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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 현장 체험기 ②

욕설과 거짓 난무… 고소·고발은 없어

글 : 윤정호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  jh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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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은 대통령 후보 선출 자격이 있는 대의원을 선정하는 데 6개월이 걸린다. 이 과정에서 권모술수와 흑색선전이 난무한다. 그림=이병익
  17명이라는 사상 최다 후보가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던 2016년 대선이 서서히 정리가 돼가고 있다. 공화당에서는 4명의 후보만 남았다. 민주당은 애초에 워낙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기세가 등등해 후보가 많지 않았다. 프라이머리(예비경선)를 시작하고는 마틴 오말리 전 메릴랜드 주지사마저 경선을 포기하면서 버니 샌더스(버몬트) 연방상원 의원과의 맞대결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50개 주와 자치령에서까지 치러지는 각 당 후보 경선은 ‘슈퍼 화요일(3월 1일)’ ‘슈퍼 토요일(3월 5일)’ ‘미니 슈퍼 화요일(3월 15일)’같이 ‘슈퍼’라는 수식어가 붙은 특정한 날이 최대의 관심이다. 여러 개 주가 동시에 경선을 치르면서 수백명의 대의원이 한꺼번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론조사는 상당히 정확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이번 각 지역 경선 결과를 보면, 여론조사 기관이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다. 이변이 속출하고, ‘슈퍼 화요일’이 지나면 대체로 결론이 날 것 같던 경선이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다 장기레이스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복잡한 선거시스템, 미국 보통 유권자들의 각성, 공화당 지도부의 노골적인 개입 등 여러 변수가 합쳐져서다. 널뛰기하듯 나오는 주별 경선 결과에 미국 언론도 자신 있게 힐러리 대 트럼프의 대결로 못박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재벌인 도널드 트럼프는 다수 득표를 하더라도 대의원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전당대회 때 뒤집힐 수 있는 변수까지 남아 있다.
 
 
  대세는 힐러리와 트럼프가 잡았지만…
 
  공화당은 지금까지 24번의 경선에서 트럼프가 15곳, 테드 크루즈(텍사스) 연방상원 의원이 7곳, 마코 루비오(플로리다) 연방상원 의원이 2곳에서 이겼다. 트럼프가 어찌 보면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는 셈이다. 그 뒤를 크루즈가 정말 예상을 깨고 꾸준히 따라붙고 있다. 당 지도부와 주류가 희망을 걸었던 루비오는 영 힘을 쓰지 못한 채 자신의 지역구 플로리다(3월 15일 경선)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려고 한다. 이 경선 결과에 따라 루비오의 운명은 좌우된다. 공화당은 과반수의 대의원을 차지해야만 전당대회 때 자동으로 후보로 지명되는데, 후보 네 명이 표를 갈라 가지면서 트럼프의 과반 득표가 쉽지는 않을 수 있다. 현재까지 트럼프는 459명의 대의원을, 크루즈는 360명, 루비오 152명,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가 54명을 확보했다. 애초 여론조사 결과대로라면 트럼프가 대의원을 휩쓸었어야 하는데, 크루즈가 100명 차도 안 되게 따라붙어 경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게 했다. 과반수는 1237명으로, 갈 길이 아직은 멀다.
 
  민주당은 22곳의 경선에서 힐러리가 13승을 해 9승을 한 샌더스를 앞섰다. 예상 밖의 샌더스 선전이다. 무소속으로 호랑이 굴에 뛰어들어 이 정도 성적을 낸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다. 게다가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부르면서 척박한 미국의 이념적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듯도 하다. 대의원 확보 수는 힐러리가 762명, 샌더스가 549명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슈퍼 대의원’이라는 제도 때문에 샌더스가 대의원 확보 측면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슈퍼 대의원’은 상·하원 의원, 각 지역의 당 지도부 등이 포함되는데, 힐러리는 지금까지 461명을 확보했고, 샌더스는 고작 25명에 불과하다. 경선에서는 샌더스가 상당히 선전했지만, 전체 대의원 수를 계산해 보면, 힐러리가 1223명, 샌더스는 574명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일부 유권자들은 민의를 거스르는 제도적 미비가 특정 후보를 유리하게 한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한다.
 
