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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크릿파일

美 CIA의 베를린 터널 작전

“철의 장막에 귀를 대라”

글 : 안치용  在美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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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전쟁을 잉태(孕胎)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진정한 지존을 가리기 위한 승전국 간의 총칼 없는 전쟁, 냉전(冷戰)이 바로 그것이다. 나치가 점령했던 지역을 연합군이 분할, 점령하면서 독일 베를린, 오스트리아 빈 등이 최전선으로 변했고 007 영화 같은 첩보작전이 진행됐다.
영국은 1949년 빈에 도청을 위한 터널을 파기 시작했고 미국은 1951년부터 베를린에 빈 터널보다 20배나 긴 터널을 준비했다. 그 결과 무려 450m에 달하는 베를린 터널에서 소련과 동구권의 전화망을 도청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청 11개월 만에 소련에 발각되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구촌 반대편에서 벌어진 한국전에서 그 실패의 씨앗이 잉태됐다.
한국전에서 북한 포로가 됐던 영국 MI6 요원이 자발적으로 소련의 첩자가 됐고 석방 뒤 MI6에 복직, 이 작전을 담당하면서 미국이 터널을 파기도 전에 작전계획을 KGB에 넘겼다. 미국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열심히 땅을 팠고 소련은 냉전시대 최대의 이중간첩을 보호하기 위해 터널 존재를 알면서도 지켜만 보다 우연을 가장해 터널 발견 사실을 세계에 알린다. 그날은 바로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가 영국 버킹엄궁을 공식 방문한 날이었다.
CIA와 NSA 등의 비밀문서, 정보요원들의 수기 등을 통해 철의 장막에 귀를 댔던 베를린 터널 작전, 그 모태가 됐던 빈 터널 작전, 그리고 한국전에서 소련으로 전향한 이중간첩 등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본다.

⊙ 미국 CIA와 영국 MI6 협조 “아무도 모르게 터널을 파라”
⊙ 화물로 위장해, ‘파낸 흙’ 실어날라
⊙ 2~3명이 24시간 소련 도청
⊙ 도청 엄청나 ‘세계 테이프 시장 휘청거릴 정도’
⊙ 한국전쟁 포로 출신 KGB 이중간첩이 작전 노출

安致勇
⊙ 47세. 부산대 사회학과 졸업.
⊙ 재미(在美) 탐사보도전문기자, 시크릿오브코리아 블로그 운영.
⊙ 前 YTN 기자.
⊙ 저서: 《시크릿오브코리아》 《박정희 대미로비 X파일, 상하권》.
베를린 터널 실제 내부 모습.
  베를린 전체를 삼킬 듯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1956년 4월 22일. 소련 KGB(舊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요원들이 정체불명의 베를린 지하공간을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갔다. 기관총을 메고 한참을 달리다 한 표지판과 마주한다.
 
  “이 선을 넘으면 미국 관할 구역입니다.”
 
  냉전시대의 가장 용맹무쌍한 첩보 작전으로 일컬어지는 베를린 터널 작전이 마침내 발각되는 순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승전국이 분할 점령했던 베를린의 지하에 미국과 소련 점령 지역을 가로지르는 터널이 존재했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경계가 가장 삼엄했던 ‘냉전의 최전선’ 베를린의 지하 6m에 자리 잡은 이 터널은 직경이 2m, 길이가 450m에 달했다.
 
 
  미국 CIA와 영국 MI6 협조
 
미국 CIA 휘장.
  ‘오퍼레이션 골드’. CIA(미국 중앙정보국)가 영국 MI6(영국 대외정보기구)의 협조를 받아 소련과 동독의 전화와 전보 등을 도청하기 위해 터널을 판 작전의 이름이다.
 
  독일은 2차 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44년 연합군에 의한 분할점령이 결정됐다. 한국의 운명은 1945년 얄타회담, 포츠담선언, 모스크바 3상회의 등에 의해 결정됐지만 독일의 분단은 이미 그 1년 전 확정되었다. 이때 그어진 경계는 베를린을 소련 점령 지역에 놓이게 했지만 그 중요성으로 인해 다시 연합군의 공동 관리구역이 됐다. 소련 점령 지역의 ‘외딴 섬’이 된 베를린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최전선이 돼버렸고 이로 인해 목숨을 건 첩보 작전을 전개하는 중심에 서게 된다.
 
  베를린의 중요성과 동서(東西)대립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소련의 베를린 봉쇄(Berlin blockade)다. 1948년 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자본주의 진영이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묶어 서독의 탄생을 예고하자 같은 해 6월 24일 소련은 서베를린의 육로와 수로, 그리고 철도를 모두 차단해 버렸다. ‘외딴 섬’ 베를린에 모든 생필품 공급이 중단되고 전력까지 끊겼다. 그러자 미국 등은 수송기를 동원해 생존에 필요한 물자들을 공급했다. 이른바 베를린 공수(Berlin airlift·空輸)가 시작됐다. 1000여 대의 수송기를 동원해 매일 2000t의 물자를 실어날랐다. 한편으로는 소련과 동유럽권에 금수조치를 취하면서 결국 10개월여 만인 1949년 5월 4일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풀게 된다.
 
  이처럼 베를린은 자본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 그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베를린은 2차대전 이전 독일의 최대도시로서 군사·경제의 중심지였고 소련과 동구권, 나아가 서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모스크바와 바르샤바, 부쿠레슈티 등 소련과 위성국가 주요 도시를 잇는 전화와 전보는 모두 베를린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한마디로 통신 허브였기 때문에 베를린 터널 작전, 즉 오퍼레이션 골드가 탄생한 것이다.
 
 
  “하나님도 도청하라”
 
  베를린 터널 작전을 구상한 것은 한국전이 한창인 1951년 무렵이다. 이때는 소련이 군사작전 등 군부가 사용하던 모든 통신을 무선에서 암호화시킨 유선통신으로 변경하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CIA는 전화 케이블만 도청할 수 있다면 소련과 위성국가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동구권 공산화에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CIA가 베를린 지역의 통신망을 조사한 결과 마침 소련 등의 국제전화가 모이는 곳이 베를린의 미국 점령 지역 바로 맞은편 소련 점령 지역이었다. 거리는 600m. 어떻게 이 전화라인에 접근하느냐가 문제였고 지하에 케이블을 매설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방법의 하나로 검토했다. CIA의 결정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터널을 뚫으라”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에게도 와이어(wire·전선)를 걸어라”는 정보기관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즉 동베를린의 관문국을 거치는 모든 전화라인을 통째로 미국 측 지하 케이블에 연결한다는 것이다.
 
