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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일본의 ‘左’와 ‘右’

‘右’와 ‘右翼’, ‘左’와 ‘左翼’은 다르다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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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右翼은 ‘右’ 이념을 앞세운 조폭집단,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는 ‘右翼’이 아니라 ‘右’
⊙ 천황, 헌법, 자위대, 美·中·韓에 대한 인식이 좌우를 가르는 잣대
⊙ 일본 정계의 核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 역사교육 강화 추진하면서 日帝침략 美化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추천

劉敏鎬
⊙ 51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現 워싱턴 〈Pacific,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1970년 11월 25일 일본 방위청 본관 발코니에서 천황 중심의 강력한 일본건설을 호소하는 연설을 한 후 할복자결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右’의 상징이다.
  지난 8월 11일 새벽, 일본 히로시마 주재 한국총영사관의 출입문이 파손당했다. 벽돌로 영사관 유리문을 깬 일본인 유아사 마사카즈(44)는 경찰에 자진 출두해서 “나는 우익(右翼) 단체 회원”이라면서 “한국 대통령이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에 상륙한 데에 화가 났다”고 주장했다.
 
  종군위안부·역사교과서 등 과거사문제나 독도문제 등이 불거질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본의 우익. 그들은 과연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지난 4월 16일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 도쿄도(東京都) 지사는 미국 워싱턴 헤리티지 재단 주최 행사에 참석, 연설을 했다.
 
  일본 정치무대에서 이시하라의 무게를 증명하듯 신문·방송 기자들이 청중보다 더 많은 듯 느껴졌다. 80 노인인 이시하라는 미리 준비한 연설문 없이, 곧은 자세로 얘기를 시작했다. 서두는 ‘의외로’ 중국에서부터 시작됐다.
 
  “공산당 일당독재국가를 찬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지나(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의 말 가운데 한마디는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시하라는 중국을 차이나가 아닌, 지나(支那:シナ)로 부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나는 중국인이 들으면 100% 굴욕감을 느끼는 호칭이다. 19세기 말 일본이 식민지 상태의 중국을 하대할 때 부르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청말(淸末) 이후 60여 년간 계속된 암울한 중국의 이미지가 ‘지나’라는 말 속에 녹아 있다.
 
 
  마오쩌둥을 인용한 이시하라
 
  이어 이시하라가 인용한 마오쩌둥의 말은 중국공산당의 근본철학이기도 한 ‘주요모순(主要矛盾)’에 관한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순이 아니라, 그 뒤를 에워싼 보다 근본적인 모순이 주요모순이다. 눈앞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모순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시하라가 마오쩌둥의 말을 인용한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연설이 계속되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위대 파견문제, 동맹관계, 핵문제 등 현재 일본이 갖고 있는 각각의 모순의 근본적인 출발점은 바로 일본헌법에 있다.”
 
  비핵(非核) 3원칙과 국군을 부정하는 일본 평화헌법을 바꾸기 위한 논거로 이시하라는 마오쩌둥을 끌어들인 것이다.
 
  “일본주권하의 섬을 외국이 공격할 경우, 동맹관계인 미국은 곧바로 일본을 지원하도록 명문화돼 있다. 그러나 일본자위대는 외국군에 대해 제한적 수준에서만 대응할 수 있다. 무력(武力)행사를 영원히 포기한다고 규정한 헌법 9조 때문이다. 자기 나라가 공격을 당해도 맞서 싸우지 못하고 동맹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시하라가 외국군의 일본 공격의 예(例)로 내세운 것은 센카쿠(尖閣) 열도였다. 센카쿠 열도는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시하라는 일본정부가 센카쿠 열도 문제를 소홀히 한다고 비난하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잠시 숨을 죽였다가 한마디 던졌다.
 
  “도쿄도 이름으로 센카쿠 열도 내 섬을 구입하겠다. 현재 구매를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이다.”
 
  이것이 다음 날 일본, 중국, 한국 그리고 워싱턴 주요 신문에 실린 ‘센카쿠 열도 구입’ 발언이다. 이시하라가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센카쿠 열도 문제를 이슈화해서 자기가 주도하고 있는 신당(新黨) 창당의 대의명분을 구축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센카쿠 열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일본정부를 적(敵)으로 삼으면서 국민적 지지를 얻어나가겠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가 야스쿠니신사(靖?神社) 참배를 이슈화해서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결집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반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고이즈미 지지자들이 하나로 결집된다. 한국·중국의 반대시위가 격해질수록 보수주의자들의 힘이 통일될 수 있다.
 