 
  갈라지는 ‘아메리카’, 인종별 몰아주기 투표 성향
 
3월 1일 열린 ‘슈퍼 화요일’에서 힐러리는 12개 주 중 8개 주에서 승리했다.
  이번 미국 대선은 인종별로 투표 성향이 확연하게 갈리고 있다. 특히 민주당 경선 결과를 미국 지도에 대입하면 당내 지지성향도 한눈에 들어온다. 힐러리는 백인이 많은 중부 이상 지역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첫 경선이 치러졌던 아이오와와 매사추세츠 등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샌더스와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 반면 미시시피, 앨라배마, 아칸소, 조지아,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텍사스 등 이른바 ‘딥 사우스(Deep south)’로 불리는 남부 지역에서는 훨훨 날았다. 이 지역의 공통점은 흑인 유권자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힐러리는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맞붙었을 때는 흑인들의 표심을 잡지 못해 ‘대세론’을 살리지 못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오바마 지지 흑인들이 대거 힐러리 쪽으로 돌아섰다. 샌더스는 흑인 비중이 1%밖에 되지 않는 버몬트에서 자신의 정치 경력 대부분을 보냈지만, 힐러리는 12년 동안 남부 지역인 아칸소에서 주지사 부인으로 살았고, 퍼스트레이디 때도 흑인 인권 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지난번 경선 때는 흑인인 오바마가 후보로 나섰기 때문에 핏줄을 따라 흑인들의 표가 그쪽으로 흘렀지만,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는 샌더스보다 힐러리로 기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남부 지역에서는 80%가 넘는 지지율로 샌더스를 압도했다. 반면 샌더스는 뉴햄프셔, 콜로라도, 미네소타, 오클라호마, 네브래스카, 캔자스, 메인, 미시간, 버몬트 등에서 강세를 보였는데, 대의원 수가 많은 플로리다나 캘리포니아 같은 경우는 흑인도 많지만, 히스패닉 유권자 비중도 높아 샌더스에게는 큰 벽이 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분노하는 백인’에 주목했다. 자유무역을 하면서 자신의 일자리가 날아갔다고 여기는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이번 경선에서 분노의 한 표를 던지면서 판세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와 샌더스가 미시간에서 승리한 이유가 바로 백인의 분노라고 해석했다. 트럼프는 워낙 외국에 대한 적대감을 일찌감치 드러냈고, 한국에 대해서도 방위비 분담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주장하면서 미국인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백인 남성들에게는 제대로 먹혀 미시간주 경선에서 트럼프는 남성 유권자 43%의 지지를 얻었다. 트럼프보다 백인 노동자의 덕을 본 후보가 샌더스다. 여론조사만 보면 샌더스는 힐러리에게 미시간에서 지는 걸로 나왔다. 그러나 TV토론과 유세 과정에서 샌더스는 계속해서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유일한 후보가 바로 나”라고 강조했다. 미시간 지역 경제가 자유무역협정 통과로 어려워졌다는 인식을 갖는 유권자들을 겨냥한 캠페인이었다.
 
  디트로이트 등 공업도시가 많은 미시간에서는 샌더스의 주장이 먹혔다. 부동층이던 이들이 샌더스에게 무더기 표를 던지면서 힐러리 캠프가 비상이 걸렸다. 힐러리는 자유무역협정을 상원의원 때도 찬성했고, 국무장관을 하면서 미국과 일본 등 12개국이 참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주도한 경력이 있어서다. 한때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쇠락한 북·중서부 제조업 지대를 일컫는 ‘러스트 벨트(Rust Belt)’가 샌더스에 가세하면 의외의 고전을 할 수도 있다. 샌더스는 오하이오와 일리노이, 4월 5일 위스콘신 등 ‘러스트 벨트’에 희망을 걸고 있다. 미시간에서 17%포인트나 뒤지던 여론조사를 역전승(2%포인트 승리)으로 만들어낸 저력을 발휘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경제는 인종도 초월했다. 백인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흑인 유권자의 30% 가까이도 출구조사 분석결과 샌더스에 동조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CNN과 AP통신 등은 “샌더스가 ‘TPP는 미국인 노동자에게는 재앙이었다’고 선전하면서 좋은 결과를 미시간에서 얻었고, 중서부 공업지대인 오하이오, 일리노이에서도 더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히스패닉 표심이 승부 가를 수도
 
  히스패닉의 표심도 이번 경선에서는 큰 변수가 된다. 인구학적으로 계속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미국 인구의 16% 가까이 차지한다. 이들 상당수는 민주당 지지 성향으로, 힐러리와 샌더스 모두 이들을 잡지 못하면 대권을 기약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지난 3월 9일 플로리다에서 열렸던 TV토론에서는 이민 정책이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플로리다는 대의원이 214명이나 되고, 히스패닉 인구 비중이 20%를 넘는다. 두 후보 모두 상대 후보가 과거 이민개혁에 반대했던 전력을 끄집어내면서 토론을 뜨겁게 달궜다.
 
