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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현지취재

‘아랍 民主化 革命’의 震源, 튀니지를 가다

“亡命·감옥생활 경험뿐인 執權黨에 뭘 기대하겠나”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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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國家지만 賣春은 合法
⊙ “이슬람律法 도입은 全的으로 國民들 의사에 맡길 것”
⊙ 혁명의 先決과제는 실업률 감소와 지역 간 불균형 해소
⊙ “復興黨은 靑年들 희생에 편승해 執權했을 뿐 民生안정 위한 方策 없어”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당시 튀니지 대통령은 시민들의 분노를 보고 24년간 앉아 있던 권좌에서 물러났다. 아랍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정권(政權)이 교체된 것이다. 지난해 10월 튀니지는 총선을 치러 제헌(制憲)의회를 구성했다. 이 선거에서 최다(最多) 의석을 차지한 온건 이슬람 정당 부흥당(復興黨)은 ‘정국안정’을 이유로 공화국회의, 자유노동민주포럼 등의 정파와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 합의했다. 그 결과 공화국회의의 몬세프 마르주키(Moncef Marzouki)가 대통령, 부흥당의 하마디 제발리(Hamadi Jebali)가 총리, 자유노동민주포럼의 무스타파 벤 자파르(Mustapha Ben Jaafar)가 국회의장직을 차지했다.
 
  비록 과도정부가 출범했지만, 벤 알리 정권 시절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는 없었다. 실업난(失業難)을 비롯한 경제위기는 물론 사회적 모순도 지속돼 각지에서 시위와 파업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튀니지는 이집트와 달리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튀니지의 인구는 약 1070만명으로 이집트의 8분의 1 규모다. 또 석유를 비롯한 자원도 많지 않다. 아랍권에서조차 영향력이 미미한 소국(小國)이요, 빈국(貧國)이란 얘기다. 이런 이유로 외신들은 튀니지 소식을 전하는 데 인색했다.
 
 
  “라마단 기간 禁食하는 사람은 절반도 안될 것”
 
하야 전날 벤 알리 대통령은 TV에 출연해 “시위를 자제해 달라”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다음날 사우디 아라비아로 도피했다.
  그러나 튀니지 ‘재스민 혁명’은 아직도 유의미하다. 튀니지가 순조롭게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장하는 신(新)헌법을 만들고, 실업난을 해소할 수 있는 경제발전과 공정분배를 이뤄내 ‘혁명’을 완수한다면, 다시 한번 아랍권에 혁명의 불길을 댕길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는 ‘재스민 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그 여파로 전(全) 세계 독재정권이 무너지길 바랐던 것처럼, 폐쇄사회에서 폭압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주권(主權)’을 되찾게 하는 일종의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랍 민주화 혁명’의 진원지, 튀니지의 정국은 어떤 상황일까.
 
  기자가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로 향한 날은 8월 1일. 이집트 카이로공항을 이륙한 항공기는 3시간30분이 지나자 ‘튀니스 카르타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이름에 과거 로마와 지중해 패권(覇權)을 두고 다툰 ‘카르타고’가 들어가 있어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내 지방 도시의 공항과 규모가 비슷했다.
 
  오전 11시(현지 시각) 출구를 나오자 한 여성이 중국어로 인사를 건넸는데 그 순간 어색함이 느껴졌다. 기자가 8일 동안 머물렀던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거구의 호텔 여직원 한 명을 제외하면 여자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길에 다니는 여자들은 40℃를 훌쩍 넘는 날씨에도 히잡을 썼고, 검은색 차도르(얼굴부터 몸 전체를 가리는 것)로 온몸을 감싼 사람도 많았다. 이슬람국가 중 개방적인 나라에 속하는 이집트조차 이방인(異邦人)의 시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나라였다. 하지만 튀니지는 달랐다. 생활문화가 유럽과 비슷했다. 기자에게 인사를 한 여성은 민소매 티셔츠에 몸에 착 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세속(世俗)주의 국가 튀니지의 첫인상이었다.
 
