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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판 從北주의 심층연구 (上) 동독 첩보기관의 工作 企圖와 서독인의 동독 追從 전말

從北에 빠진 한국, 슈타지의 工作에 걸린 西獨 전철 밟고 있다!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agleb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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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독 정권 변화시키겠다는 동방정책 목표 상실… 동독에 대한 내재적 접근만 강조
⊙ 슈타지(국가안전부), 동독 공산정권의 창과 방패 역할
⊙ 서독 의원 매수해 親동독 성향의 총리 불신임案 저지 성공
⊙ 헌법보호청·연방정보부 요원 포섭… 서독의 정보·방첩기능 치명타 입어
⊙ 슈타지, NATO 軍事정보 빼내 소련과 바르샤바 회원국에 전달
구글지도에 나타난 독일 연방정보부(BND) 신청사 일대와 독일 연방헌법보호청(BfV) 마크.
  4·11총선(總選)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안보 문제가 주요 이슈로 부각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과거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정권이 추진했던 대북(對北) 포용정책은 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안보 분야마저도 포용과 관용의 마법에 빠지도록 했다. 북한은 이를 놓치지 않고 남한 사회 곳곳에 종북(從北)세력들을 침투시켰다. 종북세력은 북한의 통일전략전술의 매개체로 활약하면서 김정은 3대(代) 세습, 핵무기 개발, 인권탄압에는 침묵하고 있다. 반면, 그들은 대한민국 발전상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 주요 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비판하고 반대해 왔다.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북한이 종북주의자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모습은 놀랍게도 독일이 분단시절에 겪었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1960년대 후반 서독이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강조하는 동방(東方)정책을 펴자 동독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비밀첩보기관인 ‘슈타지(MfS·국가안전부·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를 통해 서독 사회에 마수(魔手)를 뻗치기 시작했다. 서독 하원의원까지 매수해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지지하는 총리의 불신임안(案)을 부결시킬 정도로 그들의 공작은 집요했고 무시무시했다. 그 무렵 서독 사회에서는 동독을 서방의 시각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봐야 한다는 ‘내재적 접근론’이 확산됐다. 또 동독 정권의 공산독재와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무조건적인 화해와 포용을 주장하는 친(親)동독세력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로 인해 서독 사회에서는 안보불감증이 만연됐다.
 
동독 공산당의 칼과 방패 역할을 했던 비밀첩보기관 슈타지. 현재 이 건물은 동베를린에 남아 있다. 오른쪽은 슈타지 마크.
  서독은 동독 슈타지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1990년 10월 세계사적인 통일을 이뤄냈다. 소련과 동구권의 개혁·개방 와중에서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동독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시대가 가져다준 선물이기도 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서독은 동독 슈타지와 동독 추종세력들에 의해 농락당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체제 수호에 대한 서독인들의 굳은 의지, 그리고 국내외의 체제 도전을 견뎌낸 튼튼한 안보시스템으로 동독의 공작(工作)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 같은 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의 공작 사례와 서독의 안보 부침사(浮沈史)는 최근 우리 사회에 정체를 드러낸 종북세력들에 대한 대처방안과 실효성 있는 대북정책, 그리고 실현 가능한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월간조선》은 독일판 ‘종북주의’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東方정책 :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이름으로 敵과의 동침
 
  아데나워 총리, 힘의 우위 원칙下 東西獨 통일 꿈꿔
 
  제2차 대전 후 서독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기독교민주당(CDU·이하 기민당)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1949~1963년 재임)는 전후(戰後) 패전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통해 자유민주체제와 시장경제의 기틀을 닦아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대외정책 방향에서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국가에 대해 강경노선을 견지했다. 대신 미국·서방과의 결속하에 대외적으로 독일의 유일 대표권을 확립하는 것을 최우선 정책목표로 삼았다.
 
  그의 통일정책은 ‘힘의 우위’, ‘자석 이론’, ‘할슈타인 독트린’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할슈타인 독트린은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정책으로, 동독을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실제로 서독은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1957년 유고슬라비아, 1963년 쿠바와 외교관계를 끊었다.
 
  서독은 NATO의 집단안보체제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경제적으로도 동독을 능가하면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 서독 주도의 흡수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데나워 총리는 자유가 희생되거나 사라지는 식으로의 통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동독을 인정하는 것은 분단체제를 고착화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아데나워 총리가 1963년 10월 사임한 이후 기민당의 에르하르트(1963~1966년)·키싱어(1966~1969년) 정부가 연이어 들어섰다. 이들은 전임 아데나워 정권에 비해 동유럽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유연성을 보였다.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과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하고 경제·문화 부문에서 교류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 같은 단계적 개방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아데나워의 대(對) 동독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동방정책 시작한 사회민주당
 
1966년 1월 대연정 수립에 합의한 후 키싱어 기민당 당수(좌)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브란트 사민당 당수(우). 사민당의 정권 참여는 동독 슈타지에 서독의 최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1969년 9월 총선이 끝나고 사회민주당(SPD·이하 사민당) 주도로 자민당과의 연정이 시작됐다. 종전 후 처음으로 좌파(左派) 성향의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서독의 대 동독정책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됐다. 사민당은 그간 동독고립 정책의 폐기, 동독과의 교류협력 확대를 통한 평화정착을 주장해 왔다.
 
