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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대단한 나라’ 인도 기행

인도, 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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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동안 아잔타 석굴, 타지마할, 불교 聖地 등 여행, 도로 사정 안 좋아 평균 시속 40km,
    400km 이동하는 데 10시간 넘기기 일쑤
⊙ 가는 곳마다 구걸하는 아이와 장애인들, 1960년대 한국을 보는 듯
⊙ 힐링 멘토 마가스님, 부처님 열반지에서 유언장 쓰기 등 통해 자신의 삶 돌아보도록 유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변에서 목욕하는 힌두교도들. 힌두교도들에게는 이곳에서 목욕하는 것이 큰 소원이다.
  2013년 11월 18일 오전 11시30분 인천공항 J-18구역. 아무리 둘러보아도 스님과 아주머니들만 보일 뿐, 최병윤 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최병윤 회장은 ‘생각하는 불자(佛子)들의 여행 모임’을 표방한 불타보헤미안의 창립자로, 내게 인도여행을 함께 가자고 제안한 사람이다. 에어 인디아 비행기에 탑승한 후, 불타보헤미안의 실무자인 윤지홍 실장에게 물었다.
 
  “최 회장은 어디 계세요?”
 
  “최 회장님은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됐습니다. 배 기자님께는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비밀로 하라고 해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화장장(火葬場)에서 미처 다 타지 못하고 강물에 떠내려온 시신(屍身)의 팔다리가 밟히는 갠지스강변을 함께 걸으며 푸자(힌두교의 화장 의식)를 구경하자고 했던 사람이, 나만 홀로 남겨놓다니….
 
  더 황당한 것은 여행단의 구성이었다. 43명의 일행 가운데 지도법사(法師) 마가스님과 나를 포함한 6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서로를 ‘보살’이라고 부르는 50~80대의 여성이거나 비구니들이다. 이런 집단 속으로 던져지기는 난생처음이다.
 
 
  “한국, 대단한 나라!”
 
인도 지도.
  같은 날 자정 무렵 델리공항. 짙은 갈색 피부에 건장한 체격의 가이드 두 명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라케쉬와 산토스. 두 사람 다 한국어가 유창하다. 내가 탈 2번 버스를 담당하는 가이드는 라케쉬다. 라케쉬가 말했다.
 
  “인도! 대단한 나라! 5000년 역사를 가진 나라! 나라 이름 네 개! 인디아, 힌두스탄, 바라트(‘바라트왕의 나라’라는 뜻), 아리아바트(‘아리안족의 나라’라는 뜻)! 인구 13억! 언어 2000개! 하지만 아직 가난한 나라야. 한국하고 달라. 1960년대 한국과 같아요. 화장실도 잘 없고…. 한국! 작지만 대단한 나라! 삼성 휴대폰, LG 세탁기, 현대 자동차…. 여행 왔으니까 여기서는 한국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난 다시 태어나면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 인도는 아직 남자들 중심이지만, 한국은 여자가 더 힘이 세. 한국에서 남자는 포터야, 포터. 여자 짐 들어주는….”
 
  묘한 친구다. 완벽한 한국어는 아니지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면서, 능숙하게 농담도 하는 품이 친근감이 갔다.
 
  11월 19일 아침. 버스는 델리 시내 중심부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거리 곳곳에는 총으로 무장한 군인, 경찰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라케쉬의 말로는 12월 총선(總選)을 앞두고 테러에 대비해 경비가 부쩍 강화되었다고 한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소리를 듣지만, 선거를 전후(前後)해 폭력사태로 몇백 명 죽는 것은 일도 아닌 나라가 인도이기도 하다.
 
 
  초라한 인도 국립박물관
 
아그라 시내에서 아기를 안은 여인이 애타게 구걸하고 있다.
  1961년에 지었다는 국립박물관 건물은 제법 고풍스럽기는 했지만,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시골 학교 건물을 연상케 했다. 도록(圖錄) 등 기념품을 함께 파는 매표소는 옛날 시골의 은행창구 같았다. ‘인류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을 일으켰던 나라의 찬란한 문명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다라 양식의 조각상들이나 굽타왕조시대에 만든 불상, 섬세한 상아(象牙)공예품 등도 좋았지만, 무굴왕조시대의 회화(繪畫)와 민속품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실도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 곧잘 했던 ‘뱀주사위 놀이’를 연상케 하는 주사위놀이판이 있는가 하면, 술에 취해 귀가한 후 널브러진 남편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아내를 그린 풍속화(風俗畫)도 있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다음 일정만 아니라면 박물관 안에서 하루를 몽땅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점심식사는 시내 고급 중국 음식점에서 했다. 주변의 초라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식당을 나서는데 “원 달러(One dollar)”를 외치며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가이드 라케쉬는 아침에 버스에서 미리 주의를 줬었다.
 
  “앞으로 돈 달라고 하는 애들 많이 볼 거야. 한 아이에게 돈을 주면, 다른 아이들까지 돈 달라고 해. 한번 편하게 돈 받기 시작하면, 그건 그 애 인생 망치는 거야. 돈 주지 마. 정 돈 주려면 자기 힘으로 노력할 수 없는 사람, 팔다리 없는 사람한테 줘.”
 
  애써 그들을 외면하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하려 하자 “원 달러”를 외치는 소리는 더욱 크고 간절해졌다. 그 소리가 어찌 그리 애잔하게 들리던지…. 그것은 인도 여행 내내 보게 될 풍경과의 첫만남이었다.
 
 
  마가, “나는 누구인가”
 
  이날 오후 인도 국내선 비행기편으로 아우랑가바드로 이동했다. 아우랑가바드는 17세기 무굴제국의 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가 건설한 도시다. 가이드 라케쉬의 말로는 ‘~바드’가 붙으면 이슬람 도시, ‘~푸르’가 붙으면 힌두교 도시라고 한다. 아우랑가바드는 ‘아우랑제브의 도시’라는 뜻이다.
 
  가이드인 라케쉬는 “인도는 힌두교 국가가 아니라 다(多)종교 국가”라면서 “인도에서는 힌두교, 자이나교(기원전 6세기경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인도의 고유 종교), 불교, 기독교 등이 잘 어울리면서 살고 있지만, 유독 이슬람교가 문제”라고 했다. 그는 폐허가 된 불교유적지들을 찾아갈 때마다 “이슬람교도들이 파괴했다”는 얘기를 되풀이했다.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얘기기는 하지만, 힌두교도로서 갖고 있는 이슬람교에 대한 반감(反感)을 느낄 수 있었다.
 
  11월 20일. 아잔타 석굴 관광에 나서기 전, 마가스님의 주재로 호텔 앞에서 간단한 체조와 명상을 했다. 마가스님은 법륜, 혜민, 정목 스님과 함께 불교계의 4대 힐링(healing) 멘토(mentor)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공주 마곡사 포교국장으로 있던 2002년 참가자들을 그룹별로 나눠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게 하는 ‘맞춤형 템플스테이’와 자기 안에 있는 미움의 응어리를 걷어내고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자비 명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그가 중앙대에서 교양과목으로 진행한 ‘내 마음 바로 보기’ 강좌는 150명으로 시작한 수강생이 1500명까지 늘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2013년 11월에는 가족을 버렸던 아버지와의 화해 과정을 털어놓으면서 그동안의 힐링 경험을 소개한 《알고 보면 괜찮은》을 펴냈다. 마가스님이 말했다.
 
