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집중점검

세계시장 석권 노리는 일본 방위산업의 실력 ① 항공무기 편

‘제로센’에서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 ‘F-3’까지… 100년의 軍用機 노하우 보유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1910년 첫 동력비행 성공… 100여 년간 면허 생산과 항공기 자체 개발을 병행하는 방식 固守
⊙ 日, 태평양전쟁 기간 3만6500대의 전투기 생산… 1944년경 12개의 항공기 제작사 보유
⊙ 6·25전쟁 때 면허 생산으로 항공산업 부활… 1958년 제트엔진 중등훈련기 T-1 자체 개발
⊙ 2022년경 실전배치할 F-3는 중국·러시아 등 주변국 스텔스기 대항용
⊙ “무기 수출 본격화하면, 수송기 등을 중심으로 동남아와 중동 시장에서 강세 보일 것”

취재지원 : 劉旿相 月刊朝鮮 인턴기자
일본 항공자위대의 주력기인 F-15J가 F-2A 지원전투기(가운데)와 나란히 비행하고 있다.
  최신형 해상초계기 P-1, 신형 수송기 C-2, 국산 스텔스기 F-3, 최신예 잠수함(SS급), 10식 전차…. 일본의 첨단 육해공 무기들이 글로벌 무기 시장에서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방산업체들과 경쟁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2013년 10월 일본 정부는 총리 자문기구인 ‘안전보장과 방위력에 관한 간담회’를 통해 무기 수출을 금지한 ‘무기 수출 3원칙’의 개정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에 따라 1967년 이후 역대 정권이 계승해 온 ‘무기 수출 3원칙’에 따른 무기 수출 금지 원칙이 조만간 완화될 전망이다.
 
  1967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가 천명한 무기 수출 3원칙은 공산권 국가, 유엔이 무기 수출을 금지한 국가, 국제분쟁 당사국 또는 그 우려가 있는 국가에 대해 무기 수출을 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도쿄대학에서 생산 중인 ‘펜슬(연필) 로켓’이 인도네시아와 유고슬라비아로 유출되자, 사토 수상이 중의원(衆議院)에 출석해 정부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작은 외할아버지 사토 총리(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동생)가 밝힌 무기 수출 3원칙을 대체할 새로운 무기 수출 통제 원칙을 만들기로 했다.
 
  아베 정권이 마련한 대체안은 ‘일본의 안보에 이바지하는 경우’ 무기를 수출할 수 있도록 규정해 역대 정권이 견지해 온 무기 수출 규제를 사실상 푸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유엔이 정한 금지국과 국제분쟁 당사국 등에 대한 금지 규정은 유지하기로 했다. 《아사히신문》은 “아베 정권이 마련한 새 원칙은 ‘정부정책의 대전환’을 의미한다”며 “앞으로 무기 수출 품목과 지역이 많이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무기 수출 3원칙’ 완화로 日방산업계 ‘들썩’
 
일본 항공자위대의 비행곡예팀 블루임펄스(T-4 중등훈련기)가 구마타니기지에서 곡예비행을 펼치고 있다.
  박영준(朴榮濬) 국방대 교수는 “아베 신조 총리가 1967년 이래 불문율로 유지해 온 ‘무기 수출 3원칙’의 완화를 공식화하는 수순에 들어간 것은 무엇보다 ‘일본의 보통 국가화’ 기반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포석의 성격이 강하다”며 “한편으로 ‘무기 수출 3원칙’ 완화는 일본이 무기 개발 및 무기 수출을 통해 방위산업을 강화하고 막대한 이득을 얻으려는 경제적 목적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일본 방위산업체들은 자국 정부에 1990년대 이후 미국 등과 공동 무기 개발, 무기 생산이 가능하도록 무기 수출 3원칙을 해제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해 왔다. 무기 시장이 내수(內需)에만 국한돼 생산수량이 제한됨에 따라 조달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 경쟁력이 없어진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은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당시 미사일 방어 시스템과 관련, 미·일 공동개발과 함께 제3국 수출을 예외로 인정하는 등 실제로 ‘무기 수출 3원칙’은 사문화(死文化)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 경단련(經團連)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일본의 공업생산액은 약 250조 엔(약 2606조원)으로, 이 가운데 방위산업 생산액은 약 1.9조 엔(약 11조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방위산업 생산은 일본 전체 공업생산액의 0.7%, 자동차 생산액의 20분의 1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일협정 비준 후 사토 에이사쿠 일본 수상이 평의원 회의에서 답변하고 있다. 사토 수상은 1967년 무기 수출 3원칙을 천명했고, 그의 외손자 아베 총리는 무기 수출 3원칙을 완화 내지는 폐지하려 하고 있다.
  현재 일본 방위산업의 유일한 ‘고객’은 방위성(防衛省)과 자위대(自衛隊)다. 이에 대해 일부 방위산업 업체는 “수출을 하면 수입도 늘게 돼 해외 제품과의 경쟁력이 더 떨어질 것” “분쟁국이나 테러리스트에 방산물품이 전용돼 팔릴 우려도 있다” “무기 체계를 생산해 실제 전장(戰場)에서 사용하는 검증 과정을 거치지 못해 전 세계 군인들의 요구 성능에 맞추기 어렵다”며 무기 수출 가능성에 부정적 시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송화섭(宋和燮) 한국국방연구원(KIDA) 일본실장은 “일본은 항공무기, 해상무기, 육상무기 등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축적해 온 무기 제작 노하우가 세계 정상급 수준”이라며 “실제로 ‘무기 수출 3원칙’이라는 ‘족쇄’만 풀린다면 일본의 방위산업은 전 세계 방산 시장의 판도를 뒤바꿀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방위청 장관을 지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자민당 간사장은 “냉전이 종말을 고하고 시대의 조류가 ‘공동연구’ ‘공동개발’ ‘공동사용’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 무기 수출 3원칙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무기 개발의 리스크와 비용을 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무기 수출 3원칙 완화로) 실전을 경험하지 않은 고가의 일본산 전투기, 호위함, 전차가 세계 시장에서 팔릴 수 있도록 방산업체들은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103년의 항공기 제작 역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이센(零戰)’ 함상전투기(일명 제로센)로 연합군 파일럿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일본의 항공기 제작 기술은 현재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 F-3를 2022년 창공에 띄울 정도까지 왔다.
 