 
  CIA, MI6의 빈 도청 작전에 자극받아
 
베를린 터널 안에 설치해 놓은 도청 시설.
  이때 오퍼레이션 골드의 모델이 됐던 작전이 오퍼레이션 실버, 이른바 MI6의 빈 도청 작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도 베를린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분할점령 지역으로 전 세계 스파이들이 총집결한 지역이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납치, 살인 등이 횡행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MI6 지부장이던 피터 런(Peter Lunn)은 1949년 어느 날 소련과 동구권의 국제전화 케이블이 한데 모이는 지점을 발견했고 터널을 파서 전화를 모두 도청하기로 했다. 피터 런은 영국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출신으로 배짱이 두둑하기로 알려진 인물이었고 그 뚝심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빈의 한 상점 지하에서 소련 점령 지역 국제전화 케이블까지는 약 70피트. MI6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약 20m의 터널을 파서 도청에 성공했다.
 
  이 작전과 관련해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터널 시작지점인 상점의 성공스토리다. 이 상점은 홈스펀이라는 모직 양복으로 잘 알려진 ‘해리스 트위드(Harris Tweed)’ 의류를 파는 옷가게였는데 작전을 위해 매입, 빵집으로 위장했다. 그런데 도청 터널을 숨기기 위해 위장용으로 세웠던 ‘프런트 컴퍼니’인 이 위장 빵집이 항상 손님으로 넘쳐날 정도로 너무나 장사가 잘됐고 결국 원활한 도청 작전을 위해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이 오퍼레이션 실버 작전은 1955년 오스트리아가 주권을 회복할 때까지 계속한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그렇다 보니 CIA는 ‘빈에서 영국도 성공했는데 우리가 못해, 미국이 못한다고, NO, 무조건 뚫자’ 이렇게 해서 오퍼레이션 골드가 탄생했다.
 
 
  CIA, 통화 도청 가능 확인
 
  CIA는 ‘무조건 뚫고 본다’는 대원칙을 정하고 즉각 가능성 검토에 들어갔다. 지하 케이블을 깐다면 가장 안정적으로 도청이 가능하겠지만 비화기(祕話機)를 사용한다면 과연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CIA 통신담당 책임자가 곧바로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했다. 오퍼레이션 실버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실제로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과 영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부분의 정보를 공유하는 혈맹이었다. 쑥떡같이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양국 정보기관도 찰떡궁합이었다.
 
  CIA 통신 책임자는 빈의 도청 터널을 방문한 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 측 통화를 도청해 봤더니 미국 암호장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미국이 비밀전화를 할 때 비화기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도청을 피했는데 영국 MI6가 개발한 간단한 방법으로 비화기의 에코를 제거했더니 모든 내용이 뚜렷하게 들렸다. 미국은 즉각 비화기 등을 교체하는 소동을 벌였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 측의 문제점을 파악하면서 의외로 큰 성과를 올리게 된다.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 측 암호장비도 똑같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CIA 통신 담당자는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그렇다면 소련 전화 케이블만 따낼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때만 해도 영국은 미국의 베를린에서 소련 통화를 도청하려는 구체적 계획은 몰랐지만 결국 미국은 오퍼레이션 골드 실행 직전에 영국에 모든 계획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하게 된다.
 
  CIA는 통신 담당자로 하여금 도청의 기술적 문제를 검토하게 함과 동시에 터널에 대해서도 타당성 검토에 들어갔다. 1951년 초 CIA 해외작전담당 부국장은 CIA 통신국 토목 담당자에게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터널을 파는 것이 가능한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답변은 간단했다. ‘전 세계 어디든 비밀터널을 파는 것이 가능하다. 단 터널의 규모에 따라 시간과 비용이 더 들 뿐이다.’ 즉 100% 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이 토목 담당자는 즉각 해외작전국으로 전출돼 베를린 터널의 공학적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이처럼 소련 점령지 아래까지 무조건 터널을 뚫으라는 지상 명령하에 기술적 타당성 검토와 함께 구체적 계획이 하나하나 짜 맞춰질 때 또 하나의 작전이 감행됐다. 과연 동베를린을 통과하는 소련 전화와 전보들은 얼마나 가치 있는 정보인지를 평가하는 일이었다. 즉 영양가가 있는 ‘쫄깃쫄깃한’ 정보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동베를린 전화국 직원을 포섭했다. 1953년 1월 어느 날 밤, 그 직원이 근무하는 시간인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의 소련 통화를 도청했다. 도청한 테이프를 분석한 결과, 독일 주둔 소련군 배치 명령이 녹음되는 등 매우 양질의 정보가 오갔음이 드러났다. 그 뒤 기회가 될 때마다 잠깐 잠깐씩 6개월간 수시로 도청했다. 가슴 졸이며 실시한 이 도청 작전 결과는 대만족,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정보임을 확인했다.
 
