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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점검

세계시장 석권 노리는 일본 방위산업의 실력 ② 해상무기편

不沈戰艦(불침전함) ‘야마토’ 건조… 옛 영광 되찾을 수 있을까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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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모하게 건조한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 航母 결전시대 맞아 ‘애물단지’로 전락
⊙ 영국의 지도로 항모 건조 익혀… 태평양전쟁 때 항모 10여 척 보유
⊙ 1905년부터 263척의 잠수함 건조…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 가능성도
⊙ 6·25전쟁 때 방위산업 起死回生… 6·25전쟁 초기 6억5000만 달러의 군수장비품 수주
2006년 10월 29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운데)가 도쿄 남쪽 가나가와현 사가미만에서 열린 일본 해상자위대 관함식에서 각료 등과 함께 일장기에 경례하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전력은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권으로 평가될 만큼 막강하다. 해상자위대는 일본을 공격하는 적을 바다에서부터 차단하는 게 목적이다. 해상자위대는 크게 대양 항로 확보를 담당하는 1개 자위함대와 연근해를 초계하는 5개 지방대로 구성하는데, 호위함대·잠수함대·항공집단 등 최고 전력으로 구성한 자위함대의 비중이 가장 크다. 자위함대의 핵심인 호위함대는 4개의 호위대군으로 조직한다.
 
  1개 호위대군은 8척의 구축함과 8기의 함재 헬기로 구성한 이른바 ‘8·8함대’인데 한국 해군 전체 구축함 전력과 맞먹는 규모다. 해상자위대는 140여 척의 각종 함정과 175기의 작전기를 보유해 핵무기를 제외한다면 세계 3위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해상자위대의 구로다 마사히코 대령(해군 무관)은 “중국의 해양 팽창을 봉쇄하고 주변국과의 영유권 분쟁 등에 대비해 20여 년간 해상전력 강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라고 했다.
 
  《2013년 방위백서》에 따르면, 4만5000여 명의 해상자위대 전력은 한국 해군을 양적·질적으로 모두 압도한다. 일본은 구축함 33척, 호위함 15척, 잠수함 18척을 보유하고 있다. 최강의 해상전투 체계인 이지스 구축함을 한국(3척)의 2배인 6척을 운용 중이다.
 
해상자위대의 곤고급 이지스 구축함 묘코(DDG 175)가 2007년 3월 필리핀 근해에서 기동훈련을 하고 있다.
  곤고급 이지스함(곤고, 기리시마, 묘코, 초카이) 4척과 아타고급 이지스함(아타고, 아시가라) 등 6척이다. 당시 미군을 제외하고 이지스함을 투입한 나라는 일본 해상자위대가 최초라고 한다. 2020년까지 이지스함 2척을 추가로 도입할 계획이다.
 
  2012년 3월, 일본은 ‘미니 이지스함’이라 불리는 아키즈키급 호위함(DD-115) 1번함을 취역시켰다. 일본은 구축함을 ‘호위함(DDH)’이라고 부른다. 아키즈키급 호위함은 스텔스 성능을 중시해 설계한 호위함으로, 외형만 놓고 본다면 영락없이 이지스 구축함인 ‘아타고급의 축소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키즈키급 호위함을 2번함(DD-116)까지 실전에 배치했고, 3번함 스즈쓰키(DD-117), 4번함 후유즈키(DD-118) 등 4척을 곧 실전에 배치할 예정이다. 아키즈키급 호위함은 일본판 이지스 레이더인 ‘단거리 SAM 시스템 3형 A형’을 장착한 호위함으로, 사정거리 50km의 미국제 ESSM 함대공 미사일을 운용한다.
 
  해군 관계자는 “아키즈키급의 전투 성능은 자국산 이지스급 구축함에 버금가는 성능으로 인정받고 있다”면서 “아키즈키급 호위함은 기존 이지스급 구축함들이 대탄도탄 방어 임무에 투입될 때, 함께 작전지역에 들어가 함대(艦隊)를 방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 해군은 아키즈키급 전투함으로 대공(對空) 능력을 강화한 차기호위함(FFG) 건조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한국과 일본이 상호간에 대잠임무와 대공임무를 ‘미니 이지스함들’을 통해 강화함으로써 동북아 지역에서의 한·미·일 연합작전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전함 ‘무사시’ 제작한 도크에서 전함 건조
 
제국주의 일본이 히든카드로 건조한 불침전함 야마토. 건조 중인 야마토의 모습(1)과 시험 운항하는 야마토(2). 야마토가 1945년 3월 19일 미 공군기의 집중공격을 받고 회피기동을 하고 있다(3).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인 1887년, 일본은 4000톤급 순양함 건조시설을 요코스카(須賀)에 건설하는 등 일찍이 세계 일류급 함정 건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애썼다. 전후 10년 가까운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호위함 건조기술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 유럽의 조함(造艦) 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주요 함정 건조에는 미쓰비시중공업, 가와사키중공업, IHI마린유나이티드, 히타치조선(日立造船), 유니버설, 미쓰이조선(三井造船) 등이 참여하고 있다. 특히, 호위함은 미쓰비시중공업과 IHI마린유나이티드, 기뢰함정과 보조함정은 유니버설, 잠수함은 미쓰비시중공업과 가와사키중공업, 소해정(掃海艇)은 유니버설조선이 맡는다. IHI마린유나이티드는 헬리콥터 탑재 호위함을 일본 내에서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의 3대 함정 건조회사의 배후에는 함정 조타 장치를 만드는 다카토리제작소, 구 해군기 ‘신텐(震電)’을 만든 128년 역사를 가진 와타나베철공(渡邊鐵工) 등 2500여 개의 강소기업들이 함정 제작에 동참하고 있다.
 
