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해외포커스

反日이라는 이름의 만병통치약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전 세계에서 아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삼는 건 한국·중국·북한뿐
⊙ 美의 ‘야스쿠니 참배 실망’ 성명은 주일대사관 차원에 불과
⊙ 日, 北美 전문가와 한반도 전문가를 통합 운용하는 등 글로벌 차원에서 외교전략 구사
⊙ 감정적 대응으로는 舊韓末 前轍 되풀이할 수도

劉敏鎬
⊙ 53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아베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이후인 작년 12월 27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일본을 찾은 것은 거의 3년 만이다. 지난번 찾았을 때는 3·11 동일본지진 대참사로 인해 일본 국민 대부분이 불안과 한숨으로 지내던 시기였다. 일본 국토의 3분의 1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열도(列島) 전체를 휩쓸던, 정신적 공황(恐慌) 상태에 있던 2011년.
 
  그로부터 1000일이 지난 일본의 모습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거리에 사람이 넘치고, 뭔가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활기로 가득 차 있다. 화려한 옷과 노출을 피하며 심각한 모습으로 등장하던, 이른바 텔레비전 프로그램 속의 ‘후킨신(不謹愼)’ 자제 분위기도 사라졌다. 국민적 아이돌 AKB48의 한 멤버가 누드화보집을 내놓았다는 뉴스가 스포츠 신문 1면에 실려 있다. 백화점에는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전(全) 세계에 염려와 불안의 대상으로 비쳤던 일본과 일본인은 3년 전과 180도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다.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최대의 주역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다. 그는 공공(公共)투자에 활용할 엔(円)을 마구 찍어내겠다는, 이른바 아베노믹스(アベノミクス)를 주창하면서 일본정치무대에서의 1인 독주시대를 열었다.
 
  아베노믹스는 크게 볼 때 세 개의 화살(第三の矢)로 구성돼 있다. 대담한 금융정책, 기동적인 재정정책, 그리고 민간투자를 환기시켜 주는 성장전략이 그것이다. 현재 아베가 선보인 것은 3개 중 하나 정도이다. 우려와 걱정도 많지만, 아베가 활용할 수 있는 화살은 아직 두 개나 남아 있다.
 
  한국에서 아베는 일본 우향우(右向右)의 원흉(元兇) 정도로 받아들여지지만,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다르다. 잃어버린 20년과 3년 전 대참사를 잊게 만들어주는 활기찬 지도자다.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塩野ナナミ)에 따르면,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지도자’쯤에 올라 있는 신념에 찬 인물이 아베이다.
 
 
  자꾸만 멀어지는 韓日
 
  아베가 총리가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보다 2개월 빠른 2012년 12월 26일이다. 그는 취임 즉시 잃어버린 20년과 3·11 동일본 대참사를 과거사로 돌려버렸다. 절망에 빠져 있던 1억2000만 일본인을 한순간에 희망모드로 바꾼다. 1인당 국민소득 4만5000달러 수준의 고(高)학력자 일본인을 한순간에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4인 가정의 가장(家長)조차 집안분위기를 새롭게 하기가 어렵다. 2014년 봄, 일본은 희망을 넘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강한 일본’에 대한 신념과 확신이 열도 전체에 넘치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의 희망과 자신감은 불안과 우려로 받아들여질 듯하다. 경제대국 일본이 엔저(円低)를 무기로 한국의 해외시장 점유율을 잠식하고, 제국주의·군국주의(軍國主義)의 망령(亡靈)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우려가 한국 신문·방송의 화두(話頭)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근대사는 식민의 역사이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한반도는 주권과 정신을 잃어버린 채, 일본 군국주의의 군홧발 아래에서 신음했다. 아베를 중심으로 한 일본 내 우향우 지식인들이 내뱉는 과거사 관련 발언은 우려와 불안을 넘어 반감과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한국인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드는 발언과 행동이 끊이지 않는다. 종군(從軍)위안부 문제를 합리화하는 데 이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유서(遺書)를 세계기록유산에 올리겠다고 공언한다. 이런 걸 보면서 한국 신문·방송, 지식인, 그리고 국민들은 대부분이 반일(反日)행보로 나아가게 된다.
 
