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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정현의 ‘저 높은 중국, 낮은 중국’ ⑪

3000년의 잠에서 깨어난 황금 유물을 찾아서

글 : 김정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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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판 ‘트로이 문명’인 어얼둬쓰 문화와 싼싱두이 문화
⊙ 황금 유물과 청동기 유물을 다양하게 배출해 낸 어얼둬쓰 문화
⊙ 1989년 벽돌공장 노동자가 발견한 유물로 존재가 드러난 싼싱두이 문화

金正賢
⊙ 55세. 서울경찰청 경위 퇴직.
⊙ 주요 작품으로 《아버지》 《어머니》 《맏이》 《누이》 등 가족 연작.
⊙ 2002년부터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 준비 중.
  하인리히 슐리만이 없었다면 트로이 유적은 아직까지도 단순한 전설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전설로 남을 뻔한 문명이 뒤늦게 그 모습을 드러낸 예는 아시아에도 존재한다. 바로 중국의 어얼둬쓰(鄂爾多斯·Ordos) 문화와 싼싱두이(三星堆) 문화다. 어얼둬쓰 문화는 북방민족의 자취가 남아 있는 네이멍구 지역에 전해내려 온다. 싼싱두이 문화는 쓰촨 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촉국의 문화 중 하나로 여겨지는 문화다. 두 문화는 공통적으로 찬란한 황금 유물을 자랑한다.
 
 
  베이징의 골동품 시장에서 첫 발견된 북방 문화
 
진사 태양신조 금식.
  어얼둬쓰 문화는 고대 중국 네 방향에 자리하던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에 기원한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중국 역사는 이들을 ‘오랑캐’라 폄하한다. 이 중 동이는 우리 민족과 관련이 깊다. 남만은 간간이 존재감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비교적 조용히 중원 문화권에 흡수된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서융과 북적은 좀 복잡하다.
 
  북적은 귀방(鬼方), 융적(戎狄) 등으로도 불렸는데 뒷날에는 서융과 더불어 융으로 불리다가 흉노로 이어져 오랫동안 중원세력의 북쪽 경계를 넘나들었다. 세세히 논할 수 있는 지면 사정이 아니라 한마디로 하자면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단한 건축물이라는 ‘만리장성’을 존재하게 한 주인공이 그들이었다. 심지어 훗날에는 철옹성이라 여긴 만리장성을 넘어 아예 대륙 전체를 집어삼켜 주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중국의 사서(史書)에만 기록되어 여전히 ‘오랑캐’라는 오명을 달고 있다.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어얼둬쓰청동기박물관장 왕즈하오(王志浩·54세)는 어얼둬쓰시 출신으로 몽골족이다. 지린(吉林)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어얼둬쓰 유적 발굴 등 줄곧 중국 북방 지역 고고문물 발굴에 종사했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자치구 성도(省都)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네이멍구박물관에서 근무하는 그의 딸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따님이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군요.
 
  “예, 전남대학교에서 3년간 공부했습니다. 다시 석·박사 공부를 위해 한국에 갈지도 모르겠고요. 저도 한국에 학술토론회 참석차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진지한 학술토론이 인상 깊었고 우호적 감정이 깊습니다.”
 
 
  농경 지역에서 사막으로 바뀐 어얼둬쓰 지역
 
   —중국 북방, 특히 어얼둬쓰 지역의 청동기 역사는 어떤가요.
 
  “중원 지역 청동기 역사는 4천 년가량 되는데, 어얼둬쓰 지역의 청동기는 상(商)나라 시기에 시작되어 약 3천 년 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베이징(北京) 골동품시장에서 북방 지역 청동기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대부분 학자는 그 무렵 발견된 양사오(仰韶) 문화 유적과 함께 서방 소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져 온 문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발견된 청동기를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어얼둬쓰 지역이 그 출처임을 알게 됐고, 체계적 발굴이 이어졌습니다.”
 
