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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크릿파일

냉전시대 CIA 사상최대 비밀작전 프로젝트 아조리안

“해저 5000m 소련잠수함을 건져라”

글 : 안치용  在美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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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3월, 냉전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당시 태평양에서 미국과 러시아를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로 몰아넣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 골프2급 잠수함, K-129가 태평양 한복판에서 실종된 것이다. 핵탄두가 장착된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시스템으로 무장한 최신예 잠수함이기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 잠수함을 찾기 위해 미국과 소련 간의 피 말리는 신경전이 진행되고 실종 6년 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이맘때 미국이 5000m 해저에서 이 잠수함의 일부를 인양함으로써 사건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미국이 정확히 무엇을 인양했는지, 잠수함의 잔해라면 어느 부분인지조차 공개되지 않은 채 극비에 부쳐졌다. 지금까지 미 중앙정보국(CIA)이 공개한 비밀문서(Project Azorian-The story of the Hughes Glomar Explorer)는 단 하나. 군데군데 삭제된 50페이지가 전부였다. 그래서 ‘프로젝트 아조리안’에 대한 호기심은 갈수록 증폭되고 신비감은 더해만 갔다. 하지만 마침내 올 들어 미 국무부가 이 작전과 관련한 비밀문서 25건을 공개했고 판도라의 상자를 비집고 나온 속살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프로젝트 아조리안은 대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부분적 실패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냉전시대 미국 CIA 최대의 비밀작전이라는 ‘프로젝트 아조리안’의 실상을 밝혀 본다

⊙ 아조리안 비용 5억~8억 달러 소문은 허위, 실제 2억5000만 달러 투입
⊙ “아무리 무겁고 깊은 곳에 있더라도 들어올려라”
⊙ 냉전을 녹인 소련수병 장례식, 비디오 전달하자 적장 옐친도 눈시울 적셔
⊙ ‘미국은 무엇을 건졌는가’ 아직도 오리무중
⊙ 1991년 북한, 통일교 관련 의심 회사로부터 동일 형태 잠수함 고철로 매입

安致勇
⊙ 47세, 부산대 사회학과 졸업.
⊙ 재미(在美) 탐사보도전문기자, 시크릿오브코리아 블로그 운영.
⊙ 전 YTN 기자.
⊙ 저서: 《시크릿오브코리아》 《박정희 대미로비 X파일, 상하권》.
소련 잠수함 인양을 위해 특수제작된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호’ 실제 사진(왼쪽). 1974년 8월 10일 포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안보회의 회의록. 콜비 CIA 국장은 “소련잠수함 인양도중 집게가 손상을 입으면서 잔해 일부가 추락했다”고 보고했다(오른쪽).
  1968년 2월 말 소련 태평양함대 제15잠수함전단 소속 골프2급 K-129 잠수함이 채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아침 모항인 캄차카반도의 최남단 페트로파브로프스크(Petropavlovsk)를 안개처럼 빠져나갔다. 캄차카반도 아래쪽 태평양 공해상 정찰을 위해서였다. 길이 99m, 폭 8.5m에 무게가 2700t에 달하는 이 잠수함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SS-N-5-SERB)을 3발 실었고 최신 암호체계로 무장해 있었다. 가히 ‘바닷속의 왕자’라고 할 정도였다. 1960년 취항한 이 디젤추진잠수함의 물위 속도는 시속 28~31km, 잠행속도는 시속 22~26km로 추가 연료공급 없이 70일간 작전이 가능했다.
 
  표면상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약 1주일 뒤 K-129가 레이더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소련 태평양함대뿐 아니라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이때만 해도 미국은 아무 것도 모르는 ‘감감무소식’ 상태. 그러던 중 태평양에 배치된 미 해군 수중음향감시부대(SOSUS)가 태평양 해저에서 대형 폭발이 2차례 발생했음을 탐지했다. 미군은 잠수함 내 폭발사고로 판단했다. 이때가 3월 8일, 폭발지점은 하와이 북서방 1560마일로 추정됐다. 미국 본토에 핵공격이 가능한 지점이었다.
 
  미국은 시치미를 떼고 소리 소문 없이 움직였다. 모든 레이더기지와 감청 기지를 동원한 결과 폭발이 감지된 지 사흘 뒤인 3월 11일쯤 소련잠수함이 침몰했음을 알아냈다. 소련 태평양사령부 등이 사력을 다해 잠수함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미국은 살금살금 뒤만 밟았다. 소련은 태평양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러나 약 2개월 뒤 소련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수색을 포기한 것이다.
 
 
  미 해군 샌드달러 작전 하달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호’ 주요부분 설계도면.
  이제 미국의 차례였다. 미 해군은 샌드달러(Sand dollar)라는 작전에 돌입했다. 특수 해저수색장비를 갖춘 잠수함을 동원했다. 해리버트잠수함(USS Halibut). 해리버트는 태평양의 3100km² 넓이를 차근차근 수색했다. 5월 말 어느 날 해리버트가 K-129의 잔해를 찾아내고 수중카메라로 확인까지 마쳤다. 소련이 2개월간 이 잡듯이 뒤지고도 허탕을 쳤지만 해리버트는 3주 만에 해냈다. 북위 40도1분, 동경 179도9분, 태평양 해저 5km 지점이었다. 그 뒤 해리버트는 약 2개월간 해저 밑바닥에 무인조종 촬영장비를 내려보내 잠수함 잔해사진 2만2000장을 찍었다.
 