튀니스의 중심지, 하비브 부르기바 광장은 ‘재스민 혁명’ 당시 수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던 곳이다.
  공항을 나와 택시승강장으로 갔다. 그 사이에 호객꾼, 기사들이 귀찮게 달라붙었지만 뿌리치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택시에 탔다. 튀니스의 택시는 폴크스바겐, 르노, 시트로앵, 푸조 등의 유럽산 경차로 모두 노란색이었다. 밖에서 봤을 때 지저분한 이집트 택시와 달리 매우 깔끔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타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내부는 폐차(廢車)의 수준이었다. 유럽에서 폐기되기 직전의 차량을 수입해 택시로 쓰기 때문이었다.
 
  더운 날씨에 땀은 비 오듯 흘렀다. 기사에게 “에어컨을 켜 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에어컨이 안된다”고 답했다. 창문을 열려 했지만, 그것도 고장이었다. 택시 안의 온도계는 42℃를 가리키고 있었다. 15분 동안 ‘찜통’에 갇힌 채 가야 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고 불쾌지수가 높아진 상태로 호텔에 도착했다. 그러던 차에 택시기사가 “잔돈이 없다”며 3디나르(한화 2100원)를 거슬러 주지 않으려 했다. 기사를 호텔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한참 다그친 뒤 거스름돈을 받아 냈다. 좋았던 튀니지의 첫인상은 도착 후 불과 30분 만에 이렇게 깨졌다. 여장을 풀고 호텔 옆 공원에 갔다. 그때 한 남성이 “미스터 박”이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자신을 라쉬드(51)라고 소개한 그는 “나는 호텔 경비원인데 아까 접수처에서 싸운 사람 아니냐? 체크인할 때 당신의 이름을 들었다”며 “가까운 카페에 가서 차 한잔 할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튀니지는 헌법 제1조에 ‘이슬람국가’라고 명시된 나라다. 튀니지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라마단(금식월) 기간에 현지인이 먼저 “차를 마시자”고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쉬드는 “튀니지 사람 중 라마단 때 금식(禁食)하는 사람은 절반도 안될 거다. 다들 빵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고 말했다.
 
 
  초대 대통령, 近代化 위해 이슬람 억압 정책 시행
 
프랑스 언론에 소개된 압달라 구에츠의 여성. 이슬람국가 튀니지는 19세기 중반부터 매춘을 합법화했다.
  그를 따라 호텔 인근 카페로 갔다. 카페는 밖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게 셔터를 절반쯤 내려 놓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물담배나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로 만원(滿員)이었다. 그 모습에서 튀니지의 세속화를 느낄 수 있었지만, 카페 밖에는 안을 향해 “왜 금식을 지키지 않느냐”며 소리를 지르는 이들도 있었다. 올해 튀니지 정부는 처음으로 라마단 기간에 요식업의 주간(晝間) 영업 중단을 권고했다. 세속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들 간 종교갈등이 심화돼 충돌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튀니지가 여타 아랍국가와 달리 문화적 개방성을 보였던 이유는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와 그 뒤를 이은 벤 알리의 세속화(世俗化) 및 정교(政敎)분리 정책 때문이다. 국부(國父) 부르기바는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서구 자유사상의 신봉자로 1956년 프랑스로부터 튀니지 독립을 이끌어 냈다.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근대화(近代化)를 위해 ▲중혼제(重婚制) 폐지 ▲이혼의 자유 인정 ▲여성의 사회참여 등을 골자로 한 반(反)이슬람 개혁을 시행했다. 1961년에는 라마단까지 폐지하려 했다. 당시 그는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하지 말자”는 취지의 TV연설을 하며 공개적으로 물을 들이켰다. 이런 파격(破格)은 무슬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부르기바는 결국 라마단을 폐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집권 기간 경찰력을 동원해 이슬람 원리(原理)주의자를 제압했고, 그 기조(基調)는 벤 알리 정권으로 계승됐다. 두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이 “아잔(사원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너무 시끄럽다”며 “소리를 줄이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튀니지의 세속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매춘(賣春)이 합법(合法)이라는 점이다. 튀니스의 대표적인 집창촌은 구(舊)시가지의 ‘압달라 구에츠(Abdallah Guech)’ 거리다. 이곳은 튀니지 이슬람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이투나 사원 부근에 있다. 이곳을 소개한 프랑스 언론에 따르면 압달라 구에츠 거리의 가게들은 보통 2~3개의 침실을 갖추고 영업을 하는데, 화대(花代)는 20~30디나르(1만4000~2만1000원)이다. 여기서 일하는 여성들은 ‘내무부 소속’임을 밝히는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으며, 주당 1~2회씩 국가의 성병(性病)검진을 받는다. 또 정해진 세율에 따라 성매매 수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낸다.
 