  1910년 12월 처음으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일본은 103년의 항공기 제작 역사를 갖고 있다. 1903년 12월 7일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12초간 동력비행에 성공하고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와 독일제 기체를 창공에 날린 것이다. 당시 일본은 엔진은 물론 기체를 제조·생산하는 단계에는 미치지 못했다.
 
  일본은 육군성, 해군성, 문부성 3성이 공동으로 설립한 ‘임시군용기구연구회’에서 항공기 관련 사업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초기 일본의 항공산업은 군(軍)이 주도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항공기 연구 상황은 악화됐다. 세계대전으로 기체와 엔진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모방생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방생산한 엔진은 성능이 불안정한 등의 기술적 한계가 있었지만, 일본은 모방생산을 통해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축적했다.
 
  항공기 개발의 실행 주체였던 임시군용기구연구회가 육군의 직속단체로 바뀌자, 해군은 1916년 함정본부에 ‘해군항공기술연구위원회’를 설치했다. 문부성도 ‘항공학조사위원회’를 설립함으로써 3성은 제각각으로 항공기 개발을 추구했다. 독자개발 노선을 걸으면서 육군과 해군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모방생산을 본격화한 시기, 민간에서도 항공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육군과 해군이 해외에서 항공기를 수입하면서 일부 소요를 민간기업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1919년 나카지마(中島) 비행기, 1920년 미쓰비시의 고베 내연기제작소가 설립되고, 이어 가와사키, 가와니시 등 훗날 일본 항공기산업의 핵심이 될 기업들이 속속 탄생했다.
 
  그러나 신생 제작사들은 설계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군이 기체나 엔진 제조권을 해외기업에서 구입, 해외기업이 보내준 기술자가 일본에 와서 도제식으로 생산을 지도하는 방식이었다.
 
  때마침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한 항공기의 재고가 쌓여 항공 시장이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우수한 서구 기술자들이 일본 항공기산업에 투입됐다. 일본은 1922년 체결된 워싱턴 조약으로 영·미에 비해 주력함 건조비율면에서 불리해졌다. 일본 해군은 전력 열세를 항공력 강화로 만회하고자 했다. 육군도 해군에 뒤질세라 1924년 육군항공본부를 설치했다.
 
  이러한 경쟁구도 덕분에 항공기 국산화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생산 능력도 눈에 띄게 성장해 군의 조병창(造兵廠)을 능가하는 항공기 제작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1930년 민간에서 개발한 항공기가 해군의 연습기와 함상전투기로 들어왔다.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상해사변은 일제(日帝)의 항공정책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두 사변을 겪은 일본군 수뇌부는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 효율적인 작전을 위해 더 많은 군용기를 요구했다.
 
 
  美軍, 제로센의 약점 파악해 공격
 
미군 항공기 64대를 격추한 일본 해군의 전설적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아래). 연합국 파일럿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제로센 전투기(위).
  1935년 미쓰비시가 A5M 96식 함상전투기를 개발하자, 일본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제로센 함상전투기의 개발 원형이 된 96식 전투기의 우수성을 확인한 일본 해군은 해외 구입을 중단하고 최신예 항공기를 독자적으로 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확전으로 전투기와 폭격기 소요가 급증했다. 1936년 한 해 동안 민간기업은 557대의 군용기를 생산했다. 이듬해에는 두 배인 1144대를 생산했다. 주변국 침략 의도가 노골화하면서 군용기 소요는 더 증가했다. 1938년 육군은 2262대를 요구했고, 1939년에는 3064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양산 요구에 일본 기업들은 기술과 자본이 역부족인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속도를 비롯해 항공기 성능이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레이더 등 최신 항공기에 장착되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정밀부품을 대량 생산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민간 항공기 제작사가 다양한 항공기를 만들어 일본군에 납품했다. 미쓰비시는 무려 1만500여 대의 제로센 전투기를 납품했고, 나카지마(현 후지중공업)는 2만6000여 대를 납품했다.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본에서는 60여만 명의 노동자가 연간 2만5000여 대의 항공기, 4만여 개의 엔진을 생산했다. 1944년경에는 12개의 항공기 제작사와 7개의 엔진 제작사가 풀 가동할 정도였다.
 
  일본 해군이 채용한 제로센은 뛰어난 기동성과 상승속도, 긴 항속거리 등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진주만 기습으로 초전에 승기(勝機)를 잡은 일본 해군의 베테랑 조종사들이 제로센에 탑승해 미군의 P-40 워호크나 F4F 와일드캣 함상공격기를 공략했다.
 
  실전 경험은커녕 비행경력도 짧았던 미군 조종사들은 성능이 뒤떨어진 전투기로 제로센을 막아섰다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졌다. 미군 조종사들은 ‘제로센 충격’에 빠졌다. 전후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일본 해군의 전설적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坂井三郞) 중위(2000년 작고)는 64대의 연합군기를 격추했다.
 
