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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판 從北주의 심층연구 (下) 동독 첩보기관의 工作 企圖와 서독인의 동독 追從 전말

독일은 좌파정당에 대한 감청·감시활동을 합법화하고 있다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agleb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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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첩자들의 공작 활동은 서독 전역에 만연된 안보불감증으로 훨씬 쉬워졌다. 동독의 간첩활동으로 인해 일반국민·재계·정부·정당 등 사회 전반에서 심각한 수준의 안보 無知와 안일한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연방범죄수사청, 1984년 2월 동독 첩자들의 위험에 대한 서독 국민 인식 평가 결과)

⊙ 서독 언론 통한 여론 조작… 종교계·노조·좌파 학생조직에 침투해 親동독 세력 강화
⊙ 동서독 간 긴장완화 분위기 틈타 對共시스템 무력화 企圖
⊙ 감상적 평화주의가 서독 국민을 심리적으로 武裝해제시켜 안보의식 약화 초래
⊙ 統獨 후 舊동독 잔재 청산 위해 슈타지문서관리청·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 신설
⊙ 헌법보호청, 동독 공산당 後身 ‘좌파당’ 계속 감시
⊙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지지가 밑바탕
독일 헌법재판소. 방어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핵심기구인 헌법재판소는 좌파정당을 합법적으로 감청, 감시한다.
  동서독(東西獨) 냉전시대 당시 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는 서독 사회 깊숙이 침투해 정보를 빼내고 흑색선전을 벌여왔다. 통일 후 공개된 슈타지의 공작(工作) 사례와 서독 인사의 간첩행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혼란에 빠진 동독은 슈타지의 비밀문서를 대거 폐기했다.
 
  현재 독일 슈타지문서관리청이 보관·복원 중인 문서들은 직접적인 피해자를 제외하고는 일반인의 열람이 제한되고 있다. 공작활동이 광범위하고 문서 분량이 많다 보니 슈타지 활동의 전모를 파악하기에 아직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통일 전 서독 사회가 스파이 활동에 제약이 없을 정도로 개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신념이 이유가 됐든, 금전적 동기나 남녀 간 애정이 계기가 됐든 슈타지는 손쉽게 간첩을 서독에 침투시켜 협조자를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서독 사회의 안보의식이 매우 느슨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슈타지 고위 관계자들의 입에서 “슈타지가 침투할 수 없는 곳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84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지도부는 “서독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우리가 서독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슈타지의 선전과 기만전술: 서독 각계각층에 동독 편들기 분위기 조성
 
  슈타지의 선전·기만전술에 이용된 언론
 
  서독 언론은 여론조작에 이용할 수 있는 유용성 때문에 슈타지의 주요 공작대상이었다. 언론인은 특유의 직업의식으로 인해 동독 정부기관 및 연구소 관계자, 학자 등으로 위장한 슈타지 요원들의 접근이 매우 쉬웠다. 슈타지는 서독 언론을 이용, 서독 사회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이익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동독에 비판적인 인물들의 권위와 명예를 실추시켜 나갔다. 또 서독의 국제적인 지위를 손상시키기는 한편, 동독을 ‘극우 나치즘과 절연한 사회주의 모범국’으로 정당화시키려 했다. 슈타지는 이를 위해 좌파에서 우파 언론매체에 이르기까지 협조자를 골고루 확보해 활용했다. 조작된 보고나 정보를 서독 언론에 흘리거나 서독의 신문·출판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인들은 슈타지와의 접촉을 정보교환의 수단으로 삼았으며, 어떤 이들은 슈타지 정보를 자신의 경력을 쌓는 데 이용했다. 슈타지의 거짓정보에 속은 언론인도 상당수에 달했다.
 
  보수 성향의 시사잡지 《퀵(QUICK)》은 1970년대 초반 서독 사민당의 동방(東方)정책이나 동독 공산체제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했다. 발행부수가 140만~170만 부에 달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높아 동독 정권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은 이 잡지의 평판에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사장 겸 편집장인 하인츠 판 노우휘스(Heinz van Nouhuys)의 슈타지 접촉 경력을 폭로하기로 결정했다. 노우휘스는 1954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난테(Nante)’라는 가명(假名)으로 슈타지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 슈타지는 《퀵》의 경쟁지였던 《슈테른》에 노우휘스 관련 비밀자료를 제공했다. 자료에는 과거 노우휘스가 슈타지로부터 받은 공작금 액수와 증거물까지 들어 있었다. 《슈테른》은 슈타지가 자신들의 공작에 이용한, 영향력 있는 대중 언론매체 중 하나였다.
 
  《슈테른》은 1973년 10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서독 정부가 동유럽국가들과 협상할 때마다 《퀵》은 비열한 저널리즘으로 이를 방해해 왔다. 그러나 최근 《퀵》의 편집장인 노우휘스가 ‘난테’라는 가명으로 슈타지를 위해 6년간 20만 마르크를 받고 일한 것이 밝혀졌다.”
 
  서독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뤘고 결국 《퀵》은 언론매체로서의 신뢰성에 큰 손상을 입었다.
 