  총리에 취임한 빌리 브란트는 기민당·기사당(기독교사회당)의 대 동독정책이 동독 공산정권의 불안감을 조장해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 설치 등 교류 차단에 나서게 됐다고 강조했다. 브란트는 1969년 10월 의정연설에서 “동서독의 인적·물적 교류가 장기간 악화되도록 한 원인은 공산정권인 동독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완강한 보수정책을 밀고 나간 기민당 정부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류협력을 통해 동서독 간 긴장을 완화하고 동독 정권의 변화를 유도, 통일을 완성한다는 이른바 ‘접근을 통한 변화’를 기본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결해 점진적으로 변화를 추구한다는 ‘작은 걸음 정책’도 표방했다. 이런 브란트의 정책은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과의 관계개선에 중점을 둬 동방정책(Ostpolitik)이라 불렸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그의 중도 퇴임(자신의 보좌관이었던 기욤이 동독 정보기관의 요원임이 드러나 1974년 사퇴)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민당 출신 후임 총리인 슈미트(1974~1982년)에 의해 계승됐다.
 
  브란트 정부는 독일문제 해결이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달려 있다고 판단,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급선무로 봤다. 수차례 소련과의 물밑 협상 끝에 1970년 8월 평화유지와 긴장완화, 현(現) 유럽의 국경존중 등을 골자로 하는 모스크바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브란트의 제의로 1970년 3월과 5월 전후 최초로 동서독 총리가 교차 방문하는 정상회담이 열렸다. 1970년 3월 동독 에르푸르트시(市)에서 브란트-슈토프 총리 간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5월에는 서독 카셀에서 2차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교류협력이 진전되면서 1972년 12월 동서독 간 기본조약이 체결돼 마침내 동서독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고 1973년에는 UN에 동시 가입했다. 나아가 ‘서독과 서베를린 간 통과협정(1971년)’,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동독 도로 이용에 관한 의정서(1975년)’, ‘우편통신협정(1976년)’ 등의 체결로 동서독 간 인적·물적 교류가 확대되는 토대가 마련됐다.
 
 
  동방정책의 표면적 성과
 
1970년 3월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의 에르푸르트 역에 도착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를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영접하고 있다.
  또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들과도 관계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조약을 체결했다. 동구권 국가들은 경제개발을 위해 서독의 자본·기술이 필요했다. 서독은 이를 토대로 동구권과의 관계를 개선시켜 나갔다.
 
  동방정책은 양독 관계에서 이산가족 재회, 경제분야 협력, 문화예술 교류 등을 진전시키며 동서독 주민 간 이질감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국제적으로도 공존과 긴장완화를 내세워 유럽의 안정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동방정책은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근본적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먼저, 동방정책은 동독체제 변화를 의도한 정책이었으나 오히려 공산 독재체제를 인정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통일을 지연시켰다. 양독 간 교류협력의 활성화로 동독은 무역뿐만 아니라 비(非)상업적 분야에서도 서독으로부터 경화(硬貨)를 획득했다. 우편 및 전화통화료, 통과도로 및 철도 사용료, 방문객의 비자 신청비, 서베를린의 폐기물 처리비, 국경지역의 환경보호 관련 비용 등을 서독 정부로부터 얻어냈다. 1990년 통일 당시 대외교역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80%를 외채(外債) 이자를 갚는 데 썼다는 점에서 서독의 경제지원이 없었다면 동독 경제는 이른 시기에 파산했을 것이다.
 
  둘째, 동방정책은 통일정책이라기보다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정책이라 할 수 있다. 동독과의 접촉과 교류에만 몰두해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최종 목적은 희석됐다. 교류협력으로 분단현실이 고착화되면서 독일인 스스로가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서독이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서독 국민들은 1965년 45%가 ‘통일’로 답했는데 이 수치가 1971년에는 3%로 급락했다. 실제로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서독 정부는 10~15년 정도 후에야 통일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막상 통일까지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통일 준비 부족은 막대한 통일 비용(약 2.5조 유로)을 낳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기존에 견지해 오던 서독의 유일 합법정부 및 대외 단독대표라는 입장을 포기함으로써 동독 공산정권의 국제적 위상강화를 초래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로 동독은 국제적으로 주권국가임을 인정받게 돼 서방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73년 영국과 프랑스, 1974년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대우받았다.
 