  그러나 남태평양의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미군의 칵터스 항공대가 추락한 제로센 기체를 획득한 후 상황은 바뀌었다. 분석 결과, 제로센은 소문만큼 뛰어난 기체가 아니었다. 엔진 출력이 부족해 강력한 기동성을 확보하려고 장갑(裝甲)을 제거했던 것이었다. 기관포 몇 발만 맞아도 추락할 만큼 허약했던 것이다. 미국은 제로센이 공중분해 될 것이 두려워 급강하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챘다. 제로센의 허상이 드러나자 미군 조종사들은 강력한 기관포를 탑재한 F4U 콜세어 전투기를 앞세워 제로센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일본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제로센을 설계·제조했다고 자랑했으나, 제로센은 영국에서 개발한 글로스터 F.5/34 전투기를 복사한 것에 불과했다. 항공전문가 K씨는 “일본의 기술력은 모방설계와 생산까지는 가능했으나 엔진 출력을 강화하거나 장갑의 추가 장착 같은 큰 개조는 전혀 하지 못했다”며 “실전에서 요구되는 사항을 기체에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이 모방설계의 한계”라고 했다.
 
  일본은 항공기의 대량 생산에도 실패했다. 개전 초기 일본은 국력 차이를 고려해 항공기 생산목표를 미국의 3분의 1 정도로 책정했다. 1944년 일본은 일시적으로 이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균일한 품질 유지였다. 균일한 품질은 항공기의 실제가동률과 직결되는 것이다.
 
 
  제트전투기 ‘기카’ 개발
 
미군의 전략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일본 해군이 제작한 최초의 제트전투기 기카. 1944년 독일의 제트기 Me262를 원형으로 제작했다.
  일본 항공기들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가동률을 유지하지 못했다. 부품의 정밀성이 떨어진 것이 큰 원인이었다.
 
  숙련공들이 최종공정을 담당했던 전쟁 초반 육·해군 항공기의 가동률은 80%에 달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숙련공들이 대거 징집되자, 그 자리를 주부와 학생들이 메꿨다. 1944년 군 항공기의 가동률은 50%대로 곤두박질쳤다. 1945년에는 항공유 부족까지 더해져 20%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항공산업은 전쟁을 치르면서 한 단계 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제트기까지 생산했다. 나카지마가 ‘황국 2호 병기’라는 명칭으로 제트전투기인 ‘기카(橘花)’를 개발했다. 일본 해군은 미군의 전략폭격기에 대응할 결전 병기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호위기의 도움 없이 폭격기를 공격할 수 있는 단좌식 쌍발 제트요격기를 개발했던 것이다. 이 요격기의 원형은 동맹국인 독일의 Me 262 제트기였다. 제트기의 생산에서 큰 문제가 된 것은 엔진이었다. Me 262는 BMW 003 축류터보 엔진을 장착했다.
 
  일본은 독일로부터 설계도와 함께 견본으로 사용할 엔진을 제공받기로 했다. 그러나 이를 운반해 오던 잠수함이 미군에 격침되면서 설계도를 받지 못했고, 결국 BMW 003 엔진의 실물을 보며 복제할 수밖에 없었다. 시행착오 끝에 1945년 여름 이시카와지마 하리마에서 BMW 003를 카피한 Ne-20 엔진 개발에 성공했다. 8월 7일에는 이 엔진을 장착한 기카 시제기가 초도비행을 했다. 그날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종전 뒤 패전국 일본은 항공산업이 금지돼 기카를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카를 양산했더라도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Ne-20 엔진의 출력이 너무 낮아 이륙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항공전문가 K씨는 “그런 점에서 일본의 과거 항공산업은 과대 포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며 “하지만 2003년 마하 1.5의 T-50 고등훈련기로 제트기 시대를 연 우리나라보다 60년 앞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했다.
 
 
  6·25전쟁 계기로 항공산업 부활
 
2002년 10월 20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도쿄 북구 하야쿠리 공군 비행장에서 자위대를 사열하고 있다. 왼쪽이 F-4EJ, 오른쪽이 F-2 전투기다.
  미국 주도의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군정(軍政)을 통해 일본이 어떤 군사무기도 생산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항공기 관련 생산 및 연구활동이 전면 금지된 것이다. 세계가 프로펠러 추진 항공기에서 제트항공기로 발전해 가는 결정적 시기에 일본의 항공산업은 ‘직격탄’을 맞은 격이었다.
 
  항공전문가 K씨는 “속도에 따른 설계기술은 계속 진보하고 있었으나, 일본은 종전 후 제로센이 마하 0.5에서 멈췄기 때문에 당시 마하 1.5~2를 돌파하고 있던 항공선진국과의 기술 차이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사실상 일본이 1960년대에 항공기 제작을 다시 시작한 것은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라고 했다.
 
  5년도 지나지 않아 6·25전쟁 발발로 일본 항공업계는 ‘호기’를 잡았다. 1952년 4월 9일 6·25전쟁에 동원된 미군기의 창정비(廠整備) 활동을 계기로 일본의 항공기 산업은 부활하기 시작했다. 1954년 방위청이 설립되자 일본은 항공자위대 장비 조달을 위해 미국 군용기의 면허 생산을 추진했다.
 
  미국은 일본을 소련과 중공의 위협에 대처할 전초기지로 봤다. 미국은 기술과 군수지원 능력을 강화해 일본의 전쟁 억제력을 높이기로 했다. 1954년 미일 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국은 미군 식으로 자위대 장비를 표준화해 미 공군의 보조전력으로 양성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1954년 T-34 멘터 초등훈련기를 시작으로, 1955년 F-86F 세이버 전투기, T-33A 슈팅스타 고등훈련기, P-2J 넵튠 대잠기가 일본에서 면허 생산됐다. 일본 정부가 미국 정부와 양해각서(MOU)를 맺으면, 일본의 제작업체가 미국의 제작사로부터 기술지도를 받아 생산하는 식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모방생산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전후 빠르게 발전한 공업 기반을 토대로 일본은 선진국 수준의 품질을 갖춘 제품을 생산할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일본의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은 미쓰비시(三菱)중공업, 가와사키(川崎)중공업, 이시카와지마하리마(IHI) 중공업, 후지(富士)중공업 등 항공업계 ‘빅4’를 중점 육성했다. 이 가운데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중공업은 일본 최초의 제트기 ‘기카’의 엔진을 생산한 엔진 제작 전문회사다.
 
