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집중분석

한국의 선진화와 스위스 ②

총을 놓은 영세중립은 없다!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張哲均
⊙ 62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 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주 라오스 대사·주 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는 국민개병제와 각종 군사시설 구축을 통해 안보태세를 확립해 놓고 있다.
  2008년 미국 월가의 금융파동 이후 국제사회의 화두는 미·중시대(G2)로 요약된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2010년 일본을 앞질렀고 2025년경에는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팍스 차이메리카(Pax Chimerica)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은 워싱턴 컨센서스는 저물고,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베이징 컨센서스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부상하는 중국과 쇠퇴하는 미국 사이에 샌드위치 된 한국의 외교, 안보전략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과 미국은 한반도의 현재와 장래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다 민감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런 만큼 G2에 대해 좀 더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중국은 이중적 관계를 갖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이해가 충돌하는 갈등 관계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으로 돈을 벌고 잉여 달러로 미국의 국채를 사들이는 상호보완적 구조를 갖고 있다. 한 배에 타고 있는 불편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은 경제력, 군사력, 과학기술, 소프트파워 등 종합적인 국력을 고려할 때 여전히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000달러 수준으로 미국의 약 10분의 1 정도이다.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세계총생산의 약 4분의 1로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합보다 많다. 중국이 이제까지와 같이 빠른 경제성장 속도를 유지하고 성장에 따른 지역 간, 계층 간 부의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면서 소득증대에 따른 자유 민주화의 사회적 확산을 잘 관리해 나갈 경우, 2030년경에는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미국이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한반도 주변에는 미국과 중국 이외에도 러시아와 일본이 있다. 2030년경에는 중국과 함께 러시아의 부상도 예견된다. 러시아의 과학기술은 세계적 수준이고 시베리아의 엄청난 지하자원을 동원하면 경제성장은 시간문제이다.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성장이 다소 지체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은 어떤가? 잃어버린 10년과 경제침체, 그리고 60년 자민당 독주의 해체와 정치적 불안정이 일본의 위상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경제의 양과 질을 감안하면 여전히 제2의 경제대국이다. 핵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군사력은 세계 3, 4위 수준이다. 천재지변이 계속되지 않는 한, 일본의 총체적 국력은 상당기간 세계 4위권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이러한 주변세력의 부침에 따라 이해가 교차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어 그들의 전쟁터가 되는 비극적 역사가 반복되곤 했다. 폴 케네디 교수의 언급처럼 한국은 ‘네 마리의 코끼리에 둘러싸인 작은 동물’의 모습이다. 네 마리의 코끼리 중에서 한 마리만 움직여도 다른 세 마리를 자극하여 한반도가 그 희생양이 되는 ‘지정학적 핸디캡’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한국은 오늘날 경제와 군사력 모두 10위권의 국가로 성장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북한은 핵을 개발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의 네 나라는 세계의 4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일본의 해양세력과 중국-러시아의 대륙세력은 과거와 같이, 지금도 앞으로도 갈등 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안보여건과 독립 안정성은 앞으로도 계속 취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G4의 부활로 ‘구한말의 역사가 반복되는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한반도와 같이 강대국에 포위된 약소국이지만, 성공적으로 국가를 건설한 나라가 있다. 스위스이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과거의 합스부르크)에 둘러싸여 한국과 유사한 지정학적 여건에 있으면서도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오늘날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위스의 성공사례를 연구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스위스의 성공이 자연의 혜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며, 특히 영세중립 지위가 스위스의 독립을 보장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인식임을 먼저 지적해 둔다.
 
 
  스위스 안보의 뿌리는 자결과 무장
 
   스위스는 유럽 강대국의 중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과거 로마제국 시대부터 로마로 통하는 육로는 스위스의 험준한 알프스 산길을 넘나들어야 했다. 또한 스위스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으로 여러 민족이 모여 살고 있는 다민족 복합문화 국가이다. 그래서 주변국가 간에 갈등이 시작되면 곧바로 스위스 내부로 점화되어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는 역사의 반복을 경험했다.
 
