 이들의 대탈주는 서독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했지만, 동독에는 큰 손실이었다. 특히 체제 경쟁 상황에서 동독 탈출자들의 ‘발로 하는 투표’는 이른바 독일민주공화국의 정통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한편 소련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는 베를린의 지위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긴장을 조성했다.
 
 
  베를린장벽이 안겨준 충격
 
빌리 브란트와 ‘접근을 통한 변화’를 제창한 에곤 바르(오른쪽). 사진=독일 공보처
  1961년 8월 13일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철조망이 쳐지고 장벽이 구축되기 시작하자 서베를린 시민들과 서독 국민들은 격분했다. 서베를린 시장이던 빌리 브란트는 연합군 사령부로, 분노한 시민들 앞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가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조치를 취해달라고 호소했다. 케네디는 브란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정의 뜻을 표하면서도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당시 선거 유세 중이던 아데나워는 며칠이 지나서야 서베를린에 모습을 나타내는 바람에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장벽 건설로 탈출자들을 막을 수 있게 된 동독 공산 정권은 물론 서독 및 서방 정부들은 이로써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은 일단락됐다며 안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빌리 브란트는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단지 ‘장벽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외칠 뿐, 더 나은 어떤 다른 대처 방안을 알지 못했다. 어떤 대응 조처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 서방 진영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서방에 대한 신뢰가 깊이 흔들렸다. 베를린 사람들에게는 경악의 날이었다. 그날이, 서방 진영에는 객관적인 안심의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베를린에 해당되는 그들의 권리는 침해되지 않았고 염려하던 전쟁의 위험은 피했다는 것이다. 서방이 자주 전승 4개국 협정을 인용하면서 유럽과 독일에 치욕스러운 장벽의 괴물을 면할 수 있게 할 수도 있었을 어떤 주도적 조처를 취할 의사와 능력이 없는 데 대해 나는 많은 시민과 함께 실망했다.”
 
  빌리 브란트는 “그 후로 나는 이 당시를 거울삼아 정치를 해왔다. 데탕트의 시작이라 할 동방정책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밝혔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서방세계로의 통합을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통일을 추진한다는 아데나워의 노선에 대해 ‘연방공화국의 영원한 거짓말’이라고 빈정대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언론인 출신으로 브란트의 측근 참모가 된 에곤 바르였다. 에곤 바르는 1963년 7월 투칭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내놓았다. 그의 주장은 같은 행사에서 빌리 브란트가 했던 연설보다 훨씬 더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아데나워는 갈수록 데탕트로 기우는 미국의 자세에 불안을 느끼고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에게 접근했다. 1963년의 독불협력조약(엘리제조약)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후일 유럽통합, 즉 EU(유럽연합) 창설로 이어졌다. 반면에 당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아데나워의 후임 총리) 등은 프랑스가 미국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이에 반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독일 외교의 중요한 자산으로 남아 훗날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아데나워의 뒤를 이어 에르하르트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적인 기민당 정부도 나름 정책 전환을 시도했다. 한마디로 동독의 존재는 부인하되 소련 및 동구와의 관계 개선은 추구하면서 분단, 특히 베를린장벽 구축으로 인한 고통들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리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기민당 총재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데나워를 필두로 한 기민당의 주류적 입장은 소련과 동독의 독재체제를 간접적으로라도 용인해야 한다면 데탕트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는 유럽의 현 상황을 기정사실로 인정해야만 변화가 생기고, 동독 주민들의 ‘생활의 질(質)’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빌리 브란트는 1963년 동베를린시 당국과 접촉해 그해 성탄절 휴가 중 서베를린 주민들의 동베를린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때 브란트는 동베를린과의 합의문에서 동베를린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수도(首都)’라고 명기했는데, 이는 동독이 정치적 실체(實體)임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1966년까지 신정, 성탄절, 부활절, 그 밖의 몇몇 기독교의 종교적 축일(祝日)에 동서독 주민들 간의 왕래를 허용하는 협정이 동서독 간에 맺어졌다. 빌리 브란트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뭔가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사민당은 물론 기민당의 연정(聯政)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자민당) 내에서도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고 오데르-나이세선을 독일-폴란드 국경으로 인정(다시 말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및 폴란드가 차지한 옛 독일 영토를 포기)하자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아비 없는 사회’
 
  1966년 12월 기민당과 사민당이라는 양대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대연정(大聯政)이 출범했다. 기민당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가 총리,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았다. ‘코끼리들의 결혼’이라는 소리를 들은 대연정은 전체 하원의석 중 총 447석을 차지했다. 기민당의 연정 파트너였다가 밀려난 ‘유일 야당’ 자민당의 의석은 49석에 불과했다.
 