  그런데 압달라 구에츠 거리는 ‘재스민 혁명’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표적이 됐다. 지난해 2월 18일 자이투나 사원에서 금요기도를 마친 무슬림 수백 명은 내무부 청사 앞으로 향했다. 이들은 “이슬람국가에서 매음(賣淫)굴이 있는 건 수치”라고 성토한 후 압달라 구에츠 거리로 갔다. 시위대는 화염병을 던져 집창촌에 불을 지르려 했다. 이들은 손에 칼을 비롯한 흉기도 들고 있었다. 시위대의 방화 시도는 인근 주민들이 막았다. 곧이어 출동한 경찰은 헬기까지 동원해 이들을 해산시켰다. 압달라 구에츠 거리 방화 시도는 ‘성매매’에 대한 시비를 떠나 지난 정권 기간 웅크리고 있던 이슬람 극단주의자(極端主義者)들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년6개월이 흐른 지금, 압달라 구에츠 거리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통역 이사무엘(23) 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압달라 구에츠로 가자”고 했지만, 기사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이씨도 “이곳에 집창촌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해 자이투나 사원 근처를 돌며 직접 찾을 수밖에 없었다.
 
 
  革命 이후 女性에 대한 暴言·暴行 빈발
 
재스민 혁명 이후 튀니지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를 우려해 히잡을 쓰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튀니스의 중심이자 재스민 혁명 당시 시위대가 운집했던 ‘하비브 부르기바’ 광장에 도착했다. 부르기바가 30년 동안 집권한 독재자인데도,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시내 한복판에 있고, 튀니지인들이 국부로 추앙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비교가 됐다. 광장 끝 중앙에 있는 이븐 할둔(중세 이슬람을 대표하는 튀니지 출신의 역사·정치·사상가) 동상을 지나 자이투나 사원이 있는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구시가지는 중세시대에 축조(築造)된 성곽 안에 있다. 이곳은 미로같이 좁은 골목이 이어져 있어 길을 잃기 딱 좋은 구조였다.
 
  구시가지 골목의 폭은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다. 가로등도 없어 매우 어두웠다. 이방인이 매우 꺼릴 만한 환경이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 탓인지 이곳에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빈발한다. 길을 가다 현지인 무리를 만나면 내심 긴장이 됐지만, 약 한 시간 동안 압달라 구에츠를 찾아 헤맸다. 길을 가다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건물이 나와 내부를 확인해 봤지만 아닌 것 같았다. 이씨를 통해 현지 사정에 밝은 한국인 유학생에게 전화해 정확한 위치를 물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라마단 기간에는 영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일 현지 체류 한국인 사업가에게 들은 얘기로는 차이나타운에도 사창가(私娼街)가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곳의 화대는 러시아 여성은 20디나르, 이탈리아 여성은 30디나르 등이다.
 
  이외에도 이슬람주의가 득세한 정황은 더 있다. 주(駐)튀니지 대사관에 따르면 혁명 이후 여성들에 대한 폭언·폭행 사례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 전통을 따르지 않는 여성들의 옷차림이다. 부르기바 대통령 이래 튀니지에서는 히잡을 착용한 여성이 관공서나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학내 히잡 착용 불허로 논란이 있었지만, 이슬람국가 튀니지에서는 이미 법으로 수십년 동안 이를 규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위협 때문에 복식(服飾)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실제 거리를 다니다 보면 히잡을 쓴 여성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차도르를 착용한 여성도 종종 보였다.
 
  혁명 이후 이슬람주의 확산 결과는 이슬람 정당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튀니지는 혁명 전까지 양원제(兩院制)를 채택했지만, 지금은 제헌의회가 활동하고 있다. 제헌의회 제1당은 약 42%를 득표해 총 217석 중 89석을 차지한 부흥당이다. 부흥당은 현재 중도좌파이면서 원내 2당과 3당인 공화국회의(29석), 자유노동민주포럼(19석)과 연정을 통해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다.
 