 
  1000달러짜리 日食의 의미
 
  일본을 꾸짖고 일본인이 저지른 죄상을 세계에 알리는 것은 좋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반일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이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반일은 대부분 감정적이다. 계산하고 따지고 평가하는 이성적(理性的) 차원이 아니다. 조절하기 어려운,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무계획적이고도 즉흥적인 대응이다.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대응하는 반일이다. 권투로 치자면 12라운드까지 갈 경우에 대비하면서 양다리로 링을 빙빙 돌면서 싸우는 식이 아니라, 혈기 하나로 양팔만 휘두르며 달려가는 식이다.
 
  친일(親日)이든 반일이든,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감정으로서의 반일이 개인 차원을 넘어서 국가 간 문제로 나아가는 경우이다.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멀리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지만, 그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질 경우 거기에 따른 반대급부도 국가적 차원으로 닥쳐올 수밖에 없다.
 
  신문·방송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일본 관련 기사를 보자. 전 세계가 일본의 우경화 행보에 대해 반대하는 것 같다. 사실은 다르다. 일본의 행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할 이유 또한 없다는 것이 실상이다.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한국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로 한국인의 자긍심이 생기기 한 세대 전부터 일본의 경제력은 세계를 장악했다. 눈에 안 보이게 움직이면서, 특유의 조직력과 사교력으로 세계의 이스태블리시먼트(Establishment)를 친일파(親日派)로 바꾼 지 오래다.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뉴욕에서 최고급 요리는 일본요리이다. 다이긴조 사케(大吟釀酒)와 함께 제공되는 1인당 저녁 한 끼가 1000달러 선에 달하지만, 예약은 한 달 전에나 가능하다. 백만장자 일본인 손님들이 찾는 음식점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당을 찾는 손님은 대부분 백인이다. 물론 비싼 음식가격이 반드시 일본의 힘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고급’이란 이미지를 굳히는 데는 기여한다. 이스태블리시먼트는 자신만을 위한 고급을 좋아한다.
 
 
  세계가 야스쿠니 참배를 비난하고 있다?
 
지난 1월 30일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기간 중 종군위안부를 주제로 한 기획전이 열렸다.
  아베의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 참배 이후 미국은 짧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베의 참배에 대해 ‘실망(Disappointed)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신문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大書特筆)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야스쿠니 참배를 비난하는 그 흔한 상원이나 하원의 결의안 하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직 장관이나 정치인 개개인이 한마디 던지는 것이 비난기사의 대부분이다.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미국인의 반일메시지도 눈에 띈다.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실망’이라는 성명을 내놓은 것이 백악관이나 국무부가 아닌, 주일(駐日)미국대사관이라는 것도 한국 언론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실망’이라는 말이, 중국공산당이 위구르나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탄압할 때 나오는 비난들에 비하면 수위(水位)가 낮다는 것도 알리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전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중국·북한 외에 야스쿠니 참배 문제를 이슈화한 나라는 없다. 옳고 그르고, 정의롭고 아니고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감정적 대응의 특징 중 하나로 수동적(受動的)이란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주체적으로 판단하면서 해결해 나가는 능동적(能動的) 자세와 거리가 있다. ‘상대방이 저렇게 엉망으로 나오니까,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다’면서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나온다. 스스로 이슈를 만들어 일본과 함께 머리를 맞대면서 서로의 이익과 합일점(合一點)을 찾아내는 과정에서의 반일이 아니다. 일본이 저렇게 나가니까, 우리는 이렇게 대응한다는 식이다.
 
  독자 중에는 이런 생각에 대해 반감(反感)을 갖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렇게 막 나가는 일본을 그대로 두자는 말인가?”
 
  필자가 도쿄(東京)에 가기 전 한국에서 지인(知人)들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들었던 얘기이다.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필자는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정상(頂上)회담에 나서지 않거나, 70m2 공간에서 열린 프랑스 만화전(漫畵展) 같은 것은 답이 될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철저히 계산하지 않은 채, 한순간에 달구어졌다가 식어버리는 식의 이벤트로는 현재 한반도에 밀려드는 대변화의 판세를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글의 뒷부분에 강조하겠지만, ‘일본에 대한 한국’이라는 틀 속에서 얘기를 이어갈 수 없는 것이 2014년의 한반도 정세이다. 다시 말해 한일관계 속의 대응만으로는 ‘일본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을 관철할 수 없다. 일본이 아니라, 미국 나아가 아세안 전체가 일본과 연계되어 움직이고 있다. 가상적(假想敵) 수준이 아니라, 현실로서의 미국의 적(敵)으로 부상한 중국만이 이러한 틀 밖에 있다.
 