  대연정이 출범한 것은 당시 산적해 있던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큰 과제는 그때까지도 미국·영국·프랑스 등 점령 3개국이 갖고 있던 비상사태 선포권을 넘겨받아 기본법(헌법)에 이를 명시하는 개헌(改憲)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독이 완전한 주권 회복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세력, 지식인, 학생들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확보한 대연정이 나치와 같은 독재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당시 독일은 훗날 ‘문화혁명’이라고 일컫게 되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1950년대 ‘라인강의 기적’ 덕분에 전후 복구를 완결 짓고 풍요를 누리게 됐지만, 그 풍요의 과실을 따 먹게 된 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를 향해 “당신들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뭐 하고 있었느냐?”고 삿대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젊은이들에게 전후 서독은 나치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여전히 권위주의적 적폐(積弊)들이 온존해 있는 불의(不義)한 체제였다. 기성 체제의 모순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연극이 공전의 히트를 하는가 하면, 나치 전력(前歷)이 있는 기민당 요인들이나 보수 매체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은 나치 시대에 군사기지와 강제수용소 건설을 했던 건설회사 간부였다는 이유만으로 ‘나치’라는 공격에 시달리다가 임기 만료 전에 사임했다. 나치 시절 외무부 부국장이었던 키징거 총리도 젊은 여성으로부터 따귀를 얻어맞았다. 정신병리학자 알렉산더 미첼리히는 이러한 현상을 ‘아비 없는 사회’라고 표현했다. ‘아비 없는 사회’의 젊은이들의 불만은 결국 1968년 68사태로 폭발했다. 그 배후에는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국가안전부)의 공작이 있었다.
 
  68사태 이후 일부 젊은이는 독일적군파, 바더-마인호프 같은 극좌 테러리스트로 둔갑했다. 하지만 많은 이는 1969년 사민당 정권이 출범한 이후 ‘제도권 속으로의 대장정(大長征)’을 선택했다. 학계·언론계·문화예술계·시민운동단체·법조계·정계 등으로 진출해서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말 이후 한국 운동권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통일을 거부하기 시작한 동독
 
  대연정에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한 빌리 브란트는 자기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동방정책을 서서히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소련 점령지구’라고 지칭하던 동독을 ‘다른 편 독일’이라고 호칭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키징거 총리도 양독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지지했다.
 
  하지만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은 1967년 4월 당대회에서 “독일 민족이 사회주의 독일민주공화국과 제국주의·군국주의 국가인 연방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독일 주권국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의 리더십에 의한 민족통일은 불가능하다”면서 “두 독일 국가가 통일되려면 서독이 민주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독이 공산화되지 않으면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이와 함께 동독 공산 정권은 과거의 독일과의 관계를 하나하나 끊어나가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913년 독일제국 시대에 제정된 공민법을 폐지하고, 형법을 개정한 것이다. 1968년에는 공산당을 ‘국가와 사회의 지도세력’으로 명시하는 신헌법을 채택했다. 이후 동독은 점차 통일보다는 ‘두 개의 독일’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69년 9월 연방하원 총선에서 기민당과 그 자매정당인 기독교사회당(기사당)은 46.1%를 득표했다. 사민당은 42.7%, 자민당은 5.8%를 득표했다. 자민당이 어느 정당과 손을 잡느냐가 관건이었다. 기민당의 키징거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브란트가 자민당에 손을 내밀었다. 이로써 서독이 건국된 지 20년 만에 정권이 사민당으로 넘어갔다. 브란트는 자기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동방정책’을 실천에 옮길 기회를 잡게 되었다.
 
 
  동방정책
 
‘두 빌리’의 만남.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3월 19일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오른쪽)와 만났다. 사진=독일 연방문서청
  브란트는 1970년 1월 연두교서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자결(自決·통일을 의미)에 이르는 길은 멀고 지루하다. 그렇다고 하여 두 독일 국가 간에 통제된 공존(共存)으로 가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민주공화국을 국제법상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 서로 다른 외국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브란트는 ‘독일의 분단정책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 오늘날 자유를 누리고 있는 부분의 독일(서독)에서 자유를 보존하고, 연방공화국이 자기 인식을 명확히 밝히는 것 ▲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 ▲ 인권 보장에 기여하는 것을 꼽았다. 브란트는 “동서독은 독일 민족의 유대를 유지해나갈 의무를 갖는다. 양독은 외국이 아니다” “상대방 영토와 사회구조를 힘으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6가지 원칙도 제시했다.
 
  집권과 함께 브란트는 통일문제를 담당하는 부서의 이름을 전독부(全獨部)에서 내독부(內獨部)로 개칭했다. 이것도 브란트 정권이 통일보다는 동서독 간의 대화와 교류, 협력에 더 관심이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1970년 1월 브란트의 오른팔인 에곤 바르는 모스크바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그해 3월 빌리 브란트는 동독의 에어푸르트에서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와 만났다. 브란트는 에어푸르트의 호텔 발코니에서 “빌리 브란트는 창가로 나오라!”고 외치는 동독 시민들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울음을 삼켰다. 에어푸르트 회담에서 슈토프는 동독인들의 서독 탈출로 1000억 마르크 이상의 손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브란트는 1970년 8월에는 소련과, 그해 12월에는 폴란드와 조약을 체결, 오데르-나이세 국경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유럽의 국제질서를 받아들였다. 브란트가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 게토 희생자 추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유명한 일이다.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된 후 빌리 브란트는 TV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이 조약은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것을 공식화했을 뿐”이라고 설득했다.
 
