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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알카에다의 새 지도자 자와히리

외과의사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 더 능한 ‘죽음의 의사’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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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만남은 돈과 이슬람 혁명 비전의 결합이었다
⊙ 아버지는 대학 교수, 어머니는 유명 지도자의 딸
⊙ 15살 나이에 이슬람 국가 건설 위한 혁명조직 만들어

朴炫度
⊙ 45세.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연구소 박사 과정 수료.
⊙ 現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종교간 대화위원,
    《종교와 평화》 편집위원.
⊙ 저서 : 《사람의 종교 종교의 사람》(共著)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共著)
    《재미있는 종교이야기》(共著).
1998년 8월 7일 자와히리는 케냐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폭파했다.
  “알카에다는 논의 끝에 아부 무함마드 자와히리가 지도자 직무를 수행할 것임을 공포한다.”
 
  알카에다가 지난 6월 16일 홈페이지에 올린 선언문이다. 한때 알카에다 아라비아 지부의 알아울라키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결국 테러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빈 라덴의 두뇌이자 실질적 테러 조직책인 자와히리가 알카에다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지난 5월 2일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에 의해 사살된 지 45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뒤늦게 후계자가 결정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도층 간 이견과 내분으로 인해 지연되었을 가능성과 함께 미국의 집요한 추적과 감시로 인해 곳곳에 산재(散在)한 지도부가 서로 원활하게 소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비록 후계 인선 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알카에다의 반(反)서구-반미-반이스라엘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자와히리는 외과의사지만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는 데 더 능하기에 ‘죽음의 의사(Doctor of Death)’로 불린다. 자와히리가 어떤 식으로든 이미 천명(闡明)한 대로 빈 라덴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시도할 가능성이 적잖기 때문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일찌감치 미국 멀린 합참의장은 빈 라덴처럼 그를 사살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10개가 넘는 가명(假名)을 지니고,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 주재 미국 대사관 폭파 주도자로 미국 FBI가 무려 2500만 달러를 내걸고 지명수배 중인 자와히리. 도대체 그는 어떠한 인물인가.
 
 
  부모 모두 엘리트 집안
 
  자와히리는 1951년 6월 19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 남쪽 중산층 거주지 마아디에서 아들·딸 쌍둥이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아이만(Ayman)이다. 아버지는 아인샴스대 약학교수, 어머니는 대학 총장과 대사를 역임한 유명인사의 딸이다. 사회적으로 탄탄한 가족배경이 보여주듯, 자와히리 양친의 집안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화려한 이력을 지닌 사람들로 가득하다.
 
  자와히리가 커서 외과의사가 된 것은 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이다. 부계(父系)는, 공부는 좋아하되 정치와는 담을 쌓은 학자집안이다. 직계 조부, 증조부는 아즈하르 대학교 학자였고, 방계(傍系) 조부는 아즈하르 대학교의 대(大)이맘(이슬람교 교단 조직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하나의 직명)이었다. 1995년 한 친척의 부고(訃告)에는 46명의 가족이 언급되는데, 이 중 무려 31명의 직업이 의사, 약사, 대사, 판사, 국회의원일 정도로 자와히리 부계는 사회지도층이다.
 
  모계(母系) 역시 만만치 않다. 외할버지 앗잠(Azzam) 박사는 전 카이로대 총장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킹사우드 대학교 설립자이자, 예멘,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역임했다. 외증조부는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초대 아랍연맹 사무총장 앗잠 파샤(Azzam Pasha)다. 그는 제1차 중동전쟁 때 전 세계가 “몽골 침략 이래 본 적이 없는 대학살을 보게 될 것”이라며 이스라엘 패망(敗亡)을 약속했던 장본인이다.
 