  해리버트가 보내 온 사진은 반파되기는 했지만 잠수함의 중요 기능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입수해야 할 고급정보들이었다. 문제는 그 보물들이 바닷속 5000m에 가라앉아 있었고비록 반파됐어도 무게가 1700t, 길이는 40m라는 것이다. 당시 미국이 가장 깊은 바닷속에서 선박을 인양한 것은 245피트, 채 80m 깊이도 안 됐다. 이건 해저 5000m, 60배나 더 깊은 바닷속이었다. 까딱하다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눈앞의 보물을 놓칠 판이었다. CIA는 무조건 인양하기로 했다. ‘정보가치만 있다면 아무리 크고, 아무리 무겁고, 아무리 깊은 곳에 있더라도 달랑 들어올리면 된다’는 식이었다.
 
 
  “불가능은 없다”
 
  1968년은 린든 존슨 대통령의 재임 마지막 해였다.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1969년 1월 20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인양작업을 추진하게 된다. ‘정보가치만 있다면 달랑 들어올리겠다’는 그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인양작전에 사용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불가능은 없다’라는 정신을 실현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CIA가 공개한 비밀문서에 짧게 인용한 인양요원들의 수기에도 이 같은 결의가 잘 나타난다. ‘임무수행이 불가능한가? 말도 안 된다. 우리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Mission impossible? Nonsense! Impossible was not in our vocabulary)’가 바로 그들의 결의였다. 이 같은 결의에다 세계 최고로 평가됐던 미국의 과학기술이 뒷받침하면서 ‘황당무계한’ 인양방법이 하나하나 현실화됐다.
 
 
  프로젝트 아조리안 본격 시동
 
  1968년 말과 1969년 초 CIA와 국방부 관리들은 내부적으로만 인양 가능성을 논의했다. 그러다 1969년 4월 1일 국방부가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 CIA 국장에게 인양 가능성 등을 검토해 달라는 공문을 보냄으로써 인양작전을 본격화한다. 이른바 ‘프로젝트 아조리안’을 본격 가동한 것이다. 1969년 7월 1일 존 팔랑고스키 CIA 부국장이 내부계획을 수립했고 7월 중순 CIA 내부승인을 받았다. 1969년 8월 8일 마침내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국방부차관, CIA 국장 등이 참여하는 고위위원회와 대통령 재가를 얻어 냈다.
 
  잠수함인양작전기구는 회의를 거듭했고 마침내 인양방법을 3가지로 압축했다. 첫째는 짐승처럼 무지막지한 힘으로 무조건 끌어올리는 것, 둘째는 밸러스트를 이용하는 방법, 셋째는 특수가스등을 이용, 부력을 생성시켜 잠수함을 띄우는 것 등이었다. 어떤 방법을 채택했을까 상상해 보라. 첫 번째 방법이었다. CIA 비밀문서에는 이 방법을 ‘Brute force’로 표현했다. 글자 그대로 짐승 같은 힘이다.
 
  CIA는 1970년 9월 11일 국방부에 ‘무조건 달랑 들어올리기’에 대해 브리핑했고 10월 30일에는 고위위원회에 이 방법을 설명했다. “길이 565피트, 폭 106피트의 배를 만들고 그 배 위에 해저 1만6500피트에서 1750t을 들어올릴 수 있는 장비를 장착하겠소”라는 것이 CIA 비밀문서가 전하는 당시 브리핑 내용이다. 황당했다. 그러나 자신에 차 있었다. ‘정보가치만 있다면 아무리 크고, 아무리 무겁고, 아무리 깊은 곳에 있더라도 달랑 들어올리면 된다’는 발상을 하나하나 기술로 구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국방부와 군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반대이유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이다. 마침내 1971년 8월 4일 프로젝트 아조리안이 생사 갈림길을 맞았다. 이날 국방부 차관은 위험이 증가되고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프로젝트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0년 계획했던 비용이 1년 만에 50%나 늘어났다는 것이다. 갑론을박 끝에 몇 달간 더 계속해 보기로 했고 10월 4일 고위위원회 승인을 얻어 기사회생하면서 11월 16일 인양선 건조에 돌입했다.
 
  8개월 정도 지난 1972년 7월 28일 고위위원회에서 1974년 여름 인양작업이 가능하다고 결론냈다. 72년 8월 14일 이른바 ‘40위원회’에 인양계획을 보고했다. 40위원회는 닉슨 대통령이 지난 1970년 2월 17일 하달한 <국가안보위원회 메모랜덤 40>에 따라 설립한 기구로 미국의 비밀작전을 조정, 감독하는 기구다. 메모랜덤 번호가 40이어서 40위원회로 이름 지어진 이 기구는 키신저가 위원장이었고 비밀작전은 반드시 40위원회의 검토를 거쳐야 했다.
 
