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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大選 포커스

세계의 여성 대통령·총리들

아시아형이냐 유럽형이냐에 따라 업적 달라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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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나 남편의 後光으로 집권한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베나지르 부토, 코라손 아키노,
    메가와티 등은 부정부패와 정치혼란으로 실패
⊙ 대처는 강한 추진력, 메르켈은 ‘기다림의 리더십’ 발휘
⊙ 로빈슨, 그로 브룬틀란, 할로넨 등은 전문성 바탕으로 인권신장 등에서 업적 남겨
⊙ 바첼레트, 호세프 등은 실용주의 리더십 발휘, 키르치네르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기
  1960년 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가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로부터 52년이 흘렀다. 이제 여성 총리나 대통령을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초기에는 주로 제3세계 국가에서 남편이나 아버지의 후광(後光)을 업은 여성들이 대통령이나 총리(수상)가 됐다. 그러나 이제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에 투신해 자력(自力)으로 최고위직까지 오른 여성 정치지도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대통령의 임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여성 총리가 나왔다. 박근혜(朴槿惠)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8월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대통령 등장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성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됐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국가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가 얼마나 국정(國政)을 제대로 수행하느냐 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어떤 여성들이 어떻게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됐는지, 그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지를 살펴보기로 한다(단, 여기서는 국민이나 의회에 의해 선출되어 자신의 책임 아래 국정을 수행한 대통령이나 총리만을 다루기로 한다. 노무현 정권 시절의 한명숙 전 국무총리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의 에디트 크레송 전 총리처럼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경우는 제외한다).
 
 
  세계 최초의 女총리 반다라나이케
 
세계 최초의 여총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전 스리랑카 총리.
  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전 총리는 라트나푸라의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영국 옥스퍼드대 크라이스처치에서 공부했다. 1959년 남편인 총리 S.W.R.D.반다라나이케(1956~1959년 재임)가 암살된 후, 남편이 창당한 스리랑카자유당(SLFP) 총재가 됐다. 1960년 총선에서는 ‘울보 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죽은 남편을 상기시키는 눈물의 유세를 펼쳐 1960년 총선거에서 승리,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이후 반다라나이케는 1960~1965년, 1970~1977년 총리를 지냈다. 반다라나이케 정권은 다수(多數)민족인 싱할리족 위주의 정책을 펴다 소수(少數)민족인 타밀족의 반발을 사 이후 반세기에 걸친 내전의 싹을 만들었다.
 
  시리마보의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는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1988년 남편 비자야 쿠마라퉁가와 함께 스리랑카민중당(SLPP)을 창당했다. 유명 영화배우 출신 정치인인 비자야는 1988년 암살당했다.
 
  1994년 11월, 대통령제로 개헌 이후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찬드리카 쿠마라퉁가가 총리로 선택한 사람은 바로 친어머니 시리마보였다. 찬드리카는 1999년 조기 대선을 실시해 재선되었으나, 그해 12월 타밀족 반군집단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의 폭탄테러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 시리마보는 2000년 사망했고. 찬드리카는 2005년 퇴임했다. 그는 취임시 외자(外資)유치를 통한 경제발전과 타밀족과의 내전종식 등을 공약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의 사례는 이후 서남아(西南亞)나 동남아(東南亞)에서 정권을 잡은 여성 지도자들의 모델 케이스가 된다.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선진국의 명문 대학을 나오고, 아버지나 남편이 정치적 암살을 당한 후 그 정당을 유산(遺産)처럼 상속받아 정권을 잡지만, 무능과 부정부패로 실각(失脚)한다. 이후 재집권과 실각을 되풀이한다. 공교롭게도 이런 드라마가 되풀이되는 지역은 스리랑카처럼 과거 대영제국의 인도 식민지 일부였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등이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베나지르 부토 정권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
  두 차례 파키스탄 총리를 지낸 베나지르 부토는 파키스탄의 대통령과 총리를 지낸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맏딸이다. 줄피카르는 1977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후 1979년 처형됐다. 베나지르 부토는 미국 하버드대와 영국 옥스퍼드대를 나왔으며, 옥스퍼드대 재학 시에는 ‘옥스퍼드 유니온(학생회)’ 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베나지르는 아버지가 죽은 후 영국으로 망명, 야당 연합체인 민주주의회복운동(MRD)에 참여해 반(反)군부투쟁을 벌였다.
 