 
  동서독 기본조약
 
  1972년 5월에는 동서독 간에 최초의 ‘국가 간 조약’인 통행조약이 체결됐다. 그해 12월에는 동서독기본조약이 체결됐다. 서독은 자신들이 독일의 유일합법정부라는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독일에는 두 개의 주권국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1972년 4월에는 기민당·기사당이 자민당 이탈 의원들과 손잡고 브란트를 불신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5월 연방하원은 동방정책을 추인(追認)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은 모스크바조약과 바르샤바조약이 유럽평화와 독일의 안보라는 외교정책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유럽의 틀 안에서 민족통일을 평화적으로 회복하려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책은 이들 조약과 상충(相衝)되지 않는다” “연방공화국은 계속해서 그 안보와 자유의 기반이 되는 나토에 확실한 뿌리를 내린다”고 다짐했다.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사민당 정권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동맹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기민당이 타협을 한 것이다. 이후 독일의 대외정책은 크게 보면 이 틀 안에서 움직였다.
 
  동서독 기본조약의 의회 비준을 앞두고 기민당의 자매정당인 기사당이 집권하고 있던 바이에른주 정부는 “기본조약이 독일민족통일을 부인하면서, 독일민주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독일 영토 내의 경계를 국경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독일의 분단을 영구화했다”는 이유로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違憲)심사를 요청했다. 헌재는 1973년 7월 판결에서 “기본조약은 재통일을 추구하는 기본법 정신에 저촉(抵觸)되지 않는다”면서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1973년 9월 동서독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1975년에는 대표부를 교환했다. 동독은 양독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라는 이유로 외무부에서 서독 관련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지만, 서독에서는 ‘특수관계’라는 이유에서 내독부에서 관장했다.
 
  이렇게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빌리 브란트가 동독이 그의 주변에 침투시킨 간첩 때문에 물러나야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1974년 4월 브란트의 비서였던 귄터 기욤이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자, 브란트는 사임했다.
 
 
  슈미트, 美 중거리미사일 배치 제안
 
  일단 동방정책이라는 레일이 깔리자 이후 독일의 대(對)동독 및 동구권 정책은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빌리 브란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헬무트 슈미트는 착실한 경륜가(經綸家)였다. 그는 동방정책을 계속했고, 데탕트를 지지했다. 그는 1975년 미국과 소련을 비롯해 동서 유럽 35개국이 참여한 헬싱키의정서에 서명했다. 이 의정서의 요체(要諦)는 1945년 독일 패망 이후 형성된 유럽의 국제질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헬싱키의정서에 내재되어 있는 인권 관련 규정들은 이후 소련·동구에서 일어난 자유화운동의 도덕적 근거가 됐다.
 
  슈미트는 데탕트의 지지자였지만 맹목적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데탕트와 억지력이 안보의 양대 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전(戰) 실패의 여파로 미국이 고립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소련이 그 틈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는 나토가 확실한 군사적 억지력을 확보해 힘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역설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구 국가들에 위협이 된 것은 소련이 1974년부터 배치하기 시작한 SS-20 중거리 미사일(IRBM)이었다. 슈미트는 미국이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추진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만 감축하고 중거리미사일 문제는 외면할 경우 유럽의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했다. 슈미트는 유럽 안보를 위해서는 질적(質的)으로 향상된 미국의 핵무기를 서독 등 유럽에 배치해야 한다고 제창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미온적인 입장이었지만, 슈미트가 계속 강하게 밀어붙이자 1978년 신형 퍼싱Ⅱ미사일과 크루즈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에 슈미트는 소련이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지 않을 경우, 서방 측도 이 미사일들의 배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더블 옵션(double option)’이라고 한다. 이 정책은 훗날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상대로 군축(軍縮)협상을 할 때 아주 유용한 지렛대가 되었다.
 
 
  “서독은 서방정책의 충직한 통역”
 
  미국의 신형 핵미사일 배치 계획이 발표되자 서독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반핵(反核)평화운동이 벌어졌다. 1980년대 전반을 뜨겁게 달군 이 반핵평화운동의 뒤에는 소련의 공작이 있었다. 반핵평화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소련 SS-20의 위협은 외면하고 미국이 배치하려는 퍼싱Ⅱ미사일만 문제 삼았다. 68세대들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등장한 사민당도 이런 반핵평화운동에 동조했다. 슈미트는 1981년 한 연설에서 이들을 겨냥해 “어느 누구라도 미국은 우리의 적(敵)이요, 소련이 우리의 우방이라는 소리를 지껄이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사실 슈미트 시절 서독과 소련 관계는 매우 원만했다. 슈미트는 소련으로부터 천연가스를 도입하는 대신, 천연가스를 운송할 강관(鋼管)을 수출하는 계약을 성사시켰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슈미트 재임 중 3차례 서독을 방문했다. 함부르크에 있는 슈미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서독은 미국·일본의 뒤를 이어 세계 제3위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핵무장만 하지 않았을 뿐, 나토의 최전방을 담당하는 군사강국이기도 했다. 하지만 슈미트는 감히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재자를 맡겠다느니 운전대를 잡겠다느니 하는 큰소리를 치지는 않았다. 1981년 브레즈네프가 본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서독 정부 대변인이 “서독은 양대 초강대국들의 통역(通譯)”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슈미트는 재빨리 이를 바로잡았다. “통역은 통역인데, 서방정책의 충직한 통역”이라고….
 