 
  이시하라, ‘헌법포기’ 주장
 
지난 4월 헤리티지 재단에서 연설하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
  이시하라의 기대처럼 이후 센카쿠 열도 문제는 새로운 정치적 어젠다로 부각됐다. 도쿄도민들이 자진해서 열도 구입비를 모금하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중국에 대한 강경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곧 소비세(한국의 부가가치세) 인상 문제와 관련해 총선이 실시될 경우, 센카쿠 열도 문제도 선거 이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영토 문제는 시비의 대상이 아니다. 국민들이 외교라는 평화적 해법에 매달리는 정부를 불신하고 있는 상태에서, 센카쿠 열도 구입에 반대한다는 것은 ‘약한 일본과 국익(國益)을 무시한 친중(親中)’이란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시하라가 내세운 센카쿠 열도 구입 문제는 일본 보수주의자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시하라의 연설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센카쿠 열도 구입 문제보다는 헌법 9조에 대한 입장이다. 이시하라는 “헌법 9조가 21세기 상황에 대처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조항”이라면서, “다른 조항과 더불어 헌법 전체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헌법포기’를 통해 일본헌법이 갖고 있는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주요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헌법을 포기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시하라가 말한 ‘헌법포기’ 발언은 센카쿠 열도 구입 문제에 묻혀 뉴스가 되지 못했다. 일본 기자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음 날 신문·방송에서 ‘헌법포기’ 발언에 대한 분석이 없었다는 것은 놀랍게 느껴졌다. ‘헌법개정’이 아니라 ‘헌법포기’라는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종래 헌법과 관련된 일본 보수주의자들 주장의 핵심은 ‘헌법개정’이다. 국군을 부정하는 헌법 제9조를 바꾸자는 것이 우(右)의 주장이다.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헌법을 지켜나가야만 한다는 것이 좌(左)의 생각이다.
 
  좌와 우의 주장을 절충한 주장이 이른바 ‘광의해석(廣義解釋)’으로 불리는, 국회의 유권해석(有權解釋)을 통해 헌법 제9조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것이다. 이는 헌법을 조금씩 광의(廣義)로 해석하면서 자위대의 군사력 사용범위와 작전반경을 조금씩 넓혀가는 방식이다. 자위대의 작전반경을 페르시아만으로 확대한다, 동맹국인 미국에 대한 항공 유류(油類)지원을 가능하게 한다, 북한이 무너질 경우 자위대 구출단을 한국에 보낸다…. 전부 9조의 광의해석을 통한 결과물이다. 헌법개정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도 느린 속도지만, 좌의 입장에서는 너무 앞으로 나간다고 반발한다.
 
 
  左右를 판단하는 4가지 기준
 
  이시하라가 말하는 ‘헌법포기’는 기존의 헌법을 전부 없던 것으로 하고 새로 헌법을 만들자는 의미이다. 기존의 우보다 한층 더 오른쪽으로 날아간 ‘울트라 우’인 셈이다. 전략전술적으로 볼 때, 센카쿠 열도 구입 발언은 이러한 발상을 일본에 알리기 위한 ‘미끼’라고 볼 수 있다. ‘헌법개정’에 머물러왔던 기존 ‘우’의 발상을 아예 ‘헌법포기’로 몰아가는 신호탄인 셈이다.
 
  이시하라의 워싱턴 연설 내용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는 좌우 논쟁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그 배경과 역사적 상황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흔히들 한국에서는 이시하라를 일본 ‘우익(右翼)’의 대명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그렇게 말하면 일본인 대부분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일본적 관점에서 이시하라는 ‘우’이기는 하지만, ‘우익’은 아니다.
 