  1988년 8월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 그해 말 실시된 총선에서 파키스탄인민당(PPP)이 승리하자 베나지르 부토는 35살의 나이로 파키스탄의 총리가 됐다.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총리였다.
 
  그러나 베나지르 부토의 국정운영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파키스탄을 구성하는 종족 간의 분쟁,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의 국경분쟁, 경제난 등이 그를 괴롭혔다.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각종 이권(利權)에 개입해 ‘미스터 10퍼센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각종 이권을 알선해 주고 10%의 수수료를 뜯어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결국 1990년 군부와 야당의 압력으로 제1차 베나지르 내각이 무너졌다.
 
  베나지르 부토는 1993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집권했다. 제2차 베나지르 정부에서도 부정부패는 계속됐다. 그는 서방세계에는 민주화 개혁가로 알려졌지만, 여권(女權)신장이나 토지개혁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1996년 베나지르는 다시 총리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번에도 군부의 압력이 작용했다.
 
  부토 부부는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기소됐고, 2006년에는 인터폴의 지명수배자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베나지르는 런던과 두바이를 오가면서 파키스탄인민당을 원격조종했다. 그는 2007년 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 군사정권에 맞서기 위해 귀국했지만, 그해 12월 유세 도중 자살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베나지르가 죽은 후, ‘미스터 10퍼센트’는 죽은 아내의 후광에 힘입어 대통령이 됐다. 파키스탄인민당의 당수직은 옥스퍼드대 1학년 재학 중이던 19살의 빌라왈이 상속받았다.
 
 
  방글라데시- 두 여자의 전쟁
 
방글라데시를 혼돈으로 몰고 간 하시나 와제드 총리(왼쪽)과 칼레다 지아 전 총리.
  과거 동(東)파키스탄으로 불리다가 1971년 독립한 방글라데시는 정변(政變)의 희생자인 두 여인의 정쟁(政爭)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 명은 셰이크 하시나 와제드. 그는 방글라데시의 초대 총리와 대통령을 지낸 방가반드 셰이크 무지부르의 딸이다. 그는 아버지가 1975년 지아 울 라만 장군의 쿠데타로 피살된 후 아버지가 이끌던 아와미동맹(AL)을 상속받았다.
 
  다른 한 명은 지아 울 라만 장군의 아내 칼레다 지아.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남편이 1982년 또 다른 쿠데타로 피살된 후 남편이 만든 방글라데시국민당(BNP)을 물려받았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칼레다는 “세상을 떠난 지도자들을 대신할 남자들을 아직 구하지 못했다”고 말하곤 한다고 한다.
 
  하시나와 칼레다는 1980년대에는 구원(舊怨)을 덮어 두고 함께 에르샤드 군사정권에 맞섰다. 하지만 1991년 에르샤드 정권이 무너진 후 두 사람은 정권을 놓고 치열하게 맞붙었다.
 
  칼레다 지아는 1991~1996년, 2001~ 2006년 총리로 재직했다. 하시나는 1996~2001년 총리를 지냈고, 2008년 재집권했다. 두 사람의 재임기간은 모두 경제난과 부정부패로 얼룩졌다.
 
  2006년 칼레다 지아가 두 번 째 임기를 마친 후, 양측은 선거인명부 위조 시비로 내전을 방불케 하는 유혈충돌을 빚었다. 이 때문에 2년간 총선이 유예됐다. 군부의 지원을 받는 과도정부는 하시나와 칼레다를 부정부패,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 두 사람을 정계에서 추방하려 했다.
 
  그러나 2008년 12월 총선에서 아와미동맹이 승리하면서 하시나가 다시 권좌에 복귀했다. 2010년 11월 하시나 정부는 칼레다를 그가 30년간 살아온 집에서 쫓아냈다. 군(軍)기지 내에 있는 칼레다 집의 대지가 지아 울 라만 정권 시절 불법 불하(拂下)됐다는 이유에서였다. 칼레다가 “옷만 겨우 걸치고 쫓겨났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의 지지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거리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
 
인디라 간디 전 인도 총리.
  인도아대륙(亞大陸)의 중심국가인 인도에서도 일찌감치 여성 총리를 배출했다. 바로 인디라 간디다.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의 딸인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1947년 인도가 독립한 후에는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면서 국정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38살 때 집권당인 인도국민회의당 운영위원이 됐고, 4년 후에는 총재로 선출됐다.
 
