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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특집

SNS가 촉발한 이집트 혁명, 그 18개월 후

“빈곤과 실업 해결 못 하면 제2 혁명 있을 것”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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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프드黨, “이슬람 정당들의 政治 宣傳에 이집트 國民들이 농락당했다”
⊙ “무슬림형제단은 革命이란 버스를 ‘날치기’한 사람들” (이집트 사회민주당)
⊙ 무르시, 탄타위 國防長官 解任으로 軍部 힘 빼기 시도
⊙ “이집트는 經濟개발과 교육 분야에서 성공한 韓國의 협조 바란다” (자유정의당)
6월 18일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코란을 든 남성이 무르시의 대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있었던 노점상 부아지지(당시 26세)의 분신자살(焚身自殺)은 25년 동안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반(反)정부 시위를 촉발했다. 이른바 ‘재스민 혁명’이다. 혁명은 아랍권 전체를 뒤흔들었다. 외신(外信)들은 “아랍의 봄이 도래했다”고 평가했고, 서방 전문가들은 이를 ‘SNS혁명’이라고 명명(命名)했다.
 
  혁명의 불길은 주변국 독재정권을 덮쳤다. 이집트에서는 30년 동안 비상조치법으로 통치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하야(下野)했고, 예멘에서도 12년간 대통령 자리에 있던 압둘라 살레가 해외(海外)로 도피했다. 리비아에서는 내전(內戰)이 일어나 반군(反軍)에게 무아마르 카다피가 사살(射殺)됐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란, 요르단, 알제리, 바레인, 수단, 모로코, 오만 등에서 있었던 반정부 시위는 정권 퇴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시리아에서는 내전이 벌어져, 7월 말 기준으로 2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정권 교체를 한 나라들조차 ‘민주화 혁명’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政權 교체한 튀니지와 이집트, 이슬람주의 得勢
 
정부청사에서 무바라크의 사진을 떼는 사람들. 이집트 시민혁명으로 그의 30년 독재는 막을 내렸다.
  튀니지에선 이슬람정당인 부흥당(나흐다당)이 총선에서 40%가 넘는 지지를 받아 집권당이 됐다. 이집트에서도 무슬림형제단이 만든 자유정의당의 모하메드 무르시가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51.7%를 얻어 48.3%의 지지를 받은 아흐메드 샤피크 후보를 3.4%p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선출됐다. 서방(西方) 전문가들은 이를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소위 ‘예외주의(Exceptionalism)’를 주장한다. 즉 아랍세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종교의 영향력이 크며 다수(多數) 종교인 이슬람이 민주적인 정치문화 형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이슬람 문화는 민주주의와 배치된다는 점 등이 그 논거다.
 
  실제 이집트에서는 정권 교체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반(反)세속주의 테러 증가, 이슬람 율법 ‘샤리아’ 적용 주장, 여성(女性)과 소수자 권리 위축 등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과연 ‘이집트 시민혁명’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을까.
 
  7월 23일 기자는 인천공항을 출발, 두바이를 경유해 다음 날 오전 11시(현지시각) 이집트 카이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3시간30분 동안의 비행 후 착륙을 위해 비행기가 고도(高度)를 낮추자 창밖으로 누런 사막이 드러났다. 생소한 풍광에 비로소 이역만리(異域萬里)에 왔음을 느꼈다. 잠시 후 시야에 카이로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집트의 국토 면적은 100만㎢로 한반도의 5배쯤 되지만, 대부분 사막이다. 거주가 가능한 땅은 나일강 양안(兩岸)과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전체 국토 면적의 5%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이집트의 도시들은 인구밀도가 높다. 특히 카이로는 세계 최고(最高)의 인구밀도를 보인다. 이집트 인구는 총 8200만명. 이 중 카이로 인구는 1800만명으로, 서울(1040만명)의 1.7배에 달하지만, 면적은 서울(605㎢)시 면적의 1/3에 불과한 214㎢다. 즉 카이로의 인구밀도는 8만4000명/㎢로 서울(1만7200명/㎢)의 5배에 달한다. 산술적으로 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면적이 12㎡(3.6평)다.
 