  슈타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설립한 신문사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戰) 반대와 반미(反美)를 주장하는 학생운동이 확산되는 와중에 1967년 5월, 서(西)베를린 독자들을 대상으로 좌파 성향의 《베를린 엑스트라-딘스트》가 창간됐다. 이 신문은 슈타지가 추진해 왔던 ‘서독 내(內) 좌파신문 설립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창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구고모스는 오랫동안 슈타지 요원과 접촉해 왔다. 이 신문은 슈타지로부터 운영자금은 물론 신문발행 노하우와 취재 자료까지 지원받았다. 언론이라는 보호막 아래 학생들에게 좌경사상을 고취시키고 반(反)정부주의 사상을 옹호했다. 슈타지는 《베를린 엑스트라-딘스트》를 배후에서 조종하며 서독 여론을 장악하려 했다.
 
  독일 제2 공영방송 ZDF는 2004년 7월부터 2년간 35만 페이지 분량의 슈타지 문서를 분석, 슈타지 협조자로 활동한 직원을 적발해 냈다. 통일 직전 동독특파원을 포함, 유명 방송인 2명과 카메라맨 1명이 슈타지 협조자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슈타지가 관여한 방송보도가 최소 230여 건에 달한 사실도 확인됐다. 방송편집과 직접 관련이 없는 카메라맨은 ZDF 건물 설계도, 방송사 조직과 예산 규모 등을 슈타지에 넘겼다.
 
 
  종교·학계·노조 등 좌파단체를 적극 활용한 슈타지
 
  동독 정보기관의 입장에서 볼 때 서독 교회는 정부·정당·언론에 비해 비중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독 개신교와 가톨릭은 동독 정권에 골칫거리였다. 서독 종교계는 인도적 지원과 동독 교회와의 협력 등을 이유로 끊임없이 동서독 간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동독 주민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면서 서독의 영향력이 동독으로 유입되는 관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슈타지는 서독 종교계의 이런 의도를 차단하고 내부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첩자를 적극 활용했다.
 
  서독 수도 본(Bonn)에서 활동했던 고트프리트 부쉬(Gottfried Busch)는 ‘나무(Baum)’라는 가명으로 40년간 간첩으로 암약하면서 교회 내부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그는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시절 슈타지에 포섭돼 1961년 서독으로 밀파(密派)됐다. 목사라는 신분을 이용, 정치적 저명인사들과 다방면에 걸쳐 접촉, 정보를 수집했다. 그가 슈타지에 보고한 내용은 광범위했다. 중동지역에 파견된 서독 연방정보부 요원들에 대한 내부정보와 군(軍)장성 스캔들에 대한 서독 방첩기관의 조사내용도 들어 있었다. 부쉬는 1994년 간첩활동으로 구속됐다.
 
  올덴부르크 소재 교회에서 청소년 교육전문가로 일하던 젠젠슈미트 목사도 슈타지의 첩자였다. 그는 1964년 동독 튀링겐주(州)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슈타지에 포섭됐다. 1966년 동서독 국경철책을 부수고 서독으로 탈출했는데, 이는 슈타지의 조작극이었다. 그는 튀빙겐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대학 내 분위기와 개신교 학생회 관련 정보 등을 슈타지에 넘겼다. 동독 출신 귀순자들의 동향보고 임무도 맡았다. 통일 전까지 그가 작성한 정보보고서의 분량은 1800페이지에 달했다. 1993년 간첩행위가 적발돼 처벌받았다.
 
  개신교 목사 프랑크 루돌프도 1992년 슈타지 문서가 열람 되는 과정에서 슈타지의 협조자라는 정체가 드러났다. 그는 1963년부터 슈타지 내 교회 담당 부서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겉으로 동독 내 재야인사로 알려졌던 그였지만 실상은 반정부 세미나 계획을 밀고하거나 몰래 서방세계로 도주하려는 사람들을 슈타지에 고발해 왔던 것이다. 1985년 서독으로 넘어와 서독 인권단체들의 내부정보를 입수, 슈타지에 넘겨주고 그 대가로 매월 일정액의 돈을 받아왔다. 그는 1994년 9월 간첩죄로 처벌받았다.
 
 
  서독 대학가, 예비 간첩 양성하는 최적지
 
  서독의 대학들은 슈타지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대학이 슈타지의 중요 침투대상이었던 이유는 예비 간첩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권력의 핵심부와 달리 대학생들은 비교적 쉽게 협조자로 포섭할 수 있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좌경 학생운동의 확산은 포섭 대상자들을 다수 확보할 수 있는 호기였다. 당시 작성된 다량의 슈타지 보고서에는 ‘현재 대학 내 자원을 개발하는 데 아주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는 대목이 자주 등장했다.
 
  대학생활 중 포섭된 간첩들은 상당수가 사회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원을 지낸 빌헬름 박사는 대학 재학 중 사회주의대학동맹(SHB) 회원으로 동독 라이프치히로 여행을 갔다가 슈타지에 포섭됐다. 그는 사민당과 산하 청년조직에 관한 정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동독에 대한 정치적 호감으로 슈타지에 협력한 경우도 있었다. 사민당 전문위원을 지낸 폴러트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 1975년 슈타지 정보원이 됐다. 그녀는 사회주의대학동맹 간부 자격으로 동독 자유독일청소년단의 초청을 받고 동독을 방문하던 중 포섭됐다.
 
  68세대의 전형으로 정치학 전공자였던 라인하르트 오트 박사도 유사한 경우다. 그는 1973년 슈타지에 포섭돼 총 25만 마르크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 기민당 간부 비덴코프가 이끌던 경제사회정책연구소 연구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회 전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슈타지에 고급정보를 팔아넘겼다.
 