  북한조차 일본과 연계된 상태에서 한국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북한과 일본의 국장급 외교관이 지난 1월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결론적으로 한일 두 나라를 지지하는 지반(地盤)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손가락으로 상대를 비난하지만, 주변 환경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지도 알기 어려워진다.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하고 있지만, 일본은 변화하는 환경이란 큰 그림 속에서 한국을 상대하고 있다.
 
 
  아베의 발 빠른 대응
 
  그럼에도 한국의 여론이 반일로 치닫는 것은, 반일이 분노하는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켜 주고 치유하는 만병통치약(萬病通治藥)이기 때문이다. 반일을 전면에 내세우면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모을 수 있다. 반일을 내세우는 순간 내부의 모순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반일이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한국 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나흘 동안 프랑스 만화전 한국관의 참관자가 1만7000명 정도’라는 보도가 나왔다. ‘일본을 꺾은’ 여장관의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 나오지만, 70m2 공간에 무려 1만7000명이 다녀갔다는 얘기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반일이라는 열기에 취해 숫자 감각조차 둔해진 듯하다.
 
  ‘실탄 1만 발’ 사건은 만병통치약 반일의 효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지난해 12월 23일부터 신문 지면을 채웠다가 한순간에 사라진 의문투성이의 사건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 남(南)수단의 한국의 한빛부대가 주인공이다. 유엔남수단임무단(UNMISS)의 일원으로 남수단에 파견된 한국군 한빛부대가 반군(叛軍)의 위협에 직면해 현지의 일본 자위대로부터 실탄 1만 발을 빌렸다.
 
  당시 일본은 한국 측의 실탄제공 요청에 대해 발 빠르게 대응했다. 아베가 신설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첫 번째’ 회의가 급히 열렸다. 안건은 한국에 대한 1만 발 실탄제공 여부. 1967년 사토 에이사쿠(佐藤筞作) 수상 이래 일본은 무기수출 3원칙을 견지해 왔다. 공산권, 국제결의에 의해 수출이 금지된 나라, 분쟁 당사국이나 분쟁 가능국에 무기 수출이나 반출(搬出)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3번째에 해당된다. 무기수출 3원칙에 따르면 한국에 실탄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베는 NSC 회의에 이어 각의(閣議)를 열어 한국군에 대한 실탄 1만 발 지원을 결정했다.
 
 
  ‘집단적 자위권’ 실천
 
분쟁 중인 남수단에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된 한빛부대 장병들이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 행보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보여준 가장 빠른 의사결정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본에서 국방안보 문제에 관한 이슈는 정치가로서의 자리를 보전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다음 선거에서 낙선할 수 있는 악재(惡材)에 불과하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일본 국민은 가능하면 군사 문제에 관해 무대응,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강하다. 헤이와보케(平和ボケ), 다시 말해 ‘일본의 군사안보는 동맹국인 미국이 책임지겠지’라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전후(戰後) 출생한 단카이세대(團塊世代)는 군사안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를 죄악시하는 여론지도층이기도 했다.
 
  아베는 그 같은 과거의 버릇이나 장애물들을 한순간에 해치워 버렸다. 동맹국인 미국이 필요로 할 경우, 자위대가 함께 전쟁에 참가한다는 집단적 자위권을 주장한다. 우향우로 치닫는 아베 자신의 개인적 소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은 섬 하나를 둘러싸고 중국의 무력 위협에 맞서는 과정에서 일본인 대부분은 아베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베는 초스피드로 결정을 내린 뒤 곧바로 각의를 열어 한국군에 대한 탄약지원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에 대해 ‘집단적 자위권을 실천하는 결정’이라고 내외신에 알렸다.
 
  한국은 얼떨결에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실천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일본에서 보도가 나온 즉시, 한국에서는 “실탄 1만 발 지원을 핑계로 집단적 자위권을 합리화하지 말라”는 여론이 일었다. 일본이 아니라 유엔군을 통해 실탄 1만 발 지원을 요청했을 뿐이라는 얘기도 서울발 뉴스로 흘러나왔다. 일본의 군사팽창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 곧바로 빌린 탄알 1만 발을 돌려주겠다는 소식도 한국 국방부발로 전해졌다.
 