  IHI마린유나이티드는 요코하마(橫浜)와 히로시마 구레(吳)시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요코하마에서 자위대의 함정을 건조하고 있다. 이 회사의 기원은 1853년 당시 에도(江戶) 막부가 설립한 이시카와지마(石川島) 조선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시카와지마 조선소는 1888년 일본 해군의 마야(摩耶)급 포함(砲艦)인 ‘초카이(鳥海)’를 건조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나가사키(長崎)와 고베(神戶)에 각각 100년 이상 된 조선소를 갖추고 있으며, 나가사키에서는 호위함을, 고베에서는 잠수함을 건조하고 있다. 1991년 미국 해군 이후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지스함 곤고를 건조했다.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의 다테가미(立神) 도크는 태평양전쟁 당시 전함 ‘무사시(武藏)’를 건조했던 역사적인 장소라고 한다.
 
  패전 후 전함 건조가 중단됐다가 해상자위대(해상경비대) 발족 후인 1954년 전후 최초로 갑형(甲型) 경비함 ‘하루카제’를 건조하게 된다. 이후 나가사키 조선소는 미사일 호위함 ‘하타가제(1984년)’와 이지스 호위함 ‘곤고(1991년)’, 제2세대 이지스함 ‘아타고(2005년)’ 등 ‘1번함’을 단골로 건조한 기록을 갖고 있다.
 
  방위사업청의 한 관계자는 “일본의 조선소들은 한국의 조선소들이 울산(현대중공업), 옥포(대우조선해양), 부산(한진중공업) 등지에서 해군 기지와 별개로 자리 잡고 있는 것과 달리 구레, 마이즈루(舞鶴), 사세보(佐世保), 나가사키 등 해상자위대 기지에 동거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며 “해상자위대 기지에 조선소가 함께 붙어 있으면, 유사시 함정 수리와 보급이 원활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 방위산업의 역사
 
미·소 냉전 대립과 6·25전쟁으로 起死回生의 발판 마련

 
1945년 9월 27일 아카사카의 미대사관에서 만난 맥아더 사령관과 히로히토 일왕(오른쪽).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지난 4월 1일 무기와 관련 기술 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해 온 ‘무기수출 3원칙’을 47년 만에 전면 개정한 ‘방위장비이전 3원칙’을 각의(국무회의) 의결함으로써 무기 수출을 통한 방위산업 육성, 국제 무기 공동개발 참여를 통한 자국 안보 강화 등을 꾀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일본의 방위산업은 1887년 4000톤급 순양함의 건조시설을 요코스카(橫須賀)에 건립하면서 태동했고, 이후 1985년까지 도쿄와 오사카에 육군 무기 생산시설을 설치하면서 본격화됐다. 1900년대 초반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인접 강대국과의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정부 예산을 방위력 확장에 쏟아부었다.
 
  이 시기 일본은 군수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다. 일본 정부 예산의 방위비 비중은 20~40% 수준에서 1930년대 말 전시 국가총동원체제로 70% 이상으로 급증했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전인 1944년에는 무려 86%를 차지했다.
 
  1941년 이후부터는 연간 항공기 3500대, 전차 1000대, 함정 80만 톤 이상을 생산할 정도로 방위산업의 대규모 양적, 질적 팽창을 이룬다. 특히 1938년 전시에 수립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민간 기업들이 모든 군수물자를 직접 제조함으로써, 미쓰비시중공업, 가와사키중공업, 도시바 등은 당시의 첨단 군수기술과 제조 관련 고급 기술들을 직접 습득하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 일본은 경량급 전투기인 ‘제로센’과 ‘야마토’ 전함 등 당시 기술력 측면에서 미국, 영국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인 무기를 개발했다.
 
  1945년 8월, 전쟁에 패하면서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 내 무기, 탄약 등 모든 군사물자의 제조와 유통이 금지되면서 방위산업 기반이 일시적으로 소멸했다. 미국은 당시 잔존하던 모든 군수물자의 제조설비와 인력들을 민수(民需)산업 분야로 강제 전환하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1946년 8월, ‘특주회사정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의해 대규모 기업집단은 대부분 해체·분할되고, 군수공장은 민수로 전환됐다.
 
  특히 일본 방위산업의 주축을 이루던 항공 분야는 생산뿐만 아니라 연구 자체도 모두 금지돼 개발 생산업체들은 트럭, 오토바이, 농업용 기계 분야로 전업하거나, 연합군 군용차량 수리 등을 하며 연명했다. 그러나 이어진 극심한 미·소 냉전 대립과 19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일본 방위산업은 본격적인 재건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트루먼 대통령의 1947년 공산주의 봉쇄전략을 지향한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미국은 일본에 대해 전략적인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시작했다. 이것을 일본은 방위산업을 재건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GHQ는 6·25전쟁 발발 2개월 후인 1950년 8월, 6·25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품 조달을 위해 경찰예비대를 설립했고, 1952년 해상경비대가 포함된 ‘보안청’으로, 1954년에는 ‘자위대’로 점차 격상돼 현재와 같은 군사조직을 완비하게 된다.
 
