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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초점

일본 외교문서에 나타난 1965년 한일협정 뒷얘기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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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위안부 합의’, ‘한일협정’과 비슷하게 마무리
⊙ 외교부 보관중인 〈JP-오히라 메모〉는 筆寫本
⊙ 일본 전략, “시간 끌면 상쇄”
⊙ 이승만, 일본에 80억 달러 규모 보상금 요구
⊙ 일본측 문건으로 확인한 위안부·독도 문제
1962년 1월 5일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 발언을 기록한 일본 측 극비문서.
  1962년 1월 5일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주일(駐日) 미국대사는 국무부의 지시로, 일본 이케다 총리를 면담했다. 당시 주요 발언 내용은 이렇다.
 
  “한일 양국 간 한일회담을 타결할 가장 좋은 기회이며, 이 기회를 놓치면 회담이 지연될 가능성이 있어요. 한국이 주장하는 대일청구권 8억 달러 또는 12억 달러는 너무 많으니 5억 달러 이하로 하고, 그중 일부를 청구권 지불액이 되도록 한국 측을 설득하겠습니다.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일본의 원조는 불가결하며, 일본자본의 도입, 기술원조의 실시가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 서독, 이탈리아, 영국 등의 자본이 점차 한국에 진출하고 있는데, 일본이 시간을 끌 경우 일본 제품의 한국 진출이 어려워요.”
 
  일본 외교문서철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해당 발언을 통해, 한일협정의 교섭과정에 미국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청구권 액수는 미국의 중재(仲裁)로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위안부 합의’와 ‘한일협정’의 유사점
 
  1965년 ‘한일협정’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와 묘하게 닮은 점이 많다. 2015년 12월 28일 서울에서 한·일 외교장관은 ‘한·일 위안부 합의문’을 발표했다. ‘법적(法的)’이라는 표현은 빠졌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분명히 했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사죄·반성의 뜻을 밝히는 등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여부가 최대 쟁점이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부분을 양보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더구나 합의문에는 ‘최종적·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논란에 불을 지폈다. 물론 ‘일본정부가 표명한 조치들을 착실히 실시할 것’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지만, 결과적으로 향후 한국이 국제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합의문에 따르면, 소위 일본 측의 ‘조치’는 위안부 지원 재단 설립과 예산지원에 한정되어 있다. 문구의 해석에 따르면, 일본이 새로 설립하는 재단에 10억 엔의 예산을 지원할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 국민정서상 만족할 수준의 합의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합의 직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국민의 바람을 배신한 외교적 담합”이라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1965년 ‘한일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미국의 역할 또는 압력이 크게 작용했고 ▲한일 양국이 각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합의문을 해석할 수 있도록 모호(模糊)하게 작성되었으며 ▲오랜 기간의 실무협상을 했으나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해결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통상 각국은 중요한 외교회담이나 교섭결과를 상세히 기록하여 남겨 둔다. 물론 사실관계에 근거하지만, 자연스럽게 자국에 유리하게 주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한일회담처럼 상대방이 있는 경우, 교섭과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국의 외교문서를 종합적으로 비교·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국내의 경우, 주로 한국 측 자료에 의존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한일협정’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한일협정을 굴욕적 타협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측은, 이 협정 때문에 오늘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청구권협정을 한일 간의 담합(談合) 또는 밀실(密室) 합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02년 9월 일제 강점기 피해자 99명은 행정법원에 한일협정 문건 공개 소송을 제기했다. 2004년 2월 법원은 문건 일부 공개 판결을 내렸지만, 외교부는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나 외교부는 항소심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청와대와의 조율을 거쳐, 2004년 12월 문서의 일부를 공개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나아가 다음 해 8월 26일 한일회담 문서를 전면적으로 공개했다. 당시 “국익을 위해 외교 문건 공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역사 바로 세우기 측면에서 전면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했으나 문서는 결국 전면 공개됐다.
 
