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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일본 동맹외교의 어제와 오늘

美日동맹 2.0시대가 오고 있다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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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마, 지난 7월 美中정상회담에서 일본 비난하는 시진핑의 말을 자르면서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친구”
⊙ 일본, 메이지시대부터 동맹외교의 중요성 주목, 英日동맹으로 성공했다가 3국동맹으로 敗亡
⊙ 신임 美태평양함대 사령관인 해리 해리스 중장은 어머니가 일본인

劉敏鎬
⊙ 52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신임 미 태평양함대사령관 해리 해리스 제독. 어머니가 일본인인 그가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견고해지는 미일동맹을 상징한다.
  집단적 자위권(自衛權) 문제에 이어 중·일(中日) 충돌에 관한 얘기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중국의 영해(領海)침범과 일본의 긴급발진이 계속되던 센카쿠열도(尖閣諸島) 주변상황은 어느새 중국 핵(核)잠수함이 등장하고 일본의 자위대가 섬 탈환 훈련을 실시하는 상황으로 비화되었다. 전면전(全面戰)을 염두에 둔 상황이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센카쿠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서두르고 있는 것은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총론(總論) 차원의 논의가 아니다. 집단적 자위권의 정착화를 위한 각론(各論)이 지금 일본의 관심사다.
 
  잘 알려져 있듯이, 10월 말 김장수(金章洙) 청와대 안보실장이 급히 워싱턴을 찾았다. 한국정부가 원치 않을 경우 한반도를 미·일(美日) 집단적 자위권의 작전범위에서 제외해 달라고 하기 위해서다. 요구와 요청, 어느 쪽인지 모르지만 시기를 놓쳤다는 느낌이 든다. 미·일은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해 총론에 대한 합의를 끝내고 각론에 들어간 상태인데, 뒤늦게 나타난 한국이 총론을 거론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전투기형 헬리콥터 오스프레이 대량구입, 2014년부터 선보일 미제(美製) 고성능 무인(無人)정찰기 블랙호크, 60여 명의 고급두뇌로 구성될 총리 직속 정보통합기구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신설, 국가기밀 누설자를 처벌할 수 있는 특정비밀보호법안 심의, 1967년 이래 지속돼 온 무기수출 3원칙의 대폭적인 수정, 센카쿠 주변 섬들에 대한 방어선 검토….
 
  이상은 모두 집단적 자위권 정착화를 위한 각론에 해당된다. 집단적 자위권을 받쳐 주는 각론에 해당하는 정책들이 지난 10월 이후 1주일에 거의 하나씩 쏟아지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둘러싼 일본의 발 빠른 행보를 보면 크게 두 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총론으로서의 동맹, 각론으로서의 기습이다. 동맹과 기습.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組合)이라 생각할 듯하다.
 
 
  ‘국제공헌’ 對 ‘집단적 自衛權’
 
  일본 역사를 살펴보면 왜 집단적 자위권 논의에서 동맹과 기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대사를 보면, 동맹은 일본이 군사대국으로 나갈 때의 전제조건이었다. 일본은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다시 말해 군사적 관계의 보험을 체결한 상태에서 외부로 눈을 돌렸다. 멀리 뛰기 위해 먼저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는 식이다.
 
  대신 외부로 눈을 돌린 뒤 행동하는 시간과 과정은 엄청나게 빨랐다. 일본은 협박이나 허풍으로 상대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뒤 공격하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비웃고 무시해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적을 제압했다.
 
  일본의 특징 중 하나지만, 총론과 각론이 결정될 경우 대열에서 이탈하는 일본인은 극히 드물다.
 
  어제의 명분이나 논의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들끓었던 반대 목소리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일본사회 특유의 정체성(正體性)인 ‘공기’만이 지배한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우향우(右向右) 바람이 그 같은 현상이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가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은, 한동안 일본이 주장했던 유엔을 통한 국제공헌을 유명무실하게 만든다. 199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국제공헌론’은 반핵(反核)·평화·반미(反美)로 무장한 단카이(團塊) 세대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郎)가 자신의 책 《일본열도개조론》과 《보통국가론》에서 주장한 생각이다. “미·일관계보다 유엔을 통해 국제무대에 진출하고 일본의 경제력에 맞게 군사적 책임을 다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분쟁지역에서의 유엔평화유지군 참가와 같은 것이다. 유엔이라는 글로벌 집단동맹을 통한 무력(武力)증강이다.
 