  양사오 문화는 1921년 허난(河南)성 양사오촌에서 발견된 채도(彩陶 )를 중심으로 한 황허 유역 신석기 문화를 말한다. 당시 발견을 주도한 이는 스웨덴 지질학자 안데르센이었는데, 앞서 서구의 채도 문화를 접했던 그는 당연히 서방에서 전파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사결과 양사오 유물의 시기가 더 오래되어 자생적 문화로 판명되었다. 역사의 소홀함은 여차 그런 오류를 낳게도 하는 것이다.
 
  —어얼둬쓰를 비롯한 북방 청동기는 황허 유역 청동기와는 다른 특징이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북방 청동기는 황허 유역과는 다른,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청동기와 유사한 점이 많아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학계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렇다고 중국 북방의 청동기가 서방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발견된 유물의 연대가 서방보다 더 오래된 것들이 많기에 확실한 사실입니다. 또 한(漢)나라 이후 철기 문화는 중원과 유사해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연관되는 문화는 누가 먼저라기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요. 스키타이를 비롯해 신장(新疆), 중국 북방을 포함한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지요.”
 
  —어얼둬쓰 지역에도 신석기 문화가 있지 않나요.
 
  “예, 어얼둬쓰 신석기 유적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 밖에도 일대의 고대 유적지는 약 1천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그중 신석기 유적이 대략 4분의 1 가량 차지합니다.”
 
어얼둬쓰 청동기박물관장 왕즈하오.
  —신석기시대 어얼둬쓰 유적을 보면 농경의 흔적도 있어 지금과는 기후 차이가 있었던 듯합니다.
 
  “당시에는 숲이 무성하고 농경에 적합한 기후였던 게 맞습니다. 그 후 차갑고 건조한 기후로 변화되며 점점 사막화된 거죠.”
 
  —중국의 오지를 다녀보면 생존에 불리한 척박한 환경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머물러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왜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나지 않는 걸까요.
 
  “그 문제는 우리가 깊이 탐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어얼둬쓰 사람들도 일부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중원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민족이 어울려 사는 중원에서는 아무래도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결국 그들 중 일부는 다시 돌아왔지요.”
 
  —결국 융화될 수 없어 독자성을 유지한 것인가요.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얼둬쓰 지역은 흥미로운 곳입니다. 지반이 안정되어 한번도 지진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또 3면은 산이고 남으로는 황허가 흘러 나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업에서 목축업으로 생산방식을 바꾸었고, 나중에는 유목으로 이어진 겁니다.”
 
  —사서에 따르면 주(周)나라 때 지금의 베이징 인근에 연(燕)이라는 제후국을 두어 북방세력을 경계하게 했습니다. 오랑캐라 부르면서요.
 
  “갑골문에 따르면 ‘융’은 ‘전쟁’과 ‘북방민족’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보수적이고 낙후된 관념으로 인해 그리했습니다. 하지만 1949년 신중국 이후, 의식의 개선과 더불어 여러 고고학적 증명들이 늘어나면서 황허문화, 창장문화, 북방초원문화 등을 아울러 중화문명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중국 역사학자와의 대화는 언제나 이처럼 중화문명, 중화민족으로 귀결된다.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이번 호의 주제는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에 민감한 질문은 삼갔다.
 
 
  문자가 없던 북방민족
 
전국시대 융족의 전차 복원도.
  —북방민족의 고유한 문자나 사서는 없었나요.
 
  “한대 이후 돌궐이나 말갈 등은 고유문자가 있었지만, 그 이전 북방민족의 문자와 관련된 유물은 발견된 바 없습니다. 기록도 중원민족의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고대 북방민족의 사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요.”
 
  ‘오랑캐’의 사전적 의미는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다. 그러나 오랑캐로 칭해진 그들도 농경을 했고, 기후의 변화에 따라 삶의 수단을 변화시켰다. 초기에는 변화된 자연환경에 목축으로 대응했고, 더 척박해진 다음에는 유목으로 삶을 영위했다. 정착할 수 없었기에 말을 길들여 이동 수단으로 삼았고, 불안정한 여건에서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청동기의 칼날을 벼려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예술을 등한시한 것도 아니었다. 지배층은 황금장식으로 권위를 높이며 예술적 승화를 이루었고, 전사(戰士)의 청동무기에는 익숙하고 수호적 의미를 담은 각종 동물 문양을 조각했다.
 