  이에 맞서 일본은 곧바로 현지 한빛부대장이 일본에 직접 전화를 걸어 전한 내용을 공표했다. 유엔군을 경유해서가 아니라 부대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다급하게 부탁했기 때문에 들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실탄 1만 발을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전이 신문 지면을 연일 장식했다.
 
 
  전쟁터에 가면서 총알을 안 갖고 갔다?
 
  이 일련의 보도를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한 부분이 하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전쟁터에 가는 군인이 총알을 갖고 가지 않았을까?”
 
  국방부는 평화유지군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에 총알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같은 목적으로 남수단에 파견된 일본 자위대는 어떻게 한국군에게까지 빌려줄 정도로 충분한 총알을 갖고 있었는가?
 
  반일 만병통치약은 그 같은 기본적인 의문조차 허용치 않는다. 반일이라는 감정으로만 대하다 보니, 내부의 1차원적인 문제점조차 제기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내부 문제를 파헤칠 경우 일본을 이롭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떠올랐을지 모르겠다.
 
  “현지 한국사령관이 일본, 아니 유엔군에 실탄지원을 요청할 때 무기체계가 비슷한 일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남수단이 실탄을 갖고 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평화로운 곳이란 정보는 누가 어떤 식으로 제공한 것일까? 현지 부대장이 실탄지원 요청을 할 때 국방부의 어떤 지휘체계를 통해 결정됐을까? 외교부나 청와대와의 논의나 교감은 사전에 있었을까?”
 
  책임자 문책과 같은 화풀이식 논리로 실탄 1만 발 사건을 분석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국가기밀인지 모르지만,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의나 분석이 전무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은, 실탄 1만 발 사건을 이용해 군사대국화로 나가지 말라!’는 반일 메시지뿐이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 대상은 한반도
 
  아베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것은 실탄 1만 발 사건 발생 3일 뒤인 작년 12월 26일이다. 왜 아베가 야스쿠니행(行)을 단행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평소의 우향우 성향으로 볼 때 곧 닥칠 이벤트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주변을 의식해 야스쿠니행을 주저하던 아베를 한국 측이 밀어넣었다는 주장이다.
 
  아베는 초스피드로 한국에 대한 실탄지원을 결정했다. 무기수출 3원칙과 관련해 나중에 책임을 질 일이 있다면 스스로 지겠다는 각오로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일을 처리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모든 과정이 미국과의 교감을 통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한일관계라는 선에서 일본을 상대한 반면, 일본은 한일만이 아니라 미일동맹 관계라는 차원에서 미국과 주파수를 맞췄다.
 
  현재 일본 외무성은 북미(北美) 전문가들을 운용하면서, 단순히 미국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한국 및 북한 전문가들을 연결시켜 운용하고 있다. ‘한반도 관계=미일관계’로 접목(接木)시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가 상정하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은 미일동맹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유사시에 발동될 가능성이 높다. 중일(中日)분쟁도 집단적 자위권의 대상이 되겠지만, 일단 발등의 불인 한반도 유사시가 현안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3만7500여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라크 철군(撤軍)과 함께 중동(中東)에 있던 미군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주한미군 수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중일분쟁의 경우 육지가 아닌 바다나 상공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군의 참전이 제한적이다. 한반도의 경우 유사시에 1차로 4만명에 육박하는 미군이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질 경우, 일본은 미군과 함께 전쟁에 나선다는 것이 집단적 자위권의 요체(要諦)이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들어갈 때 한국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하지만, 유사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이 북미 전문가를 한반도 전문가와 연결시켜 운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反日 외침 속에 自省은 사라져
 
  너무도 당연하지만, 일본은 제1회 일본판 NSC가 열리기 직전부터 미국과 전부 논의했다. 한·미·일 3국 동맹구축에 힘을 쏟는 미국은 아베의 발 빠른 행보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결과는 한국으로부터의 비난과 실탄 1만 발 즉시 반환이었다.
 
  덕분에 아베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이 생기게 됐다. 그동안 아베 내각 안에서 야스쿠니행에 부정적이던 사람들조차 아베의 결심을 꺾지 못한다. 한국이 실탄 1만 발 지원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했다면 아베가 야스쿠니행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는 언젠가 닥칠 문제였지만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일찍’ 점화(點火)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회를 노리던 차에 실탄 1만 발 사건이 터졌다고 볼 수 있다.
 