  이런 주장을 했던 오자와는 아베의 재(再)등장과 함께 정치적 재기(再起)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이다. 그는 평화·반핵·반미 세대에게 먹히던 정책으로 일본정치를 주물렀지만, 단카이가 70대로 접어들면서 현실정치에서의 힘도 한순간에 빠져 버렸다.
 
  버블경제가 끝난 뒤 20여 년간 일본 외교·군사 분야의 키워드로 자리 잡았던 국제공헌은 이미 역사적 유물로 전락했다. 국제공헌을 통한 세계진출이 아니라 미국에 공헌하면서 전(全)세계에서 일본의 이익을 확대하자는 것이 집단적 자위권의 핵심이다.
 
 
  시진핑의 말을 끊은 오바마
 
지난 7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일본을 비판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을 가로막았다.
  “아베,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참배하면 한중(韓中)과의 관계 불안정해질 것.”
 
  지난 11월 1일 한국 신문에 실린 기사이다. 커트 캠벨 전(前) 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가 한 얘기다. 그는 한 일본 신문사가 주최한 포럼에서 영상(映像) 메시지를 통해 아베에게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야스쿠니를 참배할 경우 일본이 아시아에 쌓은 소프트 파워의 성공이 퇴보할 수 있다는 경고다.
 
  캠벨은 민주당을 대표하는, 워싱턴 최고의 아시아 전문가 중 한 명이다. 옥스퍼드대학 박사 출신으로 해군에서 근무한 뒤 하버드대학과 국방부, 백악관과 국무부 그리고 워싱턴의 싱크탱크를 거쳤다. 언젠가 국무부나 국방부 장관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캠벨의 이 발언은 아베의 우향우에 반대하는 친한(親韓)·친중(親中)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한국 언론은 이를 두고 ‘아베에 대한 쓴소리’라고 규정했다. 과연 그럴까?
 
  캠벨은 지난 7월 17일에도 일본을 방문, 일본외신기자클럽에서 동북아(東北亞) 정세에 관해 연설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7월 7일부터 이틀간 열린 미·중 정상회담 때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오바마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센카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일본의 우경화(右傾化)를 비판하자 오바마는 시진핑의 말을 끊으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그치는 게 어떻겠습니까!(Let's stop you here.)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인 동시에 친구이자,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이 미·중 정상회담은 시진핑이 미국에 대해 이른바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를 제안한 회담이었다. 중국도 미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세계문제를 다루는, ‘양대 패권국(G2)’의 하나로 인정해 달라는 자리였다. 그리고 센카쿠 문제는 중국으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이익이다. 그러나 시진핑의 얘기를 듣던 중 오바마가 던진 말은 “스톱(Stop)!”이다. 중국 공산당 매체가 대대적으로 선전한 당시 두 사람의 사진을 보자. 시진핑의 얼굴은 시종 일그러져 있다. 오바마 역시 유쾌한 모습이 아니다.
 
  미·중 정상회담 3일 뒤, 미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던의 홍콩망명 사건이 터지면서 ‘신형대국관계’ 얘기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한국 신문에 자주 실리는 ‘중국, 미국과 어깨 나란히…’ 같은 얘기는, 워싱턴의 상식과 거리가 먼, 소설에 가까운 얘기일 뿐이다.
 
 
  中-몽골 합의
 
  시진핑의 야스쿠니 관련 발언이 있기 5일 전인 10월 26일, 몽골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다. 몽골 총리와 시진핑의 회담 후 나온 양국 간 합의문이 흥미롭다. 여러 얘기가 있지만, 핵심은 “양국 간의 핵심적 이익과 중대한 관계를 고려해, 그것과 관련된 어떤 식의 군사정치동맹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의문에 새겨진 행간(行間)의 의미를 새겨 보자. ‘핵심적 이익’이란 말의 의미는 센카쿠나 남중국해 영토문제에 관한 부분이다. 한마디로 몽골에 일본·미국·아세안이 주도하는 반중(反中)동맹에 참여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일본을 대하는 캠벨의 자세나 몽골 총리를 대하는 중국의 태도는 국제사회를 대하는 미·중 양국의 기본자세나 인식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먼저 미국을 보자. 캠벨이 미·중 정상회담 당시 오바마의 발언 내용을 단어 하나 가감(加減)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알린 것은 동맹국에 대한 예의이다.
 
