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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장리포트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무역 현장

미얀마 군부의 부패로 물든 중국 보석 ‘비취’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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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우파운동과 함께 사라졌던 비취가 개혁개방 이후 다시 각광받기 시작
⊙ 중국과 미얀마 국경도시 루이리의 눈부신 발전
⊙ 폐쇄국가가 개혁개방에 나서면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들이 외국으로부터 대접받아

牟鍾赫
⊙ 45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양양하오상가에서 비취를 파는 양린과 상품을 유심히 살펴보는 관광객들.
  중국 서남부에 자리 잡은 윈난(雲南)성은 동남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이다. 이름부터가 ‘구름의 남쪽 나라’ 아닌가. 베트남·라오스·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윈난의 성도(省都) 쿤밍(昆明)에서 서쪽으로 752km 떨어진 지점에 루이리(瑞麗)가 있다. 루이리는 미얀마의 무세(Muse) 맞은편에 있는 변경도시다. 미얀마와 같은 시간대로 베이징(北京)과는 1시간 반의 시차가 난다. 하지만 중국은 통일시차를 적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루이리는 해가 베이징보다 1시간 반 늦게 뜬다. 주민들도 베이징보다 1시간 늦은 라이프 스타일을 갖고 생활한다.
 
  그러나 제가오(姐高) 변경무역구에 위치한 옥시장(玉城)은 아침 7시 반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지난해 12월 1일 이곳을 찾은 필자는 사위가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사방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타고 옥시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루이리 시내에서 강을 건너온 중국인들이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국경을 넘어왔다. 옥 원석을 가지고 온 미얀마인들이다. 미얀마인 중 대다수는 임시통행증을 제시하고 국경검문소를 거치지만, 일부는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산길을 넘어 찾아온다.
 
지마오상가에서 비취 팔찌를 진열하는 미얀마인 매니 덴.
  중국인이든 미얀마인이든 옥시장에 오면 상가의 지정된 좌판에 상품을 진열한다. 여러 보석상가 중 지마오(吉茂)가 가장 크다. 규모가 축구장만 해서 루이리에서 으뜸이다. 8시 반이 되니 옥상인들이 모두 집결했다. 9시에는 중국 각지에서 온 소매상과 소비자들까지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다. 상가 옆 식당에서 만난 량제(32)는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왔다. 그는 “이곳을 다녀갔던 동업자의 소개로 찾아왔다”며 “중국 최대 규모의 옥시장답게 물량이 풍부하고 가격도 저렴하다”고 말했다.
 
  옥시장에서 거래하는 상품은 비취(翡翠)의 원석과 가공품이다. 비취는 경옥(硬玉)류 보석이다. 경옥은 미세한 결정질이 결합된 규산염(硅酸鹽)광물로, 철만큼 강해 잘 깨지지 않는다. 색깔은 무색, 흰색, 녹색 등 다양하다. 일부가 녹색을 띠는 이유는 결정질에 함유된 원소인 크로뮴(Cr)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옥을 모두 비취라고 할 수는 없다.
 
  쾅산(鄺山) 아시아비취연구회 회장은 “비취는 경옥 중에서도 결정질이 아주 촘촘하게 결합되고 다양한 원소 성분이 절묘하게 배합된 것”이라며 “경옥은 티베트·러시아·멕시코 등지에서도 발견되지만, 보석으로서 상품가치를 지닌 비취는 전 세계의 95% 이상이 미얀마에서 나온다”고 소개했다.
 
  지마오상가 한편에서 비취 팔찌를 진열하던 미얀마 상인 매니 덴(30)은 필자가 다가가자 유창한 중국어로 먼저 말을 걸어 왔다. 그는 “미얀마에서 가져온 A급 원석으로 가공한 상품”이라며 “가격대는 2000위안(약 36만원)에서 1만 위안(약 180만원)으로 다양하다”고 말했다. 매니는 소수민족인 카친(Kachin)족 출신이다. 2년 전 중국에 와서 시내에 거처를 구해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비취 가공은 오직 중국인만 할 수 있는 고난도의 기술이라서 미얀마인들은 원석을 가져와 중국인 도매상에게 넘기거나 가공품 판매에만 종사한다”고 밝혔다.
 