  외삼촌 마흐푸즈 앗잠은 나세르 대통령 당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당한 사이드 꾸뜹(1906~66, Sayyid Qutb)의 변호사로 야당 부총재를 지냈다. 현실정치에 무관심했던 부계와 달리 역동적으로 정치활동을 한 모계를 보면, 자와히리는 정치 지향 유전자를 어머니 쪽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사회지도층 가족배경을 지녔지만 자와히리의 양친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았다. 교수 월급으로 자와히리를 비롯해서 모두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의 교육비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혼자 책읽기 좋아하던 모범생
 
이집트 출신 의사로서 알카에다 2인자 아이만 알 자와히리.
  자와히리는 대단히 명석한 아이였지만, 이러한 경제사정으로 인해 인근 교육 수준이 높은 사립학교 대신 공립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자와히리 부모는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엄격하거나 경건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그의 어머니는 외출 시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
 
  어린 자와히리는 신체접촉 운동을 싫어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즐기는 아이였다. 그는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과격한 운동을 싫어했다. 그런 아이가 커서 종교를 앞세운 테러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어린 자와히리가 이슬람 전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사이드 꾸뜹이다.
 
  근대 이슬람 근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사이드 꾸뜹은 일선 학교 감독관으로 교육부에서 일했다. 아랍어 교사이자 문필가였던 그는 영국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이집트 사회정치 현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였으나 이를 이슬람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슬림 지도자들을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사람들로 여기고 스스로를 근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급변한 것은 교육부 후원으로 2년 동안 미국 북(北)콜로라도 주립 교대에 유학했을 때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영국보다 미국을 더 공정하고 좋은 나라로 인식했다. 그러나 사이드 꾸뜹은 미국 생활을 통해 오히려 반서구 문화, 반유대-그리스도교 사상으로 무장한 채 귀국한다. 권투나 레슬링같이 잔인한 스포츠를 즐기고, 교회에서 남녀가 무도회를 열어 성적으로 문란하게 어울리며, 이스라엘을 맹목적으로 편애하는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것이다.
 
  심지어 흑인 재즈 음악조차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퇴폐수단이라고 비판한다. 귀국 후에는 교육부 내 승진을 거부하고 언론에 사회정치에 관한 비판적 글들을 기고했다. 이슬람 세계 재건을 지향하는 무슬림 형제단에 1953년에 가입, 주간지 편집을 담당했다.
 
  타락한 서구 문화에 대한 강렬한 반감, 지옥행이 확실한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후대에 미친 가장 강력한 꾸뜹의 사상은 자힐리야(Jahiliyyah), 즉 무지(無知)의 시대에 대한 재해석이다.
 
  이슬람 역사에서 무지의 시대라는 말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가르치기 이전의 세계를 뜻한다. 불신자(不信者)들이 살던 시대다. 그런데 꾸뜹은 이 용어를 무슬림 사회까지 포함해서 널리 확장해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 우리는 이슬람 여명기와 같은 무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지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올바르지 않은 무슬림 지도자가 다스리는 곳은 무지의 시대 상황에 놓여 있으니, 올바른 이슬람으로 세상을 인도하여 바꾸라는 말이다. 이는 곧 참된 이슬람의 이름으로 무슬림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현대 이슬람테러주의의 초석이 되는 사상이다. 자와히리가 “가장 뛰어난 근본주의 이론가”라고 평가한 사이드 꾸뜹은 이슬람 혁명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수차례 투옥을 거쳐 1966년 8월 2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쿠데타 혐의로 검거돼 고문받고 성격 포악해져
 