 
  이집트 자동차 시장 1위는 현대·기아차
 
이집트 혁명 당시 시위대는 집권당이던 국민민주당 당사를 불태웠다.
  카이로국제공항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그만큼 공항 출구의 택시기사들 간 손님 유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출구를 나서는 순간 일단의 이집트 사내들이 웃으면서 “니하오” “곤니찌와”라고 인사를 건넸다. 대꾸없이 지나치자 한 남자가 “꼬리?(코리아)”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눌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기자는 그의 차를 타고 시가지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 중 한국산 차량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집트 자동차 시장 1위 업체가 현대·기아차이기 때문이다. 2011년 기준 현대·기아차의 이집트 내 자동차 판매량은 5만5000대로 시장점유율 31%를 기록했다. 자신을 압델라(38)라고 소개한 택시기사도 “우리나라에서 당신네 나라 자동차가 인기가 좋다”며 “엘란트라(아반떼)는 훌륭한 차”라고 말했다.
 
  압델라 씨와 한국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니 도심이 가까워졌다. 시내로 진입할수록 카이로가 중동의 도시임을 실감케 하는, 황토색 빌딩들 사이로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악명높은 카이로의 교통체증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곳곳에서 경적이 울리고, 끼어들기 위해 이리저리 차 머리를 들이미는 통에 정체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호등도 없고, 이를 정리할 교통경찰도 없었다. 압델라 씨는 “지금은 라마단이라 이 시각에 퇴근하는 차량이 쏟아져나와 평소보다 차가 더 막힌다”고 설명했다.
 
  이슬람 단식 성월(聖月)인 라마단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욕구를 절제하는 기간이다. 밥도 못 먹고, 물도 마시지 못한다. 담배도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양치하면 수분을 섭취하게 되므로 이를 닦지 않는다. 침조차 삼키지 않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라마단이 시작되면 모든 것이 중단된다. 이 시기 무슬림은 동이 트기 전에 밥을 먹고 잤다가 일어나 오전 10시쯤에 출근해 오후 1시만 돼도 퇴근해 버린다. 일몰 후엔 가족과 이프타르(라마단에 먹는 저녁식사)를 먹고, 친척이나 친구를 만나는 등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에서 일을 보기 위해서는 라마단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올해는 7월 20일부터 시작해 8월 21일에 끝난다. 주이집트 대사관 관계자는 기자에게 “라마단에는 취재가 어려울 것”이라며 일정 조정을 권했지만, 원래 계획대로 출국했다. 최악의 시기를 골라서 출장을 간 셈이었다.
 
 
  “콥틱敎人은 앞으로 더 살기 어려워질 것 같아요”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 타흐리르 광장.
  시가지에 들어선 택시는 타흐리르(Tahrir·해방) 광장 옆을 지나쳤다. 이곳에서 ‘이집트 시민혁명’은 시작됐다. 2011년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이집트 시민들은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당시 다수의 시위 참가자는 휴대전화로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 장면을 찍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사진과 동영상이 SNS를 통해 급속히 전파됐고, 독재정권(政權)에 대한 분노를 확산시켰다. 이에 무바라크 정권은 2011년 1월 28일부터 2월 1일까지 5일간 이집트 전역(全域)의 인터넷과 이동통신을 전면 차단했지만, 이는 결정적 패착(敗着)이었다. 통신망이 끊기자 사람들은 시위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가했다. 타흐리르 광장엔 수십만 인파(人波)가 몰려들었다. 이날부터 시위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뚜렷한 지도자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된 시위는 마침내 30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후 타흐리르 광장은 ‘혁명의 성지(聖地)’가 됐다. 무르시 대통령은 공식 취임식을 하루 앞둔 6월 29일 이 광장에서 무슬림 지지자 수만 명에게 둘러싸여 상징적인 취임식을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모든 이집트인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기사 압델라 씨에게 ‘새 대통령’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작년 1월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이집트가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길 바랐어요. 또 자유(自由)를 원했죠. 그래서 새 대통령은 경험 많고, 지도력이 강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무르시 박사는 아니라고 봐요.”
 