  정부·재계·군부 등이 연구비를 지급하며 대학에 위임한 연구 과제들도 슈타지의 관심 대상이었다. 베를린 자유대학·킬대학의 동독 및 동유럽 문제 연구, 괴팅겐대학·브라운슈바이크대학의 자연과학·공학 부문 등이 정탐 대상이었다. 이공계 분야 명문대학으로 유명한 아헨공과대학의 서독 군수기술 개발 연구 동향도 주요 관심거리였다.
 
  노동조합은 슈타지가 협력대상자로 적극 개척했던 ‘목표물’이었다. 서독 노조 내 친(親)동독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과제였다. 여론층에 영향력이 강한 언론노조도 공략대상이었다.
 
  서독 노조에서 암약한 대표 간첩으로는 빌헬름 그로나우(Wilhelm Gronau)를 들 수 있다. 그는 서독 최대 노동조합인 독일노동조합연맹(DGB·회원 수 600만명)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인물이다. 1956년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1957년 서독으로 건너가 DGB의 직원이 됐다. 이후 DGB 의장인 빌리 리히터(Willy Richter)의 비서이자 통일담당부서 책임자로서 DGB의 동구권 노조 접촉동향, 주의회 선거결과에 대한 사민당 평가 등을 슈타지에 전달했다. 1972년 서독 방첩기관에 적발돼 1년 후 동서독 첩보원 교환 시 동독으로 추방됐다.
 
  DGB의 집행부 부장이었던 귄터 쉐어도 ‘가스톤’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슈타지의 협조자였다. 그는 DGB 내부동향과 제2 공영방송인 ZDF 관련 정보 320건을 제공했다.
 
 
  슈타지의 마지막 노림수: 서독의 對共태세 약화
 
  1960년대 후반 베트남戰 반대 움직임과 좌경 학생운동의 촉발
 
1968년 2월 서독에서 열렸던 ‘베트남국제회의’를 담은 영화 속 장면. 연단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역이 독일 좌경학생운동의 대표였던 루디 두치케이다.
  1960년대 후반 독일 대학생들은 ‘관료적 학제 운영 타파’를 내걸며 학생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세계적으로 확산된 베트남 전쟁 반대 요구, 제3세계 반식민 해방운동 등과 맞물려 학생운동은 정치운동으로 변질됐다. 많은 대학생이 탈권위를 내세우며 사회주의·무정부주의에 탐닉했고, 기존의 정치질서를 수구(守舊)적이라 비판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기성세대를 나치 전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낡은 세대로 인식했다.
 
  1967년 4월 미국 험프리 부통령의 서독 방문과 그해 6월 팔레비 이란 국왕의 서베를린 방문 때 격렬한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팔레비 왕의 서베를린 방문 기간 때 시위에 참가했던 ‘벤노 오네조르크’라는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사망하자 서독대학가에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독일 좌파운동이 조직화, 무장투쟁으로 격화됐다. 이른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세계를 뒤흔든 ‘68혁명’이 독일에서 본격화한 것이다.
 
  놀랍게도 2009년 공개된 슈타지 문건에 따르면, 시위 당시 오네조르크에게 총격을 가한 ‘쿠라스’라는 경찰관은 슈타지의 첩자였다. 정확한 사건의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서독의 68혁명이 동독 슈타지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1968년 4월 베트남전 반대시위 도중 좌익 계열인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SDS)의 대표인 두치케가 우익청년의 총탄에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치케는 “제국주의 첨병 나토(NATO)가 서유럽에서 민중해방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한 급진 좌경주의자였다. 그가 중상을 당하면서 서독 내 소요사태는 과격 양상을 보였다. 노동조합은 동맹파업을 선포하고 대학과 공장은 학생·노동자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비상사태 발생 시 군병력의 투입을 허용한 비상조치법 제정(1968년 5월)도 좌익세력들의 시위를 촉발한 명분이 됐다.
 
  슈타지는 서독 내 좌경학생들의 소요 확산을 좌파세력의 지지층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1960년대 서독의 학생운동을 이끌던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은 동독의 공산당 청년조직인 자유독일청소년단(FDJ)과 일찍부터 교류·협력해 왔다. 슈타지는 첩자를 독일학생동맹에 침투시켜 내부동향을 보고받고 활동방향을 배후 조종했다. 또한 슈타지는 서독 대학생들의 베트남전 반대 움직임을 미국-서독 관계 이간질에 적극 활용했다. 동독 자유독일청소년단을 통해 베트남전 관련 자료를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에 제공, 반전여론과 반미시위를 조장했다. 슈타지는 1967년 자금지원을 통해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과 유사한 ‘공화국클럽’을 결성, 학생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했다.
 