  1980년에 슈미트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 정의 및 인간의 존엄성 등은 독일-미국 간의 우의와 연대(連帶)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공통의 가치요 원칙이다. 우리가 맹방(盟邦)이기 때문에 같은 이념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같은 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맹방이요, 같은 도덕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맹방인 것이다.”
 
  슈미트를 두고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슈미트가 이렇게 중심을 잡으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당초 동방정책이 표방했던 ‘접근을 통한 변화’는 묘하게 변질됐다. ‘접근’만 남고, 동독의 ‘변화’는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서독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정치적 통일에 대한 의지가 눈에 띄게 약화됐다. 사민당과 그에 동조하는 좌파 세력, 지식인, 언론인들은 통일은 구시대적 발상이며 1970~80년대에 그런 주장을 펴는 것은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정치적 통일보다 민족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문화민족(Kulturnation)’을 내세웠다. 물론 기민당의 지도자 헬무트 콜을 비롯한 보수주의·자유주의 세력들은 그런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쓸모 있는 바보’
 
  다른 한편에서는 동독에 대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레닌이 말했던 ‘쓸모 있는 바보들’이 등장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차이트》 발행인 테오 좀머는 1986년 동독에 대한 기사에서 “나라 전체가 활기에 넘치고 인민들은 행복해졌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썼다.
 
  동독도 ‘변화’, 즉 인민에 대한 탄압을 줄이고 통일을 향해 가기 위한 노력을 전면적으로 거부했다. 1974년 동독은 헌법을 개정,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이다”라던 헌법 제1조를 “독일민주공화국은 노동자・농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로 고쳤다. 헌법상의 통일 규정을 삭제한 것이다. 1980년 10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본(서독)이 아직도 하나의 독일 민족을 고집하고 있으나, 마땅히 동독의 주권과 공민권을 승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런데도 사민당은 68세대를 중심으로 점점 더 좌경화되어갔다. 1982년 헬무트 콜 정권이 이끄는 기민당 정권이 들어선 후 에곤 바르 등 사민당 지도부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과 독자적으로 만나서 양독 관계에 대한 정책 합의를 하는 지경까지 나아갔다. 이처럼 ‘변화’는 제쳐놓고 ‘대화를 위한 대화’만 고집하는 사민당을 두고 ‘아첨을 통한 변화’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 1978년 서독으로 망명한 동독 지식인 볼프강 자이퍼트는 이렇게 비판했다.
 
  “동독 체제하에서 살고 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서독의 정치 엘리트들이 동독 지도자들을 상대하면서 보여준 경솔, 단견, 안정감과 자신감의 부족 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 당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 갈등의 난삽(難澁)하고 복잡한 성격과 ‘상대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만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길’이라는 전제 아래 동독의 최고위급 인사들을 어떻게든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하는 필요성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정치적으로 어물쩍하고 넘어가려다 보니 정말 법적인 평등, 말하자면 공산체제가 독재정부라는 사실이나 그 국민들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는 현실 등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내재적 접근법
 
  서독인들의 동독에 대한 시각이 이처럼 왜곡된 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었다. 페터 크리스찬 루츠라는 동독 전문가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동독을 이해하는 첩경(捷徑)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에 서서 보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는 “동독 같은 공산주의 국가를 외부의 기준, 즉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으로 분석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고, 정확할 수도 없으며, 부적합하다”면서 동독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보는 관점에 반대했다. 루츠의 제자들이 연구소를 비롯해 서독 내 관련 기관들에서 점차 다수를 차지하면서 동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사라졌다. 브란트 정권도 1971년부터 루츠의 내재적 접근법에 기초해 독일문제에 대한 연감(年鑑)을 내놓기 시작했다.
 
  데니스 L. 바크와 데이비드 R. 그로스는 《도이치현대사》에서 “서독과 서방세계에서 동독에 대한 전문적 분석의 초점과 비중을 이렇게 전환시킨 결과는,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이 슈타지로 구현되는 이 체제의 실체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게 된 것이었다. 동독의 실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서독의 인식이 변화한 탓으로, 동독은 더 이상 정치사찰(政治査察) 국가가 아닌 루츠의 말대로 ‘잘 돌아가는 구조’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하르무트 예켈은 “마을 지도를 그리면서 어디가 농가이고 어디가 골짜기인지는 그런대로 표시했는지 몰라도, 마을 전체가 물속에 잠겨 있다는 말은 빠뜨린 격”이라고 야유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같다고? 맞다. 루츠의 주장이 바로 송두율에 의해 국내에도 널리 전파(傳播)되어 소위 대북전문가들을 사로잡은 ‘내재적 접근법(內在的 接近法)’이다.
 
