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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스포츠 소식

기회 찾아 한국 떠난 영화 <글러브> 주인공

글 : 이상희  월간조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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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성심학교 야구부 시절의 서길원(6번)과 양인하(7번). 사진제공=충주성심학교.
  〈글러브(Glove)〉라는 제목의 한국영화가 있다. 2011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청각장애인들로 구성된 ‘충주성심학교 야구부’ 이야기를 소재로 만들어졌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당시 프로야구의 흥행과 맞물려 많은 이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청각장애를 안고 야구선수의 꿈을 키워가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일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 영화가 히트하자 모 방송국에서는 충주성심학교 야구부원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이들 중 야구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서길원(19)과 양인하(19) 선수는 당시 방송에 출연해 수화(手話)로 “장애를 딛고 반드시 프로야구 선수가 돼서 장애인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의 꿈이 이뤄져 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견도 완화되었으면 좋겠다”고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전했다.
 
 
  프로야구단의 문을 두드렸던 청각장애인 양인하 선수
 
  기자가 잊고 지냈던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접하게 된 건 지난해 9월이었다. 지인을 통해 양인하 선수가 국내 유일의 독립구단인 고양 원더스가 주최한 트라이아웃(try out)에 도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기자 또한 영화 〈글러브〉를 감명 깊게 봐서 양인하 선수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양인하 선수는 지난해 9월에 열린 트라이아웃에 참가하기 위해 충주성심학교 박정석 야구부장과 함께 고양시 일산으로 향했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합격자 85명 명단에 오른 양인하 선수는 당일 ‘체력검사-캐치볼-배팅-수비연습’ 순으로 이어진 1차 테스트를 마쳤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당당히 ‘합격’ 통보를 받았다.
 
  다음날 실시된 최종 테스트는 1차 합격자들을 두 팀으로 나눠 연습경기로 치러졌다. 하지만 처음 접해본 대학야구 선수 출신이 던진 공이 버거웠는지 양인하 선수는 5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배트 중앙에 잘 맞은 공이 몇 차례 있었지만 번번이 야수 정면으로 날아갔다.
 
  충주성심학교 박정석 야구부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인하가 많이 아쉬웠는지 그리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분했는지 테스트를 마치고 짐을 챙기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양인하 선수의 심정을 전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들에게 ‘다음에 다시 보자’는 불합격 문자통보가 날아왔다.
 
  박정석 야구부장에 따르면 “인하는 우리 학교의 얇은 선수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수를 했지만 3루를 맡으면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2루수와 유격수는 경기 중에 서로 의사소통을 많이 해야 하는 포지션이라 청각장애가 있는 인하가 맡기 어렵지만 3루수는 충분히 가능한 자리”라고 말했다. 박 부장은 또 “인하는 유연성도 좋고 투지와 정신력이 강해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많다”고 덧붙였다.
 
  양인하 선수는 국내 프로야구 선수 중 올해 일본에 진출한 오승환(한신)과 김현수(두산)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이 둘은 매년 충주성심학교 야구부를 찾아와 야구용품도 지원해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겨울 박정석 야구부장을 통해 양인하 선수에게 장래 희망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그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어려서부터 청각장애 때문에 위축됐고 그러다 보니 왕따를 당하는 등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통해 당당해질 수 있었고 장애인도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업을 해야 할 만큼 가정형편이 어렵지만 그때까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제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끝날 때까진 절대 끝난 게 아니니까요.”
 