  본격적인 무기 생산의 재개를 위해 1951년 8월 육·해군 간부들 간 협력단체인 ‘일본기술생산협력회’가 설립되고, 1952년 3월에는 GHQ가 일본 정부에 무기 제조를 허가함에 따라 전후 최초로 완성품인 4.2인치 박격포를 발주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는 미국의 군수원조, 자위대의 방위력 정비, 미일 경제협력을 위한 ‘미일 경제협력간담회’ 등을 발족했다. 또 방위 생산에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방위생산위원회’를 설립했다. 이후 일본은 극동 아시아에서 미국의 중요한 후방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고, 6·25전쟁 당시 미군에 대한 방위장비 수주는 일본의 방위산업을 살리는 원동력이 됐다.
 
  일본은 6·25전쟁 초기 2년 동안 약 6억5000만 달러에 이르는 섬유, 운송기계, 금속제품, 정비 등을 미군으로부터 수주했다. 이러한 ‘6·25전쟁 특수’는 당시 일본의 국방비 총액을 상회하는 규모로서, 방위산업 발전을 위한 토대가 됐다. 이 과정에서 후지중공업, 미쓰비시중공업 등 패전 후 분할된 주요 방산기업들이 재통합되면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전기가 마련됐다.
 
  거함거포주의의 상징, 야마토
 
야마토함에 승선해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
  일본의 해군력은 이미 20세기 초에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 해군력을 뒷받침한 것이 일본의 전함 건조 능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도 항공모함·순양함·구축함·전함·잠수함·소해함 등을 건조했고, 이들 함정을 이끌고 미 해군과 태평양 곳곳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벌였다.
 
  현재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가장 먼저 이지스 시스템을 확보했다고 자랑하는 곤고급 이지스함은 일본 해군 역사에 이름이 올라 있는 함정이다. 1913년 일본이 2만6230톤급 전투순양함 곤고를 영국에서 건조해 인도받았다. 일본에 전함 기술을 전수한 ‘선생’은 영국이었던 것이다.
 
  곤고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 함대 중에서 가장 빠른 30노트가 넘는 속력과 14인치 함포로 수많은 해전에서 용명(勇名)을 날렸다. 그러나 곤고함은 1944년 미 해군의 잠수함 ‘시 라이온(Sea Lion)’에 의해 격침됐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최초의 이지스함에 곤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태평양을 주름잡던 시절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다.
 
  일본에 그 해군력을 상징하던 전함 ‘야마토(大和)’가 있었다. 제로센과 함께 일본의 당시 기술이 응축된 전함으로, 독일 나치의 비스마르크(Bismarck)호와 함께 전쟁 원칙이던 거함거포주의(巨艦巨砲主義)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까지만 해도 두꺼운 장갑판을 두른 우람한 덩치에다 화력 좋은 전함이 해군력을 상징했다. 나치의 비스마르크호를 비롯해 일본의 야마토와 무사시가 그랬다.
 
  만재배수량 5만t인 비스마르크호는 1940년 취역 당시 세계 최대·최고의 전함이었다. 380mm 주포 8문에다 150mm포 12문 등을 갖춰 화력이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1년 후 수장되면서 세계 1위 자리는 야마토로 넘어갔다.
 
  야마토는 1941년 12월 7일 시작된 태평양전쟁 약 일주일 후,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건조 완료돼 취역했고, 유명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합함대 사령관의 기함(旗艦)이었다. 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沖繩) 북방 200마일 해상에서 미 항공기의 집중공격을 받고 격침됐다.
 
  당시 미국이 첫 원자폭탄 투하 대상지로 히로시마를 택한 것은 야마토를 건조한 구레 조선소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역사상 최대의 전함 격침을 안타까워해 60주년을 맞아 구레시에 야마토 전함을 소개하는 박물관(구레시해사역사과학관)을 2005년 개관하는 한편, 야마토 전함을 신화로 포장해 우주전함 ‘야마토’라는 애니메이션으로 부활시켰다.
 
 
  야마토라는 ‘괴물’이 탄생한 까닭
 
일본은 2012년 3월 신형 호위함으로 일본판 ‘미니 이지스함’으로 불리는 아키즈키함을 건조했다. 아키즈키함은 ESSM함대공 미사일을 장착해 대공능력이 강하다.
  1945년 4월 7일 오후 2시23분, 규슈(九州) 남서쪽 약 200km 해상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폭음과 연기가 바다 건너 규슈에서도 관측되었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폭발이었다. 폭발과 함께 화염을 뿜어내며 한 척의 군함이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역사상 최대의 전함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야마토의 최후였다. 20세기의 개막과 함께 시작된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을 모델 삼아 군사력 증강에 나섰다. 특히 강력한 해군을 발판으로 세계 제패에 성공한 영국을 본받아 대대적인 해군력 증강에 나섰다. 도발 욕구를 드러내고 싶었던 제국주의 일본은 그동안 구축한 군사력을 발판으로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하면서 당당히 군사 강국의 위치에 올랐고, 제1차 대전이 끝났을 때 어느덧 세계 3위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됐다.
 