  2012년까지 루이리의 비취 상권은 도심의 볜마오제(邊貿街) 일대에 집중됐었다. 그러나 2013년 지마오상가가 문을 열면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전까지 아침에만 열렸던 제가오 옥시장이 하루 종일 영업하면서 최대 상권으로 부상했다. 양양하오(样样好)상가에서 만난 한족 상인 양린은 “제가오는 국경 철책만 넘으면 바로 미얀마라서 비취 원석을 넘겨받기 아주 편리하다”며 “도심에 있던 가공 장인들도 제가오로 옮겨오는 추세”라고 말했다. 현재 루이리에서 보석 관련 산업 종사자는 4만명, 연 거래액은 30억 위안(약 5400억원)을 넘는다.
 
  이런 루이리의 현실과 달리 오랫동안 비취는 우리에게 ‘중국의 보석(中國珠寶)’으로 잘 알려졌다. 그 이유는 비취가 청대 이래 중국에서 열렬히 환영받으면서 거대한 시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부터 옥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몸에) 금을 걸쳐 부귀를 뽐내고, 옥을 차서 평안을 지킨다(穿金顯富貴, 戴玉保平安)’고 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원대 이전까지 애용했던 옥은 연옥(軟玉)이었다. 주요 산지는 신장(新疆), 칭하이(靑海), 간쑤(甘肅) 등 중국 서북부다. 경옥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진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비취를 특히 사랑했던 서태후
 
비취 원석을 가공하는 노동자들. 가공기술은 오직 한족끼리만 전수한다.
  고대 이래 윈난–미얀마–인도를 잇는 남방 실크로드에서는 마방(馬幇)이 활동했다. 그들은 짐의 균형을 잡기 위해 미얀마 강가에서 주운 돌을 말에 채웠다. 말을 유심히 살펴본 중국 상인들은 이 돌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챘다. 실제 돌을 깨 보니 에메랄드처럼 영롱한 녹색 빛깔까지 발산했다. 상인들은 돌을 가공해 상품으로 내놓았다. 일부는 직접 미얀마에 넘어가 원석을 사들였다. 이 때문에 명대에는 쿤밍에서 미얀마에 이르는 길이 옥석루(玉石路)라고 불렸고, 비취는 ‘윈난옥’이라 이름 지어졌다. 당시 옥 거래와 가공의 중심지는 루이리에서 180여km 떨어진 텅충(騰冲)이었다.
 
  비취가 중국 전역에 보급된 것은 청대부터다. 1762년 청조와 새로 들어선 버마족의 꼰바웅왕조는 영토 문제로 대립해 전쟁을 벌였다. 전투는 7년간 계속되다가 1769년에 끝났다. 전후 청과 미얀마는 군신관계를 맺어 꼰바웅왕조가 청 황실에 조공을 바쳤다. 1885년 영국군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꼰바웅왕조가 가장 많이 바쳤던 조공물이 바로 비취 원석이었다. 1세기여 동안 막대한 비취가 미얀마로부터 들어오자, 청 황실과 귀족층 사이에서 비취를 장신구로 착용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비취가 악귀를 쫓아내고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각광받았던 것이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끌었던 품목은 목걸이였다. 목걸이는 가공한 비취 구슬 108개를 꿰어 만들었다. 티베트 불교를 신봉했던 만주족의 신앙과 한족의 전통이 결합한 산물이었다. 황족이나 귀족은 평소 입는 예복 위에 긴 목걸이를 걸쳐 부귀영화를 뽐냈다. 특히 서태후(西太后)는 비취에 대한 애착이 광적이었다. 각종 비취를 매단 옷이 3000상자가 넘어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갈아입었다. 비취로 만든 식탁과 식기가 아니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 서태후가 광서제(光緖帝)에게 하사했던 비취 목걸이는 무가지보(無價之寶)였는데, 2014년 홍콩 소더비 경매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
 
  비취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비취대왕’ 춘준푸(寸尊福)다. 춘은 1855년 텅충의 허순(和順)촌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마방을 따라 미얀마로 넘어간 뒤 만달레이(Mandalay)의 한 옥가게에서 일했다. 현지 생활에 익숙해지자 동향인들과 함께 푸성룽(福盛隆)을 개업했다. 춘은 비취를 보는 안목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진귀한 원석을 찾아내 싼값에 사서 가공하여 중국시장에 고가로 팔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도 안 되어 억만장자가 됐고 미얀마 화교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춘의 성공 가도는 거침이 없어 영국 지배하의 미얀마 입법회 의원에도 선출됐다.
 