  “간밤에 죽은 사람 하나 없이 이렇게 다시 만나니 얼마나 좋아요? 오늘은 남아 있는 내 생(生) 가운데서 가장 젊은 날입니다. 오늘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날입니다. 오늘 하루,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관세음보살은 누구인가? 성모(聖母) 마리아는 누구인가? 가장 따뜻한 어머니는 누구인가? 관세음보살이 성모 마리아고, 어머니입니다. 오늘 하루는 남모르게 관세음보살행을 실천하도록 해 보십시오.”
 
  일행 중에는 기독교인이 세 명, 천주교인이 한 명 있었다. 성모 마리아까지 언급한 것은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 사냥하다 발견한 아잔타 석굴
 
아잔타 석굴 내부. 화산암 암벽을 파고 들어가서 내부의 스투파(탑)와 승방 등을 조성했다.
  아우랑가바드에서 동북쪽으로 100여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잔타 석굴은 B.C 2세기~A.D 7세기에 조성됐다. 화산암(火山巖)인 암벽에 물을 묻혀서 바위를 무르게 한 후 안으로 깎아 들어갔다고 한다. 모두 29개의 석굴이 있는데, 5개는 예배용 석굴(차이티야)이고 나머지는 승려들의 수도(修道) 및 거주 공간인 비하르이다. “석굴 안에 있는 불상이나 스투파(탑)는 외부에서 만들어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위산을 깎아 만든 석굴의 일부”라는 설명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1번 석굴에는 부처의 일생 등을 그린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아잔타 석굴은 중국의 둔황(敦煌) 석굴이나 경주의 석굴암 암굴사원의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밀림에 묻혀 있던 아잔타 석굴은 1819년 4월 28일 호랑이 사냥에 나섰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영국군인 존 스미스가 발견했다.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10번 석굴 기둥에는 그의 이름과 발견 일자가 새겨져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거칠 것 없는 제국주의의 오만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잔타 석굴과 관련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잔타 석굴군의 석굴들은 900여 년에 걸쳐 여러 왕이나 토호(土豪)들이 조성했다. 공사 도중 석굴 조성을 하려던 왕이나 토호가 죽으면 석굴 공사도 중단됐다. 미완성 석굴들 입구도 완성 석굴들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일생 등을 화려하게 조각해 놓았다. 아마 그 석굴을 만들려던 왕이나 토호는 ‘기존의 그 어느 석굴보다도 더 크고 아름다운 석굴을 부처님에게 바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석굴 공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보다 먼저 죽음이 찾아오면, 공사는 중단됐고, 석굴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인생무상(人生無常)!
 
 
  불교·힌두교·자이나교가 共存하는 엘로라 석굴
 
  가마꾼들이 한국말로 “가마 타세요!”를 외쳐댔다. 운 좋게 관광객을 태우면 그들은 연방 “물러섰거라!”를 외치며 걸음을 빨리했다.
 
  석굴 관람을 마치고 버스로 돌아가는 길. 남루한 행색의 장사꾼들이 코끼리나 부처상, 도록 등을 팔려고 몰려들었다. 한눈에 봐도 별로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조잡한 것들이다. 관심을 안 보이자 그들은 한국말로 “두 개 1달러”를 외쳤다. “이거 좋은 책입니다. 안 사면 후회합니다”라며 제법 긴 문장을 구사하는 행상도 있었다. 저들은 누구에게서 한국어를 배웠을까?
 
  11월 21일. 아우랑가바드에서 서북쪽으로 28km 지점에 있는 엘로라 석굴군을 구경했다. 7~10세기에 조성된 엘로라 석굴군은 불교(1~12번 석굴), 힌두교(13~29번 석굴), 자이나교(30~34번 석굴)의 석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랫동안 밀림 속에 묻혀 잊혔던 아잔타 석굴군과는 달리 엘로라 석굴군은 종교사원이자 여행자들의 숙소로 오랫동안 활용되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 복색의 시각장애인이 한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동냥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사내는 정확한 한국어로 “눈이 안 보여요.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엘로라 석굴군 관광을 마친 후, 다음 목적지인 인도르로 향했다. 아우랑가바드에서 410km 북쪽에 있는 인도르는 다음 목적지인 보팔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야 한다. 1시쯤 엘로라를 출발했는데, 출발하기가 무섭게 바로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구정이나 추석, 귀성(歸省) 교통보도 때 흔히 나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이건 아예 5분 움직이고 1시간 제자리에 서 있는 식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붙였다. 눈을 떠 보니 차창 밖으로 보이던 산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시계를 보니 1시간쯤 지났을 뿐이었다.
 
 
  카스트제도
 
  가이드 라케쉬가 자기 집안 얘기를 했다. 자기 이름은 라케쉬 쉐르마. 카스트(cast) 가운데 최고 계급인 브라만 계급에 속한다고 했다. 쉐르마라는 성(姓)이 바로 자신이 브라만 계급임을 증명한다고 했다.
 
  나중에 라케쉬에게 “인도에도 족보(族譜)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듣다가 “우리 집안의 요기(힌두교 수행자)를 통해 족보가 전해져 오고 있다”고 했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부유한 상민(常民)들이 양반집 족보를 사서 양반 행세를 하는 일이 있었다. 이른바 ‘환부역조(換父易祖)’다. “인도에서는 그런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라케쉬는 “그런 일은 없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농민계급 출신 대통령과 장관들이 나오고 있다”면서 카스트제도에 의한 제도적 제약은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인도의 결혼 풍속에 대해 얘기하면서는 “같은 계급 내에서만 결혼을 한다”고 했다.
 
  카스트제도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1억명이 넘는다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에 대해 묻자 그는 “언터처블(Untouchable)?”이라고 반문하더니 “그 사람들은 병(病)이 있어서 격리되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얼버무렸다. 카스트제도에 의한 제도적 제약은 사라지고 있지만 불가촉천민에게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고, 결혼 등에서 사회적·관습적 제약은 여전히 공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바라나시 교외 등에서는 다 쓰러져가는 천막 속에서 사는 불가촉천민들을 곧잘 볼 수 있었다.
 
  라케쉬는 어린 시절에는 가난했지만, 3형제가 모두 대학을 나와 큰형은 은행 매니저로 있고, 작은 형은 작은 파이낸스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와 3형제, 아들과 조카들까지 13명이 모두 한집에 살고 있어. 돈은 엄마 갖다주면 엄마가 며느리들에게 나눠줘. 가이드 해서 번 돈으로 엄마에게 집 사드렸어. 엄마, 어려움 많이 겪고 이제 늙었어. 우리가 모시고 살아야 해. 안 그러면 사람 아냐.”
 