  15세기 종교혁명이 일어나자 유럽 사회는 구교(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종교적 대립뿐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갈등이 확대되었다. 프랑스에서 쫓겨난 신교도들은 스위스에 와서 혁명과업을 계속했는데 칼뱅이 대표적 인물이다.
 
  스위스는 신·구교 국가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시험대가 되고 스위스의 칸톤들은 신·구교 간 내분으로 동맹연합이 해체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위기에 처한 칸톤의 지도자들은 회합을 갖고 스위스의 동맹은 유지되어야 하며, 내부적 단합을 위해 종교는 각 칸톤이 자유로 선택하되 대외적으로는 종교 분쟁에 중립을 지키기로 정치적 타협을 이루어낸다.
 
  정치적 타협에 의한 내부적 단합과 대외적 중립은 스위스의 생존 자구책으로서 외교와 안보의 근간을 이루게 되고 자결주의 중립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각 칸톤은 주변 세력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 합의에 따라 유럽의 분쟁에 중립을 유지하는 전통을 확립한다.
 
  유럽은 종교혁명 이후 신·구교 간의 분열이 정치적 갈등으로 확대되고, 1617년 30년간의 종교전쟁으로 비화된다. 스위스는 자결주의 안보방침에 따라 군대를 동원, 침공 가능성이 있는 국가와의 국경에 배치하여 결연한 항전의사를 보였다. 스위스의 주변 강대국들은 요충지인 스위스를 점령하려 했으나 전력낭비를 우려하여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 자결과 무장중립의 전통이 30년간의 전화에서 스위스를 지켜낼 수 있었다.
 
  무장중립의 혜택을 확인한 스위스 칸톤의 지도자들은 연방단위의 모임(윌회의)을 갖고 중립과 무장의 필요성을 결의한 후, 군사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스위스는 무장중립을 제도화했다. 30년 전쟁을 마무리한 1647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위스는 무장 중립국가로 승인받게 된다.
 
 
  주변 강대국의 합의에 의한 영세중립
 
  프랑스 대혁명을 겪은 유럽은 얼마 못 가서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린다. 스위스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알프스를 넘어온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칠 수 없었다. 자발적은 아니지만 스위스군은 나폴레옹 군에 동원되고 스위스는 전쟁터가 되어야 했다.
 
  1812년 나폴레옹 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스위스는 대내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나폴레옹 전후 처리를 위한 빈회의(1815년)에서 강대국들은 스위스의 영토불가침과 영세중립 그리고 무장중립에 동의하고 이를 문서화함으로써 국제법상 효력을 갖는 최초의 영세중립 국가가 탄생했다.
 
  규범과 제도로서의 영세중립은 ① 조약 또는 국내법에 의하여 자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구히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② 동맹 조약과 같은 전쟁에 개입하게 될 우려가 있는 의무를 지는 조약의 당사자가 되지 않으며 ③ 관계 국가들에 의해 그 독립과 영토보전 및 중립적 지위를 보장받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은 스위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스위스의 여러 칸톤이 산업화되면서 신교로 전향하고 신교의 자유-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구교 간의 갈등이 재현되고 1847년 내란으로 발전했다.
 
  동맹해체의 위기를 느낀 신교의 진보세력은 스위스의 단합과 중립의 필요성을 재인식하고 보수-구교 소수세력의 의견을 수용하여 권력의 분산과 칸톤의 자치권을 존중하는 타협을 다시 한 번 이루어냈다. 정치적 타협과 대외적 중립의 전통이 작동한 것이다.
 
 
  세계대전과 무장중립
 
스위스 전국에는 핵전쟁에 대비한 3500여 개의 방공호가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스위스는 무장중립 정책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고 방어요새를 구축했다. 그리고 전쟁의 어떤 당사자도 스위스의 영토 통과를 허용치 않는다고 선포했다. 전쟁 당사자들도 전시중립을 명문화한 헤이그협정(Hague Convention,1907년)에 따라 스위스의 중립과 영토불가침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했다. 독일계 군 최고사령관이 친 프로이센적 태도를 보이자 프랑스계가 분노했다. 국방의무에 동원된 군인들의 불만과 정당 간의 이견으로 국론이 분열됐다. 전쟁 불황으로 스위스 경제는 위축되고 레닌 공산주의 혁명에 영향받은 노동자들의 파업동맹으로 정치·사회적 혼란이 야기됐다.
 