  지난 7월 초 미·중 정상회담 당시 일본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이 회담에 주목했다. ‘1972년 닉슨 쇼크(닉슨 미 대통령의 전격적인 중국방문) 때처럼 미·중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제멋대로 요리하지 않을까? 일본이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당시 워싱턴 내 일본인들은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외교관·기자·상사(商社) 직원들이 총동원되어 회담 관련 정보에 매달렸다. 캠벨의 발언은 이러한 일본인들의 갈증을 한순간에 풀어 줬다. 일본의 모든 신문이 캠벨의 발언을 주요 뉴스로 다룬 것은 물론이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견고한 미·일동맹’이란 타이틀의 기사가 일본 신문을 덮었다.
 
 
  중국에 동맹은 없다
 
영국 매카트니사절단은 건륭제를 알현하고 통상을 요청했지만, 자기중심적인 중국인의 세계관만을 확인했다.
  중국은 어떨까? 중국-몽골 합의문은 수직적(垂直的) 관계에 기초해 있다. 이 합의문을 보면, 몽골에 일본·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지 말라는 중국 측의 강력한 요구가 들어 있다. 하지만 합의문에 몽골이 중국에 대해 요구하는 바는 들어 있지 않다. 물론 국제정치에 공짜는 없다. 몽골이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뭔가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장·단기 유·무상 경제지원이 이뤄질 것이 분명하다.
 
  중국과 몽골 간 합의는 동맹에 기초한 미·일관계와 비교할 때 큰 차이점이 있다. 동맹이란 것은 이념·원칙·의무·권리 같은 명문화(明文化)된 규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다. 상황이 일어나면 곧바로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국가간 계약서에 해당된다. 애매하거나 오해가 생길 만한 규정은 평소에 만나 대화를 통해 다듬어 간다.
 
  중-몽골 관계는 다르다. 편의에 따라 만나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유연한 관계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상황에 따라 180도 다르게 변신할 수 있는 관계이다.
 
  중국은 동맹개념이 희박한 나라이다. 유사시 목숨을 걸고 서로를 도와주겠다는 발상이 애초부터 없다. 예외적으로 냉전(冷戰) 당시 공산권 국가들과 ‘잠시’ 동맹관계를 맺기는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구(舊)소련과 동맹을 맺었지만 1979년 미국과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파기했다.
 
  지금 중국의 유일한 동맹국으로 남아 있는 나라는 북한이다. 그러나 지난 3월 중국의 한 장성이 고백했듯이, 북한이 과연 중국의 동맹국인지는 의문이다. 그 중국 장성은 중국군이 북한에 주둔하지도 않고, 유사시 지휘권과 관련해서 양국 간의 합의가 없다는 이유로 양국 간 동맹을 부정했다. 파키스탄·미얀마 같은 나라들이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용을 보면 단순한 군사협력 관계에 불과하다.
 
  냉전의 역사에 밝은 사람 중에는 동맹에 관한 무관심이 중국이 지향하는 비동맹(非同盟)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1960년대에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진영과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길, 즉 비동맹운동을 주창했었다. 중국의 희박한 동맹개념과 비동맹운동을 연결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1793년 영국의 조지 3세는 중국과의 무역확대를 위해 무역사절단을 베이징(北京)에 파견했다. 영국사절단은 중국과의 무역확대를 원한다는 조지3세의 의사를 건륭제(乾隆帝)에게 전했지만, 황제의 반응은 “노(No)”였다.
 
  “중국이 왜 당신들과 같은 작은 나라와 무역을 하겠는가? 우리는 전부 갖고 있다. 당신 같은 소국(小國)으로부터 수입할 것도 없고, 사고 싶은 것도 없다. 통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실 중국은 당시 영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이 첫 만남을 통해 영국은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고 믿는 중국인의 세계관을 확인했다. 영국이 아편전쟁에 승리한 뒤 난징(南京)조약으로 중국을 무력화(無力化)시킨 것은 건륭제 대면 49년 뒤이다.
 