 
  갑작스러운 문건 전면 공개의 배경
 
유의상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표기명칭대사.
  논란이 뜨거웠던 당시 외교부 동북아1과장으로 실무를 맡으면서 행정소송의 외교부 측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한 적이 있었던 유의상(劉義相)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표기명칭대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문건 공개 소송이 제기된 시점은 한일관계가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최상의 상태에 있었으며, 따라서 정부는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문서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정부의 방침이 문서공개 쪽으로 갑자기 선회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으나, 2005년 2월 22일 일본 측에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식 호칭)의 날’ 제정 등으로 한일관계가 급격히 악화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문건 전면공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볼 수 있다.
 
  유 대사는 “무언가 한일협정 협상에 밀실 담합 혹은 합의가 있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막상 전면 공개되자, 관련 문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일협정은 명분과 실리의 불가피한 타협의 결과였다”며 “비록 일본과 정치적으로 타협했다는 한계가 있으나, 당시 한국경제가 극심한 부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국 원조마저 1958년부터 양적으로 감소하는 등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금 도입이 절실했다는 점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유 대사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과 한국의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를 수집해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청구권 문제의 교섭과정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연구가 소홀했던 일본 측 외교문서(일본의 한일회담 관계 문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시민단체가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2007년 3월부터 부분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하였다)의 분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월 말 《대일외교의 명분과 실리》라는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기자는 출판 예정인 책의 원고와 일본 측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부분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했다. 특히 일본 측 외교문서를 통해 당시 협상에 임했던 일본 내부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데 주력했다.
 
 
  일본 측, “시간 끌면 된다”
 
‘한·일 양국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원본.
  1951년 10월 20일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열렸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일본으로부터 일제 강점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받고 궁극적으로 양국 간 국교정상화를 위한 사전 준비 성격의 회담이었다. 회담은 12월 4일까지 총 10차례 개최됐다. 회담이 종료되기도 전인, 11월 25일 일본은 ‘한일 기본관계 교섭에 관해 유의해야 할 사항’이라는 내부문건을 작성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1. 기본조약안 작성의 가부(可否)에 관하여
 
  -현재 진행 중인 예비회담에서 한국 측은 양국이 각각 조약안을 준비하여 내년 2월의 본 교섭 개시에 앞서 일정한 시기에 쌍방의 안을 제시하고 예비협의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나 일본 측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응하고 있음.
 
  -그러나 회의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견지에서, 특히 종전(終戰) 이전에 기인하는 한일 쌍방의 제(諸) 청구권의 일괄 상호 포기라고 하는 대국적인 규정을 삽입코자 한다면, 오히려 일본이 한국에 앞서 조약안(개략적인 것이라도 무방)을 작성하여 한국 측에 제기하는 것이 득책일 수 있음. 한국은 국제교섭, 조약체결 등에 경험이 없으므로 우리가 준비해서 초안을 제시하면 교섭을 리드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됨.
 
  (중략)
 
  4. 교섭의 준비(특히 청구권 관계)에 관하여
 
  -한국 측은 교섭에 임하는 기본태도에 있어 일본에 의한 40년의 조선통치가 착취적 식민정치에 의한 것이었다는 명분을 내세울 것으로 예상됨.
 
  -일본으로서는 원칙론으로서 이러한 한국 측 주장을 논파할 필요가 있음. 필요하다면 한국 측 그리고 세계의 오해를 풀기 위하여 일본의 조선통치하에서 한국인들의 경제생활, 문화생활에서의 향상된 측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설명문을 준비할 필요가 있으며, 적당한 사안들에 관해서는 다른 외국의 제국주의와 비교할 필요가 있음.
 
  -한국이 거액의 대일청구권 제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음. 재일조선인 처우 문제를 제외하면 이 문제가 한일교섭의 가장 번잡하고 곤란한 사안이 될 것으로 생각됨.
 