 
  호리코시 지로가 제작에 참여한 YS-11
 
영화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으로 제로센 전투기를 설계한 호리코시 지로(원 안). 호리코시 지로 등 일본의 항공기 설계 전문가들이 투입돼 1962년 첫 시험비행한 YS-11 민수용 항공기.
  미국은 군사원조사업으로 기술이전과 함께 미국 항공기의 일본 내 생산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등 항공산업 육성을 도왔다. 1954년 일본은 항공자위대를 발족하자 전투기를 도입해야 했다. F-86 전투기의 대당 가격은 1억5000만 엔, 방위청에 할당된 항공기 구입예산은 7억 엔에 불과했다. 미국은 미·일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항공기 구매에 필요한 예산을 상호방위 원조사업 형식으로 지원했고, 이 원조는 1964년까지 계속됐다.
 
  전후 일본이 생산한 항공기들은 제1세대 전투기나 헬기, 해상초계기 등이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일본은 최신 기종 생산에 도전했다. 1960년대에는 본격적인 마하 2급 전투기인 F-104J를 미쓰비시에서 면허 생산해 1967년 11월까지 총 210대를 항공자위대에 인도했다.
 
  일본은 군용기 개발과 함께 민간 항공기 개발에도 서서히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본 통산성은 진작부터 항공기 생산규제가 풀릴 것에 대비해 항공기 개발자를 관리해 왔다. 1957년 규제가 풀리자, 통산성은 재단법인 ‘수송기설계연구협회(수연)’를 발족시켰다. 운수성으로부터 일본 내에 필요한 항공기 수요를 확정받은 통산성은 수연으로 하여금 쌍발 터보프롭 중형항공기인 YS-11을 개발하도록 했다.
 
  일본은 축적된 항공기술을 실증하기 위해 면허 생산을 탈피해 항공기 독자개발도 병행했다. 민용기 개발에 나선 것은 군용기를 개발하면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기 때문이었다. 민용기를 양산해 수출로 실리를 도모하자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YS-11의 개발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최고의 군용기 설계 베테랑들이 투입됐다. 미쓰비시의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郞)를 필두로, 하야부사 전투기를 설계한 후지중공업의 오타 미노루(太田稔), 시덴카이 2식 국지전투기를 설계한 신메이와공업의 기쿠하라 시즈오(菊原靜男), 히엔 3식 전투기를 설계한 도이 다케오(土井武夫), 그리고 장거리 비행기록을 세운 항연기를 만든 도쿄제국대학의 기무라 히데마사(木村秀政)까지 일본 최고의 전문가 5명이 모여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1년여 만에 설계를 완료하고, 수연과 항공기 제작사들은 YS-11의 본격적인 개발과 생산을 시작했다. 이후 수연은 해체되고 민관 공동의 특수 법인인 ‘일본 항공기 제조(NAMC·Nihon Aircraft Manufacturing Corporation)’가 1959년 6월 1일 설립됐다. YS-11 시제 1호기는 생중계되는 가운데 1962년 8월 30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YS-11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기체였다. 군용기를 염두에 두고 개발한 탓에 민간 여객기에 필요한 쾌적함과 안전성,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러한 항공기는 민수시장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NAMC는 150대를 생산해 개발비를 회수할 예정이었지만, 그 정도의 생산으로는 비용회수가 어렵다고 판단, 180대로 생산목표를 높였다. 일본은 YS-11을 1973년까지 182대 생산해 민간 항공사는 물론 항공자위대에도 배치하고 해외 수출까지 했다.
 
  그러나 생산 대수를 늘리자 적자 폭도 따라서 커져만 갔다. 처음으로 해보는 민간 여객기 사업인데다, 높은 생산원가와 판매대금 회수의 지연, 과다한 개발 및 생산비용 등이 원인이었다. 엄청난 ‘과외비’를 낸 일본은 1974년 2월 YS-11 생산을 중단했다.
 
  그러나 YS-11 사업 자체는 생산량이 부족해 적자였지만, YS-11을 개발하면서 얻게 된 기술은 이후 C-1 수송기로 이어져 YS-11은 일본 항공기술력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T-2 훈련기 개발해 전투기로 임무전환
 
미·일 공동으로 개발한 F-2 지원전투기. 형상일체성형술을 적용한 기체로 공중전에서 기동성이 뛰어나다.
  YS-11이 실패하자 일본은 항공산업의 승부를 군용기 개발에 걸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의 근거로 항공산업이 발전한 나라들은 민수용이 아니라 군용기 개발로 사업을 지탱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제작된 29개 기종의 제트여객기 가운데 손익분기점을 넘는 기종은 보잉에서 만든 4기종뿐이었다. 일본은 보잉이 30년이 넘는 투자와 군의 지원을 받았기에 겨우 민수 시장에서 이익을 낼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군용기를 개발해야 국내와 해외에 시장이 형성돼, 각종 부품과 서브 시스템에 대한 수요가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군용기를 개발해야 마이크로 전자산업과 컴퓨터·통신산업 등 최첨단 산업 분야가 발전하는데, 이 분야 기술은 민간기로 전용할 수 있다. 군용기 사업을 통해 최첨단 기술을 계속적으로 개발하고 육성하는 ‘기술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속내였다.
 