  바로 그 다음날 해군 작전국장이 반대입장을 밝혔다. 8월 28일에는 마침내 미국군을 대표하는 토머스 무러(Thomas H. Moorer) 합참의장도 40위원회에 반대입장을 전달했다. 1968년 소련잠수함 침몰로부터 4년여가 지나 정보가치가 줄었다는 것이다. 발끈한 헬름스 CIA 국장은 1972년 9월 14일 소련잠수함의 정보가치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국가정보위원회의 판단이 우선이라며 계속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국가정보위원장은 헬름스 국장이었다. CIA와 군부가 대 공방을 벌인 것이다.
 
  결국 또 다시 작전검토위원회를 구성해 재검토에 들어갔고 12월 11일 보고서는 프로젝트 아조리안이 타당하다고 최종 결론내렸다. 같은 날 40위원회에서 닉슨 대통령의 의중이 공개됐다. 키신저가 작성한 메모에는 ‘대통령은 프로젝트의 독창적이고 혁신적 접근에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대통령은 ‘잠수함 인양 대찬성’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반대는 없었다. ‘심해광물자원탐사’로 위장한 프로젝트 아조리안은 이렇게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칠레 쿠데타로 당황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호’가 도크를 통해 침몰한 지점으로 집게를 내리는 모습. 마이클 화이트제작 다큐멘터리 캡처.
  워싱턴에서의 갑론을박에도 불구하고 실무팀은 인양준비를 일정대로 착착 진행했다. 인양선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Hughes Glomar Explorer)’는 마침내 1973년 4월 12일 필라델피아의 선조선소(SUN Shipbuilding & Deydock co.)에서 진수됐고 로컬테스트, 동부연안테스트, 동서부횡단테스트, 서부연안테스트, 종합테스트 등의 과정을 밟아 가게 된다. 운항 여부를 점검한 로컬테스트는 델라웨어만을 따라가며 진행해 이틀 만에 끝났다. 동부연안테스트는 7월 24일 시작해 델라웨어를 떠나 동부 연안을 따라 남하, 8월 10일 버뮤다 해밀턴항에 도착함으로써 종결됐다. 인양선이 항해다운 항해를 떠난 것은 동부에서 서부로의 1만2800마일 항해였다. 8월 11일 버뮤다를 출발해 9월 29일 캘리포니아 롱비치항에 도착하는 계획이었다.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최단코스는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것이었지만 인양선폭이 35m나 돼 33.53m에 불과한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남아프리카를 돌아서 서부로 갔고 장장 50일이 걸렸다. 인양선이 칠레에 중간 정박했던 9월 11일에는 마침 군부 쿠테타가 발생,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칠레 군부가 CIA의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판에 인양선이 칠레에 입항했으니 ‘CIA 대형 작전선이 입항하자 정권이 넘어갔다’는 오해를 받을 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양선은 당초 일정보다 하루 정도 늦은 9월 30일 오후 5시 롱비치항에 입항했다. 항해거리는 1만2745마일, 평균속도 시속 10.8노트, 50일 7시간30분이 걸렸다. 퍼펙트한 항해였다.
 
 
  닉슨 대통령의 작전 승인
 
  인양선은 롱비치항에서 출항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최종 점검에 나섰고 워싱턴에서는 최종 판단을 위한 회의가 거듭됐다. 1974년 4월과 5월 국가정보위원회는 작전을 재점검했다. 5월 7일 국가정보위의 결론은 인양작전이 미국 안보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40위원회는 6월 5일 모임을 가진 뒤 키신저가 닉슨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작성, 승인을 요청했고 이틀 뒤인 6월 7일 닉슨 대통령이 프로젝트 아조리안 작전을 승인했다. 닉슨 대통령은 자신이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소련을 방문하므로 그의 귀환 이전에 작전을 실행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아서 프로젝트 아조리안 실행을 명령한 것이다.
 
  6월 7일 작전승인 뒤 보름 정도가 지난 6월 20일 롱비치항 3마일 밖에서 거창한 선박인도 행사를 거행했다. 심해광물자원탐사 선박을 고객에게 인도하고 탐사에 나선다는 것을 알리는 행사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소련을 의식한 쇼였다. 인도식이 끝난 시간부로 프로젝트 아조리안 작전 돌입이었다. 6월 20일 밤 긴 뱃고동을 울렸다. 미국의 명운을 건 출항이었다.
 
  롱비치항에서 인양지점까지의 거리는 3008마일, 인양선의 항해속도가 시속 10노트로 12마일 정도임을 감안하면 약 2주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닉슨대통령이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귀환한 다음날인 7월 4일 오후 1시1분 마침내 인양해역에 도착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날은 미국 독립기념일로 건국 198년째 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인양선은 곧바로 자동정박 장치를 가동하고 준비에 들어가 7월 8일에는 문풀(Moonpool·도크에 붙인 예명·미국의 경우 도크 등에 사람과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음) 도크를 오픈하고 집게를 내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갑자기 태풍이 닥쳤다. 7월 11일, 파도가 2m도 넘어 모든 작업을 중단했다. 7월 12일에는 파도가 7m에 달했다. 7월 13일에는 악천 후 속에서도 인근을 지나던 영국상선의 의료지원 요청을 받고 영국 선원을 인양선으로 데려와 치료를 해 주기도 했다. 7월 14일 집게를 내리려다 파도가 높아지면서 오히려 장비 일부가 부서졌고 7월 18일에야 날씨가 조금 갰다.
 