  꾸뜹의 불꽃은 자와히리에게 옮아 붙었다. 꾸뜹이 죽은 해에 자와히리는 불과 15살. 이 어린 나이에 쿠데타로 나세르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국가를 세우기 위한 혁명조직을 만들었다. 나세르 군사혁명에 감화되어 리비아의 어린 소년 카다피가 리비아의 나세르를 꿈꾸며 혁명조직을 만든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1974년 카이로 의대를 졸업할 때 그의 지하 이슬람 지하드 조직원은 40명이었다. 그의 이러한 지하조직 활동은 가족은 물론, 학우들에게조차 비밀이어서 그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군의관으로 3년을 복무한 후, 1978년 양친이 모두 변호사인 앗자(Azza)와 결혼한다. 세속적이었던 그의 아내는 카이로대 재학 중 종교적 전환기를 맞아 가족들이 놀랄 정도로 대단히 경건한 무슬림이 되었다. 히잡, 더 나아가 눈을 제외하고 얼굴을 모두 가리는 니깝을 착용하며, 순교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었다. 자와히리와 천생연분이라고나 할까.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자와히리의 속마음을 반영하듯, 결혼식은 음악도, 사진 촬영도 없이 거행되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자와히리는 무슬림형제단이 운영하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 병원 원장의 제의에 따라 1980년 여름 아프가니스탄 난민구제 활동에 참여한다. 파키스탄 북부 국경도시 페샤와르의 적신월사(赤新月社·이슬람권 적십자)에서 약 4개월간 근무한다. 이때 순교자(샤히드)가 되고자 아프가니스탄에 온 아랍 무슬림 전사 중 하나로 모금운동에 열정적이던 빈 라덴과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1981년 3월 다시 페샤와르로 돌아와 적신월사에서 두 달간 일한 자와히리는 그해 10월 6일 사다트 대통령이 승전기념일 군 사열 중 저격돼 사망하자 암살공모 및 총기소유 죄로 3년간 옥고를 치른다. 사다트를 죽인 이슬람 혁명 군인들과 자와히리는 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와히리는 특정 지도자 암살이 아니라 체제 전복을 목표로 삼았다. 지도자 암살이 정답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 사다트 피격 훨씬 이전에 그는 정부 전복을 위해 이미 육군 정보부 대령과 탱크 부대장을 포섭, 쿠데타 계획을 진행 중이었다. 그해 2월 거사는 들통 났지만, 그는 운 좋게 검거되지 않았다가 사다트 저격 후 체포된 것이다.
 
  이때 그는 고문에 못 이겨 쿠데타 주동자 동료인 이삼 알까마리 소령을 배신, 당국의 체포 작전을 돕고 만다. 극심한 고문으로 그의 영혼은 파괴되었고, 내성적이던 그는 거칠고 폭발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고문을 받은 후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빈 라덴과의 만남
 
자와히리(좌)와 오사마 빈라덴.
  1984년 감옥에서 풀려난 자와히리는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제다로 날아가 병원에서 일하다가 1986년에 다시 아프가니스탄 전선으로 복귀한다. 페샤와르에서 그는 남동생 무함마드와 함께 이집트 정부 전복을 위한 지하드 조직을 재건한다. 이때 이미 빈 라덴은 “지하드는 무슬림의 의무요, 외세 점령 치하에 있거나 공격을 받고 있는 무슬림들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친 대학 은사 압둘라 알앗잠 박사와 함께 지원사무소를 세워 놓고 있었다. 이곳에서 지하드 후원금을 모금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을 모집, 훈련시키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와히리는 빈 라덴과 협력하며 그를 점차 변화시켜 나갔다. 빈 라덴은 이슬람 세계 건설이라는 구체적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부유했던 그는 고통 받는 무슬림 형제들에 대한 신앙적 부채감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자와히리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반면 자와히리의 이슬람 전사적(戰士的) 이상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청소년기부터 이미 꾸뜹을 존경하며 조직을 만들어 이슬람 국가 체제를 꿈꾸었고, 이집트 정부 전복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참가한 아프가니스탄 전장(戰場)은 재도약을 위한 발판이었다.
 
  1988~89년 빈 라덴과 자와히리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지하드 전사들은 여러 무장 단체와 개별 전사들이 서로 연계하여 알카에다를 결성,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몰아내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알카에다는 기지(基地)라는 뜻이다. 지도부는 자와히리의 이슬람 지하드 조직이 중심이 되었고, 경제적 지원은 빈 라덴의 몫이었다.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만남은 돈과 이슬람 혁명 비전의 결합이었다. 빈 라덴은 자와히리의 조직력, 전략전술, 그리고 이슬람 세계 건설에 매료되었다. 자와히리가 빈 라덴을 완전히 좌지우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자와히리는 ‘하늘이 내려 준’ 선물 같은 빈 라덴의 경제력이 절실했다. 그는 측근에게 “지하드 조직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빈 라덴과 함께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바라크 암살 시도 실패
 