  당시 세계 최대의 민수 항공 시장을 보유한 미국조차 항공기의 60% 이상을 국방부가 구매했다. 나머지도 미국 내 정부기관이나 다른 나라의 군이 구매했다. 일본에서는 자체 생산하는 항공기의 80%를 방위청이 구매했다. 제트엔진을 생산하는 가와사키중공업은 민수 판매는 거의 하지 못했다. 따라서 군용기 사업을 계속 일으켜 군이 구매하게 해야 항공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통산성은 판단했다.
 
  일본은 전투기를 독자개발하고자 했다. 일본은 항공산업이 해방을 맞은 1956년 중등훈련기 T-1의 자체 개발을 추진해 1958년 초도비행을 성공시켰다. T-1은 ‘기카’ 이후 최초의 제트기였다. 그러나 미군이 무상으로 훈련기를 공여해 준 데다, 일본에서 면허 생산한 항공기들이 우수했던 이유로 T-1은 66대만 생산되고 사라졌다.
 
  그리고 초음속 훈련기 필요성이 부각되자 T-X(차기 훈련기) 사업을 시작했다. 전범국 일본은 T-X 사업에 초음속 훈련기만 개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노스롭사의 T-38훈련기/F-5전투기가 하나의 플랫폼으로 개발해 훈련기와 전투기 양쪽으로 사용한 대표적 케이스였다.
 
  T-X 사업 주관 기업으로는 미쓰비시가 선정됐다. 영국과 프랑스의 합자회사인 SEPECAT에서 개발한 ‘재규어’를 개발 원형으로 삼기로 했다. T-X 사업으로 개발된 T-2는 1971년 초도비행에 성공해, 모두 96대가 생산됐다. T-2는 철저하게 국산화에 집중했다. 전체 부품 가운데 자체 개발한 것이 56.5%, 면허 생산한 것은 41.8%였고, 직수입한 것은 1.7%에 지나지 않았다.
 
  T-2라는 초음속 기체가 확보되자, 일본은 이를 근접지원임무용 전투기(즉 공격기)로 개수하기 시작했다. SF-X 사업에 들어간 것이다. T-2의 구조를 변경해 최소 비용으로 초음속 지원전투기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T-2의 후방석을 제거하고 전자장비를 추가했으며 하드포인트(무장 장착용)를 증설해, 전후 일본 최초의 국산 전투기인 F-1 지원전투기가 탄생했다. 일본의 전투기 부대는 크게 요격전투기와 지원전투기로 구분된다. 요격전투기는 주로 방공임무를 담당하고, 지원전투기는 해상 및 지상 지원을 담당한다. F-1이 일본이 독자개발한 최초의 지원전투기인 셈이다.
 
  1978년 4월부터 실전배치된 F-1은 160대를 생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F-4EJ의 수량 확보와 개량을 위해 예산이 축소돼, 77대만 생산됐다. F-1은 1970년대의 공격기치고는 항속거리가 멀고 지상공격 능력도 갖췄다. 정비도 간편했고, 부품 국산화율이 높아 일본 항공기술력을 15년 앞서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美, F-2 공동개발 통해 ‘일체 성형 기술’ 배워
 
1974년 F-104J 후계 기종으로 선정돼 일본의 주력기가 된 F-15J. 1976년 소련 조종사 벨렝코의 망명으로 선정이 앞당겨졌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방위청을 중심으로 한 정부와 항공기업들 사이에는 향후 개발할 전투기는 완전 국산화한 것이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70년대 주력 전투기인 F-4EJ의 국산화율은 무려 99%에 달했지만, 1980년대 주력 기종인 F-15J에서는 75%까지 하락하고, 사업 손실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82년 F-1의 후계 기종을 개발하는 FS-X(Fighter Support eXperimental·차세대 지원전투기) 계획을 입안했다. 일본은 엔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 개발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미쓰비시중공업과 가와사키중공업은 전투기 개발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제출하고 각각 독자 모델을 제안했다. 그러나 엔진을 국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첨단을 추구하면 개발비가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그때 미국은 독자개발을 하려는 일본에 ‘국제공동개발’이라는 카드로 제동을 걸었다. 반도체로 대일(對日) 무역역조가 심했던 차에 전투기 독자개발 시도는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미션 컴퓨터 개발에서 성과를 올리지 못해 완전한 자국산 전투기 개발이 어렵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1987년 FS-X는 국내 개발이 아니라 미국과 공동개발한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일본은 F-15, F-16, F/A-18 세 기종 중 어느 것을 FS-X의 개조 모체(母體)로 삼을지 고민했다. 그때 가장 유력한 기종인 F-16의 제작사인 제너럴 다이내믹스(현 록히드 마틴)가 기수(機首) 재설계와 복합재료의 사용, 일본산 항전장비 탑재 등 일본 측의 주요 요구사항을 수용하겠다고 회신, FS-X는 F-16을 기초로 공동개발하는 것으로 낙착됐다.
 
  공동개발에 들어가자 여러 가지 문제점이 튀어나왔다. 업무분담은 일본이 60%, 미국이 40%로 결정되었지만, 개발 단계에서는 미국이 60%가 됐다. 가장 큰 문제는 기술이전이었다. 1989년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일본의 대미무역 불균형 등을 문제 삼으며 F-16 기술이전을 막고자 했다.
 
  F-16의 소스코드 이전을 제한하고 미국의 사업분담률은 최대로 보장받는 반면, 일본이 보유한 기술은 반드시 제공받도록 보증한다는 불평등협약을 적용한 것이다. 일본이 미국에 협력한 핵심적인 이유는 엔진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인데, 미 의회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기술이전만 이루어졌다.
 