  평화유지군이든 전투군이든 관계없이 군(軍)은 군이다. 한국에서는 총알도 없이 군대를 해외로 보낸 데 대한 자성(自省)의 소리가 없다. 응당 있어야 했던 이런 자성은 반일의 외침 속에 사라져버렸다. 역시 ‘반일’은 만병통치약이다.
 
  굳이 얻게 된 교훈을 들자면, 앞으로 해외에서 절대로 일본군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는 한, 한국 평화유지군의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반일을 만병통치약으로 써먹는 행태는 아프리카만이 아닌 워싱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2월 3일 한국 신문에 보도된 오바마 아시아 방문 관련 기사를 보자.
 
  ‘오바마, 일본 1박만 하고 한국행. 미국, 일본 국빈방문 거절.’
 
  ‘오바마, 일본 1박 후 한국 방문하지 않을 가능성.’
 
  기사를 보는 순간, 워싱턴 한국외교관의 책임만회용 ‘리크(leak)’가 눈에 선하게 와닿았다.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 기사의 핵심은 한국에 잠시 스쳐 지나가거나, 아예 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다른 부차적인 부분들이 훨씬 눈에 더 들어온다. ‘일본이 국빈방문을 애원하고 있지만 미국은 무관심하다. 일본에서 1박만 하고 떠난다’는 데 방점(傍點)이 찍혀 있다. 오바마가 한국에 왜 오지 않는지, 오더라도 왜 잠시 스쳐 지나가는지에 관한 얘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국빈방문 애걸하는 일본’이란 헤드라인이 눈에 더 들어온다.
 
  결과적으로 오바마의 방한이 실현되기는 했지만 왜 한국 외교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오바마의 방한 스케줄을 만들어내지 못했는지에 대한 분석이나 반성이 없다. 반일 만병통치약의 강력한 약발(?) 덕분에 그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신문·방송도 없다.
 
  2000년 전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사람도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전부 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부분만 보게 된다.”
 
  사랑에 눈먼 젊은 연인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세상사에 통달한 사람조차, 한쪽 눈을 감은 채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객관성을 무시한 채, 듣기 좋은 말이나 외양에 빠진다는 의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세상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본, 극단적인 경우라 볼 수 있다.
 
 
  아베의 소치올림픽 외교
 
  일본과의 관계를 감정으로만 접근할 경우,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다. 일본은 결코 어리석지도 무모하지도 않다. 한국이 반일이라는 만병통치약에 취해 있는 동안, 일본은 미국·러시아·아세안·유럽, 심지어 아프리카와 남미(南美)에까지 행보를 넓히고 있다.
 
  소치올림픽에서 일본 피겨스케이트 선수에 관한 얘기가 한국 언론에 오르내리는 동안, 일본 신문 1면은 소치올림픽에 참가한 아베와 워싱턴에 들른 기시다(岸田) 외무장관의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아베는 소치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한 뒤 곧바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들어갔다. 독도 문제와도 깊은 관계를 갖는, 북방영토 문제가 주된 의제이다. 중국의 팽창에 대한 우려도 논의됐다고 한다. 아베는 격식이나 특별한 의전도 없이 방문 하루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비즈니스맨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기내 1박2일 스타일의 방문이다.
 
  기시다 외무장관은 존 케리 국무장관과 만나 중국의 방공(防空)식별권에 대한 미일 양국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중국의 방공식별권을 미일 양국이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센카쿠(尖閣)열도에 이어 오키나와(沖繩) 전체도 미일동맹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 야스쿠니 문제는 두 사람 대화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한국이 반일 하나에 주파수를 맞추는 동안, 일본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정세 변화 못 읽은 高宗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기간 중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밀사들의 소식을 전한 《만국회의보》. 하지만 이들은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지나치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현재 한국이 가진 일본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1907년 7월 헤이그밀사(密使)사건에 비교할 수 있다. 고종(高宗)은 1905년 11월 일본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한 데 항의하기 위해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했다.
 
  현실은 어떠했을까? 이준을 비롯한 3명의 밀사는 회의장 출입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다. 한국 역사교과서는 일본의 교활한 방해공작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맞는다.
 