  호텔에 도착해 현지인 무스타파(51) 씨에게 같은 질문을 건넸다. 그는 “무슬림형제단의 무르시가 대통령이 돼 불안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집트엔 이슬람교만 있는 게 아니라 콥틱교(이집트 기독교)도 있습니다. 신자(信者)가 1000만명이 넘어요. 저도 그중 한 명이죠. 혁명 때는 종교와 관계없이 ‘우리는 이집트인’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 말이 사라졌어요. 콥틱교인은 예전에도 차별을 많이 받았는데, 앞으로 더 살기 어려워질 것 같아요.”
 
  이집트는 다른 중동(中東) 국가보다 종교적 갈등이 덜하지만, 그래도 무슬림과 콥틱교인 간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한다. 가해자는 거의 무슬림이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무슬림형제단 출신 무르시 대통령은 대선 유세 기간에 “여성과 비(非)무슬림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종교 편향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에 무스타파 씨 같은 콥틱교인은 종교박해와 차별이 심해질 거라 우려하고 있다.
 
 
  “SNS는 이집트 혁명의 ‘숨은 功臣’”
 
‘4월 6일 청년운동단’ 마흐무드 아피피 대변인.
  지난해 반(反)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청년들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4월 6일 청년운동단’에 물었다. ‘4월 6일 청년운동단’은 2008년부터 ‘경찰의 날’인 1월 25일을 ‘깡패의 날’로 규정하고 반정부 시위를 진행했고, 작년에는 튀니지 재스민 혁명에 고무돼 시민들을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다. 다음은 마흐무드 아피피(26) ‘4월 6일 청년운동단’ 대변인과의 문답이다.
 
  ―현재 이집트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또 군부와 정치를 분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무르시 대통령과 집권당이 그 문제들을 풀 수 있겠습니까.
 
  “군인(軍人)들은 국정(國政)을 운영한 지 60년이 됐고, 지금도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이들을 정치와 분리하는 데 수년이 걸릴 것으로 봅니다. 다른 문제들은 현 정부가 제대로 된 정책만 시행한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이 조기에 구체적인 성과를 내놓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라고 해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를 몰아낼 제2, 제3의 반(反)정부 시위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무바라크 정권 30년 동안에는 왜 그런 대규모 시위를 한 적이 없습니까.
 
  “무바라크 정권 초기 10년은 외교정책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후 10년은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이었지만, 큰 저항은 없었어요. 언론을 통제했기 때문이죠. 지난 세월 언론은 무바라크의 앞잡이였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맞게 각색(脚色)된 ‘거짓’만을 사람들에게 알려줬습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반(反)정부 운동이 시작됐고, 독재에 대한 반감 등이 쌓이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겁니다.”
 
  아피피 대변인이 말한 것처럼 이집트 언론은 정부에 의해 통제됐다. 정권에 유해(有害)한 정보는 내보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의 SNS는 혁명이 성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위하려면 군중을 동원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써야 하지만, SNS의 등장은 그 비용을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컴퓨터, 스마트폰만 있다면 누구나 SNS를 이용할 수 있고, 신속한 정보공유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SNS는 매우 적은 비용으로 대규모 시위를 가능케 했으며, 독재정권과 싸우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
 
  ―지난해 시위 당시 SNS가 큰 역할을 했지요.
 
  “SNS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아는 문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 전국 각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의견을 교류하고, 세력을 규합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충분한 이해와 자신감이 없었다면 그렇게 수십만,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오지는 않았겠죠. 그런 점에서 SNS는 이집트 혁명의 ‘숨은 공신’입니다.”
 
  ―향후 반정부 시위를 한다면 그때도 SNS가 중요한 역할을 하겠네요.
 