  1964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인디라 간디는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냈다. 인디라 간디는 1966년 샤스트리 총리가 사망한 후, 당내 파벌들 간 타협의 산물로 총리직을 맡았다.
 
  인디라 간디는 농업생산 증대, 핵(核)무장, 1971년 파키스탄과의 전쟁 승리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총애하는 막내아들 산자이의 조언에만 의지하면서 점점 민심과 멀어졌다. 산자이는 국책은행으로부터 부당대출을 받은 돈으로 수상한 사업을 벌였고, 이는 인도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렸다.
 
  1973년 가난과 부정부패, 인플레이션에 대한 항의시위가 빈발하고, 법원이 총선에서 여당이 개표(開票)부정을 저질렀다는 판결을 내리자, 인디라 간디는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응수했다. 정적들은 투옥되고, 비판언론은 탄압받았다. 강제적인 인구억제 시책도 민심의 이반을 불렀다.
 
  결국 국민회의당은 1977년 총선에서 패배했다. 새 정부는 인디라 간디를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에 회부해 그의 정치생명을 끊으려 했다. 이는 역풍을 불렀다. 1980년 총선에서 승리한 인디라 간디는 다시 총리가 됐다. 62살이 넘어 다시 권력은 잡은 그는 점성술사(占星術師)와 예언가, ‘현자(賢者)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의존했다. 1984년 10월,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경호원들에 의해 암살됐다. 범인들은 시크교도였다. 그들은 그해 6월 인도군이 시크교도들의 성지(聖地)인 암리차르황금사원을 공격해 600여명의 시크교 과격파를 사망케 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그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총리직을 이어받았지만, 1991년 타밀족 테러리스트의 자살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 소냐 간디는 국민회의당 총재로 인도 정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필리핀 민주화의 代母 코라손 아키노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필리핀에서는 두 사람의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 한 명은 남편, 한 명은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었다.
 
  1983년 8월 미국에 망명했다가 귀국길에 오른 필리핀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가 마닐라공항에서 피살됐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코라손 아키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필리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됐다. 코라손 아키노는 198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 마르코스 대통령과 대결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마르코스의 승리를 선언하자 격분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엔릴레 국방장관, 라모스 참모총장 등 군부도 시위에 가세하면서 21년간 계속된 마르코스 정권은 무너졌다.
 
  ‘피플파워(people power)’로 집권한 아키노는 6년 단임제 개헌을 단행하는 등 민주화에 착수했으나, 8차례에 걸친 군부 쿠데타 시도에 영일(寧日)이 없었다. 가톨릭과 소수의 명문 지주가문 등 기득권 세력에 기대다 보니 근본적인 사회개혁에도 착수하지 못했다.
 
  대통령으로서의 실적은 보잘것없었지만, 퇴임 후에도 코라손 아키노는 ‘민주화의 대모(代母)’로 부패한 에스트라다 대통령과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시위를 이끌었다. 2009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글로리아 아로요 전 필리핀 대통령.
  2001~2010년 필리핀 대통령을 지낸 글로리아 아로요는 1961~1965년 대통령을 지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이다. 필리핀국립대 등에서 교수로 있다가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시절이던 1987년 통상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에 입문했다. 1992년 상원의원, 1998년 부통령에 당선됐다. 2001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 에스트라다가 사임한 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아로요는 취임 후 부패방지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신 부정부패의 포로가 됐다. 변호사 겸 사업가인 그의 남편은 온갖 이권에 개입했다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망명(?)을 떠나야 했다. 글로리아 아로요 역시 자기가 몰아냈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과 관련된 불법도박업자와 유착됐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아로요는 2004년 대통령에 재선됐지만, 선거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남은 임기 동안 아로요는 경제난,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의 테러, 군부 소장파의 쿠데타 시도 등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아로요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정권 연장을 시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0년 퇴임했다.
 