  미얀마에서 입지를 굳힌 춘준푸는 조국으로 눈을 돌렸다. 쑨원(孫文)이 조직한 중국혁명동맹회의 미얀마지부 상임이사를 맡았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뒤에는 막대한 후원금을 기부했다. 쑨원은 이런 춘을 “화교의 영수, 민족의 자랑”이라고 칭송했다. 춘은 고향 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898년 윈난성 서부에서 최초의 여학교인 밍더(明德)학당을 설립했다. 1928년에는 허순도서관도 개관했다. 허순도서관은 오늘날에도 중국 최고의 향토도서관으로, 춘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로 바뀐 이후 더 많은 비취가 중국으로 유입됐다. 영국 정부는 1899년 텅충에 영사관을 개설해 보석무역을 관할했다. 중국도 1902년에 세관을 열었다. 수십 년간 미얀마와 윈난 사이에 번창했던 제이드 로드(Jade road)는 1930년대 또 다른 이름으로 대체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해 일본군은 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연해지방이 모두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중국은 미국과 영국의 군수물자를 지원받기 위한 보급로를 건설했다. 그것이 1937년부터 1년여간 20만명의 노동자를 동원해 닦았던 버마 로드(滇緬公路)다.
 
  버마 로드는 총 길이가 1154km에 달했던 밀림 및 산악도로다. 그 험난한 길을 통해 중국은 군수물자를 보급 받아 일본군에 맞섰다. 1942년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하자, 미군은 2년간 인도에서 수백 대의 수송기를 날려 물자를 공수했다. 1944년 영국군이 임팔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레도(Ledo) 로드를 새로이 뚫어 육로수송을 재개했다. 당시 버마 로드와 레도 로드의 중간 기착점이 바로 루이리였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옥 거래와 가공의 중심이 텅충에서 루이리로 넘어갔다.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중국인의 비취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그러나 1957년 반우파운동이 시작되면서 대륙에서 급속히 사라졌다. 반우파운동은 신중국 건국에 참여했던 중도파와 마오쩌둥(毛澤東)을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를 몰아낸 정치투쟁이었다. 당시 55만명의 사회 지도급 인사와 지식인들이 핍박당했다. 비취도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전통의상 치파오(旗袍)와 함께 일상생활 속에서 종적을 감췄다. 심지어 문화대혁명 시기에 비취를 소지한 사람은 사구(四舊,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에 물든 반동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1978년부터 시작한 개혁개방은 대륙에서 퇴출됐던 비취를 부활시켰다. 특히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전면적인 개방정책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거두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나는 바오파후(暴發戶·벼락부자)는 부의 상징물로 비취에 주목했다. 이에 1990년대 중반부터 비취 팔찌가 부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금세기 들어서는 얼마나 값비싼 ‘싼바오(三寶)’를 딸이나 며느리에게 결혼예물로 안겨 주느냐가 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됐다. 싼바오는 다이아몬드 반지, 금목걸이, 비취 팔찌를 가리킨다.
 
 
  비취와 함께 떠오른 도시 루이리
 
현재 루이리에서 미얀마로 수출하는 최대 품목은 오토바이다.
  비취가 다시 각광받으면서 잊혔던 변방 루이리가 떠올랐다. 루이리는 1992년 현(縣)에서 시로 승격됐지만 발전 속도는 더뎠다. 2000년 중국 정부가 제가오 변경무역구의 설치를 비준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마침 미얀마 군사정권이 1988년 ‘랑군의 봄’을 짓밟고 아웅산 수지 여사를 가택 연금시켜 서구세계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2002년 제가오 변경무역구가 문을 열었고, 2003년에는 미국과 유럽이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에 돌입했다. 서구세계의 대(對)미얀마 봉쇄정책은 루이리에 도약의 날개를 달아 줬다. 루이리가 중국과 미얀마의 무역 허브로 발돋움한 것이다.
 