  이제 다시 한 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헬무트 콜이었다. 1982년 10월,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이 기민당·기사당과 손을 잡고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콜, 서독 방문한 호네커 앞에서 장벽 비판
 
1987년 9월 콜 총리는 서독을 방문한 호네커에게 베를린장벽으로 인한 독일인들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사진=독일 연방문서청
  기민당 총재로 총리 자리에 오른 헬무트 콜의 별명은 ‘아데나워의 손자’였다. 1970년대 초 기민당의 중진(重鎭)정치인으로 대두할 무렵의 콜은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독일의 통일을 역설했다. 그로미코는 “당신처럼 젊은 사람이 아직도 그런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니…”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1983년 6월 콜은 연방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했다. 연설의 제목은 〈분단 독일의 국정연설〉이었다. 원래 독일에서는 아데나워 시절 이래 총리의 의회 국정연설을 공식적으로 그렇게 칭했는데, 브란트 정권 때 폐지된 것을 콜이 부활시킨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연설의 본래 목적을 다시 한 번 되살리려 합니다. 그것은 독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결권과 인권과 우리 분단 민족의 통일에 관한 것입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 콜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동포들이 자결권을 부인당하고 그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 독일 국민들은 조국의 분단 상황을 수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헌법 정신에 따라 자유의사에 따른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굳은 결의와 인내력을 갖고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우리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단념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상황이 바뀌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콜은 1987년에는 “자유를 팔아서 통일을 사는 게 아니라, 자유는 통일의 전제조건”이라면서 “민족의 통일은 국민의 자유 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989년 5월 조지 H.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후에는 “독일 분단 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과제”라면서 ▲ 독일의 운명은 전반적인 동서 관계와 연관되어 있고 ▲ 자유가 통일보다 우선이며 ▲ 자유롭고 통합된 유럽에서만 자유로운 통일독일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87년 9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겸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대통령) 에리히 호네커가 본을 방문했다. 콜은 호네커 면전에서 “독일인들은 분단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의 길을 막고 밀쳐버리는 장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반면에 빌리 브란트는 1988년 9월 기본법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 아니라는 취지의 연설을 해서 정치적 통일의 필요성을 부인했다. 《디 차이트》지 발행인 테오 좀머도 “독일인의 통일? 우리는 하나의 독일 국가가 아니라, ‘자유 유럽’이라는 큰 지붕 아래 ‘두 개의 자유로운 독일 국가’라는 전혀 다른 구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 같다”
 
  콜의 연설처럼 역사는 통일을 원하는 이들의 편이었고, 상황은 바뀌었다. 1985년 소련에서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됐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신사고(新思考)·혁신]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헝가리를 필두로 한 동구권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태동했다. 헝가리는 1989년 5월 2일 오스트리아의 국경선에 쳐진 철조망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동구, 더 나아가 소련 붕괴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콜은 그 의미를 감지했다. 그는 1989년 6월 신문 인터뷰에서 “역사는 우리 편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콜은 고르바초프에게 영합해서 뭔가를 얻어내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무렵 서독을 방문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콜은 “독일연방공화국은 서방세계의 가치관을 존중한다. 우리는 어떠한 감언이설(甘言利說)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나토와 EU는 독일 정책의 양대 축(軸)이다”라고 못을 박았다.
 
  1989년 8월 이후 여름 휴가차 헝가리를 방문했던 동독인들이 국경 철조망이 해체된 것을 기화로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독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동적으로 서독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는 1950년대에 서독이 독일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던 아데나워 정권이 1913년부터 시행되어온 독일 공민법을 그대로 유지해온 덕분이었다. 오늘날 탈북자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즉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1989년 8월 이후 사태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헝가리에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서독대사관으로도 동독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9월 28일 동서독 외무장관은 이들의 서독행에 합의했다. 이들은 봉쇄된 열차를 타고 동독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갔다. 서독 DAP통신은 1989년 10월 5일, 9월 11일 이후 2만7000명이 동독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나흘 후 그 수는 3만5000명으로 늘어났다. 1989년 1월 이후 9개월 동안 동독을 합법적·비합법적으로 떠난 주민들의 수는 11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베를린장벽 붕괴
 
  1989년 10월 4일 동독 정권은 독일민주공화국 건국 40주년을 축하하는 거창한 행사를 벌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는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나타났다. 공산 정권이 말끝마다 ‘인민’을 외치는데, 그들이 말하는 인민은 사이비(似而非)고 ‘진짜 인민’은 자기들이라는 외침이었다. 동독 창건 기념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는 “상황 변화에 굼뜬 자 앞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10월 9일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는 7만명이 모여 개혁을 요구했다. 10월 18일에는 18년간 동독을 통치해온 에리히 호네커가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직에서 물러났다. 에곤 크렌츠가 그 뒤를 이었다. 크렌츠는 11월 3일 방송 연설을 통해 이런저런 개혁을 약속하면서 떠나가는 민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튿날인 11월 4일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에서 열린 시위에서 동독인들은 그의 프러포즈를 거절했다. “자유! 자유!”라는 외침과 함께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한 민족이다)’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동독의 민주개혁을 넘어서 통일을 요구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서독으로의 탈주도 계속됐다. 11월 5일에는 1만5000명 이상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떠났다. 11월 7일에는 빌리 슈토프가 동독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고, 개혁파인 한스 모드로가 총리가 됐다.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였다. 11월 9일 저녁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귄터 샤보우스키는 기자회견에서 동독인들의 출국 자유화를 선언했다. 장차 그렇게 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데 불과했지만, 휴가 끝에 출근해 얼떨결에 기자회견에 나서는 바람에 전후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샤보우스키는 ‘그 조치가 언제부터 시행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즉각!”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동베를린 시민들도, 서베를린 시민들도 베를린장벽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해머로 장벽을 부수는가 하면, 장벽 위에 올라가 환호했다.
 