  “확실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SNS는 이미 사람들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무슬림형제단은 革命이란 버스를 ‘날치기’한 사람들”
 
올해 1월 개원한 이집트 하원은 6월 대선 직전 헌법재판소의 ‘불법 원(院) 구성’ 판결에 따라 해산됐다.
  그러나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청년단체들의 대(對)국민 호소력은 예전과 같지 않다. 이들은 SNS라는 무기로 권력 견제와 비판은 할 수 있었지만,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시민의 요구를 정책으로 실현할 수도 없었다. 돈과 조직이 없어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발언권은 제도권 정당으로 넘어갔다. 무바라크 대통령 시절 이집트에선 정당(政黨)을 만들려면 당시 집권당이던 국민민주당(NDP)의 승인이 필요했으나,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정당을 만들 수 있게 됐다. 현재 활동하는 정당들 대부분이 2011년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정국 주도권은 이슬람주의 정당에 넘어갔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치러진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창당한 자유정의당은 하원 의석 총 498석(席) 중 235석을 차지했다. 자유정의당은 ‘온건 이슬람주의’를 표방한다. 121석의 제2당은 살라피스트(원리주의자)들이 모인 곳으로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자구 그대로 헌법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누르(광명)당이다.
 
  특히 무슬림형제단은 “혁명에 소극적으로 참여했거나, 방관(傍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난해 시위가 다양한 세속주의 세력이 운동의 주축(主軸)이 돼 그동안 정치적 논의를 지배했던 종교 담론이 아닌 사회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무슬림형제단은 “우리도 시위에 참여해 혁명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당시 이들 단체의 청년들이 개인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건 맞다. 하지만 그들이 시위에 참가하자고 건의를 했지만, 지도부는 사태 추이를 지켜봤다. 내부에서 시위 불참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탈당파도 나왔다. 그럼에도 계속 관망하던 지도부는 시위 양상이 심상치 않자 뒤늦게 합류했다. 그리고 총선에서 승리해 의회(議會)를 주도하게 됐다.
 
아흐메드 에즐랍 와프드당 부총재.
  이에 지난 총선에서 57석으로 원내 3당이 된 와프드(대표단)당의 아흐메드 에즐랍(80) 부총재는 “이슬람 정당들의 정치 선전에 이집트 국민들이 농락당했다”며 “기존 정권의 부정부패가 심해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이 종교를 기반으로 한 정당은 정치적으로 순수할 줄 알고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
 
  원내 4당인 이집트 민주당 후세인 고하르(47) 외무(外務)위원장은 “무슬림형제단은 혁명이란 버스를 ‘날치기’한 사람들”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독재정권 시절 억눌려 있던 가장 큰 종교조직이 시류(時流)에 편승(便乘)해 정권을 잡은 것이지, 이들과 혁명은 상관이 없습니다. 또 이들에게 현재 이집트가 안은 총체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국민들이 그들을 선택한 이유는 뭡니까.
 
  “그들은 자금이 풍부합니다.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은 수입의 10%를 회비로 냅니다. 아랍국가들이 지원해 주는 거액의 정치자금도 있고요. 이 돈으로 지난 세월 조직관리를 하면서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죠. 그리고 독재정권 시절, 정치단체는 활동이 금지됐을 때, 종교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軍部, “특정세력의 이집트 지배 용납 않겠다”며 무슬림형제단에 경고
 
후세인 고하르 이집트사회민주당 외무위원장.
  이슬람주의 정당들이 의회를 장악하자 군부는 향후 입법, 예산 편성 등에서 자신들의 권한이 줄어들 것을 걱정했다. 이때 나온 것이 이집트 헌법재판소의 ‘의회 해산 명령’이었다. 지난 6월 14일 이집트 헌재는 “전체 의석의 1/3은 무소속 후보를 위한 것인데, 정당들이 후보를 냈기 때문에 전체 의회 구성은 불법(不法)”이라며 의회를 해산시켰고, 더불어 제헌(制憲)위원회도 해소(解消)됐다.
 