  오늘날 루이리의 발전상은 통계수치로 잘 드러난다. 2014년 루이리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55억3000만 위안(약 9900억원)을 기록해 전년대비 16.6%가 늘어났다. 대미얀마 무역액은 286억3000만 위안(약 5조1534억원)을 넘어 전년대비 무려 56.8%나 증가했다. 이는 중국과 미얀마 전체 무역액(90억5000만 달러)의 절반에 해당한다. 2014년 미얀마의 총 무역액은 272억6000만 달러로, 중국이 제1의 무역파트너였다. 인적 이동도 활발해 한 해 1658만명이 루이리 출입국관리소를 오고 갔다. 지난해 3월부터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미얀마 화폐를 환전할 수 있게 됐다.
 
  2014년 5월 완공된 미얀마 짜욱퓨(Kyaukphyu)에서 쿤밍에 이르는 송유관도 루이리를 지난다. 이 송유관의 길이는 원유가 771km, 천연가스는 2806km에 달한다. 이처럼 루이리를 무대로 경제활동이 활발하다 보니, 변방도시답지 않게 값비싼 자동차가 도로 곳곳을 누빈다. 볜마오제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 중 절반은 외제차다. 높은 소비수준은 온라인에서도 확인된다. 2014년 전국 현급(縣級)도시의 온라인 소비지출에서 루이리는 저장(浙江)성 자싱(嘉興), 장쑤성 타이저우(泰州)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자싱과 타이저우는 루이리보다 인구가 3~4배 이상이나 많은 연해도시다.
 
  루이리의 경제력은 더훙(德宏)다이(傣)·징포(景頗)족자치주 내에서 주도인 망스(芒市)보다 약간 뒤처질 뿐이다. 2010년 제6차 인구센서스 결과 루이리의 상주주민은 18만명에 불과했지만, 망스는 39만명에 달했다. 물론 여기에는 루이리에 거주하는 3만여명의 미얀마 국적자가 제외되었다. 미얀마인은 제가오뿐 아니라 바이징루(白井路) 일대에 집거한다. 대부분 보석가게를 운영하지만 음식점, 식료품점, 이발소 등도 열어서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뤘다. 심지어 자신들만의 불교사찰과 모스크도 세웠다.
 
볜마오제에 주차된 차량의 절반 이상이 외제차다.
  현재 루이리 내 미얀마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버마족이다. 2010년 현재 미얀마 인구 6028만명 중 버마족은 68%, 나머지는 134개의 소수민족이다. 소수민족 중 카렌족(7%), 카친족(2%), 중국계(2.5%) 등은 1948년 미얀마 건국 이래 수십 년간 분리독립투쟁을 벌였다. 이와 달리 버마족은 합법공간에서 반정부투쟁을 펼쳤지만 버마공산당은 달랐다. 건국 초기부터 무장투쟁을 벌였고,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았다. 1962년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이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년 필자가 만났던 미안 마오는 “중국과 인접한 밀림지대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산 무기로 미얀마 정부군과 대등하게 교전했다”고 말했다. 미안은 버마족 출신으로 양곤(Yangon)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지도자였던 네윈이 중국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서 미안의 운명은 바뀌었다. 1978년 중국은 버마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공산당 반군은 홀로서기에 나섰지만, 1988년 미얀마 정부군에 항복했다. 투항을 거부한 일부는 미안처럼 중국으로 넘어왔다. 지난 20여 년간 미안은 루이리에 사는 버마족을 규합해 미얀마 내 반정부세력을 지원해 왔다.
 