 
  콜의 〈10개조 프로그램〉
 
  이 장면을 보면서 전 세계가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현실 정치인들은 달랐다. 특히 독일과 불편한 과거가 있는 소련·폴란드 등 동구 국가들은 물론이고 함께 유럽통합을 추구하던 영국·프랑스 등 서구 우방들도 정작 독일 통일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콜 총리의 외교안보보좌관인 호르스트 텔칙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직후인 1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12개국 정상회담에서 열강의 정상들이 보여준 태도에 대해 “미국이 가장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프랑스가 조금 삼가는 태도를 보였으며, 영국은 삼가는 태도가 심했다”고 회상했다.
 
  열강 가운데 처음부터 독일 통일을 확고하게 지지한 것은 미국뿐이었다. 버논 월터스 주독 미국대사는 11월 16일 텔칙과 만난 자리에서 “독일이 통일될 것으로 믿는다. 그 사람이 누구든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라면서 이러한 판단을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텔칙은 후에 “나는 그 순간 미국 대통령이 우리 앞에 놓인 문제에 관한 올바른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통일과 같은 격변기에 주재국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있는 외교관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독일과 미국은 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정상 차원에서는 물론 정상의 외교안보 참모, 각료, 주재국 대사 모두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마치 한 팀처럼 움직였다고 텔칙은 회고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통일의 가능성에 대해 환호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동독 내 개혁 세력은 물론 서독 내 좌파 정치인·지식인·언론인 중에서는 통일보다는 민주적으로 개혁된 사회주의 동독의 공존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을 한시바삐 정리하기 위해서 콜은 향후 독일 정책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했다. 그것이 콜이 11월 28일 연방하원에서 제시한 〈10개조 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은 콜의 외교안보보좌관 호르스트 텔칙이 기초하고, 콜 자신이 대폭 수정한 것이었다. 콜은 여기서 얼마 전 한스 모드로 동독 총리가 제안한 ‘조약공동체’라는 개념을 일부 수용하면서, ‘민주적·합법적 동독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전제로 해서 과도단계로 국가연합(confederation)을 지지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면서, 궁극적으로 연방국가(federation), 즉 단일 주권 아래 재통일된 국가를 이룩하는 것이 그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콜은 “통일의 과정이 유럽의 관심사이며, 유럽통합과의 관련 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약공동체-국가연합-연방’이라는 3단계를 제안한 것으로 봐서 이때만 해도 콜은 통일이 그렇게까지 급박하게 진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美, 제일 먼저 독일 통일 지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콜이 전날 자신과 통화를 하면서도 〈10개조 프로그램〉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데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이후로도 한동안 “독일 통일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교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 점에서 대처는 전형적인 영국인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바꾸어놓은 것은 미국이었다. 12월 4일 부시 미국 대통령은 나토정상회의에서 “나토는 40년 이상 독일 통일을 공동으로 지지해왔다”고 상기시키면서 독일 통일은 나토 및 유럽공동체의 관계에서, 연합국(미·소·영·프랑스)의 권리와 책임을 적절한 방법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이렇게 독일 통일에 앞장선 것은 아데나워 정권 이래 40년에 걸쳐 양국 간에 신뢰가 구축되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특히 1970~80년대 슈미트의 사민당 정권조차 중거리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앞장서 주장했던 것은 서독이 정권에 관계없이 미국의 견고한 우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12월 12일 콜 총리를 방문한 제임스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이 “이와 같이 어려운 시기에 미국의 입증된 친구인 콜 총리와 같은 인물이 독일 정치의 정상에 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고 말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 부시 미국 대통령이 독일의 ‘기여’를 요구했을 때 콜은 미국이 요구한 것 이상을 화끈하게 내놓아 보은(報恩)했다.
 
  미국이 이렇게 선도적으로 확고하게 독일 통일을 지지한다는 뜻을 표명하자 프랑스와 영국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콜과 겐셔 외무장관도 영국과 프랑스에 이번의 독일 통일은 과거처럼 오만불손한 정치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즉 동서독 양국 국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의 결과임을 간곡하게 설득했다. 콜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이 ‘독일의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독일’이라고 강조했다.
 
 
  소련의 반대에도 나토 잔류 관철
 
  독일 통일에 대한 가장 큰 비토 세력은 소련이었다. 과거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아 20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바 있는 소련에 동독은 ‘전략적 발코니’였다. 소련은 동독 땅에 30여만명의 병력을 주둔시켜놓고 있었다.
 