  일본이 강력한 해군력을 앞세워 대외 도발을 추진할 때, 세계 1위의 해군력을 다투고 있던 미국과 영국이 ‘견제구’를 날렸다. 이들 국가의 해군력 모두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배치된 것은 아니었지만, 해군력은 이동과 배치가 손쉬운 전략적 유연성 때문에 일본도 미국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20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거함거포주의가 대두되면서 각국은 상대를 압도할 전함의 보유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것은 국력을 올인해야 할 만큼 부담이 컸던 경쟁이었다. 따라서 제1차 대전 이후 군축이 논의됐고, 이때 중점 감축 대상이 되었던 것이 해군력의 주력이던 전함이었다. 1922년 체결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Treaty for the Limitation of Naval Armament)’에서 일본은 비록 세계 3위의 전함 보유국 지위는 인정받았지만, 신규 전함 건조가 금지되는 바람에 전력 증강에 큰 제한을 받게 됐다.
 
  워싱턴 군축 조약으로 신규 전함 건조가 어려워지자, 미국과 영국은 ‘꿩 대신 닭’이란 심정으로 항공모함 건조에 나섰고, 일본도 진주만 공습에 6척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항모(10여 척)를 건조했다. 오늘날 항공모함의 존재감은 크지만, 당시만 해도 각국 수뇌부는 “해전의 주역은 역시 전함”이라고 할 만큼 전함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다.
 
  1930년대 들어 대외 침략 야욕을 더욱 노골화하며 이런 제약을 거추장스러워 한 일본은 1937년 ‘2차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을 거부하며 군비 확충에 열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1934년부터 비밀리에 추진하던 초대형 전함들의 건조에 전격 착수해 광적인 보안을 유지한 끝에 초도함을 1941년 취역시켰다.
 
  애초 일본은 5척의 신예 전함의 취득을 계획했고, 이후 초도함의 이름을 따서 야마토급 전함으로 불렀다. 2번함 무사시는 1938년 건조에 착수해 야마토 취역 이듬해인 1942년에 실전 배치했으나, 3번함 시나노(信濃)는 건조 도중 항공모함으로 용도가 바뀌었고, 나머지는 계획이 취소됐다.
 
  이들 야마토급 전함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야마토는 6만5000톤급으로 만재톤수는 무려 7만2000톤이고 자매함 무사시와 함께 일본이 건조한 가장 큰 전함이었다. 미국이 건조하다 중단한 ‘몬타나’급 전함이 6만500톤이었으니 야마토가 얼마나 큰 배인지 짐작할 수 있다.
 
  군축 조약으로 말미암아 열강들이 보유한 대부분의 전함은 3만5000톤 이하였다. 재군비를 선언한 독일이 1년 먼저 야심만만하게 건조에 착수한 비스마르크가 5만5400톤, 일본의 시도에 놀라 대응에 나선 미국의 아이오와가 5만7000톤인 점을 고려한다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8만 톤급 항공모함 USS 포레스털(Forrestal)이 등장(1950년대)하기 이전까지 사상 최대의 군함이기도 했다.
 
  미국의 항공모함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최대 항공모함이 만재배수량 5만8000톤 규모인 러시아의 쿠즈네초프(Admiral Kuznetsov)라는 사실만 보아도 1940년대 초에 실전에 배치된 야마토급 전함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야마토 호텔
 
  그러나 일본은 자국의 조선 능력이 미국이나 영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미국은 본토에 산재한 해군조선소에서 풀빵을 찍어내듯 전함들을 건조·취역시켜 단박에 일본에 대해 숫적 우세를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무리를 해서라도 새로 건조되는 신형 전함에는 강력한 화력, 장갑(裝甲), 빠른 기동력까지 부여해야 했다. 미국의 대규모 전함들과 맞붙어 포격전을 펼치더라도 무조건 이길 수 있는 ‘무적전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은 야마토 건조에 당시 일본 정부 예산의 2%인 1억5000만 엔에다 온갖 기술력을 총력 투입하면서 공을 들였다. 특히 동맹국 독일에조차 감춘 94식 460mm 주포는 미 해군 전함들과의 결전에서 일본 해군에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 줄 비장(秘藏)의 병기로 생각했다. 초도함인 야마토는 진주만 공습 열흘 후인 1941년 12월 16일 배치됐다.
 
  이때는 해군의 전투 양상이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바뀌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로 인해 야마토는 덩치만 큰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해전의 사상(思想)을 바꾼 이들은 바로 일본 해군 자신이었다.
 
  항공모함 함대를 이용한 진주만 기습은 그동안 바다의 주역 노릇을 하던 전함 대신 함재기로 무장한 항공모함이 그 자리를 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일종의 ‘사변’이었다. 하늘을 통해 보다 멀리서 때릴 수 있는 자가 승리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일본은 스스로 야마토의 출전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야마토는 큰 덩치로 인해 공격 목표가 되기 쉬운 표적인데다가 엄청난 국부(國富)를 투입해 건조한 전함이라 최대한 안전하게 보존해야 했다. 더구나 물자 부족에 시달렸던 터라 엄청난 유류를 소비하는 야마토의 출격을 더더욱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군항에 정박해 있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수병들은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렀다.
 