  F-2 전투기는 일본 측이 제작한 탄소계 복합소재로 ‘일체 성형 복합재 기술’을 적용해 동체와 날개의 접합 부분을 없앴고, 그 결과 주익(主翼)의 면적을 약 25% 늘려 기체를 0.7t 가볍게 해 선회 성능을 향상시켰다(훗날 미국은 일본에 배운 일체 성형 복합재 기술을 F-22 제작에 적용했다).
 
  연료 탑재량(최대 1500갤런)을 늘려 작전반경(834km)을 크게 늘렸으며, 스텔스성 향상을 위해 전파흡수도료(RAM)를 최초로 적용했고, 미쓰비시가 개발한 전자식 능동위상배열 레이더(APAR·Active Phased Array Radar)를 장착했다. F-2 전투기는 주익의 균열문제가 발생했지만, 1995년 초도비행을 거쳐 2000년부터 실전에 배치됐다.
 
  F-2는 비록 공동개발이었지만 전투기에 대한 일본의 독자개발 의지가 매우 강하게 반영된 기종이다. 엔진을 제외한 내부 장비는 실질적으로 일본이 독자개발한 것이어서 F-2는 기존의 F-16과는 상당히 다른 ‘일본식 전투기’가 됐다. F-2에 명명된 ‘바이퍼 제로(Viper Zero)’는 옛 제로센의 영광을 꿈꾸기 위한 일본의 의지가 반영된 이름이다. 전문가들은 독도에 한일 영유권 분쟁이 발생하면, 같은 F-16 전투기 계열인 양국의 F-2와 KF-16이 라이벌로 격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차세대 초음속 여객기(SST), 프랑스와 공동으로 연구개발
 
  FS-X의 개발 과정에서 실망한 일본은 군용기 개발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냉전 종식으로 군축 붐이 일었고, 방위수요도 줄어들었으니, 군용기 개발은 항공산업을 이끄는 기관차가 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경제산업성은 중소형 민간 항공기 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일본 항공산업의 두드러진 특징은 미국과 여객기 공동개발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이다. 최초에는 30~50인승 소형 제트여객기 개발을 추진하다가, 나중에는 사업성이 높은 70~90인승 중형제트기 개발로 전환했다.
 
  그에 따라 미쓰비시가 추진한 것이 MRJ(Mitsubishi Regional Jet)라는 중형여객기 개발사업이다. MRJ 시제기는 2013년 초도비행했다. MRJ는 YS-11 이후 일본이 개발한 최초의 민항기로, ANA(전일본항공)가 25대, 미국의 트랜스 스텝 홀딩스(Trans Step Holdings)사가 100대, 홍콩의 ANI 그룹 홀딩스가 5대 등을 사전 계약해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항공업체들은 미국 보잉의 B-767, 777, 787이나 유럽 에어버스사의 여객기 개발에 하청업체로 참여해 왔다. 보잉 787 드림라이너에서는 전방동체와 윙박스 등 주요 부분 제작에 공동개발자로 참여하는 등 전체 사업 분담량의 35%를 차지했다. 1980년대에 보잉 767 부품을 일본이 15%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것이다.
 
  일본은 미국 이외 국가의 여객기 개발사업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유럽의 에어버스 A380 사업에는 일본 기업 18개사가 공급업자로 참여해 조종석 시현장치, 미익(尾翼), 복합재 등을 납품하고 있고, 캐나다와 브라질에서도 협력사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2005년 4월 콩코드의 뒤를 이을 차세대 초음속 여객기(SST)를 프랑스와 공동으로 연구개발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은 초음속에 견디는 복합재와 엔진 등 관련 기술을 공동으로 연구한 뒤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기체 개발도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일본의 민항기 제작기술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최근 들어 일본은 본격적으로 여객기 제작에 뛰어들었다. 최근 일본 경제산업성은 미쓰비시중공업이 개발 중인 제트여객기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경제산업성 자문기구인 산업구조심의회 산하 항공기위원회에 전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제트여객기 개발을 위해 민관이 함께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80석 규모의 이 제트여객기 개발에는 민간과 정부가 공동으로 자금을 투자하고 있고, 2012년 시험비행을 했다.
 
 
  항속거리 8000km의 최신형 해상초계기 P-1
 
1970년 개발된 C-1수송기를 대체하기 위해 일본 순수기술로 제작한 차기 수송기 C-2. 에어버스의 A400과 경쟁 기종이다.
  최근 들어 군용기에서도 괄목할 만한 개발이 있었다. 일본은 1970년 개발된 C-1 수송기를 대체하기 위해 C-X(차기수송기) 사업과 P-3 해상초계기를 대체하기 위한 P-X(차차기 초계기) 사업을 2007년부터 동시에 추진했다. 일본은 개발비용을 줄이기 위해 P-1과 C-2 두 항공기를 만들 때 쓰는 치공구(治工具·물건을 고정할 때 사용하는 공구)를 최대한 함께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2013년 3월 일본 방위성은 최신형 국산 해상초계기 P-1의 개발 완료를 선언, 실전배치를 본격화했다. P-1은 엔진 등 모든 구성품이 일본 순수기술로 제작된 첫 제트항공기로 2000여 개의 일본 기업들이 개발에 참여했다. 2007년 1호기가 첫 시험비행에 성공한 뒤 2011년부터 배치될 예정이었지만 강도시험 중 날개와 동체에 균열이 발생, 배치가 1년 이상 지연됐다.
 
  P-1은 가와사키중공업이 만든 4발 엔진 초계기로, 길이 38m, 폭 35m, 최대이륙중량은 80t이다. 하푼 및 ASM-1 공대함 미사일, 매버릭 공대함 미사일, MK-46 어뢰 등 각종 무장을 9t 이상 탑재할 수 있다. 최대속도는 시속 830km이고 항속거리는 8000km에 달한다. 일본은 미국을 제외하곤 가장 많은 P-3C 해상초계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P-1은 구형 P-3C에 비해 항속거리 및 초계시간이 더 길다.
 