 
  편견과 가난을 넘지 못한 ‘청각장애인 야구선수’
 
  트라이아웃에 고배를 마신 양인하 선수는 차선책으로 대학에 진학해 야구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설령 운이 좋아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매달 수십만 원에 달하는 야구부 회비와 방학 때마다 국내 또는 해외로 떠나는 전지훈련비 수백만 원을 선수 본인이 직접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면 학비는 물론 운동경비도 지원받는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동국대학교 출신으로 지난해 프로야구 10구단 KT에 입단한 김병희(24)는 올 초 미국 스프링캠프에서 만난 기자에게 “정말 뛰어난 선수가 아니면 대학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해도 운동경비는 물론 학비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매년 해외로 가는 전지훈련비 때문에 대학시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다행히 나는 프로에 입단해 계약금이라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선수들의 현실은 정말 비참하다”며 국내 아마추어 야구의 현주소를 들려주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돈이 없으면 운동도 못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양인하 선수는 결국 ‘장애’와 ‘가난’이라는 이중고 때문에 야구선수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올 초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장애인 특별채용을 통해 한 산업체 시설에 취업해 집안의 생계를 돕고 있다.
 
  박정석 야구부장은 “인하는 코치가 지시하면 꾀부리지 않고 항상 성실히 훈련에 임하기 때문에 보다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지도만 받으면 분명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그런 인하에게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 무척 아쉽다”고 말했다.
 
  박 부장은 또 “이럴 줄 알았으면 길원이도 인하와 함께 트라이아웃에 도전해 보는 건데 아쉽다”고 말했다. 충주성심학교는 열악한 재정과 한정된 인력 때문에 두 선수를 동시에 트라이아웃에 참가시키는 건 무리라고 봤다. 한 선수에게 인력과 경비를 집중해 합격자를 배출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바뀔 것이고 제2, 제3의 양인하를 배출하는 게 전보다는 좀 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당시 양인하 선수의 소식을 접하고 그가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 위해 고양 원더스를 비롯해 기존의 프로야구단과 프로야구선수협회 등 여러 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가득 찬 내용이거나 ‘다음에 고려해 보겠다’는 상투적인 회신이 주를 이뤘다. 프로야구단이 저마다 입버릇처럼 외치던 ‘우리 사회에 꿈과 희망을 전하겠다’는 구호가 무색할 정도였다. 개중에는 ‘바쁘다’거나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며 애써 외면한 단체도 여럿 있었다.
 
 
  영화 <글러브>의 주인공은 왜 한국을 떠났을까?
 
서길원·양인하 등 충주성심학교 야구부의 얘기를 소재로 한 영화 <글러브>.
  양인하 선수를 위한 실낱같은 희망이 꺼져가던 지난 1월, 기자 앞으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충주성심학교 박정석 야구부장이었다.
 
  “서길원 학생이 미국에 잘 도착했습니다. (중략) 길원이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길러 한국 농아인 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야구선수의 꿈도 이룰 수 있게끔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동료 양인하의 좌절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서길원 선수는 ‘야구선수’가 되기 위한 기회를 얻기 위해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물론 그 또한 어려운 가정형편상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의 부모님 역시 청각장애를 갖고 있고 시골에서 작은 농사를 짓고 있다. 그의 선택은 충주성심학교 전 교장인 장명희 콘솔시아 수녀와 워싱턴DC의 한인회, 원주카리타스재단 등에서 십시일반 경비를 마련해 줬기에 가능했다.
 