  특히, 야마토와 무사시가 별다른 전과(戰果)도 기록하지 못하고 피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야마토급 전함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이다. 야마토는 당시 일본의 철강, 조선, 기계 공업의 능력이 떨어져 ‘맷집’이 과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은 미 해군 전함의 명중탄 400~600발을 맞고도 격침되지 않도록 미 해군 주포인 356mm와 406mm의 함포탄에 견디도록 설계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열처리 기술이 구미 열강에 비해 떨어져 철강의 품질이 좋지 않아 장갑(전면 장갑 650mm, 함교 장갑 495mm, 선체 측면 410mm)이 두꺼워야 했고, 함포도 구경을 크게 만들 수밖에 없어 결국 초대형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야마토는 거대한 구경의 주포로 인해 사격 때 반동이 엄청났고, 이것은 세계 최대의 전폭을 가진 선체로도 쉽사리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야마토의 사격통제 체계도 형편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야마토에 탑재된 레이더들은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성능이 현격히 떨어졌다.
 
 
  海水 유입에 치명적 구조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일본 제로센 전투기(오른쪽)와 일본군의 공격으로 불타는 미 전함 웨스트버지니아. 미군 2390명이 전사한 이 공습으로 미국은 12척의 전함과 171대의 전투기를 잃은 반면 일본의 손실은 미미했다.
  게다가 야마토는 리벳-볼트의 절단으로 해수(海水)가 유입되는 치명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다. 전함의 맷집은 직접 방어에 간여하는 외부 장갑 판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적의 포탄이나 어뢰에 피격되더라도 피해가 주변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구조여야 한다. 충격 분산을 위해서는 선체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건조해야 했다. 즉 선체를 용접하고 부분적으로 리베팅을 해야 했으나, 일본은 리벳-볼트를 무려 615만 개나 사용해 야마토를 조립했던 것이다.
 
  이것은 장갑판이 운 좋게 적함의 포격을 막아낸다 하더라도 내부의 리벳-볼트가 충격으로 부러진다면 장갑판이 밀려나면서 막대한 양의 해수가 선체 내부로 밀려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야마토와 무사시의 격침 당시 이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갑판 상부와 포탑 상부를 뚫고 들어온 포탄이나 항공폭탄이 내부에서 유폭(油爆)을 일으킬 경우, 이를 막아내기도 어려운 구조였다.
 
  게다가 야마토를 비롯한 일본의 전함들은 아군 정찰기로부터 정보 수신을 용이하게 하고 육안으로 목표물 탐지를 하기 위해 텐슈(天守·망루)를 방불케 하는 함교(艦橋)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42년 과다카날 인근 해역에서 일본 전함 ‘기리시마’는 미 해군 전함 USS 워싱턴의 레이더 조준사격으로 격침당했다.
 
  일본의 최후가 다가온 순간, 일본 군부는 야마토를 부두에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항공모함 전력이 바닥난 일본은 수상함 전력을 그러모아 전선에 투입했고, 야마토와 무사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공권 확보는 고사하고 하늘에서 이들을 보호해 줄 최소한의 전력도 턱없이 부족한 채로 전함들이 출동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1942년 5월 29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사령관은 기함 야마토에 승선해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제1항공함대사령관이 항공모함 4척을 잃고 조종사들이 불길에 휩싸여 바다로 추락하는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944년 10월 레이테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에서 무사시가 격침됐고, 이듬해 4월 야마토도 텐고(天一) 작전(오키나와 상륙 차단작전)에 무모하게 참가했다가 400여 기의 미군 함재기들로부터 1시간40여 분에 걸친 ‘벌떼 공격’을 받고 수장되고 말았다.
 
 
  부활한 일본의 항모, ‘이즈모’
 
2013년 8월 6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해상자위대 소속의 항공모함급 구축함 ‘DDH183 이즈모’호 진수식이 열렸다. 원 안은 진수식에 참석한 아소 다로 부총리.
  지난해 8월 6일, 일본 도쿄 인근 요코하마 조선소에선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전후 최대의 해상자위대 전투함인 22DDH ‘이즈모(出雲)’ 진수식이 열렸다.
 
  약 1200억 엔(약 1조3500억원)을 들여 건조된 ‘이즈모’의 공식 명칭은 호위함이지만, 헬기는 물론 F-35B와 같은 수직이착륙기도 탑재할 수 있는 경(輕)항공모함이다. ‘이즈모’는 태평양전쟁 때 제국해군 제3함대 기함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이즈모’는 1937년 중국 상하이에 파견돼 포격을 하고 중국 어뢰정의 공격에도 살아남았던 전설적 존재다.
 
  일본은 공격무기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현재는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 대신 헬리콥터 탑재 구축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다. 이즈모는 대 잠수함 작전용 헬기 3대, 소해용 헬기 1대를 탑재할 수 있다. 이즈모는 일본 해상자위대가 2척을 보유하고 있는 헬기항모 16DDH ‘휴우가’급에 비해서도 크고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즈모에는 헬기는 물론 F-35B, MV-22 수직이착륙기 등까지 운반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도 설치돼 있어 유사시 강력한 상륙작전 지원 능력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은 최근 미일 연합훈련을 통해 이즈모보다 작은 휴우가급에서 미 해병대의 MV-22를 엘리베이터로 운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줬다. 일본은 이즈모와 같은 형의 22DDH 2번함을 건조 중이며 올해 진수시킬 예정이다.
 