  둘째는 이슬람교도다. 미얀마는 우리에게 불교국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전체인구의 89%가 불교를 믿지만 기독교도(5%)와 무슬림(4%)도 존재한다. 건국 초기만 해도 이슬람교도에 대한 대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네윈은 철저하게 버마족과 불교도 위주 정책을 펼쳤다. 이에 무슬림들이 반군을 조직해 저항하자, 1978년과 1991년에 대규모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때부터 적지 않은 이슬람교도가 인접한 방글라데시로 탈출했다. 바로 난민 사태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로힝야(Rohingya)족이다.
 
  로힝야족은 7세기 미얀마에 들어와 정착한 아랍 상인들의 후예다. 이들은 피부가 짙은 갈색이고 얼굴 생김새도 버마족과 전혀 다르다. 현재 북서부의 라카인주를 중심으로 130만명이 미얀마에 사는데, 모두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방글라데시로 넘어간 이들도 25만여명에 달한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처음에는 같은 무슬림인 로힝야족을 반겼지만 너무 많이 유입되자 지원을 끊었다. 10여년 전부터는 국경순찰을 강화해 입경을 막고, 유엔난민기구와 국제 비정부기구(NGO)의 구호활동마저 방해하고 있다. 그로 인해 방글라데시 내에서 2만명 가까운 로힝야족이 굶거나 병들어 죽었다.
 
 
  탈북자에서 미얀마인으로 바뀐 인신매매 대상
 
한눈에 봐도 로힝야족의 피부색과 얼굴 생김새가 아랍이나 서남아시아 계통임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동쪽으로 길을 나서 국경을 넘었다. 루이리의 미얀마인 상인회장인 펑조도 그중 한명이다. 2013년 필자가 만났던 펑조는 “20여년 전 맨손으로 중국에 와 지금은 내 명의로 된 가게에 집과 자동차를 샀고 아들을 랑곤에 소재한 대학에 입학시켰다”고 말했다. 오늘날 바이징루의 북쪽 거리는 로힝야족의 천국이다. 로힝야족은 버마족과 달리 루이리에 오자마자 비취 장사에 매달렸다. 펑조는 “볜마오제 보석상점의 1/3은 미얀마인이 주인이거나 미얀마인이 중국인의 명의만 빌려 운영하고 있다”며 “이 중 열에 아홉은 무슬림이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루이리 내 미얀마인은 어떤 방식으로 비취 원석을 조달받을까? 그동안 필자는 루이리를 여러 차례 찾으면서 현지 중국인과 미얀마인에게 속사정을 탐문(探問)했다. 중국 상인들은 한결같이 “원석을 가져오는 것은 온전히 미얀마인의 소관이라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 여러 소식통을 통해 ‘21세기 제이드 로드’의 운반책은 오토바이와 차량을 이용한 카친족과 로힝야족이 담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다이공(帶工)은 한때 마약도 운반했다. 지금은 중국 국경수비대가 마약운반책을 현장 사살하는 등 강경책을 취하면서 손을 뗐다.
 
  로힝야족의 경우 보통 미얀마 최대 옥 산지(産地)인 카친주에 가서 원석을 구한 뒤 중국으로 향한다. 현재 중국 국경과 맞댄 카친주 동부는 카친독립군(KIA)이 지배하고 있다. KIA는 상비군 1만명과 예비군 1만명을 거느려, 병력이 미얀마 내 15개 소수민족 반군 중 두 번째로 크다. 와주연합군(UWSA)이 3만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만, 병력이 분산되어 있어 전투력은 떨어진다. 이에 반해 카친족은 기독교 신자가 대다수이고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지난해 10월 미얀마 정부가 총선을 앞두고 8개 반군과 맺은 휴전협정을 KIA와 UWSA는 거부했다.
 
  이런 상황 아래 로힝야족이 국경을 넘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다. 루이리 시 정부는 비취 원석을 가져온 미얀마인에게 임시 거류증을 발급해 준다. 비록 다른 시현으로 이동하거나 여행할 순 없지만, 인신의 구속은 전혀 없다. 우리의 탈북자(脫北者)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혜택마저 부여하고 있다. 일정한 거주기간이 지난 이들에겐 집, 자동차, 오토바이 등을 자유로이 매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펑조는 “2010년부터는 상인회가 앞장서 새로 유입되는 미얀마인의 정착과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 시 정부의 고위관리와 수시로 만난다”고 말했다.
 