  그 말에 모두 박수를 쳤다. 라케쉬는 “델리나 뭄바이 등 대도시는 다르지만, 인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러 대(代)가 한집에서 살고 있다. 이런 점도 한국의 1960년대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라케쉬는 둘째 형 친구가 한국어책을 주면서 권해서 독학(獨學)으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델리로 나와 한국 배낭족 여학생을 만나 생전 처음으로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그 여자가 오해하고 도망가는 바람에 한참 쫓아다니다가 지갑을 잃어버린 그녀를 도와주면서 뜻을 이룬 얘기, 처음으로 한국인 관광객 가이드를 맡았던 때의 에피소드, 인도의 결혼 풍속 등을 구수하게 늘어놓았다.
 
  라케쉬에 의하면 인도에서는 일부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직도 집안 부모님들끼리 결혼을 약속하고, 신랑과 신부는 첫날이 되어서야 얼굴을 보게 된다고 한다. 라케쉬도 마찬가지였다고. 또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옛 고구려에 형사취수(兄死取嫂)의 풍속이 있었다고 하더니만, 인도에 그런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놀라웠다. 아마도 여자에게 딸린 자식과 재산을 묶어두기 위한 것일 것이다.
 
 
  20km 가는 데 4시간 걸려
 
엘로라에서 인도르로 가는 도로. 화물트럭으로 꽉 막힌 이곳 20㎞ 구간을 통과하는 데 4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버스는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가이드 라케쉬와 산토스, 윤지홍씨가 버스에서 내려 어디론가 갔다. 한참 후, 다시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가 길을 돌아서자 아스라한 낭떠러지 저편으로 끝없는 화물트럭의 행렬이 보였다. 가드레일도 없는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진 컨테이너 트럭이 보였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라케쉬 등은 트럭 운전사들에게 “우리 버스부터 보내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교통정리를 하는 등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20km를 통과하는 데 4시간이 걸렸다.
 
  차가 휴게소에 섰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휴게소는 아니다. 운전기사들이 간단한 요기를 하거나 차이(인도식 밀크차)를 마시는 곳이다. 관광객들에게 식사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빌려주고 돈을 받기도 한다. 우습게도 이런 휴게소들이 ‘호텔’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차이 한 잔씩 마시고 나니, 기운이 나는지 아주머니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영락없는 ‘묻지 마 관광’ 분위기다.
 
  병목구간을 빠져나온 뒤에도 버스는 360여km를 더 달렸다. 당초 저녁 8시쯤 도착할 예정이었던 호텔에 버스가 도착한 시각은 이튿날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제법 괜찮은 호텔이었다. 호텔에서는 아직 저녁식사를 못한 우리 일행을 위해 식당을 열어놓고 있었다. 방에 들어간 시각은 새벽 2시25분. 가이드가 예고한 기상 시각은 새벽 4시. 짐 정리하고 샤워하고 나면 눈 붙일 시간은 1시간 반이 안 될 판이었다. 이건 호텔 투숙이 아니라 그냥 고급 휴게소에서 잠시 눈 붙이고 샤워하고 가는 기분이었다.
 
 
  무궁화호 열차만도 못한 인도 최상급 열차
 
보팔에 있는 산치대탑. 탑 곳곳에는 석가모니의 前生과 一生을 조각해 놓았다.
  11월 22일 새벽 5시. 버스는 187km 떨어진 보팔을 향해 출발했다. 보팔은 1984년 12월 미국 회사인 유니언 카바이드사(社) 공장에서 독성(毒性) 가스가 유출되어 약 3만명이 사망하고 15만명이 불구가 되는 참사가 발생했던 곳이다.
 
  5시간 만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산치대탑(大塔). 인도에 불교를 널리 전파한 아쇼카 대왕이 B.C 2~3세기경에 세운 불교 유적지다. 비교적 오지(奧地)에 속하는 곳이어서 이슬람의 침략으로 인한 병화(兵禍)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탑 곳곳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이나 전생담(前生談)이 새겨져 있었다. 인도여행을 오기 전 읽었던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 등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조각으로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곳의 바위들은 무른 사암(砂巖)이어서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다고 한다.
 
  산치대탑을 둘러본 후 아그라로 가기 위해 보팔역(驛)으로 이동했다. 오후 2시25분에 출발할 예정이라는 열차는 제시간이 되어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들은 “위험할 수도 있으니 차 안에 있어야 한다”면서 2시40분이 넘어서야 우리를 버스에서 내리도록 했다. 짐은 포터들이 날랐다. 그들은 무거운 여행가방들을 두세 개씩 머리 위에 얹고 행진하듯 앞으로 나갔다.
 
  우리가 타기로 한 열차는 ‘인도의 KTX’라고 하는 최상급(最上級) 열차. 그래서인지 승객들도 대부분 잘 차려 입은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 주위로 걸인들이 몰려들었다.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 팔다리가 휘어진 사람…. 한순간 두려움마저 들었다.
 
  2시50분이 다 되어서야 열차가 도착했다. ‘인도의 KTX’라지만, 옛날 무궁화 열차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열차는 3시쯤 보팔역을 출발했다.
 
  아그라로 가는 6시간 동안 옆자리에 앉은 개인택시기사 현문재씨, 사진작가 차준현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 모두 어려운 형편으로 학교도 변변하게 다니지 못했는데도 세상을 보는 눈이 참 긍정적이었다. 차준현씨는 1990~2000년대에는 웨딩촬영 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가 무리하게 사업확장을 하는 바람에 망했다고 한다. 그는 여행 기간 내내 걸쭉한 유머와 몸 개그로 여행의 활력소가 됐다. 그는 “한창 잘나갈 때에는 건방도 많이 떨었는데, 수백억 원을 날리고 나니 나 자신과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렸다”고 말했다.
 
 
  타지마할
 
동남아에서 온 승려가 안갯속의 타지마할을 바라보고 있다.
  11월 23일.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을 구경했다. 붉은 사암으로 된 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흰색의 타지마할이 들어왔다. 타지마할은 자신의 자태(姿態)를 바로 드러내기가 아깝다는 듯, 안갯속에서 우리를 맞았다. 사진 등을 통해 수없이 많이 본 타지마할이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보니 그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였던 샤자한의 아내 뭄타지마할의 무덤. 1631년 어질고 총명했던 뭄타지마할이 38세 때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샤자한이 그녀를 기리기 위해 1632년부터 22년에 걸쳐 건설했다. 뭄타지마할은 원래 시장(市場) 상인의 딸이었는데, 현재 타지마할이 있는 곳이 바로 샤자한이 처음 뭄타지마할을 만났던 시장 자리라고 한다.
 