 
  동방정책, 분단 고착화 등 여러 폐단 초래
 
1967년 젊은 시절의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콘라드 아데나워 전 총리(오른쪽).
  셋째, 동서독 간 교류협력이 동독 정권의 변화와 동독 주민의 인권 개선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동서독 간 관계 진전 속도에 비해 동독 주민의 인권 개선은 매우 더뎠다. 동독에서는 공산체제 비판으로 정치범이 속출했고 의사표현, 이동의 자유 등 기본권의 제약도 심했다. 1980년대 초 국제사면위원회의 동독 인권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약 200명씩 발생하는 정치범 중에서 50% 가량이 체제비판 발언으로 수감됐다. 특히 국경에서 동독 탈출을 시도한 주민들이 사살(射殺)되는 사건이 계속 터졌다. 1970년대 후반 동독의 저명한 반(反)체제 인사들은 교류협력 정책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인권상황이 개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서독 사회에 폭로하기도 했다. 심지어 슈미트 서독 총리는 동독의 인권유린 상황에 대해 “이곳(서독)에서 저항함으로써 (동독 인권유린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라고까지 언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넷째, 서독은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개선 과정에서 국경선 등 현상유지를 인정함으로써 국익상실을 초래했다. 2차 대전 전(前) 독일 영토였던 오더-나이세강(江) 동쪽 땅을 미국·영국·프랑스 등 다른 전승국들의 동의 없이 국경선으로 인정해 버림으로써 독일은 전전(戰前) 영토의 4분의 1을 상실하고 차후 협상카드도 스스로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마지막으로, 사민당 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입장에 동조하며 유화적 목소리가 커지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동독 내 반체제세력보다는 공산정권 지도부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많은 비판이 뒤따랐다. ‘아첨을 통한 변화’, ‘굴욕을 통한 변화’라는 비아냥마저 듣기도 했다. 사민당은 1982년 기민당의 콜 정부가 들어서면서 야당이 된 이후에도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SED)과 교류를 확대했다. 특히 사민당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인들이 대거 서독으로 탈출하자 탈출자 수용 제한과 점진적 통일을 주장하면서 ‘통일을 주저하는 당’이라는 악평까지 받았다.
 
 
  슈타지의 工作 : 서독의 정부기관과 정당 內 동독 비호세력 침투
 
  거대한 조직, 對서독 공작 성공
 
  동독은 1950년 2월 국가안전부(일명 슈타지)를 창설했다. 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를 줄여 슈타지로 불린 이 첩보기관은 1989년 당시 베를린 본부와 15개 지부 산하에 9만여 명의 공식 요원과 17만여 명의 비공식 요원을 둔 방대한 조직이었다.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의 ‘창과 방패’로서, 동독의 체제 보전과 서독 내 정보수집, 친동독 여론 조성 등을 위해 다방면의 공작을 폈다.
 
  대외 정보수집·공작활동은 슈타지 산하 해외공작총국(HVA)이 총괄했다. 총책임자는 서독에서 출생하고 소련에서 교육받은 공산주의자 마르쿠스 볼프였다. 그는 1986년 퇴임 시까지 34년간 해외공작총국을 이끌며 대 서독 공작활동을 지휘했다. 해외공작총국은 서독의 정당, 군부, 언론, 노조 심지어 정보기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 간첩을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서독 좌파단체의 활동을 배후 조종하고 보수 성향 정치인이나 기관에 대해 나치 연루 의혹 등 흑색선전을 벌였으며, 심지어는 총리의 측근 보좌관 자리까지 간첩을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다.
 
  통일 전후로 많은 슈타지 공작문서가 폐기되면서 구체적 활동 파악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총 2만~3만명의 서독인이 슈타지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브란트 사민당 정부의 대 동구권 관계개선 조치 이후 서독 주민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호기심, 같은 민족으로서 동독인에 대한 친근감 등으로 대 동독 안보의식이 크게 이완됐다. 1976년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 마르쿠스 볼프는 “지금까지 접근할 수 없었던 서독 내 인사들이 우리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됐음을 체험하고 있다”며 슈타지의 공작이 성공했음을 밝힌 적이 있다.
 
  방첩기능을 수행했던 서독 헌법보호청(BfV)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부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까지 슈타지의 대 서독 공작 사례는 무려 4만여 건에 달하며 이 중 정치 공작은 1만여 건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슈타지의 활동 영역은 광범위했으며 침투할 수 없는 곳이 사실상 없었다.
 
 
  서독 정부기관·정당, 슈타지의 제1 공작 목표
 
  슈타지의 주요 첩보수집 대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서독 중앙정부·주(州)정부·정당 및 사회단체 등을 대상으로 한 정치첩보활동, 둘째 서독 국방부 및 NATO에 대한 군사첩보활동, 셋째 핵(核)연구시설 및 전자·항공·군수 분야 등에 대한 산업첩보활동, 넷째 대학·연구소 등에 대한 학원첩보활동, 다섯째 동독 출신 이주민에 대한 첩보활동 등이다.
 
  이 중에서도 서독 내 주요 정치권 인사들의 동향과 정책결정 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정부기관·정당의 핵심 인사 포섭은 슈타지의 제1 공작 목표였다. 슈타지는 도처에 심어놓은 정보원들을 통해 정치·경제·안보 분야에서 정책 수립 동향과 정권교체·연정(聯政)구성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했다. 서독 총리실을 담당한 해외공작총국 1과에만 32명의 정보원이 있었으며, 브란트 총리 측근으로 동방정책을 입안했던 에곤 바의 경우에는 자택에 도청장치까지 설치할 정도였다.
 