 
  KGB 이중간첩에 작전 노출
 
  그해 8월 앨런 덜레스(Allen Dulles) CIA 국장이 베를린 터널 작전의 마스터플랜 수립을 지시했다. CIA는 터널을 뚫는 건축기술, 전화 케이블을 도청하는 기술, 터널 공사 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위장전술 등 다양한 계획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CIA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터널 도청 작전을 펼치고 있던 영국정보기관 MI6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1953년 10월 22일 런던의 한 안가(安家)에서 미·영 양국 정보기관의 회의가 열렸다. CIA에서는 베를린 주재 CIA 지부장인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CIA 암호 담당자로 덜레스 국장 자문역이던 프랭크 로(Frank Rowett), 토목 담당자 등이, 영국 MI6에서는 부국장 조지 영(George Young), 베를린 지부장 피터 런, 한국전의 영웅 조지 블레이크(George Blake) 등, 모두 9명이 참석, 상세한 계획이 논의됐다. 빈 터널 작전, 즉 오퍼레이션 실버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던 MI6 빈 지부장 피터 런도 때마침 베를린 지부장으로 옮겨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이때 회의의 기록을 담당했던 사람이 블레이크였다. 그는 KGB의 이중간첩이었다(자세한 내용은 뒷부분 참조). 바로 이날 회의를 기점으로 소련 KGB에 모든 정보가 노출된다. 오퍼레이션 골드는 시작 전부터 모든 것이 KGB에 환하게 노출된 작전이었지만 터널이 발각된 1956년은 물론 1961년까지도 CIA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CIA와 MI6가 KGB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양국 정보기관은 10월 회의에 이어 12월 15일, 17일, 18일 연거푸 회의를 열고 터널 파기에 골몰했다. 사실상 공동작전이 된 것이다. 터널의 공학적 측면을 담당했던 CIA 토목 담당자는 해외작전국으로 배속된 직후부터 1948년 건설된 맨해튼 배터리파크와 브루클린 남부를 잇는 브루클린-배터리 터널을 방문해 공법을 연구하는가 하면 워싱턴DC의 터널들에 대한 연구 등을 토대로 요원들이 도청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최소 직경 2m의 터널이 필요하다고 결론 냈다. 미·영 회의에서 이 토목 담당자는 터널의 구조적 측면을 계산하는 방법을 설명했지만 참석자들은 그 계산 방식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어떻게 뚫으면 좋은지 결론을 말하라는 분위기였고 이 토목 담당자는 직경 2m 터널을 뚫되 강철튜브 형태로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영국 MI6는 콘크리트 터널을 주장, 갑론을박 끝에 강철튜브, 즉 거대한 강철관 형태의 터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1954년 최종 작전 승인
 
베를린 지하터널의 약도.
  미·영 회의를 마친 CIA는 베를린 터널 작전 최종계획서를 수립했고 1954년 1월 20일 앨런 덜레스 국장이 이를 최종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작전을 본격 가동했다. 하비 CIA 베를린 지부장이 사실상 실무를 총괄했다. 그래서 이 베를린 터널을 하비홀로도 부르는 것이다. 터널 시작점을 어디로 할 것인지를 두고 영국 점령 지역 한 곳과 미국 점령 지역 한 곳 등 두 곳을 검토했고 결국 미국 점령 지역의 한적한 농촌마을로 결정했다. 미국과 영국의 역할도 분담했다. 미국은 터널을 뚫고 영국은 터널 끝 부분에 동베를린 전화회선과 연결하는 수직갱도와 도청장치 등을 운용하는 도청실을 만들기로 했다. 물론 도청내용은 공유하기로 했다.
 
  CIA는 미국 점령 지역인 베를린 러도우에 레이더 기지를 만든다고 둘러댔다. 동베를린의 유일한 공항인 쇠네펠트 공항이 터널예정지 인근에 있었기에 공항을 감시할 레이더 기지를 만든다고 소문을 퍼트렸던 것이다. 터널의 시작은 러도우의 미군기지, 끝 지점은 동베를린의 알트글리에니케였다. 공사도 아예 독일 업자에게 맡겼다. 그래야 소련의 의심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1954년 8월 이중펜스가 쳐진 거대한 창고 형태의 레이더가 완성됐고 독일 업체는 열쇠를 넘겨주고 떠났다. 창고 꼭대기에는 감시초소가 설치됐다. 이 감시초소에서 터널 굴착 지역 소련군이나 동독군의 동태를 24시간 감시했다. 또 소련 측도 이 레이더 기지를 24시간 감시했기 때문에 미국은 적절한 볼거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즉 소련 측이 터널 굴착을 눈치 못 채도록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만한 이벤트를 준비했던 것이다.
 
  독일 건설업자가 떠난 뒤 8월 18일 본격적인 터널 굴착 작업을 시작했다. 비밀스런 작전에 민간인을 투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미 공병대를 동원했다. 정확한 경로로 터널을 굴착하기 위해서는 측량 작업이 필수였다. 또 목표지점 인근 200여m 지점에 공동묘지가 있어서 자칫하면 묘가 뒤집히는 ‘대형사고’도 우려했다. CIA는 동독첩자를 시켜 터널 끝 지점에 야구공을 갖다놨다. 야구공을 보고 측량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걸. 이 지역을 순찰하던 동독 경비병이 ‘친절하게도’ 야구공을 주워서 이 첩자에게 던져주는 바람에 야구공 작전은 실패했다. CIA는 ‘아 야구공이나 가벼운 것들은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이번에는 다른 첩자를 시켜서 펑크 난 대형 타이어를 갖다놨다. 동독 경비병은 타이어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성공이었다. 측량을 마친 공병대는 140m 길이의 터널모형까지 만들어가며 도상연습을 한 뒤 굴착에 들어갔다. 3인 1조로 24시간 동안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터널 입구는 창고 형태의 레이더 기지 지하였다. 터널은 창고 지하에 수직갱도를 만들어 지하 6m 지점까지 내려간 뒤 수평으로 파 들어가 소련과 미국 경계선을 지나 도청 목표물인 소련과 동독 전화회선이 있는 곳까지 450m나 이어졌다. 당초 32피트 정도, 즉 약 10m 깊이에서 지하수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조금 깊이 파려 했지만 약 6~7m 지점에서 지하수가 나와 조금은 얕게 작업이 이루어졌다.
 
 
  일반화물열차로 부품 운반
 
베를린 터널 작전 CIA 비밀 문건.
  터널은 지상을 기준으로 ‘U’ 자형이었다. 창고 지하에서 수직갱도로 내려가서 수평터널 시작부터 중간지점까지는 약간 아래로 기울어지도록 했고 중간지점부터 동베를린 목표지점까지는 약간 위로 기울어지도록 설계했다. 터널의 소련 쪽 끝에는 도청장비가 있는 도청실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수직갱도를 만들어 전화 케이블과 연결시켰다. 이 수직갱도의 끝은 동베를린 한 고속도로의 지하 27인치, 즉 지하 69cm 지점이었다. 더구나 공항으로 연결된 도로였기 때문에 60t 무게 탱크가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튼튼한 수직갱도를 만들었다. 터널의 중간 부분이 가장 낮고 양쪽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형태로 설계된 것은 비가 오거나 지하수가 스며들 경우 가운데로 모여서 배수가 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널의 깊이가 6m다, 7m다 각기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가운데로 갈수록 다소 깊어지기 때문이다.
 