  슈타지는 미국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고 서독 정부의 도덕성 실추를 노린 공작도 벌였다. 소련 첩보기관 KGB와 공동으로, 미국과 서독이 베트남전에서 대량 학살 등 폭력을 자행한다는 거짓 문건을 작성했다. 슈타지는 이 문건을 러셀위원회(영국 철학자 러셀이 발족한 베트남 反戰위원회)를 통해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이는 서베를린 학생운동이 또다시 과격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60~70년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슈타지의 첩자 포섭작업은 활발히 진행됐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슈타지는 “정치적·이념적으로 볼 때 포섭대상자가 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매우 많다”면서 “많은 서독 학생이 정치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며 이념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급진 학생운동, 테러집단 赤軍派의 출현으로 이어져
 
서독 적군파 조직의 마크.
  1960년대 후반 좌경화된 대학생 시위로 몸살을 앓던 독일 사회는 1970년대 들어 극좌(極左)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1968년 4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백화점 두 곳에서 방화사건이 터졌다. 당시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바더와 엔스린 등이 저지른 사건이었다. 당시 이들은 사회의 소비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바더는 “무력 투쟁이 반제국주의 투쟁의 최고형태”라고 강변한 극좌 테러리스트였다. 바더가 경찰에 체포된 후 1970년 5월 일부 지지자들이 복역 중이던 그를 비밀리에 탈출시켰다. 이후 이들은 적군파(赤軍派·RAF)를 결성했다.
 
  적군파는 무장(武裝)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지원을 받으며 요르단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고 1970년 9월 서독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서독 내 은행·미군(美軍)시설·경찰서 등에 무자비한 테러를 가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며 서독 사회를 극도의 긴장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마침내 서독 정부는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여 1972년 6월 적군파의 리더인 바더와 마인호프를 포함해 조직의 핵심 인물 7명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망친 잔당이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납치와 살해 행각을 계속 저질렀다. 1975년 2월 로렌츠 기민당 서베를린 대표가 납치됐고, 1977년 4월에는 부박 당시 검찰총장이 살해됐다. 그해 7월에는 드레스덴 은행장도 납치된 후 살해됐다.
 
  그러나 서독 정부가 수감된 적군파 요원의 석방요구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고 핵심 인물의 탈출 시도 또한 수포로 돌아가자 감옥에 있던 적군파 핵심 테러리스트들은 옥중 자살한다. 1980년대까지 적군파 잔당의 테러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평화 내세워 자위적 차원의 군비확충에도 반대
 
서독 적군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바더’와 ‘마인호프’를 추종하는 ‘바더­마인호프 그룹’은 그들 스스로 최악의 테러집단임을 자처했다.
  1970년대 말 독일은 핵(核)무기 배치문제로 큰 논란에 휩싸였다. 소련은 1970년대 중반부터 중거리 핵미사일(SS-20)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배치하며 군비를 증강했다. 나토는 서유럽 안보에 중대한 위협요소로 판단, 동유럽의 핵무기 우위에 대항하기 위해 1979년 12월 이른바 ‘이중결의’를 채택했다. 이중결의란 나토가 소련과 군비축소를 논의하되, 소련이 동유럽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서독 등 서유럽 4개국에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계획이다. 미국과 소련은 1981년 11월 제네바에서 중거리 핵무기(INF) 감축 협상을 시작했다. 미국은 소련이 동유럽에 배치한 SS-20 미사일을 철수하면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제의했으나, 소련의 입장이 완강해 진전은 없었다.
 
  이중결의 내용이 알려지자 독일에서는 좌파를 중심으로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83년 4월 전국적으로 70만명이 참가한 시위가 열렸고, 그해 10월에는 울름과 슈투트가르트 간 도로에서 20만명이 인간띠를 만들어 시위를 벌였다. 나치 군국주의의 뼈아픈 경험으로 군비확장에 국민들의 거부감이 컸던 상황이라 ‘평화’를 내세운 좌파의 반핵반전(反核反戰) 주장이 큰 호응을 얻었다.
 
  서독 사회는 자국(自國) 안보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외면한 채 표면상의 평화에만 집착했다. 특히 사민당은 “미국이 군축보다 새 미사일 배치에만 관심을 가져 소련과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핵무기 배치 거부를 당론(黨論)으로 채택했다. 한편, 바르샤바 조약기구 외무장관들은 1983년 10월 서유럽에 핵무기가 배치되면 군비를 증강하겠다고 결정, 동서진영 간 긴장을 더욱 조장했다. 공산진영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서독 국민은 평화주의에 휩쓸려 전쟁을 우려한 심리적 불안감이 깊어 갔다.
 
  슈타지는 서독에서 일어난 소위 평화운동을 반정부 여론 조성과 군비확충 저지에 역이용했다. 슈타지는 반전을 주장하는 민간단체를 배후 조종했다.
 
  1981년 나토 회원국의 전직 장성 9명이 모여 ‘평화를 지지하는 장군들’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서방진영의 핵군비 강화가 동서진영 간 긴장을 고조시켜 결국 핵전쟁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직면한 최대 문제점은 활동자금 부족이었다. 회의참석이나 강연·토론 비용, 출판 경비 등을 모두 자비(自費)로 처리해야 했다.
 
  슈타지는 이런 약점을 파고들었다. 슈타지는 이 단체의 주요 회원이었던 카데 함부르크대학 교수에게 접근했다. 카데 교수가 연간 10만 마르크의 금액이면 홍보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요청하자 슈타지는 위장 연구소 명의로 자금을 전달했다. 슈타지는 동독의 입장이 담긴 자료를 제공하며 이 단체의 활동방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단체의 핵심인사이자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녹색당 의원으로 활동했던 바스티안 장군은 당초 동서 양(兩) 진영의 군비확산 책임론을 얘기하다 나중에는 바르샤바 동맹국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한편, 카데 교수는 슈타지의 협조자로 단체동향을 수시로 보고하고 운영지침을 하달받았다.
 