  윤연(尹淵) 전 해군작전사령관은 “1960년대 유럽의 전례를 살펴봐도 미국은 동북아에서 중국의 함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본격적인 항모 건조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며 “일본·중국의 항모 경쟁과 세계적인 경항모 건조 추세를 감안할 때 현재 건조가 추진 중인 독도급 2번함은 본격적인 함재기(F-35B) 운용 능력을 갖춘 경항모를 염두에 두고 건조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1922년 일본이 세계 최초로 건조한 항공모함 호쇼. 상선이나 화물선을 개조한 것이 아닌 순수항모로는 세계 최초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 해군은 해군력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1910년 11월 14일 미 해군의 항공책임자 체임버스 대령이 함정에서 항공기를 띄울 계획을 세우고 파일럿 유진 엘리가 조종하는 복엽기가 USS 버밍엄함에서 첫 이함(離艦)에 성공했다. 미 해군은 1922년 석탄운반선인 주피터의 구조물을 떼어내고 비행갑판을 설치해 미 해군 최초의 항모 ‘랭글리(CV-1)’를 탄생시킨다.
 
  일본이 항모를 건조한 것은 미국이 항모를 만든 지 불과 10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의 항공모함 개발은 영국의 도움으로 시작됐다. 영국의 항모에 대단히 강한 인상을 받았던 일본은 영국의 기술을 통해 항공 전력의 함상 운용을 시도한다. 첫 번째 수상기 모함으로 이용된 와카미야함은 영국에서 들여온 배였다. 이 배는 석탄 891톤을 싣고 스팀엔진을 사용토록 했다. 속력도 겨우 10노트의 저속이었다.
 
  조선기술의 부족과 전함에 장착하는 대구경 함포의 포신 제작 기술도 영국의 기술에 의존하던 때여서 기술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러면서 1912년 수상기의 발함에 성공하는 등 기술을 쌓은 일본은 마침내 자체 건조한 항공모함 ‘호쇼(鳳翔)’를 만든다.
 
  1922년 건조한 항공모함 ‘호쇼’는 상선이나 화물선을 개조한 것이 아닌 순수 항공모함으로는 세계 최초였다. 일본 아사노 쓰루미(淺野鶴見) 조선소에서 1921년 11월 3일 진수된 9500톤급 항모인 호쇼는 165m의 비행갑판을 가졌고, 3만 마력의 터빈엔진을 장착해 25노트의 속도를 내는 고속선이었다.
 
 
  잠수함 독자 설계가 가능한 나라
 
일본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잠수함 항모 I-400. 전투기 3대를 한번에 실을 수 있었다. 1945년 미 해군에 나포된 항모 잠수함 1-400의 격납고(오른쪽).
  대표적 ‘고슴도치 전력’인 잠수함 전력에서도 일본은 재래식 잠수함 분야에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수준이다. ‘고슴도치 전력’이란 상대의 강력한 군사력을 꺾을 순 없어도 공격을 받을 경우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비(非)대칭 전력을 말한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중 3대의 항공기 탑재가 가능한 세계 최대의 잠수함 항공모함 C-400형을 건조한 나라로 아시아에서 잠수함 독자설계가 가능한 유일한 나라다. 일본은 한국보다 6척이 더 많은 18척(연습·실험용 2척 포함)의 잠수함을 실전 배치한데다, 2020년대 초까지 잠수함 전력을 22척(훈련용 2척 포함) 이상으로 증강할 계획이다.
 
  현재 해상자위대가 보유하고 있는 18척의 잠수함은 수중 정숙성과 공격능력면에서 디젤엔진을 탑재한 통상 잠수함으로는 세계 제1의 성능을 자랑한다. 선령(船齡) 또한 매년 신형 잠수함을 한 척씩 만들어 기존 잠수함을 교체해 평균 선령이 15년 안팎으로 선령 30년인 다른 나라의 절반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잠수함에 수명연장 프로그램을 적용하지 않고 사실상 조기퇴역시키는 것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며 “보유 숫자로 주변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조기 퇴역시켜 보관하다가 유사시에 추가로 40여 척을 동원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듯하다”고 했다.
 
  일본의 잠수함 보유 역사는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잠수함 건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일본은 1890년대부터 미국에 기술자를 파견해 홀랜드급 잠수정 건조 기술을 습득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독자적 기술 습득이 여의치 않자 결국 1904년 미국과 5척의 홀랜드급 잠수정 건조계약을 체결했고, 1905년 10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제1잠수정대를 창설했다.
 