  빈 라덴은 자와히리를 만나고 난 후 세계관이 바뀌었다. 빈 라덴의 스승 앗잠 박사는 자와히리가 빈 라덴을 조종하는 것에 대해 불쾌감과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늘 분란만 일으키는 자와히리가 “아프가니스탄에 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측근에게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빈 라덴과 앗잠은 결국 지하드 노선에 대한 의견 차이로 서로 영원히 결별하고 만다. 빈 라덴은 지하드의 범위를 모든 아랍국가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무슬림 아랍국가도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처럼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반면 앗잠 박사는 무슬림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러한 그를 자와히리는 미국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논쟁을 벌인 날 저녁, 앗잠 박사와 그의 두 아들이 탄 차는 모스크로 가던 도중 폭파되어 전원 사망했다. 1989년 11월 24일 밤의 일이다. 누가 한 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장례식 추도사는 자와히리가 했다.
 
  1992년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 전사들 간 끊이지 않는 분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암살 기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단으로 거점을 옮겼다. 얼마 후 자와히리도 그 뒤를 따랐고, 수도 카르툼 북쪽에 농장을 구매하여 이슬람 전사들의 군사훈련장으로 활용하였다.
 
  수단에서 둘 사이의 관계가 늘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빈 라덴은 수단의 공공건설 분야에 진출해 사업을 벌였다. 그런데 자와히리는 빈 라덴의 경제적 지원이 신통찮다고 여겼는지 “젊은이들은 영혼을 포기한 채 싸우고 있는데, 부자들은 돈을 움켜쥐고 있다”며 불평을 토로하곤 했다.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이슬람 지하드 그룹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에까지 가서 모금을 시도해 보았지만 별무소득이었다. 전사 1인당 한 달 생활비인 미화 100달러를 주는 일이 쉽지 않았다.
 
  1995년 6월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의 에티오피아 순방시 자와히리는 무바라크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 국내에는 자와히리 동조세력 및 이슬람주의자 검거선풍이 벌어졌고, 자와히리는 보복으로 파키스탄 주재 이집트 대사관을 폭파했다. 미국이 자와히리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이집트와 미국의 강력한 압력에 못 이겨 수단 정부는 빈 라덴과 자와히리에게 출국을 종용,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이때 빈 라덴이 입은 사업 손실은 무려 3억 달러에 달한다.
 
 
  케냐 美 대사관 폭파로 자와히리에 현상금 2500만 달러 걸려
 
  1996년 8월 23일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두 성지, 즉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 전쟁을 선언했다. 자와히리는 1998년 미국은 유대인이 장악하였기에 공격해도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빈 라덴은 이러한 자와히리의 생각에 만족감을 표하며 후원금을 연 30만 달러에서 50만 달러로 올렸다.
 
  그리고 2월 23일 빈 라덴과 자와히리는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위한 국제 이슬람 전선’을 결성하고 창립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이 둘의 연대가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원래 이슬람 전사들은 이집트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가까운 적, 미국과 같은 먼 적 중 누구를 먼저 쳐야 하느냐로 논쟁이 적지 않았는데, 자와히리와 빈 라덴은 먼 적을 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미국이 유일무이한 공격목표가 되었다.
 
  자와히리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 미국은 동유럽 알바니아에 똬리를 튼 자와히리의 지하드 조직을 파괴했는데, 이에 대한 반격으로 자와히리는 8월 탄자니아와 케냐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폭파했다. 223명의 사망자와 5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자와히리에 내걸린 2500만 달러의 현상금도 바로 이 폭파사건 때문이다.
 
 
  자와히리, 자신의 거처에 떨어진 미 토마호크 불발탄 팔아 천만 달러 벌어
 
2000년 10월 12일 예멘의 아덴항에서 자살보트 공격을 받은 미 해군의 USS콜 호.
  미국은 토마호크 미사일을 쏟아 부으며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거처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들은 토마호크 불발탄을 중국에 팔아 무려 1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또 2000년 10월에는 아덴만 항구에서 재급유작전 중이던 미 해군 이지스 구축함 콜(Cole)에 자살폭탄 보트 공격을 가해 배 측면에 구멍을 뚫어 버렸다.
 