  일본인에게 ‘우’와 ‘우익’은 다르다. ‘우익’은 ‘우를 명분으로 하면서 자신들의 비즈니스를 벌이는 직업인’을 말한다. 그럴듯한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우지만, 대부분 폭력단이나 검은 비즈니스와 관련이 있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조폭(組暴) 집단’이 ‘우익’이다. 일본인들은 ‘우익’을 ‘우익단체(右翼團體)’ 또는 ‘우익세력’으로 받아들인다. 줄여서 ‘우익’이라고는 하지만, ‘우익단체’가 정확한 표현이다.
 
  이들은 도쿄의 러시아대사관이나 중국대사관 앞에서 대형 버스를 앞세우고 대형 마이크로 일본제국 시절 군가(軍歌)를 부르는 집단들이다. 이들 중 일부가 정치권과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들을 기본적으로 야쿠자(ヤクザ)나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시하라는 그런 의미에서 ‘우익’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로서의 ‘우’에 해당된다.
 
  일본에서 좌우(左右)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이념적 기준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천황(天皇)의 존재 인정 여부
  2. 헌법고수인가, 헌법개정인가
  3. 자위대에 대한 인식
  4. 친중인가 친미(親美)·친한(親韓)인가
 
2002년 2월 환송을 받으며 이라크로 파병되는 일본 육상자위대 시설대(공병). 일본은 헌법해석을 통해 자위대의 활동범위를 확대해 왔다.
 
  反천황주의자 간 나오토
 
  천황의 존재를 부인하면 ‘좌’고, 인정하면 ‘우’이다. ‘좌’의 대명사로 총리에까지 오른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는 평소 천황을 부정하는 정치가로 유명하다. 일례로 그는 2011년 7월 16일 일본올림픽위원회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 천황부부와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하루 전에 갑자기 약속을 취소했다. 천황에 대한 모독이라고 ‘우’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한 것은 물론이다. 간 나오토는 2009년 11월 천황 즉위 20주년 기념식에서는 잠을 자기도 했다. ‘좌’는 천황에 대한 정부의 예산지원과 면세(免稅)를 폐기하는 것은 물론, 아예 천황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법고수와 개정도 좌우를 확실히 가르는 단서이다. ‘좌’는 평화헌법이 있었기에 일본이 번영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헌법을 바꿀 경우 또다시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계한다. ‘우’는 중국의 부상(浮上), 미국의 쇠퇴, 북한의 종잡을 수 없는 위기상황 등을 내세우며, 헌법 제9조를 고쳐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위대에 관한 인식은 헌법고수와 개정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 ‘좌’는 현재의 자위대만으로 일본의 안전보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헌법개정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우’는 북한의 핵개발 등을 이유로 자위대를 국군으로 바꾸고 일본의 재(再)무장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핵개발은 재무장의 핵심 중의 하나이다.
 
  미국·중국·한국에 대한 입장은 일본 근대화 과정에 대한 역사관과 연결된다. 일본이 과거 전쟁과 식민통치를 통해 중국과 한국에 많은 피해를 줬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우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 ‘좌’이다. 1960년대 중반, 마오쩌둥이 문화혁명을 통해 중국 전역을 엉망으로 만들 때 ‘좌’는 중국 공산당에 박수를 보냈다.
 
 
  親中·反韓·反美
 
  ‘좌’의 선봉에 선 《아사히(朝日)신문》은 마오쩌둥은 물론 북한 김일성(金日成)도 ‘아시아의 해방자’라는 식으로 미화(美化)했었다.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와 일본인 처의 참담한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김일성을 찬미했다. 과거 역사에 대한 사죄라는 차원에서 중국과 북한이 무슨 짓을 해도 웃으면서 지지를 표시한 것이 일본의 ‘좌’이다. 반면 한국의 박정희(朴正熙)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들이대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0년대에 좌경(左傾)한 한국 지식인 중 상당수는 일본 ‘좌’의 친중관(親中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중국예찬에 동참했다. 일본 ‘좌’의 역사관에 기초한 박정희 비판과 김일성 찬미도 한국 지식인에게는 ‘진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현재도 한국 지식인 사회에 남아 있는 친중적 인식은 한 세대 전 일본 ‘좌’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유산(遺産)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좌’가 박정희를 비난한 것은 김일성을 두둔하다 보니 나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미국을 보는 ‘좌’의 시각과 연결해서도 볼 수 있다. ‘좌’는 ‘무조건’ 군사동맹에 반대한다. 군사동맹만이 아니라, 무력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좌의 유토피아이자 이데올로기이다. 이들은 일반시민을 몰살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를 맹비난한다. 미국 주도하의 군사동맹에 결사반대한다.
 