  지난 5월 초 기자와 연락이 닿은 미국 내 원주카리타스재단 관계자는 “서길원 선수는 현재 영어 수화를 배우는 연수과정을 밟고 있는데 조만간 그 과정을 수료하면 농아인 야구팀이 있는 갤러뎃(Gallaudet)대학에 진학할 예정”이라며 서길원 선수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기자는 양인하와 서길원 두 선수를 지켜보며 ‘만약 이들이 미국에서 야구를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때론 세상의 편견과 공정치 못한 제도 때문에 열심히 준비하고도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마무리 투수 켄리 젠슨(왼쪽)과 애리조나의 에이스 패트릭 코빈.
  한국에서도 유명한 LA 다저스 투수 켄리 젠슨(27)은 당초 포수로 입단했다. 하지만 그가 입단 후 4년 동안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며 마이너리그에만 머물자 구단은 그에게 투수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러자 젠슨은 투수 전향 단 8개월 만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지금은 명문구단 다저스의 뒷문을 책임지는 마무리 투수로 성장했다. 구단에서 젠슨이 못한다고 포기하지 않고 다른 길이 없는지 찾아봤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패트릭 코빈(25·애리조나)은 지난해 정규시즌에서 14승 6패 평균자책점 2.92의 빼어난 성적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이런 그도 고등학교 2학년 때서야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물론 당사자인 코빈이 열심히 한 결과이겠지만 그의 성장가능성을 알아본 스카우트(scout)가 기회를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해 6월 류현진(27·LA 다저스)과의 맞대결을 앞두고 기자와 만났던 코빈에게 ‘고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해 남보다 어깨가 싱싱해서 잘 던지느냐’고 묻자 그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전혀 상관이 없진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어느 종목이든 남보다 일찍 시작하면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코빈의 경우처럼 늦게 시작해도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과거 김병현(35·KIA)의 소속팀이었던 애리조나 구단은 2013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34라운드에서 야구를 전혀 할 수 없는 하반신 불구의 장애인 코리 한(23)을 지명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상업적 수단으로 바라봤고 이내 그의 지명과 관련된 얘기가 알려지자 수많은 야구팬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합세해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한은 촉망받는 야구선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2010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샌디에이고 구단에 지명됐지만 평소 학업을 우선시하던 그는 야구 명문 애리조나주립대(ASU)에 진학했다. 그리고 2011년 2월 대학에 진학한 뒤 가진 두 번째 경기에서 도루를 시도하던 중 상대팀 2루수와 충돌해 목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한은 결국 하반신 불구가 됐지만 야구를 향한 열정을 꺾지는 않았다.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애리조나는 지난해 신인 드래프트 34라운드에서 한을 지명했다. 34라운드에서 한을 지명한 건 그의 대학시절 유니폼 등번호가 34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은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야구를 할 수 없다. 애리조나 구단은 그를 구단 직원으로 채용해 평생 야구와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었다.
 
데릭 홀 애리조나 구단 사장(왼쪽)과 하반신 장애를 가진 코리 한(오른쪽)의 입단 기자회견 모습.
  한은 지난해 7월 애리조나 구단의 홈 구장인 체이스필드에서 입단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 기자는 물론 애리조나 지역에 있는 다수의 언론사 취재진이 참석해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다.
 
  애리조나 구단 사장 홀은 “한이 사고를 당했을 때 병원에 찾아가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는 말로 운을 뗀 뒤 “당시, 야구를 향한 그의 열정과 훌륭한 인성에 반해 언젠가 그와 함께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더 일찍 한을 지명하고 싶었지만 프로에 한 번 지명된 선수는 3년이 지나야 재지명할 수 있는 조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올해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말했다.
 
  홀은 이어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은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최고의 유망주를 뽑는다. 그래서 1차 지명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의 감동과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며 “한은 비록 34라운드에서 지명했지만 그를 뽑았을 때 느낀 감동은 1차 지명 선수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감동과 기쁨 그 이상이었다. 당시 나를 비롯한 우리 구단 직원들은 한을 지명한 후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으며 개중에는 눈물을 흘린 직원도 있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홀 옆에 앉은 한은 “나를 너무 띄워줘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말문을 연 뒤 “부상을 당해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아무 연고도 없는 나를 찾아준 홀 사장과 애리조나 구단 직원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느꼈으며 존경심도 생겼다. 장애인이 된 나를 지명해 준 구단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는 애리조나 구단에 평생 잊지 못할 큰 은혜를 입었다”며 입단 소감을 밝혔다.
 
  한은 이어 “3~4세 때 처음 야구를 시작한 후 항상 메이저리거가 되는 꿈을 키워 왔다. 하지만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게 돼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그런 와중에도 야구를 떠난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애리조나 구단의 지명은 마치 끊어진 꿈을 다시 이어준 기적 같은 일이었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미국 메이저리그는 단순히 야구만 하는 곳이 아니다. 메이저리그는 야구를 통해 팬들에게 즐거움은 물론 진한 감동도 선사한다. 꿈과 희망도 심어준다. 그들은 이런 것들이야말로 프로야구단이 팬들과 함께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삶의 가치이자 일종의 사회공헌활동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야구무대인 메이저리그에 선 장애인들
 
일명 ‘조막손 투수’로 불린 짐 애보트는 오른손이 없는 장애를 극복하고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에는 장애인이 실제로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도 진출하기 어렵다는 메이저리그 선수가 된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선수는 ‘조막손 투수’로 유명한 짐 애보트(47)이다.
 