 
  핵탄두 안전 확인
 
  8월 1일, 마침내 집어넣었던 집게가 태평양 밑바닥에서 잠수함 잔해를 완전히 감쌌다. 이제 들어올리는 일만 남았다. 1분당 5.5m를 들어올리도록 고안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난관이 많았다. 들어올리다 문제가 생기면 기술진이 다시 고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 기계를 설계했던 인력들이 동행, 현장에서 즉각 솔루션을 찾았던 것이다.
 
  당초 CIA가 들어올리려던 것은 330피트짜리 잠수함의 앞부분, 그중에서도 3분 2에 달하는 138피트 정도였다. 애당초 소련잠수함이 두 동강 나면서 잔해 두 개가 멀리 떨어졌고 CIA는 중요장비가 몰려 있는 앞부분을 들어올리려 했던 것이다. 인양선은 처음 집게가 138피트 잔해 전체를 집어서 감싸 끌어올리기 시작했지만 5km의 절반을 들어올렸을 때 집게 일부가 파손됐다는 게 작업에 동참했던 민간 기술진의 주장이다. 마이클 화이트(Michael White)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기술진은 잠수함 잔해 100피트가 다시 바다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결국 38피트만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공개된 어떤 비밀문서에도 미국이 정확히 무엇을 인양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기에 그들의 주장은 근거 없는 소리로 들렸지만 올해 들어서야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
 
  8월 1일, 집게가 잠수함 잔해를 들어올리기 시작해 인양선에 도킹한 것이 8월 8일, 약 7일 만이었다, 잠수함 잔해를 꽉 껴안은 집게가 인양선의 거대한 도킹레그에 완벽하게 맞물림으로써 마침내 인양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핵미사일이 실린 잠수함이고 폭발이 있었기에 인양선 내로 올리기 전에 방사능오염 검사를 선행해야 했다. 방사능오염 검사팀이 즉각 투입됐다. 플루토늄의 증거가 발견됐다. 일부 오염도 있었다. 다행히 폭발은 핵미사일이 아니라 하나 이상의 어뢰 폭발이었고 핵탄두는 안전함을 확인했다. 6년여가 지나 방사능오염도 인체에 해를 미칠 정도는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문풀로 완전히 들어올리고 게이트를 닫음으로써 인양의 모든 단계를 마쳤다. 8월 9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닉슨이 사임한 날이었다. 인양선에서 본부로 한 통의 무전이 날아갔다. ‘이벤트 36A 완료’.
 
 
  성공 암호는 ‘이벤트 완료’
 
1974년 9월 4일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호’ 선상에서 치러진 소련잠수함 탑승 수병의 장례식 동영상. 유튜브 캡처.
  ‘이벤트 36A 완료’가 바로 인양성공 때 타전키로 했던 암호였던 것이다. 6년여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막상 성공하고 보니 혹시라도 소련 함정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다 된 밥에 초칠하는 상황이 돼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인양선은 부이 등을 걷어들이는 것을 포기하고 신속히 현장을 이탈했다. 인양선은 작전에 성공하면 가장 가까운 미국 영토, 즉 하와이로 가기로 했다. 출항지점인 캘리포니아주 롱비치로 간다면 다시 보름이 걸리고 하와이로 가면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인양선은 귀환을 시작한 2일 뒤 소련을 속이기 위해 장비가 고장나 귀환한다는 무전을 날리고는 사전에 약속한 미국령 미드웨이 군도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미드웨이를 거쳐 인양선이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하와이의 마우이섬이었다. 마침내 8월 16일 오후 2시30분 인양선이 하와이 마우이섬 라하이나에 도착, 닻을 내렸다. 닉슨이 작전을 승인한 지 50일 만이었다.
 
  드러내 놓고 자랑할 수 없는 비밀작전이었지만 CIA 내부에서는 찬사가 쏟아졌고 본부로의 영전을 마다하고 인양선에 승선, 인양작전을 총책임진 익명의 고위간부도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절반의 실패?
 
  그러나 사실은 이 작전이 부분적 성공이었음이 올해 들어 공식 확인됐다. 이는 절반의 실패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CIA가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유일하게 공개했던 비밀문서에는 그 어디에도 실패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미 국무부가 지난 4월 공개한 25건의 비밀문서는 이 작전의 성과에 대한 재평가를 낳고 있다. 미 국무부는 지난 4월 ‘미국의 외교관계’라는 제목으로 1973년에서 1976년까지의 ‘국가안보’와 관련된 비밀문서(Frus-National Security Policy 1973-1976)를 공개했다. 이 중 ‘소련잠수함 인양작전-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의 비밀임무’라는 제목하에 40년간 고이 숨겨졌던 냉전시대 최대 비밀작전의 속살이 일부나마 드러난 것이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동안 설로만 난무하고 단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던 ‘인양 중 잠수함 잔해 일부가 파손돼 다시 태평양 밑바닥에 가라앉았다는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CIA가 잠수함 잔해 인양에 성공한 시점인 8월 8일 오전 11시20분부터 45분까지 25분간 워싱턴 모처에서 모종의 비밀회의를 열었다. 회의록까지 작성했다. 회의록은 3페이지라는 기록만 남아 있다. 일급비밀이라며 모든 분량을 삭제한 채 ‘회의록’이라는 제목만 덩그러니 드러났다. 분명히 인양성공에 따른 회의였을 것이다.
 