  1959년과 1970년 두 번에 걸쳐 일본 전역을 뒤흔들어 놓은 안보투쟁은 미일동맹에 반대하는 반미(反美)운동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징검다리 삼아 구소련·중국·북한과 전쟁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안보투쟁은 ‘친중=반미’라는 도식으로 나아간다.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한국의 박정희도 반미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미국 주도의 군사팽창을 돕는 ‘괴뢰(傀儡)’가 박정희라는 것이다. 평화를 전면에 내세우는 과정에서 반미·반한(反韓)이 나타난 것이다.
 
 
  右, 反美도 親美도 아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해군 군복을 입은 일본 우익단체 회원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旭日旗)를 앞세우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우’의 경우 미국을 보는 시각이 다소 복잡하다.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가 일본의 패전(敗戰)을 초래한 세력이 그들이다. 패전 후 미 점령군에 의해 제일 먼저 숙청된 것이 ‘우’이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함께 ‘우’는 면죄부(免罪符)를 받았다.
 
  원래 미국에 대한 반감이 그 누구보다도 강한 세력이었지만, 이후 ‘우’는 반미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들은 이념을 앞세우기보다, 미국이 갖고 있는 파워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 강하다. 이들은 패전의 원한도 한순간에 잊고 미국과 나눌 수 있는 공동이익에 주목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우’가 친미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전략적 차원에서 미국과의 협조를 강조할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이다. 흔히 이시하라를 반미주의자라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이시하라는 친미주의자도, 반미주의자도 아니다. 미일 양국의 공동이익을 전제로 하되, 할 말은 하겠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에 미국과 일본이 공동대처하자는 것이 이시하라의 생각이다.
 
  ‘우’는 태평양전쟁 이전에 이뤄진 아시아 침략사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에 대해서도 “미국이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석유라인을 끊었기 때문에 일본은 할 수 없이 전쟁에 나섰다”고 주장한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생존권 차원에서 이뤄진 전쟁으로, 처음부터 미국을 적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인식이 이런 정도니 한국을 식민통치한 것이나 아시아 침략을 대충 넘어가거나 미화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이시하라에게서 보듯, 반중(反中)은 일본 ‘우’의 기본이다. ‘우’는 한국에 대한 입장도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반한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다. 한국이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점도 일본 ‘우’가 과거 반한적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우’와 박정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생(共生)관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우는 반중과 미일 군사동맹을 위해, 박정희는 일본의 돈과 기술지원이 필요했다.
 
  일본에서 ‘좌’의 중심에 선 것이 이른바 단카이(團塊)세대이다. ‘불쑥 튀어나온 집단’이란 의미의 단카이는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를 말한다.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946~1954년 출생한 세대를 뜻한다. 한때 일본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했던 이들은 최근 정년(停年)을 맞아 현장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단카이세대와 左翼
 
1969년 도쿄대 야스다강당을 점거한 극좌 전공투 학생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좌익은 극렬화되면서 고립되었다가 소멸하기 시작했다.
  전쟁 직후 태어난 이들은 미 점령군 통치하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배웠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들과 총을 겨누고 싸웠고, 조국을 점령한 미국에 대해 반감도 갖게 됐다. 평화주의와 반군국주의를 내세운 반미주의가 단카이세대의 초상이다. 이들은 철이 들면서 핵과 군사동맹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이자 천황제를 반대하는 민권운동가로 나서면서 ‘안보투쟁’의 핵심이 됐다.
 
  1950년대 말 ‘좌’의 극단에 선 ‘좌익(左翼)’이 나타났다. ‘우’와 ‘우익’이 다르듯, ‘좌’와 ‘좌익’도 구별돼야 한다. 정치지향적인 임의단체를 결성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이념집단이 ‘좌익’이다.
 
  ‘우익’이 조폭단체 성향이 강한 데 비해, ‘좌익’은 순수한 정치운동가들로 채워져 있다. 전후(戰後) 상황을 보면, 1960년대 안보투쟁 당시 학생운동을 이끈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全學連)이 ‘좌익’의 대표주자이다. 이들은 공산당·사회당의 지시하에 움직였지만, 일찍부터 스탈린 독재에도 반대하면서 소련식 공산주의와 무관한 독자적인 정치단체로 발전했다.
 