 
  서독 내 좌파정당을 활용해 보수정당 공격 유도
 
1982년 52세의 나이에 총리로 선출된 헬무트 콜 총리가 엄숙한 표정으로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콜 총리는 이후 4번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 16년 동안 재임했다.
  동독 호네커 서기장은 나토가 추진하는 이중결의를 무산시키기 위해 1983년 포겔 서독 사민당 원내대표와 슈트라우스 서독 기사당 대표를 만나 핵무기 배치 포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1982년 집권한 서독 기민당의 헬무트 콜(Helmut Kohl·재임기간 1982~1998) 총리는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는 유럽에서 핵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라 주장하며 단호히 대응했다. 콜 총리는 서방진영이 소련에 여러 차례 군비축소를 제의했으나 소련이 동유럽 배치 핵무기를 철수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핵무기 배치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1983년 11월 하원 표결에서 찬성 286표, 반대 255표로 핵무기 배치가 결정됐다. 이 결정에 따라 서독에 퍼싱-Ⅱ(사정거리 1800㎞) 108기와 크루즈미사일(사정거리 2500㎞) 96기, 네덜란드·벨기에·이탈리아에는 크루즈미사일 368기가 각각 배치됐다.
 
  안보를 앞세운 콜 정부의 단호한 결정으로 위기는 극복됐다. 그러나 전쟁 재발에 불안감이 컸던 서독 국민들에게 좌파세력의 ‘전쟁보다는 평화’라는 주장은 쉽게 먹혀들었다. 감상적 평화주의 운동은 서독 국민들의 심리적 무장해제를 유도함으로써 안보의식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서독의 좌파정당들은 동독 공산정권을 대등한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상에 나섰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사민당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고 공동정책 추진을 모색했다. 사회주의통일당과 1985년 비(非)화학무기 지대에 관한 합의, 1986년 중부유럽에서 비핵회랑 지대 구축 합의 등을 도출해 냈다.
 
  1980년대 초 반전·반핵운동 흐름 속에 부상(浮上)한 녹색당도 주요 관심사안인 환경·평화 등의 주제로 동독과 대화를 시작했다. 1983년 10월 녹색당 대표단이 동독 의회를 방문해 환경과 평화, 인권, 안보정책 등을 논의했으며 1985년에는 소속 여성의원단이 동독의회를 방문했다.
 
  슈타지는 새로이 등장한 좌파정당 녹색당을 정치적 목적에 적극 이용하려 했다. 녹색당 부상에 따른 정치권 판도변화를 주시하며 보수정당인 기민당·기사당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당내(黨內) 중진의원들을 포섭,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통일정책을 전파하고 환경·평화운동 관련 지침을 하달하는 공작도 펴나갔다.
 
 
  친동독 분위기 확산으로 간첩 적발 건수 급감
 
  1970년대 사민당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 사회 전반에 대(對)동독 유화 분위기가 확산됐다. 동독을 적대시하지 않고 국가로 인정하면서 분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방향으로 정부의 정책방침이 변경됐다. 여기에 사회학자였던 페터 루츠(Peter Ludz)의 내재적 동독 접근법도 한몫했다. 루츠 교수는 “사회주의 틀 안에서 동독 체제를 봐야 한다”면서 동독 체제의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풍조는 동독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세력이 확산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루츠 교수는 내재적 접근법을 학술적으로 교묘히 위장해 비판의 시선을 따돌렸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듯, 그가 슈타지의 끄나풀이었다는 사실이 1990년대 공개된 슈타지 문서에 의해 드러났다.
 
  한편, 동독 친화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서독 법원의 간첩 사건 판결 건수는 1964년 200건에서 1970년 27건으로 급감했다. 물론 서독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공고화됐다는 믿음과 극단주의 조직이 체제 존립에 당장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극좌세력들이 제도권 전반에 침투, 이데올로기 거점을 확보하고 반정부 여론을 조장하는 것을 방조하는 꼴이었다.
 
  그 결과 서독의 대공(對共)능력이 크게 약화됐다. 1968년 8차 형법 개정으로 대공수사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간첩활동에 대한 처벌 또한 최소한으로 제한됐다. 정치인들도 철저한 반공(反共)을 주장할 경우 긴장완화를 거스르는 반(反)통일세력으로 몰려 가급적 이를 삼갔다.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슈타지의 활동에 대해 일부 언론이 간헐적으로 보도했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간첩사건이 적발되면 긴장완화에 걸림돌이 되고 동독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할 것이라는 시각마저 존재했다. 동독을 현존하는 위험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방범죄수사청(BKA)은 1984년 2월 동독 첩자들의 위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정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동독 첩자들의 공작 활동은 서독 전역에 만연된 안보불감 현상으로 인해 수월하게 된 측면이 있다. 동독의 간첩활동과 이로 인한 국가안보의 위협에 대해 일반 국민들을 비롯해 재계·정부·정당 등 서독 사회 전반에서 심각한 수준의 무지(無知)와 안일한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당시 헌법보호청을 위시한 서독의 안보기관들은 과거 히틀러 치하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민주주의 수호에 필요한 기관이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불신과 거부감을 국민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이를 틈타 동독 정보기관의 대서독 공작활동은 더욱 확대됐다. 동독 공산정권은 사민당 내 좌파세력, 노동조합, 대학생 등을 끈질기게 협력상대로 포섭·활용했다. 거액의 공작금과 인력을 투입해 서독 내 친동독 좌파세력 기반을 늘려나갔던 것이다.
 