  스위스 연방은 각료 해임 등 내부 단합을 위한 강력한 조치로 정치·경제적 타협을 이루어내어 다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오늘날 스위스에서는 노사분규, 노동쟁의를 거의 볼 수 없다. 이유는 이러한 중립성과 노·사·정 간 타협 정신 때문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불과 일주일 만에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무너지고 나치군은 파리를 점령했다. 1차대전을 경험한 스위스 정부는 슬기롭게 군 총사령관으로 앙리 기상(Henry Guisan) 프랑스계 장군을 임명했다.
 
  나치군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손아귀에 넣자 스위스는 나치군에 포위되었다. 히틀러는 유럽의 효과적 지배를 위해 그 중심에 위치한 스위스 점령이 필요해졌다. 탄넨바움(Tannenbaum)으로 알려진 침공 계획을 수립했다. 중립국을 침공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이미 전 유럽을 점령한 상황에서 작은 스위스의 점령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스위스는 나치군의 침공 가능성이 예견되자 알프스 전역에 배수진을 치고 끝까지 저항하는 전략(Reduit Strategy)을 세우고 알프스의 요로에 지하요새를 개수했다. 그 숫자가 2만3000여 개에 이른다. 현재 박물관으로 공개된 요새의 모습은 오늘날에 봐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스위스는 이러한 무장중립을 선포하고 독일군이 침공하면 오랜 기간에 걸쳐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long and costly)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히틀러는 결국 스위스 침공을 포기했다.
 
 
  중립의 진화 - 인도주의와 국제평화 유지 활동
 
  스위스는 중립이 국내외적으로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중립국의 역할을 전통적인 전시 중립에 머물지 않고 인도주의 영역으로 확대했다. 그 첫 번째 조치가 전쟁 희생자를 돌보는 인도적 구호 분야였다. 계기는 1859년 스위스 청년 사업가 앙리 듀냥의 적십자 활동이었다.
 
  이 적십자 활동을 중립국 스위스의 이미지와 연결시켜 국제적으로 확산시켰다. 국제적십자사(ICRC)의 창설을 주도하고 그 본부를 제네바에 유치했다. 적십자기는 스위스 국기와 똑같고 바탕과 십자가의 색깔만 바꾸어놓았다. 국제적십자 본부의 제네바 유치 이후 유엔사무소를 포함한 수많은 국제정치·경제·문화·스포츠 단체가 그 본부를 스위스에 두게 되었고 다양한 국제회의가 스위스에서 개최되고 있다.
 
  스위스는 평시의 적십자 활동뿐 아니라, 1871년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 시에도 인도적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프랑스 군대의 부상자와 포로를 스위스에 수용하여 돌보는 전시구호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구호 조치는 국제사회에서 스위스의 중립 이미지를 확고히 했을 뿐 아니라 국가 이미지를 한층 높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자위와 세력균형을 위한 무력사용이 정당화되었으나, 대전 후 유엔 헌장은 전쟁을 불법화하고 유엔의 집단강제조치로 전쟁 도발국을 응징하도록 규정했다. 스위스는 국제평화는 국제협력을 통해 가능하다는 입장에 따라 중립국의 역할을 인도적 구호와 함께 국제적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하는 ‘능동적 중립’으로 범위를 확대했다.
 
  스위스는 1995년 보스니아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NATO의 회원국이 아니면서도 NATO의 평화유지활동(PfP·Partnership for Peace)에 참여하고, 같은 맥락에서 2000년 코소보 위기 시에도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핵무기의 등장은 핵을 가질 수 없는 중립국 스위스의 안보태세에 영향을 준다. 스위스 여론, 특히 젊은 세대는 스위스의 병역의무와 방위세 과다 등을 이유로 비무장 중립을 지지하는 비율이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개병제와 병역의무는 존치되고 핵 전쟁과 핵 오염에 대비한 3500여 개의 지하 방공호 시설을 완비하여 유사시 전 국민이 대피하여 수개월간 생활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다.
 