  애보트는 선천적으로 오른쪽 팔목 아래가 없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미국 미시간주(州)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야구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신체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리틀야구단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왼손 투수인 그는 홀로 벽에 공을 던진 뒤 오른손에 걸쳐놓은 글러브를 왼손으로 옮기는 수많은 노력을 통해 투구 후 수비도 거뜬하게 할 만큼 정상인과 다를 게 없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 구단은 애보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에게 입단 제의를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당장 프로에 가면 ‘조막손 투수’라는 이유 때문에 흥밋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며 “나는 나의 왼팔로 돈을 벌고 싶지 장애가 있는 오른팔로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며 입단 제의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프로 대신 미시간대학(Univ. of Michigan)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애보트는 1987년 아메리카야구선수권대회인 팬암(Pan American) 대회에 출전해 8승 1패 평균자책점 1.70이란 눈부신 활약을 펼쳐 미국이 은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1년 후인 1988년에는 서울에서 열렸던 제24회 올림픽 대회에 미국야구대표팀의 에이스로 참가해 조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오른손이 없어 일상생활을 하기도 어려운 장애인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애보트는 이듬해인 1989년 메이저리그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에 입단했다. 그리고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했다. 신인이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경우는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드문 케이스다. 과거 박찬호(은퇴)도 LA 다저스에 입단해 메이저리그로 직행했지만 그는 얼마 안 있어 성적부진을 이유로 시즌 중 마이너리그로 강등됐다.
 
  애보트는 당시 프로 입단이 결정된 뒤 가진 《LA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손이 하나 없다는 장애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꿈이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발명가 에디슨의 말을 믿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최고 구속 94마일(약 151km)의 속구와 다양한 변화구를 보유한 애보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는 이후 뉴욕 양키스-시카고 화이트삭스-캘리포니아 에인절스-밀워키 브루어스를 거쳐 199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리그 11시즌 통산 87승 108패 평균자책점 4.25의 성적을 남겼다.
 
  애보트는 뉴욕 양키스에서 뛰었던 1993년에는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그 어렵다는 노히트노런(No hit no run)도 달성했다. 애보트는 메이저리그 현역시절 총 21번 타석에 들어서 2개의 안타를 쳤는데 그중 한 개는 지난해 은퇴한 빅리그 역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인 마리아노 리베라에게 뽑아낸 홈런이었다.
 
  애보트는 1991년에는 시즌 성적 18승 11패 평균자책점 2.89의 빼어난 활약을 펼쳐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Cy Young Award)’ 후보에도 올랐다. 당시 그는 성공비결을 묻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꿈이 있으면 됩니다. 나는 경기를 하기 위해 야구장에 갈 때마다 손이 하나 없다는 현실을 보지 않고 항상 내 꿈을 보았습니다.”
 
  애보트는 은퇴 후 미국 전역을 돌며 장애인과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가능성과 기회에 대한 중요함을 심어주기 위해서이다. 지난 2012년에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한 자서전 《장애가 가져온 별난 인생(Imperfect, An Improbable Life)》을 출간하기도 했다.
 
 
  빅리그에서 제2의 ‘조막손 투수’를 꿈꾸는 미국 유소년 야구선수
 
  ‘애보트 효과’였을까? 미국에는 애보트처럼 조막손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메이저리거를 꿈꾸는 유소년 야구선수들이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올해 나이 열 살인 타일러 스미스이다.
 