  부흥당은 튀니지의 대표적인 이슬람주의 정당으로 1981년 결성됐다. 물론 이때는 부르기바 대통령 시절인 만큼 이들의 정치활동은 불법(不法)이었다. 1987년 집권한 벤 알리는 부르기바의 개혁노선을 이었지만, 한편으로 이슬람 세력의 일부를 포용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이에 따라 1989년 총선에는 부흥당원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17%를 득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벤 알리는 이슬람 세력을 탄압했다. 1990년대에 이슬람 정당원 3만명이 투옥됐고, 지도부 100여명이 국외 추방을 당했다. 이후 튀니지에서 이슬람 정당은 자취를 감췄지만, 지난해 벤 알리의 철권(鐵拳)이 사라지자 기존의 이슬람 억압정책은 폐기됐다. 이에 부흥당 전(前) 당수 라쉬드 간누쉬(Rashid Ghannushi)를 비롯한 지도부가 대거 귀국해 정당활동을 재개했다.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인 해방당도 합법화돼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온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부흥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여권(女權) 보장, 히잡 강제착용 반대,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 반대, 서방(西方)국가들과 맺은 협약이행 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편으로는 ‘이슬람 정체성 회복’을 강조했다. 또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법제화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향후 튀니지 정국은 제헌 과정에서 종교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부흥당과 세속주의 정당 간 치열한 정치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슬람 율법 법제화는 歷史的 退步”
 
나지브 《라 프레스 튀니지》 사장은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부흥당이 청년들의 희생에 편승해 튀니지를 과거로 돌리려 한다”고 비판했다.
  튀니지 유력(有力) 일간지 《라 프레스 튀니지》의 모하메드 나지브(56) 사장 겸 편집국장은 샤리아 도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튀니지는 이슬람 국가 중 가장 세속적입니다. 그런데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부흥당이 정권을 잡고서 튀니지를 과거로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국민들의 다양한 생각을 무시하고 샤리아를 법제화하려 합니다. 그건 ‘재스민 혁명’의 목표였던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역사적 퇴보(退步)입니다.”
 
  그렇다면 부흥당은 어떤 튀니지를 꿈꾸고 있을까. 이 당의 파이잘 나세르(Faisal Nasser·42) 대변인은 “부흥당은 극단주의를 지양하는 온건 이슬람 정당”이라고 강조했다.
 
  ―부흥당이 제헌의회 1당이 됐는데 그 배경은 뭐라고 봅니까.
 
  “튀니지인들은 모두 무슬림입니다. 무슬림이 이슬람 정당을 찍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우리 당은 부르기바 정권 시절부터 탄압받았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들이 우리를 지지한 것은 그 희생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나세르 부흥당 대변인은 “부흥당이 집권하고 튀니지 경제가 안정됐다”며 “재스민 혁명의 1단계가 완료된 것”이라고 자평했다.
  ―지난 시절 부흥당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이 탄압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르기바와 벤 알리 정권은 1인 독재 체제였기 때문에 대중에게 지지를 받는 이슬람 세력을 달갑지 않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그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를 막는다는 이유로 이슬람 정당을 탄압했습니다.”
 
  ―SNS를 이용한 시민들의 활약과 그들의 희생으로 독재정권은 물러갔지만, 그 이후에 이슬람 정당이 득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의견이 많습니다. “이슬람은 민주화의 걸림돌”이라는 서방 전문가들의 주장에 동의합니까.
 
  “물론 동의하지 않습니다. 서방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랍 민주화 혁명’ 당시 이를 저지하려는 독재정권과 결탁해 각종 지원을 했습니다. 서방 국가들의 관심사는 아랍 민중의 자유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나오는 석유입니다. 그들이 우리 혁명에 대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라며 걱정하는 것은 위선(僞善)입니다. 우리도 이슬람식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지금 튀니지는 제헌 일정을 밟고 있습니다. 새 헌법에 샤리아를 도입합니까.
 
  “그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새로운 헌법은 모두의 의견이 반영돼야 합니다. 그중 샤리아 도입과 같이 민감한 문제는 전적으로 국민들의 의사에 맡길 문제입니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적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이 여성이나, 비(非)무슬림, 세속주의자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헌법은 결코 일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겁니다.”
 
주복룡(朱福龍) 주(駐)튀니지 대사.
  지난해 튀니지 국민들이 봉기한 것은 벤 알리 정권의 독재에 대한 불만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더 큰 원인은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경제문제 때문이었다. 주복룡(朱福龍·55) 주(駐)튀니지 대사는 “재스민 혁명을 우리 시각으로 보는 것은 큰 실수”라며 이렇게 말했다.
 