  전술도 빼어났다. 기동력 빠른 준마와 날렵한 전차로 쏜살같이 달려들어 필요한 것들을 얻은 뒤 바람처럼 초원 저 깊은 곳으로, 육중한 전차 따위로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고원으로 사라졌다. 오죽했으면 상나라 왕조는 융과 같은 계열의 강(羌)족을 증오해 그들을 노예로 삼고 제사의 제물로 썼을까. 하지만 그들의 약탈은 곡물과 같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
 
  결코 세상 누구로부터도 ‘오랑캐’로 여겨질 만큼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 아니었다. 없었던 것은 오직 문자와 사서뿐이었다. 어쩌면 이동이 잦은 생활 탓에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역사의 기억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구전되는 과정에 하나씩 기억에서 사라지고, 특히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역사는 서둘러 잊었을 것이다. 남들이 칭하는 ‘오랑캐’라는 치욕의 이름도 그렇게 잊으려 했겠지만, 결국 ‘오랑캐’라 기록한 사서와 자신들 사서의 부존재는 영원히 그 오명을 벗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역사의 의미가 새삼 두렵지 않은가? 그런데 그보다 더한, 아주 희미한 기억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찬란한 황금문명도 있었다.
 
 
  벽돌공장 노동자가 발견한 三星堆 문화
 
싼싱두이 박물관장 왕쥐중(우측)과 돤유 교수.
  쓰촨성은 예부터 땅이 비옥해 모든 물산이 있다는 ‘천부지토(天府之土)’로 불렸다. 게다가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용이치 않아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당연히 문명의 꽃이 피지 않을 리 없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하(夏)나라를 개국한 우(禹)가 임금이 되기 전 치수(治水)에 나섰을 때, 양주(梁州)라는 이름으로 쓰촨성 일원을 개척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온전히 믿을 바는 못 된다.
 
  아무튼 그 쓰촨성 청두(成都) 평원의 청두시 인근 광한(廣漢)시 싼싱두이에서, 1986년 7월 18일 벽돌공장 노동자에 의해 한 점의 옥장(玉璋)이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인류 역사상 지금껏 보고 듣지 못한 화려한 황금과 청동기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른바 싼싱두이 황금 유물이었다.
 
  싼싱두이박물관장 왕쥐중(王居中·43세)은 허난성 출신으로 쓰촨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인터뷰 요청에 대학 선배이자 쓰촨사범대 파촉연구센터 돤유(段渝·60세) 교수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싼싱두이 유물은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특별한 독창성을 띱니다. 그에 대한 연구 결과는 어떤가요.
 
  “그렇습니다. 황금가면, 청동인상(靑銅人像), 청동신수(靑銅神樹) 등 싼싱두이 유물의 많은 부분은 고고학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독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중원 문화와도 분명히 다른 독립적 문화임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일부 유물은 중원 문화와 유사한 부분이 있어 시기에 따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특히 주조기술면에서 서방은 두드려 제련한 청동조각을 연결해 만드는 데 반해, 싼싱두이를 포함한 중국 청동기는 청동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 주조하는 방식이므로 서방의 기술이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황금가면, 청동인두상(靑銅人頭像), 청동신수 등의 용도는 무엇인가요.
 
  “대부분 제사에 쓰인 기물입니다. 중원 문화에서는 제사를 지내도 우상숭배는 없었습니다. 현재는 관우, 장비 같은 상징적 인물상이 있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논어》에 따르면 ‘제여재 제신여신재(祭如在 祭神如神在)’, 즉 ‘선조에 제사 지낼 때는 마치 신령이 앞에 계신 듯이 하였다’라 하여 어떤 인물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반면 싼싱두이에서는 상징적 인물을 기물로 만들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는 중원 문화와는 완연히 다른, 오히려 서방의 메소포타미아나 수메르 문명과 유사합니다.”
 