 
  세계 최초로 잠수함 항모 개발
 
태평양전쟁 말기에 자살공격용으로 사용한 고류 잠수정은 총 115척이 제작됐다. 사진은 패전 후 1945년 10월 구레 해군기지 건선거에 방치된 80여 척의 잠수정들.
  독일이 최초의 잠수함 U-1을 1906년 12월에 건조한 것으로 미뤄볼 때, 일본의 잠수함 건조 역사는 독일보다 1년이나 앞서는 셈이다. 군사 무기 관련 연감인 《제인 함정 연감》은 일본이 잠수함 보유 척수 22척으로 척수면에서 세계 5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일본은 1905년 이후 줄곧 독자모델 개발을 추진했고,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전투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모델들을 개발해 전투에 투입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할 때 일본은 63척의 잠수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윤연 제독은 “일본 잠수함이 독일 잠수함처럼 전쟁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 것은 건조 능력보다 운용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독일이 통상(通商) 파괴전으로 전쟁 물자를 차단해 영국을 항복 직전으로 몰고 갔던 것과 달리, 일본은 잠수함을 오로지 미국의 전투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운용했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A-1형, B-1형, C-1형으로 나뉘는 일본의 공격형 잠수함들은 최대속도 23노트(시속 41km), 수중 8노트(시속 14km), 항속거리는 2만5200km였다. 항속거리는 미국 본토 서해안과 파나마운하 입구까지 진출하기 위한 것이었고, 순항속도는 미국 전투함대를 측방에서 추적 및 추월해서 어뢰공격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1939년 어뢰와 유사한 모양의 A형 잠수정(2인승)을 700여 척 건조해 수상함 모함이나 공격형 잠수함에 탑재해 미군 함대 주력함들을 공격했다. 잠수정은 항모나 전함, 순양함 등 대형 표적함에 접근해 어뢰를 발사하고 복귀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동력원인 축전지를 재충전할 발전기가 없었고, 모 잠수함을 상봉하는 계획이 없어 사실상 ‘자살 특공대용’으로 사용됐다.
 
  일본의 잠수함은 설계상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2인승 A형 잠수정은 대양에서 운용하기에 항속거리가 짧았을 뿐만 아니라 잠망경 노출 높이가 낮아 파도 속에서 선체가 돌출되거나 파도에 가려 표적을 관측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전기·통신 기술이 미국에 뒤떨어져 음탐기, 레이더, 사격통제장치, 통신기 등의 성능은 미국 잠수함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에어컨과 습기제거제가 없어 열대 해역의 경우 일본 잠수함 승조원들은 섭씨 37도 이상의 실내에서 탈진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일본 잠수함이 사용한 어뢰의 성능만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이 사용한 어뢰는 속도, 주행거리, 폭약 성능이 우수해 전 세계 어뢰 가운데 가장 신뢰도가 높았다. 그러나 우수한 어뢰 성능에도 불구, 잠수함 운용 전략과 전술의 실패로 잠수함들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일본은 하늘에서는 자살특공대 ‘가미카제’를, 수중에서는 ‘가이텐(回天)’을 운용했다. 미국을 상대로 정상적인 작전을 펼칠 항공기와 수상함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잠수함 부대는 잠수정과 어뢰의 특성을 살린 자살병기로 2명이 조종해 표적에 돌진하는 ‘인간어뢰’였다.
 
  레이테만 해전에서 가미카제 특공대가 미 항공모함에 타격을 가하자, 일본은 혼슈 부근 오쓰섬(大津島) 가이텐 비밀기지에서 훈련 중인 장교들을 1944년 11월 8일 처음으로 12척의 가이텐에 올려 미 구축함 접근을 시도했으나, 1척만이 미 유조선 USS 미시시네와를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침몰 또는 좌초하고 말았다.
 
  일본은 전쟁 말기에 독일의 21형 잠수함과 같은 수중 고속 기동 잠수함을 제작했다. 외부 구조물은 단순화하고 축전지의 용량을 크게 늘린 1300톤급 I-201형 고속 기동 잠수함은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대항해 해안방어작전에 투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잠수함 3척은 1945년 2월 완성되는 바람에 한 번도 전투에 투입하지 못했다.
 
  일본의 잠수함 개발 능력은 잠수항모까지 개발할 정도로 진보한다. 지난해 12월 미 하와이대 부설 하와이해저연구소 연구진이 오아후 바다 700m 해저에서 122m 길이의 잠수함 센토쿠(潛特)급 I-400을 발견한 것이 그것이다. 일본은 전투기 3대를 한꺼번에 탑재할 수 있는 항모잠수함 I-400, I-401 두 척을 건조해 미국의 태평양, 대서양 간 함대 이동을 제지하려 했다. 이 잠수항모는 배수톤수가 5200톤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잠수함이었다.
 
  일본은 또 동남아 해역에서 미국의 봉쇄를 뚫고 일본 본토로 원유를 수송하기 위해 I-400형 3번함인 I-402를 진수시켰다. I-400, I-401 두 척에는 102피트(31m)의 실린더형 비행기 격납고가 갑판에 설치됐고, 비행기를 이륙시키기 위한 85피트(26미터) 길이의 사출장치가 있었다. 항공기 격납고 도어는 함수 쪽으로 열리게 설계돼 있었다.
 
  항모잠수함들은 최초 공격 목표로 미 올리시에 정박 중인 미 항공모함을 선택하고 I-400형 등 4척을 작전에 투입했으나 공격 개시일이 8월 17일이어서 탑재 항공기를 발진도 시켜보지 못하고 전쟁을 끝냈다. 잠수함 4척은 항복을 의미하는 검은 깃발을 게양하고 도쿄만으로 향했고, 전대장으로 I-401에 타고 있던 아리이즈미 다쓰노스게(有泉辰之助) 대령은 입항과 동시에 권총으로 자결했다.
 
 
  美, 알바코어급 설계기술 日本에 제공
 
  일본은 1905년부터 현재까지 263척의 잠수함을 건조한 나라다. 잠수함 설계와 건조기술 강국인 것이다. 독일이 1, 2차 세계대전 동안 1540척의 잠수함을 건조했지만, 그 종류는 11종에 불과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40여 종, 170여 척을 건조했다.
 