  “재스민 혁명 이후 아랍 각국에서 반(反)정부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집트, 예멘, 리비아, 시리아에서 그쳤습니까. 걸프만(灣) 산유국(産油國)은 모든 것이 공짜지만 튀니지나 이집트는 그 정도로 석유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이 매우 가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키리크스를 통해 집권층의 부정부패가 폭로되니까 화가 나서 정권을 무너뜨린 것 아닙니까. 결국 재스민 혁명은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튀니지人들의 관심사는 생활의 質的 변화”
 
지난해 10월 치른 총선에서 부흥당은 득표율 42%로 제헌 의회 최대 정당이 됐다. 이 당은 “새로운 헌법에 이슬람 율법을 도입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튀니지인들의 생활수준은 어떻습니까.
 
  “혁명 전 튀니지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600달러입니다. 하지만 그건 통계일 뿐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우리 대사관의 현지인 비서 월급은 500디나르(약 35만원)입니다. 이 정도면 여기 평균급여보다 꽤 높은 액수입니다. 여기 일자리의 대부분은 이보다 조건이 나쁘지만, 이마저도 많지 않아 청년실업률이 30%를 넘습니다.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왜 분신(焚身)했겠습니까. 멀쩡하게 대학 나와 엘리트라고 자처(自處)하는데 손수레 끌면서 식구 9명을 먹여 살려야 했잖아요. 그런데 수레마저 경찰에게 빼앗기니까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으로 분신한 것 아닙니까.”
 
  ―지금 튀니지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정치권에서는 ‘제헌’이 관심사겠지만, 사실 일반 국민들이 이런 변화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없잖아요. 남대문 시장에서 좌판을 놓고 장사하는 할머니가 정치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국민들이 먹고살 수 있게 해 주는 게 정치 아닙니까. 그들의 관심은 생활의 질적 변화에 있다고 봅니다.”
 
  ―역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인가요.
 
  “기나긴 독재에서 헤어났을 때 사람들의 기대치는 높아지게 됩니다. 그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지 못하면 머지않아 반동(反動)이 출현하기 마련입니다. ‘재스민 혁명’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어려워서 일어난 것입니다. 현(現) 집권세력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국정경험이 있는 구(舊) 정권 인사들이 재(再)등장할지 모릅니다.”
 
  주 대사의 말처럼 튀니지의 실업문제는 심각하다. 기자가 튀니스의 밤거리를 다니며 가장 자주 마주친 광경은 조그만 카페에 수십 명의 남자가 모여서 노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카드놀이를 하거나 길에 앉아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라마단이란 특수한 기간인 탓도 있었지만, 대부분 할 일이 없어서 새벽까지 놀아도 문제 될 게 없기 때문이다.
 
  현재 튀니지의 실업률은 18%다. 이 중 25세 이하 청년층의 실업률은 정부 발표치가 20% 이상이고, 실제로는 40%에 가깝다고 한다. 얼마 안되는 일자리도 숙련 근로자를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높은 학력자의 실업은 전체 청년실업률보다 훨씬 높다. 튀니지의 경제, 경영, 법학 석사(碩士) 소지자 실업률은 평균 47.1%이고 사회과학 분야 석사 소지자 실업률은 43.2%이다. 벤 알리 정권은 지난 수년간 실업문제를 경제분야에서 최우선 순위로 두고 일자리를 창출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재스민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 간 불균형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다. 튀니지 비농업 부문 일자리의 75%, 공공투자의 65%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있다. 내륙지역은 공공(公共)서비스의 질이 매우 낙후한 상황이고, 일자리도 없어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지난해 반정부 시위가 촉발된 곳이나 경찰의 진압으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곳이 중부 내륙 지역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고 해서 이 문제들이 해결되진 않는다. 과도정부나 제헌 후 출범할 정부가 일자리, 공공시설의 개선,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부, 지역 불균형 해소, 물가안정 등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재스민 혁명’은 실패로 귀결된다. 2010년 튀니지는 3.7%의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지난해에는 성장률이 0.2%에 그쳤다. 외국인투자는 전년 대비 29.2%, 신규 일자리 창출 29.6%, 외국인 관광객 30.7%, 튀니지 GDP의 7%를 차지하는 관광수입은 33% 감소해 경제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이에 부흥당은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 및 경제발전을 약속했다.
 