제가오 한편에서 미얀마에서 가져온 식료품을 파는 미얀마인 부자.
  미얀마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도 개설됐다. 지난해 12월 2일 필자가 찾아간 바이징루의 한 초등학교는 학생 정원이 400명을 넘었다. 학생은 무슬림 자녀가 대부분이었고, 버마족이 절대다수인 초등학교는 따로 있었다. 10여 명의 교사 중 5명은 미얀마에서 초빙되어 온 정식 교원이다. 중국어를 유일하게 구사했던 교사 마웅(여)은 “시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질 못해 미얀마인 상인회의 지원과 학부모들이 낸 학비로 학교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마웅은 “월급이 1000위안(약 18만원)도 안 되지만 이곳의 아이들을 정상적인 미얀마 시민으로 키운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물론 루이리 일대에 사는 모든 미얀마인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특히 여성들이 겪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적지 않은 미얀마 여인들은 인신매매단의 마수에 걸려 중국 각지로 팔려 나간다. 2013년 3월 《신경보(新京報)》는 르포를 통해 그 실태를 파헤쳤다. 《신경보》는 ‘차이니즈 드림을 안고 국경을 넘었지만 인신매매단에 의해 결혼하지 못한 농촌 노총각들에게 팔린다’고 보도했다. 미얀마 여성들은 2008년까지 2만~3만 위안(약 360만~540만원)에 팔렸다. 하지만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몸값이 급등했다. 최근에는 4만~5만 위안(약 720만~900만원)에 거래된다.
 
  본래 중국에서 외국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는 탈북자가 시초였다. 중국은 오랜 남아선호 사상과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남녀성비 불균형에 처해 있다. 현재 중국에서 30세 이하 남성 수는 여성보다 2000만명 이상 많다.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도시 서민과 농촌 총각이 늘어나는 현실로 인해 1990년대부터 인신매매가 극성을 부려 왔다. 과거에는 탈북자가 인신매매단의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었지만, 2008년부터는 미얀마인으로 대상이 바뀌었다. 그해 미얀마에서 사이클론이 발생해 14만여명이 죽으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중국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미얀마 내에서 비취 원석을 캐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더욱 끔찍하다. 과거 카친주의 옥광산은 규모가 크지 않았다. 수세기 전부터 비취 원석 채굴은 현지 주민의 가장 큰 생계수단으로 지역경제의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군사정권은 토지를 몰수해 주민들을 내쫓았다. 군사정권과 결탁한 재벌에게만 채굴권을 줬다. 채굴업체는 카친족, 로힝야족 등 소수민족을 광부로 고용했다. 광부들은 보호장비 없이 일했고 낮은 임금을 받았다. 또한 광산 측은 마약과 섹스를 제공해 광부들로 하여금 작업의 공포와 육체적 고통을 잊게 했다.
 
 
  미얀마 군부와 玉산업
 
  광산에서는 광부들만 일하는 게 아니다. 일자리를 찾질 못한 현지 주민이나 외지인들도 대형 굴착장비가 퍼 올린 돌과 흙더미를 맨손으로 파헤친다. 광부들이 발견치 못한 비취 원석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그러다 산이 무너지면 생매장을 당한다. 지난해 11월 카친주 흐파칸트의 한 광산에서 약 300m 높이로 쌓아 놓았던 돌과 흙더미가 광부와 주민들의 판잣집을 덮치면서 200명 넘게 숨졌다. 현지에선 구조장비가 부족하고 외지인이 많아 정확한 피해 집계가 나오질 않고 있다. 흐파칸트에서는 같은해 3월에도 산사태가 나서 10여명이 죽었다.
 
  이런 비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얀마 재벌들은 더 많은 옥 생산에 매달린다. 군사정권의 최고지도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옥광산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탄 슈웨다. 탄 슈웨는 1992년부터 2011년까지 미얀마를 철권 통치했던 독재자다. 그의 두 아들은 카친주 파칸의 6곳에 옥광산 채굴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동업자들은 광산 채굴업체와 옥 거래 회사를 운영 중이다. 탄 슈웨의 아들들이 관련된 사업체는 2013년과 2014년에만 2억2000만 달러의 순수익을 거둬들였다.
 