  고종이 헤이그 밀사 파견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 차르의 초청장에서 비롯된다. 1905년 10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고종에게 초청장을 한 장 보냈다. 1907년 6월부터 3개월간 열리는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는 2차 평화회의의 의장국이었다. 회의의 주제는 육전(陸戰)에 관련된 국제법이었다. 차르의 초청장은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기 한 달 전에 도착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중이었다. 일본에 넘어가기 직전의 조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 차원에서 헤이그 초청장을 보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을 맺었다. 일본이 조선을,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한다는 것이 밀약의 핵심이다.
 
  고종은 러시아 차르의 초청장을 바탕으로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기로 했지만, 그 2년 사이에 세상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고종과 조선의 지식인들만 그걸 몰랐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에 주재하던 9개 나라의 공사(公使)들이 철수했다. 미국이 가장 먼저 철수했다. 당시 국제정세하에서 열강(列强)은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러시아의 입장이었다. 고종이 보낸 밀사들은 만국평화회담장에서 의장국인 러시아에 차르의 초청장을 제시했다. 이 초청장에 대해 문의를 받은 러시아 외무부의 훈령(訓令)은 간단했다.
 
  “3명의 조선인은 헤이그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대표단이나 국가가 아니다. 그들에게 출입을 허용하지 말라.”
 
 
  러시아와 일본의 뒷거래
 
  러시아가 이렇게 입장을 바꾼 것은 헤이그 회의 도중인 1907년 7월 30일 체결된 제1차 러일협약 때문이었다.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 조선은 일본이, 몽골은 러시아가 갖는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은 1904년부터 1905년 1년 동안 격렬한 전쟁을 했다. 1906년 이후 러시아는 일본을 계속 적으로 대하기보다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동부 유럽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시베리아 동부에서의 전쟁을 자제하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을 전후해 발생한 혁명과 폭동으로 내부 역량이 크게 약화된 것은 가장 큰 이유이다. 결국 러시아는 일본을 적으로 할 경우 전력(戰力)이 분산되기 때문에 조선을 넘기고 몽골을 수중에 넣는 선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이준 열사 등 밀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25일이다. 이준 일행은 8월 22일 분사(憤死)하기까지 2개월간 헤이그에 머물렀지만, 회의장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고종이나 헤이그 밀사들은 국권을 침탈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강했지만, 조선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각변동에는 무지했다.
 
  한국 언론들은 프랑스 앙굴렘에서 열린 만화전에서 일본이 굴욕을 맛본 것이나 미국 버지니아주(州)에서 동해 표기를 병기(倂記)하기로 한 것을 연일 크게 보도하고 있다. 몇몇 전투에서 이겼다고 전쟁의 결말이 내려진 것처럼 열광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판을 치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진짜 봐야 할 부분을 무시하는 자세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베가 물러나도 일본 안 바뀐다
 
  ‘반미로 좀 재미를 봤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전임 대통령이 있었다. 그의 임기가 끝나자, 반미로 얻은 재미는 고통으로 변했다. 한국은 그 대가(代價)를 치러야만 했다. 전시(戰時)작전권 전환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보여준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약소국(弱小國) 외교의 전형이었다. 온갖 진통 끝에 2015년 12월까지 전시작전권 전환을 연기하기로 했지만, 앞으로 급증할 국방비 부담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차피 자주국방으로 나가기 위한 과정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반미가 아니라, 보다 이성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더라면 이런 시행착오와 부담은 없었을 것이다. 감정적인 접근은 반드시 화(禍)를 부른다.
 
  노무현 정권 시절의 ‘반미’가 그러했듯이, ‘반일’도 당분간은 만병통치약처럼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2013년 일본의 대한(對韓)직접투자액이 전년도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베가 물러나면 한일관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본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우매한 판단이다. 아베 이후의 일본은 아베보다 더한 우향우로 나아갈 것이다. 일단 60세를 전후한 정치무대의 주류(主流)가 한순간에 40대로 내려갈 것이다. 과거사를 부정하고 말고가 아니다. 아예 과거사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신세대 정치가가 일본에 등장할 것이다.
 
  한반도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일본만이 아니라, 일본 뒤를 받쳐주는 미국, 아시아, 나아가 세계 전체를 염두에 둔 전략적 대응이 절실하다. 계속 ‘반일’이라는 만병통치약에 취해 있다가는 107년 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서 당했던 치욕이 되풀이될 수도 있을 것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4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