  터널의 흙을 파낸 뒤 과연 어떤 식으로 붕괴되지 않도록 안전성을 확보하는가에 대해 미·영 양국이 격론을 벌였고 강철관을 어떻게 넣느냐도 문제였다. 강철관을 통째로 넣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직경 2m의 강철관을 5개 부분으로 쪼개서 조립하는 방법이었다. 원통형의 강철관을 5개 부분으로 나누고 각 이음매 부분에 물이 새거나 소음 발생을 막기 위해 고무 코팅을 한 뒤 하나하나 이어서 2m의 원통을 완성하는 것이다. 특히 터널 벽에 해당하는 4번째 강철라이너에는 구멍을 내서 그 구멍 사이로 시멘트와 모래를 반죽한 모르타르를 주입하고는 닫아버리는 방법으로 안정성을 강화했다. 이 강철라이너는 미국에서 생산해 함부르크까지 운송한 뒤 철도로 베를린으로 옮겼다. 소련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 평범한 화물로 위장, 경비병도 없는 일반화물열차를 이용했다.
 
 
  화물로 위장해, ‘파낸 흙’ 실어날라
 
  위장 레이더 기지 지붕 위 초소에서는 24시간 터널 굴착 경로를 주시했다. 동독 경비병들이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주요 도로를 따라 터널을 굴착했기 때문에 경비병들이 나타나면 긴급연락을 통해 굴착을 중단했고 또 물이 차기 시작하면 두 대의 펌프를 통해 물을 퍼낼 때까지 공사를 중단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지만 진척이 더디고 돈이 더 들어갈 뿐 기술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흙을 파내고 1피트씩 전진할 때마다 강철관을 하나씩 이어나갔다. 터널 굴착에서 나오는 잔토를 위장 레이더 기지로 빼내기 위해 터널 안에는 레일과 나무수레를 설치했다. 소음을 줄이기 위해 나무수레를 사용한 것이다. 1955년 2월 28일 목표지점 아래까지 터널을 완성했다. 약 6개월 만에 450m 터널을 완성했으니 하루에 2.5m 정도씩 흙을 파내고 원통형 강철라이너를 연결한 것이다. 이때 동원한 강철라이너만 무려 125t에 달했고 파낸 흙이 3100t이나 됐다. 이 잔토의 처리가 또 문제였다. CIA는 이 3100t의 흙을 갖가지 상표를 붙인 박스에 넣어 마치 각각 다른 물건인 양해서 실어날랐고 아예 미국으로 보내는 화물로 위장, 미국 본토까지 옮겼다. 한번은 시카고에 도착한 잔토박스가 볼티모어에 도착하지 않아 이를 찾느라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 물샐틈없는 준비를 한 것이다.
 
  터널 내 양옆에는 모래를 채운 샌드백을 쌓았다. 터널 굴착에서 나오는 잔토의 8분의 1을 샌드백을 채우는 데 사용했다. 잔토를 재활용한 셈이다. 우리가 홍수가 날 경우 임시로 둑을 쌓을 때처럼 마대라고 부르는 자루에 모래를 채워서 차곡차곡 쌓음으로써 터널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샌드백 위에 직경 18인치, 45cm 크기의 파이프를 설치했고 그 안에 소련 전화 케이블과 연결할 전송라인을 넣었다.
 
 
  하드웨어 미국, 소프트웨어 영국
 
영국 정보기관인 MI6 본부 건물.
  터널을 완성한 뒤 다음 단계는 도청실을 만들어 도청장비를 설치하고 도청실과 소련·동독의 전화회선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에는 영국 MI6가 전문성을 갖고 있었다. MI6는 3월 10일부터 20일간 공사 끝에 3월 29일 도청실과 도청장비 설치를 마쳤다. 적지 않은 도청장비 또한 영국제였다. 말하자면 베를린 터널 작전은 하드웨어는 미국이, 소프트웨어는 영국이 담당한 셈이었다.
 
  도청실 윗부분에는 엄청난 열과 압력에 견딜 수 있는 철제문을 설치했으며 이 문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열 수 없도록 설계했다. 특히 도청실 윗부분 수직갱도 표면에는 경고문까지 부착했다. 경고문 문구는 ‘이 문을 여는 것은 사령관 명령으로 금지돼 있음. 동독 주둔 소련사령관 백’이었다. 또 2m 직경의 도청실은 한쪽으론 장비를 세워놓았고 한쪽 끝엔 도청담당 직원이 앉을 수 있는 작은 책상을 놓았다. 도청실은 물과 습기에 민감한 장비들을 많이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습기가 도청 작전의 가장 큰 적이었다. 물은 터널 중간으로 모이도록 설계했고 양수기로 퍼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도청 작업에 투입한 요원들의 호흡에 의해 생기는 습기는 문제였다. 이를 줄이기 위해 특수 장비를 설치했고 수직갱도 윗부분과 도청실 사이에는 진공층을 만들었다. 또 온도와 습도를 정밀체크, 조금이라도 이상이 발견되면 작업을 중단하고 도청실을 특수장비로 환기시키기도 했다.
 
 
  2~3명이 24시간 도청
 
  드디어 5월 11일 3개의 케이블 중 2개의 케이블로 도청을 시작했다. 동베를린 관문국을 통한 소련과 동독의 통화는 물론 주요 소련 위성국가와의 통신, 일부 서방국가의 전화와 전보 등을 모두 엿들었다. 8월 3일에는 마지막 3번째 케이블도 연결했다. 당초 계획대로 3개 케이블에 대한 도청을 시작한 것이다. 약 600개에 달하는 도청 녹음장치를 일제히 가동했다. 도청 작전의 성공적인 스타트였다. 3개 케이블에 연결한 전화채널은 모두 1200개, 그러나 항상 500개 정도의 채널을 사용했고 나머지는 빈 회선이었다. 전보채널도 28개를 항상 가동했다.
 