 
  전설 속의 나라 古蜀國
 
튀어나온 눈을 가진 청동면구(싼싱두이).
  —서방 문화의 영향을 받은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유사하다는 겁니다. 이집트나 아테네, 수메르 문명 등에도 황금가면이나 청동전신상 등이 있지만 그것들은 구체적인 인물의 조형입니다. 반면 싼싱두이는 상징적인 조형이지요. 싼싱두이만의 독자 문명으로 보는 게 옳습니다.”
 
  —쓰촨은 동쪽의 중원보다는 남쪽의 윈난(雲南), 서북쪽 시짱(西藏·티베트), 칭하이(靑海)성 등과 교통이 수월합니다. 고대에 그쪽 길을 통한 교류가 있지 않았을까요.
 
  “예, 고대로부터 시짱, 칭하이, 신장, 간쑤(甘肅)성과 연결되는 교통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싼싱두이 유물에서 그 방면의 영향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 남쪽의 윈난은 청동기 문화의 탄생이 비교적 늦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서야 비로소 나타났죠. 싼싱두이 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싼싱두이 문화의 독자성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쓰촨 지역은 고대로부터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대의 일이지만 동한(東漢)시대에 탄생한 도교의 발원지도 쓰촨이었습니다. 그것은 중국 어느 지역보다 종교적 전통이 깊어 신흥 종교가 뿌리내리기 좋은 여건이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여러 황금 유물과 청동기를 제작한 자원의 생산지는 어디인가요.
 
  “윈난 지역에 금광이 있었고 진사장(金沙江) 유역에서 사금이 생산되었습니다. 청동의 원료인 구리, 주석 등의 광산도 쓰촨 서남쪽과 윈난 지역에 있었고요.”
 
  —윈난성이라면 청두시에서 1천 킬로미터 전후되는 거리입니다. 그곳까지 통치권이 미쳤다는 건가요.
 
  “황금과 구리 등은 고대에 귀중품이었습니다. 그런 귀중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확보하고 운반하려면 당연히 통치권이 미쳤을 거라 봅니다. 쓰촨성과 윈난성을 아우르는 거대 왕국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관련된 기록이 사서에 있나요.
 
  “고촉국(古蜀國)에 관한 대표적인 고서로는 《촉왕본기(蜀王本紀)》를 들 수 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시기 엄가균(嚴可均)이 저술한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의 촉왕본기를 인용한 부분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진(東晋)시대 상거(常璩)가 쓴 《화양국지(華陽國志)》 등에도 고촉국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요.
 
  “고촉국을 세운 이는 잠총(蠶叢)이고, 2대 백관(栢灌)과 3대 어부(魚鳧)를 이은 4대 두우(杜宇)왕 때 싼싱두이에서 지금의 청두시로 도읍을 옮긴 것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화양국지》에 따르면 잠총은 눈이 불룩 튀어나왔다고 전하는데 발견된 유물 중에 튀어나온 두 눈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청동기 기물이 있습니다.”
 
 
  한족의 기원은 중원의 華夏族
 
청동입인상(싼싱두이).
  —촉 지역의 고대 문화는 바오둔(寶墩) 문화, 싼싱두이 문화, 청두의 진사(金沙) 문화로 이어진 것인가요.
 
  “일반적으로 그렇게 봅니다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오둔은 시기적으로 앞섭니다만 진사의 경우는 거대 왕국인 싼싱두이에 부속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자는 있었나요.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에 7개의 부호가 있는데 문자였던 것으로 봅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어떤 의미인지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고대 중국 서남부를 아우른 싼싱두이 문화가 어떻게 3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처럼 까마득히 잊혔을까요. 기이하지 않나요.
 