  입법권은 군사최고회의로 넘어갔다. 그들은 대통령 권한 대폭 축소를 골자로 하는 임시헌법도 선포했다. 이에 따라 군부는 새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군통수권, 예산편성권 등을 갖게 됐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래 제헌위원회가 구성되고 3개월 내에 헌법 초안을 작성하면 이를 15일 내로 국민투표에 부쳐 채택 여부를 결정하고, 그 후 1개월 내로 총선을 실시하게 돼 있다.
 
  그러나 헌법을 만들기 위해 새로 구성된 100인 제헌위원회 인사를 군부가 직접 지명했기 때문에 향후 정치일정의 진행이 불투명하다. 헌법 초안을 만든다고 해도 군부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헌법 초안이 통과되면 좋은 것이고, 국민투표에서 부결된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다. 계속 군부의 권한을 유지하면서 정치일정을 지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르시는 7월 8일 “해산된 의회를 다시 소집해 입법권을 부여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총선을 치르겠다”며 의회 재소집 대통령령을 발동했지만, 헌법재판소의 무효 선언으로 무산됐다. 탄타위 국방장관 겸 군사최고회의 위원장은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에 “특정세력의 이집트 지배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경고했다.
 
  이에 대해 무르시 대통령은 8월 12일 탄타위를 국방장관과 군사최고회의 위원장직에서 해임하는 강수로 대응했다. 군사최고회의가 만든 임시헌법도 취소했다. 그는 이날 “탄타위 국방장관 겸 군사최고회의 위원장과 사미 아난 육군참모총장을 해임하고 대통령 고문으로 임명한다”면서 “군부가 구성한 100인 제헌위원회가 기간 내에 헌법 초안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에는 대통령이 임명한 새로운 위원회가 초안을 만들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인사는 특정인이나 특정기관을 겨냥한 것이 아니며 자유를 축소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나의 목적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저녁 타흐리르 광장엔 시민 수천 명이 모여 무르시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는 집회를 가졌다. 군부는 아직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정면충돌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衆論)이다.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은 외부의 우려와 달리 호전(好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자유정의당)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쌓여 있다. 먼저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르시 대통령은 취임 직후 ▲치안 ▲교통 ▲연료 ▲식량 ▲보건 등의 분야를 개선하기 위한 ‘100일 계획’을 내놓았다. 대선에서 이집트 국민의 절반은 그를 찍지 않았다. 군부와는 아직 갈등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그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댈 곳은 국민밖에 없다. 결국 ‘100일 계획’은 국민들이 불편해하는 5대 부문에서 조기(早期)에 구체적인 성과를 보이면 지지율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정책이다. 하지만 정권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실업난(失業亂), 빈곤(貧困) 등의 경제 문제다.
 
7월 9일 카이로 군사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앞줄 우측 세 번째)과 탄타위 군사최고회의 위원장(무르시 좌측). 군부는 대통령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임시헌법을 선포했다. 이에 대해 무르시는 탄타위를 해임하고, 임시헌법을 취소했다.
 
  이집트 혁명은 貧困, 失業亂이 가장 큰 원인
 
이집트인의 주식인 ‘에이시’ 가격 폭등은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지난해 1월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빵’, ‘자유’, ‘인권(人權)’을 외쳤다. 당시 구호의 가장 앞에 등장하는 것이 ‘빵’이란 점은 이집트 혁명이 일어난 원인을 살피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는 시위대가 독재정권 퇴진보다 경제난 해소에 우선순위를 뒀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집트 시민혁명을 주도한 ‘4월 6일 청년운동단’은 최근 시위 구호로 ‘가난한 사람이 먼저(The Poor First)’를 내세우기도 했다.
 