  민주당 내부 경선보다 더 흥미로운 게 히스패닉계의 시민권 따기 운동과 반(反) 트럼프 결집이다. 히스패닉계는 인구는 많지만, 투표율이 높지 않은 게 민주당으로서는 고민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민자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이들의 조직화를 자극했다. 《뉴욕타임스》는 합법적인 이민자로 미국에 거주해 온 이민자들이 트럼프를 응징하는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시민권 따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5 회계연도(2014년 10월 1일~2015년 9월 30일) 시민권 신청 건수가 전 회계연도보다 11% 늘었고,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를 범죄자나 성폭행범으로 취급하는 발언을 하던 때에는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4%가 증가했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 합법적 이민자는 880만명 정도인데, 그중 270만명이 멕시코 출신이다. 지금까지는 정치에 관심을 끊고 살던 이들이 트럼프만큼은 안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차원에서는 대규모의 자금을 써가면서 ‘히스패닉계 투표장 가기’ 운동도 시작했다. 과거 ‘부시 낙선운동’을 주도했던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 주도로 1500만 달러의 자금을 모았다. 단일 투표 독려 캠페인으로는 최대 규모라는데, 이 돈 대부분은 히스패닉·아시안 주민 비율이 높은 콜로라도와 플로리다, 네바다 등 3개 주에 쓸 계획이다. 민주당의 계획은 40만명의 새로운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공화당도 싫어하는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트럼프는 ‘분노하는 백인’의 지지를 받고 있다. 살기 팍팍한 중하층 白人들은 트럼프의 거침없는 돌직구에 환호하고 있다.
  연방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거대한 ‘코끼리(공화당의 상징)’가 ‘막말쟁이’ ‘허풍쟁이’ 트럼프 하나 당하지 못해 쩔쩔매는 게 이번 경선 최대의 희극이다. 오바마 대통령까지 남의 당 일에 한마디 걸쳤다. 그는 공화당 경선을 “서커스”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서커스를 보고 있다. 그런 일이 가능하게 한 공화당의 정치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그렇다고 오바마의 말에 무조건 반발만 하기도 어려운 게 공화당의 현실이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바마 정책에 반대만 하는 모습을 보이며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게 원인이었다. 지금 와서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보니, 공화당 주류 측은 본격적인 반(反) 트럼프 공세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지난해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의 대세론에 밀려 대선 출마를 일찌감치 포기했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총대를 멨다. 그동안 침묵했던 그는 “트럼프는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공화당원이 아니다. 다른 좋은 선택을 해달라”고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당 지도부와 공감대를 갖고 나선 건데, 노골적인 경선 개입이었다. 무한대의 자금으로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하는 ‘슈퍼팩’의 트럼프 반대 광고도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성장행동 클럽(Club for Growth Action)’이 일리노이에서 200만 달러를 들여 ‘트럼프 비토’ 광고를 시작했고, 플로리다, 미주리 등에서도 트럼프 때리기에 나섰다.
 
  공화당의 외교·안보 전문가 수십명도 공동성명을 내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외국과의 관계가 어그러진다고 주장하면서 트럼프 내치기에 열중했다.
 
 
  점점 탁해지는 경선… 욕설과 거짓은 기본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도로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는 홍보 문구를 들고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진=김은정 조선일보 기자
  한국 정치와 미국 정치의 가장 큰 차이가 ‘비방광고’다. 미국에서는 대놓고 상대 후보를 비난하는 광고를 무차별적으로 할 수 있다. 최근 쏟아지는 TV광고를 보면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표결에 불참했다’ ‘낙태에 찬성했다’ ‘아이오와 사람을 멍청하다고 했다’ ‘성경을 모독했다’ 등등 선진국답지 않은 모습이 많다. 후원금을 가장 많이 모았던 젭 부시는 자신을 알리고 상대를 비난하는 광고비에만 8400만 달러(약 1000억원)를 썼지만, 경선을 포기했다. ‘돈 질’로 승부가 나는 시대가 지나버렸다.
 