 
  70%의 실패
 
소련 첩보위성 등에 노출되지 않고 소련 잠수함 인양에 사용될 집게를 옮길 수 있도록 특수제작한 수중 바지선. 길이가 100m에 달하며, 뚜껑을 여닫을 수 있다.
  가장 의미 있는 문서는 바로 그 다음 것이다. 인양성공 이틀 뒤인 8월 10일 오전 11시15분부터 20분간 백악관이 연 국가안보회의 회의록이다. 바로 전날인 8월 9일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같은 시각에 포드 대통령이 취임했다. 10일 열린 국가안보회의는 포드 대통령이 처음 주재한 국가안보회의였다. 포드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콜비 국장, 태평양상의 우리 선박프로젝트의 최신 소식이 뭡니까”였다. 이때 콜비의 대답은 지난 40년 동안 많은 사람이 궁금해했던 진실을 이야기해 준다.
 
  콜비의 대답은 “대통령 각하! 잠수함을 들어올리다가 집게가 대미지를 입으면서 잠수함 일부가 다시 바다로 떨어졌습니다”로 시작했다. 그동안 설로만 나돌았던 인양 중 잔해 일부 재추락설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콜비는 “적어도 미사일 중 1개 이상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콜비가 어느 부분이 얼마나 부서져 추락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보고하지 않았지만 138피트를 인양하다 100피트가 떨어져 나갔다는 기술진의 주장이 사실로 인정된다. 잠수함 각 부분마다 다양한 기능이 있어 단순히 잔해 길이만으로 작전성공 여부를 논할 수는 없지만 인양도중 70%가 다시 추락했다면 분명 작전이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산술적으로는 70% 실패다.
 
  이 문서 바로 뒤에 공개된 문서는 3개월을 훌쩍 뛰어넘어 11월 11일 작성한 것이다. 국가정보위원회가 위원장인 콜비 CIA 국장에게 보고한 문서로서 미국 정부가 이번 작전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정부 평가는 사실상 실패였다. 그래서 나머지 잔해를 수거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인양작전에 나서기로 했고 이 문서는 이미 그 작전의 타당성을 검토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2차작전은 이 문서작성 시점인 11월 11일 훨씬 이전에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작전명도 정해졌음이 드러난다. 2차작전 명칭은 ‘프로젝트 마타도어(Project Matador)’였다. 국가정보위는 이 문서에서 ‘인양 타깃이 부서졌다’고 분명히 밝히고 ‘장비와 문서 일부가 다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프로젝트 마타도어를 통해 잔해를 수거해야 하며 ‘1975년 여름이면 지금보다는 정보가치는 조금 떨어지지만 기본적인 가치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2차작전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정보가치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프로젝트 아조리안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국방차관이 키신저에게 보낸 문서는 실패원인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자는 미상으로 적혀 있다. 이 비밀문서가 11월 14일 자 문서와 1975년 1월 23일 자 문서 사이에 철해진 것으로 미뤄 작성일자는 그 기간 내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집게의 결함으로 잔해 일부가 추락했고 집게를 제작한 레드우드시티로 끌고 가서 집중적으로 원인을 분석했고 집게 디자인을 일부 수정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록히드사에서 제작한 거대한 집게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드디어 1975년 2월 6일 키신저는 포드 대통령에게 2차 인양작전인 ‘프로젝트 마타도어’에 대한 준비를 승인해 줄 것을 건의했다. 키신저는 이 비밀문서에서 ‘훌륭한 작전을 수행했음에도 집게가 잘못돼 잔해 일부가 파괴되면서 바다에 추락했다’고 밝히고 40위원회 전원이 2차작전에 찬성했다고 밝혔다.
 
 
  인양선 제작사에 도둑 들기도
 
  국방부와 군부의 반대, 소련 함정들의 집요한 감시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프로젝트 아조리안을 결정적으로 위협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양선을 제작한 휴즈사에 도둑이 들었고 이 도둑은 특이하게도 인양선 설계와 관련한 문서 4박스만 훔쳐 달아났던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휴즈사 본사에 도둑이 든 날이 1974년 6월 5일, 즉 닉슨 대통령이 작전명령을 승인하기 이틀 전이었다. 만약 이 특이한 도둑이 설계도를 소련에 넘겼다면 프로젝트 아조리안은 그날로 끝장이었지만 다행히도 작전을 마칠 때까지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천운이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몇 달 뒤에 터졌다. 1975년 2월 7일 《LA타임스》가 프로젝트 아조리안에 대해 보도했다. 휴즈사 본사에서 인양선 설계를 훔친 도둑이 작전이 마무리된 뒤인 9월쯤 50만 달러를 요구하는 전화를 걸어 왔던 점을 감안하면 《LA타임스》의 보도와도 분명 관련이 있는 것이다. 특히 그 기사는 사법당국 관계자가 소스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그 같은 추측은 매우 합리적이다. 다행히 《LA타임스》 기사는 인양해역이 대서양이라고 언급하는 등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고 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안심은 잠시, 한 달여가 지나지 않아 작전의 핵심을 꿰뚫은 보도가 터져 나왔다. 1975년 3월 18일 잭 앤더슨이 미 전역에 방송하는 라디오를 통해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라는 인양선 명칭을 정확하게 언급하며 곧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보도하겠다고 밝혔다. 폭탄선언이었다. 잭 앤더슨이 포문을 열자 인양작전을 오래전부터 눈치 채고 취재해 왔던 《뉴욕타임스》가 총알처럼 반응했다. 죽 쒀서 개 줄 수는 없었다. 바로 다음 날인 3월 19일 프로젝트 아조리안에 대해 1면 톱으로 보도한 것이다. 더구나 사진까지 실었다. 《뉴욕타임스》를 시작으로 전 언론이 인양작전을 보도했고 이제 온 세상이 비밀작전을 알게 됐다.
 