  스위스는 군사동맹(예: NATO)이 아닌 국가연합, 국제기구의 회원국 가입은 중립과 양립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가 유엔에 가입하였고 유엔의 강제조치와 영세중립이 양립할 수 있다는 해석이 유력해짐에 따라 스위스 국내에서도 유엔가입 문제가 검토되었다.
 
  1986년에 연방정부는 유엔가입을 국민투표에 회부하였으나 85%의 반대로 거부되었다. 9·11 테러 이후 국제안보환경의 변화와 국제협력을 통한 평화유지의 필요성이 점증됨에 따라 2002년 재투표를 시행, 54%의 찬성으로 유엔가입을 결정했다.
 
 
  스위스의 생존과 번영을 가능하게 한 요인들
 
  스위스가 오늘날 대외적으로 독립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하고 있는 성공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첫째, 합의에 의한 상생의 정치이다. 정치적 합의는 국내적으로는 다민족 복합문화의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해 주는 린치핀(linchpin) 역할을 담당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정세 변화와 위기상황에서 초당적 외교를 구사하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둘째, 자결과 무장 안보의 역사와 전통이다. 스위스는 각 민족이 자결주의로 중립을 합의하고 무장으로 중립을 지킨다는 약속을 변함없이 굳건히 지켜낸 것이다. 변화하는 주변정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약소국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위스의 단합과 독립을 유지한 것이다.
 
  셋째, 안보태세에 대한 제도적 장치이다. 병역의무제, 민방위제, 방위세, 지하 방공호 건설 등 민감한 안보문제도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국민투표로 결정한다. 그래서 제도화된 안보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연방과 칸톤 그리고 국민 각자가 이를 준수하게 된다.
 
  넷째, ‘나라는 내 손으로 지킨다’는 결연한 안보의식이다. 스위스 국민들은 중립이 필요한 정책이지만 중립이 스위스와 자신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탈냉전 시대에도 스위스의 징병제와 민방위제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변함이 없다. 징병제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85% 이상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스위스 남자는 지금도 자신의 집에 총기와 군 장비를 각자 비치하고 관리하며, 병역기간 중의 훈련은 물론, 병역의무 이후 민방위 훈련 시에도 집에서 관리하는 자신의 장비로 참가한다. 2009년 총탄은 더 이상 집에서 보관치 못하도록 법이 개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집에 있는 총탄으로 청소년이 자살하거나 범죄에 사용되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중립 논의와 스위스의 교훈
 
  한반도의 중립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열강이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유럽의 국제정치와 스위스의 사례를 염두에 둔 한반도의 중립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 강대국 간에는 한반도의 중립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청-일,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는 식민지화되었다.
 
  국내에서는 1885년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이 중립론을 제기한 바 있으나 주목받지 못했고, 광복 후 미·소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미·소 양군 철수와 미·소·영·중의 중립보장안이 제기된 바 있다. 한국전 휴전과 제네바 정치회담에 즈음해서는 미 국무부에서도 통일·중립 한국을 검토한 적이 있다.
 
  4·19민주항쟁 이후에는 일부 대학생, 진보 정치인들이 냉전하에서 미-소 간 타협과 중립가능성을 전제로 중립논쟁이 있었으나 공론화되지 못했고 1970년대 데탕트 이후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미국의 브레진스키, 라이샤워 등이 한국 중립론을 제기한 바 있다. 최근에는 중립과 통일을 연계하여 선 통일, 후 중립, 선 중립, 후 통일, 체제수렴 후 영세중립 등과 같은 연계론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중립을 한국 또는 한반도에 적용해 보는 구상은 훗날 G2시대가 가시화되기 시작하면 다시 힘을 얻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위스 중립정책의 성공사례를 검토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스위스와 한국은 상이한 점도 많기 때문에 스위스의 중립을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 된다.
 
  먼저 스위스와 한국은 역사적 배경이 상이하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유교적 가부장질서(사대교린)의 단극체제에 익숙한 전통을 갖고 있다. 이것은 자국의 안보를 초강대국과의 안보동맹에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스위스의 안보는 유럽의 힘의 정치(power politics)와 다극체제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질서에서 형성되었다는 차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스위스의 중립사례를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그 적응성이 문제된다.
 