  이들 특권층은 채굴권을 팔거나 유령회사를 앞세워 사업을 진행해 막대한 재부(財富)를 쌓는다. 심지어 미얀마 군부가 채굴업체 2개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군부 사업체가 2014년 벌어들인 이익은 1억8000만 달러였다. 이렇게 미얀마 군부와 재벌들이 2005년 이래 10년간 해외에 팔아넘긴 옥은 약 1200억 달러로 추산된다. 현재 미얀마에서 옥과 관련된 산업과 시장 규모는 약 310억 달러에 달할 정도다. 이는 2014년 미얀마 국내총생산(GDP·691억달러)의 절반에 가깝다. 이런 현실을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미얀마 옥광산은 세계 현대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천연자원의 약탈”이라고 비판했다.
 
 
  玉, 미얀마의 거대한 국가비밀
 
제가오의 한 보석상가에서 거래되는 비취 원석. 이 원석에는 미얀마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미얀마 군부는 옥산업에서 거둬들인 돈의 일부를 소수민족 반군을 진압하는 데 사용한다. KIA도 광산을 운영해 최신 무기를 사들이고 조직을 관리한다. 놀랍게도 옥광산 개발에는 서구와 중국의 자본이 개입되어 있다.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캐터필러, 코카콜라 등 다국적 기업이 몰래 옥광산에 투자를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속사정은 그동안 몇몇 서구 언론을 통해 간간이 보도됐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한 국제 NGO가 발간한 127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통해 그 전모가 낱낱이 폭로됐다. 〈옥: 미얀마의 거대한 국가 비밀〉이 그것이다.
 
  이 보고서를 낸 단체는 글로벌 위트니스(Global Witness)다. 글로벌 위트니스는 1993년 영국에서 설립되어 런던과 워싱턴D.C에 사무소를 두고 활약하고 있는 부정부패 감시 NGO다. 이들이 1998년에 낸 보고서 〈피의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는 전 세계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1990년대 아프리카 서부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에서 다이아몬드를 두고 벌어진 내전의 참상과 그 배후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던 다국적 업체의 추악한 면모를 밝혀냈기 때문이다. 그 뒤 서구 사회에서는 피로 물든 다이아몬드에 대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여론이 악화되자, 2000년 국제연합(UN)이 주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의 주요 생산국과 소비국 대표가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다이아몬드의 원산지와 수출상 이름을 표기하는 킴벌리 협약이 맺어졌다. 범죄 및 불법과 관계없다고 인증된 다이아몬드만 시장에서 거래토록 한 것이다. 킴벌리 협약은 2003년 7월부터 시행되어 현재까지 70여 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2006년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을 제작해 세상에 널리 알렸다.
 
  지난 수년간 글로벌 위트니스는 미얀마 내에서 수많은 협력자를 확보해 다양한 조사를 벌였다. 보고서에서 밝힌 수치는 그동안 미얀마 및 중국 정부가 공개한 다양한 통계자료를 데이터화해서 얻어낸 것이다. 이와 관련해 BBC가 미얀마 정부에 공식 질의했는데 적극 부인하질 않았다. 보고서는 “옥과 관련된 산업과 시장에서 나오는 이익은 군부와 재벌, 마약조직의 주머니만 채우고 있다”며 “이런 부패사슬은 미얀마의 민주화 이행과 평화 정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위트니스는 중국의 책임도 통렬히 지적했다. 실제 중국은 지난 20여 년간 서구 세계의 경제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얀마 군사정권과 밀월관계를 맺어 왔다. 미얀마가 말라카해협을 거치지 않고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데다, 무궁무진한 자원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지만, 미얀마는 전 세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자원 미개발국이다. 미얀마의 천연자원 매장량은 원유 31억5400만 배럴(세계 34위), 천연가스 4조5000억 입방피트(세계 10위), 석탄 7억1100만Mt에 달한다. 에야와디강, 친드윈강, 딴륀강, 시따웅강 등 4대강에서 얻을 수 있는 수력발전량도 10만8000MW로 예상된다.
 