  타지마할은 이란 출신의 천재 건축가 우스타드 이샤가 설계했다. 동서 300m, 남북 560m의 대지 위에 건설된 이 무덤은 이슬람의 낙원사상을 담고 있다고 한다. 무굴제국은 물론 중국·이란·이탈리아·프랑스 등에서도 건축가와 기술자들을 데려왔고, 건물을 장식한 보석 원석(原石)이나 준(準)보석들은 터키·티베트·중국·미얀마·이집트·칠레 등지에서 조달했다고 한다. 건설비는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75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타지마할 둘레에는 네 개의 첨탑(尖塔)이 서 있다. 첨탑은 89°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지진으로 첨탑이 무너지더라도 뭄타지마할의 시신이 안치된 타지마할 건물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타지마할 동서(東西) 양쪽에는 붉은 사암으로 지은 모스크(이슬람사원)가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메카를 향해 예배하기 때문에 실제로 예배에 이용되는 것은 서쪽 건물뿐이다. 지금도 금요일이면 이곳에서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한다고 한다. 동쪽 건물은 순전히 타지마할 전체의 대칭미(對稱美)를 완성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인도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물로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는 있지만….
 
  한참 동안 타지마할 곳곳을 돌아보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다시 일행과 만나기 위해 입구를 향해 나오는 길, 청소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루한 복색, 삶의 무게에 눌린 듯한 검은 얼굴…. 타지마할의 우아한 자태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가슴이 찡했다.
 
 
  샤자한의 유폐지 아그라城
 
  타지마할을 건설하면서 국고(國庫)를 탕진한 샤자한은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야무나강 건너편에 자신의 무덤으로 쓰려고 검은색 대리석으로 된 블랙 타지마할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아우랑제브가 쿠데타를 일으켜 샤자한을 퇴위(退位)시키는 바람에, 블랙 타지마할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타지마할에서 3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아그라성(城)은 제위(帝位)에서 쫓겨난 샤자한이 유폐되었던 곳이다. 1566년 무굴제국의 3대 황제인 악바르대제(大帝)가 군사요새로 만들었지만, 샤자한이 아름다운 황궁으로 다시 건설했다. 붉은 사암으로 된 외성(外城)과 흰 대리석으로 된 건물들이 장관을 이룬다. 성내의 정원은 유럽 왕궁의 정원들 못지않게 아름답다.
 
  샤자한은 이 성의 테라스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쓸쓸한 여생(餘生)을 보냈다고 한다. 라케쉬는 “아들 아우랑제브가 샤자한을 뭄타지마할과의 행복한 추억이 깃든 이곳에 유폐한 것은, 아버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샤자한의 불행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業報)라는 생각도 든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후 똑같은 건물을 두 번 다시 짓지 못하게 하겠다면서 건축가 우스타드 이샤의 두 눈과 혀를 뽑고, 두 손과 발을 잘라버리는 한편, 건설에 동원됐던 2만명의 일꾼들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흰색 대리석으로 된 타지마할은 아름다운 미녀를 연상케 하지만, 그 이면(裏面)의 역사는 아그라성의 붉은 사암처럼 ‘피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不咎不淨
 
마가스님이 버스에 오르면, 버스 안은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힐링의 공간이 되곤 했다.
  관광을 마친 후 버스는 아그라에서 330km 떨어진 럭나우로 이동했다. 예정 시간은 7~8시간. 생각보다 버스는 잘 달렸다. 1번 버스에 있던 마가스님이 옮겨 타면서 버스 안은 마가스님이 인도하는 ‘힐링 버스’가 됐다. 마가스님이 말했다.
 
  “금강경, 천수경, 반야심경을 줄줄 외면 뭐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 삶을 그렇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20여 년 전 인도에 처음 왔을 때였어요. 식당에서 테이블을 닦아달라고 했더니, 바닥을 청소하던 걸레로 테이블을 훔치더군요. 그걸로 얼굴을 닦기도 하고. 이 사람들에게는 걸레가 행주고, 수건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불구부정(不咎不淨)입니다. 사실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라고 하면 모든 에너지가 되는 쪽으로, ‘아니오’라고 하면 모든 에너지가 안 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노숙자들에게 무슨 얘기를 하면 ‘아니오’라는 말부터 나옵니다. 부자나 성공한 사람에게 얘기하면 ‘네,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못 한다는 마음, 부정적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좋은 구경을 하고 좋은 얘기를 들으며 하는 여행.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 기분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럭나우 도착 예정 시각인 밤 9시가 넘어도 버스는 목적지에 도달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을 붙였다.
 
  다시 눈을 뜨니 밤 11시. 길은 여전히 화물트럭들로 꽉 막혀 있었다. 한순간 버스가 방향을 트는 것 같더니 ‘덜컹’ 하고 충격이 왔다. 이런! 버스가 중앙분리대를 넘고 있었다. 역주행(逆走行)! ‘이러다가 앞에서 오는 차와 충돌이라도 하면…’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동안 잘 달린다 싶었지만 그것도 잠깐, 길은 다시 막히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도로 한쪽에서는 고가차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인도가 마냥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子正)을 넘어섰다. 숙소 사정이 더욱 열악한 불교성지 순례 코스에 접어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호텔에서 충분히 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면서 짜증이 확 밀려왔다.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을 본 감흥, 마가스님과 함께한 ‘힐링 투어’의 효과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왔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럭나우시에 들어선 것은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제법 큰 현대식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과 군(軍)부대 건물들이 보였다. 호텔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40분. 이틀 연속으로 새벽 2시 가까이 되어 저녁식사를 했다.
 
 
  기원정사에서
 
  11월 24일. 눈을 뜨니 5시다. 세수만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을 나오니, 다른 일행은 벌써 출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침식사를 놓쳤다.
 
  럭나우에서 6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163km 떨어진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祇園精舍)다. 쉬라바스티는 석가모니 부처가 살아 있을 때 북인도의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의 수도다. 기원정사는 코살라국의 상인인 수닷타 장자(長者)와 태자인 제타 태자가 출연(出捐)해 설립한 최초의 불교 사찰이다. 석가모니는 이곳에서 24번의 우안거(雨安居·夏安居)를 행했고, 《금강경》을 설법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불교 성지(聖地) 순례다.
 
  기원정사 입구에서는 남루한 행색의 아이들이 연꽃다발을 흔들며 “원 달러”를 외쳐댔다. 살바도르 달리의 초(超)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손과 발이 이상하게 비틀어진 걸인들도 보였다. 도대체 이 나라에는 왜 이리 기형(奇形)의 걸인들이 많은지….
 
  일행 중 한 명이 연꽃을 사주었다. 그러자 꽃 파는 소년은 내게도 연꽃다발을 내밀면서 “너도”라고 한다. 얘는 도대체 누구에게 이 말을 배웠을까?
 
  인도의 다른 유적들도 그렇지만, 인도의 고대 건축물들은 대개 벽돌로 되어 있다. 때문에 건물은 사라졌어도 그 아랫부분들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부처가 《금강경》을 설법했다는 자리에선 미얀마나 스리랑카 등에서 온 승려들이나, 현지의 요기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마가스님과 비구니 스님들은 불자들과 함께 예불을 올리면서, 일행의 행복을 기원했다. 석가모니 부처의 자취가 서린 곳이라는 생각에 현문재씨 등은 눈물까지 보였다.
 