  권모술수, 흑색선전 등도 난무한다. 특히 크루즈가 이런 방면에서는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첫 아이오와 경선 때 신경외과 의사 출신 흑인 후보인 벤 카슨이 경선을 포기했다는 이메일을 돌려 논란이 되더니, 루비오가 ‘성경에 모든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거짓 광고를 내보냈다. 루비오의 인터뷰를 다 들어보면 ‘모든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인데, 앞뒤를 잘라 편집해 내보냈다. 크루즈는 논란이 되자 대변인을 경질하는 선에서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크루즈는 루비오에 대해서도 플로리다 경선을 포기할 것이라는 루머를 내보낸 진원지로 지목당했다. 이런 경력 때문인지 카슨은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일각에서는 부통령 후보 자리를 제안받은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트럼프에 대한 선호보다는 크루즈에 대한 반발이 그를 트럼프 쪽으로 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도 제법 만든다. 크루즈가 루비오를 겨냥해 내보낸 광고에는 과거 〈성적인 욕망〉 〈채울 수 없는 욕망〉 〈금지된 죄악〉 등의 에로영화에 출연한 에이미 린지라는 여성이 등장해 논란이 됐다. 크루즈 캠프는 즉각 광고를 내렸는데, 이에 반발한 린지는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루비오는 ‘미국에 다시 아침을’이라는 제목의 광고를 내보내면서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보여줬는데, 이 도시가 캐나다 밴쿠버여서 망신을 당했다. 루비오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84년 선거 때 사용해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던 ‘미국에 새 아침을’이란 광고를 흉내 냈는데, 본전도 못 챙겼다. 젭 부시 지지단체는 영국의 주식시장 화면을 잘못 사용했고, 이민자 반대 정책을 내세운 트럼프는 미국의 국경 대신 모로코 난민 모습을 내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미국 정치에서는 웬만해선 ‘거짓말쟁이(Liar)’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금기어 중 하나다. 그런데 이번 경선을 보면 아주 쉽게, 자주 이런 용어들이 쏟아졌다. 트럼프는 크루즈를 “불안정한 사람이고,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큰 거짓말쟁이”라고 했고, “정신질환자”라는 표현까지 썼다. 루비오의 키가 자신보다 작은 것을 비꼬듯 ‘꼬마 마코(Little Marco)’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젭 부시는 트럼프를 ‘조작의 달인’이라고 부르며 몰아붙였다. 그러나 트럼프와 맞붙은 후보 중에 크게 성과를 얻은 측은 별로 없다. 루비오는 트럼프 방식으로 트럼프를 비난하다 최근 “트럼프를 인신공격한 것은 잘못이었다”며 꼬리를 내렸다. 루비오는 유세에서 트럼프를 겨냥해 “손 작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했었고, 이에 트럼프는 TV토론 때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며 “이게 작아 보이냐. 이게 작다면 다른 어딘가도 작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 나는 문제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끄집어내며 반박한 것이다. 이런 공방의 여파로 한 인터넷 매체는 한때 트럼프가 자신의 성기를 노출한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고 보도했다가 이를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트럼프를 사칭한 한 네티즌이 가짜 사진을 올린 것으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막말’도 하던 사람이나 하는 거지, 점잖은 워싱턴 정치에 익숙한 초선 연방상원 의원에게는 버거웠던 모양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힐러리는 유세 중에 개 짓는 소리를 내 눈길을 끌었다. 공직 후보가 거짓말을 하면 개가 알아채고 자동으로 짓게 하는 라디오 코믹광고를 예로 들면서, “이를 공화당에 대해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 중인데 훈련된 개가 공화당 주자들을 따라다니게 해서, 예를 들어 ‘지나치게 많은 규제가 경기침체를 초래했다’고 말하면 곧바로 짓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멍멍(Arh arh) 멍멍’이라고 네 번 개 짓는 소리를 직접 냈다.
 
  다만 미국이 좀 더 선진적인 것은 그렇게 진흙탕 싸움을 하면서도 고소·고발전은 전무하다는 점이다. 우리 같으면 각 후보 진영 대변인이나 후보에 대해 무차별적 고발과 고소가 이어졌을 텐데, 아직까지 상대를 향해 법적 조치를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나름 정치의 영역과 사법의 영역을 구분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또 수정헌법 1조가 언론의 자유를 담고 있어 어떤 주장이나 심지어 비난까지도 그 영역에 속하는 걸로 치부하는 듯하다. 유권자의 판단에 맡겨 결론을 내는 전통도 이런 분위기를 가능하게 했다.
 
 
  복잡한 선거 시스템은 선두주자들에게 유리?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힐러리에게 어떤 도움을 줄까.
  미국 선거를 지켜보면서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주마다 또 같은 주에서도 카운티마다 다른 대의원 계산 방식이다. 대체로 한 표라도 더 많은 후보가 전체 주의 대의원을 싹쓸이하는 ‘승자독식제(Winner Take All·WTA)’가 가장 일반적인 대통령 선거 방식인데, 각 당 후보를 뽑는 과정은 이보다는 몇백 배 복잡했다. 민주당은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배분하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공화당은 이 방식과 승자독식제를 혼용한다. 게다가 승자독식 외에 ‘부분 승자독식’ 또는 ‘승자 절대다수 배분’ 방식까지 있어 표 계산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승자독식제가 적용된 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였다. 온전한 승자독식이 아니고, 하이브리드형이다. 대의원 50명 가운데 전체 득표율이 1위인 후보가 주 대의원 29명을 차지하고, 나머지 21명은 7개의 선거구에서 1위를 한 후보가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싹쓸이했다. 주 전체에서도 1위를 했고, 7개 카운티 각각에서도 모두 1위를 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승리였다.
 