  전학련은 미일동맹이 맺어지자 한순간에 사라졌다. 투쟁 실패에 대한 책임문제를 둘러싼 내부분규 때문이었다.
 
  이후 중핵파(中核派)로 알려진 ‘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革共同)’가 나타났다. 이들은 ‘신(新)좌익’ 혹은 ‘극좌(極左)’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구호가 아니라 폭력을 통해 자신의 이념을 행동으로 옮겼다. 나리타(成田)공항 공격과 천황 관련 시설물에 대한 테러를 벌였다. 1969년 도쿄(東京)대학 야스다(安田)강당 점거투쟁에서 보인 학생들의 폭력시위 배후에도 이들과 관계있는 신좌익단체인 전학공투회의(全共鬪)가 있었다.
 
 
  일본 極左派의 최후
 
  일본의 신좌익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직은 적군파(赤軍派)이다. 1972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공항 난사(亂射)사건의 장본인이다. 교토대학 학생을 포함한 적군파 소속 일본인 3명이 공항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26명이 즉사하고 7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명분은 아랍제국의 반이스라엘, 반미운동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텔아비브 사건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신좌익운동을 붕괴시키는 계기가 됐다. 아직 숨어 있는 단체는 있을 수 있지만, ‘좌익’을 표방하는 정치단체는 현재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일본의 좌익은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 속으로 스며들어가 지금은 정치권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 좌익이나 신좌익은 거의 없고, 평화주의자를 의미하는 ‘좌’만이 그럭저럭 존재하고 있다. ‘좌’는 요즘 한국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격차사회(格差社會)’와 같은 문제에 주력한다. 작년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에는 원자력발전소 폐쇄 문제가 ‘좌’의 중심 이슈가 되고 있다.
 
  신(新)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street)’ 운동은 일본에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SNS를 통해 도쿄판 ‘아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을 벌였을 때 현장에 나온 참가자는 100명도 안됐다고 한다. 정치 무관심이 극에 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것을 일본 스타일로 바꿔서 이념화·행동화하는 것이 일본인이다. ‘아큐파이 월스트리트’ 일본지부나, 코민테른 도쿄지부 같은 것은 한순간 반짝할 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일본에서 ‘좌’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이다.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단카이세대를 통해 성장하다가, 마침내 간 나오토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같은 반미적인 총리도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60대에 접어드는 단카이세대가 점차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일본 내 ‘좌’의 원동력도 점점 약화되고 있다.
 
  반미성향이 강한 간 나오토가 3·11 동일본대지진 문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것도 좌의 입장이 약화된 이유 중 하나이다. 이를 보면서 일본인들은 ‘슬로건만 대단하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후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생활대국(生活大國)’이라는 이슈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외교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좌’의 논리는 실종되고 있다. ‘좌’의 침몰은 ‘우’의 발흥을 의미한다. 수퍼파워로 떠오른 중국의 존재는 일본의 ‘우’를 일깨우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원인이야 어찌됐든,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는 결코 원만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국제상황은 중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중국은 경제대국·군사대국으로 우뚝 선 것은 물론 장차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소식을 매일 듣는 일본인의 심정은 어떨까? 자원이나 영토 문제를 통해 나타난 중국의 오만함을 보면서 일본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단카이가 사라지면서 ‘좌’의 그림자도 사라지고 있는 상태에서 미래를 대하는 일본의 선택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右’의 상징 미시마 유키오
 
  기본적으로 일본 근현대사는 ‘우’가 주도하는 드라마이다. 유럽에서 200년이 걸렸던 산업화 과정을 불과 한 세대만에 달성한 힘의 원동력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하에 군사력을 강화해서 세력을 확산하는 정치노선이다. 일본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조직력이 강한 나라이다. 불평불만 없이 주어진 명령대로 나아간다. 이유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똑같이 고생하고, 이익도 똑같이 배분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99% 서로가 믿고 움직이는 곳이 일본이다. 사장이든 직원이든 큰 차이가 없다. 가장 사회주의적이면서도 자본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곳이 일본이다. 중국은 그 반대이다. 가장 자본주의적이면서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천황은 신뢰로 뭉쳐진 조직화된 일본의 최정점(最頂點)에 서 있다.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전략전술이 잘못된 것일 뿐 근본적으로 일본의 역사는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패전 후 불과 30여 년 만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승전국(勝戰國)인 미국을 다시 압박한다. 버블경제 당시의 일본인은 ‘역시 일본은 옳았다’는 세계관으로 전 세계를 상대했다.
 