 
  NYT 보도로 2차작전 중단
 
  프로젝트 아조리안에 대한 보도는 냉전시대 미소대결에서 미국의 승리를 자축하는 기사처럼 보였지만 그 자축만큼이나 큰 부작용을 낳았다. 미국이 소련잠수함을 인양했다는 사실을 마침내 소련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소련은 《뉴욕타임스》 보도 다음 날인 3월 21일부터 해군함정과 정찰기 등을 동원, 태평양상에 대한 정찰을 강화했다. 1975년 7월에 2차 인양작전을 실시하려던 CIA의 계획이 휘청했다. 국무부가 올해 공개한 비밀문서에는 이때의 기록도 담겨 있다. 1975년 4월 2일 키신저가 포드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서에는 3월 29일 소련 측이 강력히 항의했고 키신저는 ‘미국은 정보활동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5월 19일 40위원회가 작성한 비밀문서는 그 같은 혼란 속에서도 실무진이 착실하게 작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문서에는 4월 27일 인양선인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 정비가 모두 끝났고 5월 8일 집게도 인양선에 실었다고 적었다. 6월 2일 키신저에게 보낸 메모에서도 7월 4일 출항하는 것이 좋다고 작전개시 일자까지 못 박고 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누구보다도 프로젝트 아조리안을 지지했던 키신저가 마침내 2차작전 중단을 건의했다. 6월 16일 키신저는 포드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6월 5일 40위원회가 프로젝트 마타도어를 검토한 결과 2차작전을 감행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보다 소련의 대응위협이 너무 크다고 만장일치로 결론냈다. 현 시점에서 작전중단을 건의한다는 데 합의했다’고 적고 있다. 프로젝트 마타도어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포드 대통령도 다시 인양에 나선다는 것은 기름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꼴이라는 데 동의하고 추가인양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프로젝트 아조리안의 실패를 만회하려던 프로젝트 마타도어는 휴지통 속에 처박혔고 작전은 영원히 절반의 실패로 남게 됐다.
 
  국무부 비밀문서 공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무엇을 인양했는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CIA가 단 한 번도 이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핵미사일 3기와 최신 암호해독기 2대 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핵미사일을 입수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고 또 일부에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장비를 획득했다는 말도 나돌았다. CIA가 공개한 유일한 비밀문서, 그 문서에도 곳곳이 삭제돼 있었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잠수함 잔해를 문풀에 올리기 직전 방사능오염 측정팀이 검사를 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다. ‘어뢰 1발 이상이 터졌지만 핵탄두는 안전하다’고 기재돼 있음을 감안하면 핵탄두 1개 이상을 입수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에 대해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1993년 6월 러시아 정보당국의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러시아의 판단은 ‘CIA가 2개 이상의 핵어뢰를 인양한 반면 핵미사일, 암호책, 암호해독기, 송수신기 등은 인양도중 다시 바다 밑으로 추락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K-129 침몰 원인은 아직도 오리무중
 
  그렇다면 과연 소련잠수함 K-129는 왜 태평양에서 침몰했을까. 소련은 물론 미국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기에 음모론에 가까울 정도의 가설들이 나돈다.
 
  첫 번째는 미국잠수함 스워드피시(USS Swordfish)와의 충돌설이지만 근거가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분석이다. 두 번째는 미사일이나 어뢰폭발, 세 번째는 운항 잘못이다. 미사일이나 어뢰폭발은 분명 폭발이 있었다는 점은 입증됐지만 그 폭발원인은 설명하지 못하고, 운항 잘못은 잠수함 운항이 미숙해 침몰했다는 것이지만 1960년에 취항해 7년여를 무사히 운항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약하다.
 
  네 번째로 거론하는 이유가 황당하면서도 많이 사람이 혹하며 빠져드는 영화 같은 음모론이다. 이른바 소련 악당론, 소련 깡패론으로 해석할 수 있는 ‘레드스타로그’가 그것이다. 이 가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케네스 세웰(Kenneth Sewell)로 2005년 이 같은 주장을 담아 출판한 그의 책이름이 《레드 스타 로그(Red star rogue)》다. 그는 미·중 데탕트로 인해 소련의 영향력이 감소할 것을 우려해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KGB 국장이 특수부대요원 11명에게 지시, K-129 잠수함을 강탈해 태평양 해저에서 하와이 진주만에 핵미사일을 발사하도록 하고 중국의 소행으로 위장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렇게 되면 미·중 간 전쟁으로 이어졌을 테고 상대적으로 소련의 힘이 세지고 주변국 등에 영향력도 커질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 어떤 실체적 근거도 없다. K-129 잠수함 탑승인원이 83명 내외로 알려지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94명, 95명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소련 깡패론의 영향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다양한 설이 있지만 그 원인은 누구도 명확히 입증하기 힘들 것이다.
 