 
  “얘들에게는 여러분이 원숭이”
 
기원정사에서 만난 말끔한 교복 차림의 학생들은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예불 드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말쑥한 교복 차림의 소년소녀들이 몰려왔다. 똘망똘망하게 생긴 소녀가 우리에게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짧은 영어로 “코리아에서 온 불교 순례자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체격이나 태도로 보니 중학생쯤 되어 보였는데 초등학생이라고 했다. 인도인이면서도 불교사원인 기원정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지, 우리보고 설명해 달라고 했다. 정확한 영국식 영어발음으로 말끝마다 깎듯이 “생큐, 서(Thank you, sir)”를 붙이는 것이 영국 명문사립학교 학생 같았다.
 
  기원정사 입구에서 연꽃을 팔던 아이들, 가는 곳마다 손을 내밀며 “원 달러”를 외치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입만 벌리면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양극화(兩極化)가 가장 심한 나라” 운운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생각났다. 그들에게 인도에 한 번 와 보고 그런 소리를 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른 점심을 먹은 후 버스는 부처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를 향해 출발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들판이 다시 계속됐다. 349km를 가는 데 9시간이 걸렸다. 인도-네팔의 국경 마을. 승객들의 노상방뇨를 위해 버스가 서자 새카만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남녀노소(男女老少)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우리 일행을 둘러쌌다. 동냥을 원하는 것인가 싶어 긴장했는데, 그냥 구경나온 것이었다.
 
  그건 사실 인도 어디서나 버스가 설 때마다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문득 어릴 때 서양사람을 보면 친구들에게 “나 오늘 미국 사람 봤다”고 자랑(?)하던 일이 생각났다. 라케쉬는 “여러분 눈에는 얘들이 원숭이로 보이겠지만, 얘들에게는 여러분이 원숭이”라고 익살을 떨었다.
 
 
  五體投地, 그 간절한 기도
 
인도의 한 시골마을. 버스가 서는 곳마다 낯선 동양의 관광객들을 구경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밤 8시쯤 버스는 국경을 넘었다. 국경에서 대기한 것이 2시간 남짓. 윤지홍씨는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면서 “전에는 국경에서 10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다”고 했다.
 
  밤 9시쯤 룸비니의 대성석가사에 도착했다. 대성석가사는 우리나라의 법신스님이 1995년부터 짓고 있는 사찰. 법신스님은 이 절을 지으면서 현지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술을 가르쳐 현지인들로부터 ‘생불(生佛)’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고 한다.
 
  11월 25일. 새벽 4시에 잠이 깼다. 찬물로 머리를 감고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 앞에서는 남루한 복색의 현지인 여성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올렸다가 가슴 높이에서 합장(合掌)한 다음, 무릎을 꿇고 두 팔과 두 다리를 땅에 대고 엎드리기를 되풀이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 동작은 무척이나 간절해 보였다. ‘옛날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하늘에 빌던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마음도 그랬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인은 무엇을 간구(懇求)하고 있을까? 가족 중 누군가가 병중(病中)일까? 아니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일까? 마가스님은 “우리나라에서는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빌지만, 여기 사람들은 ‘좋은 스승을 만나도록 해달라’고 기원한다”고 말했다.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
 
태국에서 온 불교신자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룸비니 동산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룸비니의 부처 탄생지로 이동하기 전, 마가스님은 일행에게 가위 바위 보를 시켰다. 나는 경기 하남 상불사 주지인 비구니 동효(東曉)스님과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겼다. 마가스님은 “이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진 사람은 10분 동안 이긴 사람을 인도해서 걸어가라”고 한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었다. 눈을 가리고 남에게 나를 맡기면서 걷는 것은 난생처음이다. 동효스님이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앞에 턱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비포장길입니다.”
 
  “개 두 마리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자신을 턱 맡길 수 있는 사람, 자기에게 의지하는 사람을 허방에 빠뜨리지 않는 사람이 ‘리더(leader)’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분이 지나서 역할을 바꾸었다. 동효스님이 눈을 가리고, 내가 인도하는 역할이다. 함께 걷다가 문득 ‘아참,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앞을 못 보는 상태지’ 하는 생각이 들어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부처가 태어났다는 룸비니 동산은 말이 동산이지, 주변과 별다를 게 없는 평지였다. 부처가 태어났다는 자리 앞에 선 흰색의 마야데비 사원 앞에서는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베트남 등에서 온 승려나 불교신도들이 예불을 올리거나 참선(參禪)을 하고 있었다.
 
  일행은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아기를 낳은 후 목욕했다는 푸르카르니 연못 뒤에 서 있는 보리수 나무 앞에서 예불을 올렸다. 비구니 경조스님이 음악에 맞춰 승무(僧舞)를 추었다. 조지훈 시인의 시(詩) ‘승무’가 생각났다.
 
 
  “‘석가모니 당시의 불교’로 돌아가야”
 
  대성석가사로 돌아오는 길. 마가스님은 불교기(佛敎旗)를 앞세우며 룸비니동산으로 들어오는 태국 순례자들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大乘佛敎·개인의 깨달음보다는 중생 구제를 강조하는 불교. 중국·한국·일본 등의 불교)이지만,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동안, 중국의 조사(祖師)들을 숭상하는 등 비(非)불교적인 요소들이 많이 첨가됐어요. 때문에 소승(小乘·중생 구제보다는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불교. 스리랑카·미얀마·태국·베트남 등 동남아 등의 불교)불교적 요소들을 도입해서 ‘석가모니 당시의 불교’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당시의 불교’라는 말이 신선하게 들렸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예수 당시의 기독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마가라는 법명(法名)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미얀마에서 공부할 때 받은 법명인데, 산스크리트어(語)로 ‘거침없이 가는 자(者)’라는 의미”라며 “그 후부터 유명해지는 등 잘나가고 있다”며 웃었다.
 
  ―버스 안에서 아침 예불할 때 보면, 불경은 한문으로, 진언(眞言·주문)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던데, 불자들이 그 의미를 알까요.
 
  “몰라요. 그런 것들도 불교가 고쳐나가야 할 것들이에요.”
 
  난생처음 가족과 떨어져 혼자 여행에 나섰다는 송화섭씨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75세. 내 어머니와 나이가 같다. 19세 때 시집을 가서 남편과 함께 근검절약하면서 10년 만에 1만 평짜리 과수원을 마련했다는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작지만 성공한 삶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나이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룸비니를 돌아본 후 버스는 인도의 쿠시나가르로 향했다. 룸비니에서 142km 떨어진 곳에 있는 쿠시나가르는 부처의 열반지(涅槃地), 즉 부처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쿠시나가르로 향하는 버스 안. 마가스님이 “오늘 룸비니에서 무엇을 느꼈느냐”면서 김귀운씨에게 소감을 물었다. 김귀운씨는 “평생 미안하게 생각해 온 큰딸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눈물의 힐링 버스
 