  슈타지는 기민·기사당 정치인들과 다양한 접촉을 통해 우파 정치인들의 활동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해 왔다. 여기에는 오래전에 심어놓았던 슈타지 간첩들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피히텔이라는 공작명을 쓴 한스 아돌프 칸터는 최고의 정보수집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는 1948년 독일공산당 선전국에서 일했으며 이때 동독 정보기관에 포섭됐다. 이후 서독 라인란트-팔츠주(州)로 이주해 기민당 청년조직에 가입했다. 그는 기민당의 유력 정치인인 콜의 정치자금 모집 분야에서 일하며 콜 보좌진과도 친밀한 사이가 됐다. 1960년대에는 슈타지의 지원을 받아 본에 재정경제자문사무소를 개설하고 플릭그룹이라는 대기업의 고문으로 일했다.
 
  칸터는 기민당과 정부 쪽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기업활동에 유리한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간첩활동도 벌였다. 정치인들에게 넉넉한 기부금을 제공하면서 이를 통해 수집한 고급 첩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콜이 총리가 된 이후에는 총리실 장관 예닝어와의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서독 정부 내의 많은 정보를 획득했다. 그는 1969년부터 통일 전까지 활동하며 서독의 군비 계획·연방총리실의 독일-소련 관계 분석 등 1700여 건에 달하는 고급 첩보를 동독에 전달했다.
 
 
  1969년 사민당 집권 계기로 슈타지 활동기반 확대
 
  1969년 말 사민당의 정권 장악은 동독 정보기관으로서는 활동기반 구축의 호기(好機)였다. 슈타지는 브란트 정부 집권 이후 동서독 간 기본조약 체결, 관계개선 및 교류활성화 움직임에 편승해 서독 사회 전반에 침투를 확대했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요인들을 매수하고 여론조작·흑색선전 등 심리전 활동도 적극 전개했다.
 
  대 동독 긴장완화 분위기 속에 서독 내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이나 동독 인사 접촉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헌법보호청은 1976년 연례보고서에서 “동독은 서독의 긴장완화 정책에 따라 증가하는 인적·물적 왕래에 편승해 간첩활동을 강화하고 있다”며 위기상황을 경고했다.
 
  슈타지는 서독 좌파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협조세력을 구축하려 했다. 사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던 비난트 의원도 슈타지의 협조자로 일했다. 그는 동독 장관 자문위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슈타지 요원과 정기적으로 접촉하며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당시 브란트 총리 등 사민당 지휘부와 관련해 자신의 예리한 분석력을 바탕으로 유용한 첩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독일 통일 이후 이 같은 간첩행위가 드러나면서 1996년 징역 2년6월, 벌금 100만 마르크의 처벌을 받았다.
 
  1979년에는 바이에른주 출신의 사민당 의원 크레머가 체포됐다. 그는 슈타지 고위간부와 10여 차례 이상 만나 정부 및 당내(黨內) 비밀을 누설한 혐의를 받았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 볼프와 1978년 7월 스웨덴에서 접선한 사실도 발각됐다. 볼프는 자서전에서 크레머에 대해 “정치적으로 서로 터놓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서독 측 대화 상대자”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는 1980년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민당 청년당원들은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개별 접촉을 갖기도 했다. 청년당원 중에는 라퐁텐 전(前) 자알란트 주지사, 아이헬 전 재무장관 등 향후 사민당의 중량급 정치인으로 성장한 인사들이 다수 있었다.
 
  슈타지는 1966년부터 3년간 기민-사민당 대(大)연정 당시부터 사민당 대표이자 외무장관이던 브란트를 주목했다. 그가 총리가 되자 외무부 내 정보원을 가동해 신(新)정부의 정책기조를 예의주시했다. 브란트 총리가 군비축소, 핵확산 반대, 동서 간 긴장해소 쪽으로 가닥을 잡자 이런 상황을 동독 정권에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다. 대 동독 대결 정책으로 흡수통일을 지향했던 기민당 정권에 비해 교류협력을 내세운 사민당의 집권을 동독 정보당국은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돈 받은 기민당 의원, 브란트 총리 불신임 반대
 
1972년 4월 27일 총리 불신임안이 부결된 후 총리직을 노리던 기민당의 바르첼(좌) 당수로부터 축하인사를 받고 있는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
  1972년 들어 브란트 총리의 정치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대한 연정 정부 내 반발이 높아지며 일부 여당의원들(사민당 4명·자민당 6명)이 야당 기민당으로 이적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의회 내 반수 이상을 차지했던 사민-자민당 연정은 과반 지위를 상실했다. 기민당은 이를 정권탈환의 기회로 보고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案)을 의회에 제출했다. 표결을 통해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브란트 총리는 물러나야 했고 동방정책은 무위(無爲)가 되는 것이었다. 동독으로서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동서독기본조약이 아직 서명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기민당으로의 정권교체는 반드시 저지시켜야 했다.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마저 동독 서기장 호네커를 모스크바로 불러 브란트를 지지할 수밖에 없음을 전달했다.
 
  기민·기사당이 근소한 차이지만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란트 총리의 실각(失脚)이 예상됐다. 그러나 1972년 4월 27일 실제 투표 결과는 찬성 247표, 반대 249표였다. 2표 차이로 불신임안이 부결됐다. 기민당 측에서 반란표가 나왔던 것이다. 브란트의 조기 퇴임을 우려한 슈타지가 기민당 내 일부 의원을 매수해 불신임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공작한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기민당의 슈타이너 의원은 슈타지 측으로부터 5만 마르크의 공작금을 받고 불신임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다른 한 명의 반란표는 ‘사자’라는 공작명으로 활동한 기사당의 바그너 의원으로 알려졌다.
 