  1989년 가을 동독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지자 서독이나 서방은 과거 1956년 헝가리사태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떠올리며 긴장했다. 일찍부터 동구권 내정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천명해온 고르바초프는 호네커 정권의 붕괴를 방임했지만,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 통일 문제가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부정적 반응을 드러냈다.
 
  소련의 첫 반응은 기존 조약들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헬싱키의정서에서 규정하고 있는 유럽의 현 상태, 즉 주권국가 동독의 존재, 독일(동독)과 폴란드 간의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차지한 옛 독일 영토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라는 얘기였다.
 
  1990년 2월 10일 콜과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에 대해 하등의 이의가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같은 달 21일 《프라우다》와의 인터뷰에서는 “독일의 통일이 두 동맹 체제(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군사전략적인 균형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통일독일이 나토에서 탈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이는 1952년 스탈린이 했던 제안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콜은 “통일을 위해 나토 회원국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콜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러한 입장을 소련에 전하면서 “중립화된 통일독일보다는 차라리 나토와 유럽공동체의 틀 안에 구속되어 있는 통일독일이 소련의 안보이익에 더 부합한다”고 설득했다. 그러자 소련은 통일독일이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둘 다 가입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내놓았다. 마지못해 통일독일의 나토 가입을 받아들이기로 한 다음에도 자기들이 동독에서 철수한 후 옛 동독 땅에는 나토군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상 통일독일의 주권이 여전히 전승 4대국에 의해 제약받는다는 의미였다.
 
  콜은 인내심을 가지고 고르바초프를 설득해나갔다. 당시 소련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것이 독일에는 행운이었다. 콜은 소련에 대한 차관(借款)을 협상하면서 그것이 통일이라는 반대급부와 결부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소련과의 숙제들은 1990년 7월 14~16일 열린 독소정상회담에서 해결됐다. 고르바초프의 고향인 코카서스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일련의 회담 끝에 고르바초프는 독일이 통일과 더불어 완전한 주권을 획득한다는 것과 독일이 계속 나토에 남는다는 데 동의했다. 독일은 병력을 37만명으로 감축하기로 했다. 이러한 양보에 대한 대가로 독일은 그해 9월 이후 동독에서 철수하는 소련군의 주택 건설 비용 등의 명목으로 150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동독의 민주선거
 
1989년 12월 19일 동독 드레스덴을 방문한 콜 총리는 환호하는 동독인들을 보면서 통일을 직감했다. 사진=AP/뉴시스
  소련에 대해서는 부드럽게 나간 것과는 달리 콜은 동독 공산 정권에 대해서는 야멸차다 싶을 정도로 강경하게 나갔다. 1989년 10월 호네커가 실각한 직후부터 에곤 크렌츠 신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서기장은 동서독 정상회담을 애원했다. 경제가 완전히 거덜 나고 동독인들이 계속 서독으로 이탈하는 상황에서 서독의 정치적·경제적 지원이 갈급했던 것이다. 사민당 등도 이에 응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콜은 동독에 합법적·민주적 정권을 상대하겠다고 고집했다.
 
  콜은 ‘호네커의 황태자’로 불리던 에곤 크렌츠가 서기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개혁파인 한스 모드로가 동독 총리가 된 1989년 12월 19일에서야 비로소 동독 드레스덴에서 양독 총리 회담을 가졌다. 콜은 공항에서 수천명의 동독인이 독일 국기를 흔들면서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보면서 “이 정권은 끝장났구나. 통일은 온다!”고 직감했다. 모드로와의 회담을 마친 후 드레스덴 프라우엔성당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콜은 “독일! 독일!” “헬무트! 헬무트!”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고 외치는 시민들에게 목멘 목소리로 “역사가 허용한다면 우리 민족을 통일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1990년 1월 28일 모드로 총리와 동독 내 민주개혁파 인사들은 ‘원탁회의’를 열고 거국(擧國)내각을 구성하기로 했다. 같은 날 동독 인민회의(국회)는 당초 5월 6일로 계획했던 선거일자를 3월 18일로 앞당기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공산 정권의 괴뢰 노릇을 하던 기독교민주당, 자유민주당 등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당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다. 공산 정권하에서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에 강제 통합되었던 사회민주당도 부활했다. 이들은 각각 서독에 있는 같은 이름의 형제 정당과 손을 잡고 선거전에 들어갔다. 콜도 동독 전역을 누비면서 동독 기민당의 유세를 도왔다.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처음 시작할 때 방문했던 동독 에어푸르트의 시민들은 ‘헬무트, 당신은 우리의 총리이기도 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콜을 맞이했다. 독일민주공화국을 자처하던 나라에서 건국 40년이 지나서 그 종막을 앞두고서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주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화폐통합
 
  2월 13일 모드로 동독 총리는 27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본을 방문, 150억 마르크의 원조를 요청했다. 콜은 이를 냉랭하게 거절했다. 이보다 앞서 2월 7일 콜은 화폐통합 제안을 내놓았다. 한마디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동독 마르크를 세계시장에서 경화(硬貨)로 당당하게 대접받는 서독 마르크(DM)로 바꾸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콜이 전하는 메시지는 자신은 동독 공산 정권이 아니라 동독 인민들을 상대하겠다는 것이었다.
 