  전자주사식 레이더 등 첨단 항공전자 장비를 갖추고 있어 미국의 신형 해상초계기 P-8 포세이돈과 경쟁이 가능한 기종으로 평가된다. 지금도 일본의 대잠수함 작전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P-1의 도입으로 일본은 더욱 강력한 대잠 및 해상초계 작전 능력을 갖게 됐다. 특히 P-1은 미국을 대신해 서태평양에서 중국의 잠수함 및 수상함정 활동을 감시하고 유사시엔 직접 타격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 총 70여 대의 P-1을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이와 함께 유엔 평화유지군 등 국제적 역할 확대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C-2 신형 수송기를 개발 중이다. C-2는 가와사키중공업이 제작한 쌍발 엔진 항공기로 최대 37t의 물자를 수송할 수 있다. 최대 항속거리는 8900km에 달한다. 제원은 길이 43.9m, 폭 44.4m, 최대속도 시속 980km다. 900m라는 짧은 거리에서 이착륙을 할 수 있어 야지에서의 운용성이 뛰어난 것도 강점이다.
 
  2010년 1월 첫 비행을 실시했고 금년 말까지 개발을 끝낼 예정이다. 1970년대 일본이 자위대 수송기 C-64를 대체해 개발한 구형 C-1과 미국에서 도입한 구형 C-130 수송기를 대체하게 되며 총 40여 대가 도입된다. 방위사업청의 한 관계자는 “C-2는 에어버스의 A400와 경쟁 기종으로, 무기 수출 3원칙 완화에 따라 동남아와 아프리카, 중동 시장에서 상당한 강세를 보일 것”이라며 “현재 내수 중심인 일본의 방산시장이 동면에서 깨어나면 미사일이나 전투기 등 직접적인 무기 체계보다는 수송기 등 물자수송을 담당하는 무기 체계 쪽으로 무기 수출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항공기 개조사업으로 노하우 축적
 
아츠키기지에 계류 중인 미국과 일본의 첨단 대잠초계기들. 오른쪽이 2013년 개발 완료한 일본의 최신형 국산 해상초계기 P-1이며. 왼쪽이 록히드 마틴 P-3C의 후계기로 총 108기가 생산된 P-8 포세이돈. 오른쪽 상단의 검정색 항공기는 최근 무기 수출 3원칙 완화의 신호탄으로 인도 수출이 결정돼 주목을 받고 있는 US-2 구난항공기다.
  세계 3위권의 항공자위대가 보유한 전투기로는 F-15 계열 203대, F-4 계열 92대, 생산이 막 종료된 F-2 지원전투기 등이 있다. 이 중 주력은 미국의 F-15C를 개조한 F-15J다. 이 기종은 공대공(空對空) 전투에는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지만, 한국 공군이 보유한 F-15K(F-15E의 개량형)에 비해 대지(對地) 공격 능력은 떨어진다.
 
  일본은 F-15J의 한계를 인식해 1997년부터 21세기 동북아 전장 환경에서 생존력을 높일 수 있도록 일본형 다단계 성능 개조 계획(JMSIP·Japan 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을 진행해 2015년경 마무리할 계획이다.
 
  항공자위대 야마노 마사시 대령(공군 무관)은 “JMSIP는 항공자위대의 새로운 항공 위협에 대처하고, F-15J를 향후 20년 이상 제공전투기로 활용하기 위해 추진되는 사업”이라며 “개조 작업을 거친 F-15J는 레이더 성능이 강화되고 중거리 공대공 암람(AMRAAM) 미사일 발사 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했다. 그는 “항공자위대는 1981년 항공총대 직속으로 비행교도대를 설치했다”면서 “비행교도대는 F-15DJ 기종으로 각 기지를 순회하며 가상적기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일본은 F-4E를 공대공 전투에 적합하도록 개조해 1971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 국내에서 라이선스 생산한 F-4EJ에 AN/APG-66J 레이더와 중앙컴퓨터, 피아식별장치 등을 장착해 개조하는 작업을 1987년부터 벌이고 있다. 이렇게 개조된 기종은 흔히 ‘F-4EJ 카이(改)’라고 부른다. ‘F-4EJ 카이’는 일본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ASM-1/-2 공대함 미사일을 장착해 본격적인 대함공격기로 운용하고 있다.
 
  미·일 양국이 공동개발한 F-2는 F-16을 기본으로 기체 크기를 키우고 전자장비 성능을 강화한 것이다. 공대공 전투 능력도 우수한 편이지만 대지·대함 공격 임무로 운용되고 있기 때문에 지원전투기라고 부른다.
 
  F-2도 단발 엔진의 크지 않은 기체를 가지고 있어 장거리 타격용으로 운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F-2는 독자 기술 확보에 치중, 연구개발 비용이 많이 든 것도 단점이다. 일본이 2012년 가을 총생산 규모를 130대에서 98대로 축소하는 결정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동일본 대지진 때 마쓰시마(松島)기지의 F-2 전투기 18대가 쓰나미에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전투기인 F-1은 2012년 9월 퇴역 기념 행사를 치른 상태다.
 
  장호근(張浩根) 예비역 공군 소장은 “현재 일본의 전투기 전력은 공대공 전투 능력은 우수한 편이나 공세적 성격이 강한 장거리 타격 능력은 제한돼 있다. 하지만 “경계항공대가 보유한 E-767 공중조기경보통제기 4대와 E-2C 조기경보기 13대 등 지원 전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항자대의 전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최근 일본은 KC-767 공중급유기 4대와 예상 항속거리 6500km의 신형 수송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어 앞으로 영토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센카쿠 열도 일대에 대한 장거리 작전 능력이 대폭 강화될 전망이다.
 