 
  귄터 기욤, 권력 가장 깊숙이 침투한 동독 간첩
 
브란트 서독 총리(오른쪽)와 그의 보좌관이었던 동독 간첩 귄터 기욤.
  귄터 기욤(공작명 한센)은 동독의 한 출판사에서 사진 편집인으로 일하다 슈타지에 발탁, 간첩교육을 받고 1956년 5월 아내 크리스텔과 함께 서독 프랑크푸르트로 위장 이주했다. 아내도 공작명(하인체)을 부여받은 부부 간첩이었다. 슈타지의 지령은 서독 사민당 내부에 침투해 협조자를 발굴·육성하라는 지시였다. 부부는 1957년 사민당에 입당한 이후 사민당 내 열성당원으로 활약했다. 기욤은 타고난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1968년 프랑크푸르트 시의회 사민당 대표직까지 맡으며 당내 고위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연방교통장관 게오르크 레버의 선거를 돕는 지역책임자로도 일했다. 또한 부인 크리스텔도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사민당의 헤센 남부지부와 주지사실에서 근무하며 서독군 관련 정보를 동독에 제공했다.
 
  기욤은 1969년 브란트가 총리로 당선된 후 주변 인사의 추천으로 총리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72년 선거전에서 사민당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연방총리실의 정당·노조 담당 보좌관으로 승진했다. 총리에게 보고되는 각종 문서를 직접 열람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그는 브란트를 지근(至近)거리에서 보좌하며 여당 내부의 정치상황을 파악하고 총리 주도의 소그룹 토론모임에도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기욤은 총리실로 보고되는 기밀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저장, 담뱃갑에 담아 슈타지 측에 인편(人便)으로 전달하는 역적(逆賊)행위를 저질렀다. 슈타지 간첩 기욤은 권력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 최고권력자의 정치적 비밀과 개인 동향을 살폈다. 그는 미소(美蘇) 간 군축회담에 대한 서독의 입장, 서독과 동맹국 간 정상회담, 미국과 유럽 정상 간 협의내용, 미국과 프랑스 간 나토 내부의 불협화음 등을 세세히 동독에 보고했다. 한편 총리 부인 루트 브란트와 기욤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도 서로 친하게 지내며 소풍도 같이 다녔다.
 
  1974년 4월 기욤의 간첩행위가 발각되자 동독 간첩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어 브란트 총리는 결국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기욤이 꼬리가 잡히게 된 것은 그와 협조관계에 있던 ‘그로나우’라는 거물간첩이 발각되면서였다. 그로나우는 서독의 노동조합 조직에 침투해 각종 정보수집, 공작활동을 벌였다.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기욤’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자 당시 헌법보호청 내 담당직원이 1950년대 동독 암호문 해독에서 동일 이름이 등장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1950년대 말까지 동독은 소련식 암호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서독 정보부가 이를 해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7년 무렵 방첩당국은 기욤의 아들 피에르가 태어났을 때 “두 번째 기욤의 출생을 축하한다”는 무선(無線) 교신과 이후 기욤 부부에게 전달된 생일축전 메시지 등을 감청해 뒀다. 체포된 기욤은 1975년 고등법원에서 국가반역죄로 13년형을, 그의 부인은 8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이던 기욤은 1981년 10월 동독에 수감돼 있던 서독 스파이들과 맞교환돼 동독으로 건너갔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 볼프는 자서전에서 기욤의 발각에 대해 “쓰라린 패배”라고 적고 있다. 그는 브란트 총리의 퇴진에 대해 “절대 바라지 않았던 결과이며 동독의 명백한 자살골”이라고 탄식했다. 기욤 사례는 브란트 총리 주도의 사민당 정부가 동독의 정치적 입지 강화와 동독 정보기관의 활동기반 확대에 얼마나 유리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例)이다.
 
 
  로미오 작전, 슈타지에 포섭된 여비서들
 
20세기 세계 최고의 스파이로 일세를 풍미한 전 동독 첩보기관 슈타지의 총책 마르쿠스 볼프의 회고록 《얼굴없는 사나이》.
  로미오 작전이란 슈타지가 젊고 매력적인 남성 간첩을 활용, 서독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 독신 여성들을 포섭해 정보를 수집한 작전 일체를 말한다.
 
  동독 작센 지역의 유명 극장에서 일하던 롤란트(Roland)는 상당한 지성과 외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NATO 본부에서 통역원으로 일하는 여성을 포섭하라는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1961년 서독으로 떠났다. 그는 ‘카이 페터센’이라는 이름의 덴마크 언론인으로 가장했고 덴마크 억양이 있는 독일어로 말을 했다.
 
  슈타지가 목표로 정한 마가레테라는 이름의 여성은 예쁘고 부지런하며 수줍음 많은 기독교신자였다. 이전에 로미오 타입의 간첩들이 몇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롤란트는 다방면의 지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마침내 결혼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 무렵 롤란트는 마가레테에게 “나는 덴마크 군(軍) 비밀보안대 간부”라며 또다시 신분을 위장했다. 마가레테는 연인을 위해 나토의 비밀정보들을 빼냈으며 롤란트는 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한동안 성공적으로 간첩활동을 하다 방첩기관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롤란트는 동독으로 넘어갔다. 마가레테는 서독에 남아 다른 간첩을 통해 정보를 제공했으나 연인이 없어지면서 점차 흥미를 잃고 협조활동을 중단했다.
 