 
  동서독 統一: 끊임없는 국가정체성 수호의 産物
 
  서독 주도의 흡수통일이 가능했던 이유
 
냉전 시절 소련의 지도자였던 브레즈네프(벽화 왼쪽)와 동독의 호네커가 입맞춤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 1989년 11월 붕괴된 독일 베를린 장벽 일부에 그려진 이 벽화는 20여 년 동안 베를린의 명물로 인정받았다.
  동독 첩보기관 슈타지는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서독 사민당(동독에 우호적이었으며 동방정책을 추진) 집권 기간은 물론, 1990년 통일 직전까지 전방위적으로 공작활동을 벌였다. 반미·반전을 들고 나온 학생시위와 평화운동으로 서독 사회 전반에 안보의식도 약화됐다.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독이 서독과의 체제 경쟁에서 패배해 결국 서독 주도로 흡수통일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동독 주민들이 갖고 있던 서독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높은 열망을 들 수 있다. 동독은 동구권 내에서도 경제적으로 모범적인 국가로 인정받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이 드러나며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1980년대 중반 서독의 지원이 없었다면 주민의 생활수준이 20~30% 떨어질 판이었다. 생필품 부족, 대외무역 적자 폭 확대, 열악한 통신과 교통 인프라, 산업시설의 노후화 등으로 서독과의 격차는 더욱 커져 갔다.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동력(動力)이 고갈된 것이었다. 1989년 들어 동구권의 변화바람과 맞물려 동독 곳곳에서 체제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인접국 헝가리·체코 등을 통한 동독 주민들의 서방행(行)도 크게 증가했다. 1989년 10월 호네커 서기장을 시작으로 11월 내각과 당(黨) 정치국원들이 줄줄이 사퇴하면서 마침내 동독 집권세력은 무너졌다.
 
  둘째, 서독 주도의 흡수통일은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개방 정책과 동유럽국가들의 민주화운동에서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
 
  1985년 집권한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계획경제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서방과의 대립에서 탈피, 개혁개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브레즈네프 독트린(1968년 8월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체코 무력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표한 선언으로 동구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특정 국가의 주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폐기하자, 폴란드·헝가리·체코 등 동유럽국가에서 대대적인 개혁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동독 지도부에도 개혁을 요구하며 동독에서 시위가 일어나더라도 소련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동독 지도부는 외교적 고립과 무능함을 드러내며 주민들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마지막으로 서독 체제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헬무트 콜 총리의 단호하고 확고한 통일정책도 동서독 통일 요인에서 빼놓을 수 없다. 콜 총리는 전임 좌파정권의 동방정책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그는 엄격한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했다. 1983년 3월 서독 정부는 서방은행의 동독에 대한 10억 마르크 차관을 보증한 데 이어 이듬해 9억5000만 마르크의 2차 차관에 대해서도 보증을 섰다. 차관 제공의 대가로 서독 주민의 동독 방문 기간을 연장받았고, 동서독 경계선에 설치된 무인 자동발사기의 철수를 동독에 요구해 관철시켰다. 또한 동독이 차관을 제대로 상환하지 않을 경우 서독이 매년 동독에 지급하는 통행료에서 일괄 공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콜 총리는 일방적 경협 대신 동독 정권으로부터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제공받는 형식으로 동독 정권의 숨통을 조여나갔다.
 
  콜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동독 주민의 탈출과 시위사태를 통일로 연결시켰다. 베를린 장벽 개방 3주 후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해 통일논의를 공식화했다. 동독 탈출자의 제한 없는 수용, 동서독 화폐의 1대 1 교환 등을 천명했다. 그는 경제적 부작용이 있더라도 동독 주민 사이에 통일 열기가 확산되는 것을 최우선시했다. 또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일 통일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냈다. 소련과는 대규모 차관 제공과 동독 주둔 소련군 철수비용을 지불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합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데올로기 대결에서의 승리 배경
 
  동독 주민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열망,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유럽국가의 민주화운동, 서독 콜 총리의 확고한 통일정책 등은 독일 통일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서독이 안보 부침기(浮沈期)를 겪으면서도 동독 첩보기관의 끊임없는 모략과 체제 흔들기에 굴하지 않고 동독을 제압할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은 무엇일까.
 
  서독 사회 내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서독은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자유민주질서 수호 의지를 통해 체제를 유지, 통일을 이뤄냈다. 이는 동방정책이 시행되던 1974년 10월 3일자 서독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보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독 국민은 동방정책에 대한 실망 이후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971년에는 서독 국민의 37%만이 미국과의 강력한 군사동맹을 희망했으나, 1974년 8월에는 51%로 상승했다. 동독과의 교류협력 결과 만연해진 안보 불감증 속에서도 자유민주 체제를 지키려는 서독의 국민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독일은 나치라는 반민주적 집단에 의해 민주주의가 철저히 유린당한 아픔을 갖고 있다. 이런 역사의 반성에서 출발해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방어적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敵)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공화국을 재건하면서 방어적 민주주의 구상을 기본법(憲法)에 수용했다. 특히 기본법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관련된 핵심내용(인간의 존엄성·국민주권·삼권분립·저항권 등)을 열거하고 이 조항은 개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기본법에 정당해산제도를 두어 정당의 자유를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하는 동시에 자유민주질서를 침해하거나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할 경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해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정당해산 판결은 통일 이전 두 차례 있었다. 1952년 10월 극우세력 사회주의제국당(SRP)과 1956년 8월 극좌세력 서독공산당(KPD)이 해체됐다.
 