  미국 코네티컷주에 살고 있는 스미스도 애보트처럼 조막손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스미스는 애보트와 달리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 없다는 것. 하지만 그 역시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일반인들과 함께 야구를 하며 그들보다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스미스 또한 애보트처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홀로 글러브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는 과정을 수없이 연습해 투수와 내야수는 물론 포수까지 내야의 모든 포지션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스미스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내가 왼손이 없는 걸 보고 신기해하지만 그들에게 선천적인 장애라고 설명하고 나면 그 뒤로는 전혀 이상하게 보거나 신기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또 “내가 유격수로 뛰면서 수비를 잘해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이 생겼다”며 “나는 특히 타격에 소질이 있는데 장차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팀에서 뛰고 싶다”는 장래희망을 밝혔다.
 
  스미스의 모친 파멜라 스미스는 “아들이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두 살 때부터 혼자 야구공을 가지고 놀더군요. 엄마인 저도 그 모습을 보고 신기했죠. 비록 아들에게 신체적인 장애는 있을지 몰라도 그의 꿈과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메이저리그에는 장애인 투수 외에 타자도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이는 일명 ‘외팔이 타자’로 불렸던 피트 그레이(작고)이다. 1915년생으로 1940년대에 선수생활을 했던 그레이는 여섯 살 때 마차를 타고 가다 추락해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절단해야 했다. 사고 전 오른손잡이였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가 됐다. 하지만 야구를 향한 그의 열정은 사고 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결국 마이너리그를 거쳐 1945년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무대에 진출했다.
 
  그레이는 메이저리그 총 77경기에 나와 중견수로 뛰었다. 타율은 0.218로 뛰어나지 않았지만 왼손으로 공을 잡은 뒤 글러브를 공중으로 던지면서 공을 빼내 재빨리 송구하는 동작은 일품이었다.
 
  메이저리그 초창기였던 1980년대 최고의 투수로 손꼽힌 휴 데일리는 왼팔이 없는 투수였다. 유년시절 총기사고로 한 팔을 잃은 그는 1983년부터 2년 연속 시즌 20승을 달성했을 만큼 당대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투수 안토니오 알폰세카(42)는 공을 던지는 오른손의 손가락이 6개였다. 하지만 플로리다 소속으로 뛰었던 2000년 시즌, 총 45세이브를 기록하며 빅리그 정상급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그 역시 자신의 장애를 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11년간이나 현역생활을 하며 총 35승 37패 129세이브의 호성적을 남겼다. 1997년에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우승의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절박했던 기회를 통해 NC가 몰고 온 돌풍과 이변
 
  지난해 프로야구 1군 무대에 처음 진입한 신생구단 NC는 총 9개 팀 가운데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전체 순위는 낮지만 1군 무대에 첫 진입한 신생구단으로선 파격적인 성적이었다. NC는 또 김종호(30)와 이상호(25)라는 두 진주를 발굴했다.
 
  김종호는 지난해 도루 50개를 성공시켜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상호는 팀 동료인 김종호보다 적은 25개의 도루를 기록했지만 도루성공률만큼은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이 둘은 발이 빠르다는 것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오랜 시간 무명의 설움을 겪었고 자칫 두 번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할 뻔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상호는 과거 롯데와 SK에서 방출된 경험이 있고 지난해 처음 1군 무대를 밟았을 정도로 철저한 무명이었다. 김종호 또한 2007년 프로에 진출한 뒤 이상호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 둘은 절망의 끝에서 NC 입단이라는 ‘기회’를 만나 도약할 수 있었다. 만약, 이들에게 NC라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NC가 지난해 ‘돌풍’을 일으켰다면 올해는 연일 ‘이변’을 연출하고 있다. 5월 초 현재 NC가 프로야구 9개 구단 가운데 당당히 1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적’에 가까운 결과이다. 그렇다면 연일 기적에 가까운 이변을 연출하고 있는 NC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전준호 NC 주루코치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한 가지 이유만을 콕 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우리 팀 선수 중에는 과거 부상이나 방출의 아픔을 겪으면서 두 번 다시 야구를 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를 경험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랬던 선수들이 NC에 입단하며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자 전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됐고 그런 노력이 모여 결국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전 코치의 말처럼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김종호와 이상호 그리고 젠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간절한 자에게 주어진 ‘기회’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온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픈 서길원의 현재와 미래…
 
  미국으로 건너간 서길원 선수가 조만간 진학할 예정인 갤러뎃대학은 세계에서 유일한 청각장애인 대학교로 14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대학 야구팀의 감독을 맡고 있는 커티스 프라이드(46)도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장애를 극복하고 1993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200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무려 14년간이나 빅리그 외야수로 뛰었다.
 