  -일본으로서는 재조선 재산에 대한 막대한 청구권이 있으므로, (한국의 청구권과) 일괄 상쇄하는 방안을 제기(bargaining tool 이상의 일본 측 주장의 실효성에 관한 연구가 필요함)해야 함. 한국이 쉽게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응한다 해도 혼합위원회 등에 의해 각 케이스별 논의를 거쳐 마지막 단계에서 응하게 될 것임.(중략)
 
  -본 건 청구권 처리 문제는 법 이론은 별개로 하고 실제 한국 측으로부터 새로이 일본의 재(在)조선 재산을 반환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우선 없으므로, 일본으로서도 한국 측의 청구에 응하지 말고 시간을 끌 경우 사실상 일괄 상쇄로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예견됨.〉
 
  일본 측의 문건을 보면, 일본은 ▲일본의 조선통치로 경제·문화에 걸친 발전이 있었으므로 배상 혹은 보상은 부당하며 오히려 ▲자신들이 한국에 남겨 놓은 재산에 대한 역(逆)청구권 혹은 대한(對韓) 청구권을 요구해야 하나 ▲한국 측이 이러한 요구를 들어줄 것 같지 않으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 서로의 청구권을 상쇄(相殺)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 제3차 회담까지 한국에 대한 역청구권을 주장함으로써 한일회담을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한일 간의 조기 국교정상화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에서의 냉전구도에서 공산세력에 대항하는 체제의 완성을 원하던 미국은 일본에 대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노력과 함께 일본 국내적으로 귀국 일본인들에 대한 보상의 길이 마련되면서 일본은 1957년 12월 31일 역청구권을 포기하였고, 1965년 6월 한국과 청구권협정 체결에 합의하였던 것이다.
 
■ 한일협정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국과 일본은 ‘한·일 양국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조인(調印)함으로써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 조약과 함께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4개의 협정이 함께 체결되었다.
 
  한일협정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일관계의 기본 틀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관계조약’과 ‘청구권협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관계조약’은 일본의 침략 사실에 대한 인정과 사죄가 담겨져 있지 않아서,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피해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역사논쟁의 한복판에 있다. 비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의 침략, 지배 인정 관련
 
  ‘기본관계조약’에는 일본의 침략과 지배 사실에 대한 기술이 없다. 그 결과 일본의 반성과 사죄 또한 담겨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기본조약 2조 해석이 논란의 중심이다. 7개조로 구성된 ‘기본관계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무효’라는 구절의 해석을 ‘한국병합은 당초부터 불법으로 이루어진 원천 무효’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반면 일본은 ‘한국이 독립한 1948년 8월 15일부터 효력을 상실한 것’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애매하게 기술해, 논쟁을 피해 간 결과였다.
 
  ②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청산
 
  한국인 등이 과거 일제 강점기의 피해를 배상받기 위해,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70여 건에 달하지만, 결국 대부분 패소했다. 청구권협정의 결과다. 청구권협정의 내용은 이렇다.
 
  제1조 일본은 한국에 10년에 걸쳐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연이율 3.5%, 7년 거치를 포함 20년 상환)를 제공한다.
 
  제2조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다.
 
  일본은 제2조 조항을 바탕으로 일체의 배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한국의 대법원은 2012년 5월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불법이며, 개인 청구권 역시 소멸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양측은 조약에 규정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자금의 성격에 대한 해석도 달리하고 있다. 한국은 해당 자금을 ‘배상금’, ‘보상금’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를 ‘독립축하금’, ‘경제협력금’으로 부르고 있다.
 
 
  ■ JP가 외교부 소장 〈김-오히라 메모〉가 眞本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
 
한국 외교부 소장 〈JP-오히라 메모〉(아래)와, 일본측 소장 〈JP-오히라 메모〉.
  2005년 외교부는 한일협정 관련 3만5000쪽 분량의 비밀이 해제된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그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것은 〈김종필-오히라 메모〉이다. 한일협정은 김종필 중정부장과 오히라 외상의 담판으로 가능했다. 1962년 11월 12일 도쿄에서 김종필 부장과 오히라 외상은 ‘일본은 한국에 6억 달러+알파를 차관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의 〈김-오히라 메모〉를 남겼다.
 