  “우리 큰애는 늘 전교 1등을 하던, 착하고 천사 같은 애였어요. 그 애가 중학교 때 남편이 부도(不渡)를 맞았어요. 동생들은 어려서 느끼지 못했지만, 큰애는 집안이 어려워졌다는 걸 느꼈나 봐요. 딸아이는 ‘이러다가는 대학도 못 가겠구나’라고 생각해서 혼자서 남몰래 타자 공부를 시작했어요. 한 달에 성적이 한 등씩 내려가더군요. 나는 정신이 없어서 그걸 잘 몰랐는데, 누군가가 ‘딸애를 잘 챙기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나는 애를 닦달하기 시작했어요. 잘하라고 한 것이었지만, 그게 아이에게는 부담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명문대는 가지 못했어요. 걔는 아직까지도 여자답게 잘 꾸미려는 생각도 없고, 시집갈 생각도 안 해요. 그 때문에 야단도 많이 쳤어요. 그 애만 생각하면, 난 해준 것도 없고, 그 착한 애가…”
 
  목이 메어 말을 이어가던 김귀운씨는 눈물을 쏟았다. 마가스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착한 딸이 어렸을 때 집안이 기우는 것을 보고 공부 그만두고 일을 하겠다고 나서고, 그걸 보면서 엄마는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요? 딸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닦달을 했지만, 그 딸이 그 때문에 아직까지도 결혼도 안 하려 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마가스님은 자리에 앉아 있던 김완전씨를 불러내 얼굴에 스카프를 씌웠다. 마가스님이 김귀운씨에게 말했다.
 
  “자, 이분을 따님이라고 생각하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해 보세요.”
 
  김귀운씨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소림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에게 관심이 많다고 해서…, 내가 너를 힘들게 했다. 이제 다시는 야단 안 치고, 사랑만 하고, 잘해 줄게…. 중학교 때 부도가 나서, 착한 네가 동생들 생각하면서…”
 
  결국 김귀운씨는 거기서 방성통곡을 했다. 마가스님은 이번에는 김완전씨에게 딸의 입장에서 김귀운씨에게 얘기를 하라고 했다. 마가스님이 한마디씩 해야 할 말을 김완전씨에게 일러주었다.
 
  “엄마, 많이 힘들었구나. 내 생각만 하느라 엄마가 그렇게 힘들었을 줄은 몰랐어. 이제 엄마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사람도 만나고, 옷도 잘 입고 할 거야. 엄마가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김귀운씨는 김완전씨가 친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이렇게 착한 딸을…. 내가 보살피지 못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김완전씨도 엉엉 울었다.
 
  “엄마 울지 마.”
 
  승객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가 두 사람을 다독여주었다. 이어 유순희씨, 김완전씨 등이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이번 여행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사회의 ‘힐링 열풍’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파이팅을 해도 모자랄 판에 힐링할 틈이 어디 있나’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나름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지만, 속에 맺힌 게 있는 분들이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쏟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것이 얼마나 지속가능한 힐링인지는 차치하더라도, 한번쯤 속에 맺힌 것을 토해내는 정화(淨化)의식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지길
 
‘불타보헤미안’ 순례자들은 쿠시나가르의 석가모니 열반당 앞에서 유언장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쿠시나가르로 가는 길은 인도여행 중 만난 길 중에서 가장 험한 길이었다. 버스가 한 번 덜컹거릴 때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듯했다. 뒷자리에 누워서 자던 사람은 굴러 떨어지기까지 했다. 좌우로도 요동이 심했다. 라케쉬는 “인도의 길은 마사지길”이라고 익살을 떤 일이 있는데, 이건 숫제 전신(全身)마사지다. 버스가 아니라 흡사 풍랑에 흔들리는 배 같았다. 느닷없이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어기야 디어라, 어기야 어기 여차, 뱃놀이 가잔다~”
 
  항상 유머와 몸개그로 일행을 즐겁게 해주던 사진사 차준현씨였다. 폭소가 터져나왔다.
 
  그날 저녁 쿠시나가르. 부처의 열반지에 들어선 열반당과 열반탑을 참배한 후, 마가스님은 일행에게 백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장례나 유산 처리 등에 대한 내용을 담은 유서를 써보라”는 주문이었다. 유서를 쓴 다음에는 조별(組別)로 모여앉아 그걸 읽도록 했다.
 
  “잘 자라준 내 아들들, 고맙다.”
 
  “재산은 두 아들이 똑같이 나누어 갖고, 내 장례는 수목장(樹木葬)으로 해다오.”
 
  “○○아, 아버지 밥 잘 해 드려라.”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 50~70대의 주부들이어서인지, 가상(假想)이라고는 해도 죽음을 앞둔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 심상(尋常)한 일은 아닌 듯했다. 나는 유언장을 쓰지 않고 구두(口頭)로 대신했다. 아내, 부모님, 동생들, 제수들, 친구들, 그밖에 내 인생에서 고마웠던 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한마디, 한마디 얘기해 나가다가 나도 눈물을 쏟고 말았다.
 
 
  혜초의 첫 방문지, 바이샬리
 
  11월 26일. 쿠시나가르의 부처 다비장(석가모니를 화장한 곳)을 돌아본 후 부처가 처음 출가(出家)했던 케사리아를 거쳐 바이샬리로 이동했다. 쿠시나가르에서 바이샬리까지는 181km. 4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이제 이 정도 거리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샬리는 석가모니의 주요 활동지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자,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곳이기도 하다.
 
  혜초(慧超)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바로 이 바이샬리에서 나체(裸體) 수행자들을 만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맨발에 알몸으로 옷도 입지 않고 다니는 외도(外道)인 나체 수행자들이 보인다. 이들은 음식을 먹을 때도 아무 때나 먹으며 재계(齋戒)를 하지 않는다. 이곳의 땅은 모두 평평해 산이 없다.>
 
  여기서 나체 수행자들이란 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자이나교 가운데 디감바라(天衣派, 혹은 空衣派)를 일컫는다. 혜초는 이후 우리 일행이 지나온 쿠시나가르(‘구시나국’)로 향한다. 혜초가 이곳에서 쿠시나가르까지 한 달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아침부터 5시간 넘게 걸려 이곳에 온 것을 불평할 수는 없겠다.
 
 
  “초콜릿!”
 
대림정사터가 있는 바이샬리의 농촌. 석가모니 당시에는 번창한 도시국가였지만, 지금은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하다.
  대림정사터 일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대림정사터까지는 100m 정도. 양쪽으로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몰려든다. 이들은 이제까지 하도 많이 들어서 귀딱지가 앉을 지경인 “원 달러” 대신 “초콜릿!”을 외쳐대며 졸졸 따라온다. 그게 더 가슴을 짠하게 한다. 말로만 들었던,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미군 지프 뒤를 따라 달리면서 “초콜릿!”을 외쳤던 1950년대 우리나라 아이들의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대림정사터도 기원정사터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벽돌 유허(遺墟)뿐이다. 여기서도 아이들은 “초콜릿!”을 외치면서 따라붙는다. 한 아이는 “A, B, C, D, E, F, G…X, Y, Z”를 노래하다가는, 바나나를 가리키면서 “바나나”, 황소를 가리키면서 “옥스(ox)”, 암소를 가리키면서 “카우(cow)”라고 외친다. 어떻게 해서든 관심을 끌어보기 위한 행동이다.
 