 
  해군과 동맹
 
  1853년 7월 8일,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동인도함대 소속 군함 4척이 도쿄 앞바다에 들이닥쳤다. 선체를 검게 칠한 흑선(黑船)의 등장에 일본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일본은 당시 아시아의 대형(大兄) 중국의 침몰소식을 잘 알고 있었다. 첨단기술로 무장한 서방 제국주의가 일본을 식민지 노예국가로 만들 것이란 소문이 열도 전체에 퍼져 나갔다. 1년 뒤 미국은 다시 군함 9척을 일본에 파견했다. 여기에 대항하다가 질 경우 식민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일본은 곧바로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1639년 기독교 전파를 막기 위해 포르투갈 배의 일본 입국을 금지한 이래 처음으로 외국과 맺은 조약이었다. 이로써 185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쇄국(鎖國)정책이 끝났다. 4년 뒤인 1858년 7월 29일, 일본은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美日修好通商條約)을 맺었다. 관세자주권이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이후 영국·프랑스·네덜란드·러시아와도 비슷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동맹’은 개국(開國)과 동시에 일본이 주목한 새로운 개념의 세계관 중 하나였다. 유럽과의 통상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일본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나라를 연구하게 됐다. 모델은 당시 패권국이던 영국이었다. 영국은 유럽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자원도 없는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다. 일본은 영국을 ‘유럽의 일본’이라고 해석했다. 개국 후 일본은 영국에 대규모로 유학생들을 보냈다. 일본의 문호(文豪)로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영국에서 3년간 공부했다.
 
  일본은 영국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에 주목했다.
 
  첫째는 해군이었다. 영국의 절대적 파워의 배경에는 세계를 누비는 강력한 해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둘째는 동맹이다. 영국은 유럽문제에 직접 휘말리지 않으면서 국력을 키워나갔다. 이 과정에서 동맹이라는 외교적 전략전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英日동맹
 
영일동맹을 비꼬는 만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속셈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당시 영국은 이른바 ‘영광스런 고립(Splendid Isolation)’을 외교정책의 근간(根幹)으로 삼고 있었다. 20세기식으로 얘기하자면 비동맹노선이다. 영국은 동맹을 통해 유럽문제에 직접 끼어들기보다는 제3자적 입장에서 세력균형 역할을 맡겠다고 공언했다.
 
  이러한 영국의 동맹관은 일본에 큰 영향을 줬다. 일본은 영국의 비동맹노선 자체보다, 영국을 비동맹노선으로 나서게 만든 유럽 내 동맹관계의 의미와 역학(力學)관계에 주목했다. 일본은 영국과 유럽대륙 간의 외교관계를 지켜보면서 현실로서의 국제정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영국이 ‘영광스런 고립’에서 벗어나 동맹노선으로 전환했을 때, 그 첫 파트너가 된 것이 일본이었다. 1902년 1월 30일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이 역사상 처음으로 맺은 동맹 파트너가 영국이었고, 비동맹노선을 고집하던 영국을 100여 년간의 고독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이 일본이다.
 
  지난 10월 중순, 영국 외무장관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 뉴스를 접했을 때 필자의 머리를 스친 것은 111년 전의 영일동맹이었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두 나라 간의 화학반응이 21세기에 부활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은 것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랴오둥(遼東)반도를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프랑스·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으로 하여금 랴오둥반도를 내놓게 했다. 이어 의화단(義和團) 사건 이후에는 다롄(大連)까지 이어지는 동청(東淸)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주 곳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켰다.
 
  일본은 사사건건 자신들의 팽창을 가로막는 러시아에 대해 협상을 통해 상호이익을 보장받으려 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제의를 일축했다. 그러자 일본은 러시아의 급격한 팽창을 두려워하던 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영일동맹은 1923년 8월 17일까지 지속된다. 이 기간 동안 세계무대에서 일본의 위상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흑선에 놀라 개국한 지 70여년 만에 일본은 영국·미국·프랑스에 버금가는 강국으로 성장한다.
 