 
  극한대립에 피어난 인간애
 
  또 하나 프로젝트 아조리안과 관련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냉전시대의 극한대립 상황에서도 인간애가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인양선이 잠수함 잔해 인양을 성공적으로 마친 지 약 20일 정도가 지난 9월 4일, 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잠수함 잔해에서 발견한 소련 수병 6명의 엄숙한 장례식이었다.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던 이 장례식을 태평양상 인양선 위에서 거행했다는 것이다.
 
  비디오카메라로 낱낱이 촬영한 이 장례식은 감동 그 자체다. 유튜브에 공개된 10여분 분량의 영상은 똑같은 크기의 미국 국기와 소련 국기가 인양선 선상에 걸려 있고, 가운데 붉은색 박스에는 소련 수병 6명의 시신이 안치돼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인양선 승무원이 하얀색 철모를 쓴 채 도열해 있었다.
 
  장례식은 미국 국가와 소련 국가의 연주로 시작됐다. 양국 국가 연주가 끝난 뒤 소련 수병 6명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불렀고 인양선 선원들은 묵념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비록 적대국가의 군인이지만 태평양 깊은 바다에서 고통 속에 죽어간 수병들에게 최대한의 예를 표한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면서 마침내 천장에 매달린 기중기가 소련 수병의 시신이 안치된 컨테이너박스의 양쪽 문을 차례로 닫게 된다. 붉은색 컨테이너박스는 문이 굳게 닫힌 채 다시 기중기에 의해서 배 바깥 부분으로 옮겨져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물보라를 일으키며 태평양 한복판에 내려진다. 자신들이 숨졌던 5km 깊은 바닷속에서 건져 올려졌다 장례식을 치른 뒤 적들의 애도 속에 다시 바다로 돌아간 것이다.
 
  냉전시대 총부리를 겨눴던 적군이 아니라 수병 대 수병의 동지애로서 적군의 시신을 거둬 준 이 엄숙한 장례식 장면은 냉전을 녹인 감동의 비디오였다. 구소련이 해체된 뒤인 1992년 로버트 게이츠 당시 CIA 국장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비디오를 직접 전달했다. 죽은 수병의 관을 덮었던 구소련의 국기도 옐친에게 건넸고 옐친도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로버트 게이츠 국장이 자신의 자서전 《Robert Gates-from the shadows》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혔고 그 감동적 비디오는 유튜브에 남겨져 많은 이들을 울리고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같은 장례는 인양작전을 수립할 때 부터 매뉴얼에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애초 작전계획을 세울 때 인양 중 소련잠수함에서 시신이 발견되면 1949년 체결된 제네바포로협정에 따라 처리한다고 매뉴얼에 명시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국무부가 공개한 프로젝트 마타도어 관련 비밀문서에서 드러났다. 또 인양해역에서 영국상선에 의료지원을 해 준 것도 사전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작전비용은 2억5천만 달러
 
  그렇다면 이 작전에 투입한 비용은 얼마일까. 최소 5억 달러에서 최대 8억 달러가 들었다는 것이 그동안 알려진 내용이었다. 미국정부가 물가상승 등을 고려, 특정시점의 돈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는 공식기준인 CPI Inflation Calculator를 적용하면, 인양시점인 1974년을 기준으로 5억 달러가 들었다면 현재가치는 24억 달러, 8억 달러라면 38억 달러에 달한다. 그래서 38억 달러짜리 작전이라는 말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용문제도 올해 국무부가 비밀문서를 공개하면서 명확해졌다. 5억 달러, 8억 달러 등은 터무니없는 추정이었다. 1974년 11월 14일부터 1975년 1월 23일 사이에 키신저에게 보고한 비밀문서에 따르면 그때까지 투입한 비용은 2억5000만 달러였다. 또 1975년 2월 5일 키신저가 포드 대통령에게 프로젝트 마타도어를 준비하도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 문서에도 비용을 명시했다. 키신저는 문서작성 당일, 즉 1975년 2월 초까지 지출한 비용이 2억5000만 달러이며 프로젝트 마타도어를 위해 이미 지출한 돈이 2600만 달러, 향후 투입할 비용이 3600만 달러라고 밝혔다. 즉, 프로젝트 아조리안에 투입한 비용이 2억5000만 달러, 프로젝트 마타도어 투입비용이 2600만 달러로 소련잠수함 인양작전에 든 돈은 모두 2억7600만 달러다. 이는 당초 추정한 돈의 2분의 1~3분의 1 정도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13억 달러가 조금 넘는다.
 