  또 다른 젊은 서독 여성 게르다(Gerda)는 1960년대 초 열아홉의 나이에 파리의 한 어학원에서 동독 간첩 허버트 슈뢰터를 알게 됐다. 슈뢰터는 자신의 정체를 게르다에게 털어놓았고 그녀는 동독에까지 가 슈타지와 접촉하고 슈타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1966년부터 게르다는 외무부 정보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서독의 모든 대사관에서 들어오는 암호전문을 해독해 슈타지에 넘겨줬다. 외무부 정보센터의 업무 분위기는 자유분방한 편이었는데 이 점을 이용, 게르다는 1m가 넘는 전보문 용지를 자신의 핸드백 속에 챙겨 청사에서 퇴근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녀가 가져온 서류를 남편 슈뢰터는 사진으로 찍어 동독 측에 넘겼다. 그녀가 3개월간 워싱턴의 서독대사관 암호해독원으로 파견됐을 때 슈타지는 미독(美獨) 관계의 내부사정에 대한 고급첩보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게르다는 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파견됐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서 그녀는 서독 언론인이라는 남자를 우연히 알게 돼 사귀게 됐다. 실상 이 남성은 서독 연방정보부의 요원이었다. 게르다는 이 남자에게 스파이 사실을 털어놨고 결국 그녀의 남편 슈뢰터는 동독으로 탈출, 그녀 또한 서독으로 소환돼 처벌받았다.
 
  이 외에도 나토에서 근무했던 잉그리드 가르베, 서독 재무부 소속의 슈나이터, 총리실에서 일했던 헬가 리디거 등도 유사한 공작 사례이다.
 
 
  서독 內 흑색선전 유포하고 이간질 공작 자행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돌연 베를린 장벽을 구축했다. 그 후 슈타지의 대 서독 정치공작의 주안점은 ‘통일’에서 ‘평화’로 바뀌게 된다.
  슈타지는 유력 정치인에 대해서는 허위정보를 흘리는 흑색선전을 감행했고, 정당 간 상호 이간질시키는 공작도 벌였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은 1974년 10월 기민당 정치인인 쿠어트 비덴코프와 당시 기민당 대표였던 콜 간의 전화내용을 도청했다. 콜의 약한 지도력 문제가 통화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미국의 정보요원이 도청한 것처럼 허위로 조작, 《슈테른》지(誌)에 흘렸고 이 잡지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야당의 총리 후보가 지도력이 약하다는 내용을 퍼뜨려 보수 야당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동맹국의 비밀요원이 서독 정치인을 도청한다는 인식을 심어 미국-서독 간 관계 악화를 노린 이간질이었다.
 
  또한 1980년 10월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는 자매정당인 기민-기사당 간 불화를 조장하기도 했다. 기사당은 기민당의 자매정당으로 남부 바이에른주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동독은 사민-자민당 연립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슈타지는 기사당이 바이에른주에만 국한된 정당활동을 버리고 다른 주에서도 정치활동을 할 것이란 허위사실을 만들어 언론에 흘렸다. 당시 기사당 사무총장인 슈토이버가 이를 공식적으로 재가(裁可)했다는 내용을 《슈피겔》지에 전달해 기민-기사당 간 큰 분란을 야기하고 전통적 협력관계에도 타격을 입혔다. 슈타지의 의도대로 그해 선거에서 사민-자민당 연합정권은 재(再)집권에 성공했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은 1980년대 초반 기민당 성향의 잡지인 듯한 《Die Mitte(중도)》와 《SPD-Intern》이라는 소책자를 수차례 발행했다. 동독정책에 우호적인 내용을 실으면서 각각 기민·사민당 내부에서만 알 수 있는 정보도 적당히 섞어 당원들이 발간한 책자처럼 보이게 했다. 정당과 지지층 내부의 혼란과 이간질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이처럼 슈타지는 대 동독 긴장완화 정책 이후 서독에서 광범위한 공작활동을 벌였으며, 서독 인사들도 슈타지 첩자들에게서 얻은 비밀을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다녔다. 비단 정치권과 정부 인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 같은 현상은 서독의 사회 주요인사들에게 유행처럼 번져갔다.
 
 
  슈타지 工作 : 서독의 안보기관을 향한 눈
 
  슈풀러, 16년간 활동한 연방정보부 내 고정간첩
 
  서독의 정보기관은 크게 국내 방첩 및 체제 수호를 담당하는 헌법보호청과 해외정보 수집을 맡는 연방정보부(BND)로 나뉜다. 슈타지로서는 서독 정보기관에 침투해 내부 기밀정보를 빼내고 방첩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 목표였다. 정보수집을 위해 서독 정보기관원에게 신분을 위장해 접근하거나 통신망 도청 등의 방법을 활용했다. 또한 서독 정보요원들의 신원정보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다음 사례는 슈타지에 포섭돼 암약했던 서독 정보기관 내 대표적인 간첩 사례들이다.
 