  단카이세대가 민주주의와 평화를 내세우지만, 일본인 대부분은 메이지유신 때의 영광과 향수를 잊지 못한다. 많은 일본 TV가 대하(大河)드라마라는 형식으로, 메이지유신 당시의 이야기를 영웅서사시로 만들어 방영한다. 기본적으로 ‘우’가 지배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의 ‘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소설 《금각사(金閣寺)》를 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이다. 미시마는 이시하라보다 일곱 살 위로 서로 잘 알고 있는 인생선배이자 친구이다. 그는 준수한 용모와 세련된 매너로 베스트셀러 작가인 동시에 청춘의 상징으로 통하던 1960년대의 영웅이다.
 
  미시마는 1970년 11월 25일, 45세의 나이로 도쿄 신주쿠(新宿)에 있는 방위청 본관 2층 발코니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일본을 주창하는 연설을 한 뒤 할복자결했다. 그는 할복한 뒤 자신을 따르던 민병조직의 부하들에게 목을 치도록 명령했다.
 
  소설가로서만이 아니라 보디빌더, 검도선수, 영화감독, 배우,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한 미시마 유키오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일본인의 머릿속에 살아 있다. 그는 할복으로 목숨을 끊은 후 ‘우’의 상징으로서만이 아니라, 할복을 통해 죽음의 미학(美學)을 실천한 심미주의자(審美主義者)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부 20여 권이 넘는 미시마의 소설과 글은 일본 내에서만 2500만 부(2011년 말 기준)가 팔렸다고 한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던 미시마는 생전에 이미 영역(英譯)된 글을 통해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가로 알려졌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외국어로 번역돼 있기 때문에 일본을 공부하는 외국인이라면 반드시 만나는 인물이기도 하다.
 
  미시마 유키오는 노벨문학상 수상이 유력했지만, 일본인 최초의 노벨문학상은 1968년 《설국(雪國)》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게 돌아갔다. 일본인들은 당시 ‘일본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을 때, 당연히 미시마가 받은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정치활동에 나선 것이 미시마가 노벨문학상에서 멀어진 이유였다.
 
 
  소설 《우국》 속에 나타난 천황중심주의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동명(同名) 소설을 영화화한 《우국》.
  미시마의 정치관은 이시하라와 거의 비슷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표현까지 똑같다. 헌법 문제의 경우, 미시마는 “전승국(미국)이 만든 헌법”이란 점에서 ‘헌법포기’를 주장했다. 지난 4월 헤리티지 재단에서 이시하라가 ‘헌법포기’를 주장한 것은 미시마의 생각에서 따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시마는 국군 창설과 군사력 강화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그는 방위청 본관에서 할복하기 전 군사력 강화에 관한 연설을 남겼다. 이 연설에서 그는 천황을 ‘나라의 근본’인 ‘국체(國體)’로 해석하면서, 천황이 일본 정치·역사·문화의 중심이자 근본이라고 역설했다. 반미는 아니지만, 미일동맹을 탈피해서 독립된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의 화신(化身)’인 미시마의 성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소설이 《우국(憂國)》(1961년)이다. 미시마가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라며 독자들에게 추천하기도 했던 이 소설은 일본 우익이 가장 즐겨 찾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시마는 직접 감독으로 나서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우국》은 1936년 우익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인 2·26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일단의 위관급 청년장교들은 ‘쇼와유신(昭和維新)’을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중신(重臣)들을 살상했지만,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박정희의 5·16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 《우국》의 주인공 다케야마(武山) 중위는 2·26쿠데타에 가담한 청년장교들과 막역한 친구 사이로 그들과 뜻을 같이해 왔지만 거사 과정에서 신혼(新婚)이라는 이유로 배제된다. 2·26사건이 터진 후 진압군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지 않을까 고심하던 다케야마는 결국 아내와 함께 할복자결하고 만다. 미시마는 다케야마 부부가 죽음을 결심하고 마지막 정사(情事)를 나눈 후 차례로 목숨을 끊는 과정을 아주 세밀하면서도 탐미적으로 그렸다.
 