  “저는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 창장(長江) 유역의 여러 문화도 그렇고, 서방이나 남미 제국의 여러 문명도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한(漢)민족의 형성입니다. 현재 중국인의 90% 이상이 한족인데 이 점은 중국이 대제국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한족은 중원의 화샤(華夏)족이 형성된 이후 주변 다른 민족과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전(全) 민족입니다.”
 
  사라지고 잊혔던 문화에 대한 답변이 뜻밖이었다. 어쩌면 중화민족의 주류가 화샤족인 사실이 중요하지 한 지역의 잃어버린 문화는 다시 찾은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청두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진사 유적지는 싼싱두이와 시기상 맞물리지만 나름 또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진사박물관장 왕이(王毅·50세)는 쓰촨성 출신으로 쓰촨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현재 청두박물원 원장과 청두문물고고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는 전문가이다. 그를 만나봤다.
 
  —진사 유적 발굴에 직접 참여했나요.
 
  “예, 발굴 초기부터 참여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가 하나의 문물에 응고되었다가 부활하는 순간인데, 고고학자로서 그런 발굴에 참여하는 것은 최고 행운이고 영광이죠.”
 
  —진사 유물은 싼싱두이와 그 궤를 같이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나타냅니다. 어떤가요.
 
  “우선 싼싱두이의 청동입인상(靑銅立人像)은 전체 높이 260.8cm 중에 사람 부분만 172cm에 달해 실제 크기임을 짐작할 수 있고, 청동신수는 그 높이가 무려 396cm에 달하는 등 많은 유물이 장대합니다. 반면 진사 유물은 크기 면에서 훨씬 소형입니다. 또 청동인두상의 경우도 싼싱두이의 것은 머리 부분이 수평으로 잘려 있지만 진사 유물은 온전한 두상입니다. 황금마스크도 양식이 다르고요. 가장 특별한 것은 태양신조(太陽神鳥) 금식입니다.”
 
  —그처럼 변화된 까닭은 무엇인가요.
 
  “당시의 제사는 국가의 최고 기물을 매장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싼싱두이의 경우는 왕조가 교체될 무렵, 이전 왕조의 종묘 기물을 그대로 가져다가 자신의 조상에게 제사 지낸 것으로 봅니다. 반면 진사는 빈번하게 있는 제사에 지나치게 사치스럽지 않은 것으로 전문 기물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단순한 심미적, 예술적 변화가 아니라 어떤 상황과 환경의 변화를 구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학계가 외면했던 고촉국 전설
 
  —혹시 유물의 크기 차이가 종교적 숭배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화(轉化)되는 문명화 과정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형의 싼싱두이 문물과 진사의 소형화가 두 문명 간 근본적인 형태상 변화였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싼싱두이와 진사 두 문화는 완전히 잊혔다가 3천 년 만에 불현듯 나타났습니다. 왜 그처럼 빛나는 문화가 망각되었을까요.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누구도 그걸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전설인가요.
 
  “주로 《화양국지》에 근거한 이야기인데, 대략 ‘서남지방에 고촉국이라 하는 강대한 나라가 있었고 청두 평원에 큰 도성이 있었다. 왕은 두우였다. 두우는 농업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적이 있었다. 그런데 유능한 신하의 천하절색 부인과 사랑에 빠져 나라를 내놓으니 훗날 그 원통함에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누구도 믿지 않았죠. 심지어는 제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 스승님도 그런 전설은 꾸며낸 거짓 이야기이니 믿을 것도 연구할 가치도 없다고 했습니다. 고대 쓰촨 문화는 중원 문화에 비해 미개하고 황량하며 낙후된 문화라고 생각해 문화차생론(文化次生論)이란 말까지 나왔었고, 쓰촨 문화의 흥기는 진나라에 의한 위대한 중국 통일 이후라고 여겼습니다.”
 
  —어쨌든 두 문화의 독자성이 완연한데 중원이나 다른 지역과의 교류 흔적은 없나요.
 