  이 도청실에서는 항상 2~3명이 한 조로 24시간 일했다. 도청이 전자동으로 이뤄졌지만 도청실에 요원이 상주했던 것은 수시로 중요회선을 들으며 이른바 ‘핫(hot)’한 정보가 있을 때 즉각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CIA가 이 작전을 영국에는 알리면서도 미 국가안보국 NSA에는 철저히 숨겼다는 것이다. 결국 CIA는 도청을 담당할, 러시아어와 독일어에 능통하면서도 신원이 확실한 인력을 찾다가 어쩔 수 없이 NSA(미국 국가안보국)에 도움을 요청, NSA 언어 전문가들을 도청 업무에 투입했다. CIA는 협조를 구하면서도 ‘차단의 원칙’ 등을 거론하며 도청정보에 대한 100% 공유를 거부하다 나중에 모든 정보를 공유했음이 NSA 비밀문서를 통해 드러난다.
 
 
  도청 엄청나 ‘세계 테이프 시장 휘청거릴 정도’
 
  엄청난 양의 도청정보는 모두 자기(磁氣)테이프에 녹음했다. 아주 옛날식 녹음기를 연상하면 된다. 카세트테이프 녹음기의 원조격으로 거대한 릴에 자기테이프를 거는 녹음장치를 통해 녹음한 것이다. 그 양이 너무나 많아 전 세계 자기테이프 시장이 휘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보는 하루 도청한 메시지만 프린트해도 그 양이 4000피트에 달했다. 폭 10피트, 길이 15피트로 쌓으면 높이 8피트에 달하는 양이었다. 도청은 표면상 너무나 순조로웠다. 처음에 긴장했던 도청요원들도 나중에는 도청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면서 헤드폰으로 도청상황을 체크할 정도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베를린 터널 작전을 기록한 CIA 비밀문서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당시에 이미 자기테이프에 녹음한 전화통화를 문자로 자동으로 변환하는 기술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상당부분 완성했다는 것이다. 요즘 시속 100km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을 도청 차량이 뒤쫓아가며 도청하면 곧바로 도청내용이 차량에 장착된 프린트를 통해 인쇄돼 나올 정도로 도청기술이 발달했는데 이러한 기술이 이미 60년 전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작전을 통해 CIA가 도청한 것은 전화, 즉 음성통신과 전보, 즉 문자통신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애당초 전화통화는 런던에서, 전보는 워싱턴DC에서 분석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매일 베를린에서 전화통화 녹음테이프는 영국으로, 전보통신 녹음테이프는 워싱턴으로 전달했고 워싱턴 분석센터는 CIA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다 뒤늦게 합류한 NSA가 운영했다.
 
  중간중간 어려움이 있었지만 도청은 무리 없었다. 그러나 도청 작전이 시작된 지 채 1년도 안 된 1956년 4월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된다. 4월 17일 베를린에 억수 같은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동베를린의 전화와 전보 케이블도 물에 잠기기 시작했고 일부 회선에 장애가 발생했다. 특히 동독 주재 소련군사령관의 전화라인 등 소련군 지휘부의 전화가 불통됐고 동베를린과 모스크바 간 직통으로 연결된 공중 조기경보시스템도 두절됐다. 상황이 심각했다. 소련의 통신부대와 동독 전화국 직원들이 밤을 새우며 복구작업에 나서 일부 회선은 복구했다. 문제는 베를린 터널 종착지점에서 불과 2km 떨어진 지점의 케이블이었다. 임시개통했지만 이 케이블라인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혹시 이 케이블을 수리하다 도청 사실이 발각될까 우려됐고 도청실 근무자들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예의주시했지만 4월 21일 오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마침내 도청 작전 11개월 11일째의 밤인 4월 21일 밤 운명적인 순간을 맞게 된다. 공중 조기경보시스템 라인 상태가 계속 좋지 않았기 때문에 22일 아침까지 별도라인을 가설하기로 결정했다는 통화가 도청됐다. 그러던 중 22일 새벽 0시50분 소련통신부대와 전화국 직원들이 베를린 터널 종착지점 바로 윗부분으로 몰려들어서 이 일대를 3피트에서 5피트 간격으로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발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소련, 자국 비밀통신시설로 오해
 
  새벽 2시쯤 소련 측이 도로에서 불과 27인치 아래, 즉 지하 69cm 지점에 있던 터널 수직갱도 윗부분을 발견했다. 수직갱도 바로 아랫부분이 도청실이었다. 그래도 도청실 요원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수직갱도 윗부분의 문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 없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CIA는 수직갱도 주변에 여러 개의 고성능 마이크를 미리 설치해 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 수직갱도 주위의 움직임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도청실 요원들은 이 마이크를 통해 지상의 상황을 낱낱이 파악한 것은 물론 모든 대화를 녹음까지 했다. 소련 측의 발굴상황이 미국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던 것이다.
 
  소련통신부대와 동독 전화국 직원들은 거대한 맨홀을 연상케 하는 단단한 철 구조물을 발견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수직갱도 윗부분이 발견된 지 10분쯤 지난 2시10분, 러시아인들의 대화가 마이크를 통해 들려왔지만 터널이나 도청을 의심하는 내용은 없었다. 이들은 드릴로 수직갱도 윗부분에 작은 구멍을 내고 들여다 봤지만 내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소련통신부대 장교들도 맨홀이라고 결론을 내는 분위기였다. 새벽 2시30분 이들이 맨홀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도 일단 공중 조기경보시스템부터 복구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 장교가 왜 공중 조기경보시스템 라인이 계속 문제를 일으킬까 의문을 제기했지만 다른 장교들이 이를 묵살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을 때의 다급함과는 거리가 먼 편안한 음성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표면적으로 소련은 도청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새벽 2시50분 정체불명의 소련 장교가 현장에 도착했고 잠시 머물며 물끄러미 바라보다 사라졌다. 대화내용을 살펴볼 때 소련통신부대의 장교는 아니었다. 이때도 소련 측이 수직갱도 윗부분에 구멍을 뚫기 위한 작업을 계속했지만 내부에는 케이블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새벽 3시쯤 아침까지 결론을 미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3시20분 소련 장교는 2차대전 중 소련이 매설한 비밀통신설비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자신들이 파묻은 비밀장비로 생각했다. 아마도 수직갱도 윗부분의 경고문도 소련이 자신들의 장비로 착각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 문을 열지 마라’는 소련군 사령관 명의의 경고문이 있었으니 소련군의 판단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고는 3시30분 이 장교는 떠났고 그 이후 현장에서는 약 1시간30분 정도 아무런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소련군이 오고 있다”
 
  그러나 4시15분쯤 동독 주둔 소련군 장교들의 아파트에 갑자기 전화통화량이 늘어났고 날이 밝고 아침 7시가 되자 많은 장교가 현장으로 몰려왔다. 마침내 KGB 통신 담당자도 도착했음이 확인됐다. 혹시 부비트랩이 설치된 것은 아닌지 확인하라는 대화가 들려왔다. 사실상 베를린 터널이 발각된 것이다.
 