  이와 더불어 기본권 박탈제도도 갖췄다. 독일 기본법 제18조는 언론의 자유, 교육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서신·우편 및 통신의 자유, 재산권 보장, 망명권 등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훼손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연방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해당 기본권을 실효시킬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는 기본권을 남용하거나 오용해 자유민주질서를 위해(危害)하려는 반헌법세력들에 대한 제재수단이었다.
 
 
  방어적 민주주의를 통한 체제수호
 
2012년 3월 독일 대통령으로 선출된 요아힘 가우크(왼쪽)가 앙겔라 메르켈(오른쪽) 총리로부터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가우크 대통령은 동독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고 통독 후 초대 슈타지문서관리청장을 지냈다. 메르켈 총리도 동독 출신이다.
  방어적 민주주의의 실행기관으로는 연방헌법재판소와 연방 및 주(州) 단위의 헌법보호청을 들 수 있다. 연방헌법재판소는 헌법의 적, 민주주의의 적을 가려내고 이를 무력화시키는 헌법기관으로 설립됐다. 정당 해산이나 기본권 실효와 같은 정치적 중요한 사안에 대한 판결을 통해 방어적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1950년대 사회주의제국당, 서독공산당 등 위헌정당 해산은 물론 1970년대 소위 군인판결과 감청판결을 통해 방어적 민주주의 이론을 폭넓게 적용·발전시켜 왔다.
 
  군인판결이란 1970년 2월 자유민주질서를 부정하는 병영 내 토론행위에 대해 불법이라 결정한 판결을 말한다. 감청판결은 1970년 7월 자유민주질서 수호를 위해서는 감청 당사자에게 사전통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이다.
 
  독일 기본법은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반하는 단체나 개인의 활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연방과 주에 헌법보호청을 설치할 수 있는 ‘헌법보호청 조항’을 두고 있다. 헌법보호청은 개인, 단체 및 정당의 헌법 적대행위를 적발해 연방·주 내무장관과 연방범죄수사청(BKA) 등을 통해 필요조치를 할 수 있다. 또 독일 내 모든 공직자와 공공기관 종사자 임용 시 신원조사 업무도 수행하고 있다. 헌법보호청은 예방적 헌법수호라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성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기구이다.
 
  독일 기본법은 형법에 위배되거나 헌법질서와 국제적 합의에 반하는 결사를 금지하는 결사금지조항(제9조 2항)도 두고 있다. 연방과 주정부가 해산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해산명령이 내려지면 단체 재산의 압류와 몰수가 이뤄진다. 나아가 결사법 제8조는 해산된 단체의 대체조직 결성을 금지하고 있고, 제9조는 해산된 단체의 상징물을 공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독일은 형법의 여러 조항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위협세력에 대한 방어수단을 갖추고 있다. 형법 80~92조는 평화에 대한 위협, 내란 및 민주 법치국가에 대한 위협을 중요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 조항은 우리의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 간첩죄, 불고지죄 조항과 유사하다.
 
 
  정치교육센터·정치재단 통한 민주시민 교육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은 나치즘과 같은 극단주의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국민들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교육에 적극 나섰다. 그 일환으로 1952년 연방정치교육센터(BPB)와 주별 정치교육센터가 설립됐다. 정치교육센터는 출범 초기부터 정파(政派)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학생·공무원·군인·시민들을 대상으로 균형잡힌 정치교육을 실시해 왔다. 시민교육 프로그램은 1970년대 적군파와 같은 극좌 테러조직과 신(新)나치즘과 같은 극우 민족주의를 건전한 시민의 힘으로 억제하고 사회갈등을 토론과 타협으로 해결하는 성숙한 시민문화 형성에 기여했다.
 
  독일의 시민교육은 다양하게 진행됐다. 독일 역사·언어·문화의 통일을 강조하면서도 동서독 간 체제와 통일정책의 차이점을 구분하도록 했다. 아울러 동독 주민에 대한 인권보장의 요구가 서독인의 의무임을 가르쳤다. 2005년 9월 한국을 방문한 휘빙어 연방정치교육센터 부소장은 “정치교육이 독일의 민주화와 통일의 원동력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독일의 정치교육은 각 정당과 긴밀히 연계된 정치재단에 의해서도 실시되고 있다. 원내에 진출한 6개 정당이 각각 정치재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 재단은 나치와 동독 공산당 독재 체제에 맞서 독일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산파역할을 했다. 정치재단은 시민의 책임을 강조하고, 민주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능력과 태도를 배양시켰다. 정치재단 중 아데나워재단, 에버트재단, 나우만재단, 자이델재단은 한국에 지부(支部)를 두고 있다.
 
  연방과 주정부, 각종 종교·문화·시민단체는 반(反)극단주의 캠페인을 주기적으로 열어왔다. 특히 정부는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꾸준히 지원했다. 극단주의의 활동실태와 폭력행위에 관한 각종 토론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국민들은 자유민주질서 위협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일 수 있었다.
 