  현재 이집트는 인구의 절반이 25세 이하 청년층이지만, 이들이 힘을 쏟을 일자리는 많지 않다. 2011년 2월 무바라크 퇴진 이후 발표된 이집트 통상산업부 자료에 따르면 25세 이하 청년층의 실업률은 50%였다. 취업을 해도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이집트 월 최저임금은 1984년 35이집트 파운드(당시 6.5달러)로 결정된 이후 인상되지 않았다. 2010년 11월에 겨우 400이집트 파운드(66달러)로 인상했다. 그러나 1년 동안의 최저임금은 1인당 국민소득(2011년 2800달러)의 28%에 불과했다. 이는 물가인상률이 연평균 10%를 넘는 상황을 감안하면 국민의 기대수준에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청년층이 장기집권을 하면서도 호구지책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하는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감정이 좋았을 리 없다. 이런 이유로 청년들이 분노를 표출하며 시위를 주도한 것이다.
 
  밀 가격이 폭등한 것도 반정부 시위의 주요 원인이다. 2008년부터 국제 곡물(穀物) 가격은 폭등했다. 미국의 바이오 에너지 정책에 따라 밀과 옥수수 수요가 증가했고,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안전한 현물 투자 종목으로 꼽히는 곡물에 투기 자본이 몰렸기 때문이다. 2010년에는 세계 주요 밀 수출국 러시아에 이상기온이 발생했다. 가뭄과 산불이 계속돼 밀 수확량이 급감한 러시아는 같은 해 7월 밀 수출금지 조치를 취했다. 이후 국제시장에서 밀 가격은 60% 상승했다. 이는 연간 700만t의 밀을 해외에서 조달하는 세계 최대 밀 수입국 이집트에 직격타를 날렸다.
 
  이집트인들의 주식은 화덕에 구운 통밀 반죽이다. 이 빵의 이름은 아랍어로 ‘생명’을 뜻하는 에이시(Aysh)다. 밀 가격 상승은 이집트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그때마다 폭동이 발생했다. 1977년 이집트에서는 에이시에 대한 국가 보조금이 중단되자 수십만 명이 폭동을 일으켜 800여 명이 사망했고, 2007년과 2008년에도 에이시 공급 차질로 인한 소요가 있었다.
 
  현재 이집트는 전체 인구의 40%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절대빈곤층이다. 원래 이집트는 에이시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해 왔지만, 2010년 에이시 가격 상승분을 소비자가 부담하게 했다. 2011년 1월 당시 3000만명 이상의 절대빈곤층은 60% 이상 폭등한 에이시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들은 살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왔다.
 
 
  “한국에 이집트는 중요한 나라”
 
김영소 주이집트 대사.
  그러나 혁명 이후 경제상황은 더 나빠졌다. 2012년 5월 기준 물가상승률은 약 10%다. 치안(治安) 부재로 지난해 관광수입도 40% 감소했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2007년 대비 1/12 수준으로 떨어졌고, 외환보유고도 작년 2월 298억 달러에서 10개월 만에 180억 달러로 줄었다. 이집트의 주요 수출시장인 유럽이 경제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집트 파운드의 가치도 하락하고 있으며, 통화가치 폭락은 외환보유고를 더 빠른 속도로 고갈시킬 것이다. 또 통화가치 하락으로 환율이 상승하게 돼,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리비아에서 일하던 이집트 노동자 약 100만명이 귀환하면서 실업률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리비아 혁명과 내전(內戰)으로 외화(外貨) 수입의 원천 중 하나인 국내 송금이 크게 줄었다. 국민들이 호응할 수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 정권 퇴진운동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결국 혁명을 진행하기 위해 선결(先決)해야 할 과제는 경제 건설이란 얘기다.
 
  김영소(金榮昭·58) 주(駐)이집트 대사(大使)도 “무슬림형제단이 경제발전을 시키지 않으면 집권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생존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며 “최근 그쪽으로부터 한국의 성공사례를 주제로 세미나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대사에 따르면 올 연말(年末)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이집트로 와서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다음은 김 대사와의 문답이다.
 