  아로요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코라손 아키노의 아들)이 사정(司正)의 칼날을 들이대자 2011년 11월 신병(身病)치료를 이유로 몰래 출국하려다 저지당한 후 체포됐다.
 
 
  조용히 정계에서 사라진 國父의 딸
 
  2001~200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지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르티의 경우도 아로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메가와티는 인도네시아의 국부(國父)인 아흐메드 수카르노의 딸이다. 그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점성술에 심취한 평범한 여성에 불과했다. 1983년 수하르토 정권 아래서 관제(官製) 야당의 성격이 짙었던 인도네시아민주당(PDI) 자카르타 지부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입문했으며, 1987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메가와티는 정치입문 초기만 해도 어용 야당의 ‘꽃’과 흡사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점차 ‘수카르노의 딸’이라는 이름에 힘입어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1993년 메가와티가 민주당 총재가 되자 수하르토 정부는 1996년 당내 어용세력을 동원해 그를 축출했다. ‘핍박 받는 야당지도자’가 된 메가와티는 투쟁민주당을 결성해 수하르토 정권에 맞섰다.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졌다.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투쟁민주당은 제1당이 됐다.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 아래서 메가와티는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됐으나, 여성경시 풍조가 만연한 이슬람 국가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압둘 라만 와히드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 7월 와히드가 부패와 실정(失政)으로 탄핵당해 사임한 후 메가와티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대통령이 된 후 메가와티는 정치적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치적 상징’이라는 위치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 타우픽 키마스는 뇌물수수 의혹 등으로 아내의 발목을 잡았고, 군부는 과거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결국 2004년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메가와티는 수하르토의 측근이었던 군부 출신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에게 패배했다. 퇴임한 메가와티는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의례적인 축하인사도 없이 가정으로 돌아갔다.
 
 
  ‘태국의 에바 페론’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
  그런가 하면 오빠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경우도 있다. 2011년 태국 총리로 취임한 잉락 친나왓은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탁신 친나왓의 막내 여동생이다.
 
  태국 유수의 통신재벌 출신인 탁신은 2001년 집권 이래 낙후지역 및 소외계층에 대한 복지확대, 경제성장 등을 통해 인기를 누렸지만, 왕실과 군부 등 기득권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됐다. 탁신은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자 해외를 떠돌다가 작년 7월 총선을 앞두고 여동생 잉락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미국 켄터키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부동산회사 회장으로 있던 잉락은 정계 입문 6주 만에 푸어타이당을 이끌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당시 푸어타이당이 내건 구호는 “탁신이 생각하면, 푸어타이는 행동한다”였다. 잉락은 총선 당시 “내가 정치인으로서는 신인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를 경험해 왔고, 정치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잉락은 농민 전용 신용카드 발급, 초등학교 입학생 전원(약 80만명)에게 태블릿PC 지급, 최저임금 40% 인상 등 선심공약을 내세워 왕실과 군부,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받는 집권여당을 두 배 가까운 지지율로 앞서며 압승했다. 이런 포퓰리즘 공약 때문에 ‘태국의 에바 페론’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미인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던 잉락은 남성 위주의 태국 정치판에서 여성스럽고 발랄한 이미지를 한껏 활용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오빠 탁신처럼 서민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도 기득권층에 화해의 메시지를 던지는 노련미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적으로 몰락한 집안의 막내딸이라는 ‘피해자 이미지’를 활용, 군부와 여당이 그녀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듣는다.
 
 
  ‘鐵의 여인’ 마거릿 대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물론 실패한 여성 지도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서유럽의 여성 정치인 가운데는 성공한 지도자들이 많다.
 
  1979~1990년 영국의 총리를 지낸 마거릿 대처는 긴 말이 필요없는 정치인이다. 영국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대처리즘(Thatcherism)’이라는 그의 이름이 든 말을 남긴 것만으로도 그의 그림자가 얼마나 긴가를 느낄 수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34살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됐고, 1970년 에드워드 히스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대처는 각료로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히스 정부가 총선에서 패배한 후인 1975년 ‘보수주의 정체성(正體性)’을 전면에 내걸고 보수당 당수 경선에 도전해 당수가 됐고, 1979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총리가 됐다.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대처는 소련으로부터 ‘철의 여인(Iron Lady)’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잡지 기자와 만나 요리, 가족, 패션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참모나 각료들을 관저로 불러 요리를 대접하면서 국사를 논하기도 했다.
 