  알프레드 슈풀러는 1971년 뮌헨에서 독일공산당원과 비밀리에 접선한 후 이를 통해 슈타지와 접촉을 시작했다. 자신의 형 루트비히도 중간역할을 하도록 설득해 간첩활동에 끌어들였다. 형제간첩은 각각 ‘페터’와 ‘플로리안’이라는 공작명으로 활동했다. 슈풀러는 매주 최대 400여 쪽 분량의 연방정보부 내부 기밀자료를 유출했으며, 당시 슈타지 측은 이 정보를 소련 정보기관 KGB에도 제공했다. 슈풀러가 빼돌린 정보의 주요내용은 서방에서 바라본 바르샤바 조약기구 분석, NATO가 파악한 동구권의 핵무기 위치, 소련의 우주계획 등이었다. 1급비밀로 분류된 NATO의 동구권 타격 예상지점 리스트도 포함돼 있었다. 슈풀러는 자신이 근무하던 서독 연방정보부 직원들에 대한 정보도 정기적으로 누설(漏泄)했다. 슈타지는 이를 통해 서독 연방정보부의 세부 조직, 요원들의 주요 임무뿐만 아니라 가명(假名)으로 활동하는 현직 정보요원들의 본명·거주지 주소까지 상세히 파악했다.
 
  슈풀러는 기밀을 슈타지에 넘길 때 이동식 무인(無人) 수수소(授受所)를 활용했다. 빈-동베를린 간 열차의 화장실 세면대 아래에 빼낸 자료를 놓아두면, 검표원으로 가장한 슈타지 해외공작총국 직원이 이를 수거해 가는 방식이었다.
 
  동독 정부는 이들 형제간첩에게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수여하고, 16년간 총 25만 마르크를 지급했으며, 심지어 이들의 이혼소송 및 이사 비용까지 부담했다. 형제간첩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주 뒤인 1989년 11월에 체포돼 각각 징역 10년, 5년6월 형을 선고받았다. 슈풀러는 후에 《포커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당시 사회주의에 심취, 스스로 혁명가라고 생각했으며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방정보부 내 박사 출신의 여성 공작원 가스트
 
  가스트는 1968년 10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내 여성들의 활동’이라는 주제의 박사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동독으로 여행을 갔다가 슈타지에 포섭됐다. 1973년 1월 연방정보부에 입사한 후 분석평가 부서인 3국에 배치됐다. 그는 소련과 동유럽 문제 분석관으로서 중요 보고를 취합, 서독 총리에게 보고되는 정세보고서 작성을 담당했다. 그가 슈타지에 전달한 내용은 서독과 NATO의 내부 상황, 동구권에 대한 서방 측 평가보고서 등이었다. 전달방식은 문서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화장지나 화장품 속에 숨긴 후 뮌헨에서 동구권행 기차 화장실에 넣어두는 방식을 취했다. 나중에는 슈타지 간첩이 직접 뮌헨으로 와 수영장 탈의실에서 물건을 넘겨받기도 했다.
 
  가스트는 첩보보고를 할 때마다 장문(長文)의 편지를 동봉했다. 그는 편지에다 첩보내용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적었고 자신이 점찍어 놓은 인물들을 소개하며 이들과 어떻게 접선·포섭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도 기술했다. 연방정보부의 인사정책도 알려줬다.
 
  슈타지는 그녀의 서독 연방정보부 내 위상과 중요성을 감안, 그녀의 존재를 슈타지 내 극소수 인사만 알도록 했다. 그러나 통일 후 전직 슈타지 간부가 “연방정보부 내 장애인 아이를 키우는 여자 하나가 우리를 위해 일해 왔다”고 제보함으로써 정체가 드러났다. 가스트는 1991년 2월 반역죄로 체포돼 징역 6년9월 형을 선고받았다.
 
 
  돈과 업무 욕심이 컸던 헌법보호청 요원 클라우스 쿠론
 
1970년대 초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 시절 동방정책 책임자였던 에곤 바 장관(왼쪽)이 동독 측 비밀협상책임자인 미하일 콜(오른쪽)에게 합의된 동서독기본조약안을 넘겨주고 있다.
  정보기관 내의 배반자는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해 왔다. 서독의 방첩기관 헌법보호청이 클라우스 쿠론의 배반으로 입은 타격은 재앙(災殃)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쿠론은 1962년 헌법보호청에 입사, 주로 방첩 파트에서 근무하며 이중간첩 색출작전을 지휘해 왔다. 뛰어난 정보수집력과 작전수행으로 헌법보호청 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승진 기회가 제한된 데 따른 불만과 경제적 이유 등으로 자신의 정보지식을 적대국 정보기관에 팔아넘겼다.
 
  그는 1981년 슈타지 해외공작총국 9과(방첩담당) 앞으로 직접 편지를 작성해 본에 있는 동독상주대표부의 우편함에 갖다놨다. 자신의 이름과 직무 부서를 언급하지 않은 채 헌법보호청 직원이라고만 적었고, 정보를 제공할 의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대가로 15만 마르크와 매월 자신의 월급 2배를 달라고 제시했다. 해외공작총국장 볼프에 따르면, 슈타지는 필적(筆跡) 비교를 통해 편지 작성자가 헌법보호청 방첩과에 근무하는 직원임을 파악했다.
 