  낮 12시30분, 마침내 수직갱도의 맨 윗부분에 소련 측이 들어왔고 구멍을 넓히며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썼다. 오후 3시15분에서 30분 사이 단계적으로 전화라인 도청이 중단됐다. 도청 케이블을 소련이 잘라버린 것이다. 오후 3시35분 전보라인도 끊겼다. 그래도 수직갱도 주변의 마이크는 작동하고 있어 대화를 들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3시45분 마이크를 통해 들려온 대화는 절망적이었다. 마이크를 통해 미국이 작업상황을 체크하고 있음을 알아챘다는 대화가 들려왔다. 5분 뒤인 3시50분 마이크라인도 절단됐다. 11개월 11일간의 베를린 터널 작전이 마침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소련이 베를린 터널을 발견할 당시 마이크를 통해 녹음한 내용을 정리한 녹취록을 보면 일촉즉발의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CIA가 비밀해제한 이 녹취록에는 시간이 적혀 있지 않지만 현장에서 소련과 동독 군인들의 대화내용이 독일어와 러시아어로 기록돼 있고, 그 대화를 들으면서 CIA 도청요원들이 내뱉는 탄식 등도 그대로 담겨 있다.
 
  도청요원들은 ‘러시아말이 들린다. 소련군들이 온 것 같다’ ‘그들이 구멍 밖에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제발 뭐라고 말해봐라 이놈들아’라며 애타게 외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섞인 이야기도 하고 있다. 소련이 수직갱도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만큼 수직갱도의 윗부분을 사람이 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아놓았던 것이다.
 
 
  달아난 CIA 요원
 
舊 소련 KGB 건물.
  점점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가 절망적으로 바뀐다. 대화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 때는 ‘잘 안 들린다’고 하다가 ‘누군가 들어온 것 아냐’라고 말했고 ‘마이크를 발견한 것 같다’는 말이 이어졌다. 아마도 4월 22일 오후 3시15분 이후의 상황으로 추정된다. 곧이어 ‘선을 끊는 것 같다’고 말한 뒤 ‘마지막 하나 남은 마이크도 발견한 것 같다’ ‘끊었다’라고 탄식했고 조금 뒤 ‘모든 것이 끝났다’라는 말로 녹취록은 끝난다.
 
  과연 도청실에서 CIA 요원들이 언제 철수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녹취록으로 추정하면 마이크 선이 끊긴 뒤 도청요원들은 터널 속을 전력질주해서 미국 측으로 넘어왔다고 볼 수도 있고 이미 그 이전에 미국 점령 지역인 레이더 기지로 철수해 그곳에서 소련 측 대화내용을 듣고 있었을 수도 있다.
 
  CIA비밀문서가 아닌 소련 측 언론에는 아침 6시께 수직갱도 윗부분의 작은 구멍을 통해 도청요원들이 헤드폰을 끼고 도청하는 모습과 녹음장비,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았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작업자들이 헤드폰을 벗어던지고 터널의 미국 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또 KGB 요원들이 오후 3시 이후 도청실에 진입, 터널 속으로 달려갔지만 중간지점에서 ‘이 선을 넘으면 미국 관할구역입니다’라는 표지판과 마주쳤다고 전하기도 했다.
 
  어쨌든 도청요원들은 소련군이 바로 머리 위에서 드릴로 파 내려 올 때도 한동안 미동도 않고 근무를 계속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들의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매일 도청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도 없이 이 터널을 지나다녔을 터인데, 마지막 탈출 당시 그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죽을 힘을 다해 달렸는지, 아니면 ‘제임스 본드’처럼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유유히 걸어서 미국 측으로 넘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들에게도 450m의 터널이 이날만큼은 4.5km로 느껴졌을 것이다.
 
  CIA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초 미국이 이 작전 수립과 함께 계획한 비상시 행동요령은 터널이 발각되면 첫째, 미국은 공개적으로 부인하며, 둘째 적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 수직갱도 위편 문을 봉쇄하고, 셋째 미국과 소련 점령 지역 중간지점에 폭약을 설치, 터널을 폭파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실제로 터널을 폭파하려 했으나 찰스 대서 베를린 주둔 미군사령관이 소련인이 희생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고 반대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한다.
 
  1955년 5월 11일부터 1956년 4월 21일까지 11개월 11일간 수행됐던 베를린 터널 작전. ‘오퍼레이션 골드’라고 알려진 이 도청 작전을 통해 입수한 정보는 그야말로 금쪽같은 정보라는 게 미국 측 평가다. CIA나 NSA 두 기관 모두 소련의 핵무기 관련 정보와 동독 내 소련 우라늄 광산의 채굴량 등 운영실태, 독일 주둔 소련군의 병력 이동 및 작전명령, 동독은 물론 서독 내 KGB의 위장사무실, 그리고 소련 등이 입수한 서독 정보기관의 활동내역 등도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전혀 입수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양질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소스였고 특히 유럽에 대한 소련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 CIA비밀문서의 기록이다. 또 소련이 스탈린 실각 뒤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한다는 등 소련체제 관련 정보도 도청 작전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초 약속대로 전화는 영국, 전보는 미국에서 맡아서 분석했다. 이들 분석센터의 처리량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CIA, 670만 달러 투입
 
  영국 런던의 전화통화분석센터는 한때 최고 인원이 317명에 달했다. 전체 도청기간 동안 소련의 전화통화 녹음테이프는 2시간짜리 릴로 2만 개에 달했고 무려 36만8000건의 대화를 녹음해 완벽하게 녹취록을 작성했다. 동독의 전화통화는 2시간짜리 릴로 1만3500개. 이 중 중요한 통화 7만5000건에 대한 녹취록을 만들었다. 따라서 영국에서 작성한 녹취록만 44만3000개에 달했다.
 