  집권 후 대처는 일련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 브리티시항공, BP(석유회사) 등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고,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을 해외에 매각했다. 노조와 정면대결해 2차대전 이후 영국을 좌지우지했던 노조를 무력화(無力化)했다.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영국령(領) 포클랜드 제도(諸島)를 점령하자 대처는 이를 무력(武力)으로 탈환해 ‘대영제국’의 위신을 살렸다. 포클랜드전쟁의 승리는 대처에게 장기집권으로 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손을 잡고 신냉전(新冷戰) 시대를 이끌었다.
 
  임기 중반을 지나면서 대처는 점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되어 갔다. 특히 1988년 대처정부가 모든 성인들에게 부과하는 인두세(人頭稅)를 도입하자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률을 강조하는 대처 스타일에 지쳐 있던 젊은 세대는 폭동을 일으켰다.
 
  1990년 유럽통합 문제로 보수당과 내각이 분열됐다. 대처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대해 마이클 해슬타인 전 국방장관, 제프리 하우 전 외무장관 등이 반기(叛旗)를 들었다. 그해 10월 당내 경선에서 대처는 다수표를 얻기는 했으나, 보수당 규정상 필요한 득표를 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처는 2차 투표를 하는 대신, 당의 단결과 차기 총선에서의 승리를 위해 사임했다.
 
  대처의 자유주의적 개혁은 1980년대 경제번영을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극화(兩極化) 심화, 국내 제조업 기반의 붕괴 등을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다림의 리더십’, 앙겔라 메르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2005년부터 독일 총리로 재직 중인 앙겔라 메르켈은 동독 태생이다. 동서독 분단 후 동독으로 이주한 개신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통일 전까지 물리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메르켈은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민주개혁당 소속으로 동독의 최초이자 마지막 자유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마지막 동독정부인 데메지에르 정부의 대변인을 지냈다.
 
  통일 후 내각에 동독 출신의 젊은 여성 정치인이 ‘필요’했던 헬무트 콜 총리는 메르켈을 연방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때문에 그에게는 한동안 ‘콜의 양녀(養女)’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1998년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후, 메르켈은 기민당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이 됐다. 콜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가 메르켈은 기민당이 진상을 밝히고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신문에 기고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0년 콜 총리의 후계자였던 볼프강 쇼이블레마저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되어 낙마(落馬)하자, 메르켈은 그해 4월 기민당 대표로 선출됐다. 당내 거물 정치인들로서는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로 얼룩진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당 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시한부 대표’로 그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그해 9월 원내대표까지 겸하면서 당을 장악했고, 2002년과 2004년 당 대표로 다시 선출됐다.
 
  2005년 총선에서 기민당은 사민당에 박빙의 승리를 거두었다. 메르켈은 기민-사민당 대연정(大聯政)의 총리가 됐다. 2009년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사회민주당을 내보내고 기독교민주당-기독교사회당 정부를 이끌어 오고 있다.
 
  메르켈의 연설은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이성(理性)에 호소하는 스타일로, 지루하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정치적인 쇼맨십이나 카리스마도 부족하다는 평이다. 하지만 원칙을 준수하면서 성실함과 근면함, 과학자다운 치밀함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투박하지만 간결한 말투로 복잡한 정치현안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듣는다.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 냉정한 분석력과 판단력도 그의 장점으로 꼽힌다.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무리 없이 이끈 것도 이러한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한다.
 
  앙겔라 메르켈의 평전을 쓴 하요 슈마허는 “남자들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실패할 때, 실패가 없던 메르켈이 서서히 중앙으로 진입한 것을 알 수 있다”며 “어떻게 성공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냐가 그녀의 삶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이런 성격은 비밀경찰의 감시 아래서 꼬투리 잡힐 일은 하지 않으면서 살아야 했던 동독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도 있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동독 출신으로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경험했기 때문에 서독 출신의 정통 보수주의자들보다도 더 시장경제 원칙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문가 출신 여성 지도자들
 
  대처와 메르켈 외에도 유럽에는 주목받는 여성 정치인들이 많다. 이들은 대개 해당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위직까지 진출했다.
 