  이와 관련, 김종필 전 총리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외교부가 공개한 2장짜리 문서는 내가 오히라와 함께 쓴 메모가 아니다”며 “글씨체도 내 필체가 아니며, 나는 한글과 한자를 혼용해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외교부에서 공개한 〈김-오히라 메모〉는 일어와 영어로 작성된 2장으로 구성돼 있다.
 
  김 전 총리의 주장대로, 외교부가 보관 중인 〈김-오히라 메모〉는 진본이 아니다. 일본 측 외교문서를 확인해 보면, 오히라 외상이 작성한 일본 측 〈김-오히라 메모〉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측 문건은 2장으로 깔끔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 일본 측 메모는 한눈에 보아도 중간 중간에 합의를 하면서 내용을 집어넣은 것처럼 산만하지만 자연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우리 측은 〈협력하도록 ‘건의’할 것을 양자 수뇌에게 건의한다〉며, ‘건의’ 부분에 오자(誤字)가 나와 있는 반면, 일본 측 문건은 〈협력하도록 추진할 것을 양 수뇌에게 건의한다〉며 바르게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 측이 가지고 있는 문건은 외교부에서 원본을 보고 따로 정서(精書)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총리가 해당 메모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妄言의 원조, ‘구보타 발언’의 속사정
 
한일협정 조인을 마치고 조약문서를 교환하는 양국 외교부 장관. 사진=조선일보
  현재도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妄言)은 한일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큰 짐이다. 한일협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망언은 계속됐다. 대표적인 망언은 제2차, 3차 회담의 일본 측 대표였던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외무성 참여(국장과 차관 사이의 직급)의 ‘식민지 시혜론 발언’(소위 ‘구보타 발언’)이다. 한국 측 외교문건에도 관련 내용이 나와 있으나, 일본 측 문건을 보면 내용이 더욱 자세하다. 1953년 10월 15일 제3차 회담 청구권위원회 제2차 회의석상에서 있었던, 그의 발언을 일본 측은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 (‘일본이 없었더라도 한국은 근대국가로서 당연한 진보를 거두었을 것이다’는 한국 측의 발언에 대한 답변으로) 일본이 가지 않았다면(식민지 하지 않았다면) 한국이 더 좋아졌을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나의 외교사 연구 결과로 볼 때 일본이 가지 않았다고 하면 중국 또는 러시아가 들어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일본의 대한청구권 주장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한국 측의 문제제기에 대해) 일본의 청구권도 법률적인 것이다. 한국 측이 국회 의결 운운하면서 배상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것이다. 만일 그러한 제안을 했다면 일본 측으로서는 한국에서 민둥산을 녹화한 일, 철도를 깐 일, 항만을 건설한 일, 논을 조성한 일, 대장성의 돈을 많은 해는 2000만 엔, 적은 해는 1000만 엔 지출하여 한국 경제를 배양한 일을 반대 제안으로 제출하고, 한국 측의 요구와 상쇄했을 것이다.〉
 
  ‘구보타 발언’은 한일회담사에서 회담을 4년 6개월 중단시킨 큰 사건이다. 구보타가 망언을 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발언을 하게 된 내막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측 기록을 보면, 구보타의 본심을 알 수 있다. 구보타가 자신의 발언이 있은 후 10년 이상이 지난 시점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일본의 외무대신이나 당 수뇌부는 ‘해 해’ 하면서도 전혀 열의가 없었다.(중략) 위에서 적극적으로 무언가 해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려웠다. 실무적으로 한국과 협의를 해 봐야 마무리가 안 되고, 예를 들어 청구권 문제는 상쇄하는 것이 일본 측의 방침이었는데 ‘최후에는 1억 달러 정도 한국에 준다’라는 지침을 주었다면 나로서는 휠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한 것은 대신(大臣) 차원에서 대장대신과 합의를 이룰 사항이지 내가 대장성 주계(主計)국장과 이야기해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느 정도 보상이 필요하지만, 구체적인 액수에 대한 지시가 없어 처음부터 회담이 어려웠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이승만, 일본에 거액 보상금 요구한 배경
 
1951년 11월 25일 일본 측에서 작성한 〈한일기본관계교섭에 관해 유의해야 할 사항〉 내부문건.
  이러한 현실적 이유와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도 회담에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에 대한 구보타의 평가는 아주 거칠다.
 