 
  英日동맹의 해체와 3국동맹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한순간에 커지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일본이 급성장하면서 주변국, 특히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의 알력이 생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일본 4개국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영일동맹 무용론(無用論)이 나왔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필리핀·마셜군도 등 태평양에서 자신의 이익을 잠식하는 가상적(假想敵)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미국은 만약 태평양에서 일본과 충돌하게 되면 영일동맹이 미국을 적으로 삼게 된다는 우려를 영국에 전했다. 영국은 이러한 미국의 우려를 받아들여 영일동맹을 연장하지 않았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승전국 가운데 하나였지만, 승전국 간의 외교에서는 패자(敗者)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곧이어 열린 열강 간 군축(軍縮)회담은 일본해군의 규모를 미국·영국의 6할 정도로 규제했다. 일본은 이를 아시아 유색인종에 대한 서방의 차별로 받아들였다.
 
  영일동맹 파기 이후 일본은 서방 열강으로부터 소외된 아시아의 외톨이가 되었다. 일본은 이미 영일동맹을 통해 동맹의 중요성을 피부로 경험했었다.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이 일본을 사로잡았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고립은 더 심해졌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에 들어갔다. 일본은 새로운 동맹관계 구축에 나섰다. 그것이 1940년 9월 27일 체결된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동맹이다. 일본은 이들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을 향해 나갔다.
 
 
  동맹과 기습
 
일본은 3국동맹을 체결한 지 1년3개월 후에 진주만을 기습했다.
  20세기 초 영일동맹과, 1940년대 삼국동맹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동맹을 만든 후 일본은 적대국에 대한 무력(武力)공격, 그것도 한순간에 해치우는 기습공격을 단행했다.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이틀 뒤 일본해군은 뤼순항(旅順港)의 러시아해군을 기습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는 단계에서부터 러시아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이 대한해협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섬멸할 수 있었던 것도 동맹국 영국이 제공해 준 정보 덕분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기습공격은 영일동맹이라는 듬직한 보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기습을 단행했다. 삼국동맹이 체결된 지 15개월 만에 감행한 전격(電擊)작전이다.
 
  일본 외교군사 노선의 특징인 동맹과 기습공격은 1951년 9월 8일 맺어진 미일동맹에는 부합하지 않을 듯하다. 미일동맹은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맺은 동맹이 아니다. 미국의 세계전략 속에 추진된 수동적(受動的)·수직적 동맹관계라 볼 수 있다. 미일동맹은 두 번 다시 일본을 군사대국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는 감시자 역할을 한다. 기습작전은커녕 일본이 주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군사적 권한은 극히 제한돼 있다.
 
  그러나 아베가 총대를 멘 2013년의 집단적 자위권은 기존의 미일동맹 구도와 전혀 다르다. 일본이 능동적(能動的)인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주체적인 외교군사 노선이다. 동맹국인 미국을 도우러 나간다는 이른바 ‘미군 2중대’ 역할을 하는 군사행동이지만, 그래도 과거 수동적인 자위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베 이전이 미일동맹1.0이라면 집단적 자위권에 기초한 관계는 미일동맹2.0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이 미국을 도우러 외국에 나갈 경우, 미국이 시종일관 일본군을 통제할 수는 없다. 일본군의 행동반경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미일동맹2.0이라 해도 영일동맹이나 삼국동맹 때처럼 일본의 이익을 위한 독자적인 기습공격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일동맹에 도움을 줄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아베가 주장하는 적기지(敵基地) 선제(先制)공격론, 즉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북한에 대한 예방적 차원의 기습공격이 그 같은 범주에 들어선다.
 
  지난 10월 16일 하와이 진주만 기지에서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갖는 의미와 방향을 감지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새로운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해리 해리스(Harry Harris) 중장이 취임한 것이다. 그는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일본이다. 일본의 기습공격을 당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일본계 제독이 세계 최강의 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것이다.
 
  왜 ‘지금 이 순간’ 일본계 태평양함대 사령관인가? 해리스 중장은 일본어에 능통하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물론, 미일동맹에서 그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 태평양함대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해리스 중장이 곧 부산에도 들르겠지만, 그때 한국인들은 미일동맹2.0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다.
 
 
  드라마 <아마짱>과 <오싱>
 
  지난 9월 28일, NHK 드라마 하나가 화제 속에 막을 내렸다. 88회 시리즈물로 일본인 모두가 아침 8시15분이면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5개월간 방영된, 아침 연속드라마 <아마짱(あまちゃん)>이다.
 