  노르웨이의 그로 할렘 브룬틀란(1981, 1990~1996년)은 의사 출신으로 낙태인정 등 여성운동을 하다가 1974년 35살의 나이로 환경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는 원래 정당정치인이 아니었으나, 1981년 당시 총리가 건강상 이유로 갑자기 사임하면서 총리가 됐다. 당시 내홍(內訌)을 겪던 노동당은 젊고 참신한 그를 등장시켜 국면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브룬틀란은 그해 총선에서 패배해 총리직을 내놓기는 했으나, 이후 유럽통합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던 노동당을 잘 추슬러 1990년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총리재직 시절에는 각료의 절반을 여성으로 충원하는 등 남녀평등 실현에 노력했다. 특히 북해유전(北海油田)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수입을 낭비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체계적으로 관리, 투자하는 국부기금을 설치한 것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87년 유엔 세계환경개발위원회 위원장으로 <우리의 공동미래>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퇴임 후인 1998~2002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다. 2004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그를 ‘지난 25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유럽 지도자’ 중 네 번째로 꼽았다.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도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여성지도자 중 하나다. 그는 트리니티대 법학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9년, 25살의 나이로 상원의원이 됐다. 대학교수에게 상원의석을 할당하는 아일랜드 헌법 규정 덕분이었다. 그는 이후 20년 동안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가톨릭 전통이 지배하는 보수적인 아일랜드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여권(女權)신장, 동성애자·집시 등 소수자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90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의원내각제하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존재다. 그의 전임자들은 대통령직을 원로 정치인의 종착역으로 여기고 임기를 보냈지만, 그는 이 ‘상징성’을 충분히 활용해 국민과 소통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특히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지도자 게리 애덤스 등을 만나 북아일랜드 내전종식 문제를 논의, 1993년 북아일랜드평화협정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수행, ‘비(非)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정치적 효과를 거둔 대통령’ ‘실권이 없으면서도 빛나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턱걸이 대통령’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간신히 대통령에 당선돼 ‘지지도 2%’로 출발했던 그는 1997년 퇴임시에는 93%의 지지를 받았다. 1997년 퇴임 후에는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으로 활약했다.
 
  2000년부터 대통령으로 재직 중인 핀란드의 타르야 할로넨도 젊은 시절부터 동성연애자, 여성, 라플란드인 및 집시 등 소수자 인권보호 활동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국회의원, 사회복지부 장관, 북유럽협력부 장관, 법무장관, 외무장관 등을 거쳐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할로넨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하면서, 국제적으로는 복지, 소수자 인권보호, 세계화의 폐해 고발 등에 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민들로부터는 ‘국모(國母)’ 혹은 ‘정치판의 듀라셀(힘 좋고 오래가는 건전지) 아줌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지를 받고 있다.
 
 
  이사벨 페론과 미첼 바첼레트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이사벨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
  중남미에서도 일찍부터 여성 대통령들이 출현했다. 중남미의 여성 대통령들은 남편의 후광에 힘입은 아시아형 지도자와 자기의 능력으로 입신(立身)한 유럽형 지도자가 혼재한다.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은 무용수 출신으로,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대명사인 후안 페론의 아내이다. 후안 페론의 망명 시절 그의 비서로 일하다가 아내가 됐다. 후안 페론이 1973년 10월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해 대통령에 당선되자 부통령이 됐다. 1974년 후안 페론이 사망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해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이사벨 페론 정권은 인플레이션과 경제혼란, 민생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와 폭동, 좌우익 테러로 표류했다. 여기에 여성 대통령에 대한 반감, 비서실장의 전횡과 부정부패 등이 겹쳐 민심이 이반했다. 결국 1976년 3월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됐다.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
  2006~2010년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은 이사벨 페론과는 정반대되는 리더십의 소유자다.
 
  바첼레트는 아옌데 정권 시절 정부 고위직에 있었던 공군 장성의 딸이다.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 후 아버지가 고문 끝에 죽자 어머니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고, 동독에 망명을 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군사정권 당시 희생자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활동을 했고,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미주(美洲)국방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런 경력을 인정받아 라고스 정부에서 보건장관을 거쳐, 2002년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에 임명됐다. 2006년 중도좌파연합인 콘세르타치온의 후보로 출마, 당선됐다.
 