  “일부 청동 유물에서는 중원 문화와 교류한 흔적이 있습니다만 시기적으로 각기 다르다고 봐야 할 겁니다. 황금을 사용한 전통은 서아시아와 유사한데 권력의 지팡이(權杖)나 왕관의 형태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또 진사에서 발견되는 조개껍데기는 산지가 동중국해인 것이 확실하니 남쪽 등 여러 루트로 교류가 있었을 겁니다.”
 
  —독자적인 문자나 사서는 없었나요.
 
  “문자가 아주 없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만 기록하거나 형상화하는 방법이 중원과 달랐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예를 들면 진사 지역에서는 조개에, 서남 지역에서는 나뭇잎에 글을 새겨놓았던 것으로 추측하는데 아무래도 보존성이 떨어지니 사멸된 것으로 봐야겠지요.”
 
  —역사 기록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군요.
 
  “예, 중원 문화의 한자체계는 아주 정교하죠. 결국 쓰촨 지역의 고촉국과 고촉국의 조상은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전욱(顓頊)이라는 등의 이야기는 기록으로 전해진 《화양국지》 등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촉 문화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떤 특성인가요.
 
  “한두 마디로 문화 전체를 이해시키기는 어렵습니다만 개방과 포용성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독자성을 지닌 싼싱두이와 진사 문화를 접하며 그 문명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인 때가 있었습니다. 즉 황허 문명과 대조적인 시각으로 대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류였습니다. 문화에 있어서는 전쟁은 없고 융합만이 존재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들은 충돌할 때 비로소 창조성이 발현된다는 뜻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치가들과는 다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에서 황허 문명과 창장 문명은 서로 대립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 하며 발전하는 과정에서 문명의 부흥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사라진다
 
싼싱두이 유물에서 발견된 문자로 추정되는 부호들.
  —한국이나 일본과의 학술적 교류 상황은 어떤가요.
 
  “중일 간의 교류는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중한 간의 교류는 늘어가고 있습니다.”
 
  —두 나라와 학술교류에서의 특징은 어 떤가요.
 
  “일본의 경우는 자신들 문화의 기원과 뿌리를 찾는 데 집중하는 특성을 가졌고 여러 시기, 특히 중일전쟁 시기 약탈 등의 방법으로 많은 유물과 문헌자료를 가져가 기초가 탄탄하고 학문적 깊이도 깊습니다. 반면 한국은 우 호적 감정은 깊지만 학문적 연구수준에서는 아직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황금과 거대 청동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그 많은 자원을 먼 곳에서 조달해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거대한 왕국이 있었다. 그런 왕국이 어떤 이유에서건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3천 년이 지나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인류 역사상 명멸한 나라는 수없이 많다. 갑작스런 자연재해로 그리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쟁 등과 같이 다른 상대에 의한 멸망이었다. 그러나 멸망과 사라짐은 분명히 다르다. 비록 적에게 패해 멸했을지라도 그 역사가 전해지는 이들은 언젠가는 다시 자신들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역사를 간직하지 않은 이들은 그것으로 영원히 멸해지고 마는 것이다.
 
  촉으로 불리는 쓰촨성 지역은 지금도 나름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도교와 불교가 융성한 종교적 성향이 그렇고 문학과 미술 등 예술적 성취에서도 특별하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지역적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지역성 특성과 더불어 아주 오래전부터 무의식중에 전해져 오거나 DNA로 물려진 어떤 인자가 한몫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것이 역사의 또 다른 의미와 가치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는 당당하고 자랑할 수 있는 장구한 역사가 있다. 그러나 지난 얼마 동안 우리는 우리 역사의 폄훼에 기를 쓰는 세력이 있었고 다수는 그에 대해 수수방관만 했다. 심지어는 아직 그 공과를 판단하기 이른 시점인데도 부끄러운 역사라며 두부 모 자르듯 잘라내자는 이들도 있었다. 자랑스러운 역사만 역사일까? 부끄러운 역사는 또 그대로 거울이 되는 것이 역사의 진정한 의미이지 않을까.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며 너무 두렵고 부끄러워 교훈으로 삼았으면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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