  2001년 6월 자와히리가 이끌던 이슬람 지하드와 알카에다가 하나의 단체로 통합하면서 알카에다는 이름을 ‘알까이다툴 지하드(al-Qaidat al-Jihad)’로 바꾸었다. 알카에다에 지하드를 덧붙인 것이다. 번역하면 ‘지하드 기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운명의 9월 11일, 이들은 미국 뉴욕의 쌍둥이 빌딩과 미 국방부 건물에 비행기 테러를 가하였다. 자와히리는 이를 두고 “신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위대한 승리”라고 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만 할 수 없는, 진정 성스러운 행위”라고 치켜세웠다.
 
 
  자와히리,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에게 ‘충성’표하며 求愛중
 
2001년 알카에다는 뉴욕 쌍둥이 빌딩에 테러를 가했다.
  이후 10년에 걸친 집요하고도 끈질긴 미국의 반격으로 지난 5월 테러의 주역 중 하나인 빈 라덴은 사살되었다. 또 다른 주역 자와히리는 알카에다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이미 미국의 폭격에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고, 지금 이 시각에도 숨 쉴 틈 없이 추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영국 가디언지 후세인의 분석에 따르자면, 최근 탈레반 지도자 몰라 오마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충성을 표한 것으로 보아 탈레반의 협력이 필요한 지역, 즉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북부에 은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마르는 자와히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마르는 자와히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을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와히리는 이를 무시한 채 9·11 공격을 감행,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미국으로부터 심각한 보복타격을 받아 정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오마르가 자와히리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 자와히리는 더더욱 오마르의 호의가 절실하게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마르에게 충성한다고 했을 것이다.
 
  자와히리의 앞날은 가시밭길이다. 무엇보다도 빈 라덴만큼 부유하지 못하다. 경제적 여유 없이 느슨하게 연계된 알카에다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가 빈 라덴을 놓을 수 없었던 것도 결국 지하드를 수행할 자금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물주 찾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그는 빈 라덴처럼 사람을 끄는 매력도, 카리스마도 없고, 비판자들을 다독일 줄도 모른다. 1999년 여름 그가 이끌던 이슬람 지하드의 유럽 조직원들이 그의 리더십을 비판하자 보란 듯이 지도자 자리에서 사퇴한 적도 있다.
 
 
  자금과 리더십 부족으로 자와히리 앞날은 가시밭길
 
  또 수단에 체류할 당시 이집트 정보당국의 강압에 10대 소년이 어쩔 수 없이 조직을 배신하자 배신의 말로를 보여주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생각에 이슬람법의 이름으로 가차 없이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여주었다. 이때 그에 실망하여 등을 돌린 전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민심도 그의 편이 아니다. 그는 최근 무고한 무슬림 형제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알카에다 조직원들에게 말했지만, 그동안 이슬람의 이름으로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무슬림을 죽인 장본인이 자와히리 자신이다.
 
  미국의 선전대로 알카에다보다 무슬림을 더 많이 죽인 자들은 없다. 그가 그토록 제거하려고 했던 무바라크는 이집트 국민들이 민주주의와 비폭력의 힘으로 끌어내렸다. 알카에다는 중동민주화를 지지한다고 하지만, 민주주의를 원하는 중동의 국민들이 알카에다나 자와히리를 환영할지는 의문이다.
 
  1980년대 이슬람 혁명 동지 이삼 알까마리(Isam al-Qamari)는 자와히리를 두고 “어느 그룹에서건 너는 지도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라며 그의 지도력을 혹평한 적이 있다. 알까마리의 예견은 빗나갔지만, 종교를 앞세운 폭력의 패러다임이 성숙한 중동 민주화 물결에 휩쓸려 그의 지도자 생활이 성공적이지 않길 바란다. 신의 은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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