 
  중국, 미얀마의 석유와 천연가스 채굴권 확보에 혈안
 
국경 검문소를 자유로이 오가는 중국과 미얀마 국민들.
  이미 중국은 미얀마에서 적지 않은 석유와 천연가스 채굴권을 손에 넣었다. 미얀마가 중국으로 천연가스를 수출해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15억 달러에 달한다. 심지어 중국은 중동에서 수입하는 원유와 천연가스를 미얀마에서 운송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짜욱퓨에서 시작하는 송유관을 통해 중국 본토로 보내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중국은 미 해군이 장악한 말라카해협을 통하지 않고 안전한 에너지 수송로를 확보하게 된다. 현재 동남아 국가들과 영유권 문제로 대립하는 남중국해에서 분쟁이 일어날 경우 직면할 위험에서도 벗어난다.
 
  이런 배경 아래 중국은 불법적으로 자국으로 넘어온 미얀마인들을 우대해 왔다. 물론 중국 정부가 마냥 반긴 것만은 아니었다. 1990년대 말부터 미얀마인들이 대량의 마약을 소지한 채 들어오자 국경수비를 강화했다. 미얀마는 태국, 라오스와 더불어 골든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마약 생산지다. 2009년 미안 마오는 필자에게 “과거에는 중국인들이 미얀마인을 형제처럼 따뜻하게 맞이했지만 2008년 사이클론 사태 이후 많은 미얀마인이 넘어오자 3D업종에 취업시켜 중국인보다 훨씬 낮은 임금으로 부려먹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자가 지난해 12월에 찾은 루이리는 또 다르게 변했다. 중국 정부가 미얀마인에 대한 임시통행증 발급을 완화해 주어, 미얀마인은 제집 드나들 듯 무세와 루이리를 오고 갔다. 펑조는 “미얀마가 개혁개방을 가속화하고 앞날이 밝아지면서 최근 중국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미얀마인을 친근하게 대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미안은 오랜 중국생활을 정리하고 2014년 미얀마로 귀국했다. 펑조도 자신의 옥가게 운영보다 미얀마로 진출하려는 중국기업의 에이전트 일로 더 바쁘다.
 
  실제 루이리에는 연해지방의 중국기업들이 미얀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잇달아 진출하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베이징자동차가, 10월에는 인샹(銀翔)오토바이가 공장을 완공했다. PC, 휴대폰 등을 제조하는 ICT제조업체도 진출했는데, 이들 기업이 계약한 투자액이 300억 위안(약 5조4000억원)을 넘어섰다. 쿤밍에서 루이리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올해 1월에 완공되어 개통했다. 루이리시는 2014년 5월 중국에서 유일하게 현급 도시를 거점으로 한 항공사까지 설립했다. 루이리항공은 앞으로 중국과 미얀마 간 항공노선 개설뿐 아니라 미얀마 국내시장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루이리를 중심으로 중국과 미얀마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살펴보며, 필자는 탈북자와 북한을 떠올려 봤다. 대약진운동과 문혁(文革) 시기 중국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북한 주민들은 쌀을 모아 중국으로 보내줬다.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중국인들은 1990년대 아사(餓死)상태에 빠진 북한에서 자국으로 유입된 탈북자들을 한동안 따뜻이 맞이했다. 그러나 북한이 갈수록 지옥의 나락으로 빠지면서 태도를 바꿨다. 여기에다 북한 정권이 중국 정부에 탈출한 자국민의 강제 송환을 요구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이와 달리 미얀마 군사정권은 해외로 나간 자국민을 처벌하지 않았다. 심지어 1982년부터는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암암리에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그렇기에 북한과 미얀마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폐쇄국가가 개혁개방에 나서면, 안으로는 경제가 발전하고 밖에서는 국민들이 대접받는다는 점이다. 북한도 마그네사이트 60억t(세계 1위), 천연우라늄 400만t(세계 1위), 희토류 4800만t(세계 3위) 등 약 7355조원 가치의 천연자원을 지녔다. 북한 정권은 하루빨리 미얀마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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