  쿠론은 오스트리아에서 슈타지와 접선, 자신이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는 것과 현재의 월급으로는 자녀들 대학공부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경제적 불만을 털어놓았다. 쿠론은 이후 드레스덴에서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인 볼프를 직접 만났다. 볼프는 착수금으로 15만 마르크를 청구한 쿠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매달 4000마르크를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쿠론은 통일 전까지 슈타지에 서독의 간첩 색출작전, 역(逆)공작 계획, 서방에 여행 중인 동독인 감시 실태 등 방첩작전 진행 상황을 상세히 알려줬다.
 
  통독 직후 자신의 배반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형(刑)을 면제받는 조건으로 자신이 KGB에 대항해 이중간첩으로 일하겠다고 헌법보호청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간첩행위로 체포돼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서독軍·NATO에 대한 군사정보 수집에도 혈안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있는 독일 국민들.
  동독의 군사 스파이 활동은 서독군과 NATO의 군사력 현황·군비충원계획·국방정책 등의 정보수집에도 집중됐다. 이 업무는 슈타지 해외공작총국과 동독군 첩보국이 주로 담당했는데 두 조직은 서독에 다수(多數)의 정보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독의 고급정보원들은 대부분 평범한 직원들이었지만 직장에서 광범위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고 유사시 정보유출을 통해 서독 방위체계에 치명적 손실을 입힐 수도 있었다. 수집한 정보는 소련을 중심으로 바르샤바 조약국들에도 전달·공유됐다.
 
  라이너 룹(공작명 토파스)은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껴 ‘68학생운동’ 폭력시위에도 참가했던 좌파 성향의 인물이었다. 68학생운동은 1968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으로 독일에서는 사회주의독일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연좌농성·파업·폭동이 일어났다.
 
  룹은 미국·NATO를 담당하던 슈타지 공작요원에게 포섭돼 동베를린 슈타지 본부에서 서류 사진 찍기, 암호 작성, 무선송신 등 간첩교육을 받았다. 슈타지의 도움으로 브뤼셀에서 학업을 지속하다 브뤼셀 영국 군사고문단에 근무하던 영국 여성을 사귄 후 1972년 결혼식까지 올렸다. 그의 아내도 간첩행위에 가담했는데 NATO 내 여러 곳의 부서를 옮겨가며 기밀을 빼돌렸다. 룹도 1977년부터 NATO에 근무하며 NATO의 군사계획·지휘부 구조·바르샤바 조약국들의 군비증강에 대한 평가 등을 슈타지에 보고했다. 그의 간첩활동은 통일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그는 통일 후 슈타지 비밀문서를 입수한 CIA에 의해 적발돼 1993년 체포, 12년형을 선고받았다.
 
  디터 폽은 베를린 출생으로 보험회사 직원으로 근무하던 친(親)공산주의 성향의 인물이었다. 1960년대 동독군 첩보국 간첩에게 포섭돼 서독 국방부 침투를 목적으로 본으로 이주했다. 그는 동성연애자이던 국방부 직원 에곤 슈트레퍼를 협조자로 끌어들였다. 슈트레퍼는 1970년부터 국방부 참모본부에 배속돼 기밀서류의 관리·복사·파기 업무 등을 맡았다.
 
  디터 폽은 슈트레퍼를 통해 NATO의 전력계획, 서독군의 군축협상, 장관보고, 대화메모 등 다양한 대외비를 접했으며 이를 동독 측에 전달했다. 그는 1989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20년간 간첩으로 활동했다.
 
  이 외 주독(駐獨)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며 1500건에 달하는 군사첩보를 넘긴 가브리엘레 알빈, 국방부 내 기밀문건 관리담당자로 1000건 이상의 문서를 동독에 제공한 볼프 하인리히 프렐비츠 등이 동독 슈타지와 내통한 1급 간첩으로 꼽힌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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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선    (2012-08-05) 찬성 : 376   반대 : 221
1987년 서강대학교에서 1학기 봄학기에 성적이 곤두박질 하여,,,
  윤용선    (2012-08-05) 찬성 : 69   반대 : 69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고,,,나름대로 성적도 괜찮았던 저,,,아버님께서 늘,,,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놀 때 놀고 공부할 때 공부해라,,,어머님께서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 자라,,,저는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 공부하는지 노는지,,,성적은 공부하는만큼 나왔고,,,낮에 놀다 밤에 공부하고,,,
  윤용선    (2012-08-05) 찬성 : 91   반대 : 80
금산국민학교현 금산초등학교와 금산중학교를 졸업,,,충청남도 대전시 보문고등학교 29기와 서울특별시 종로학원에서 재수 1985년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85학번으로,,,1992년 대전광역시 대전생명에서 약 일년 재직,,,
  윤용선    (2012-08-05) 찬성 : 73   반대 : 68
저는 1965년 09월 09일 을사년 08시에 태어났습니다,,,전라북도 정읍에서 아버님 윤석후 어머님 정송희 사이에서,,,그 시절 조선대학교 약대를 졸업하시고 윤약국을 경영하시던,,,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으로 이사,,,

2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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