  워싱턴DC의 전보분석센터에선 한때 350명이 근무했다. 소련에서 발송한 전보는 6시간짜리 릴로 1만8000개, 동독에서 발송한 전보 등은 6시간짜리 릴로 1만1000개에 달했다. 특히 이 6시간짜리 테이프는 녹음방식을 달리하면 36개 트랙으로 녹음이 가능해 최대 216시간까지 녹음할 수 있다고 한다.
 
  1956년 4월 22일 도청 작업을 중단했지만 그동안 도청한 테이프를 분석해 녹취록을 만드는 작업은 2년6개월 뒤인 1958년 9월 30일까지 계속됐다. 도청 작업을 통해 첩보가 아닌 정식 정보보고서로 만들어진 문서도 1750개나 됐다.
 
  CIA는 1956년까지 이 작전에 투입한 비용을 670만 달러라고 밝혔다. 터널 길이가 450m이므로 1m당 1만5000달러씩 투입한 셈이다. 이 돈을 미 정부가 화폐가치를 계산하는 방법인 소비자물가지수 인플레이션 계산방식(CPI inflation calculator)을 통해 2014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860만 달러에 달한다. 이는 1950년대 후반 시작한 U2기 정찰 작전과 관련한 U2기 6대 제작비용이 2200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U2작전 이전 미국의 최대규모 첩보작전이었던 셈이다.
 
 
  한국 전쟁과 소련 이중간첩
 
  여기까지가 1956년 터널 발견 때까지의 스토리다. 그러나 5년 후에는 전혀 다른 스토리가 밝혀지면서 전 세계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란다.
 
  1961년 초 영국 MI6에서 활동하던 소련 이중간첩이 체포됐다. MI6 요원 블레이크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MI6 요원 400명의 신상기록을 KGB에 넘겼고 이에 따라 MI6 요원 42명이 KGB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독일 내 영국첩보망이 송두리째 노출된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블레이크는 냉전시대 최대의 이중간첩으로 불리는 것이다. 1961년 5월 그는 영국 역사상 최대 형량인 42년형을 선고받았고 재판과정에서 그가 소련에 충성하게 된 동기가 밝혀졌다. 놀랍게도 그 배신의 씨앗은 한국전에서 잉태한 것이었다.
 
  192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 블레이크는 10대 때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18세 때 나치 치하의 네덜란드를 탈출, 런던으로 온 뒤 영국 해군에서 복무하다 2차대전 중 MI6 요원으로 변신한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의 함부르크대사관에 파견돼 U보트 선장에 대한 심문을 맡기도 했으며, 1948년 말 한국에서 활동할 영국첩보망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받고 서울의 영국대사관에 파견된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 발발과 함께 북한에 체포돼 3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고 그때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읽은 뒤 자발적으로 소련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으로서 우의를 다졌던 미국과 소련이 사상 처음으로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한국전에서 자유진영을 배신하는 최대의 스파이가 탄생했고 후일 이역만리 베를린에서 펼쳐진 미국과 영국의 도청 작전을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한 영국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의 참상을 보면서 나는 잘못된 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 무엇인가가 바로 소련 KGB의 스파이가 되는 것이었다. 한국전 휴전과 함께 그는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일약 전 국민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다시 MI6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중간첩으로 나서게 된다.
 
  1953년 10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가면 CIA가 베를린 터널 작전을 위해 MI6와 공조하기 위해 런던에서 연 첫 회의에 참석했던 9명 중 한 사람이 바로 블레이크였다. 한국전이 끝난 지 3개월도 안 됐으니 블레이크가 MI6에 막 복직한 직후였다. 특히 그는 그날 회의에서 기록을 맡았고 CIA 요원들은 유난히 꼼꼼하게 모든 것을 메모하던 영국요원으로 기억했다. 당시 그는 런던에서 막 KGB 요원을 접촉, 연결망을 구축하던 시기로, 바로 이때 베를린 터널 작전계획을 유출했던 것이다. 그는 1990년 출판한 자신의 책 《선택의 여지가 없다(No other choice)》에서 ‘미·영 회의 이틀 뒤인 10월 24일 자신이 터널모형까지 그려가며 모든 정보를 KGB에 넘겼다’고 고백했다. 시쳇말로 ‘잉크도 채 안 마른’ 작전문서를 적에게 고스란히 넘김으로써 KGB 이중간첩으로서의 첫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또 베를린 터널뿐 아니라 빈 터널의 존재도 KGB에 낱낱이 고했으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이중첩자였다.
 
 
  망명 이중간첩이 KGB에 제보
 
  베를린 터널 작전이 1954년 1월 덜레스 CIA 국장의 승인을 받고 1954년 8월 터널 굴착에 들어가고 1955년 5월 도청을 시작했음을 감안하면 KGB는 CIA가 베를린에 터널을 파기도 전부터 베를린 도청 작전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베를린 터널 작전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그 뒤 1959년 무렵 CIA는 미국에 망명한 KGB 요원으로부터 영국 정보기관 내에 KGB 이중간첩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고 이를 영국에 통보, 2년간의 수사 끝에 1961년 블레이크를 체포한다. CIA는 막상 KGB 이중간첩이 베를린 터널 작전을 논의하던 영국 측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고 5년 전 터널 발각 당시를 다시 조사하게 된다. CIA는 1953년 10월 회의 직후 블레이크가 이 정보를 KGB에 넘겼고 영국에 있던 KGB 요원은 1954년 2월 이후 이 정보를 KGB 본부에 보고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블레이크에 의해 베를린 터널이 발각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CIA는 1956년 4월 KGB가 터널을 발견한 것은 블레이크의 제보보다는 집중호우에 따른 우발적인 사건으로 KGB가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도청으로 입수한 모든 정보도 KGB가 의도적으로 흘린 잘못된 정보가 아니라 ‘진짜배기’ 정보라고 결론 냈다. 소련언론이 소련이 도청을 미리 알고 정보가치가 없는 통화, 가십성 통화만 흘려보냈다고 보도까지 했지만 CIA는 아전인수격으로 ‘성공’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우연을 가장해 터널 급습
 