  도쿄에서 공부하던 한 여고생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바닷가 고향에 갔다가, 할머니의 뒤를 잇는 해녀(海女)가 되기로 결심한다. 사투리와 시골의 인심이 드라마 전체에 묻어난다. 주인공을 영상화한 해녀 관련 동영상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그는 얼떨결에 현지 아이돌로 데뷔한다. 이후 도쿄까지 진출해 지방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활약한다. 고향주민의 자랑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3·11 동일본 대지진이 터지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아이돌을 넘어서 지진복구에 참여하는 등 행동하고 봉사하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아침 드라마의 이미지에 맞게, 밝고 건강한 모습의 젊은 탤런트를 내세워 성공한 국민드라마이다.
 
  드라마 <아마짱>을 보면서 필자의 머리에 스친 또 하나의 NHK 드라마가 있다. 일본 드라마 역사상 62.9%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자랑한 <오싱(おしん)>이다. 1983년 4월부터 1년간, 297회에 걸쳐 방영된 아침 드라마이다. 12월 5일부터 한국에서 상영하는 영화 <오싱>은 이 드라마를 영화화한 것이다.
 
  <오싱>은 메이지(明治)시대 때 태어나 80대에 세상을 뜬 실존했던 여인 오싱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근대화와 태평양전쟁, 이어 패전 후의 일본을 경험한 역사의 증인으로 오싱이 등장한다. 가난으로 점철된 유년기와, 전쟁에 휘말리던 와중에서도 서로 돕고 살았던 중년기, 이후 패전과 함께 찾아온 고통의 시간이 밀도 있게 그려진다. 1972년 한국국민들을 울린 태현실·장욱제 주연의 여로(旅路)에 비견될 수 있는 드라마이다.
 
  <오싱>은 전 세계 68개국에 수출된 일본을 대표하는 소프트 파워이기도 하다. 4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오싱> 드라마를 한 번쯤 봤거나, 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라도 있을 것이다.
 
  <오싱>과 <아마짱>을 보면서 미일동맹1.0과 2.0의 차이를 생각했다. 오싱은 가난을 극복하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인생을 개척해 나간다. 일본인 모두가 공감하는 길을 제시하는 모범 인생이다. 오싱은 화려하거나 잘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일본인으로서의 정도(正道)를 보여준다.
 
  아마짱은 어떨까? 결코 모두가 바라는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 해녀가 되겠다고 결정할 때, 아이돌로 나가겠다고 할 때, 반대의견에 부딪힌다. 고등학생인 여주인공은 전부 혼자서 결정한다. 부모는 물론, 그 어떤 사람도 주인공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주변에 맞서면서 묵묵히 혼자의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아마짱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맞추기도 하면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싱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이다.
 
  오싱이 미국의 의지에 맞추는 미일동맹1.0이라면, 아마짱은 일본인 스스로의 생각을 강조하는 미일동맹2.0 어디쯤에 있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
 
 
  앵글로색슨과 일본
 
  한국 신문·방송에서 집단적 자위권이란 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그나마 자주 등장한 것은 두 달여 전부터이다. 동맹국 미국의 백악관·의회·국무부·국방부 모두가 두 손을 들고 일본을 지지하고 있다. 전후(戰後) 60여 년간 이뤄진 모든 변화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움직임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과거 일본군이 감행했던 무력 기습공격과는 다르지만, 전격작전에 맞먹는 한순간의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동맹과 기습을 통한 일본의 외교사는 통산전적 1승 1패로 기록된 상태이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한 1승과, 태평양전쟁에서의 항복으로 인한 1패이다. 일본 정치외교 무대에서 언급되는 통설(通說)이 하나 있다. 개신교를 믿는 앵글로색슨계인 영국·미국이 일본과 가장 잘 맞는다는 얘기다. 일본 내에서는 앵글로색슨계와 등을 질 경우 언젠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암묵의 상식이다. 반면에 중국·러시아·이탈리아, 심지어 게르만족인 독일도 일본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과거 역사에서 일본이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아울러 일본이 미국·영국·호주로부터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이들과의 관계강화에 노력해 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정작 역사에서 배우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민족과 국가는 극히 드물다. 일본은 과거 동맹외교의 성공과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움직이고 있다. 지금 한국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얼마나 교훈을 얻고, 실천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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