  패전 후인 1955년 일본은 미국의 대여 잠수함 ‘구로시오(미국 함명 밍고)’를 유일한 잠수함으로 운용했으나, 잠수함도 건조가 허용되자 1960년 전후 최초로 국산 잠수함 ‘오야시오’를 건조했다. 현재 일본은 오야시오급(3000톤급) 11척, 하루시오급(2750톤) 3척, 소류급 4척 등을 보유하고 있다.
 
  그 후 계속적으로 잠수함 건조가 이어지면서 기술도 축적되기 시작해 2009년에는 공기불요동력장치(AIP·Air Independent Propulsion) 기관을 탑재한 세계 최대의 통상 잠수함 ‘소류’가 취역했다. 일본은 디젤엔진 발전기로 전 세계에서 가장 정숙하다고 알려진 스웨덴의 스털링(Stirling)엔진을 소류형 잠수함에 장착했다.
 
  소류형 잠수함은 스털링 방식의 AIP를 장착해 수중(水中)에서 지속적으로 2주 이상 작전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류형 스털링엔진은 스웨덴의 코콤스사(社) 제품으로, 가와사키중공업이 라이선스로 도입해 국산화했다.
 
  일본인들은 일본 잠수함을 이야기하면 관서(關西) 지방의 사투리를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잠수함은 미쓰비시중공업과 가와사키중공업 2개사가 건조하고 있고, 두 조선소는 모두 고베(神戶)에 있기 때문이다. 두 회사는 1959년부터 매년 사이좋게 연간 1척씩 나눠가며 건조하고 있었으나, 1999년 방위성이 방산 제품에 경쟁 입찰 제도를 도입함에 따라 졸지에 협력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바뀌었다고 한다. 두 개 회사를 건조사로 하는 것은 잠수함 설계와 건조기술, 인력, 생산시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일본 정부의 복안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안승범(安承範) 《디펜스타임즈》 편집장은 “일본은 1968년 미국의 ‘알바코어급’ 잠수함 설계기술을 바탕으로 ‘우즈시오급’을 건조하면서 오늘의 잠수함 전력을 건설할 수 있었다”며 “원자력 추진 잠수함(SSN)을 가질 수 없는 일본은 재래식 잠수함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선체로 인정받은 미 해군의 알바코어급 기술을 비공식적으로 전수받았던 것”이라고 했다.
 
  안 편집장은 “전후 일본 잠수함의 계보는 유우시오급, 하루시오급, 오야시오급 그리고 현재의 최신형 소류급으로 이어진다”며 “함정 건조 능력은 한국과 격차가 많이 줄었지만, 일본의 누적형(눈물방울형) 잠수함 건조 역사와 이제 막 설계를 진행 중인 한국의 3000톤급 중잠수함 역사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日,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하나
 
AIP를 탑재한 해상자위대의 3000톤급 잠수함. 호주는 일본의 잠수함 기술을 배우기 위해 최근 일본에 잠수함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일본의 4200톤급 디젤잠수함 소류는 디젤잠수함으로는 덩치가 커 원자력 추진 잠수함으로 착각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핵추진 잠수함을 보유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일본은 함정용 동력원인 원자로(原子爐)를 ‘무쓰’라는 상선에 탑재해 시험운용에 성공했다.
 
  일본은 미국, 소련, 독일 등의 원자력 선박 개발에 자극을 받아 1963년 일본 원자력개발사업단을 설립, 원자력 상선 ‘무쓰’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1970년 선체부를 완성하고 1972년부터 핵연료를 투입해 해상 시운전을 시작했다. 1990년 일본 최초로 원자력 동력항해를 시작해 1991년 2월에는 우라늄(U-235) 4.2kg으로 8만2000km 실험 항해에 성공하며 원자력 상선 무쓰를 완성시켰다.
 
  해군의 한 관계자는 “핵무기를 제조, 반입, 보유하지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유지하는 일본은 외교력을 통해 우라늄 농축시설과 재처리시설을 완비하고 있다”면서 “잠수함 선진국 일본은 정부가 결심만 하면 1년 이내에 소류급과 같은 대형 디젤잠수함에 원자로를 탑재해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운용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무기 수출 3원칙을 폐기하며 무기 수출의 족쇄를 풀어버리자 일본 언론은 이를 “군수산업의 개국(開國)”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패전 이후 일본의 군수산업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과거 일본은 무기 제조 역량에서 세계 정상급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패전으로 군수산업 자체는 크게 축소됐으나, 기술력과 잠재력은 여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무기에 대한 동남아 지역을 비롯한 각국의 ‘러브콜’이 이어지자, 일본 정부는 내년에 무기 수출을 전담할 ‘방위장비청’ 신설까지 고려하고 있다.
 
  한용섭(韓庸燮) 국방대 안보문제연구소장은 “전후 일본의 방위산업은 일시적 와해를 경험한 뒤, 6·25전쟁 등 대내외적 기회요인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태평양 전쟁 수행을 통해 형성된 기술과 인력 기반을 빠르게 재결집했다”면서 “지금 일본의 방위산업은 세계 최정상급은 아니지만, 일본 특유의 ‘벤쿄(勉强)’ 정신으로 무장하면 옛 명성을 되찾을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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