  하지만 소련이 블레이크를 보호하기 위해 우연을 가장해 터널을 발견했다는 서방정보기관의 분석이 더 많았다. KGB는 베를린 터널 작전을 알고서도 블레이크를 보호하기 위해서 터널 굴착을 저지하지 않고 특별 감시조를 구성, 조용히 그러나 꼼꼼하게 감시만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블레이크는 CIA가 터널을 본격적으로 파기 시작하던 1955년 독일 베를린에 파견된 뒤 독일에서 활동하던 MI6 비밀요원의 신상명세를 KGB에 무더기로 건네고 있었다. 소련이나 KGB로 봐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바로 블레이크였다. 소련 수뇌부는 베를린 터널 작전 정보를 극비로 취급하고 심지어 동베를린 주재 KGB 지부장이나 소련 주둔군 사령관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1956년 봄, 베를린 터널 작전이 소련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소라고 판단, 4월 집중호우가 내리는 시기를 택해 우연을 가장, 터널을 습격하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터널을 발견한 시기는 불가닌 수상과 흐루쇼프 공산당 제1서기가 영국을 방문하던 때였다. 흐루쇼프는 영국으로 떠나면서 최대한 우연으로 가장하고 발견 뒤에는 서방언론을 대대적으로 초청, 영국보다는 미국 측을 집중 비난하도록 언론을 통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소련 정상의 영국 방문기간은 1956년 4월 18일부터 4월 27일까지였다. 특히 터널이 발견된 1956년 4월 22일은 흐루쇼프가 영국 버킹엄궁에서 열린 공식 환영만찬에 참석하던 날이었다. 흐루쇼프는 영국에 대해 단 한마디의 비난도 없이 끝까지 시치미를 떼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영국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대신 다음날 서방언론들이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던 것이다. 소련은 기자들이 동베를린 쪽에서 터널을 통해 서베를린까지 가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취재를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의 보도다.
 
  이처럼 블레이크는 서방에는 암적인 존재, 소련으로서는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스토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5년 뒤인 1966년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한다. 42년형을 선고받고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영국 웜우드 스크럽스(Warmwood Scrubs)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블레이크가 1966년 10월 22일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영국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쳤지만 결국 그를 찾지 못했다. 그는 그해 12월 말 영국 추적을 따돌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모스크바에 나타났다. 그가 어떤 경로로 탈출했는지는 22년간 베일에 싸여 있다 1988년에야 전모가 드러났다. 반핵운동가였던 마이클 랜들(Michael Randle) 등 동료죄수 3명이 블레이크에게 선고된 42년형은 ‘비인간적’인 처사라며 그의 탈옥을 도왔고 블레이크는 탈옥 뒤 사전에 랜들 등이 준비했던 런던 교외의 주택 등을 옮겨다녔다. 결국 랜들은 블레이크가 소련으로 가는 것만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방법을 강구했다. 1966년 12월 랜들이 가족과 함께 캠핑카를 타고 동독으로 여행을 가는 것처럼 꾸몄고, 그 차 밑바닥에 비밀공간을 만들어 블레이크를 눕혔다. 서독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았지만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결국 블레이크는 동독 잠입에 성공했다. 이 캠핑카에는 랜들의 어린 자녀들이 타고 있었지만 그는 가족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가족은 자신들의 의자 밑에 웬 낯선 남자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적을 속이려면 나 자신부터, 내 주위부터 속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대목이다.
 
 
  러시아에서 영웅 대접
 
  그 뒤 블레이크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 소련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85세 때인 지난 2007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우정의 메달’을 받았다. 현재도 모스크바 근교 KGB의 안전가옥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지금도 종종 주요 언론을 통해 그의 근황이 보도될 정도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냉전시대 미·소 첩보전쟁의 물줄기를 바꾼 KGB 최대 이중간첩이 한국전을 통해서 탄생했음은 한국전이 세계사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엄청난 비밀을 가진 베를린 터널의 동쪽 부분은 1956년 소련 발견 뒤 어떻게 처리됐는지 알 수 없지만 서베를린 쪽은 1997년 완전히 파헤쳐져 폐기처리됐고 그 일부분만 실물 그대로 옮겨져 베를린의 연합군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2년 전인 2012년 8월 베를린에서 150km나 떨어진 지점에서 베를린 터널과 똑같은 터널이 발견됐다. 강철튜브형의 터널이며 크기나 재료 등이 모두 똑같았다. 베를린 터널의 잔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먼 지역이므로 또 다른 터널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그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오퍼레이션 골드, 오퍼레이션 실버 등과 관련한 비밀문서들을 살펴보면 미국 CIA와 영국 MI6, 그리고 CIA와 NSA가 긴밀히 협조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보기관 간 치열한 자존심 대결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베를린 터널 작전은 골드, 빈 터널 작전은 실버라고 이름 붙인 것은 베를린 터널이 450m인 반면 빈 터널은 20분의 1도 안 되는 20m 길이의 ‘베이비’ 터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같은 이름은 미국은 금메달, 영국은 은메달이라는 미국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가 최고라는 것이다.
 
  영국은 미국과 달리 이 작전을 오퍼레이션 골드가 아닌 오퍼레이션 스톱워치라고 부르고 있다. 또 CIA가 영국 MI6와 협조해서 터널을 팔 때까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NSA는 이 작전을 오퍼레이션 리갈(regal)로 부르고 있다. CIA와 전혀 다른 작전명칭을 붙인 것이다. NSA는 우여곡절 끝에 이 작전에서 입수한 전보를 총괄분석하는 업무를 맡은 뒤 이들이 분석한 전보 관련 보고서는 ‘리갈’ 관련 문서라고 불렀고 NSA가 작전 전반에 대해 작성한 비밀문서의 제목은 ‘오퍼레이션 리갈’이었다.
 
  빈 터널 작전과 베를린 터널 작전은 한국전이 잉태한 KGB 이중간첩의 존재로 말미암아 태생적으로 실패가 예고된 작전이었다. 소련도 베를린 터널을 폭로하며 미국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키고 자신들의 승리를 자랑하려 했었다. 하지만 서방언론은 물론 일부 동구권 언론도 ‘미국이 용맹무쌍하고 그 기술력은 더욱 놀랍다’는 기사를 내보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 작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기상천외했고 미국 등 자유진영의 첨단 기술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스파이 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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