 
  하시모토의 역사인식
 
  이 소설을 쓴 지 9년 후 미시마도 다케야마 중위처럼 할복으로 목숨을 끊었다. 미시마의 생각은 마지막 순간에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고 죽어간 2·26사건 주모자들의 생각과 닿아 있는 것이다.
 
  지금 일본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은 하시모토 도오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다. 오사카 시정(市政)을 개혁하고 유신정치숙을 만들어 총선에 나설 2000여 명의 후보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그는 일본정치를 근본부터 뒤집어놓을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하시모토는 얼마 전 ‘좌’가 독점하던 원자력발전소 가동 반대 문제를 자신의 이슈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무조건 반대하는 대신 발전소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의 동의를 바탕으로 가동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좌우를 모두 만족시켜 주는 생각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국난(國難) 수준에 빠진 일본인에게 마치 ‘메시아’처럼 떠오르고 있는 하시모토에 대한 관심은 워싱턴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가능한 한 빨리 하시모토를 워싱턴에 불러 그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이미 자신의 이념적 좌표를 ‘우’로 잡고 있다. 역사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하시모토의 생각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지난 5월 10일 하시모토는 “중국에 비해 일본학생들이 근현대사를 잘 모르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자신의 기반인 유신회 의원들에게 역사 공부를 위한 시설을 짓도록 지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하시모토가 근현대사 공부를 위한 교육단체로 추천한 단체이다. 바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회(新しい歷史敎科書をつくる?)’이다. 이 단체는 ‘난징(南京)대학살’을 ‘난징사건’이라고 부르고, 한국인 종군위안부 문제를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아 물의를 빚었던 후소샤(扶桑社)의 역사교과서 발간을 주도했던 단체이다.
 
  불과 2, 3년 전까지만 해도, 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이 우익성향의 교육단체를 만난다는 것은 정치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시모토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일본 어디에도 없다.
 
  하시모토는 이미 권투경기장에서 ‘기미가요(君が代)’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조회 때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 교사들을 퇴출(退出)시키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우성향’이 아니라, ‘국가로서의 일본’을 만들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겪었던 이웃 나라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한 일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보아 장차 하시모토가 반중·반한의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일본 ‘右’의 기대주 하시모토
 
하시모토 도오루 오사카 시장.
  이시하라와 하시모토는 지금 신당 창당에 서로 협력하겠다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시하라가 제기한 센카쿠 열도 구입 문제에 대해, 하시모토는 “보통 정치가는 생각할 수 없는, 이시하라만이 가능한 행동”이라고 칭찬한다.
 
  그럼에도 하시모토가 이시하라를 잇는 ‘우’의 대표주자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일본에서 좌우를 가르는 네 가지 잣대로 보면, 아직 모호한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가 기미가요를 부르는 것으로 봐서는 천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헌법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행 헌법 고수, 광의해석, 헌법개정, 헌법포기 중 어느 하나를 명확하게 선택하지 않고 있다. “필요하다면,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바꿀 수 있다”는 원론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자위대를 국군으로 개편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주변국과의 관계의 경우, 교과서 문제를 통해 결과적으로 한국·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아직 한국이나 중국을 적대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은 없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시모토는 우향우(右向右)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 국난에 신음하는 일본은 개혁이 아닌, 유신 차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신은 ‘우’를 근간으로 한 조용한 혁명이다. 메이지유신-2·26사건-미시마 유키오-이시하라 신타로로 이어져 온 일본 ‘우’의 내일이 최하층민인 부라쿠(部落) 출신 하시모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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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선    (2012-08-22) 찬성 : 175   반대 : 138
한국과 일본의 과거 현재 미래,,,미래를 지향하며,,,저의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대한민국 조선일보社를 통한 신뢰 믿음 신용한다면,,,저는 댓글로,,,아름다운 댓글을 달아 세상이 아름다와지는지,,,댓글을 달아 세상이 아름다와지는지라는,,,

2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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