  화폐통합은 뒷날 통일 후 독일 경제를 추락시킨 잘못된 조치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에도 계속 서독으로 밀려드는 동독인들 때문에 서독의 수용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면 우리는 집에 머문다. 마르크화가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간다”고 외쳐대는 동독인들을 콜은 화폐통합으로 달래려 했던 것이다.
 
  화폐통합이라는 당근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동독 선거에서 사민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기민당이 중심이 된 ‘독일을 위한 동맹’이 압승한 것이다. 로타어 데 메지에르가 동독 총리가 됐다. 콜이 줄기차게 요구해오던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정권이 동독에 들어선 후 통일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5월 18일 동서독 재무장관이 콜과 데 메지에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통화·경제·사회통합협정에 서명했다. 콜은 데 메지에르에게 “‘독일 통일의 실제적 실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 조약은 그해 7월 1일부터 발효됐다. 콜은 이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민족은 그 도덕적 힘을 이미 상실한 것”이라면서 독일 국민들에게 통일을 위한 희생을 감수해달라고 호소했다.
 
  1990년 8월 23일 동독 인민회의는 서독 기본법 제23조에 따라 동독의 5개 주가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기로 결의했다. 8월 31일에는 ‘통일조약’이 동베를린에서 체결됐다. 9월 1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2+4 외무장관회의가 열렸다. 동서독 외무장관과 4대 전승국(미·소·영·프랑스) 외무장관은 〈독일에 관한 최종적인 규정에 관한 협약〉에 서명했다. 이 협약은 10월 3일 독일 통일과 함께 베를린과 독일에 대한 전승국들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모두 종결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통일
 
  1990년 10월 2일 밤, 몇 시간 후면 통일독일의 첫 총리가 되는 콜은 TV 방송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콜은 40년간 부당한 동독 정부하의 희생자들을 추도하면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용기 있는 동독 국민들에게 감사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어려운 시절 독일의 편이 되어주었던 프랑스와 영국, 소련의 고르바초프, 그리고 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그 밖의 유럽 국가에 대해서도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날 밤 콜 총리는 리하르트 바이츠체커 대통령, 겐셔 외무장관 겸 자민당 총재, 빌리 브란트 전 총리, 오스카 라퐁텐 사민당 총재, 데 메지에르 동독 총리 등과 함께 베를린의 옛 제국의사당 앞 계단으로 나갔다. 10월 3일 자정이 되자 불꽃이 터지고, 제국의사당 국기게양대에 흑·적·황 3색의 독일 국기가 게양됐다. ‘통일과 자유와 권리’라는 가사가 담긴 국가(國歌)가 울려 퍼졌다. 독일은 통일됐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콜은 국내외로부터 통일을 너무 서두른다는 비난을 받곤 했다. 그때마다 콜은 천둥번개가 치기 전에 곡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곳간에 들여놓으려는 농부의 심정에 자신을 비유했다. 독일의 언론인 귀도 크놉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통일 과정이 너무 성급했으며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는 비난이 자주 쏟아지곤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는 옳지만 정치적으로는 잘못되었다. 우리는 단지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조용한 섬이 아니라 유럽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 통일의 문은 겨우 조그만 틈새만 열려 있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만, 1990년 11월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물러났을 때 독일 통일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고, 1991년 고르바초프의 실각(失脚) 이후에는 더욱더 어려웠을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역사의 외투는 단지 잠시 동안만 나부꼈다. 따라서 통일로 이르는 왕도(王道)는 귀를 쫑긋하고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잘 마무리하려는 사람에게만 보였다. 천둥번개가 칠 때 농부가 채찍으로 말을 몰아서 12시 5분 전에 마차 한 대분의 곡식이라도 더 헛간에 운반하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후 나머지 곡식을 어떻게 저장하고 어떤 방아를 찧고 찧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바꿀 수 없는 최종 결론”
 
  독일의 통일은 1945년 패전 이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미국 등 서방세계와의 동맹을 통해 독일의 재건을 모색했던 아데나워 노선의 승리였다. 독일은 결국 아데나워가 예언했던 방향으로 통일됐다. 독일 통일과 관련해서 흔히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빌리 브란트를 많이 얘기하지만, 독일연방공화국의 대계(大計)를 세운 아데나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통일을 이룩한 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인 아데나워는 50년대에 엄청난 저항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에 대한 서방세계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또 동서독 문제와 관련, 법적·정치적으로 그 해결을 유보한 채 인내와 긴 호흡으로 동서 간 갈등을 극복하는 작업에 정책 목표를 두었다. 1989~1990년에 일어난 사건들은 아데나워의 견해가 옳았다는 것을 인상 깊게 확인시켜주었다.”
 
  통일이 되기 5년 전인 1985년 리하르트 바이츠체커 대통령이 했던 연설도 의미심장하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서방세계의 동쪽 끝이 되었고, 독일민주공화국은 동방세계의 서쪽 끝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독일의 분단은 유럽의 분단이 종결되지 않는 한 끝이 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 우리는 서구 민주주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우리 공동체를 묶는 것은 내면적 가치 체계와 법치주의에 대한 공통된 신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바꿀 수 없는 최종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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