  스위스는 중립에 대한 정치적 합의 도출의 전통과 확고한 국민적 지지가 존재한다. 그리고 스위스는 이러한 합의 도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가 운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정치적, 국민적 합의를 이룬 경험이 미흡하다. 제도적 장치도 미흡하다. 역사에서 보이는 사색당쟁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안보문제와 관련해 동맹파와 민족파, 포용론과 원칙론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한국은 스위스와는 달리 분단의 현실과 통일의 문제가 있다. 남북한이 정치적 타협을 통해 통일을 이룰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합의해도 이를 지켜낼 수 있는 상호신뢰가 미비하다. 중립은 한미동맹의 폐기를 전제로 하므로 안보상의 현재적 실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중립의 논의나 가설적인 주장은 오히려 한국의 안보를 취약하게 할 수 있다.
 
  스위스의 주변 이해당사국들은 스위스의 중립에 비교적 일치된 이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중립화에 대해 주변 관계국의 입장이 일치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일시적으로 일치한다 해도 힘과 정세가 변화할 경우, 합의의 지속성과 실효성은 매우 불확실하다.
 
  한반도의 중립화 논의는 대내외적으로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중립과 통일의 연계는 이상적 방안이 될 수 있으나, 현실적 대안으로서는 미흡하다. 현재로서는 국내적으로 안보와 통일에 대한 정치권의 타협 역량을 축적해 가면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효성이 검증된 한미동맹을 기저로 안보태세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의 선진화와 안보
 
  스위스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립은 독립유지에 필요한 대안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중립은 대내외적 갈등을 극복하는 정책이지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독립과 중립을 지켜주는 수단은 위기에 대비한 안보의식, 군사대비, 제도적 장치, 초당적 외교와 같은 안보태세의 기제들이다.
 
  한국의 안보태세는 어떤가? 우리는 유사시에 강하다. 역사적으로도 전쟁이 나면 국민이 뭉치고 구국의 영웅이 나왔다.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도 목숨을 건 3·1독립운동이 있었다. 1998년 외환금융위기 시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금 모으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상시에 약하다. 국론 분열과 안전불감증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치는 대권에 관심이 있고, 국민은 안보에 별 관심이 없다. 위기가 발생하면 단결하지만 위기를 미리 막고, 대비하는 일에는 소홀하다.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 국제화의 성공을 사상의 누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선진화를 성취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 시점에서 안보태세를 점검하고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국가의 안보는 국익 중에서도 최우선의 과제이다.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권이 바뀌면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안보를 정치화하는 것은 안보위기를 조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생존의 문제로 국력을 낭비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정치가 국가의 안보문제에 타협을 이루지 못하면 정치권이 모두 책임진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올해 19대 국회가 새로 출범했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안보정책을 여야가 합의하고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 특히,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에 관해서는 정치권이 합의해야 한다. 국가 지도자들은 정치적 이유로 인기없는 안보문제의 거론을 회피하거나, 경제를 앞세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긴장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현실은 이러한 대중영합의 정치를 허용하기에는 너무 심각하다.
 
  ‘나라는 내 손으로 지킨다’는 자주적 안보정신을 생활화하여야 한다. 우리 사회는 상업주의가 만연되면서 안보기피 증세가 위험수준에 있다. 민족우선의 사고도 이러한 안보 해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으로 잠시 달구어진 안보의식도 ‘냄비’처럼 식어버렸다. 자유민주주의를 향유하려면 국민 스스로가 안보의 몫을 감당해 나가는 자세가 요구된다.
 
  스위스는 평화 시에도 위기 시에도 모두 강했다. ‘필요하면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한다. 그리고 그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스위스 정신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모두의 선망이 되는 선진국이 되었다. 안보에 관한 스위스의 교훈은 위기에 앞서 평소에 정신무장과 군사무장을 단단히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스위스가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선진화의 초석을 다지는 길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협 어부바 콘텐츠 공모전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