  ―경제발전과 국가건설의 성공사례로 우리를 본보기로 생각한다는 거군요.
 
  “우리를 특정한 건 아닙니다. 각국의 분야별 성공사례를 연구해 적용하겠다는 거죠.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반부패, 스페인의 관광, 터키의 정치체제 등이 있는데, 우리는 압축성장과 교육 분야가 해당됩니다.”
 
  ―한국 교육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뭡니까.
 
  “여기는 문맹(文盲)률이 30%가 넘습니다. 사람들이 대선 때 후보를 구별할 수 있게 상징물을 표기할 정도인데,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교육의 우수성을 자주 얘기하고, 카이로대학에 방문했을 때도 우리 교육을 칭찬하니까 관심을 갖게 된 겁니다. 최근 우리에게 직업훈련원과 대학을 설립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이집트 경제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집트는 1년 무역액이 800억 달러인데, 무역적자가 250억 달러예요. 이 적자를 메우는 세 가지가 관광, 해외송금, 수에즈운하 통관료입니다. 관광의 경우 연간 수입이 100억 달러인데, 여기에 직간접으로 종사하는 사람이 500만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해외에 이집트인들이 나가 본국으로 보내는 돈이 100억 달러, 통관료가 50억 달러입니다. 이걸로 근근이 수지를 맞추는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이집트는 어떤 의미가 있는 나라입니까.
 
  “이집트의 국제적 위상을 고려할 때 다자 외교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남북한 대치 상황이고, 북핵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잖아요.”
 
 
  “이집트 대통령은 무르시 한 명뿐”
 
각 후보 옆에 상징물이 그려진 이집트 대선 투표용지. 이집트의 문맹률은 30%가 넘는다.
  ―이집트의 국제적 위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집트는 아랍 지역 20여 개 국가 중 최강국입니다. 아랍연맹 본부가 카이로에 있고, 사무총장은 이집트인이 맡는 게 원칙입니다. 또 아프리카 50여 개국 중 남아공, 나이지리아와 함께 3대 강국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나라가 70여 개국으로 UN 회원국의 1/3이 됩니다. 비동맹회의 창설국으로 아시아, 중남미 국가와도 교류가 깊고요.”
 
  ―이집트가 바라보는 한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일반인들은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통해 많이 알고 있고, 식자층은 ‘세계 7위 수출국’, ‘경제 강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외무성에서도 한국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하는데, 주로 경제성장과 관련된 거죠.”
 
  모하메드 압델라티프 자유정의당 카이로시당 위원장은 “경제 부문에서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책들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집트 국민들이 우리를 선택한 마음을 알기 때문에 세계 70여 개국의 성공사례를 이집트에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있고요, 적합하다고 결론이 나면 이를 지역별 특성에 맞춰 육성하려고 합니다.”
 
모하메드 압델라티프 자유정의당 카이로시당 위원장.
  ―경제건설을 추진할 정도의 리더십과 권한이 무르시 대통령에게 있습니까.
 
  “무르시 대통령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4000여 명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인물입니다. 엘바라데이나 다른 후보들보다 지명도가 약간 떨어졌을 뿐 리더십이나 자격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된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슬림형제단 내에서 무르시 대통령의 서열은 어떻게 됩니까.
 
  “무르시 대통령은 무슬림형제단 지도부에 있었고, 우리 당이 창당될 때는 총재를 맡은 사람입니다. 자유정의당은 무슬림형제단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현재 긴밀하게 연결된 건 맞지만, 정당과 사회단체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또 나중에는 자유정의당이 무슬림형제단의 역할을 뛰어넘을 겁니다.”
 
  ―무르시 대통령과 탄타위 국방장관 중 군통수권자는 누구입니까.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군통수권자는 대통령이며, 대통령은 무르시 한 명뿐입니다.”
 
  ―향후 국가건설 과정에서 한국에 바라는 점이 있습니까.
 
  “한국은 교육과 경제개발에서 성공한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한국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이집트는 항상 열려 있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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