  텍사스와 조지아, 앨라배마, 버몬트 등은 ‘50대 20’ 규정이 적용되는 곳이다. 한 표라도 더 많은 후보가 독식하는 게 아니라, 과반을 넘겨야 하는 자격조건이 있다. 그렇지 못하면 1위 후보가 나머지 후보들과 대의원을 배분하는데, 1위 쪽에 대다수 대의원이 배분된다는 차원에서 ‘승자 절대다수 배분(Winner Take Most·WTM)’이라고 부른다. 하한선도 있어, 대의원을 배당받으려면 최소 20% 이상의 득표율을 올려야 한다. 이 때문에 루비오는 20% 밑의 지지율 때문에 대의원 수에서는 상당히 손해를 많이 봤다. ‘50대 15’ 규정이 적용되는 곳(아칸소, 오클라호마)도 있고, ‘66대 20’ 규정(테네시) 등 복잡 다양한 방식이 다 동원된다. 최대 관심이 쏠리는 플로리다는 1위 후보가 99명의 대의원을 독식하는 ‘승자독식’ 방식의 경선을 치른다. 지금 여론조사만 보면 트럼프가 루비오를 앞선다. 그런데 플로리다가 승자독식주가 된 것은 최근이다. 당시 젭 부시가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면서 부시에게 힘을 몰아준다는 차원에서 득표 방식을 바꿨다. 그런데 부시는 일찌감치 탈락하고, 주의 대표격인 루비오가 트럼프에게 힘을 쓰지 못하면서 괜히 방식을 바꿨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의 세계에서 꼼수는 결국 이상한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공화, 7월 전당대회에서 후보 결정될 수도
 
  트럼프가 계속해서 대의원을 모아가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면 불안한 처지가 된다. 공화당 규정상 과반수 대의원을 확보하지 못하면 전당대회에서 후보를 원점에서 선출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중재 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 ‘경쟁 전당대회(Contested convention)’ 등의 이름이 붙는데, 처음에는 지도부가 마음대로 후보를 정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중재 전당대회라고 부르다가, 최근 경쟁 전당대회라는 개념이 정립됐다. 누구도 과반 대의원을 확보하지 못하면 7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리는 전당대회에서는 2472명의 전체 대의원이 과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재투표를 한다. 끝장 경선이 치러지는 건데, 이 경우 지역 예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게 돼 있는(Binding) 대의원들은 그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누구든 지지할 수 있다. 공화당은 1948년 토머스 듀이 뉴욕주지사가 3차 투표 끝에 후보로 선출된 이후 한 번도 중재 전당대회가 열린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전당대회는 최근까지 있었다. 1등 후보를 배제하고 2, 3위 후보가 ‘야합’해 판을 뒤집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공화당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다수 후보를 배제하는 식이 지금 통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 중재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후보가 당선된 적도 없다. 1위인 트럼프나 2위인 크루즈 모두 중재 전당대회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자유로운 경쟁으로 후보를 뽑는 게 정석이긴 하다. 다만 공화당 내부가 워낙 갈라져 있고, 트럼프가 본선에 나오면 필패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사실상 무덤 속으로 들어갔던 중재 전당대회가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트럼프는 이런 점을 의식했는지 3월 10일 열린 토론 때는 ‘점잖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동안의 상호 비방 대신 사회보장과 외교정책, 이민법, 이슬람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토론을 했다. 트럼프는 무슬림 혐오주의적 발언을 자제하면서 “모든 무슬림이 아니라 무슬림 가운데 증오심을 가진 부분을 언급한 것”이라고 피해갔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강한 지도자’라고 했던 것에 대해서도 해명을 했다. 그는 “푸틴을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고, 강함이 다 좋다는 뜻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경선에서 승리를 거듭하면서 트럼프가 듬직한 대통령 후보감이란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적인 저자세’라고 언론들은 분석했다. 일부 언론은 이와 관련해 “트럼프가 사업가라는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며 “사업가의 장점은 유연성이고, 트럼프는 자기의 자리에 따라 입장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관측했다.
 
  트럼프의 변신처럼 미국 대선은 예측 불가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전당대회까지 후보가 결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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