  인도 어딜 가나 만나게 되는 걸인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 누구도 팔다리나 가방을 붙잡고 늘어지거나, 돈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해코지를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은 저마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했다.
 
  “여기서도 새마을운동을 해야 해!”
 
  “인도에도 박정희가 나와야 해!”
 
  택시기사 현문재씨는 “교육이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빌어먹을 놈’이 큰 욕이잖아요.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잔칫집에서 가져오는 것은 받아도, 잔칫집에는 가지 말라’고 가르쳤어요. 남의 집에 가서 얻어먹는다고 얕잡아 보인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애들은 굶어 죽을 정도로 못 사는 집 아이들 같지는 않은데, 구걸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여기서는 애들이 구걸을 하면 엄마가 뒤따라 가면서 돈을 받는 것도 봤어요. 부모가 애들을 구걸해서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거리 곳곳에 내걸린 총선 벽보 속의 인도 정치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결같이 근엄하거나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정치인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욕지기가 나왔다. 자기 나라 국민들의 절대다수를 이 지경으로 방치해 놓고서도 표를 달라며 자기 얼굴을 여기저기 내건 인간들이 미웠다.
 
  대림정사를 관람한 후 139km 떨어진 라지기르로 이동했다. 석가모니 시절 북인도의 강국이었던 마가가국의 수도로 불교 관련 서적에 흔히 ‘왕사성(王舍城)’이라고 나오는 곳이다.
 
 
  영취산의 서양인 승려들
 
라지기르 영취산에서 만난 서양인 승려들. 왼쪽 승려는 호주, 오른쪽 승려는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한다.
  11월 27일 새벽 6시. 부처가 《법화경》을 설법한 영취산(靈鷲山)에 올랐다. 불교에서 말하는 ‘영산회상(靈山會相·靈山會上)’의 영산이 바로 영취산이다. 며칠간 끝없는 들판만 달리다가 모처럼 산다운 산을 만났다. 아우랑가바드 인근에서 본 산은 평지돌출한 사다리꼴 모양의 민둥산이었는데, 영취산은 주변 산세(山勢)니 수목들이 한국의 산들과 흡사했다.
 
  산으로 올라가는데 총을 든 군복 차림의 사내들이 따라 올라왔다. 얼룩무늬 군복 위에 민간용 점퍼를 걸친 것이 군인이나 경찰 같지는 않다. 라케쉬의 말로는 경비원이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새벽 순례자들을 터는 강도가 출몰했는데,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영취산 정상의 석가모니 설법터에서는 태국 승려 복색의 서양인 두 명을 만났다. 한 명은 이탈리아 태생, 한 명은 호주 태생이라고 했다. 호주 태생의 스님은 올해 41세로 불교를 공부한 지 22년째라고 한다. 지금은 태국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1964년에 호주에 1년간 가 계셨다”고 하자, 그는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무척 오래전”이라며 웃는다.
 
  이어 기원정사와 함께 초기 양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죽림정사터와 불교 교육의 중심지였던 날란다대학터를 둘러보았다. 죽림정사터에는 그 흔한 벽돌 유적조차 없었다. 드문드문 있는 대나무들만이 ‘죽림정사’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했다.
 
  5~12세기 불교 교육의 중심이었던 날란다대학은 전성기에는 둘레가 10km에 달했으나 현재 발굴된 것은 1.5km 정도라고 한다. 한창때에는 교수 스님이 1500명, 학생 스님이 8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대학 밖에서 입학을 위해 대기하던 스님들 수가 3만여 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문지기가 내는 문제를 풀어야만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지기들조차 높은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의 아리야발마스님과 혜업(慧業)스님이 이곳에 유학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위해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3개월 전 마하보디사원에서 테러 발생
 
석가모니가 득도한 보드가야의 보리수 앞에는 마하보디 사원이 들어서 있다.
  날란다대학을 둘러본 후 라지기르를 출발, 78km 떨어진 보드가야로 갔다. 29세 때 출가한 석가모니는 6년 후 이곳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곳에 세워진 절이 마하보디 사원(대보리사)이다.
 
  마하보디 사원의 보안검색은 무척 엄격했다. 휴대폰은 일절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고, 두 번이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2013년 8월경 마하보디 사원에서 일어난 테러사건 때문이었다. 다섯 명의 테러리스트는 이곳을 폭파하려 했으나 1명의 부상자를 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라케쉬에게 범인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더니 “파키스탄에서 온 무슬림”이라고 대답했다.
 
  1300년 전 이곳을 찾은 혜초스님은 “보리대탑 멀다지만 걱정 않고 왔으니/녹야원의 길인들 어찌 멀다 하리오.(중략) 어찌 사람 소원 이루어졌는가/오늘 아침 내 눈으로 보고 말았네”라며 감격에 젖었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감격스러워 했다.
 
  마하보디 사원을 둘러보는데 스리랑카 스님 하나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이라고 했더니,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아는 사람 중에 한국인이 몇 명 있다”고 했다. 간단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던 그는 기념품이라며 보리수 잎을 하나 주었다. 마하보디 사원 뒤편에서 법회를 한 후 호텔로 향했다.
 
  11월 28일. 이른 아침에 다시 마하보디 사원을 참배한 후 7시간을 달려 255km 떨어진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바라나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피라날사국’이다. 3000년이나 된 도시다. 석가모니가 득도한 후 첫 설법을 한 녹야원(鹿野園)이 이곳에 있으며, 초기 불교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불교와 거의 동(同)시대에 나온 자이나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힌두교도들은 갠지스강물을 성수(聖水)로 여기는데, 이곳에서 목욕을 하거나 시신을 화장(火葬)한다. 여러 불경에 등장하는 ‘항하(恒河)’가 바로 갠지스강이다. 여기서 화장을 하면 아무리 악행(惡行)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죄업을 씻을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1년 내내 이곳을 찾는 힌두교도들이 줄을 잇는다. 거기에 더해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 “바라나시를 보지 않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다. 바라나시를 보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다” “인간과 신(神)이 공존하고 고대와 현대가 함께 있으며, 죽은 자와 산 자가 어울려 사는 가장 인도적(印度的)인 도시”로 알려지면서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갠지스강변의 火葬터
 
갠지스강변의 火葬場. 갠지스강변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저녁 무렵 인파와 소음을 헤치며 자전거 릭샤(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갔다. 버스는 아예 들어갈 수 없고, 자전거 릭샤와 오토 릭샤(인도 고유의 소형택시), 오토바이, 소와 인간이 얽힌 길을 자전거 릭샤는 잘도 달렸다.
 
  강변에서 갠지스강을 유람하는 배에 올랐다. 대단한 유람선이 아니라 사공이 노를 젓는 보트였다. 20분쯤 강을 따라 이동하니 오렌지빛 화염이 여기저기서 치솟는 것이 보였다. 힌두교도들이 화장을 하는 곳이다.
 