 
  “經濟發展 위해 長官들은 하루 18시간 일한다”
 
2010년 12월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 장면은 SNS를 통해 튀니지 전역으로 퍼졌고, ‘재스민 혁명’을 촉발시켰다.
  부흥당을 비롯한 과도정부는 그동안 어떤 성과를 보였을까. 부흥당 나세르 대변인은 “우리 당이 집권하고 튀니지 경제상황이 많이 호전됐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경제난이 혁명 발생 원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혁명 완수를 위해 가장 시급한 조치가 필요한 문제인 건 맞습니다. 과도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관계 부처 장관들이 하루에 18시간을 일하며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올해 1월 -2.2%였던 경제성장률이 7월엔 2.8%를 기록했습니다. 또 해외투자를 유치해 약 8만5000개의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수치는 우리가 집권하고 튀니지 경제가 안정됐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로써 튀니지 혁명의 1단계는 완료됐다고 생각합니다.”
 
  ―‘재스민 혁명’이 성공할 것으로 봅니까.
 
  “물론입니다. 경제 부문은 점차 회복 및 성장세로 돌아서고 있고, 정치적 자유와 언론의 자유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신장됐습니다. 현재 튀니지에는 84개 정당이 활동 중이고 언론사는 혁명 이전보다 4배 늘었습니다. 물론 지금 상황은 기반만 조성된 것일 뿐이지만, 앞으로 더 발전할 것으로 믿습니다. 튀니지 ‘재스민 혁명’은 성공할 겁니다.”
 
  튀니지 중앙은행 무으타즈 하미르 투자부 차장도 “지난해에는 혁명의 여파로 경제 부문에서 전반적인 감소세를 보였지만 최근에는 안정을 되찾아 올해부터는 성장할 것으로 본다”며 이렇게 말했다.
 
  “경제 부문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률을 낮추는 겁니다. 튀니지엔 농수산품 가공업, 제조업 등이 있지만 자본 형성이 빈약합니다. 이 때문에 외국인투자가 중요합니다. 이미 삼성을 비롯한 많은 외국 업체들이 튀니지에 진출해 기업활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유럽과 아랍, 아시아 지역의 대(對) 튀니지 투자가 늘고 있어 향후 경제전망이 밝습니다.”
 
  그러나 정부 당국과 중앙은행의 설명과는 달리 경제가 좋아졌다고 체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부르기바 광장에서 만난 하싼(43) 씨는 “생활수준이 벤 알리 때보다 낮아졌다”며 “지금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곧 괜찮아진다’고 계속 희망적인 얘기를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부르기바 광장에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는 택시 기사 아딘(28) 씨도 “관광객이 감소해 수입도 줄었는데 물가는 계속 오르니까 사는 건 예전만 못하다”며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다들 감옥에 있거나 외국에서 살다 와서 아무런 경험이 없는데 뭘 기대하겠나”라고 토로했다. 호텔 경비원 라쉬드 씨는 “결혼을 늦게 해서 얻은 두 아들에게 과자 사 줄 돈도 없다. 혁명 이후 바뀐 게 없다”면서 기자에게 과자 값으로 2디나르를 받아 갔다.
 
  나지브 《라 프레스 튀니지》 사장은 “실업률은 이전보다 더 증가했고, 외국인투자는 바닥이다. 서비스와 산업 부문의 상황은 악화됐고, 농업은 여전히 매우 취약한 상태”라며 “사람들의 생활이 예전보다 개선됐다는 징후가 전혀 없는데 부흥당과 중앙은행은 신뢰성 없는 수치만 발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나지브 사장의 말이다.
 
  “부흥당은 청년들의 희생에 편승해 정권을 잡았을 뿐입니다. 국민이 가장 바라는 민생(民生)안정을 위해 준비된 방책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국민들의 상황을 공감(共感)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게다가 극단주의자들의 과격행동에 미온적(微溫的)으로 대처해 치안(治安)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부흥당이 획기적인 개선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2013년 3월 치러질 총선과 대선에서 튀니지는 새로운 국면(局面)을 맞게 될 겁니다.”⊙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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