 
  콜 정부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강화
 
  1980년대 들어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끄는 우파(右派) 연합정권은 좌파세력의 헌정질서 교란과 파괴 위협에 맞서 방어적 민주주의를 통한 체제수호 활동에 집중했다. 헌법 적대세력으로부터 서독을 지키기 위해 최일선 치안기관인 경찰은 물론 연방정보부(BND)와 헌법보호청 그리고 군(軍)방첩대(MAD)의 활동 반경을 대폭 늘렸다.
 
  이는 동독 공산주의에 대한 ‘힘의 우위정책’으로 이어졌다. 콜 총리는 동독의 상응조치 없이는 경제협력을 추진하지 않는 상호주의 정책을 꾸준히 펴나갔다.
 
  콜 총리는 반헌법세력에 대해 법적 조치는 물론, 원천적으로 고사(枯死)시키는 방안도 추진했다. 다양한 시민교육 프로그램, 시민사회·언론에 의한 비판적 여론조성 등을 통해 적대세력을 사회로부터 고립시켰던 것이다. 반헌법세력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와 토론의 활성화는, 국민들로 하여금 나치 체제와 같은 독재 체제, 공산당, 극좌 테러조직 등에 대한 이념적 면역력을 갖게 했다. 내부적으로 민주주의의 적에 대한 면역력을 갖춘 서독의 자유민주 체제는 종국적으로 통일을 이룩하는 밑거름이 됐다. 동독 주민 절대다수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서독 체제로의 편입을 원했던 이유는 서독 자본주의의 풍요뿐만 아니라 서독의 튼튼한 자유민주주의 제도 때문이었던 것이다.
 
 
  통일 후에도 舊동독 독재체제 청산에 적극 나서
 
2009년 10월 독일 베를린에서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주최로 열린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행사에 역사적 사건의 주역 3인이 참석했다. 왼쪽부터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독일 정부는 통일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독 체제하에서 자행됐던 정치탄압, 인권유린 등 과거사를 정확히 밝히고 피해자에 대한 복권과 보상을 시행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공산독재 잔재를 청산함으로써 국민통합과 실질적 통일의 길로 나아가려는 노력인 것이다.
 
  슈타지는 동독 공산정권을 떠받치던 핵심기구로 동독 주민들에 대한 감시, 테러 등 정치적 범죄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동독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600만명의 사찰자료를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정부는 통일 이후 방대한 양의 문서를 관리하기 위해 ‘슈타지문서관리법’을 제정하고 1991년 슈타지문서관리청(BStU)을 설립했다. 문서관리청을 중심으로 불법적인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하고 슈타지 행적에 대한 문헌 출판과 강연을 실시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1998년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을 설립, 과거 공산 독재 저항운동을 조사하고 정치적 희생자에 대한 지원, 독일 분단사 연구 등에 나서고 있다. 동독과 관련한 각종 학술활동을 지원, 독재 체제를 직접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공산 체제를 미화(美化)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방지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동독 집권당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좌파당(Die Linke)에 대한 감시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좌파당은 2007년 6월 동독 독재 공산당 후신(後身·민사당)과 사민당에서 이탈한 세력들이 결집해 만든 정당이다. 좌파당은 동독 지역에서 발생한 실업 증가와 빈부격차 확대 등 사회불안 상황에 힘입어 지지기반을 넓혀갔다. 그 결과 원내 제4당이 됐다. 이 정당은 주독(駐獨)미군 철수·해외군사개입 반대 등을 주장하는 급진 좌파정당으로, 당권은 공산주의 플랫폼(KPF)·마르크스포럼(MF) 등 극좌세력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며 반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설립 등을 주장하고 있다.
 
  독일 헌법보호청은 좌파당에 대해 엄중한 감시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공식적으로 당 자체를 극단주의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당내 극단주의 분파의 조직·구성원·활동실태 등을 면밀히 관찰해 매년 연례보고서에 ‘국내 극좌세력의 동향과 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독일 연방행정법원은 2010년 7월 좌파당 지도부에 대한 헌법보호청의 감시를 합법적이라 판결했다. 물론 감시의 범위가 공개자료에 의한 일반동향 사찰 수준으로 제한돼 있지만, 독일과 같은 성숙한 자유민주사회에서도 헌법수호를 위해 정치인에 대한 감시를 합법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反헌법세력에 대해 무관용 원칙 지켜야
 
  냉전 이후 한국처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한 국가는 세계에서 드물다. 남북분단 상황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동독 주민들처럼 북한 주민들에게 강력한 유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2만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탈북 동기(動機)로 ‘빵’과 ‘자유’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남한 사회에 정체를 드러낸 종북주의자들이 자유민주 기본질서를 공공연히 부정하고 있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정당·노조·학원·종교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진보라는 가면을 쓴 채 북한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다. 천안함 폭침에 대해 북한 소행을 부정하고 애국가도 부정한다. 종미(從美)가 더 문제라는 자들이 국회까지 진출했다.
 
  종북 논쟁을 계기로 올바른 안보관·대북관 설정이 시급하다. 헌법 적대세력을 단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법적·제도적 장치를 보완해야 한다. 특히 체제 위협세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관용과 침묵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통일한국을 이루는 데 이들이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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