  잠시 후 시신 한 구가 운구되어 왔다. 우리나라 화장장처럼 시신을 관(棺)에 담아 운구해 온 후, 소각로(燒却爐)에 밀어넣는 것이 아니라, 시신을 바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태우는 것이다. 배에서의 거리는 불과 50m. 어쩌면 오늘 아침까지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지금은 장작더미 위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 가고 있었지만, 별다른 감회는 일지 않았다. 남들은 여기서 생(生)은 무엇이고 사(死)는 무엇인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는데, 내 정서가 메마른 것일까? 아니면 내 나이가 아직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나이는 아니라는 얘기일까?
 
  하지만 내 곁의 ‘보살님(여자 불교신자들을 이르는 말)’이나 ‘거사(居士)님(남자 불교신자들에 대한 호칭)’들은 달랐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바라밀경을 외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장사를 지내는 데 드는 비용은 한화(韓貨)로 110만원 정도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액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장작을 덜 쓰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면 시신이 완전히 타지 않기 때문에 팔이나 다리 조각이 강으로 떠내려가거나, 강변 모래밭에서 발견되기도 한다고 한다.
 
  라케쉬의 얘기로는 이곳 화장장은 천민들이 관리하는데, 아무리 높은 사람의 시신이라도 그들의 허락이 있어야 이곳에서 화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를 누린 사람이라고 해도 저승길로 가는 마당에서는 그들이 천대하던 천민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니, 재미있다. 화장장에는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인도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남아(男兒)선호가 강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할 아들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꽃접시를 띄우며
 
  가이드 산토스가 “저걸 좀 보라”고 했다. 30m쯤 떨어진 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작은 배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산토스의 말로는 “수장(水葬)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유족들은 시신 몸통에 널빤지를 대고 바윗돌을 매단 줄을 묶고 있었다. 산토스는 “수장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화장이건 수장이건, 슬픈 곡(哭)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푸자를 구경하다가 배가 처음 출발했던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선착장 옆 무대에서는 시끄러운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현란한 불빛 사이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가스님은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데서는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여기서는 축제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도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11월 29일 새벽 5시. 일출(日出)을 보러 다시 갠지스강으로 나갔다. 이른 새벽이지만 걸인들이 몰려들었다. 다시 배에 올랐다. 조잡한 불구(佛具)나 기념품을 파는 잡상인들이 탄 작은 보트들이 따라붙었다. 무엇인가 검은 물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죽은 소였다.
 
  꽃접시 위의 심지에 불을 붙여 가만히 강물 위에 내려놓았다. 여행 기간 내내 마가스님이 강조했던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리며 다짐해 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인간이 되기 위해, 자꾸 나태하고 비겁해지려는 마음을 여기에 버리고 가렵니다.’
 
  우리가 배를 탔던 강변 맞은편 모래밭에 올랐다. 여러 불경에 나오는 ‘항하의 모래’를 접하게 된 비구니들과 불교신자들은 준비해 간 작은 병과 비닐주머니에 모래를 담으며 즐거워했다.
 
  모래밭 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변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노 포토(No photo)!”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일행 중 몇 명이 잡상인들에게서 물고기를 사서 방생(放生)을 했다. 늘 웃는 모습이던 사진작가 차준현씨가 불같이 화를 냈다.
 
  “이건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에요. 물고기가 잡혀서 풀려날 때까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풀려나도 얼마 못 살고 죽을 거예요. 환경이 오염되는 겁니다. 불교계 지도자들이 생각이 있다면 방생을 금지해야 해요.”
 
  나도 동감이다. 방생은 종교의 가르침이 잘못된 방향으로 형식화된 예라고 할까?
 
 
  버스 커튼이 사라진 이유
 
갠지스강변의 힌두교 수행자. 얼굴 모습이 기괴하다.
  이날 아침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다섯 제자에게 설법한 녹야원을 찾는 것으로 불타보헤미안의 성지순례는 사실상 끝났다. 나머지 여정은 한국으로,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지난밤 묵었던 호텔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한 후 버스는 델리까지 가는 중간 도시인 럭나우로 달렸다. 287km 거리를 9시간 걸려 달렸다. 10시가 다 되어 호텔에 도착했다. 엿새 전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갔던 바로 그 호텔이다.
 
  11월 30일. 아침 6시에 버스에 오르니 뭔가 달라졌다. 차창의 커튼이 사라진 것이다. 모두들 ‘마지막 날이니 커튼을 걷어 세탁하기 위한 것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라케쉬는 “지난여름 한국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한, 버스 여대생 집단강간 사건 후 버스에 커튼을 치거나 짙은 색유리를 끼는 것이 금지됐다”면서 “그동안은 시골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단속이 그리 엄하지 않았는데, 델리에서는 단속을 엄격하게 하기 때문에 커튼을 떼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럭나우에서 델리까지는 507km. 우리나라에서는 6시간, 유럽에서는 5~6시간이면 갈 거리를 12시간을 달렸다. 그나마 중간에 톨게이트 비용이 비싼 민자(民資)고속도로를 달렸는데도 그렇다. 이 민자고속도로는 버스가 비교적 덜컹거리지 않으면서 제 속도를 내는, 그리고 중간중간에 제대로 된 휴게소가 있는, 인도에서 만난 유일하게 ‘길 다운 길’이었다. 다른 고속도로는 말이 고속도로지 사실상 국도(國道)나 지방도로 수준이었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릭샤, 오토 릭샤 등이 함께 달렸고, 심지어 횡단보도까지 있었다.
 
  델리 시내에서 델리공항까지 다시 2시간. 그날 자정 무렵. 에어 인디아 310편은 델리공항을 이륙했다.
 
 
  인도의 明暗
 
인도의 시골길에서는 지붕 위에 승객을 태운 승합차를 곧잘 볼 수 있다.
  인도는 ‘인도아대륙(亞大陸)’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땅덩어리다. 말이 한 나라지 유럽대륙에 버금가는 땅을 2주간 여행한 셈이다. 그 큰 땅의 극히 일부 지역, 그것도 낙후된 농촌지역을 여행한 것을 가지고 인도를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인도여행을 한 2주 내내 끝없는 벌판을 달리면서 참 많이 부러웠다.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첩첩한 산만 만나게 되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가도 가도 끝없는 비옥한 벌판을 가진 이 나라는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인가? 거기에다 ‘영(零·0)’이라는 개념과 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어낸 과학적 전통, 타지마할·아잔타 석굴 등 빛나는 문화유산, 오늘날에도 실리콘 밸리의 인재 풀(pool) 역할을 하는 우수한 인력….
 
  하지만 신(神)은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듯이, 나라에도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 듯했다. 현재의 비참한 삶도 주어진 숙명으로 감수하고 살도록 강요하는 힌두교의 낡은 교리와 거기에 순응해서 사는 사람들, 종교 간 갈등, 카스트제도라는 족쇄는 신이 이 나라에 내린 천형(天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마신 것보다 더 많은 먼지를 마시고,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걸인을 보고, 평생 버스 타고 달린 것보다 더 많은 거리를 달린 것 같은 여행이었다. 하지만 유언장을 써보고 갠지스강의 화장을 지켜보며 나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지금 나의 삶이, 내 조국 대한민국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여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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