  대통령으로서의 바첼레트는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실용주의적 리더십을 구사했다. 그는 교육, 보건, 복지, 여권신장 등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군사정권 시절의 유산(遺産)을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는 아버지가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희생된 고위장성이라는 가족적 배경이 큰 도움이 됐다. 퇴임 직전 그에 대한 지지율은 84%에 달했다.
 
 
  도시게릴라 출신 지우마 호세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
  남미에는 지금 두 명의 여성 대통령이 있다. 한 명은 2010년 대통령에 당선된 지우마 호세프. 젊은 시절 좌익 도시게릴라로 활동하다가 군사정권에 체포돼 투옥된 경력이 있다. 룰라 디 시우바 정권 아래서 에너지장관, 수석장관(국무총리)을 지냈다. 퇴임 당시 80%가 넘는 지지율을 자랑했던 룰라 전 대통령의 후광에 힘입어 여유 있게 대통령이 됐다. 사회주의자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감한 추진력으로 ‘브라질의 대처’ ‘철의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앞에서 말한 ‘아시아형’과 ‘유럽형’을 한 몸에 보여주는 흥미로운 경우다.
 
  그는 2003~2007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뒤를 이어 2007년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작년에 재선됐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는 산타크루스주(州) 지사, 상원의원 등을 지낼 정도로 정치적 자생력을 가졌다.
 
  키르치네르 부부는 모두 페론식 포퓰리스트로 분류된다. 실제로 페르난데스는 국가예산의 18%을 국민생활보조금으로 지급하고, 케이블TV 프로축구 중계를 무료로 시청할 수 있게 하는가 하면, 노인연금 37% 인상, 집세보조금 50% 인상 등 ‘통큰 선심정책’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키르치네르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세계적인 고(高)식량가격에 힘입어 연평균 8%대의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어 포퓰리즘 정책을 지속하고 있지만, 25%에 달하는 실질 인플레율과 30%에 달하는 빈곤층 비율이 복병이다. 남편 1주기를 4일 앞두고 치러진 작년 대선 때, 페르난데스는 검은 옷을 입고 남편 사진을 들어 보이며 선거운동을 벌여 압승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앨런 존슨 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주목받고 있다. 유엔과 세계은행에서 근무했던 재정 전문가인 그는 1980~90년대에는 군사정권의 박해를 받아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6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국제기구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독재와 가난에 찌든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1년 여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박근혜의 미래는?
 
  그밖에도 줄리아 아일린 길라드 호주 총리,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 등 현역 여성 정치인들이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젊어서부터 정당정치를 시작해 남성 정치인들과 경쟁하면서 정치인으로서 계단을 밟아 가며 성장한 사람들이다.
 
  앞에서 살펴본 여성 정치인들을 보면, 대체로 아버지나 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은 아시아의 여성 정치지도자들은 실패했다.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딸로 여권운동가인 마리나 마하티르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봉건적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상속이다. 그런데 땅은 아들만 물려받는다. 자식들 중에 미국 등 선진국의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딸들이다. 이들은 귀국 후 법조계나 의료계 등에서 활동한다. 대지주 가문은 토지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선거구 전체에 영향력이 있다. 그런 집안의 딸이 정계에 진출하면 그들의 가장 큰 목표는 권세를 누리는 자기 가문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것이 된다.”
 
  반면에 자신의 전문성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정당정치 체제 아래서 착실하게 성장한 유럽의 여성 정치인들은 대체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아버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후광에 힘입어 정치에 입문했고, 성장했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아시아형 여성 정치인이다. 반면에 1990년대 후반 정치에 입문해 10년 넘게 정치를 배웠고, 2004년과 2012년 총선에서 위기에 처한 당(黨)을 구하고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것은 유럽 스타일의 전문가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형과 유럽형의 중간쯤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꿈을 이룰 것인가. 이룬다면 아시아형이 될 것인가, 유럽형이 될 것인가.⊙
 
  〈취재지원 : 장애리 월간조선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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