  프라이드 감독은 또 과거 미국 청소년축구 국가대표로 선발돼 1985년 중국에서 열렸던 16세 이하 월드컵 대회에 출전해 2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대회가 끝난 뒤 그는 전 세계 청소년축구 선수 중 FIFA(국제축구연맹)가 뽑은 ‘유망주 15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프라이드 감독은 자신의 성을 딴 ‘프라이드 재단’을 설립해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멘토(mentor) 역할은 물론 보청기와 장학금을 후원하는 등 다양한 자선활동도 벌이고 있다.
 
  충주성심학교 출신의 서길원 선수가 소정의 영어 수화 과정을 수료하고 갤러뎃대학에 진학하면 그는 곧 프라이드 감독을 만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보다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은 ‘장애인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그들에 대한 편견도 적고 각종 기회가 다양하게 그리고 충분히 제공되기 때문이다. 야구는 물론 다른 종목이라도 운동을 잘하면 특기자 혜택이 주어지고 설령 그가 외국인 유학생 신분이라 할지라도 장학금은 물론 운동경비도 학교에서 지원해 준다.
 
  기자의 주변에도 이런 이유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체적인 장애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편견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또 “일반인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편견 때문에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는 아픔은 당사자들만의 몫”이라고 말했다.
 
  서길원 선수는 그 간절한 기회를 얻기 위해 익숙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제 신체적인 장애는 물론 낯선 타향에서 다른 수화와 다른 문화 등 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서길원 선수의 소식을 접한 전준호 NC 코치는 “나도 메이저리그 코치연수 때문에 1년간 미국에 있어 봤지만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지내야 하는 외국생활은 정상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전 코치는 이어 “야구인의 한 사람으로 서길원 선수가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미국에 간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하루 빨리 우리 사회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에게 균등한 기회와 혜택이 주어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기자를 통해 서길원 선수의 소식을 접한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의 한국인 유망주 최지만(23) 선수는 “안타깝다”는 말로 운을 뗀 뒤 “후배인 서길원 선수가 미국에서 야구를 하는 동안 그의 개인 야구용품을 지원해 주고 싶다”며 후원 의사를 밝혔다.
 
 
  서길원, “야구 할 수 없는 게 가장 힘들다”
 
  서길원 선수는 최근 기자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정말 많이 힘들었다”고 운을 뗀 뒤 “하지만 지금은 영어 수화도 배우고 미국 문화도 익히면서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고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 있었을 때는 매일 야구를 했는데 지금은 갤러뎃대학의 학부 학생이 아니어서 야구를 할 수 없는 게 가장 힘들다”고 했다. 갤러뎃대학 교칙상 영어 수화 연수과정만 듣는 학생은 야구팀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서길원 선수는 힘들고 바쁜 미국생활 중에도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은 물론 자신을 후원해 주는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부도 더 열심히 한다고 한다.
 
  기자가 이메일을 통해 “장차 어떤 인물이 되고 싶은가”라고 묻자 서길원 선수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먼저 영어 수화를 열심히 배워 대학입학시험을 통과하고 갤러뎃대학에 학부 학생으로 입학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야구부에 들어가 야구도 계속할 수 있고 체육교육학도 전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저 같은 농인들이 야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도 아직 유효합니다. 고양 원더스에 입단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그곳을 거쳐 반드시 정식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서길원 선수가 걸어가야 할 길은 분명 쉽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그가 기회를 찾아 먼 타향까지 온 이상 그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서길원 장학 후원 문의: ‘원주카리타스재단’(미국:1+(571)432-9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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