  〈이승만과 같은 독재자를 상대로는 도저히 회담이 마무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대표는 이승만 예찬, 이승만 추종으로 일관하였다. 예를 들면 양국 간 의사록을 만들자고 합의가 이루어져 서로 안을 만들어 보면 한국 측은 이승만을 president가 아닌 great president로 해 놓아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그 당시의 의사록은 없다. (중략) 그쪽(한국 측) 철학으로는 내 발언이 쇼크였을지도 모른다.〉
 
  구보타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일 강경책 때문에 회담이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통령의 생각은 우리 측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1965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발언했다.
 
  〈내(이승만 대통령)가 김유택 (한국은행)총재를 주일대사로 임명했는데 김 총재더러 국교정상화하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야. 지금은 국교정상화할 때가 아니야. 적어도 40세 이상 된 한국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라야 국교정상화가 제대로 되는 거야.〉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강경책은 국교정상화보다는 한일회담을 통해 일본을 중요시하는 미국을 견제함으로써 미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유지하고, 일본에 대한 강경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고자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생각하는 청구권 액수는 얼마였을까. 한국 측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6년 3월 28일 이승만은 김용식 주일공사에게 이러한 지침을 하달했다.
 
  〈일본이 필리핀에 지불하기로 했던 전쟁배상금의 10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일본에 전쟁피해 보상금으로 청구할 것.〉
 
  일본은 1955년 5월 필리핀의 8억 달러(무상지원 5억5000만 달러, 상업차관 2억5000만 달러) 배상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80억 달러를 요구한 것이 된다. 80억 달러 요구는 현실성을 떠나,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일본 측 문건으로 확인한 위안부·독도 문제
 
  협정 체결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한일협정 교섭 과정이 주목 받고 있는 이유는 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일본 측 문건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은 1952년 5월 19일 제2차 회담 청구권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한국 측이 일본 측에 ‘위안부 보관금’ 문제를 거론한 부분이 발견된다. 내용은 이렇다.
 
  〈한국여자로서 전시에 해군이 관할했던 싱가포르 등 남방에 위안부로 갔다가 돈이나 재산을 놓고 귀국한 사람들이 있으며, 군 발행의 수령서를 보여주면서 무언가 해 달라고 오는데 사회 정책적으로 동 수령서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 경우도 있다. 후에 일본자료를 통해 실태를 확인해 나가길 원한다.〉
 
  당시 기록으로 볼 때 한국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지(認知)하고 있었던 것은 맞다. 다만 현재와 같은 전시중 성폭력의 희생자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재산 청구권(미수금)과 관련한 문제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위안부’ 문제를 반인도적, 여성에 대한 보편적 인권유린 및 전쟁 범죄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일회담에서는 이러한 차원으로는 일절 협의된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일협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는 일본 측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JP 독도폭파 발언의 진실
 
  독도와 관련해서는, ‘독도폭파 발언’이 논란의 중심이다. 현재까지 공개된 한일 기록 가운데, 관련 발언은 3군데에서 나온다.
 
  일본 외교문서철에는, 김종필 전 총리(JP)가 1962년 10월 23일 이케다 총리와의 면담 석상에서 독도 이야기가 나오자 “두 번에 걸쳐 반농담조로 문제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 이 섬을 폭파시켜 버리자”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962년 9월 13일 한국 측의 회의기록(제6차 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제4차 회의)에 따르면, 일본 이세키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사실상에 있어서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 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다른 한국 측 외교문서철에는, 1962년 11월 13일 방일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앞서 JP는 하네다공항에서 가졌던 양국 기자들과의 기자회견 시,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 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언급한 기록이 있다.
 
  여러 곳에서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독도폭파 관련 발언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 JP는 2015년 5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독도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폭파하면 했지 당신들한테 내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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