  냉전시대 CIA 사상최대 비밀작전으로 평가받는 프로젝트 아조리안. 2억5000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입, 5000m 바닷속에서 소련잠수함 잔해를 인양함으로써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작전이다. 그러나 실질적 성과를 따지자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바닷속에서 들어올리던 잔해의 70%를 다시 놓침으로써 부분적 성공에 불과했다. 다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 엄청난 자원을 투입, 기발한 상상을 모두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미국 과학기술의 우수성과 강대국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94년 비밀전문, <러시아 잠수함과 통일교>

 
외교 전문 <러시아 잠수함과 통일교>.
  재미있는 것은 미국이 30억 달러 내외를 투입해 확보하려 했던, 이 골프2급 잠수함과 동일한 기종을 약 20년 뒤에 북한이 현재가치로 약 16만 달러에 매입해서, 오늘날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이용했다는 분석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1994년 2월 8일 오전 9시40분 먼데일 당시 주일 미국대사는 국무부로 비밀전문을 긴급 타전했다. 전문번호는 ‘도쿄-1885’, 제목은 <러시아 잠수함과 통일교> 로 모두 7페이지 분량이다. 이 전문에 따르면 ‘아로요시 시바타’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무역회사 ‘도엔 쇼지’가 러시아의 잠수함을 고철로 매입해 북한에 판매한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으며 아로요시 시바타는 한국이름이 서재호로 통일교 신자라는 것이다.
 
  주간 《아사히》를 인용한 이 전문은 ‘도엔 쇼지가 러시아 군수업자와 지난 1993년 11월 16일 잠수함 2대를, 11월 19일에는 추가로 잠수함 10대를 구매한다는 계약을 체결했고 1994년 1월 현재 1대에 대한 선금을 지급한 상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소련잠수함은 팍스트롯 2대와 골프2급 잠수함 10대이며 대륙간탄도핵미사일이 각 3기씩 장착됐던 잠수함이다. 러시아에 개혁개방 물결이 일면서 러시아가 퇴역 잠수함을 팔아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로요시 시바타는 잠수함 1대의 가격은 약 1000만 엔, 미화 10만 달러 정도로 1993년 12월 선금으로 660만 엔을 송금했고 잔금도 곧 보낼 예정이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잠수함 1대 무게는 약 800~900t 정도이며 고철 용도로 사들인다는 것이다. 아로요시는 북한이 철이 부족하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기관차나 철도레일, 잠수함 등을 고철로 매입하려고 했지만 러시아가 북한을 믿지 못해 비즈니스파트너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대신 구매해, 북한이나 중국에 되팔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t당 약 60달러에 사서 북한에는 130달러에, 중국에는 170달러에 판매한다는 주장이다.
 
 
  통일교 측, “개인사업과 통일교는 무관”
 
  그러나 아로요시는 이 잠수함이 단지 고철일 뿐 절대로 군사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에서 이미 중요 군사장비는 모조리 제거했다는 것이다. 또 잠수함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북한의 나진으로 옮겨져 나진의 고철해체 전문회사가 해체한다고 밝혔고, 1993년 4월에도 러시아에서 증기기관차를 매입, 북한에 팔았다고 주장했다.
 
  특이한 것은 아로요시가 1951년 남한에서 태어난 한국인 서재호라는 사실이다. 그의 삼촌이 해방직후 좌익에 몸담았고 한국전 발발 뒤 이른바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뒤 반공을 내세운 통일교의 신자가 됐기 때문에 자신은 반공주의자라고 주장했다. 서재호는 1982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통일교 합동결혼식에서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뒤 1990년 10월 일본으로 이민 귀화했다고 한다. 서씨는 1991년 2월 도엔 쇼지를 설립하고 삼각무역에 나서게 된다. 공교롭게도 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만났던 것이 1991년 11월로, 서재호가 러시아와 북한 간의 삼각무역에 나선 시기와 거의 일치했다. 또 도엔 쇼지의 직원 4명 모두가 통일교 신자였다. 통일교가 북한에 러시아 잠수함을 수출한 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북한이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했음이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바로 이 1대당 10만 달러 상당에 매입한 러시아 잠수함이 그 기술의 토대가 됐다는 것이 서방의 분석이다. 2004년 8월 《제인 위클리》 등 권위 있는 군사전문지도 이 잠수함에 장착됐던 잠수함발사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북한 미사일개발의 밑거름이 되었고, 특히 무수단미사일에 그 기술을 채택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 의회조사국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러시아가 잠수함에서 핵미사일 등 주요 장비를 모두 제거하고 팔았다고 주장했지만 미사일 발사와 관련한 일부 장치는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미국이 요즘 돈 30억 달러를 들여 소련 핵잠수함 잔해 일부를 인양했고 북한은 그로부터 20년 뒤 현재가치로 단돈 16만 달러에 동일한 모델의 잠수함을 사들인 다음 그 가치를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약 북한이 사들인 소련의 고철 잠수함이 큰 역할을 했다면 북한은 수억 달러, 아니 수십억 달러를 힘 안 들이고 번 셈이다.
 
  한편, 통일교 측은 관련 의혹에 대해 “서재호씨는 과거 통일교 신자였으나 현재는 통일교 신앙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며 “서씨의 개인적 사업과 통일교는 전혀 무관하며 일체의 의혹에 대해 통일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답변했다. 또 통일교 측은 “과거 일본 언론 등을 통해 유사한 의혹 제기가 있었으나 해당 거래에서 통일교가 관련 없었기에 그 이후 보도된 적도 없었다”며 “이번에 공개된 외교전문에도 일본 통상산업청 역시 이 거래와 통일교 측이 관련되었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상황이 맞지 않다고 결론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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