  1990년대부터 일본이 도입을 원했던 기종은 F-22였다. 전통적으로 최고 성능의 미국 전투기를 면허 생산했던 일본의 입장에서 F/A-22의 도입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F-22는 미국의 최신 항공기술이 집약돼 수출이 쉽지 않았고, 일본으로서는 천문학적인 가격이 걸림돌이 됐다. 결국 일본은 대안으로 F-35 4대를 직도입하고 나머지 40대를 면허 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F-3, 이시카와가 제작한 국산 엔진 탑재 예정
 
  일본은 F-2 기종의 후속 전투기로 F-3 개발을 진행 중이다. 2020년대에 본격화될 것으로 보이는 F-3전투기는 5~6세대 전투기로 평가받고 있다. 2013년 10월 29일 일본 방위성이 주최한 방위기술 심포지엄에서는 일본이 독자개발 중인 스텔스 전투기 F-3의 구체적인 3차원 디지털 형상(DMU)이 소개돼 관심을 끌었다.
 
  F-3 전투기 형상은 헤이세이 24년(2012년)에 설계돼 ‘24DMU’라 불렸는데 일본이 본격적인 스텔스기 양산에 앞서 전반적인 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해 만든 기술실증기 ‘신신(心神·ATD-X)’보다 업그레이드된 것이었다. 일본은 24DMU에 앞서 1년 전인 헤이세이 23년(2011년)에는 23DMU 형상을 설계했다. 일본은 23DMU로 공중전 시뮬레이션을 실시, 그 결과를 가지고 개선점을 찾아내 24DMU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23DMU는 전방(前方) 스텔스 성능을 중시한 반면, 24DMU는 추가로 측면 스텔스 성능까지 확보한 형상이었다. 24DMU는 각종 미사일, 폭탄이 적 레이더파를 반사하지 못하도록 항공기 내부에 탑재하는 내부 무장창도 23DMU보다 개량된 형태였다.
 
  ‘24DMU’의 외형은 세계 최강(最强)의 스텔스 전투기인 F-22와의 개발 경쟁에서 패했던 미국 노스롭사의 YF-23와 유사한 형태인 것으로 드러나 주목을 받았다. 공중 기동 성능과 스텔스 성능을 함께 확보하는 설계가 이뤄진 것이 특징으로 쌍발 엔진 전투기다. 길이 15.7m, 폭 10.6m로 미국 록히드마틴사의 F-35보다 크고 엔진 추력도 강해 공중전 성능이 뛰어날 것으로 분석된다. 단발 엔진을 달고 있는 F-35A의 엔진 추력은 최대 19.5t이지만 일본 F-3는 엔진 한 개당 추력이 15t으로, 2개 엔진 추력은 모두 30t을 넘는다.
 
  F-3는 일본이 미·일 공동개발 형태로 만들어 실전배치한 F-2 지원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 중인 것이다. 상당수 국내외 언론은 기술실증기 ‘심신’을 앞으로 실전배치될 F-3와 같은 항공기로 보도해 왔다. 하지만 ‘심신’은 F-3를 개발하기 위한 시험기일 뿐, 본격 양산이 이뤄져 실전배치되는 항공기는 아니다. 그러나 심신은 지난 102년간 그리고 전후 55년간 일본이 추구해 온 첨단 항공기술이 모두 구현될 항공기이기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F-3 스텔스 전투기 개발을 위한 기술실증기 신신(위)의 모형과 신신의 형상(25DMU)을 조립하고 있는 모습(아래).
  ‘심신’ 기술실증기는 현재 1호기가 제작 중이며 2월 중 완성될 예정이다. 1호기는 금년 중 제조사인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첫 비행을 실시한 뒤 내년에 항공자위대에 인도돼 본격적인 시험비행에 나설 계획이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수한 공중 기동 성능과 공대공 무장, 첨단 통합 항공전자 장비 등을 모두 갖춰 24DMU보다 업그레이드된 25DMU를 만들고 있다. 일본은 이 25DMU와 내년부터 본격 시험비행에 들어갈 ‘신신’의 테스트 결과 등을 종합해 차기 독자개발 스텔스 전투기 F-3의 형상을 최종 결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일본은 F-3 전투기의 내부 무장창, 레이더, 화력제어 시스템 개발도 2017년까지 끝낼 계획이다. 일본은 총 100여 대의 F-3를 양산, F-35보다 많은 수를 보유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F-3는 일본 이시카와가 자체 제작한 엔진(XF-5)을 탑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방위성은 미국제 F-35A를 지상 목표물 공격 등 공대지용으로 주로 운용하고, 국산 스텔스기 F-3는 공대공 전투용으로 운용, 중국·러시아·한국 등 주변국의 스텔스기를 상대토록 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F-3는 사거리가 200km에 달하는 최신형 일본제 XASM-3 공대함 미사일도 탑재, 대함 타격 능력도 갖게 된다. 공군의 한 관계자는 “일본이 F-3를 쌍발 고성능 스텔스 전투기로 개발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한국형 전투기(KFX)를 단발이 아닌 쌍발 엔진 스텔스기로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독자개발 스텔스 전투기는 일본 아베 정권의 군비 증강 움직임 중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는 공군력 증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개발 중인 F-3 외에도 일본이 독자개발한 최신형 군용기들이 속속 배치되고 있어 일본 집단적 자위권 확보와 국제적 역할 확대에 도움을 줄 전망이다.
 
  장호근 장군은 “일본은 1910년 이후 무려 1세기가 넘도록 항공산업을 육성해 왔으나,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선진국에 비하면 뒤처진 상황”이라며 “하지만 수십여 년 동안 꾸준히 연구개발을 하고, 시스템 통합에 집중해서 쌓아온 일본의 노하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11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